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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22: 1842년 남경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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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0-04 ㅣ No.2026

[신 김대건 · 최양업 전] (22) 1842년 남경조약


남경조약 ‘역사의 현장’에 통역관으로 참관한 김대건

 

 

남경 조약 조인식.

 

 

세실 함장, 남경으로 떠나다

 

급보가 왔다. 영국과 청이 남경 정해사(靜海寺)에서 8월 12일부터 강화 협상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1842년 6월 26일부터 오송항에 정박한 에리곤호에 머물면서 제1차 아편전쟁 전황을 예의주시하던 세실 함장은 이 첩보를 듣고 촉이 왔다. 그는 즉시 부관 뒤프레 중위를 불러 중국말을 할 줄 아는 김대건과 함께 상해로 가서 중국 배 한 척을 구해오라고 지시했다. 뒤프레 중위와 김대건은 중국 관리의 도움으로 꽤 큰 배 한 척을 구해왔다.

 

세실 함장은 뒤프레 부관과 김대건 그리고 해수로를 탐사할 지리학자와 병사 20명을 대동하고 중국 배로 남경을 향해 출발했다. 김대건이 “16일 동안 항해한 후 남경에 도착했다”고 밝힌 것으로 보아 세실 일행은 1842년 8월 13일 오송을 출발했을 것이다. 세실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다. 메스트르 신부에게도 “남경으로 여행 갈 것”이라고 했다. 메스트르 신부는 이 말에 속아 합류하지 않고 에리곤호에 남아 있었다.

 

메스트르 신부는 조선으로의 항해를 서두르지 않는 세실 함장에게 불만이 쌓여갔다. 그 와중에 세실 함장이 남경 구경을 간다니 메스트르 신부는 따라가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세실은 21살이나 어린 메스트르 신부의 속내를 훤히 알고 있었다. “6월 27일 에리곤호가 남경의 강 즉 양자강 하구에 정박했는데 거기에는 영국 함대가 집결해 있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두 달 반을 머물렀습니다. 프리깃함에 거주한 것입니다. 함장이 거듭된 약속에 따라 이 프리깃함이 저를 조선에 데려다 주기를 기대하며 참고 견디면서 말입니다. 함장은 중국인들과 연락하는 데에 저와 제 학생을 이용했고, 작은 정크선을 타고 남경으로 갈 때는 제 학생을 대동하고 갔습니다. 그가 돌아온 지 이틀 만에 이 프랑스인 함장이 제게서 찾는 것은 자기에게 필요한 통역인이며, 그 통역인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면 즉시 돌려보내리라는 것을 명백히 깨달았습니다.”(메스트르 신부가 10월 2일 강남 장가루에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경리 담당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

 

노련한 정치군인이었던 세실은 ‘천천히 서둘렀다’. 그는 남경 강화 협상 진척 상황을 첩보로 들으면서 서서히 남경으로 접근했다. 도중에 진강 격전지 현장도 둘러봤다. 그리고 세실 함장은 영국과 청이 조약을 하던 8월 29일 남경에 도착해 초대도 하지 않은 조인식장에 나타났다. 세실이 영국과 청이 한참 협상을 하고 있을 때 남경에 모습을 드러냈다면 분명 그는 남경조약식을 참관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실은 누구보다 이를 잘 간파하고 있었다.

 

“세실 함장이 남경 시내를 구경하기 원해서 중국 배 한 척을 임대하였는데, 에리곤호는 강을 거슬러 오르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 3명의 장교와 선원들을 데리고 출발했는데, 저는 통역관으로 따라갔으며, 메스트르 신부님은 에리곤호에 그대로 머물러 계셨습니다. 출발한 지 약 6일 만에 진강부에 도착해 하루 동안 도보로 시가지를 걸어 다니면서 구경했는데, 전쟁으로도 파괴되고 강도들의 습격으로도 약탈당해 폐허가 된 시가지는 사방에서 악취가 났습니다.…다시 거기서 닻을 올리고 떠나 남경에 가서 닻을 내렸습니다. 남경 시가는 파괴되지 않았으며, 영국인과 중국인들이 강화 조약을 맺던 중이었습니다.”(김대건 신학생이 1842년 12월 9일 요동 백가점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16일 동안 항해한 후 강화 조약이 조인되던 바로 그 날 남경에 도착해 조인식에 참석하고, 4명의 중국인 고관들을 전부 만났습니다.”(김대건 신학생이 1842년 9월 상해에서 극동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실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전권대사 헨리 포틴저를 1842년 1월 홍콩에서 이미 두 차례나 만났다. 세실과 포틴저의 구체적인 면담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실은 아편전쟁에 대한 프랑스의 중립적 입장을 지키겠다고 약속해 영국인들에게 상당한 인정을 받았다. 세실은 이 면담에 이어 1842년 1월 30일 광주 외곽에서 청의 고위층과도 비밀 접촉을 했다. 이 만남은 마카오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사 기예 신부가 적극 주선하고, 다른 신부 한 명이 통역했다. 세실은 청의 고위 관리에게 △자신은 영국식 무력행사에 동의하지 않는다 △프랑스가 청에 군사적 도움을 주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중국은 가능한 한 빨리 영국과 강화 협상을 하는 게 좋다는 견해를 밝혔다. 세실은 이 면담들을 통해 영국과 청의 인정을 받아 초청장 없이도 남경조약식을 참관할 수 있었다.

 

 

남경조약의 내용

 

1842년 8월 12일 강화 협상을 시작한 영국과 청은 이틀 뒤인 14일 주요한 조약 내용을 사실상 합의했다. 영국군은 17일 초안을 작성해 청에 전달했고, 포틴저는 영국군의 도발을 중지시켰다. 19일 청 대표들은 영국군 사령함 콘월리스호를 찾았고, 22일 영국 전권대사 포틴저는 정해사를 방문했다. 그리고 26일 정해사에서 최종 조약 문안을 완성했다.

 

남경조약식은 영국군의 요청으로 1842년 8월 29일 오전 11시 콘월리스호 갑판에서 열렸다. 포틴저와 기영(耆英), 이리포(伊理布), 우감(牛)이 영어와 중국어로 된 조약문에 서명했다. 조약문은 총 12개 조항으로 구성돼 있고, 10개월 후 홍콩에서 빅토리아 여왕과 도광제의 공식 승인을 받아 인준됐다.

 

김대건은 리브와 신부에게 조약 내용을 “①중국은 영국에 배상금 2100만 원을 지불할 것 ②중국은 6개 항구에서 영국과의 통상을 승인할 것 ③영국은 북경 황제에게 대사를 파견할 것”이라고 보고했다.(1842년 9월 편지)

 

양국 대표들이 조약문에 서명을 마치자 콘월리스호는 21발의 축포를 쐈다. 그리고 선상 오찬이 열렸다. 또 청의 흠차대신 기영과 이리포는 영국군을 초청해 정해사에서 잔치를 열고, 영국의 군함에도 술과 음식이 전해졌다. 포틴저는 남경조약으로 이듬해인 1843년 홍콩을 청으로부터 넘겨받아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초대 총독으로 임명됐다.

 

 

김대건의 역할

 

김대건은 1842년 9월과 12월 리브와 신부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실 함장의 중국어 통역관으로 남경조약식을 참관했음을 밝힌다. 또 김대건은 리브와 신부에게 중국인 고관 4명 곧 황제의 외숙부 기영, 대청 제국의 전권대신 이리포, 달단군 장군 사포(乍浦), 강남총독 우감을 전부 만났다고 밝혔다. 아마도 조인식을 마친 선상 오찬 때보다 정해사에서 청 대표들이 개최한 연회에서 이들과 세실 함장의 만남을 통역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김대건은 영국 대표에 관해선 한마디 언급도 없다. 이는 세실 함장이 영국인과 소통하는 데 있어 김대건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최근 들어 김대건 성인이 영어까지 능통했다는 이야기가 가짜 뉴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경조약식에 나타난 세실 함장은 한 마디로 ‘불청객’이었다. 영국군 네메시스호 윌리암 허치천 홀 함장은 “다수의 영관급 장교들이 콘월리스 갑판에서 열리는 매우 흥미로운 조인식에 참관하는 것이 허용됐다. 나는 참가할 수 있는 등급이 되지 않았지만, 전공을 고려해 특별히 초청받았다. 바로 그 중대한 순간에 프랑스 프리깃 에리곤의 세실 함장이 상해에서 임대한 중국 배를 타고 오송에서 출발해 막 도착했다. 그는 초청받지 않았지만, 참관을 요청했고, 환영받지는 못했지만 참관했다”고 회고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0월 3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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