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레지오ㅣ성모신심

새 번역 교본 읽기: 레지오 사도직(제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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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4-13 ㅣ No.745

[새 번역 교본 읽기] 레지오 사도직(제10장)

 

 

한국세나뚜스협의회는 ‘레지오 마리애 공인교본(2014년 영문판)’에 대해 광주대교구 소속 안세환 신부께 번역을 의뢰하였습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번역 교본은 1993년 영문판을 번역한 것으로 1993년 이후로 수차례 부분 수정이 있었습니다. 교본 전체를 새로운 시각으로 번역한 교본의 내용을 본 코너를 통해 계속 게재할 예정입니다.

 

단원들께서는 새로 번역된 교본의 내용을 검토하시고 내용에 대해 건의가 있을 경우 상급 평의회나 월간지 편집실로 의견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보내주신 내용은 검토하도록 하겠으며, 타당한 의견이나 건의에 대해서는 추후 새로운 교본의 인쇄가 결정될 경우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제10장 레지오 사도직


1. 레지오 사도직의 존엄성

 

레지오 마리애가 단원들에게 요구하는 사도직이 얼마나 존엄하고 얼마나 교회에 중요한지를 표현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권위 있는 선언보다 더 힘 있는 말씀은 없다.

 

“평신도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자신의 결합에서 사도직에 대한 의무와 권리를 받는다. 세례성사로 그리스도의 신비체와 결합되고 견진성사를 통하여 성령의 힘으로 튼튼해진 평신도들은 바로 주님께 사도직을 받았다. 평신도들은 모든 활동을 통하여 영적 제물을 봉헌하며 세상 어디에서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임금의 사제로, 거룩한 민족으로(1베드 2,4-10 참조) 축성되었다. 모든 사도직의 생명인 사랑은 성사 특히 성체성사로 전달되고 자라난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3항)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신자들은, 더 정확하게 말해서, 평신도들은 교회 생활의 일선에 서 있습니다. 그들에게 교회는 인간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는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은 특별히 교회에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바로 교회라는 더욱 분명한 의식을 지녀야 합니다. 교회란 모든 사람의 으뜸인 교황의 지도 아래 그리고 교황과 일치하는 주교들의 지도 아래 있는 지상의 신자 공동체입니다. 이들이 바로 교회입니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 9항)

 

“마리아는 인류에게 일종의 도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계신다. 마리아의 영향력을 자연 질서 안에서 물체와 그 구성 부분들을 함께 묶어주는 인력, 친화력, 응집력 같은 물리적 힘에 비유해 봄으로써 가장 잘 헤아릴 수 있다. …… 우리는 마리아가 사회생활과 그 참된 문명을 이루는 모든 위대한 운동에 참여하셨음을 우리가 증명하였다고 믿는다.”(페치탈로 Petitalot)

 

 

2. 사도직을 수행하는 평신도는 반드시 필요하다

 

‘사도직을 수행하는 평신도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 명제는, 평신도 신분에 속해 있으면서도 사제와 같은 안목을 갖추고 통제된 친밀함으로 사람들과 만나는 접촉점이 되어주면서 사도직을 수행하는 평신도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톨릭 공동체는 건강하다는 사실에 기반을 둔다. 가톨릭 공동체는 이처럼 사제와 사람들 사이의 일치가 완전히 이루어질 때 안전할 수 있다.

 

그런데 사도직의 근본정신은 교회의 복지와 사업에 깊은 관심을 갖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러한 관심은 참여 의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만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사도직 단체는 사도들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거푸집과 같다.

 

사도직이 지녀야 할 이러한 자질들을 꾸준히 길러 놓지 않으면, 교회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책임감이 전적으로 부족하게 되어 다음 세대에 가서는 분명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미성숙한 가톨릭 정신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 그리고 교회가 완전히 평온하다는 것 말고는 교회의 안전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처럼 무기력한 양 떼는 자기 목자들을 절멸시킬 정도까지 우르르 몰려다니거나, 그렇지 않으면 무대 위로 등장한 첫 번째 사나운 이리 떼에게 잡혀 먹힌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운다. 뉴만 추기경(Cardinal Newman)은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가톨릭 정신의 잣대는 평신도였다.”는 점을 일종의 원리처럼 말하고 있다.

 

“레지오 마리애의 위대한 역할은 평신도 성소 의식을 일깨우는 것이다. 위험스럽게도 우리 평신도들은 교회를 성직자와 수도자들과 동일시해버릴 수 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 우리 평신도들 역시 ‘성소’라는 이름으로 배타적으로 일컫는 것을 주셨다. 우리 평신도들은 무의식중에 스스로를 최소한 규정된 의무를 수행하기만 하면 구원받을 기회가 있는 익명의 군중으로 간주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당신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신다는 사실(요한 10,3)과, 우리처럼 골고타의 현장에 함께 하지 않았던 바오로 성인이 고백한 것처럼(갈라 2,20 참조),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셨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우리 가운데 어떤 이는 예수님처럼 동네 목수이고 어떤 이는 예수님의 어머니처럼 소박한 주부일 수 있지만 그러한 경우에도 우리 각자는 하나의 소명을 가지고 있으며, 각자 자신만의 사랑과 봉사를 하느님께 드리고 어떤 구체적인 일을 행하라고 하느님으로부터 개별적으로 부르심을 받는다. 그 구체적인 일이란 설령 다른 이들이 더 잘할 수 있지만 우리를 대신해서 할 수는 없는 일을 말한다. 나 말고는 어느 누구도 하느님께 나의 마음을 드릴 수 없고 나의 일을 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레지오가 촉진하는 개인적 종교 감각이다.

 

레지오 단원은 수동적이거나 피상적인 역할에 더 이상 만족해하지 않는다. 각자는 하느님을 위하여 무엇인가 되어야 하고 무엇인가 행하여야 한다. 종교가 인생에서 아주 평범한 일이라 하더라도 더 이상 부차적인 문제가 아니며, 개인의 삶에 영감을 부여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각자 자신의 소명을 확신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일을 수행하고 제2의 그리스도가 되고 가장 작은 형제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하는 열망, 즉 사도적 정신이 우러나올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레지오는 수도회를 갈음하는 평신도 단체로서, 완덕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이상을 평신도들의 생활 속에 옮겨 놓아 오늘날 세속화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을 넓혀가고 있다.”(몬시뇰 알프레드 오래힐리 Msgr. Alfred O’Rahilly)

 

 

3. 레지오와 평신도 사도직

 

다른 여러 원리와 마찬가지로 사도직도 그 자체로서는 다소 차갑고 추상적이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할 수 있다. 그 결과 평신도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고귀한 사명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거나, 더 심각한 경우에는 응답할 능력이 자신들에게는 없다고 생각할 위험성마저 있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펴고 있는 싸움에서 평신도들이 반드시 맡아야 할 고유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독려하려는 노력까지도 포기해버리는 비참한 결과가 빚어질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분으로서 아프리카 선교 지역에 사도좌 사절로 파견되었다가 그 후 중국에서 교황 대사를 지낸 리베리 추기경(Cardinal Riberi)의 말을 들어 보자.

 

“레지오 마리애는 참으로 매혹적이고 매력적인 형태의 모습을 갖춘 사도직 활동이다. 레지오는 활기에 찬 모습으로 모든 사람들을 끌어들이며, 교황 비오 11세가 정하신 방법, 즉 하느님의 동정 성모께 온전히 의지하는 방법으로 활동을 수행한다. 레지오는 자질을 강조하면서 이를 단원들의 토대와 심지어 수적인 힘의 비결로 삼는다. 레지오는 많은 기도와 자기희생, 정밀한 조직 체계, 그리고 사제와의 온전한 협력을 통하여 보호받는다. 레지오 마리애야말로 현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기적 가운데 하나이다.”

 

레지오는 합법적 장상에게 드려야 할 마땅한 존경과 순명을 사제에게 드리지만, 단순히 그 정도로 그치지는 않는다. 레지오 사도직은 은총의 주된 통로가 미사와 성사이며 사제는 미사와 성사의 필수적인 교역자라는 사실을 토대로 삼아 세워졌다. 이와 같은 사도직을 수행하기에, 레지오 사도직의 모든 노력과 활동 방법은 병들고 굶주린 군중에게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 생명의 양식을 가져다준다는 중대한 목적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레지오 활동의 첫 번째 원칙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사제를 모셔다 드리는 일이 되어야 한다. 물론 사제를 직접 모셔가는 일은 불가능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제가 미치는 영향력과 사제가 사람들을 이해하고 있다는 차원에서는 어디든 사제를 모셔갈 수 있다.

 

이것이 레지오 사도직의 본질적인 사상이다. 레지오 사도직은 수많은 평신도 단원들에 의하여 수행되겠지만, 단원들은 사제들과 온전히 일치하고 사제들의 지휘 아래에서 사제들과 전적으로 똑같은 관심을 지니고 활동할 것이다. 레지오는 사제들의 수고를 보충하고 사람들의 삶 속에 사제들이 차지하는 자리를 넓힘으로써, 사람들이 사제들을 맞아들일 때 마침내 사제들을 보내신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것이 될 수 있도록 온갖 열성을 다 바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요한 13,20)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4월호, 편집실]

 

 

[새 번역 교본 읽기] 레지오 사도직(제10장)

 


5. 본당에서의 레지오

 

“현재의 상황에서 평신도들은 본당에서 교회적 친교의 성장을 위하여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으며, 또 그러기에 많은 일을 하여야 합니다. 특별히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거나 포기한 냉담자들과 비신자들을 향한 선교 열정을 다시 일깨우는 데에, 평신도들은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또 하여야 합니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 27항) 레지오 마리애를 설립함으로써 진정한 공동체 정신의 성장이 크게 촉진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레지오를 통하여 평신도들은 본당에서 사제와 밀접히 일치하여 활동하는 것과 사목적 책임에 참여하는 것에 익숙해진다. 정기적인 주 회합을 통하여 여러 가지 본당 활동을 조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이점이 있다. 그러나 더 높이 고려해야 할 점은, 본당 활동에 참여하는 신자들이 레지오에 가입함으로써 영적인 양성을 받게 되어 본당이 일종의 성찬의 공동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고, 레지오라는 체계적인 조직을 통하여 그러한 성찬의 공동체를 설립하려는 목적으로 본당 내 모든 신자들에게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이다. 본당에서 레지오 사도직을 수행하는 몇 가지 방법은 제37장 [활동의 예와 방법]에 설명되어 있다.

 

“사제들은 평신도 사도직을 자신들이 수행하는 사목 활동의 확고부동한 부분으로 여겨야 하며, 신자들은 이를 그리스도인 생활의 의무로 여겨야 한다.”(교황 비오 11세)

 

 

6. 높은 이상과 진취적 행동의 견인차인 레지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진리의 수호자인 교회가 틀에 박힌 신중한 모습만 보인다면, 진리를 위태로운 상태로 몰아넣을 수 있다. 너그러운 심성을 지닌 젊은이들은 이상적인 행동을 갈망한다. 그런데 그 젊은이들이 순전히 세속적이거나 심지어 반종교적인 조직을 바라보며 이를 찾는 습성에 물들어 버린다면, 무서운 해악을 입게 되며 그 값은 다음 세대가 치르게 될 것이다.

 

여기서 레지오는. ‘이상’과 ‘행동’이라는 두 낱말을 교회를 위하여 취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보완하는 것으로 삼는 것처럼, 자신이 행하는 사업과 노력과 희생 가운데 하나를 계획으로 수립함으로써 도움이 될 수 있다.

 

역사학자 렉키(Lecky)에 따르자면, 세상은 그 자신만의 여러 이상(理想)에 의하여 지배받는다. 실제로 그러하다면, 더 높은 이상을 창출하는 사람들은 이를 통하여 인류의 삶을 향상시킨다. 이상은 실천적인 그 무엇이고, 또 사람들을 이끌 만큼 충분히 드러나는 것임을 마땅히 이해할 수 있다. 레지오 마리애가 주창하고 이상이 이 두 가지 요건 모두에 부합한다는 사실에는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레지오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레지오 단원들과 그 자녀들 가운데 수많은 이들이 사제성소와 수도성소를 받아 레지오의 활동을 영예롭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혹자는 이기주의로 가득 찬 요즘 세상에 레지오 단원으로서의 무거운 짐을 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반대 의견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옳지 않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활동에 부름 받고 응답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내 시들해져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큰일을 하도록 부름 받고 이에 응답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끝까지 견뎌낼 것이고, 그 정신은 점차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될 것이다.

 

이처럼 레지오의 쁘레시디움은 사제를 도와 사제의 사목에 위탁된 이들을 복음화하는 임무에 평신도들의 협력을 점진적으로 얻어내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사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주회합에 참석하여 단원들을 지도하고 격려하며 영성을 높이는 데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을 사용함으로써, 레지오 단원들을 통하여 모든 곳에 갈 수 있게 되고, 모든 것을 들을 수 있게 되며,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되고, 사제 자신의 물리적인 모든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진정으로 많은 쁘레시디움을 지도하는 일에 열성을 다하는 것보다 더 나은 목적에서 열성을 다할 수는 없을 것이다.

 

레지오 단원들 그 자체로는 막대기, 가죽 주머니, 돌팔매 끈, 자갈 따위의 볼품없는 도구와 같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들을 하늘의 무기로 만드셨다. 따라서 레지오 단원들로 무장을 한 사제는 또 하나의 다윗이 되어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지니고서 죄악과 불신이라는 교만한 골리앗과 싸우기 위하여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후략)

 

 

7. 단원 양성을 위한 도제 제도

 

사도들의 양성을 거론할 때면 일반적으로 주로 강의를 듣고 교재를 공부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레지오는 활동이 따르지 않는 사도 양성이란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실제로, 실질적인 활동을 떠나서 사도직을 논하는 것은 그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활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논의할 때에는 그 활동의 어려움을 설명해 주고 또한 높은 정신력과 수행 기준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새로 입단한 단원들에게 그러한 방식으로 말하면서, 동시에 실질적인 실천을 통하여 그 활동이 그들의 능력으로 충분히 해낼 수 있고 사실상 쉬운 일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지 않는다면,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하여 활동을 못하게 만들 뿐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강의 제도는 이론가들 즉 지성을 사용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배출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러한 사람들은 보잘것없는 일과 개인 접촉이 뒤따르는 수고스러운 일에 헌신하기를 꺼려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평신도 사도직의 모든 일은 이처럼 보잘것없고 수고스러운 일에 달려 있고, 레지오 단원들은 이를 아주 기꺼이 받아들인다.

 

레지오가 단원 양성에 쓰는 방법은 도제제도(徒弟制度)이다. 이는 어떤 직종이나 기능 분야에서도 외관상으로는 예외 없이 사용되는 이상적인 훈련 방식이라고 레지오는 주장한다. 스승은 지루한 강의 대신 제자의 눈앞에 활동거리를 내놓는다. 그리고 그 일이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지 시범을 통하여 보여주고, 그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들을 활동을 진행해 나가면서 설명해 준다. 그러고 나서는 제자 자신이 그 활동을 시도해 보고 수행하는 중에 교정을 받는다. 이러한 훈련을 통하여 유능한 단원을 배출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강의는 활동 자체를 바탕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강의 내용 한마디 한마디는 실제 행동과 연결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강의 제도는 빈약한 결실을 낸다. 강의 내용이 기억조차 나지 않을 수도 있다. 정규적으로 참석한 학생들마저도 강의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후략)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5월호,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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