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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9: 우골리노 백작과 루제리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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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5-04 ㅣ No.417

[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 (9) 우골리노 백작과 루제리 대주교


가장 기괴한 악과 고통의 장소인 제9 지옥

 

 

- 제9 지옥에서 고통받는 우골리노 백작(위)과 루제리 대주교.

 

 

마지막 지옥인 제9 지옥은 ‘코키토스’(통곡의 강)라고 불리는 얼음 왕국이다. 코키토스는 네 구역으로 나뉘어 있고 네 종류의 배신자들이 그 안에서 벌 받고 있다.

 

제1 구역은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의 이름을 따 ‘카이나’(지옥 5,107)라고 불리며, 자신의 혈연을 배신한 자들이 있는 곳이다. 그들은 목 아랫부분이 얼음에 갇혀있고, 얼굴은 모두 밑을 향하고 있다. 제2 구역이 ‘안테노라’라고 불리는 것은 조국을 배신한 트로이 장군 이름 때문이다. 따라서 안테노라에는 자기 조국이나 당파를 배신한 죄인들이 벌 받고 있다. 저편 한 구렁에 두 남자가 꽁꽁 얼어붙은 채 위에 있는 남자가 아래에 있는 남자를 물고 늘어지며 증오심을 쏟아내고 있다. 피사의 우골리노 백작과 루제리 대주교다.

 

‘나는 한 구멍에 둘이 얼어붙은 것을 보았는데 하나의 머리가 다른 자의 모자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마치 배고픔에 빵을 씹어 대듯이, 위에 있는 자는 다른 자의 머리와 목덜미가 맞붙은 곳을 이빨로 물어뜯고 있었다.’

(지옥 32,125-129)

 

원래 기벨리니(황제파)였던 우골리노 백작은 1275년 피사를 장악하기 위하여 궬피(교황파) 지도자인 사위를 도와 교황파 정부를 세운다. 그러다 1284년 해전에서 제노바에게 패한 후 제노바를 견제하기 위해 피렌체와 루카에 몇 개의 성을 내주고 동맹 관계를 맺었다. 이에 황제파 루제리 대주교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나고 우골리노 백작은 당파와 조국을 배신했다는 죄명으로 자식들과 함께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아사하였다. 네 명의 자식들이 자기 앞에서 굶주림으로 하나하나 쓰러져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우골리노 백작의 사연은, 형벌의 책임을 가족 전체에게 묻는 비열함, 인권을 무시한 아사(餓死)형, 자식의 호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비의 비운(悲運)이라는 점에서 가장 비인간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인간적이다.

 

‘나는 울지 않았고 가슴속은 돌이 되었어요.’

(지옥 33,49)

 

우골리노 백작의 가슴은 그때 돌이 되었다가 지금은 증오의 얼음이 되어있다. 루제리 대주교는 탑 입구를 못질하고 그 열쇠를 강물에 던져버렸다. 못질 소리를 듣고 불안에 떠는 자식들을 보고 아비는 자신의 팔을 깨문다. 자식들은 효심으로 죽음을 앞당기고자 우골리노 백작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버지, 저희를 잡수시는 것이 우리에게 덜 고통스럽겠습니다. 이 비참한 육신을 입혀주셨으니, 이제는 벗겨주십시오.’

(지옥 33,61-63)

 

몸을 내어주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겹쳐진다. 그러면서도 넷째 날 우골리노의 넷째 아들 가도는 쓰러지면서 그리스도처럼 말한다.

 

‘아버지, 왜 나를 도와주지 않습니까?’

(지옥 33,69)

 

우골리노 백작은 자식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눈이 멀었다. 그런데 그 고통 못지않게 굶주림은 더 참을 수 없었다. 아비는 어쩌면 죽은 아들들의 시신을 먹고 더 이상 인간임을 그만두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눈이 멀어버린 나는 그들을 더듬으며 그들이 죽은 후 이틀 동안 그들을 불렀는데, 고통 못지않게 배고픔도 괴로웠답니다.’

(지옥 33,73-75)

 

배고픔에 대한 해석은 서로 엇갈린다. 누구는 사람 고기를 먹었다(예레 19,9)고 한다. 그런데 단테가 사용한 배고픔이라는 단어는 ‘굶주림’(fame)이 아니라 ‘단식’(digiuno)이란 점에 주목하자.

 

우골리노 백작 이야기는 인간의 고통과 악에 관한 가장 그로테스크한 설명들 가운데 하나이다. 프레체로는 우리가 텍스트를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면 그것은 시체를 먹는 식인(食人) 풍습(cannibalism)이라는 기괴한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를 영적으로 해석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몸을 영하는 성체 배령(communion)의 이야기가 된다.

 

[가톨릭신문, 2021년 5월 2일, 김산춘 신부(예수회·서강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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