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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신학대전은 과연 그리스도론을 경시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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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1-24 ㅣ No.597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신학대전」은 과연 그리스도론을 경시했는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서 그리스도론에 관한 문제는 제III부에서야 등장한다. 아퀴나스가 중요한 그리스도론을 이렇게 뒤늦게 다루었다는 사실은 많은 신학자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어느 신학에서든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먼저 나타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분은 우리의 삶과 역사보다도 더 중요하지 않은가? 특히 종교개혁 이후에 개신교 신학은 그리스도론이 중심이 되어서 그 저술도 그리스도론으로부터 출발하는 경향을 지녔다. 이런 경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현대 가톨릭 신학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그런데 「신학대전」 제III부에서조차 아퀴나스는 예수님의 활동부터 시작하지 않고, 신앙으로 수용된 육화의 신비(1-26)부터 시작한다. 그다음에서야 비로소 구세주의 지상 생활과 운명에 관한 많은 문항이 다루어진다(27-59).

 

십자가를 통한 신의 자기 계시를 강조하는 이들은 인간의 자연 이성으로 신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하는 아퀴나스의 자연신학적 경향이 예수 그리스도를 지엽적으로 다룬다고 비판했다. 과연 아퀴나스는 그리스도론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 「신학대전」의 뒷부분에서 부차적으로 다루었던 것일까?

 

 

아퀴나스 신학에서 그리스도론의 중요성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의 전체 구조를 발출(Exitus)과 귀환(Reditus)의 도식에 따라 구성했다. 곧 제I부에서는 신을 원천으로 창조되는 만물의 발출 과정(신론, 삼위일체론, 창조론)을 다루었고, 제II부에서는 신을 목적으로 되돌아가는 일반적인 귀환의 과정(인간론, 행위론, 윤리학)을 다루었다. 아퀴나스는 이 작업 전체를 통해서 신에게서 흘러나온 인간이 다시 신에게 귀환하는 과정을 부각했다.

 

제III부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찰하는 데로 돌아서서, 특히 “그분이 우리가 부활을 통해 불멸의 삶이라는 참행복, 하느님을 충만하게 누리는 데에서 성립되는 영속하는 참행복에 도달할 수 있게 해 주는 진리의 길임을 입증”한다(III, 머리말). 예수 그리스도는 신에 관한 진리를 가르치고,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며, 심은 일제의 신에게 이르는 구체적인 ‘길’을 제공한다(III,40,1).

 

신에게 귀환하고자 하는, 그리스도교적 모범으로 간주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여정은 만물이 신에게서 나와 신에게로 돌아가는 과정의 중심이다. 여기서야 비로소 「신학대전」의 신학적 기획 전체는 그 ‘완성’에 이르게 된다.

 

 

인간 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진 구조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의 어느 대목에서든 언제나 고유한 원인을 찾은 것처럼, 그리스도론에서도 원인에 대한 분석에 중점을 둔다. 어떻게 신적이고 인간적인 힘들이 결합하여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을 가져오게 되었는가?(III, 머리말)

 

그는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라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처럼 육화의 원인을 ‘인간의 구원’에서 찾는다(III,1,2).

 

또한 아퀴나스에게 신의 육화는 인간 본성의 존엄성(dignitas humanae naturae)을 보여 준다. 「신학대전」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에서 드러나듯이, 창조된 인간 본성은 신적인 것과의 결합으로 말미암아 위축되거나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되고 강화된다(III,8,1).

 

예수님께서는 쇄신된 인류를 위한 새로운 아담으로서, 인간 실존에서 상처 입은 것을 복원하시고, 신의 모습과 유사성을 재창조하시며, 새로운 인류의 미래를 시작하신다.

 

인간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역할은 육화뿐만 아니라 수난과 부활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신의 ‘말씀’이 재판과 십자가형으로 질식되는 예수님의 죽음은 구속적(的)이다. 새로운 인류의 머리인 그리스도가 땅에 묻혔기 때문에, 그의 부활이야말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준다(III,53,1).

 

아퀴나스는 인간 구원에 집중하면서도, 신의 전능과 절대성을 손상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에게 신의 육화는 모든 인간의 죄를 치유하는 데 필요하기는 했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신은 전능하므로 다른 방법으로도 인류를 구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육화는 상대적 필요에 따른 것으로, 무엇보다도 인간이 스스로는 제공할 수 없는 합당한 대가를 신에게 드리는 가장 적합한 방식이었다(III,1,2).

 

아퀴나스는 또한, 신성한 그리스도가 수난을 받았지만, 신성(神性)이 수난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신적 위격이 수난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신적 본성은 수난당할 수 없고 불멸하기 때문이다(III,46,12).

 

현대 신학자들은 이러한 그리스도론이 “신 자신을 고통이나 그리스도의 죽음과 동일시하려는” 신학적인 반성을 근본적으로 제한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인간의 몸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신이시며, 거룩한 삼위의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고자 했다.

 

 

육화와 수난은 사랑의 궁극적 표현

 

아퀴나스가 신성의 수난을 부정했다고 해서, 인간이 겪는 고통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무감각한 신을 제시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을 깊이 사랑하여 인간의 삶을 구원하며 심화시킬 ‘육화한 말씀’의 모습을 도입했다.

 

“신의 본성은 선이다. … 선의 본성은 전달되는 것이다. … 자기 자신을 고상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은 최고의 존재자에게 속한다”(III,1,1).

 

아퀴나스에게 신이 타자인 인간 존재자가 된다는 것은 사랑의 궁극적 표현이다. 신의 아들이 우리와 함께 인간의 본성을 나누었다는 사실만큼 신의 사랑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표지는 없다. 그는 제III부에서 즐겨 하듯이 아우구스티노의 말을 인용한다. “주님의 오심이 우리에게 사랑을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무엇 때문이겠는가?”(III,1,2)

 

아퀴나스는 육화를 신과 인간의 불분명한 혼합의 결과나 어떤 변덕스러운 기적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사랑의 계획의 성취로 이해했다.

 

보이지 않는 신의 사랑을 믿기가 어렵기에, 우리와 가까워지기를 원했던 신은 그것을 육화 사건을 통하여 입장했다(III,1,2,ad3). 바로 신이 우리를 사랑한 사건인 육화로 말미암아 우리는 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신이 인간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는지는 실제로 발생한 예수 수난의 방식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III,46,3).

 

아퀴나스의 그리스도론은 스콜라철학의 융성기를 대표하는 13세기의 사회적인 분위기를 반영한다. 이 분위기는 당시에 경쟁적으로 건축되었던 고딕 성당에서 잘 드러난다. 카를 대제 시대와 로마네스크 성당이 유행하던 시기에는 세속적인 세계와 투쟁하는 ‘거룩함’의 영성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고딕 시대에는 인간에 대한 긍정이 점자 증가했고, 이것은 세상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졌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예수 안에서 신의 지혜와 사랑이, 복원되고 강화된 신의 모습, 곧 인간과 하나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통해서 인간의 행복이자 인간 삶의 목적인 신성에 충만하게 참여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가능해졌다.

 

이 대목에서도 아퀴나스는 다시 아우구스티노의 말을 인용한다. “인간이 신이 되게 하려고 신이 인간이 되셨다”(III,1,2). 그의 그리스도론을 통해서 신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인간의 존귀함과 구원의 중요성이 더욱 확실한 기반을 갖게 된 것이다.

 

아퀴나스는 “인간이 보고 따를 수 있도록 하려고 신이 사람에게 나타났다.”(III,1,2)라고 주장한다. 그에게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신의 계획에 대해 확신에 차서 가르치는 ‘스승’이요 ‘박사’이시다.

 

“그리스도는 가장 탁월하고 지고한 ‘스승’(magister)이고, 따라서 그의 학생들은 가장 특전적인 학생들이다”(「요한 복음 주해」,8,1).

 

우리의 스승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우리가 그분의 모범을 따라 자기 자신을 내어 주며 실제로 그의 길을 걸을 때, 「신학대전」 전제가 지향하는 참된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 박승찬 엘리야 - 가톨릭대학교 철학 전공 교수. 김수환추기경연구소장을 맡으며 한국가톨릭철학회 회장으로 활동한다. 라틴어 중세 철학 원전에 담긴 보화를 번역과 연구를 통해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다양한 강연과 방송을 통해 그리스도교 문화의 소중함을 널리 알린다. 한국중세철학회 회장을 지냈다.

 

[경향잡지, 2020년 11월호, 박승찬 엘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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