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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8 · 19세기 한국의 벼농사, 쌀밥, 술에 관한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들의 견문기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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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20 ㅣ No.674

18 · 19세기 한국의 벼농사 · 쌀밥 · 술에 관한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들의 견문기 분석

 

 

1. 머리말

2. 벼농사에 관한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들의 견문기
3. 쌀 · 쌀밥 · 술에 관한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들의 견문기
4. 맺는말

 

 

1. 머리말 


18 · 19세기의 한국인들이 영위하던 벼농사, 그 산물인 쌀로 지어 먹던 밥 그리고 쌀로 빚어 마시던 술에 관한 당시 실제 면모를 생생하게 전해주는 기록으로는 과연 어떤 게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당시의 官邊 文書이라든지 文集 기록들을 섭렵하면서 늘 지니게 된다. 당시 한국인의 실생활에 관한 우리의 기록 속에서는 정작 이런 것들을 거의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행히도 異邦人이자 국가적으로 보면 不請客이어서 迫害의 대상이 되었던 西洋人 天主敎 宣敎師들이 남겨 놓은 기록을 검토하다 보니, 당시 한국의 벼농사 · 쌀밥 · 술에 관한 것들이 적지 않게 나옴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논문을 작성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들은 선교 대상인 한국인들에 관해 의당 관심이 많았으므로 한국인의 여러 방면의 실제 생활과 관련된 세세한 내용들까지 자신의 일기나 편지에 적어 두었으며, 아울러 자신들이 소속된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 보내는 보고서에서도 자신들의 전교 상황을 적으면서 이것저것 한국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서 상세한 묘사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록들을 전부 모아 분석하면 당시의 실생활과 관련된 면면을 알게 되겠다 싶었다. 이러한 생각에 그래서 예전에도 읽어 두었던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적힌 내용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재차 조사하게 되었는데, 그 자신의 〈머리〉에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어 많은 것을 되새김하게 해준다. 일반적으로 연구자들이 달레의 이 책을 많이 인용하는데, 그 기록들을 과연 그대로 신용해도 괜찮은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이를 통해 해소할 수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천주교회사에 들어가기 전에 조선의 제도, 정부, 풍속, 습관에 관한 〈序說〉이 나온다. 거기에는 선교사들의 편지 중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것으로 쉽게 본문에 들어갈 수 없는 많은 정보를 모아 분류하였고, 따로 한 章 마련하여 지금까지 東洋學 학자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는 조선말의 초보문법의 대강을 적었으며, 또 한 章에는 이 나라의 공식 행정구역 일람표를 넣었다. 사실에 대한 이야기를 보충하기도 하고 또 그것에 의하여 보충되기도 하는 이 예비 작업이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결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런대로 이 〈序說〉은 독특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니, 그것은 이 나라에 머물며 그 나라 말을 하고 본국인들과 오랫동안 살면서 그들의 법률과 성격과 편견과 관습을 착실히 알 수 있는 서양인은 선교사들뿐이기 때문이다.

이 정보의 정확성으로 말해도 매우 크다. 그러나 늘 숨어 살고 거의 언제나 수색의 대상이 되던 선교사의 처지로 보아 어떤 경우에는 그들이 들은 것을 직접 확인하여 볼 수가 없었고 또 여러 지방의 풍속을 서로 비교하여 볼 수도 없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나라의 어떤 곳에서 절대적으로 참말인 것이 다른 곳에서는 비교적 그렇다는 정도밖에 안 되는 때가 흔히 있다. 그러므로 영광스러운 순교자 다블뤼 Daveluy 주교가 어떤 편지에 풍속에 대한 꽤 자세한 설명을 적고 나서 아래와 같이 덧붙일 때에 그는 모든 동료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제가 보내 드리는 것은 오죽잖은 것이며, 불완전하고 착잡합니다. 또 본의 아닌 어떤 잘못이 끼어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최선은 다하였습니다.” 증인의 이 양심적인 조심성은 그의 말이 진실하다는 가장 훌륭한 보증이 아니겠는가. 《한국천주교회사》는 선교사들의 편지와 그들이 번역하여 보낸 조선 사람들의 보고들로 꾸며졌다. 다른 자료는 있을 수가 없다.1)

이 대목을 종합하여 재정리하면, 그가 본격적인 《한국천주교회사》 서술에 들어가기에 앞서 한국의 풍속이나 습관에 관한 것을 정리한 〈序說〉이 있으며, 여기에는 “선교사들의 편지 중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것으로 쉽게 본문에 들어갈 수 없는 많은 정보를 모아 분류하였다”고 했다. 또한 자신의 정리로 조선말의 초보문법이나 공식 행정구역 일람표를 넣은 예비 작업이 행해졌으며 그리하여 여기에는 어쩔 수 없는 결함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런대로 이 〈序說〉은 독특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나라에 머물며 그 나라 말을 하고 본국인들과 오랫동안 살면서 그들의 법률과 성격과 편견과 관습을 착실히 알 수 있는 서양인은 선교사들뿐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이 정보의 정확성’은 ‘매우 크다’는 것이라 하였다. 다블뤼 주교의 증언을 구체적인 예로 들어 제시하면서, “증인의 이 양심적인 조심성은 그의 말이 진실하다는 가장 훌륭한 보증이 아니겠는가?”라고 되묻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면서 단언하기를 “《한국천주교회사》는 선교사들의 편지와 그들이 번역하여 보낸 조선 사람들의 보고들로 꾸며졌다. 다른 자료는 있을 수가 없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측면을 고려하면, 달레가 직접 인용한 선교사들의 글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자신이 선교사들의 글을 인용하여 정리한 부분들도 그렇기 때문에 상당히 신용할 바가 크다고 해서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다만 그 자신도 앞서 인용한 글에서 述懷하고 있는 바대로 “늘 숨어 살고 거의 언제나 수색의 대상이 되던 선교사의 처지로 보아 어떤 경우에는 그들이 들은 것을 직접 확인하여 볼 수가 없었고 또 여러 지방의 풍속을 서로 비교하여 볼 수도 없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며, 또한 “이 나라의 어떤 곳에서 절대적으로 참말인 것이 다른 곳에서는 비교적 그렇다는 정도밖에 안 되는 때가 흔히 있다”는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그가 직접 길게 인용한 선교사들의 글은 더욱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고 하겠으나,2) 달레 자신이 인용한 게 누구의 글인지를 밝히지 않은 경우에는 그래도 좀 조심스럽게 접근하여 眞僞 與否를 캐야 마땅하리라 본다.

이와 같이 판단이 되는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다가, 당시 한국에 와서 생활했던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들 가운데서 크게 주목되는 바는 제5대 조선교구장을 지낸 다블뤼(Daveluy) 주교의 문서들 그리고 제6대 조선교구장을 역임한 리델(Ridel)의 일기와 편지 등을 정리한 《리델문서》이다. 더욱이 다블뤼 주교가 1866년에 순교하고 난 뒤에 그의 출신 교구인 프랑스 아미앵 교구에서 인가를 얻어 출판한 샤를 샬몽(Charles Salmon)의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3)에서 찾아지는 여러 편지들 속에서 당시 그의 조선 생활의 진면목을 찾을 수 있으며, 또한 당시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들의 활동과 일상생활 그리고 그들의 조선 인식을 분석하여 최근 출간한 조현범의 《조선의 선교사, 선교사의 조선》4)에서도 미처 접하지 못했던 佛語 원문의 한글 번역문 자료들을 읽어볼 수가 있게 되었다. 이런 자료들에서 찾은 적지 않은 기록들을 토대로 분석하여 이 논문에서는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들이 실제로 체험한 18 · 19세기 한국의 벼농사 · 쌀밥 · 술 문화의 실상에 대해서 파악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2. 벼농사에 관한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들의 견문기

당시 한국의 벼농사에 관해서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가 기술해 놓은바 가운데 제일 주목되는 게 다음의 것이다. 이는 달레 자신이 정리한 게 아니라 작성자가 누구인지를 명료하게 밝혀 놓지 않기는 했을지라도 ‘어떤 선교사의 이런 글’이라고 밝히고 그대로 인용하고 있음으로 해서 더욱 그러하다고 하겠다. 그만큼 당시의 실상을 가감 없이 전해주는 것으로 믿어서 좋다고 본다.

朝鮮은 산 나라이다. 滿洲의 長白山脈에서 뻗어 나온 큰 산맥이 북에서 남으로 東海岸을 끼고 내려와 그 윤곽을 이루어 놓았으며 이 산맥의 支脈들이 거의 나라 전체를 뒤덮고 있다. 어떤 선교사는 이런 글을 썼다. “어디에 발을 들어놓든지 보이는 것은 오직 산뿐입니다. … 눈 가는 곳마다 끝이 뾰쪽한 봉우리며 굉장히 큰 괭이를 거꾸로 놓은 듯한 산이며 깎아지른 듯한 바위가 솟아 있을 것이고, 저 멀리 지평선 끝에는 그보다도 더 놓은 산이 막아 서 있을 것이니 이 나라의 어디를 가든지 거의 이러합니다. 오직 하나의 예외가 있는데 그것은 서쪽바다로 불거져 나온 지방으로 내포(內浦)평야라고 불리웁니다. 그러나 평야라는 말을 듣고 우리 불란서의 아름다운 평야의 평탄하고 넓게 뻗은 지면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다만 이 나라의 다른 지방보다 산이 훨씬 낮고 훨씬 드문드문한 곳일 뿐입니다. 더 넓은 계곡들은 벼농사를 할 수 있는 더 큰 공간을 제공하여 줍니다. 한편 기름진 이 땅에는 도랑이 사방팔방으로 나 있으며 그 농산물이 하도 풍부하여 서울의 곡창이라고 불리울 지경입니다.”5)

나라 전체가 산으로 뒤덮어 있을 정도로 평야가 드문 이 나라에서 內浦평야만이 ‘오직 하나의 예외’라고 묘사했지만, 이 편지는 분명 내포평야에서 생활했던 선교사의 글이라 그렇게 적고 있음에서 연유한다고 보일 뿐이다.6) 다만 이곳에서 평야라고 하는 게 프랑스의 평탄하고 넓게 뻗은 것과는 확실히 다르며, “이 나라의 다른 지방보다 산이 훨씬 낮고 훨씬 드문드문한 곳일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 뒤를 이어서 써놓은 바가 크게 주목해 보아야 할 바라고 생각한다. 다름이 아니라 “더 넓은 계곡들은 벼농사를 할 수 있는 더 큰 공간을 제공하여 줍니다”라고 서술하고 있음이 그것이다.

이는 당시 한국에서 너른 평야가 아닌 계곡을 활용해서 주로 벼농사를 많이 짓고 있었음을 확연히 지적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7) 이와 같이 당시에 계곡을 활용하여 벼농사를 많이 짓고 있었다는 사실과 연결하여 또 하나 주목되는 바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8)

계곡에는 땅이 조금이라도 쓸 만하면 벼를 심는데, 산에서 내려오는 시내와 작은 강들이 굉장히 많아 이 벼농사에 필요한 못을 쉽게 만들 수가 있다. 이렇게 灌漑가 된 땅은 결코 놀리는 일이 없어 언제나 수확을 가져다준다.9)

앞서 인용한 글에서 “더 넓은 계곡들은 벼농사를 할 수 있는 더 큰 공간을 제공하여 줍니다”고 한 것을 여기에서는 부연하여 확실히 입증이라도 하듯이, “계곡에는 땅이 조금이라도 쓸 만하면 벼를 심는데, 산에서 내려오는 시내와 작은 강들이 굉장히 많아 이 벼농사에 필요한 못을 쉽게 만들 수가 있다. 이렇게 관개가 된 땅은 결코 놀리는 일이 없어 언제나 수확을 가져다준다”고 했음이 주목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당시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들의 상세한 기록들을 통해서 18 · 19세기의 한국에서는 산에서 내려오는 시내를 이용하여 계곡에 땅이 조금이라도 쓸 만하면 벼농사를 지었으며, 그것들은 관개가 된 논이라 休耕하지 않고 매년 常耕하는 것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겠다.

그렇지만 이처럼 계곡의 물을 활용하여 常耕으로 벼농사를 짓던 이런 모습은 18 · 19세기에 이르러서 비로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이미 高麗時代 이전부터도 산속 계곡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던 이런 논들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당시의 이런 논의 모습을 高麗 仁宗 때 宋나라의 사신으로 직접 와서 본 徐兢은 자신이 견문한 많은 사실들을 적어 정리하여 저술한 책 《高麗圖經》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던 것이다. 이 기록이 앞서 인용한 달레의 것과 대비된다고 생각되므로, 이를 참조해서 잠시 살필 필요가 있겠다.

나라의 강토가 동해에 닿아 있고 큰 산과 깊은 골이 많아 험준하고 평지가 적기 때문에 田地를 만든 게 산간에 많았고 그것이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하였으므로 경작하기가 매우 힘들며 멀리서 바라다보면 사다리[梯] 비탈길[?]과 같이 그렇다. … 그 땅에 황량 · 흑서 · 한속 · 참깨 · 보리와 밀 등이 있고, 그 쌀은 멥쌀은 있으나 찹쌀은 없고 쌀알이 특히 크고 맛이 달다. 소 쟁기나 농구는 중국과 대동소이하므로 생략하고 싣지 않는다.10)

徐兢은 高麗에는 큰 산과 깊은 골이 많고 평지가 적기 때문에 田地, 즉 경작지를 만든 게 산간에 많았다고 하면서, 그것을 멀리서 바라다보면 ‘사다리[梯] 비탈길[?]과 같이 그렇다’고 묘사하였던 것이다. 깊은 골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이 전지를, 그러면서도 곧 이어서는 “그 쌀은 멥쌀은 있으나 찹쌀은 없고 쌀알이 특히 크고 맛이 달다”고 기록한 것과 연결시켜 보면 그 자신도 이 ‘사다리 비탈길과 같은’ 田地가 쌀의 생산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긴 듯하다. 말하자면 산의 깊은 계곡을 활용하여 만들어진 전지는 그 계곡물을 활용하여 농사를 짓는 형태로, 旱田, 즉 밭이 결코 아닌 水田, 곧 畓이었음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가늠된다고 하겠다.11)

또한 이처럼 산간에 만들어진 사닥다리 같은 田地를 중국의 이른바 《王禎農書》에서는 ‘梯田’이라고 적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徐兢이 깊은 골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사닥다리 같다고 한 전지는 바로 이러한 梯田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을 글로 묘사한 바라고 믿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梯田의 모습은 오늘날 智異山 燕谷寺 주변의 계곡을 비롯해서 남해읍 가천 마을 등 현재 전국 곳곳의 계곡에서 볼 수 있는 다랑논(다랭이논 혹은 다락논)의 경우 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12) 그러므로 방금 살펴본 바와 같이 산계곡을 대대적으로 활용하여 벼농사를 짓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는 서양인 천주교 신부들의 벼농사에 관한 견문기는,13)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벼농사에 대해 연구하는 오늘날의 연구자들에게 徐兢의 《高麗圖經》이 그러하듯이 앞으로 18 · 19세기 한국의 벼농사와 관련된 기록으로서 후대의 연구자들에게도 대단히 소중히 여겨질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한편 벼농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畜力의 활용 문제와 관련하여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들이 써놓은 견문기 가운데 다음과 같은 대목이 또한 주목된다. 당시 한국에서 실행되고 있었던 牛耕과 자신들이 경험한 馬耕과의 차이점에 대해서 記述해 놓은 것으로 보이기에 그러하다고 하겠다.

쟁기에는 소만을 메우고 말을 이용하는 일은 도무지 없는데, 어느 날 선교사가 교우들에게 자기 말을 쓰라고 권하였더니 모두 와아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마치 불란서에서 개로 밭갈이를 하라고 제안한 것이나 꼭 마찬가지였다. 하기는 논에는 늘 물이 차 있으므로 말이 논에서 일을 하다가는 살지를 못할 것이다.14)

이를 통해서 쟁기를 활용한 논갈이에는 소만을 그랬을 뿐 말은 도무지 이용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 선교사가 자신의 馬를 활용해볼 것을 권하자 커다란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되는 바는, 논갈이에 말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논에는 늘 물이 차 있으므로 말이 논에서 일을 하다가는 살지를 못할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대목이라고 하겠다. 말은 발굽에 징을 박아 물기가 없는 땅에서만 제대로 힘을 쓸 수 있지 물기가 질척질척한 땅에서는 활동하기 힘들므로, 물이 그득한 논에서 말이 일을 하다가는 결국에는 살지를 못하게 될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사실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들이 살았던 西洋에서는 물론, 東洋에서도 中國에서나 日本에서나 시기가 古代이건 現代이건 막론하고, 그리고 韓國에서도 제주도와 같은 곳에서는 지금도 논물대기 이전의 논에서 말이 활용되기도 하지만, 특히 밭에서는 여전히 말로 밭갈이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5) 그렇기 때문에 말로도 논을 갈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발상도 했던 모양이나, 끝내 늘 물이 차 있으므로 말이 살지를 못하겠다는 점을 떠올리고 있는 것으로, 일부 지방의 밭에서는 실제로 말을 활용해서 갈이를 하고 있음도 목격했기에 이런 게 아닌가 싶다. 단순히 자신들의 고향에서만의 사실을 떠올려 이런 제안을 한 게 아니라, 밭농사에서 행해지고 있는 馬耕을 논농사에서도 적용해서 벼농사에 원활함을 기하면 좋겠다고 하는 생각을 피력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벼농사에 있어서 牛耕의 이러한 당시 실상 묘사와 함께 또 하나 짤막하지만 당시의 농기구 및 소의 貸與 慣行에 관한 見聞記 역시 흥미롭다. 달레의 기록에 “논밭갈이 연장을 빌러 오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빌려 주고, 또 흔히는 소까지도 농번기를 제외하고는 꽤 쉽게 빌려 준다16)”고 했음이 그것이다. 이처럼 논밭갈이 연장과 소를 빌려 주는 관행이 행해지고 있었다고 하는 이러한 기록은 日帝時代 것도 그러하지만,17) 이 당시의 것으로서는 오늘날은 물론이고 이후의 연구자들에게도 주목받을 사실의 하나가 되리라 본다.

한편 벼농사와 관련하여 강우량과 기후 조건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 역시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들은 한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경험적으로 잘 알고 지냈으며, 그럼에 따라 이에 대한 기록도 빠뜨리지 않고 적고 있었다. 다음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 가늠된다.

(가) 보름 전부터 장마가 시작되어 강우량이 충분한 덕에 벼농사와 담배 농사의 수확이 순조롭게 되었다.18)

(나) 요즘엔 날씨가 아주 청명하다. 밤에는 시원하고 낮에도 그리 덥지 않아 일 년 중 가장 좋은 계절이다 … 추수 때를 아직 한 달 남기고 있는 벼 역시 장관이다.19)

이들은 분명 陽曆을 사용하였을 것으로 이들 기록 모두 그렇다고 하겠는데, 7월에 적은 (가)의 기록으로 장마가 시작되어 충분한 강우량 덕분에 벼농사와 담배 농사의 수확이 순조롭게 될 것임을 예단하고 있으며, 9월의 날씨가 청명하고 밤에는 시원하고 낮에는 그리 덥지 않아 추수가 아직 한 달 남은 벼가 풍년을 이루어 장관을 이루고 있음을 적었던 것이다. 이럴 정도로 이들 역시 벼농사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은 천주교 교인들의 식량 확보와 직결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끼닛거리 마련과도 관련이 깊은 것이었으므로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농사에 있어서는 모름지기 施肥의 문제 해결이 가장 필수적인 것일진대, 이러한 施肥 방법에 대해서도 관심을 세밀히 기울여 적어놓고 있음 역시 간과할 수 없겠다. 다음의 기록이 그것이다.

농사에는 퇴비와 정성스럽게 거두어 두는 그 밖의 가축거름 외에도 조선집에서 많이 생기는 재를 쓴다. 나무가 비싸지 않고 겨울에는 굉장히 많이 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봄에 나뭇잎이 우거지기 시작하면 밑가지를 쳐서 밭에 펴 썩힌다. 씨앗을 뿌린 다음에는 새들이 쪼아먹는 것은 막고 어린 줄기가 지나친 더위로 말라죽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하여 또 다른 나뭇가지로 밭을 덮었다가 나중에 농작물이 충분히 자란 뒤에 걷어치운다.20)

이 기록을 정리하면, 당시 농사에서는 퇴비, 가축거름, 재 그리고 나뭇가지, 이 네 가지를 활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고 하겠다. 여기에서 각별히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가축거름과 관련하여 “정성스럽게 거두어 두는 그 밖의 가축거름 외에도 조선집에서 많이 생기는 재를 쓴다”고 적은 대목이다. 정성스럽게 거두어 두었던 가축 거름에는 비단 소의 그것만이 아니라 말의 그것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므로 그렇다. 이 점과 관련하여서는 柳袗(1582~1635)의 《渭濱明農記》에서 이미 〈전답에 거름을 주어 땅을 기름지게 하는 법(糞田肥地法)〉가운데 “牛馬 우리의 뒤편을 파내어 우마의 糞汁을 저장하였다가 또한 재에 뿌려 주면 좋다”고 한 것이라든가, 柳重臨(1705~1771)의 《增補山林經濟》에서 〈거름주기〉 가운데 “馬糞을 햇볕에 말려 밭에 거름하면 흙이 기름지게 된다”고 한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21) 즉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들의 눈에도 牛糞 외에도 馬糞과 같은 가축들의 糞尿가 비료로써 활용되고 있는 모습이 관찰되었고 이 사실이 기록되기에 이르렀으며, 따라서 당시의 施肥法에 관한 귀중한 증언을 하나 더 확보한 게 되는 셈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이들에게는 迫害를 피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火田을 일구며 살아가는 천주교 교인들의 생활 모습 역시 예사롭게 여겨지지 않았던 듯하다. 그래서 일부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들은 이 火田의 모습과 경영 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적고 있었던 모양인데, 다음에서 이를 볼 수 있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화전을 간 것은 천주교인들이었다. 박해 때문에 아주 외 따른 곳으로 밀려난 그들은 굶어죽지 않기 위하여 땅을 개간하였고, 몇 해 동안 경험을 쌓은 덕으로 이런 종류의 땅에 가장 알맞은 경작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이들의 시도가 성공하는 것을 본 外敎人들이 그들을 본받아 지금은 많은 산에 밭이 일구어졌다. 담배가 이런 높은 곳에서 나는 주요한 농산물이며, 조도 곧잘 자라고, 大麻나 몇 가지 야채도 꽤 잘 되지만 목화는 아직 길들지 않았다. 들판의 농사보다 훨씬 더한 노력이 드는 이런 종류의 농사지마는, 그대신 가난한 농부들에게 크나큰 이익이 된다. 세금이 덜하고 나무와 풀과 야생과일이 사방에 얼마든지 있다. 굉장히 많이 소비되는 순무가 담배포기 사이에서 썩 잘 자라서 귀중한 식료품을 공급하여 준다. 불행히도 땅이 꽤 빨리 토박하여져서 골짜기에서는 쉬는 밭을 보는 일이 결코 없는데, 산에서는 얼마가 지나면 여러 해 동안 땅을 늘려야 한다. 그러고도 처음 일구었을 때에 가졌던 생산력을 다시 찾는 일은 거의 없다.22)

이 글 첫머리에서 火田의 개간이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서 처음으로 이루어졌다고 한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옳은 게 아니다. 韓國에서 화전은 이미 古代부터 행해졌으며,23) 특히 조선후기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24) 더욱이 外敎人들이 교인들에게서 火田 耕作法을 배우게 되었다고 하는 것도 일부 그랬을지는 몰라도 전부가 그랬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기록 자체가 박해를 피해 산속으로 피해 들어가 火田을 일구면서 敎友村을 형성하고 살아가던 이들 천주교인들의 실생활을 전해주는 것으로 보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겠다. 이밖에 담배농사를 화전민들이 하였다든가 조 그리고 대마가 화전에서 재배되었다는 사실 외에도 순무가 담배포기 사이에서 잘 자라고 있다는 모습 등등은 오늘날 農書라든가 文集의 기록에서는 잘 찾아보기 어려운 생생한 기록이라, 이후 18 · 19세기 농사에 관한 연구에도 보탬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3. 쌀 · 쌀밥 · 술에 관한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들의 견문기

벼농사를 통해서 얻어진 쌀, 그것으로 지어 먹던 쌀밥 그리고 그것을 빚어 만든 술과 관련하여 한국인의 생활 모습에 대해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들은 무엇을 보았으며, 어떻게 느끼고 그리고 어찌 판단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여기에서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즉 그들이 체험하고 적어놓은 기록에 담겨 있는 이런 점들에 관해 분석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18 · 19세기 한국인의 쌀 · 쌀밥 그리고 술 문화에 대해서 조망하는 기회를 가지려 하는 것이다.

1) 쌀

한국인의 主食이 쌀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외국인 천주교 선교사들도 한국에 오기 이전 이미 충분히 이 사실을 알고 주식을 쌀로 하는 생활에 익숙해지도록 중국에서부터 단단히 준비하고 왔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블뤼 신부의 글에 보면, 마카오를 출발해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여행길에서 “그렇게 쇠약했던 건 아니지만 좀 약했던 몸도 회복되었지. 아니 오히려 매우 건강해졌어. 중국 사람처럼 젓가락질을 하면서 밥을 막 먹어댔기 때문이야. 난 빵은 거의 먹지 않아. 언젠가는 어쩌면 빵의 맛을 모르게 될지도 몰라25)”라고 적어서, 자신이 더 이상 빵을 먹지 않고 밥을 먹음으로써 그래서 오히려 건강해졌다고 述懷하고 있는 데에서 이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다블뤼 신부만이 그런 게 아니라 그의 뒤를 곧 따라 한국에 온 리델의 경우도 한국행 선박 속에서부터 쌀밥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면서 쌀에 대한 관심을 크게 드러내고 있었으므로26) 역시 그랬으리라 여겨지는데, 그가 남긴 기록 가운데는 특히 1866년 프랑스가 강화도를 공격한 이른바 丙寅洋擾 때 특히 江華島에서의 쌀과 관련된 실상을 잘 전해주고 있는 게 적지 않다. 다음 일련의 기록들이 대표적이다.

(가) 강화섬의 중요한 토산물로는 잘 가꾼 모든 들에서 생산되는 쌀, 보리, 담배, 수수, 옥수수, 순무, 무, 배추, 밤, 풍부한 감, 가난한 사람들이 죽 같은 것을 쑤어 먹는 도토리 등입니다.27)

(나) 강화읍은 점령됐고, 우리는 이곳에 포진을 쳤다. 곧 관가의 모든 건물과 창고들이 수색되었다. 우리가 이곳에서 찾아낸 모든 것을 상세히 기술한다면, 상당히 길어질 것이다. 단지 식량만은 소량이었다. 관가 창고에서 우리는 적은 양의 보리만을 찾아냈다. 사실 이때는 벼를 추수하는 시기였고 들판은 논으로 덮여 있었다.28)

(다) 강화읍에서는 쌀이 부족했으나 프랑스인들은 굉장히 많은 쌀을 갖고 있었다. 버려졌던 여러 척의 배에 쌀이 가득했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운반하는 데 애쓴 사람들에게 그 대가로 쌀을 나누어주었다.29)

(가)의 기록에서는 강화도의 토산물 중에서 쌀을 제일 먼저 꼽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것 역시 쌀이 가장 중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리델 자신이 알고 있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풀이된다. 기록 (나)에서는 관가 창고에서 적은 양의 보리만을 찾아낼 수 있었다고 하면서 이 때가 벼를 추수하는 시기여서 쌀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도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당시 春窮期의 실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다)에서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강화읍에는 쌀이 부족했으나 프랑스군들은 여러 척의 배에서 쌀을 획득하였고, 이를 운반하는 데에 도움을 준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 사실에서 당시 쌀 부족 상황의 심각성을 헤아릴 수 있다.

그리고 쌀을 얻기 위해 적군의 일꾼이 되어 이제는 그들의 노획물이 되어 버린 쌀을 운반해주던 이들의 모습에서, 쌀을 목숨처럼 여기던 당시 한국인의 쌀에 대한 관념의 일단을 헤아려볼 수 있을 듯하다. 전쟁의 와중에서 이렇게 해서라도 쌀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심지어 어린아이를 길거리에 내다버리는 경우까지 발생하였는데, 다음에서 이런 상황이 잘 드러난다.

군의관들을 불렀더니 곧 아이에게로 달려와서는 몸을 따뜻하게 해서 살려 보려고 옷을 벗기고 아이를 솜이불로 감싸주었다. … 나는 군종 신부님들 가운데 한 분께 “아이에게 영세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청했더니 엘리사벳이라는 본명으로 영세를 주었다. … 어떻게 할 방도가 없어 엘리사벳의 아버지를 찾으려고 강화읍으로 갔다. … “그 아이가 저한테 오면 틀림없이 죽습니다.” “그럼 저한테 딸을 맡기시겠습니까? 딸 삼아 키우겠습니다.” “좋습니다. 데려가시오. 저는 키울 수 없습니다. 불구자인데다가 쌀도 없습니다.” 나는 엘리사벳에게로 돌아와서는 엘리사벳을 내 집으로 데려간다고 말했다.30)

이 기록에 따라서 병인양요의 와중에서 버려진 여자애를 치료해 주고 돌봐주게 된 리델은, 이 여자애에게 엘리사벳이라는 본명으로 군종신부에게 영세까지 받게 하였는데, 불구인 그녀의 生父에 의해 내버려진 결정적인 이유 역시 쌀이 없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즉 쌀이 없어 굶어 죽게 생긴 이 딸아이를 그 생부는 양육권을 포기하고 리델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예를 통해, 결국 한국인에게는 쌀이 결국 목숨과 같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렇듯이 사람들이 쌀을 목숨처럼 중시하였으므로 국가적인 경사가 있을 때마다 국가에서 가난한 국민들에게 주는 공식적인 하사품 중 가장 비중이 큰 품목 역시 쌀이었음이 다음의 기록에서 드러난다.

큰 일이 있을 때 으레 주는 하사품 외에, 이 나라의 풍속에 의하면 왕은 가난한 사람들을 부양할 책임이 있다. 1845년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임금의 施與를 받을 권리가 있는 노인이 450명이 있었다. 八旬 노인에게는 해마다 쌀 다섯 말, 소금 두 말, 어물 세 말, 七旬 노인에게는 쌀 네 말, 소금 두 말, 어물 두 말을 준다. 여기서 말하는 쌀 한 말이라는 것은 어른 한 사람의 열흘 치 식량이 될 만한 양이다.31)

달레가 정리해놓은 이 기록이 임금으로부터 쌀을 施與받을 권리가 있는 노인의 수가 450명이라는 1845년의 구체적인 통계 수치까지 제시할 정도여서 대단히 신빙성이 높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쌀 1말이 어른 1명의 10일 식량이 될 만한 양이라고 적고 있는 것 역시 여타의 기록에서는 잘 발견할 수 없는 흥미로운 기록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여기에 제시된 8순 노인에게 하사한 쌀 5말과 7순 노인에게 하사한 쌀 4말이라는 기준은 결국 이들의 2달치 식량도 되지 못하는 셈이므로, 이것만을 가지고는 결코 1년 동안 연명하기에는 부족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그렇기는 했을지언정 국가적으로는 그것도 임금이 직접 王道政治의 일환으로 愛民思想과 敬老思想을 발휘하여 이를 하사함으로써 饑饉 대책의 일종으로 삼았을 뿐이지만, 쌀을 목숨처럼 여기는 당시 한국의 국민들에게는 이나마도 생활해나가는 데에 대단히 큰 힘이 되었을 듯싶다.

이렇듯이 한국인 전부가 쌀을 연명하는 데에 꼭 필요하다 하여 마치 목숨처럼 여겨 쌀을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기울이고 있었기에,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도 역시 그러다보니 때로는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들의 마음을 크게 아프게 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혹독한 迫害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자신들의 牧者인 서양인 선교사들을 보호하고 돌보려는 순수한 종교적 열정에서 우러나온 게 아니라, 쌀을 얻어먹기 위해 선교사를 앞 다투어 자신의 집으로 유치하려 하기도 했다는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리델의 다음 글에서 이런 점이 역력하다.

저희가 거처하는 집 사람들은 가난한 백성인데다 신문교우들입니다. 거친 성품인데다 욕심이 대단합니다. 제가 주는 쌀을 받아먹으려고 저희를 자기네 집에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말을 하기가 거북하군요. 조선에 살면서 얻은 가장 슬픈 추억입니다. 치사한 장면도 몇 번 연출되었습니다. 형제끼리 서로 저를 모시겠다고 다투곤 했는데, 저한테 쌀을 얻어먹으려는 심사였던 것입니다. 내심 저는 고통스러웠지만 드러낼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제게 매우 친절하게 굴었고, 자기네 탐욕 때문에 제가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떠나려고 했습니다만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습니다.32)

리델 자신도 이런 상황을 전하면서 “말을 하기가 거북”하고, 또 “조선에 살면서 얻은 가장 슬픈 추억”이라고 吐露할 지경이었는데, 자신에게서 쌀을 얻으려고 자신을 모셔가기 위해 같은 형제끼리 서로 다투곤 하는 일들을 숨김없이 그대로 告白하였다. 결국 이들 곁을 떠나려고 해도, 迫害 중에 한국인 천주교 교우들의 도움이 없이는 결코 한 발짝도 運身할 수 없었던 그의 처지로서는 정말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리델과 같은 경우가 아주 드문 것이고 특수한 상황이었을 테지만, 이 기록을 통해서 목숨을 잇기 위해 쌀을 얻는 데에만 급급했던 가난한 한국인 천주교 신자 모습의 일단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밖에 도리가 없겠다.

2) 쌀밥

쌀 자체도 그러하였지만 그것으로 지은 쌀밥 역시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들에게는 깊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페레올 주교가 그랬듯이 쌀밥 위주의 식생활에 적응을 잘하지 못해서 위장 장애로 고생한 경우도 있었고, 혹은 반대로 다블뤼 주교처럼 쌀밥을 잘 먹어서 건강했다고 스스로 밝힌 경우도 있었지만,33) 어떤 경우일지라도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 기간 동안에는 延命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쌀밥을 먹여야만 했으므로 그러했을 것이기도 했고, 또한 무엇보다도 당시 한국인들의 식품으로서 쌀밥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한국인의 쌀밥 생활에 관한 이들이 남긴 기록은 매우 상세한 편인데, 다블뤼 주교가 남긴 다음의 기록도 그 가운데 하나다.

(가) 조선인들은 특별한 탐식과 식욕을 가진 대식가이다. 평소 그들의 식사 방법이 이를 잘 보여 주지만, 무엇보다 함께 나눠 먹어야 하는 특식을 만났을 때 그들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정말 대식가들이다. 이 점에서는 대신이건 평민이건 구별이 없다. 많이 먹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며, 질보다는 양을 중시한다. 조선인들은 식사 동안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식사하는 데는 거의 시간이 걸리지 않으며 수다를 떨지 않는다.

(나) 어릴 때부터 아이의 위장에 탄력성을 주려고 하는 것 같다. 많은 어머니들이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밥을 채워 넣는 것을 본다. 때때로 숟가락 자루로 아이의 배를 두드려 보아 꽉 찼을 때에 비로소 밥 먹이는 것을 멈춘다. 이것은 마치 유럽에서 공놀이 선수들이 손가락이 안 들어갈 때까지 공을 팽팽하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다) 노동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식사량은 1리터의 쌀밥으로, 이는 아주 큰 사발을 꽉 채운다. 각자가 한 사발씩을 다 먹어 치워도 충분하지 않으며, 계속 먹을 준비가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2, 3인분 이상을 쉽게 먹어 치운다. 우리 천주교인들 중의 한 사람은 나이가 30세에서 45세가량 되는데, 그는 어떤 내기에서 7인분까지 먹었다. 이것은 그가 마신 먹걸리 사발의 수는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64세나 65세가 다 된 어떤 사람은 식욕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5사발을 비웠다. 10사발을 감당할 때 장사라고 말한다.…

(라) 조선 사람들의 집에는 비축 식량이 없으며, 손에 넣는 즉시 먹어 치운다.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찬장이나 식량 창고가 없으므로 요리를 보관할 수 없다. 게다가 이 나라는 기후가 매우 습하기 때문에 음식물이 금방 부패한다. … 조선인들이 대식가이기는 하지만, 늘 그렇게 많은 양을 먹지는 못한다.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탐이 조선인들이 가진 악덕 중의 하나임에는 분명하다.34)

(가)에서는 특히 한국인들의 식사 습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많이 먹는 습관이 있었음을 적은 것도 그러하지만, ‘함께 나눠 먹어야 하는 특식을 만났을 때’ ‘대신이건 평민이건 구별이 없이’ 많이 먹는데 질보다는 양을 중시한다는 사실을 적고 있음도 그렇다. 더더군다나 “조선인들은 식사 동안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식사하는 데는 거의 시간이 걸리지 않으며 수다를 떨지 않는다”고 했음에서 이 당시에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식사 자리에서 거의 대화를 잘 나누지 않으며 그래서 식사 시간도 상대적으로 길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데, 서양인들의 눈에는 이런 장면이 이색적이어서 이렇게 썼겠지만 지금의 우리들로서는 별로 낯설지 않은 식습관일 뿐이다. 다만 당시에는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양의 쌀밥을 먹었다는 사실을 他者의 눈에 비친 그대로 엿볼 수 있음은 이 기록 덕분이라고 할 것이다. (나)에서는 아이들의 식사 습관에 대해, 그리고 (다)에서는 연령별 식사 습관에 대해서 상세히 쓰고 있음이 또한 눈길을 끈다. 이러한 상황도 역시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함께 나눠 먹어야 하는 특식을 만났을 때’로, (라)의 기록 가운데에서도 “조선인들이 대식가이기는 하지만, 늘 그렇게 많은 양을 먹지는 못한다.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라 썼음을 간과해서는 안 되리라 본다. 즉 이러한 게 일상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잔칫날과 같이 그야말로 함께 나눠 먹는 자리에서 벌어진 것이리라 여겨지는 것이다. 이런 자리였기에 어린아이의 어머니들은 아이의 배를 먼저 불려주기 위해서 자신의 식사는 뒤로 미루고 아이의 배가 “꽉 찼을 때에 비로소 밥 먹이는 것을 멈”추는 게 다반사였을 테고, 이런 모습을 보고 서양인 선교사들은 이렇게 신기한 듯이 기록하였던 것으로 가늠된다.

또한 이 기록에서 노동자 1인의 “보통 식사 분량은 쌀 1리터인데, 그것을 익히면 한 사발이 잔뜩 된다”라고 한 점 역시 주목되는데, 1리터의 쌀이 과연 한 사발의 쌀밥밖에는 안 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지만, 오늘날의 밥공기가 아닌 예전 1960 · 1970년대에도 흔히 볼 수 있었던 세칭 큰 사발에 이른바 고봉으로 쌀밥을 그야말로 잔뜩 담으면 한 사발이 될 수도 있었겠다 싶다.35) 여하튼 이렇게 써놓은 내용 자체는 당시의 쌀 소비량을 세밀히 전해주고 있는 것이라 당시 한국인의 식생활과 관련하여 앞으로의 연구에서도 많이 활용될 소지가 크다고 하겠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러한 분량만 먹는 게 아니라 전쟁으로 굶주린 여자 어린애의 경우에도 두 사발 정도를 한꺼번에 먹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36) 앞의 기록 (다)의 뒷부분에서도 드러나듯이 성인들의 경우 때로는 3~4인분을, 64세가량이 된 어떤 이의 경우는 “식욕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5사발을,” 심지어는 밥 먹기 내기를 해서 7인분까지도 먹었으며, 게다가 “10사발을 감당할 때 장사라고 말한다”는 사실까지도 전해주고 있다.

이러한 당시 한국인들의 폭식에 가까운 식사 습관이 왜 생기게 되었는지에 대한 다블뤼 주교의 분석 역시 대단히 흥미롭다. (라)를 보면, “찬장이나 식량 창고가 없으므로 요리를 보관할 수 없다. 게다가 이 나라는 기후가 매우 습하기 때문에 음식물이 금방 부패한다”라고 記述하고 있음이 그것이다. 찬장이나 식량 창고가 없어서 요리를 보관할 수 없는데다가 기후 역시 매우 습해서 음식물이 금방 부패하므로, 음식을 그야말로 “손에 넣는 즉시 먹어 치운다”는 설명인 것이다. 여기에서 “찬장이나 식량 창고가 없으므로 요리를 보관할 수 없다”고 한 지적은, 그가 당시 한국인의 식생활 습관이 한국의 실내 생활 여건 혹은 건축 구조 특징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또한 “기후가 매우 습하기 때문에 음식물이 금방 부패한다”고 쓴 것 역시 한국의 기후 특성에 따라 많은 양을 마련한 음식을 바로바로 소비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야기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고 하겠다. 그럼으로써 한번 장만한 음식을 부패하기 전에 소비하기 위해 폭식에 가까울 정도로 음식을 먹는 식생활 습관이 몸에 배어 있던 한국인의 식생활 습관을 관찰하여 가감 없이 전해줌은 물론, 그것이 한국의 실내 생활 여건과 기후 특성에 따른 것으로 풀이하고 있음은, 당시 한국의 쌀밥, 나아가 음식문화 전반을 이해하는 데에 크게 참고가 된다고 하겠다.

3) 술

술에 관해서도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들은 의당 관심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사제로서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서는 포도주가 절실하게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1790년 尹有一 바오로와 함께 禹 요한세자가 洗禮를 받자마자 선교사가 도착할 때 모든 준비가 갖춰져 있도록 하기 위해 포도로 술 만드는 법을 배우게 하였었고,37) 그리고 1841년 박해 중에도 이를 자체적으로 제조하여 원활히 조달하고자 선교사 范世亨(앵베르, Imbert) · 羅伯多祿(모방, Maubant) · 鄭牙各伯(샤스탕, Chastan) 3인이 崔榮受 필립보의 집을 방문하기도 하였던 것이다.38) 이럴 정도로 자연히 포도주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으므로, 리델도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게 되었던 것 같다.

여러분에게 조선의 포도주에 관해 말하는 것을 잊었다. 이곳에서는 포도를 경작하지 않지만 산에 일종의 야생 포도가 있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그것으로 포도주를 만들 생각에는 미치지 않는 모양이다. 그들은 쌀을 발효시켜 일종의 능금주나 맥주 같은 주류(酒類)를 만드는데 이제는 그것에 익숙해져서 그 술을 빚게 하여 매일 조금씩 즐겨 마신다. 나는 화주(火酒)도 만들어서 그것을 복통 약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니, 그것은 엉터리 라스파이(Raspail)식이었다. 지난해에는 그 약주로 두 명의 복통 환자를 치료해 주었더니 조선인들은 감탄해 마지않았다.39)

리델은 산에서 채취한 야생 포도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을 가지고 포도주를 만들 생각은 하지 않는 당시 한국인들에 대해 약간은 불만스러운 논조인 듯싶지만, 그러면서도 한국인들이 쌀을 발효시켜 능금주나 맥주 같은 술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적어 두고 있음이 당시의 실상을 알기에 요긴하다. 그 자신이 그것을 매일 조금씩 즐겨 마셨다고 했으며, 더욱이 그걸 활용해서 火酒를 만들어 복통 약으로 사용해서 병을 고치기도 했음을 적고 있어40) 술이 단순히 음주용으로써뿐만이 아니라 치료용으로도 쓰였음을 알게 된다. 당시 한국의 술이 이처럼 쌀로 만든 것만이 있었다는 점을 알려주는 점에서는 앞서 인용한 바와 같지만, 그 외에도 음주로 인해 생기는 사회적 문제 등에 관해 아는 데에는 다음의 기록 역시 도움이 된다.

조선에는 곡물, 특히 쌀로 만든 술밖에 없다. 그래서 매년 수확량의 절반 이상이 술을 만드는 데 날아가 버린다. 이 때문에 식료품 가격이 얼마나 오를지 생각해 보라. 이 나라에서는 아무도 술 취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왕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대소 관리들이 매일 술에 취해 있다. 양반에서부터 시작해서 무수한 사람들이 자기 정신을 술병 바닥에 두고 있다.41)

쌀로 만든 술밖에는 없으므로 상당한 양의 쌀이 술을 만드는 데에 들어갔을 것임은 분명하지만, 이 글에서처럼 과연 “매년 쌀 수확량의 절반 이상이 술을 만드는 데 날아가 버린다”고 할 정도였는지는 모를 일이다. 또한 프티니콜라 신부가 이 글에서 걱정하듯이 이로 인해 얼마나 식료품 가격이 올랐는지도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술 취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풍조가 널리 퍼져 있었던 것만은 이 글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겠는데, 이 역시 술을 쌀로 만든 것이어서 음식의 하나로 여기는 데에서 나온 게 아닐까 싶다. 다음의 기록에서 우러나오듯이 다블뤼 주교 역시 쌀밥을 먹는 데에 익숙해졌고, 그래서 술도 쌀로 만든 것이라서 마신다고 하는 듯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던 데에서 당시의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제 경우는, 저는 조금은 더 익숙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밥을 먹고, 또 밥을 먹고 또 밥을 먹습니다. … 저는 어떤 품질의 술이든지 모두 마십니다. 그저 보통 사람들보다 맹목적으로 막 마셔대는 사람들이 즐겨 들이키는 술이라도 상관없습니다.42)

다블뤼 주교 자신은 밥 먹는 것에 익숙해져서 밥을 먹고 또 먹는다고 하면서, 아울러 어떤 품질의 술이든지 모두 마신다고 한 것은 그게 밥처럼 쌀로 만든 것이어서 끼니를 대신하거나 혹은 그것은 아닐지라도 배고픔을 면하게 해주기 때문이었지, “그저 보통 사람들보다 맹목적으로 막 마셔대는 사람들이 즐겨 들이키는 술이라도 상관없이” 마셔 대서 술기운을 얻기 위함이 아니었음은 분명할 것이다. 따라서 다블뤼 주교 역시, 당시 한국인들이 늘상 그러하였듯이 쌀밥에 익숙해지고 술도 쌀로 만든 것이라 음식의 하나로 여겼기 때문에 이렇게 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 밖에 술과 관련하여서 1866년 丙寅洋擾의 와중에 강화도를 점령당하고 나서 프랑스 군인들과 충돌 속에서 여러 차례 밤에 싸움이 벌어져, 몇몇 조선 사람들이 다친 상황에서 대해 설명하면서 리델은 “어떤 집에서 발견된 약주가 주민들을 멀리하게 만든, 이 같은 불쾌한 소란의 원인이었다”고 적었을 정도였다. 더 이상의 기록이 없어 자세한 정황을 헤아릴 길이 전혀 없지만. 이 기록에 멀지 않게 이어지는 기록에서, “주민들은 더 이상 먹을 양식이 없었고, 아이들은 빵조각을 조금 떼어주는 프랑스 군인들의 뒤를 따라다녔다43)”고 서술한 것으로 보아, 식량 부족 사태 속에서도 쌀로 담근 약주가 발견되자 이를 둘러싸고 프랑스 군인들과 강화도 도민들 사이에 벌어진 소동이었던 게 아닌가 짐작된다.

그만큼 전쟁 중에도 술은 여전히 애주가들의 기호품으로서는 가장 우선하였던 것이며, 또 한 사람의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 프티니콜라 신부의 지적에 따르면, 음주벽의 폐단은 일일이 다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나라를 황폐하게 하기도 하고, 또한 나라 전체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게도 만든 원인이 되기도 하였을 정도라고 하였다.44) 물론 엄격한 淸貧 생활에 익숙한 또 한 사람의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 다블뤼 주교의 눈에는 한국인의 이러한 술 풍습이 심지어는 타락한 모습으로 비쳐지기도 하였다.45)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이 적지 않게 드러나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한국인들은 술 자체를 쌀로 만들어 배를 불릴 수 있는 음식의 일종으로 여겨 밥을 먹을 때 이를 곁들여 즐기는 습관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46) 쌀밥으로 배를 불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기회를 놓치면 되돌아오지 않아 결국에는 굶주리게 되므로 쌀밥을 폭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쌀로 빚은 술 역시 그렇게 여기는 상황이었다고 가늠된다. 그렇기 때문에 술 취한 모습에도 관대했으며, 한편으로는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그가 그렇게 큰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만큼 부자임을 마음속으로 축하한다47)”고 한 표현에서 느낄 수 있는 바와 같이, 배부르게 쌀밥 먹고 정신을 못 차릴 지경으로 취하게 또 술을 마시는 그런 큰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정도로, 술 취한 자가 부자라는 사실을 누구나 부러워하는 데에서 연유한 게 아니었을까 여겨지기도 한다.


4. 맺음말

지금까지 18 · 19세기 한국에 직접 와서 활동하였던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들의 見聞記를 집중적으로 분석하여 당시 한국의 벼농사 · 쌀 · 쌀밥 그리고 술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거나 혹은 그렇지는 않더라도 한국의 쌀 문화와 관련하여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여러 사실들을 정리하는 것으로써 맺음말을 삼고자 한다.

서양인 선교사들은 당시 한국에서 너른 평야가 아닌 계곡을 활용해서 주로 벼농사를 많이 짓고 있었음을 확연히 지적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러한 선교사들의 상세한 기록들을 통해서 18 · 19세기의 한국에서는 산에서 내려오는 시내를 이용하여 계곡에 땅이 조금이라도 쓸 만하면 벼농사를 지었으며, 그것들은 灌漑가 된 논이라 休耕하지 않고 매년 常耕하는 것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겠다. 그리고 이들의 글을 통해서, 畜力의 활용 문제와 관련하여 쟁기를 활용한 논갈이에 소뿐만 아니라 말도 활용하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발상도 했던 모양인데, 이는 단순히 자신들의 고향에서만의 사실을 떠올려 이런 제안을 한 게 아니라, 밭농사에서 행해지고 있는 馬耕을 논농사에서도 적용해서 벼농사에 원활함을 기하면 좋겠다고 하는 생각을 피력한 것으로 보인다고 하겠다.

한편 당시의 농기구 및 소의 貸與 慣行에 관해서도 논밭갈이 연장을 빌러 오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빌려 주고, 또 흔히는 소까지도 농번기를 제외하고는 꽤 쉽게 빌려 준다는 관행을 전하고 있음이 역시 흥미롭다고 하겠다. 또한 벼농사와 관련하여 강우량과 기후 조건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 역시 적고 있으며, 施肥 방법에 대해서도 관심을 상세히 기울여 牛馬와 같은 가축들의 糞尿가 비료로써 활용되고 있는 모습을 관찰하여 적고 있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迫害를 피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火田을 일구며 살아가는 천주교 교인들의 생활 모습에 대해서도 상세히 적어 두었는데, 담배농사가 주요한 농산물이었으며 조 그리고 대마가 주로 화전에서 재배되었다는 사실 등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한국인의 主食이 쌀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사전에 주식을 쌀로 하는 생활에 익숙해지도록 미리 준비하고 왔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다가 이들은 한국인들에게 있어 쌀이 목숨과 같이 여겨지는 것이라는 점도 잘 알고 있었으며, 당시 春窮期의 실상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한국인 전부가 쌀을 목숨처럼 여겨 쌀을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기울이고 있었기에,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도 역시 그러다 보니 때로는 서양인 선교사에게서 쌀을 얻으려고 이들을 서로 모셔가기 위해 같은 형제끼리 서로 다투곤 하는 일 등도 발생하였던 모양이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목숨을 잇기 위해 쌀을 얻는 데에만 급급했던 사람들의 실생활의 일단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쌀로 지은 쌀밥 역시 이들에게는 깊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므로 당시 한국인의 쌀밥 생활에 관한 이들이 남긴 기록은 매우 상세하다. 특히 많이 먹는 습관이 있었음을 적은 것도 그러하지만, 함께 나눠 먹어야 하는 특식을 만났을 때 대신이건 평민이건 구별이 없이 많이 먹는데 질보다는 양을 중시한다는 사실을 적고 있음도 그렇다. 이러한 당시 한국인들의 폭식에 가까운 식사 습관이 왜 생기게 되었는지에 대한 다블뤼 주교의 분석 역시 대단히 흥미롭다고 하겠다. 찬장이나 식량 창고가 없으므로 요리를 보관할 수 없다고 한 지적은, 그가 당시 한국인의 식생활 습관이 당시 한국의 실내 생활 여건 혹은 건축 구조 특징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또한 기후가 매우 습하기 때문에 음식물이 금방 부패한다고 쓴 것 역시 한국의 기후 특성에 따라 많은 양을 마련한 음식을 바로바로 소비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야기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고 하겠다.

한편 술에 관해서도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들은 사제로서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서는 포도주가 절실하게 필요하였기에 직접 포도주를 만들기에 힘쓰기도 하였지만, 한국인들이 쌀을 발효시켜 능금주나 맥주 같은 술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적어 두고 있다. 또한 그 자신들도 역시 쌀로 만든 술을 마시기도 하였는데, 다블뤼 주교 자신이 “어떤 품질의 술이든지 모두 마신다” 하고 “그저 보통 사람들보다 맹목적으로 막 마셔대는 사람들이 즐겨 들이키는 술이라도 상관없이” 마신 것 역시 당시 한국인들이 늘상 그러하였듯이 쌀밥에 익숙해지고 술도 쌀로 만든 것이라 음식의 하나로 여겼기 때문에 그랬을 것으로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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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샤를르 달레 原著, 안응렬 · 최석우 譯註, 〈머리말〉, 《韓國天主敎會史》 上,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15쪽.

2) 이런 점과 관련하여서는 샤를르 달레, 앞의 책, 〈머리말〉, 17~18쪽에서 “이 책을 쓰는 중에, 흔히는 선교사들의 편지들을 간추리지 않고 전문을 인용하였다. 그 결과로 때로는 길어지기도 하고 반복도 된다. 그러나 이 자그마한 단점은 그 편지들 자체가 가진 흥미로써 상쇄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았다. 그 편지들을 쓴 분들은 대부분 얼마 후에 피로써 신앙을 증명하였는데 교우 독자들은 순교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나 다른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는 것이 기쁠 것이다”고 하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3) 샤를 살몽 지음, 정현명 옮김, 서봉세 신부 · 차기진 감수,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대전가톨릭대학교 출판부 · 천주교 대전교구 갈매못 성지, 2006.

4) 조현범,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5) 샤를르 달레,〈조선의 자연지리〉, 27쪽.

6) 당시 내포 지역을 관할한 것은 다블뤼 주교였으므로, 이 기록도 그렇기 때문에 그의 것이라고 보인다.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下, 1980, 324~325쪽 참조.

7) 그래서 부락의 형성도 자연히 경작지 근처에 조성될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이러한 당시의 모습에 대해서 “이 산 많은 나라에 도로와 운수기관이 없기 때문에 대규모의 경작은 어떤 것도 절대로 할 수가 없다. 각기 자기 집 둘레와 근처에 있는 경작할 뿐이다. 그래서 큰 부락은 드물고 농민들은 집이 서너 채 아니면 고작 여나문 채 있는 작은 마을에 흩어져 산다(샤를르 달레, 〈조선의 자연지리〉, 30쪽)”고 쓰고 있음도 그래서였다고 보인다.

8) 비록 달레가 선교사 누구의 글을 옮겨 놓은 것인지는 밝히고 있지 않아 다소 갑갑하지만, 앞서 인용하였듯이 〈머리말〉에서 “《한국천주교회사》는 선교사들의 편지와 그들이 번역하여 보낸 조선 사람들의 보고들로 꾸며졌다. 다른 자료는 있을 수가 없다”고 단언했던 점을 상기한다면, 이를 신용해서 크게 문제가 될 소지는 없을 듯하다.

9) 샤를르 달레, 〈조선의 자연지리〉, 29쪽.

10) 徐兢, 《高麗圖經》 23 〈種藝〉; 《국역 고려도경》, 민족문화추진회, 1977, 138~139쪽. 이 부분의 원문(같은 책 영인본 부분, 138~139쪽)은 다음이다. “國封地瀕東海 多大山深谷 崎嶇?? 而少平地 故治田 多於山閒 因其高下 耕墾甚力 遠望如梯?然 … 其地宜黃梁黑黍寒粟胡麻二麥 其米有?而無? 粒持[特]大而味甘 牛工農具 大同小異 略而不載.”

이 글에서 가장 주목되는 게 “治田 多於山閒” 부분으로, 앞의 번역에서는 이를 ‘밭들이 산간에 많이 있는데’라고 하였지만, 이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다고 보여진다. ‘治田’은 ‘田地을 만들다’ 그래서 ‘田地를 일군다’는 의미로 보아, 이 부분을 “전지를 만든 게 산간에 많았고”로 새기는 게 옳지 않나 한다. 게다가 그 뒤에 “其高下 耕墾甚力” 부분도 앞의 번역에서와 같이 “그 지형의 높고 낮음에 따랐으므로 갈고 일구기가 매우 힘들며”라고 하기보다는 “그것이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하여 경작하기가 매우 힘들며”라고 푸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 또한 “如梯?然” 부분도 “사다리와 층층계와 같다”고 옮기기보다는 “사다리[梯] 비탈길[?]과 같이 그렇다”고 하는 게 좋지 않나 한다.

11) 李昇漢, 〈高麗時代 農業史 硏究現況 ―休閑法 問題를 中心으로―〉, 《全南史學》 4, 1990, 13쪽에서 이와 관련하여 “산간의 치전은 ‘멀리서 보면 사닥다리나 돌계단 같다’라는 표현으로 보아 旱田이기보다는 水田일 가능성이 많다. 산간치전을 돌계단처럼 했다는 것은 물을 이용하기 위한 치전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산간치전은 수리시설이 충분히 보급되지 않은 당시에 산곡의 물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어 水田의 확대책으로 보편화되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했음이 크게 참조된다.

12) 盧鏞弼, 〈統一新羅…의 벼농사〉, 《震檀學報》 107, 2009 참조.

13) 당시에 이렇듯이 골짜기를 활용하여 논이 많이 조성되어 있었다고 함은 “사냥은 산중에서만 행하여진다. 왜냐하면 골짜기와 들판은 거의 다 논이어서 사냥꾼들을 끌만한 짐승이 도무지 없기 때문이다(샤를르 달레,〈조선인의 성격〉, 231쪽)”이라고 서술하고 있음에서도 여실히 알 수 있다.

14) 샤를르 달레, 〈조선의 자연지리〉, 29~30쪽.
15) 盧鏞弼, 〈한국 농서의 말 활용 농법〉, 《馬事博物館誌 2007》, 2008, 6~10쪽 참조.
16) 샤를르 달레, 〈조선인의 성격〉, 226쪽.

17) 배영동, 〈소의 사육과 농가경제적 효용성〉, 《민속연구》 1, 안동대 민속학연구소, 1991 ; 동개제, 〈소 사육의 관행과 농가경제적 의미〉, 《농경생활의 문화읽기》, 민속원, 2000, 174쪽에 따르면 1930년대에 소 1마리를 빌려서 하루동안 부린 사람은 하루동안 소주인의 집에 가서 일을 해주는 것으로 소의 축력에 대해 보상하였다고 한다.

18) 펠릭스 클레르 리델 원저, 한국교회사연구소 번역위원회 역주, 〈리델이 형 루이에게 보낸 1864년 7월 16일의 일기〉, 《리델문서》 Ⅰ(1857~1875) - 병인양요와 선교사 활동의 좌절 -,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62쪽.

19) 〈리델이 형 루이에게 보낸 1864년 9월 13일의 일기〉, 《리델문서》, 70쪽.
20) 샤를르 달레, 〈조선의 자연지리〉, 30쪽.
21) 盧鏞弼, 〈한국 농서의 말 활용 농법〉, 20~25쪽.
22) 샤를르 달레, 〈조선의 자연지리〉, 30쪽.

23) 李賢惠, 〈한국 古代의 밭농사〉, 《震檀學報》 84, 1997; 《韓國 古代의 생산과 교역》, 一潮閣, 1998, 224쪽.

24) 申虎澈, 〈朝鮮後期 火田의 擴大에 대하여〉, 《歷史學報》 91, 1981 참조.
25) 샤를 살몽 지음, 정현명 옮김, 〈마카오 체류(속)〉, 209쪽.

26) 〈리델이 형 루이에게 보낸 1875년 10월 17일의 일기〉, 《리델문서》, 430~431쪽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서 선박 속에서 쌀밥을 구할 길이 없어 끼니를 거르고 있음을 절박하게 적고 있는 데에서 이와 같은 그의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아침에 우리는 조반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쌀밥을 지을 수가 없다고 알려 왔다. 점심때에도 마찬가지로 허리띠를 졸라매어야만 했고, 저녁에도 저녁밥을 기다렸으나 허사였다. … 쌀밥을 지을 수가 있어서 모두가 그것을 맛있게 먹었다.”

27) 〈리델이 형 루이에게 쓴 1866년 12월의 편지〉, 《리델문서》, 116쪽.

28) 〈리델이 쓴 조선에서의 프랑스인들(1866년) : 병인양요 - 프랑스의 조선 원정 제2차 보고서〉, 《리델문서》, 145쪽.

29) 〈리델이 쓴 조선에서의 프랑스인들(1866년) : 병인양요 - 프랑스의 조선 원정 제2차 보고서〉, 《리델문서》, 148쪽.

30) 〈리델이 쓴 조선에서의 프랑스인들(1866년) : 병인양요 - 프랑스의 조선 원정 제2차 보고서〉, 《리델문서》, 173쪽.

31) 샤를르 달레, 〈조선의 왕실〉, 58쪽.
32) 〈리델이 형 루이에게 쓴 1866년 12월의 편지〉, 《리델문서》, 101쪽.

33) 이러한 이들의 건강상의 차이와 관련해서는 〈다블뤼의 1846년 10월 26일 바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 샤를 살몽 지음, 정현명 옮김, 270쪽에 보면, “저는 아주 건강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교우들을 방문하는 중에도 금육, 금식 등을 지켰습니다. 프랑스에 있었다면 그러지 못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란 고향을 떠나 기후, 풍습 등이 바뀌어도 죽지는 않는군요. 오히려 저는 더 건강하기만 합니다. [페레올] 주교님은 음식에 익숙해지지 못하십니다. 그러나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특별한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제 경우는, 저는 조금은 더 익숙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밥을 먹고, 또 밥을 먹고 또 밥을 먹습니다”라고 쓰고 있음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34) 〈다블뤼 주교의 보고서 ‘조선사 입문을 위한 노트’〉, 《조선의 선교사, 선교사의 조선》, 237~238쪽.

35) 샤를르 달레, 〈조선인의 성격〉, 234쪽에 보면 “노동자 한 사람의 보통 식사 분량은 쌀 약 1리터인데, 그것을 익히면 한 사발이 잔뜩 된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을 배부르게 하기에는 넉넉하지 못하고, 그들 중의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때에는 쉽사리 서너 사람 몫을 먹는다. 어떤 사람들은 아홉이나 열 사람 몫까지 먹어도 아무 탈이 없다고 한다”고 하였는데, 이 달레의 서술은 그 내용이 대단히 유사함으로 볼 때 앞서 인용한 다블뤼 주교의 글을 토대로 정리한 것인 듯싶다.

36) 앞에서 이미 거론한 바 있는 1866년 병인양요 당시 리델의 보호를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엘리사벳이란 본명으로 세례까지 받았던 여자 어린애의 경우 다음의 기록에서 보듯이 한 자리에서 두 사발의 밥을 먹었음이 그 일례라 하겠다. “엘리사벳은 프랑스군 야영지 안에 바다 가까이 있는 내 오두막집에서 15일을 지냈다. 기운을 차리고 많이 먹었다. 어느 날 저녁 쌀밥을 한 사발 가득히 먹은 지 한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방긋하게 열린 문으로 들어다 보니까 3리브로(1,500그램)나 되는 빵을 먹으려고 애썼다. 빵이 너무 커서 입이 빵 끝에 닿지 않으니까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땅에 대고 그 작고 하얀 이빨로 야금야금 갉아먹기 시작했다. 나는 그대로 주고, 조선 사람을 불러 밥 한 사발을 더 주라고 했더니 그 어린것이 다 먹었다” 〈리델이 쓴 조선에서의 프랑스인들(1866년) : 병인양인 - 프랑스의 조선 원정 제2차 보고서〉, 174쪽.

37) 샤를르 달레, 〈첫 受難과 金範禹〉, 329쪽.

38) 《右捕廳謄錄》 辛丑年 4월 25일 ; 《捕盜廳謄錄》 (上), 保景文化社, 1985, 62쪽上 및 샤를르 달레, 《韓國天主敎會史》 下, 1980, 23쪽 참조.

39) 〈리델이 충남 공주 진밭 마을에서 형 루이에게 보낸 1864년 7월 16일 일기〉, 《리델문서》, 65쪽.

40)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에 따르면 Francois-Vincent Raspail(1794~1878)은 프랑스의 유명한 화학자 · 생리학자이자 정치가였다고 하는데, 그는 생물학에서 세포 이론을 세우고 antisepsis, 즉 防腐法 혹은 消毒法을 주창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리델이 ‘엉터리 Raspail’이라고 표기한 것은, 자신이 환자에게 독한 술을 마시게 함으로써 소독시켜 복통을 낫게 하였다는 뜻인 듯하다.

41) 〈프티니콜라 신부가 가네 신부에게 보낸 1865년 3월 17일자 서한〉, 《조선의 선교사, 선교사의 조선》, 240쪽.

42) 〈다블뤼의 1846년 10월 26일 바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270쪽.

43) 〈리델이 쓴 조선에서의 프랑스인들(1866년) : 병인양요 - 프랑스의 조선 원정 제2차 보고서〉, 《리델문서》, 148~149쪽.

44) 〈프티니콜라 신부가 가네 신부에게 보낸 1865년 3월 17일자 서한〉, 《조선의 선교사, 선교사의 조선》, 239~240쪽. 이와 관련된 구절을 옮겨 보이면 다음과 같다.

“음주벽은 정말 수많은 방식으로 나라를 황폐하게 만드는 골칫거리이다. 음주벽이 무수한 사람들을 우둔한 상태로 빠뜨리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 음주벽은 사람들의 건강을 해지며, 그들의 돈지갑과 가족을 파고하여 수천 가지 갈등과 부정한 일의 원인이 된다. 또한 이것을 종종 전 왕국을 굶주리게 만들기도 한다.”

45) 이와 관련하여서는 〈다블뤼 주교의 보고서 ‘조선사 입문을 위한 노트’〉, 《조선의 선교사, 선교사의 조선》, 239쪽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음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영의정이나 임금도 공공연히 폭음을 한다.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바닥에 뒹굴거나 술을 깨기 위해 잠을 잔다. 그래도 아무도 놀라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혼자 쉬도록 내버려둔다. 우리 눈으로 볼 때 이것을 큰 타락이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관습이다. 그래서 허용되며, 아주 고상한 일이 된다. 이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46) 이미 앞서 제시한 바가 있는 다블뤼 주교의 보고서 내용 가운데 “우리 천주교인들 중의 한 사람은 나이가 30세에서 45세가량 되는데, 그는 어떤 내기에서 7인분까지 먹었다. 이것은 그가 마신 먹걸리 사발의 수는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다블뤼 주교의 보고서 ‘조선사 입문을 위한 노트’〉, 《조선의 선교사, 선교사의 조선》, 238쪽)라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에서 밥 몇 인분을 먹었는가를 계산하면서 그가 마신 막걸리 사발의 수는 계산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습관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47) 이런 내용은 샤를르 달레, 〈조선인의 성격〉, 235쪽에서 찾아지는데, 당시 한국인의 음주 습관과 관련된 번역문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하나의 過度는 또 하나의 과도를 빚어내는 것이어서, 과식에는 자연 과음이 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飮酒癖은 이 나라에서 매우 명예로운 일로 되어 있으며, 만약에 누가 정신을 잃도록 술을 마셔도 그를 탓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다. 수령이나 고관이나 대신까지도 식사 끝에 방바닥에 나가 떨어져도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가 조용히 술을 깨게 내버려두며, 會衆은 그런 불쾌한 광경을 보고 상을 찡그리기는커녕 그가 그렇게 큰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만큼 부자임을 마음속으로 축하한다.”

[교회사 연구 제32집, 2009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노용필(전북대 HK 쌀 · 삶 · 문명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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