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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44: 페레올 주교 한양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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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4-27 ㅣ No.2076

[신 김대건 · 최양업 전] (44) 페레올 주교 한양 입성


사제가 돼 돌아온 아들 10년 만에 만난 어머니, 감격의 눈물

 

 

김대건 신부는 신학생으로 선발된지 10년 만에 사제가 되어 귀국한 후 어머니 고 우르술라와 약 4개월간 용인 은이 상뜸이 골배마실에서 살면서 사목활동을 했다. 사진은 미리내 김대건 신부 묘소로 뒤편에 김 신부의 어머니 고 우르술라의 묘가 있다. (오른쪽 사진)

 

 

한양에서 미사와 성사를 베풀다

 

조선 입국 후 강경에 은신하고 있던 페레올 주교는 1845년 주님 탄생 대축일 즈음에 한양에 안착했다.

 

“저는 조선의 수도에 도착한 지가 얼마 안 됩니다. 출발하기 전에 우리 신자들 가운데 몇몇이 저에게 엄청나게 큰 위험을 겪을지 모른다고 말했으나, 그 위험은 다행히도 단지 그 신자들의 상상의 산물이었을 뿐입니다. 저는 50리외(200㎞)의 길을 정말 안전하게 걸어왔습니다. 실은 이 민족의 풍속 가운데 우리에게 매우 유리한 것이 더러 있습니다. 낯선 사람들 앞에 나올 때에 최상층에 속한 사람들은 천으로 자기 얼굴을 가릴 수 있는 특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부모상을 당했을 경우에 그 사람들은 더 어두운 색깔의 천으로 얼굴을 가리는 데다가 어깨 아래로 내려오는 커다란 모자를 쓰기 때문에 그들의 얼굴이 대중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개 상복 차림으로 돌아다닙니다.”(페레올 주교가 1845년 12월 27일 한양에서 파리외방전교회 바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페레올 주교는 편지에서 밝힌 것처럼 1845년 10월 12일 조선 내륙으로 들어온 후 김대건 신부와 함께 한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2개월여간 강경 교우 집에 홀로 유숙해야만 했다. 그가 이렇게 긴 시간 동안 강경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아마도 김대건 신부와 함께 라파엘호에 같이 탔던 신자 11명에 관한 소문과 감시가 잠잠해지길 기다려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배를 타고 떠난 후 깜깜무소식이어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이들이 6개월여 만에 갑자기 나타났으니 그들이 사는 동네마다 소문이 자자했을 것이다. 당연히 포청이나 담당 관가에 이런 이야기가 들어갔을 것이고, 그간 행적을 조사받기 위해 몇몇은 관장이나 포졸들에게 심문도 받았을 것이다. 페레올 주교는 세간의 눈길이 이들에게 무심해질 때까지 홀로 은신할 수밖에 없었다.

 

페레올 주교를 강경에 두고 상경한 김대건 신부도 숨돌릴 틈이 없었다. 가장 먼저, 주교를 한양으로 안전하게 모셔올 채비를 해야 했고, 주교가 거처할 숙소도 손봐야 했다. 또 무엇보다 중요한 메스트로 신부와 최양업 부제를 안전하게 입국시킬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는 1846년 초 두만강을 건너 경원 개시에서 조선 신자들과 만나 입국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김대건 신부는 1844년 3월 초 경원 개시에서 자신과 접촉했던 그때 교우들을 불러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의 안전한 입국을 위한 필요한 모든 준비를 꼼꼼하면서도 서둘러 해야만 했다. 그 와중에도 김대건 신부는 한양 미나리골과 무쇠막, 서빙고, 쪽우물골을 돌며 신자들에게 미사와 성사를 베풀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김대건 신부는 다시 강경으로 내려갈 상황이 안 되어 페레올 주교의 거처를 알고, 또 주교가 안심하고 동행할 수 있는 라파엘호 동승자 중 몇몇 신자를 주교에게 보냈을 것이다. 아마도 신학생 신분이었던 이재의와 최형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현석문 회장은 페레올 주교를 맞을 준비에, 선교사 영입에 중추 역할을 한 김 프란치스코는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를 입국시킬 준비에 바빴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김대건 신부가 강경에 다시 갔다면 페레올 주교는 편지에 김 신부와 신자들이 자신을 데리러 왔다고 적었을 것이다.

 

 

양반을 측근에 둔 페레올 주교

 

페레올 주교의 한양 입성 여정은 편지에서 보듯 “엄청나게 큰 위험을 겪을지 모른다”는 우려와 달리 “정말 안전하고” 깔끔하게 진행됐다. 그만큼 김대건 신부와 신자들의 준비가 철저했다. 페레올 주교는 신자들의 안내에 따라 상복 차림의 양반 행세를 하며 걸어서 한양까지 갔다. 페레올 주교는 이 여행 과정을 상세히 밝히지 않지만 다블뤼 신부의 편지에서 그가 어떻게 다녔을지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기품을 하나도 잃지 않고 어디든지 양반 행세를 하며 다녔습니다. 그날부터 우리는 우리가 가는 주막마다 방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을 몰아내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때는 그 가엾은 사람들은 추위에 몹시 떨어야 했지요.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서 자야 하니까요. 난 마음속으로 그들을 불쌍하게 여겼습니다. 그렇다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 불행한 만남을 피하고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을요.…엄한 말투로 말하고 가끔은 협박도 하고, 조선의 양반들이 평소에 하는 대로 했습니다. 우리를 밀쳐내지 못하도록 하면서 말이죠.”(다블뤼 신부가 1848년 8월 동생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페레올 주교는 조선에서의 첫 나들이를 통해 양반이 누리는 특권에 취했다. 이후 주교는 양반을 측근으로 중용했고, 교우촌 사목 방문 때마다 양반 신자들을 앞세워 일반 신자들과 갈등과 분열을 낳았다. 훗날 사제품을 받고 조선에 귀국한 최양업 신부는 페레올 주교에게 측근에 양반을 두지 말라고 직언해 다시금 둘 사이의 관계가 틀어지게 된다.

 

페레올 주교 일행은 ‘해남로’, 백성들 사이에서는 경기와 충청, 전라도를 잇는다 해서 ‘삼남길’이라 불리던 조선 다섯 번째 큰길을 따라 은진(강경)-노성-공주-차령고개-천안-진위-수원-인덕원-과천-남태령-동작나루-숭례문으로 해서 한양 도성 안으로 들어왔다. 페레올 주교가 아무리 상복 차림으로 서양인의 모습을 감추고 양반 행세를 했다고 해서 한양 도성을 쉽게 통과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누구 할 것 없이 반드시 이름과 신분, 거주지 등 인적 사항이 적힌 호패를 수문군에게 보여주고 그의 통과 허락이 나야만 한양 도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페레올 주교도 위조된 호패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또 수문군 중에는 미리 연락이 닿아 페레올 주교가 도성 안으로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준 조력자가 있었을 것이다. 19세기 중반 한양에 사는 교우 중에는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금군, 의금부, 포청 소속 군인과 하급 관원 수십 명이 있었다. 이들 중 절반 이상이 군인들이었다.

 

 

모자 상봉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가 부제 시절 1845년 1월 입국해 선교 자금으로 사두었던 한양 소공동 돌우무골 남별궁 뒤편 우물가 초가에서 생활하면서 제3대 조선대목구장으로서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시작했다. 아마도 페레올 주교는 주님 성탄 대축일 즈음해서 한양에 입성했고, 12월 27일자로 편지를 쓴 것으로 보아 성탄절을 기점으로 사목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페레올 주교는 1843년 4월부터 최양업 김대건과 함께 중국 길림 소팔가자 교우촌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성사를 집전할 만큼은 어느 정도 조선말을 익혔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양에 입성한 후 곧바로 신자들에게 성사를 거행할 수 있었다.

 

김대건 신부는 1845년 주님 성탄 대축일을 한양 소공동 돌우물골에서 페레올 주교와 평신도 지도자들과 함께 지낸 후 경기도 용인 은이 상뜸이로 갔다. 상뜸이는 ‘윗마을’이라는 뜻으로 그의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살고 있던 ‘은이 골배마실’을 말한다. 모자는 1836년 7월 신학생으로 선발돼 모방 신부가 있는 한양으로 떠날 때 작별한 후 10년 만에 상봉했다. 고 우르술라는 굴암 교우촌 회장으로 활동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남편 김제준이 체포돼 순교한 후 산속 깊숙이 숨겨진 동네(隱里) 위 골배마실 교우촌으로 들어와 은수자처럼 홀로 살고 있었다. 앳된 소년에서 청년으로, 또 조선인 첫 신부가 되어 나타난 아들을 본 어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하느님의 아들로, 교회의 사제로 봉헌된 아들에게 엄마는 예를 갖췄고, 무릎을 뚫고 강복과 안수를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홀로 부엌으로 가서 어머니 품 같은 집에서 10년 타향살이의 피로를 녹일 수 있도록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갖고 있던 모든 것과 이웃 교우들에게 꿔 아들 신부를 먹일 음식을 정성껏 장만하면서 홀로 “천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며 감격을 눈물을 훔쳤을 것이다. 김대건 신부는 1846년 주님 부활 대축일 전까지 어머니의 집에 머물면서 양지 터골, 응다라니, 굴암 회가마골, 정쇠, 무쇠막, 산의실, 더욱골, 산골 등 용인 일대 교우촌을 사목 방문하면서 교우들에게 미사와 성사를 집전했다.

 

1846년 4월 부활절이 가까웠을 때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로부터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를 입국시키기 위해 경원에 갔던 교우들이 그들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며 급히 상경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는 곧바로 한양으로 갈 채비를 챙겼다. 이때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마지막임을 직감했는지 김 신부를 잡았다. 그러면서 “곧 주님 부활 대축일이니 미사를 드리고 떠나라”고 청했다. 김대건 신부는 1846년 4월 12일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고 다음날 곧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에 길을 나섰다. 모자는 이날 이후 더는 볼 수 없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4월 24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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