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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베르뇌 주교 서한 자료의 편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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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3-16 ㅣ No.1504

베르뇌 주교 서한 자료의 편찬사*

 

 

국문 초록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 로마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문서고, 프랑스 르망교구 대신학교 도서관 등지에는 베르뇌 주교의 서한들이 보관되어 있다. 베르뇌 주교가 직접 쓴 친필 서한 원본도 있고, 이를 베껴 쓴 필사 서한도 있으며, 나중에 친필 혹은 필사 서한을 더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타자기로 정서한 자료들도 있다. 본고는 베르뇌 주교가 통킹, 만주, 조선 등지에서 작성한 서한들이 현재 어느 정도 남아 있는지, 그 서한들이 사료로 편찬되어 오늘날 우리의 손에 전해지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그리고 베르뇌 주교 서한 자료들이 들어 있는 문서철이 어떤 성격을 지닌 것이며, 주목해서 바라보아야 할 점들은 무엇인지도 함께 조명하였다. 그리고 아직 발견되지 않은 자료가 있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도 살펴보았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측으로부터 자료 협조를 받아 확인한 바에 따르면, 베르뇌 주교가 남긴 서한 자료는 총 287통에 달한다. 그중에서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되기 이전에 쓴 것은 149통이며, 조선대목구장으로서 쓴 것은 138통이다. 로마 교황청 포교성성에 보낸 서한 여섯 통을 제외한 나머지 서한들은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에 원본 혹은 필사본이나 타자본으로 보관되어 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최석우 몬시뇰은 파리외방전교회 한국 지부장 마르셀 펠리스 신부와 협력하여 파리와 로마에서 베르뇌 주교 서한 자료들을 수집하였고, 그 가운데에서 조선대목구와 관련된 서한 130통만을 선별하여 1995년 판독 자료집으로 간행하였다. 그리고 2018년 다시 한국교회사연구소는 판독 자료집의 내용을 원문과 대조하여 오류를 바로잡고 대역 자료집으로 간행하였다. 베르뇌 주교의 서한 자료를 정리하고 번역하여 자료집으로 펴냄으로써 앞으로 1855년부터 1866년 사이의 조선 교회사를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앞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의 서한 자료를 편찬할 때 두 가지 점을 고려할 것을 제안한다. 첫째, 선교사 서한 자료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조선대목구 관련 각 문서철은 누가 언제 묶었는지, 왜 그러한 일련번호를 붙였는지 등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다. 선교사 서한 자료들을 국내로 반입하여 교회사 사료로 편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의문들을 풀어야 할 것이다. 둘째, 선교사 서한 자료의 번역본이나 대역본을 만들고자 한다면 사료 편찬의 원칙이 있어야 한다. 본래 사료가 소장된 문서고에서는 나름의 기준으로 사료들을 분류하고 정리하여 문서철을 생성하기 때문에 그 문서철이 지닌 통합성과 완결성을 완전히 무시해서는 안 된다. 가급적 특정 문서철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문서철의 성격과 분류 방식을 밝히고 또 그 속에 들어 있는 개별 서한 자료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판독하고 번역하여 자료집에 담는 것이 사료 편찬의 기본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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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는 경험적인 증거물을 통하여 실증적으로 성립되는 학문이고, 그래서 사료들이 그 증거물이다. 교회사는 올바로 해석된 사료에서 발견되는 것만을, 또 그만큼만을 증언할 수 있다.”1)

 

 

1. 서론

 

한국 천주교 역사에 대한 학문적 연구의 출발점은 관련 사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자료로 구성하는 작업이다. 사료의 정리가 불완전하거나 해독 가능한 언어로 번역되지 않아서 연구자의 손이 미치지 못한다면 좋은 연구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2018년 11월 한국교회사연구소가 『베르뇌 주교 서한집』을 간행하여 베르뇌(Siméon François Berneux, 1814~1866) 주교가 남긴 서한 자료들의 판독문과 번역문을 학계에 제공한 것은 대단히 모범적이며 고무적인 일이다. 앞으로 이 서한 자료집을 활용하여 베르뇌 주교가 제4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재임하던 시기의 한국 천주교 역사를 다루는 연구가 활발하게 일어날 것이며, 이에 따라서 19세기 중엽 한국 천주교회 안팎의 사정들이 많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한다.

 

현재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 로마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문서고, 프랑스 르망교구 대신학교 도서관 등지에는 베르뇌 주교의 서한들이 보관되어 있다. 베르뇌 주교가 직접 쓴 친필 서한 원본도 있고, 이를 베껴 쓴 필사 서한도 있으며, 나중에 친필 혹은 필사 서한을 더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타자기로 정서한 자료들도 있다. 친필 서한을 보관하거나 필사본을 작성하는 일은 특수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행한 것이다. 베르뇌 주교의 순교 사실을 확인한 뒤에 시복 재판을 준비하기 위한 기초 자료를 마련하는 조치였을 수도 있고, 또 머나먼 선교지에서 대목구 운영 방침이나 성사 관련 교회법적 판단이 필요하여 질의를 보내오는 선교사들의 서한들을 통상적인 절차에 따라 편철하여 보관한 것일 수도 있다.

 

본고는 베르뇌 주교가 통킹, 만주, 조선 등지에서 작성한 서한들이 현재 어느 정도 남아 있는지, 그 서한들이 사료로 편찬되어 오늘날 우리의 손에 전해지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를 밝히고자 한다.2) 그리고 베르뇌 주교 서한 자료들이 들어 있는 문서철이 어떤 성격을 지닌 것이며, 주목해서 바라보아야 할 점들은 무엇인지도 함께 조명할 것이다. 그리고 아직 발견되지 않은 자료가 있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도 살펴보겠다.

 

 

2. 파리외방전교회의 베르뇌 자료 편찬

 

베르뇌 주교의 서한 자료들이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남아서 존재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기 위하여 먼저 베르뇌 주교의 서한 자료를 가장 많이 보관하고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자. 1658년에 설립된 파리외방전교회는 1680년 무렵 평신도로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의 사무를 담당하던 장-마르크 오당(Jean-Marc Odam)이 처음으로 문서고를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오당은 필체가 단아하여 지도자들의 공식적인 서한을 정서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아시아와 북아메리카 등지에 산재한 선교 지역에서 보낸 서한과 보고서들이 쌓이기 시작하자 이를 정리하여 보관하는 일이 필요하게 되었다. 인도 퐁디셰리 선교지에서 활동하다가 1833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자가 되어 파리로 돌아온 장 테송(Jean Tesson, 1798~1876) 신부가 문서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 뒤에 조제프 부아쟁(Joseph Voisin, 1797~1877) 신부가 1847년부터 문서고 담당자 임무를 맡아서 문서들을 정리하였다.

 

부아쟁 신부의 작업을 이어받은 사람은 장 루세이(Jean Rouseille, 1832~1900) 신부였다. 루세이 신부는 1856년 홍콩 대표부로 발령을 받았다가, 1860년에 파리 신학교 지도자로 소환되었으며, 도서실과 문서고를 담당하는 업무도 주어졌다. 그는 1872년에 로마 대표부로 발령을 받아 떠날 때까지 약 10년 동안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 담당자로 근무하면서 문서들을 분류하여 300권의 문서철을 만들었다. 루세이 신부가 이룬 성과는 아드리앵 로네(Adrien Launay, 1853~1927) 신부에게로 이어졌다. 로네 신부는 1884년부터 선종할 때까지 40년 동안 문서고 담당자로 근무하였으며, 문서고 자료 목록을 작성하는 임무를 맡아서 600쪽에서 1,000쪽가량으로 된 12권의 상세 목록을 완성하였다.3) 오늘날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를 방문하는 교회사학자들은 모두 로네 신부의 문서 목록에 의지하여 필요한 자료를 열람하고 있다.

 

1) 조선대목구 문서철

 

루세이 신부와 로네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 담당자로 근무하면서 문서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던 시기에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조선대목구 선교사들의 서한 자료들도 정리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제577권부터 제582권까지 일련번호가 붙은 조선대목구 문서철이다.4) 그중에서 제577권은 1797년부터 1860년까지의 서한을 묶은 것이고, 제579권은 1797년부터 1874년까지의 서한을 묶은 것이다.5) 그러므로 베르뇌 주교의 서한은 두 문서철에 들어 있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제579권에 다섯 통의 베르뇌 서한만이 존재한다. 그것도 네 통은 필사본이다. 즉 베르뇌 주교가 비오 9세 교황께 올린 1861년 10월 2일 서한,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1861년 10월 22일 서한, 1861년 10월 27일 서한, 1863년 11월 25일 서한 등의 필사본이다. 그리고 친필 서한은 베르뇌 주교가 상해 대표부의 피에르 카즈나브(Pierre Cazenave, 1834~1912) 신부에게 보낸 1865년 4월 21일 서한 하나뿐이다.

 

루세이 신부와 로네 신부가 정리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대목구 문서철에 베르뇌 주교의 서한 대부분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 루세이 신부가 1860년까지의 서한을 모아서 제577권을 편철할 때에는 이미 병인박해가 터진 뒤였기 때문에 순교자들의 기록을 별도로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그리고 카즈나브 신부에게 보낸 서한은 병인박해 순교자 기록들을 정리할 때 누락되었다가 나중에 발견되었으며, 로네 신부는 제579권을 묶을 때에 베르뇌 주교가 교황청에 보냈던 서한들의 사본과 함께 편철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으로 보자면 베르뇌 주교의 서한 자료는 애초에 조선대목구 문서철을 편철하기 이전에 따로 모아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과연 누가 어떤 식으로 모아 두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한국교회사연구소 측의 협조를 얻어서 파악한 바에 따르면 베르뇌 주교의 서한 자료는 현재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에서 몇 개의 낱장 서류철, 공책, 필사집 등의 형태로 보관하고 있다. 그러면 이하에서는 현재까지 확인된 베르뇌 주교 서한 287통을 친필 서한, 필사본 서한, 타자본 서한, 기타 서한 등 형태별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친필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 287통 가운데 친필 원본이 남아 있는 것은 186통이다. 그중에서 조선대목구 문서철 제579권에 들어 있는 카즈나브 신부에게 보낸 1865년 4월 21일 서한을 제외한 나머지 185통은 모두 BH19와 BH20이라는 번호가 붙은 문서철에 들어 있다. BH19는 베르뇌 신부가 1841년부터 1854년까지 통킹과 만주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보낸 친필 서한들을 모아 놓은 낱장 서류철이다. 통킹 선교사 시절인 1841년부터 감옥에 갇혀 있던 1842년까지 작성한 서한 12통, 통킹에서 석방되어 싱가포르, 마카오, 홍콩, 상해 등지에서 체류하던 시기에 쓴 서한 10통, 그리고 만주대목구 소속 선교사로 부임한 1844년 3월부터 1854년까지 쓴 서한 68통, 도합 90통의 서한이 모여 있다.

 

BH20은 베르뇌 신부가 만주대목구장의 부주교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조선대목구장 주교가 되어 1855년부터 1865년까지 쓴 친필 서한들을 모아 놓은 낱장 서류철이다. 트레미트의 주교 겸 만주대목구 부주교로서 쓴 5통, 갑사의 주교 겸 조선대목구장을 발신자로 표기한 90통, 총 95통의 서한이 들어 있다. 그래서 베르뇌 주교의 친필 서한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조선대목구 문서철 제579권의 1통, BH19와 BH20 서류철의 185통을 합쳐서 186통이다.

 

베르뇌 주교의 서한 가운데 만주대목구 소속 선교사로 활동하던 시절에 작성한 서한일지라도 조선대목구와 관련하여 중요한 내용을 담은 경우가 있다. 왜냐하면 만주대목구는 조선대목구와 인접해 있어서 서로 연락하기 쉬워서 홍콩이나 상해를 거쳐서 파리로 보내는 서한도 일단 만주대목구를 경유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메스트르(Joseph Ambroise Maistre, 1808~1857) 신부나 최양업 신부처럼 조선 입국을 준비하면서 만주대목구에 체류하던 조선대목구 소속 선교사들은 만주대목구 선교사들과 협력하여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베르뇌 주교의 만주대목구 시절 서한에는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소팔가자에 머물면서 중국인 신학생을 가르치면서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베르뇌 주교는 메스트르 신부가 조선 입국을 위하여 노력할 때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 그러다 보니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고 있던 페레올(Jean Joseph Ferréol, 1808~1853) 주교와 메스트르 신부 등이 만주대목구 선교사들에게 조선 사회와 교회 사정을 알리기도 하였다. 따라서 베르뇌 주교의 만주대목구 시절 서한들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3) 필사본 서한

 

베르뇌 주교의 친필 서한을 필사한 자료로는 두 종류가 존재한다. 먼저 책자 형태로 만들어진 「병인박해 순교자 서한 필사집」이 있고, 또 이와는 별도로 낱장 필사본들을 모아 놓은 서류철 세 묶음이 있다. 먼저 각각의 필사본 자료가 형성된 과정을 살펴본 다음에, 각각의 필사집과 필사본 서류철 속에 어떤 서한들이 모여 있는지를 자세하게 소개하겠다.

 

병인박해로 아홉 선교사가 순교한 뒤에 파리 본부에서는 순교자들의 행적과 관련한 자료들을 정리하여 나중에 시복·시성을 위한 청원이 있을 때 기초 자료로 삼고자 하였다. 그래서 우선 파리 본부의 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던 순교자들의 서한들을 필사하였으며, 아울러 순교자의 출신 교구와 본당 및 가족에게 연락하여 순교자들이 고향으로 보낸 서한들을 빌려와서 필사하고 돌려주었다. 병인박해가 발발한 이듬해인 1867년 11월 25일부터 1868년 10월 15일 사이에 이루어진 필사본에는 부아쟁 신부의 원본 확인 서명이 들어 있다. 그리고 필사한 날짜가 적혀 있지 않은 채 프로스페르 델페슈(Prosper Delpech) 신부, 피에르 플뢰리(Pierre Fleury) 신부 등이 신학교 장상으로서 원본 확인 서명을 한 경우도 보이는데, 이들이 장상으로 재직한 연도를 따져보면 1904년까지 다양한 시기에 필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6)

 

이렇게 모은 필사본 서한 자료들을 순교자별로 정리하고, 이어서 서한의 수신자와 작성 연도를 따져서 세부적으로 분류한 뒤에 책자로 만들어 문서고에 보관하였다. 이 책자를 「병인박해 순교자 서한 필사집」이라 부를 수 있는데,7) 총 18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 첫 세 권은 베르뇌 주교 서한 필사집이다. 그리고 제4권부터 제11권까지 여덟 권은 다블뤼 주교 서한 필사집이고, 제12권은 드 브르트니에르, 제13권은 볼리외, 제14권은 도리(또는 프티니콜라), 제15권은 푸르티에, 제16권과 제17권은 오메트르, 제18권은 위앵 신부의 서한 필사집이라는 주장이 있다.8)

 

「병인박해 순교자 서한 필사집」 제1권은 베르뇌 주교가 르망교구의 대신학교에서 신학생으로 재학하던 시절에 건강 문제로 잠시 휴학하고 가정교사로 가르친 적이 있었던 제자 앙리 드 부이으리, 르망교구 대신학교의 교장 신부였다가 나중에 르망교구의 교구장이 된 부비에 주교, 베르뇌 주교가 어렸을 때 베르뇌 소년의 성소를 발견하고 소신학교에 입학시킨 장본인이었으며 르망교구의 알론 본당 · 쿠트랭 본당 등에서 주임 사제를 역임한 누아르 신부 등에게 보낸 서한 52통을 필사한 것이다. 제1권에 실린 서한의 친필 원본은 BH19와 BH20 서류철에 들어 있지 않다. 아마 앙리 드 부이으리에게 보낸 서한은 본인이나 가족에게 원본을 빌려 필사한 다음에 반환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해석된다. 르망교구 관련 필사본 서한들은 아래에서 논할 서한 서류철 HB25에 타자본 서한의 형태로 동일하게 들어 있다.

 

「병인박해 순교자 서한 필사집」 제2권은 1841년 1월 22일부터 1854년 9월 14일까지 파리외방전교회의 여러 회원에게 보낸 서한들의 필사본을 모은 것이다.9) 그리고 제3권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는 1854년 10월 1일부터 1866년 2월 10일까지 파리외방전교회의 여러 회원에게 보낸 서한들이며, 후반부는 성영회 지도 신부에게 보낸 서한들이다. 제3권에 실린 필사본 서한은 104통이다. 파리 본부, 홍콩 대표부 및 기타 선교 지역의 동료 선교사들에게 보낸 서한들은 앞서 말한 BH20 파일에 친필 서한 원본이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파리 성영회에 보낸 서한들은 아래에서 소개할 BH24 파일에 타자본 서한의 형태로 존재한다.

 

필사본 서한의 두 번째 종류는 낱장 필사본 서한을 모아 놓은 서류철 세 묶음이다. 이 서류철에는 각각 BH21, BH22, BH23라는 번호가 붙어 있다. 앞서 소개한 BH19 파일과 BH20 파일이 베르뇌 주교의 친필 서한만을 모아 놓은 것임에 비하여, 필사본 BH21, BH22, BH23 파일에는 베르뇌 주교의 친필 서한만을 필사한 것이 아니라 베르뇌 주교와 관련된 서한들을 최대한 광범위하게 모은 다음에 그 속에서 베르뇌 주교에 관련한 언급이 나오는 부분들을 모두 필사한 자료들이다.

 

먼저 BH21(1841~1842) 필사본 파일에는 베르뇌 주교의 서한 필사본은 들어 있지 않다. 대신에 베르뇌 신부가 통킹에 도착하던 1841년부터 시작하여 체포 소식 등을 전하는 대목구장 주교의 서한 등이 필사되어 있다. 그리고 베르뇌 신부가 감옥에서 석방된 뒤에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베르뇌 신부의 아버지가 드 라 부이으리 부인에게 보낸 1843년 8월 13일 서한의 필사본도 들어 있다. 이것을 보면 베르뇌 주교의 순교 이후에 가족과 고향 등지에서 순교자 관련 자료를 조사하면서 확보한 편지를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 드 라 부이으리 가족이 베르뇌 주교의 서한들을 모아서 보관하고 있다가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순교자 관련 기록들을 찾을 때 빌려준 것으로 보인다. 베르뇌 주교가 직접 드 라 부이으리 가족에게 보낸 편지들은 「병인박해 순교자 서한 필사집」 제1권에 필사되어 있지만, 베르뇌 주교의 아버지가 드 라 부이으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여서 필사집 제1권에는 넣지 않고 따로 모아 두었다가 BH21 파일에 넣었을 것이다. BH21 파일의 또 다른 특이점은 페롱 신부와 드 브르트니에르 신부의 편지까지 포함하여 베르뇌 주교에 관하여 언급한 편지들이 필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BH22(1841~1852) 파일에는 조제프 페레올 주교가 마카오에서 베르뇌 신부를 조선대목구장 계승권을 지닌 부주교로 임명하는 내용을 기록한 1845년 7월 15일 자 짧은 문서가 들어 있다. 그런 다음에는 베르뇌 주교 서한의 목록이 나온다. 이 목록에는 파리 본부의 테송 신부에게 보낸 1841년 1월 22일 서한에서 시작하여 파리 본부의 알브랑(Etienne-Raymond Albrand, 1805~1853) 신부에게 보낸 1865년 12월 15일과 25일에 쓴 서한까지 61통의 서한에 대해서 수신자, 작성일, 분량이 적혀 있다. 하지만 실제로 BH22 파일에 들어 있는 서한 필사본의 숫자는 119통에 달한다. 그리고 119통 가운데 1841년 7월과 8월에 감옥에서 쓴 3통의 편지를 제외하면 BH19와 BH20 파일에 원본이 존재한다.

 

BH22 파일에 들어 있는 베르뇌 주교 서한 필사본은 줄이 쳐진 공책에 정성 들여 한 사람이 베껴 쓴 것들이 많다. 이런 경우에는 원본 확인 서명이 없어서 언제 필사된 것인지를 알 수 없다. 반면에 델페슈 신부의 원본 확인 서명이 들어 있는 필사본의 사본으로 짐작되는 것들도 다수 있다. 이것은 「병인박해 순교자 서한 필사집」을 제작할 때 만들어진 필사본의 일부를 복본으로 만들어 따로 보관한 것으로 보인다.

 

BH23(1856~1865) 파일에는 베르뇌 주교가 조선에서 작성한 서한의 필사본 63통이 있으며, 그 친필 원본은 전부 BH20 파일에 들어 있다. 이것 역시 BH22 파일과 마찬가지로 줄이 쳐진 공책에 한 사람이 정서하여 필사본을 만든 것과 델페슈 신부의 원본 확인 서명이 들어 있는 필사본이 섞여 있다. 그리고 BH23 파일의 마지막 필사본 서한은 베르뇌 주교의 서한이 아니다. 서울에 있던 드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시암 대목구의 라바르델 신부에게 보낸 1865년 8월 29일 서한이다. 알프레드 라바르델(Alfred Rabardelle, 1839~1904) 신부는 1862년 6월 14일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8월 18일에 시암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므로 아마 드 브르트니에르 신부와는 같은 해 서품자이면서 함께 출발한 사이로서 말하자면 동창 신부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드 브르트니에르 신부의 서한 필사본이 BH23 파일에 들어 있는 이유는 드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동창 신부였던 라바르델 신부에게 편지를 쓰면서 베르뇌 주교에 관하여 언급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베르뇌 주교 관련 자료와 베르뇌 주교 서한 자료의 필사본 파일인 BH21, BH22, BH23 파일이 필사된 시기를 추정해 보자. 앞서 말한 것처럼 이 파일들에는 동일한 필적으로 공책에 정서한 필사 일자 불명의 필사본과 원본 대조 확인 서명이 들어 있는 필사본이 섞여 있다. 원본 대조 확인 서명이 들어 있는 필사본들을 보면, BH21 파일의 첫 번째 서한 끝에는 필사 확인(conforme à une copie) 후에 장 루세이(Jean Rouseille) 신부가 서명하였다. 루세이 신부는 1867년부터 선교사 지원자들을 지도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동시에 문서고 담당자로 근무하였다. 그러다가 1872년에 로마 대표부로 파견되었다. 그러므로 루세이 신부가 문서고 담당자로 근무하던 1867년부터 1872년 사이에 조선 관계 문서들을 정리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BH21 파일의 두 번째 서한 끝에 원본 대조 확인 서명이 있는데 확인 날짜를 1868년 11월 15일로 적었다. 확인자는 조제프 부아쟁(Joseph Voisin) 신부였다. 1868년 당시 부아쟁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의 교수 신부였다. 세 번째 서한 끝에는 필사 확인(Pour copie confrome) 후에 루세이 신부가 서명하였다. 이처럼 전체적으로 보면 BH21 파일에서 원본 확인 서명이 들어 있는 필사본의 필사 날짜는 1867년 11월 18일부터 1868년 11월 15일 사이에 흩어져 있다. 특히 BH21 파일에 들어 있는 부아쟁 신부의 원본 확인 서명은 「병인박해 순교자 서한 필사집」 제1권에 있는 것과 날짜나 모양이 같다. 따라서 BH21, BH22, BH23 필사본 파일은 「병인박해 순교자 서한 필사집」 제1권, 제2권, 제3권의 베르뇌 주교 서한 필사본보다 뒤에 만들어졌으며, 일부는 복본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4) 타자본 서한

 

베르뇌 주교의 서한 자료를 타자기로 정서한 자료들은 BH24 파일과 HB25 파일, HB26부터 HB34까지 아홉 개의 파일, 그리고 614A 파일, 이렇게 네 묶음의 문서철에 들어 있다. 이 네 묶음의 문서철들은 각각 연결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작성 시기나 수신자에 따라 분류된 것이 아니며, 그 성격을 달리한다.

 

먼저 BH24 파일은 두 가지 문서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전반부는 문서 조사철이다. 즉 1910년 파리대교구에서 병인박해로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에 대해서 시복 재판을 위한 문서 조사를 개시하여 새롭게 모은 자료들이 들어 있다. 먼저 조사 개요가 나오고, 순교자들이 남긴 문서들을 조사한 결과가 실려 있다. 그리고 조선에서 순교한 시메옹 베르뇌 주교와 동료 등 하느님의 종들이 남긴 문서에 대한 조사를 지시하는 파리대교구장 레옹-아돌프 아메트 대주교의 1910년 5월 20일 교령이 인쇄본으로 들어 있다. 그리고 드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때인 1861년 10월 14일 노트르담 드 라 살레트에 있던 친구에게 보낸 서한의 타자본이 실려 있다. 아마 하느님의 종이 남긴 문서에 대한 조사 명령에 따라 관련 기관에서 드 브르트니에르 신부의 편지를 파리외방전교회로 보낸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드 브르트니에르 신부의 편지에 베르뇌 주교에 대한 언급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베르뇌 주교 관련 자료로 판단하여 BH24 파일에 포함시킨 것으로 보인다. 타자본의 끝에는 1910년 10월 15일 파리에서 원본과 동일함을 확인하였다는 서명이 들어 있다. 이처럼 BH24 파일의 전반부에는 베르뇌 주교의 서한 자료가 아니라 베르뇌 주교 관련 자료들의 타자본이 들어 있다.

 

BH24 파일의 후반부에는 베르뇌 주교가 1855년부터 조선대목구장으로서 성영회에 보낸 보고서와 서한 8통의 타자본이 들어 있다. 표지에 1910라는 숫자가 적힌 것으로 보아서 1910년에 조사된 자료로 보인다. 이 타자본은 「병인박해 순교자 서한 필사집」 제3권의 후반부에도 필사본 형태로 실려 있다. 그러므로 이미 조사된 자료들을 시복 재판과 관련하여 다시 조사한 것으로 추측된다.

 

BH24 파일에서 주목할 점은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된 베르뇌 주교 및 동료 순교자들(다블뤼 주교, 드 브르트니에르 신부, 도리 신부, 볼리외 신부,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이 남긴 문서들을 조사하도록 1910년 5월에 파리대교구장이 교령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이 교령은 순교자들이 남긴 기록을 소지한 사람이나 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지체하지 말고 파리대주교에게 통지하도록 명령하고 있다. 아마 이 교령에 의거하여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에서는 순교자들의 출신 교구나 본당, 가족 및 친구들이 보관하고 있던 기록들을 조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BH24 파일에는 파리 성영회나 기타 개인이 보관하던 베르뇌 주교의 편지 사본이 들어 있게 된 것이다.

 

또한 BH24 파일에는 파리대교구장 아메트 주교의 교령에 따라서 1910년 10월 1일까지 두 번의 회기로 진행된 베르뇌 주교와 동료들 관련 문서 조사에 관한 수속 기록(Processus super perquisitione scriptorum quae Servis Dei Berneux Simeoni et Sociis tribuuntur)이 실려 있다. 그런데 두 번째 회기에 조사된 순교자 관련 기록에는 파리외방전교회에서 만든 열여덟 권의 필사본 목록이 실려 있다. 여기에는 베르뇌 주교 필사집 세 권(제1~3권), 다블뤼 주교 필사집 여덟 권(제4~11권), 드 브르트니에르 필사집 한 권(제12권), 볼리외 필사집 두 권(제13권,10) 제14권), 푸르티에 필사집 한 권(제15권), 오메트르 필사집 두 권(제16~17권), 위앵 필사집 한 권(제18권)으로 나와 있다. 이 목록은 앞서 필사본 자료에서 제시했던 목록과는 차이가 있다. 즉 위에서는 제14권을 도리 혹은 프티니콜라 신부의 서한 필사집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BH24 파일에는 볼리외 신부가 남긴 자료 두 번째 권으로 기록되어 있다.11) 그러므로 「병인박해 순교자 서한 필사집」 전체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한 조사가 필요하다.12)

 

HB25는 베르뇌 주교의 고향이며 사제 서품을 받았던 프랑스 르망교구의 대신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서한들의 타자본이다.13) 1964년에 복사하였다는 설명이 서류철의 두 번째 장에 들어 있다. 베르뇌 주교가 파리에서 르망교구의 알론 본당 주임 누아르 신부에게 보낸 1834년 1월 4일 서한을 시작으로 하여, 누아르 신부, 부비에 주교, 어머니, 페롱 신부 등에게 보낸 서한 31통의 타자본이 들어 있다. 그 밖에 베르뇌 주교의 서한은 아니지만, 테송 신부, 누아르 신부, 드 라 부이으리 씨, 페롱 신부 등이 쓴 서한 14통도 함께 타자본으로 정서되어 있다.

 

HB26부터 HB34까지는 연속되는 일련의 타자본 파일이다. HB26은 베르뇌 주교가 통킹대목구에서 활동할 때 쓴 서한들의 타자본, HB27부터 HB31까지는 만주대목구에서 보낸 서한들의 타자본, 그리고 HB32부터 HB34까지는 조선대목구에서 보낸 서한들의 타자본이다. 그래서 타자본 HB32, HB33, HB34는 친필 서한 원본 파일 BH20, 필사본 서한 자료 BH23, 그리고 『병인박해 순교자 서한 필사집』 제3권과 겹친다.

 

한편 베르뇌 주교 관련 자료를 타자기로 정서한 마지막 묶음의 타자본은 614A라고 이름이 붙은 문서철이다. 614A 파일은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의 공식 카탈로그에 기록되어 있는 문서철이다. 그 순서를 잠시 살펴보면 제610권부터 제610N권까지 열다섯 권은 뮈텔 주교 일기이다. 이어서 제611권과 612권은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가 쓴 일기와 사진 앨범이다. 그리고 제613권은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을 종결짓는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한 조선 사절단 관련 기록이다.14) 제614권은 조선의 순교복자 100주년을 기념하는 순교자 관련 자료이다. 아마 1939년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그 뒤에 제614A권이 위치해 있다. 제615권부터는 중국 관련 문서들이다.

 

제614A권은 두 개의 파일로 되어 있고, 둘 다 베르뇌 주교 서한 사본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두 개의 문서철로 이루어진 614A 파일 가운데 하나에는 만주대목구에서 함께 활동했던 프랑클레 신부에게 보낸 15통의 서한을 타자기로 정서한 타자본이 들어 있다.15) 이 타자본 서한 자료는 친필 원본이든 필사본이든 다른 어떤 문서철에도 들어 있지 않은 유일 자료들이다.

 

제614A권의 두 문서철 가운데 다른 하나(614A)에는 BH22, BH23 필사본 파일을 타자로 정서한 것, HB26 파일부터 HB34 파일까지에 들어 있는 타자본 서한의 복본 등 36통의 베르뇌 주교 서한 자료 타자본이 들어 있다. 가령 통킹에서 베르뇌 신부가 파리 본부의 지도자 신부들에게 보낸 1841년 1월 22일 서한이나 케노 주교와 르페브르 주교에게 보낸 1841년 7월 21일 서한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베르뇌 주교가 만주대목구의 프랑클레 신부에게 보낸 1865년 12월 10일 서한은 오로지 614A 파일에만 타자본 형태로 들어 있고, 친필 원본 파일이나 필사본 파일에는 들어 있지 않다.16)

 

한편 614A 파일에 들어 있는 서한 중에는 베르뇌 주교가 보낸 것이 아니라, 베르뇌 주교에 관하여 제삼자가 쓴 서한이나 보고서들도 들어 있다. 서부 통킹대목구장 피에르 앙드레 르토르 주교가 파리 본부에 보낸 1840년 7월 11일 서한에는 베르뇌 신부가 메스트르 신부, 샤메종 신부 등과 함께 1840년 6월 말에 마닐라에 도착하였다는 보고가 들어 있다. 또 동부 코친차이나대목구에 배속된 피에르 뒤클로 신부가 대목구장 에티엔 케노 주교에게 보낸 1843년 1월 25일 서한에서 베르뇌 신부 등의 근황을 보고하였다. 그 밖에도 르토르 주교가 포교성성에 보낸 1841년 2월 18일 서한, 르페브르 주교가 파리 본부의 지도자 신부들에게 보낸 1841년 5월 15일 서한 등이 있으며, 동료 선교사들이 장상에게 보고하는 서한에서도 베르뇌 신부의 이름이 적혀 있기도 하다. 그러나 베르뇌 신부와 관련한 상세한 내용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런데 614A 파일과 HB26 등의 파일에 들어 있는 타자본 서한들 중에서 같은 날짜의 타자본 서한을 비교하면 동일한 타자본인 경우가 상당수 발견된다. 즉 타자본을 복사하여 복본을 만들어 보관한 것이다. 같은 타자본 서한인데 614A 파일에 들어 있는 서한이 더 흐리고 일부 철자가 뭉개져 있다. 그리고 HB26의 파일에 들어 있는 타자본에는 구겨진 흔적이 없는데, 614A 파일의 타자본은 종이 아래쪽이 구겨진 흔적이 많다. 만약 614A 파일의 타자본이 먼저 만들어졌다면 HB26 파일의 타자본도 마찬가지의 모양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HB26 파일의 타자본이 더 선명하고 종이의 보존 상태도 더 낫다. 이런 몇 가지 사항을 보면 HB26 등의 타자본 모음 문서철을 먼저 만들고 그 복본을 만들어 614A 파일로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614A 타자본 파일에 들어 있는 흥미로운 자료는 칼레(N.A. Calais, 1833~1884) 신부가 쓴 베르뇌 주교 약전이다. 새남터 순교자들, 베르뇌 주교, 드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푸르티에 신부, 우세영 알렉시오, 정의배 마르코의 명단과 순교일을 적은 다음에 베르뇌 주교의 약전을 두 편으로 적었다. 첫째 약전의 기록 일자는 1867년 1월 1일이며, 원본 확인 서명은 1868년 10월 15일 파리로 되어 있다. 둘째 약전의 기록 일자는 1867년 1월 6일이고, 원본 확인 서명은 마찬가지로 1868년 10월 15일 파리로 되어 있다. 아마 중국으로 탈출한 뒤에 칼레 신부가 썼던 글을 가지고 파리 신학교에서 필사본을 제작하였으며, 그 뒤에 다시 타자로 정서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614A 타자본 파일의 후반부에는 베르뇌 주교가 1855년부터 1862년까지 파리에 있는 성영회의 담당 신부에게 보낸 보고서들이 타자본 형태로 들어 있다. 시작하는 편지는 1855년 10월 15일 서한이다. 이 서한은 작성지를 황해라고 달았다. 아마 조선에 입국하면서 적은 편지로 보인다. 원본은 존재하지 않으며, 병인박해 필사집 제3권의 필사본과 614A의 타자본만 남아 있다. 이어서 1856년 11월 8일 서한의 타자본 다음에는 1857년 시노드에서 채택된 성영회 규식 프랑스어본도 있다. 그러므로 1857년 조선대목구 시노드와 관련 문서를 연구할 때 참고할 중요한 문서이다. 파리의 성영회에 보낸 서한들의 타자본 다음에는 베르뇌 주교가 한글로 쓴 문서 4편과 그 프랑스어 번역문이 들어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베르뇌 주교의 서한 자료들이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에 어떤 형태로 보관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그 존재와 내용이 확인된 베르뇌 서한 자료는 287통이다. 이는 르망교구의 알론 본당 주임이었던 누아르 신부에게 보낸 1834년 1월 4일 서한부터 만주대목구에서 활동하면서 역시 누아르 신부에게 보낸 1855년 1월 16일 서한까지 149통, 그리고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된 이후에 스스로를 조선대목구장이라 칭한 1855년 1월 17일 서한부터 서울에서 체포되기 직전에 페롱 신부에게 보낸 1866년 2월 10일 서한까지 138통을 합친 것이다. 그중에서 친필 원본 서한은 186통이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나머지 서한들은 필사본과 타자본의 형태로 존재한다.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에서 베르뇌 주교 서한 자료들을 정리하여 편찬한 전체 과정을 명쾌하게 밝혔다고 자평하기는 어려우나, 어느 정도 대략적인 모습은 그려내었다고 본다. 이제 장을 바꾸어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프랑스어와 라틴어로 된 베르뇌 주교 서한 자료들의 사본을 입수하여 자료집으로 편찬한 과정을 조명하겠다.

 

 

3. 한국교회사연구소의 베르뇌 자료 편찬


1) 판독본 간행

 

한국교회사연구소는 1995년에 베르뇌 주교의 서한들을 모아서 판독한 서한집 『베르뇌(S.F. Berneux, 張敬一) 문서』를 간행하였다. 이것은 서울대교구에서 의뢰한 ‘교구장 문서 정리 지원 사업’에 힘입은 결과물이었다. 한국교회사연구소는 1991년에 간행한 『리델(F. Ridel, 李福明) 문서』를 필두로 하여, 『리델 문서(Ⅱ)』(1992), 『블랑(Blanc, 白圭三) 문서』(1992),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문서(Ⅰ)』(1994), 『다블뤼 문서(Ⅱ)』(1994), 『다블뤼 문서(Ⅲ)』(1994), 『다블뤼 문서(Ⅳ)』(1994), 『베르뇌 문서』(1995), 『페레올(J. Ferréol, 高) 문서』(1997), 『앵베르(L. Imbert, 范世亨) 문서』(1998)를 잇달아 내놓았다.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역대 대목구장 문서 정리는 최석우 몬시뇰과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마르셀 펠리스(Marcel Pélisse, 裵世榮, 1928~2010) 신부의 협력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문서의 수집과 정리 및 해제는 최석우 몬시뇰이 맡았으며, 수집된 문서를 판독하여 타자기로 정서하는 일은 펠리스 신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에 루세이 신부와 로네 신부가 있었다면, 한국교회사연구소에는 최석우 몬시뇰과 펠리스 신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최석우 몬시뇰과 펠리스 신부가 베르뇌 주교를 비롯하여 조선대목구에서 활동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서한을 판독하고 타자본으로 간행함으로써 교회사학자들이 연구에 활용할 수 있도록 제공한 일은 선교사 서한 자료 편찬의 역사에 반드시 기록되어야 할 일이다.

 

펠리스 신부의 생애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1928년 6월 28일에 프랑스 중부 오트 루아르(Haute Loire)에 속한 작은 마을 랑제악(Langeac)에서 프랑수아 펠리스와 마리 쇼샤(Marie Chauchat)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41년부터 1947년까지 르 퓌 앙 블레(Le puy-en-velay) 교구의 소신학교를 다녔으며, 1947년 9월 15일 파리외방전교회 대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53년 5월 31일 파리외방전교회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고, 같은 해 9월 15일 한국 선교사로 출발하였다. 1954년과 1955년에 포항 예수성심시녀회에서 한국어 수업을 받은 다음에 1955년 10월 7일 포항시 죽도동 본당의 주임 사제로 부임하였다. 그 이후 1977년까지 안동 본당, 영주 본당, 점촌 본당, 울진 본당의 주임 사제로 활동하였다. 1978년부터 1990년까지 파리외방전교회 한국 지부장으로 일하면서 서울 응암동 본당에서 사목 협력자로 근무하였다. 1986년부터는 한국교회사연구소 산하 단체 한국가톨릭문화사연구회의 고문으로서 선교사 문서를 정리하는 일에 전념하였다.17) 2000년에 휴가를 받아 프랑스 고향에 갔다가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그 후에 프랑스 남부 툴루즈(Toulouse) 근방의 몽브통(Montbeton)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시설에서 지내다가 2010년 7월 5일에 82세를 일기로 선종하였다.

 

최석우 몬시뇰과 펠리스 신부가 정리한 타자본 『베르뇌 문서』는 베르뇌 주교가 조선대목구장이라는 직함을 사용하기 시작한 1855년 1월부터 1866년 순교할 때까지 남긴 서한 가운데 가족들에게 보낸 서한들을 빼고 공적인 성격을 띤 서한 130통을 제1편 주교 성성과 조선 입국 노력, 제2편 조선 입국과 활동으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그리고 제3편 베르뇌 주교의 한글 서한에는 이른바 ‘장주교 윤시 제우서’를 비롯하여 여섯 편의 한글 서한을 실었다. 제4편 순교 보고 및 추모 서한에는 테송 신부의 1866년 9월 6일 서한부터 페롱 신부의 1869년 7월 24일 서한까지 열 한 통의 서한이 들어 있다.

 

『베르뇌 문서』의 「간행사」는 최석우 몬시뇰이 쓴 것인데, 서두에서 베르뇌 주교의 서한들이 소장된 곳들을 소개하고 있다. 즉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 포교성 문서고, 르망교구 신학교 도서관, 샤토 뒤 루아르의 본당 문고 등에 베르뇌 주교의 서한들이 보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샤토 뒤 루아르의 본당 문고에는 어머니, 누나, 매형, 질녀 등 주로 가족들에게 보낸 서한 85통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르망교구 신학교 도서관에는 베르뇌 주교의 저술 심사 때 제출된 서한들로 미루어 보자면 르망교구의 교구장 주교, 본당 신부들, 대신학교 교수 신부들에게 보낸 서한들이 보관되어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포교성 문서고는 베르뇌 주교가 교황이나 포교성에 보낸 서한들을 소장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최석우 몬시뇰은 베르뇌 주교가 가족에게 보낸 서한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서한을 원본 또는 사본으로 보관하고 있는 곳은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라고 하였다.

 

최석우 몬시뇰이 「간행사」에서 언급한 바를 미루어 추측하자면 『베르뇌 문서』의 자료 출처는 대부분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였던 것으로 보인다. 『베르뇌 문서』에서 안타까운 점은 개별 서한을 판독하고 타자기로 정서하면서 그 서한의 출처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사학자들이 판독본의 원문을 실제로 보려고 하더라도 어느 문서고를 찾아가서 어느 문서철을 열람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위에서 밝힌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의 베르뇌 자료 편찬과 문서철 정리와 대조하면 대략적인 역추적이 가능하다. 먼저 베르뇌 주교의 한글 서한은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 문서철 제614A권 후반부에 들어 있다. 그리고 베르뇌 주교가 순교한 이후에 나온 순교 보고서와 추모 서한은 타자본 HB25 문서철의 후반부에 실려 있다. 그러므로 이 두 권의 문서철을 활용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베르뇌 주교가 조선대목구장으로서 작성한 130통의 서한은 친필 서한 원본 BH20, 필사본 BH22와 BH23 혹은 「병인박해 순교자 서한 필사집」 제3권, 그리고 타자본으로는 HB31, HB32, HB33, HB34, 이렇게 세 종류의 문서철 가운데 하나를 사용하여 판독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홍콩 대표부의 리브와(Napoléon Libois, 1805~1872) 신부에게 보낸 1865년 4월 21일 서한의 경우 원본 문서철인 BH20에는 첫 장이 누락되었다. 하지만 『베르뇌 문서』의 제123번 서한에는 그 전문이 다 판독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베르뇌 문서』의 베르뇌 서한 130통은 친필 서한의 원본 문서철보다는 필사본이나 타자본을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로서는 타자본 HB31~HB34를 참고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한국교회사연구소 도서실에 보관된 면장철 「Berneux」를 대조하면 확인할 수 있다.18)

 

2) 대역본 간행

 

한국교회사연구소는 2018년 『베르뇌 주교 서한집』 상·하권을 간행하였다. 이것은 최석우 몬시뇰과 펠리스 신부가 1995년에 간행한 『베르뇌 문서』를 토대로 한 작업이었다. 즉 판독문을 다시 대조하여 오류를 바로잡고, 이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사실 펠리스 신부가 작업한 판독문을 원문과 대조하면 많은 차이가 있다. 문법적으로 오류가 있거나 모호한 표현을 고치고, 좀 더 읽기 쉬운 프랑스어로 바꾸는 정도의 변경이라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용어나 표현을 완전히 고쳐버린 대목도 많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문헌학적으로 보면 크게 손상된 판독문이라 할 수 있다. 2018년의 『베르뇌 주교 서한집』은 원문과 대조하여 펠리스 신부가 고쳐 쓴 부분을 확인하고 이를 원문에 맞게 바꾸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각 서한의 출처를 찾아내어 일일이 출처를 명기하였다.19) 그러므로 1995년의 『베르뇌 문서』에 비해서 2018년의 『베르뇌 주교 서한집』은 판독문의 신뢰도가 매우 높은 편이다.

 

이와 더불어 『베르뇌 주교 서한집』은 한국인 교회사학자들이 연구에 활용할 수 있도록 판독문과 번역문을 함께 싣는 대역본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서한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역주도 충실하게 들어 있다. 그러므로 이 서한집은 베르뇌 주교가 조선대목구장으로 재임하던 시기의 교회사를 연구할 때 긴요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서한집의 일러두기에 판독자, 번역자, 감수자, 해제 집필자가 누구였는지를 분명하게 남긴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기존에 나온 교회사 관련 자료집들은 번역자나 역주자, 해제와 약전의 집필자를 밝히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그래서 뛰어난 교회사학자가 충실한 역주나 상세한 해제를 집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적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베르뇌 주교 서한집』을 비롯하여 최근에 간행된 자료집들의 사례가 관행으로 자리를 잡아서 앞으로 한국 교회사 관련 자료집을 편찬할 때 번역자, 역주자, 해제 및 약전 집필자를 기명으로 표기하리라 예상한다.

 

『베르뇌 주교 서한집』에는 베르뇌 주교의 친필 서한 가운데 조선대목구장으로서 보낸 서한들은 대부분 수록되어 있다. 다만 만주에서 말라카대목구장에게 보낸 1855년 1월 26일 서한, 상해에서 홍콩 대표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1856년 1월 16일 서한이 누락되었다. 그리고 조선에서 파리 본부 지도자들에게 보낸 1857년 11월 10일 서한은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의 참사회가 보낸 질의서에 대한 답변 서한인데, 홍콩 대표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1857년 11월 9일 서한에 첨부되어 있었기 때문에 함께 묶여 있다. 그리고 파리 본부의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1864년 11월 25일 서한과 1865년 12월 15일 서한은 둘 다 물품 요청 목록을 적은 것으로 각각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1864년 8월 18일 서한과 1865년 12월 10일 서한에 첨부되어 있었기 때문에 함께 묶여 있다. 하지만 사료 편찬의 관점에서 보면 엄연히 별개의 서한이므로 따로 분류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4. 미발굴 자료의 존재 가능성

 

베르뇌 주교가 작성한 서한 자료들은 다 발굴된 것일까?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에 소장된 베르뇌 주교의 서한들은 친필 원본이든 필사본 혹은 타자본이든 대부분 파악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베르뇌 주교 서한 자료들은 루세이 신부와 로네 신부가 분류하고 정리하여 편철한 것이지만, 그 이후에 여러 차례 재정리되면서 필사본과 타자본으로 복본이 만들어졌다. 그 과정에서 베르뇌 주교가 만주대목구로 보냈던 서한들이 다시 발굴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베르뇌 주교가 통킹대목구나 시암대목구 혹은 사천대목구 등 파리외방전교회의 동료 선교사들이 활동하던 선교지로 보낸 서한이 새로 발굴될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 있다. 티벳대목구장에게 보낸 1859년 1월 31일 서한이나 중국 귀주대목구장에게 보낸 1862년 8월 7일 서한 등은 그러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한 1995년에 간행된 『베르뇌 문서』의 「간행사」에서 최석우 몬시뇰은 프랑스 샤토 뒤 루아르 본당 문서고에는 어머니, 누나, 매형, 질녀 등 가족에게 보낸 서한 85통이 보관되어 있다고 분명히 언급하였다. 이 서한들을 과연 사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간주하여 베르뇌 주교 서한 자료에서 배제해야 할 것인가? 선교사들은 파리 본부로 보내건 로마 교황청 포교성성으로 보내건, 아니면 고향의 가족이나 출신 교구의 동창 신부에게 보내건, 자신이 보낸 서한들이 다른 사람에게 공개되어서는 안 되는 사적인 편지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대목구의 상황과 관련하여 중요한 정보를 남기기도 하였다. 가령 다블뤼 주교가 1850년 1월 병에 걸렸다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교우 마을을 순방하는 춘계 및 추계 판공성사 활동을 잠시 멈추고 신학교를 세워서 신학생을 가르쳤다는 것은 부모에게 보낸 1850년 9월 말 서한을 통하여 밝혀진 사실이다.20) 그러므로 베르뇌 주교의 경우에도 다블뤼 주교와 마찬가지로 가족에게 보낸 서한들을 새로 발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아울러 로마 교황청의 여러 문서고에 베르뇌 주교가 로마로 보낸 서한과 보고서 및 기타 자료들이 남아 있지 않은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베르뇌 문서』와 『베르뇌 주교 서한집』에는 출처를 포교성성 문서고 소장 문서철로 표기한 서한이 1855년 3월 15일 서한, 1857년 11월 18일 서한, 1858년 8월 15일 서한, 1859년 11월 7일 서한, 1860년 10월 25일 서한, 이렇게 다섯 통이 있다. 그리고 포교성성에 보낸 1862년 11월 25일 서한은 원본 출처 미상이라고 되어 있다. 베르뇌 주교가 조선대목구장으로 재직하던 10여 년 동안 도합 여섯 통의 서한만을 교황청으로 보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포교성성 문서고에서 소장하고 있는 문서철인 ‘SOCP vol. 78(Ⅱ)’, ‘SC Cina vol. 17, 18’과 더불어 다른 문서철에도 베르뇌 주교의 서한 자료가 들어 있는지 찾아볼 필요가 있다. 게다가 포교성성 즉 현재의 인류복음화성 문서고만이 아니라, 시성성 문서고나 사도 문서고, 바티칸 도서관 등에서 베르뇌 주교가 보낸 서한이나 보고서 및 기타 자료가 발견될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한다.

 

 

5. 결론

 

본론에서 전개한 베르뇌 주교 서한 자료 편찬의 역사를 요약해 보자. 한국교회사연구소 측으로부터 자료 협조를 받아 확인한 바에 따르면, 베르뇌 주교가 남긴 서한 자료는 총 287통에 달한다. 이것은 베르뇌 주교가 르망교구 대신학교에 입학하였다가 건강 문제로 잠시 휴학하고 드 라 부이으리 가족의 가정교사로 일하던 시기에 르망교구의 알론 본당에서 주임사제로 활동하던 누아르 신부에게 보낸 1834년 1월 4일 서한부터 병인박해가 발발하여 체포되기 직전에 동료 선교사 페롱 신부에게 보낸 1866년 2월 10일 서한까지 모두 망라한 것이다. 그중에서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되기 이전에 쓴 것은 149통이며, 조선대목구장으로서 쓴 것은 138통이다. 로마 교황청 포교성성에 보낸 서한 여섯 통을 제외한 나머지 서한들은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에 원본 혹은 필사본이나 타자본으로 보관되어 있다. 친필 서한 원본 186통은 BH19 파일과 BH20 파일에 들어 있다. 필사본 서한은 두 묶음이 남아 있는데, 첫째는 병인박해로 순교한 선교사들의 서한들을 정리한 필사집 제1권부터 제3권까지의 세 권이며, 둘째는 이를 참고하면서 더 많은 서한을 수집하여 필사한 BH22 파일과 BH23 파일이다. 그리고 타자본으로 정서한 서한 자료들도 존재한다. 이는 BH24 파일, HB25 파일, HB26~HB34 파일 그리고 조선대목구 문서철 제614A권과 제614A-2권에 들어 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최석우 몬시뇰은 파리외방전교회 한국 지부장 마르셀 펠리스 신부와 협력하여 파리와 로마에서 베르뇌 주교 서한 자료들을 수집하였고, 그 가운데에서 조선대목구와 관련된 서한 130통만을 선별하여 1995년 판독본 자료집으로 간행하였다. 그리고 2018년 다시 한국교회사연구소는 판독본 자료집의 내용을 원문과 대조하여 오류를 바로잡고 대역본으로 간행하였다. 이처럼 베르뇌 주교의 서한 자료를 정리하고 번역하여 자료집으로 펴냄으로써 앞으로 1855년부터 1866년 사이의 조선교회사를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앞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의 서한 자료를 편찬할 때 고려할 점 두 가지를 제안하면서 본고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첫째, 선교사 서한 자료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와 로마 인류복음화성 문서고에 소장된 프랑스 선교사들의 서한 자료들을 찾아내고 그 사본을 국내로 반입하여 자료집을 간행한 일은 전적으로 최석우 몬시뇰, 마르셀 펠리스 신부, 그리고 최승룡 신부가 이룬 업적이다. 분명히 한국 교회사 연구에 지대한 공헌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사료 편찬의 관점에서 보자면 문제점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파리와 로마의 문서고에서 사료를 정리하여 보존하고 있는 체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에 입각하여 사료를 수집했어야 한다. 해당 문서고의 담당자가 한국 천주교에 관련된 자료라고 꺼내어 보여준 것만을 그대로 가져와서는 제대로 된 사료 수집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제577권 등 조선대목구 관련 각 문서철은 누가 언제 묶었는지, 왜 그러한 일련번호를 붙였는지, 낱장 서한마다 매겨진 복수의 폴리오 번호는 누가 적어 넣은 것인지, 문서철로 편철한 이후에 해당 시기의 서한이 새로 발견되면 어떻게 처리하였는지 등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다. 선교사 서한 자료들을 국내로 반입하여 교회사 사료로 편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의문들을 풀어야 할 것이다.

 

둘째, 선교사 서한 자료의 번역본이나 대역본을 만들고자 한다면 사료 편찬의 원칙이 있어야 한다. 베르뇌 주교 서한 자료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간행된 선교사 서한 자료집들은 파리나 로마의 문서고의 문서철에서 해당 선교사의 서한들만을 뽑아낸 다음에 이를 판독하고 번역하여 간행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의적으로 선별한 자료만을 엮었기 때문에 각 문서철이 지닌 통합성을 크게 훼손하였다. 물론 교구장 문서 정리 작업이라든가 본당사 편찬을 위한 자료집 간행이라든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추진된 사료 편찬 작업일 경우에는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본래 사료가 소장된 문서고에서는 나름의 기준으로 사료들을 분류하고 정리하여 문서철을 생성하기 때문에 그 문서철이 지닌 통합성과 완결성을 완전히 무시해서는 안 된다. 가급적이면 특정 문서철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문서철의 성격과 분류 방식을 밝히고 또 그 속에 들어 있는 개별 서한 자료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판독하고 번역하여 자료집에 담는 것이 사료 편찬의 기본 원칙을 지키는 일이 아닌가 한다.

 

 

참고 문헌


1. 자료

 

『베르뇌 문서(S.F. Berneux, 張敬一)』,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베르뇌 주교 서한집』 상·하, 한국교회사연구소, 2018.

 

2. 연구 논저

 

배세영, 『임을 찾아 방랑의 길에 : 한 선교사의 신앙고백서』, 한국교회사연구소, 1988.

수원교회사연구소 편, 『볼리외 신부 자료집』, 천주교 수원교구 하우현성당, 2020.

장동하, 「1850년, 조선교구 신학교 설립에 관한 연구」, 『가톨릭 신학과 사상』 51, 2005.

조현범, 「박해 시대 조선 대목구의 사제 양성과 신학교 설립에 관한 연구」,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평신도기금운영위원회 인재양성위원회 편, 『3.1운동 100주년 기념 연구 논총 2 : 한국 천주교회와 서양 음악, 신학 교육, 한글 보급』,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21.

______, 「황사영 백서 불역본에 관한 연구」, 『교회사학』 12, 수원교회사연구소, 2015.

최석우, 「교회사 연구와 교회사 서술의 문제」, 『교회사연구』 23,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Beaulieu, Louis et Emile Lesserteur, Henri Blanchard, La Salle des Martyrs de Séminaire des Missions Etrangères, Paris: Charles Douniol, 1865.

 

 

〈부록〉 베르뇌 주교 서한 자료 총목록

※ PDF 파일이나 링크를 클릭하시면 논문 맨 뒤에 도표로 작성된 총목록이 있습니다.

 

……………………………………………………………………………………

 

1) 최석우, 「교회사 연구와 교회사 서술의 문제」, 『교회사연구』 23, 2004, 11~12쪽.

 

2) 본고의 연구를 위하여 베르뇌 주교 서한 자료 일체를 제공해 준 한국교회사연구소와 조한건 프란치스코 소장 신부님에게 감사드린다.

 

3) 조현범, 「황사영 백서 불역본에 관한 연구」, 『교회사학』 12, 수원교회사연구소, 2015, 225쪽.

 

4) 제400권부터 제567권까지가 중국 선교지(사천, 운남, 귀주, 광동, 티벳, 광서, 만주) 문서철, 제568권부터 제575권까지 일본 선교지(나가사키, 후쿠오카, 오사카, 토쿄, 하코다테) 문서철이며, 제577권부터 제582권까지가 조선 선교지 문서철이다. 그리고 제650권부터 제712권까지는 통킹 선교지, 제713권부터 제762권까지는 코친차이나 선교지, 제824권부터 제899권까지는 시암 선교지 문서철이다. 중국, 일본, 조선, 베트남, 태국의 순서로 배열한 것을 보면 일본이 조선을 강점한 이후에 완성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5) 두 문서철의 편철 연도가 겹치는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루세이 신부가 제577권을 편철한 이후에, 로네 신부가 다시 문서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새로 발견한 자료들을 모아서 제579권을 묶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발생하지 않았나 추측한다. 자세한 사정은 좀 더 연구해야 밝혀질 것이다.

 

6) 위의 글, 220쪽.

 

7) 2018년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펴낸 『베르뇌 주교 서한집』에서는 이 필사집을 ‘MEP 로마 대표부 시복 · 시성 자료’라고 명명하고 있다. 아마 필사집 가운데 일부, 구체적으로 말해서 제7권 다블뤼 주교 서한 필사집 4(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등이 파리외방전교회의 로마 대표부에 보관되어 있었던 사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 같다. 그러나 이 필사집 전체가 로마 대표부에 있었던 것도 아니며, 시복·시성 청원을 위한 기초 자료였지 시복·시성 재판에 증빙 문서로 제출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병인박해 순교자 서한 필사집」 정도로 불러도 무방하리라고 본다.

 

8) 「병인박해 순교자 서한 필사집」 18권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할 것. 조현범, 「박해 시대 조선 대목구의 사제 양성과 신학교 설립에 관한 연구」,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평신도기금운영위원회 인재양성위원회 편, 『3.1운동 100주년 기념 연구 논총 2 : 한국 천주교회와 서양 음악, 신학 교육, 한글 보급』,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21, 80~83쪽. 이 연구가 불완전하다는 점은 후술하겠다.

 

9) 「병인박해 순교자 서한 필사집」 제2권이자 베르뇌 주교 서한 필사집 제2권은 조선대목구장이 되기 이전인 통킹대목구와 만주대목구 소속 선교사로 활동하던 시기에 작성한 서한들이다. 그래서인지 이 필사집 제2권의 사본은 국내에 들어와 있지 않아서 실제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아래에서 논할 타자본 서한 자료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10) 볼리외 신부 서한 필사집 첫 번째 권, 즉 제13권의 서한들은 수원교회사연구소 편, 『볼리외 신부 자료집』, 천주교 수원교구 하우현성당, 2020에 판독문과 번역문의 형태로 실려 있다.

 

11) BH24 파일의 목록을 분석한 결과, 볼리외 신부 관련 제14권은 볼리외 신부의 서한 필사집은 아니다. 루이 볼리외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원자 시절에 동료 에밀 레세르퇴르, 앙리 블랑샤르 등과 함께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있는 순교자들의 방과 순교자들에 대해서 해설하는 책을 썼는데 1865년 파리의 두니올(Douniol)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파리대교구장의 교령에 따른 순교자 기록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이 책을 볼리외 관련 자료 제14권으로 명명한 것이었다(Louis Beaulieu, Emile Lesserteur, Henri Blanchard, La Salle des Martyrs de Séminaire des Missions Etrangères, Paris: Charles Douniol, 1865). 흥미로운 것은 이 책에서 순교자들의 방에 전시된 물품들 가운데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서한과 더불어 김대건 신부가 1846년 음력 6월 8일 감옥에서 베르뇌, 메스트르, 리브와, 르그레주와, 네 사람에게 쓴 작별 편지를 소개하고, 그 원문을 부록에 실었다는 사실이다.

 

12) 의문점은 왜 도리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가 남긴 서한 자료들이 「병인박해 순교자 서한 필사집」에 들어 있지 않냐는 것이다. 어쩌면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 조선대목구 문서철 제578권 전체가 프티니콜라 신부의 서한 필사본으로 이루어진 까닭도 이와 연관되어 있을지 모른다.

 

13) HB25부터는 문서철의 표지 번호가 BH에서 HB로 바뀌었다.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14)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한 조선인 가운데 신한청년단 대표 김규식이 있었다. 그는 파리로 출발할 당시에는 신한청년단 대표였지만 1919년 3월 파리에 도착한 후 4월에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임시 정부 외무총장 겸 파리위원부 대표가 되었다. 그러므로 제613권의 제목(Mémoire présenté par la Délégation coréenne à la Conférence de la paix 1919)에 적힌 조선인 대표단은 김규식 일행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뮈텔 주교는 1919년 4월 18일 일기에서 베네딕도회의 사우어 아빠스가 뮈텔 주교를 만나러 왔는데, 안중근 문제로 프랑스 출신 선교사와 갈등을 빚고 유럽으로 돌아갔던 빌렘 신부가 파리에 있는 것 같으

며 그의 주선으로 조선 대표들이 진정서를 고위층에 전달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비밀리에 전했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1909년부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되던 교민 신문 『신한민보(新韓民報)』의 1919년 5월 10일 기사에도 “안중근 씨의 유언을 받은 프랑스인 홍 신부(빌렘 신부의 한국식 이름은 홍석구였음)가 지금 우리 대표자들과 함께 한국 독립의 성공을 협력하는 중”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처럼 파리 강화회의에서 김규식을 비롯한 조선인 대표단이 어떤 활동을 벌였으며 빌렘 신부가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에 관심 있는 연구자는 제613권 문서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5) 본고는 이 파일을 614A-2로 명명하였다.

 

16) 한글 번역본 『베르뇌 주교 서한집』에는 이 서한이 128번 서한으로 번역되어 있다.

 

17) 배세영, 『임을 찾아 방랑의 길에 : 한 선교사의 신앙고백서』, 한국교회사연구소, 1988에 실린 배세영 신부 약력을 참고함.

 

18) 한국교회사연구소 문서고 담당자 신혜림 선생이 최석우 몬시뇰과 마르셀 펠리스 신부가 판독본을 만들 때 사용한 면장철을 확인한 결과 타자본 문서가 주를 이룬다고 알려 주었다. 지면을 빌려 감사의 뜻을 전한다.

 

19) 2018년 대역본 『베르뇌 주교 서한집』에서는 많은 서한의 출처를 ‘파리 외방전교회 로마 대표부의 시복 · 시성 자료 Ⅰ~Ⅲ’으로 표기하였다. 하지만 이 자료집은 파리외방전교회 로마 대표부에서 작성한 것이 아니며, 현재 로마 대표부에 보관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순교자들의 시복 청원을 위한 기초 자료를 만들기 위하여 1867년부터 1904년 사이에 파리 본부의 문서고에서 필사하여 책자로 만든 것이었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병인박해 순교자 서한 필사집」이라고 명명하였다.

 

20) 장동하, 「1850년, 조선교구 신학교 설립에 관한 연구」, 『가톨릭 신학과 사상』 51, 2005, 266~267쪽.

 

* 이 글은 2021년 10월 1일 한국교회사연구소 주최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와 조선 천주교회」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내용을 수정 · 보완한 것임.

 

[교회사 연구 제59집, 2021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조현범(한국학중앙연구원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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