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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정] 성령칠은2: 하느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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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9 ㅣ No.47

[성령칠은 제2강의] 하느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안다면 (9월 5일 토요일 오후)

 

 

요한 4:1- 29 :

 

(1) 예수께서 요한보다 더 많은 제자를 얻으시고 세례를 베푸신다는 소문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귀에 들어갔다. (2) ( 사실은 예수께서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베푼 것이었다. ) (3) 예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유다를 떠나 다시 갈릴래아로 가기로 하셨는데 (4) 그 곳으로 가자면 사마리아를 거쳐야만 하였다. (5) 예수께서 사마리아 지방의 시카르라는 동네에 이르셨다. 이 동네는 옛 날에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곳인데 (6) 거기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먼길에 지치신 예수께서는 그 우물가에 가 앉으셨다. 때는 이미 정오에 가까워 있었다. (7) 마침 그 때에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으러 나왔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물을 좀 달라고 청하셨다. (8)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시내에 들어가고 없었다. (9)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께 “당신은 유다인이고 저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어떻게 저더러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상종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10)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또 너에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샘솟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시자 (12) 이 우물물은 우리 조상 야곱이 마셨고 그 자손들과 가축까지도 마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우물을 우리에게 주신 야곱보다 더 훌륭하시다 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13) 예수께서는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 하셨다. (15) 이 말씀을 듣고 그 여자는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십시오. 그러면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16)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다. (17) 그 여자가 남편이 없다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남편이 없다는 말은 숨김없는 말이다. (18)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사실은 네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 대로 말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19) 그랬더니 그 여자는 ”과연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20) 그런데 우리 조상은 저 산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렸는데 선생님네들은 예배드릴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하고 (21)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말을 믿어라. 사람들이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에 ‘이 산이다’ 또는 ‘예루살렘이다’ 하고 굳이 장소를 가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올 것이다. (22) 너희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배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예배 드리는 분을 잘 알고 있다. 구원은 유다인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23) 그러나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24)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한다.“ (25) 그 여자가 ”저는 그리스도라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저희에게 모든 것을 다 알려 주시겠지요“ 하자 (26) 예수께서는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 때에 예수의 제자들이 돌아 와 예수께서 여자와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무엇을 청하셨는지 또 그 여자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는지 물어 보는 사람은 없었다. (28) 그 여자는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동네에 돌아 가 사람들에게 (29) ”나의 지난 일을 다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같이 가서 봅시다. 그분이 그리스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고 알렸다.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서 사마리아를 거쳐서 갈릴리로 가신다. 여행에 지치셔서 우물가에 앉으셨다. 사마리아 여인이 왔다. 그 때는 정오였다. 요한 복음사가는 다시 한 번 예수님과 만남의 시간을 제시한다. 우리의 삶의 순간에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길으러 나왔다. 목이 마르신 예수님은 물을 청하신다. 우리는 이 성서를 모두 읽고 좋아한다. 예수님이 겸손되이 물을 청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많은 경우 지치고 갈증을 풀어야 할 때가 많으므로 이 복음을 좋아한다. 예수님이 이 여인의 삶 속에 들어가시는 것을 안다. 간단한 섬김을 부탁함으로서 이렇게 하신다. 이것은 육화의 신비이다. 이런 겸손된 섬김을 통해서 예수님은 이 여인과 온 마을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킨다. 섬긴다는 것은 사목의 근본적인 자세이다. 우리는 육화의 신비가 교의나 교의적인 강조를 통해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주기 전에 겸손하게 청함으로서 사목이 이루어진다.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겸손하게 청함으로서 자신의 갈증을 나누신다. 단순하게 청함으로서 이 과정이 이루어지는데 정말 겸손이 요구된다. 사람들의 걱정이나 가난을 나눈다는 것은 겸손을 요구한다. 먼저 우리가 줄려고 하기 보다 받음으로서 이루어진다.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사목하는 신자들에게서 우리를 멀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사목의 대상자들과 우리를 단절시키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삶의 풍요로움이나 물질이나 지적인 부유함이나 거룩해지는 부유함이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자신을 낮추어져야 하고 그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을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처음에 인도에 갔을 때에 빈민가로 가려고 했다. 노동자 가족과 함께 집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노동자는 최근에 결혼한 사람이었는데, 첫 아이를 낳으려는 참이었다. 이 노동자는 본당신부에게 내가 머물 오두막을 내어 주겠다고 했다. 나에게 오두막을 내어 주고 자신들이 불편할 텐데, 나는 마음이 불편하여 내가 그렇게 까지 어려움을 주어야 하나? 내가 무언가를 주려고 했는데 불편을 주는 이런 모습을 보고 마음이 얼어붙는 것같았다. 그러나 그 가족들이 나를 환영했다. 가족들이 아이를 팔에 앉고 있었다. 결혼 선물인 접시에다 장미 레몬 사과를 가져왔다. 무릎을 꿇고 앉더니, “신부님 축복하세요. 우리는 신부님을 모시고 살 만한 자격도 없습니다.”라고 했다. 백부장의 믿음을 보는 것같았다. 저는 말문이 막혔다. 주기 전에 이런 믿음의 선물을 받아야 한다니. 이들의 믿음과 단순함이 놀라웠다.

 

위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 여인의 상처를 알고 계신다. 그 상처를 치유해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시려는 선물이 무엇인지 안다면”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마음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여인에 대한 초대이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 대한 하느님의 불타는 사랑을 보신다. 예수님은 한 피조물을 보신다. 하느님의 사랑 받는 딸이고 마음이 부서진 상처 입은 딸이다. 예수님은 성부가 성령을 통해서 이 여인의 상처를 어떻게 고쳐 주시려고 하는지 보고 계시다. 하느님의 부드럽고 다정한 사랑을 계시하는 것이 예수님의 선교이시다. 예수님은 “알기만 한다면”이라고 하신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마음은 닫쳐 있었다. 종교적으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야 할 사람들인데, 마음이 닫혀 있다. 그들의 사고방식이나 자만심 때문에 닫혀져 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갈증이나 정열이나 여러 가지를 아신다.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선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런 것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못하고 감사하지도 못한다. 우리는 많은 일에 분주하여 그분의 선물 앞에 멈추어서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없다. 줄 수 있기 위해서 받아들이는 시간을 갖저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다.

 

우리는 종종 사제직의 위기를 말한다. 성부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것에 주의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는 우리가 인도주의적인 일이나 사회정의 활동에 참여한다. 그런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하늘 나라를 먼저 찾지 않는다면 우리의 사명의 핵심을 잃어버린 것이다. 연대하는 일을 하는데 이런 일이 죄로부터 해방이 아니면 그것 또한 헛일이다. 연대성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접근하려면 우리는 이런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성령에 의한 영감 받은 연대(連帶)가 아니면 오히려 인간을 격하시킬 수 있다. 가난을 위해서도 일을 해야 하지만 하느님의 뜻이나 영광을 무시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사람들의 마음들이 댐처럼 막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댐에는 많은 줄 수 있는 물이 있다. 그러나 막혀 있다. 물이 막혀 있다면 생명수가 우리에게 올 수 없다. “하느님 아버지가 여러분에게 선사하시려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이 조건이 된다. 예수님의 “알기만 한다면”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이 물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 물에 대한 우리의 갈증을 보여주고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한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들이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고 성령으로 채워져야 한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부정적인 인생 체험 때문에 실망할 필요는 없다. 사마리아 여인을 보십시오. 그 여자는 상처를 받은 상태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나 깨어지기 쉬운 모습만을 보지 말아야 한다. 그 대신 예수님의 이 “당신이 알기만 한다면”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 하느님이 선사하고자 하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까? 이 질문은 영적으로 높은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 하신 질문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고 있는 그대로의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시고자 하십니다. 또한 우리를 통해서 신자들에게도 사랑과 함께 무언가를 주시고자 하신다. 하느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좋은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샘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솟아오르는 샘물, 우리는 이 물을 사람들에게 주려고 파견되었다.

 

사마리아 여인의 대답은 적절하다. “주님 그 물을 주십시오.” 저에게 주십시오. 우리도 이물을 달라고 청하면서 기도합시다. 이 여인은 그 대답으로 어떤 일이 그녀의 삶에 생기고 그로 인해서 어떤 결과에 이를지 모른다. 예수님의 부드러운 사랑과 존경에 힘입어 확신한 바를 간청하고 자신의 마음을 열어 갑니다. 우리도 같은 단순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갑시다. 두려워하지 맙시다. 우리를 위해서도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느님은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신다. 이 여인은 마을 사람들을 초대해서 어떤 체험을 나누도록 요청하신다. “와서 보라”는 말씀은 체험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여인은 사람에게 말한다. “내가 한 모든 일을 말해 주었다. 와서 보라.”

 

과거의 우리 삶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와서 보라”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의 은총과 용서의 경험이 많다. 이것이 인격적인 체험이다. 우리는 교리나 복음선교, 특수한 과제를 수행하면서 일의 효과를 찾는다. 사람들을 예수님께 이끌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체험해야 한다. “(요한4:39) 그 동네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 여자가 자기의 지난 일을 예수께서 다 알아 맞히셨다고 한 증언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여자가 체험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우리가 피정을 하러 모인 것은 우리 믿음을 새롭게 하고 이 믿음이 생활한 체험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려고 하는 것을 받으려고 모였다. 묵상하는 방법 3 관점을 말씀드립니다.

 

1. 사마리아 여인과 함께 우리 마음을 열고 무언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새로운 선물에 마음을 열고, 새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2. 비유의 말씀을 읽읍시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당신이 선택한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신비를 드러내려고 하십니다. 당신이 선택한 제자의 마음을 갖은 사람에게 드러내시려고 하신다.

 

다음 비유 말씀을 묵상하자. 마태 13,3- / 22,1- / 20,1- / 25,1- 

 

마태 13:3-23 :

 

[(마태13:3) 예수께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를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먹었다. (5)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싹은 곧 나왔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6) 해가 뜨자 타 버려 뿌리도 붙이지 못한 채 말랐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 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혔다. (8)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다. (9)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10) 제자들이 예수께 가까이 와서 “저 사람들에게는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묻자 (11)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 (12)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사야가 일찍이,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은 탓이니, 그렇지만 않다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서서 마침내 나한테 온전하게 고침을 받으리라’ 고 말하지 않았더냐?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17) 나는 분명히 말한다. 많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이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 (18) “이제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내포한 뜻을 들어보아라.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할 때에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간다. 길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20) 또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곧 기꺼이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21) 그 마음속에 뿌리가 내리지 않아 오래 가지 못하는 사람을 투고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은 그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닥쳐오면 곧 넘어지고 만다. (22) 또 가시덤불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억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23)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잘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사람은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

 

마태 22:1-14 :

 

[(1) 예수께서 또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것에 비길 수 있다. (3) 임금이 종들을 보내어 잔치에 초청 받은 사람들을 불렀으나 오려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른 종들을 보내면서 ‘초청을 받은 사람들에게 가서 이제 잔칫상도 차려 놓고 소와 살진 짐승도 잡아 모든 준비를 다 갖추었으니 어서 잔치에 오라고 하여라’ 하고 일렀다. (5) 그러나 초청 받은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고 (6)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때려 주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다. (7) 그래서 임금은 몹시 노하여 군대를 풀어서 그 살인자들을 잡아죽이고 그들의 동네를 불살라 버렸다. (8) 그리고 나서 종들에게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지만 전에 초청 받은 자들은 그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9) 그러니 너희는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 하고 말하였다. (10) 그래서 종들은 거리에 나가 나쁜 사람 좋은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다 데려 왔다. 그리하여 잔칫집은 손님으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갔더니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를 보고 (12) ‘예복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 왔소?’ 하고 물었다. 그는 할 말이 없었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 내어쫓아라.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14)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마태 20:1- 16:

 

[(마태20:1)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돈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3) 아홉 시쯤에 다시 나가서 장터에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을 보고 (4)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그러면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소’ (5) 하고 말하니 그들도 일하러 갔다. (6) 오후 다섯 시쯤에 다시 나가 보니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어서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 하고 물었다. (7)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8)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차례로 품삯을 치르시오’ 하고 일렀다. (9)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10) 그런데 맨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은 품삯을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밖에 받지 못하였다. (11) 그들은 돈을 받아 들고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12)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따졌다.(13) 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14)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15)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하고 말하였다. (16)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마태 25:1-13 :

 

[(마태25:1) ”하늘 나라는 열 처녀가 저마다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것에 비길 수 있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로 왔다. (3) 미련한 처녀들은 등잔은 가지고 있었으나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다. (4) 한편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잔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도록 오지 않아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저기 신랑이 온다. 어서들 마중 나가라!’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7) 이 소리에 처녀들은 모두 일어나 제각기 등불을 챙기었다. (8) 미련한 처녀들은 그제야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기름을 좀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우리 것을 나누어주면 우리에게도, 너희에게도 다 모자랄 터이니 너희 쓸 것은 차라리 가게에 가서 사다 쓰는 것이 좋겠다’ 고 하였다. (10)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고 문은 잠겨졌다. (11) 그 뒤에 미련한 처녀들이 와서 ‘주님, 주님, 문 좀 열어 주세요’ 하고 간청하였으나 (12) 신랑은 ‘분명히 들으시오. 나는 당신들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하며 외면하였다. (13)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

 

이 비유를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의 의미를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을 주시기를 원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그 말씀을 흘려 버리고 그 말씀에 우리 마음을 닫아 버리는가?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으로 얼마나 많은 좋은 열매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혼인 잔치의 비유를 봅시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가 모든 것을 마련해 주셨다. 어린양까지 살해되었습니다!! 이 풍요로운 잔치를 보십시오. 그런데도 우리들의 마음이 닫혀 있습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봅시다.

 

이 비유에서 일한 시간이 다른 품꾼들에게 똑같은 품삯을 주므로 “사회정의 문제를 간과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 비유의 요점은 우리 모두가 다 구원의 신비에 초대되었다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가장 완전하고 아름다운 부분을 나누도록 초대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의 관대한 마음을 안다면, 이 아름다운 일에 우리의 모든 것을 사람들과 나누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아름다운 선물을 받고 있다. 때때로 우리가 하는 사목이 힘들다고 할 때에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사목은 하느님이 주신 아름다운 사명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 비유를 보면 하느님이 주시고자 하는 풍요로움이 잘 묘사되어 있다.

 

열 처녀의 비유를 보면 마음을 여는 사람만이 그 잔치에 들어감을 본다. 이것은 인격적인 동의의 문제이다. 여러분의 사목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고 싶다. 사도신경은 구원의 신비인데 우리가 성전으로부터 받았다. 어떻게 그것을 백성들에게 전해 주고받습니까? 진리의 묶음으로 기성복처럼 만들어 제공합니까? 교리를 사람들의 머리에다 집어넣습니까? 외우게 해서 넣어 줍니까? 이것을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속삭임으로 받아들이십니까? 사랑의 체험으로 받아들입니까? 사랑의 선포(Kerygma)로 받아들입니까? 하느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또 백성들을 위해서 주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만 한다면” 아버지가 성자를 보내신 것을 알기만 한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삶을 아낌없이 나누려고 오셨다. 성령을 주시려고 오셨다. 우리를 교회 안에 한 가족으로 모이게 하여, 삼위일체의 풍요로운 삶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의 구혼(求婚:propose)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나누어주고 구원해 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리를 전할 때에 이런 맛을 알아야 한다. 이 사도신경을 묵상하므로서 내일 미사에서 고백할 사도신경을 미리 준비하자. 하느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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