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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신매매와 노예노동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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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18 ㅣ No.1228

[경향 돋보기 - 더 이상 종이 아니라 형제입니다] 인신매매와 노예노동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어린이 인신매매, ‘콤프라치코스’

「레미제라블」로 유명한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즐거운 시대를 웃으며 산다면 희극이겠지만 잔인한 시대를 웃으며 살아야하니, 그 시대는 영락없는 비극이었다.”라는 멋진 말을 남긴 또 다른 작품이 있는데, 바로 「웃는 남자」라는 소설입니다. 글을 쓸 때,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정확히 묘사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빅토르 위고는 자신의 소설 「웃는 남자」에서도 ‘콤프라치코스’라는 이름의 실존했던 인신매매 집단에 대해 고발하듯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콤프라치코스’는 스페인계 인신매매집단으로 17세기 영국에서 활동하였는데, 당시 이들의 납치 행각으로 런던에서는 2만 건이 넘는 어린이 실종사건이 발생했고, 이렇게 실종된 어린아이들은 거의 되찾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집단은 어린아이들을 납치한 뒤, 칼로 아이들의 얼굴에 심각한 상처를 입히거나 갖가지 물질들을 주사해 얼굴을 흉측하게 만들고, 여러 가지 기구들을 이용하여 아이들의 팔과 다리, 허리 등을 묶거나 고정시켜 인위적으로 기형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왜 이렇게 아이들을 납치까지 해서 기형으로 만들었을까요? 그 목적이 더욱 참혹합니다.

당시 영국은 해상무역이 상당히 발달해 있었는데, 해상무역이 발달하게 된 주요 요인 중 하나가 바로 귀족들의 사치품 수요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해상무역은 유럽 전역에서뿐만 아니라 더 먼 곳에서까지 귀한 사치품을 들여와 귀족들의 허영심을 채워주었고, 이 허영심은 귀족들 서로 간에 경쟁심까지 부추겨서 누가 희귀한 것을 더 많이 소유하고 있는지 비교함으로써 우월감을 만끽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만족할 줄 모르는 그들의 허영심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인간의 도를 넘게 된 것입니다. 희귀한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그들의 욕구가 이제는 기형적으로 생긴 사람들에게 뻗치면서, 누가 더 기형적이고 이상하게 생긴 사람을 소유했느냐 하는 경쟁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귀족들은 마치 애완동물을 데리고 다니듯이 이 기형인간들을 줄에 묶어 데리고 다니며 다른 귀족에게 보여주는 것을 또 하나의 사치이자 특권으로 여겼는데, 자신의 기형인간이 다른 귀족의 소유보다 별로다 싶으면 곧 더욱 기형적인 사람을 소유하고 싶어 했습니다. 당시 귀족들의 이 비뚤어진 허영심과 소유욕이 ‘콤프라치코스’라는 사악한 집단을 탄생하게 만들었고, ‘콤프라치코스’는 이런 귀족들의 소유욕을 채워주며 큰 돈벌이를 하려고 아이들을 납치해 인위적인 기형인간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귀족들의 허영심과 소유욕, 그리고 이를 이용해 큰 이익을 얻고자 했던 집단의 사악한 탐욕 때문에,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던 아이들이 하루아침에 모든 인간적 가치를 상실한 ‘상품’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기형인간이라는 상품으로 말입니다. 얼굴과 몸을 기형으로 만드는 그 참혹한 과정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숨졌다고 합니다.

또 귀족들에게 팔려간 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아이들의 몸이 크게 성장을 해버리면, 귀족들은 희귀한 가치가 떨어졌다며 흥미를 잃고 그 아이들을 다시 ‘콤프라치코스’에게 싼 값에 되팔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콤프라치코스’에게 되돌아온 아이들은 다시 서커스단이나 괴물쇼 같은 곳에 팔려가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다른 사람들의 구경거리와 웃음거리로 살아야 했다고 합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웃는 남자」는 이런 고통을 겪은 한 남자의 삶을 주제로 삼은 것입니다. 어린 시절 ‘콤프라치코스’에게 납치돼 입 양쪽을 강제로 찢기는 고통을 겪었고, 그로 인해 늘 웃고 있는 듯한 기괴한 얼굴을 갖게 된 이 남자의 이야기로부터, 서커스단의 ‘어릿광대’나 배트맨 영화의 악당 ‘조우커’ 같은 캐릭터들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금전적 가치에 종속되고 있는 오늘날의 인간존엄성

자기 소유욕을 충족시키는 데만 혈안이 된 사람들, 그리고 부를 쌓으려고 스스럼없이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 의해 인간존재가 상품이 되어 상상할 수 없는 치욕을 겪으며 그 존엄성을 상실해 가는 이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인간의 본성 안에 깃들어있는 그 탐욕이 정말로 무시무시하게 느껴졌습니다.

특히나 이러한 사건이 17세기에 일어났다는 점이 더더욱 놀라웠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생활하면서 맺는 모든 관계를 금전적 가치로 환원시켜 버리는 오늘날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탐욕적인 기업가들과 그 행태가 꼭 닮아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과 그 사람의 노동력을 모두 상품화하는 것, 그리고 특히 가난한 나라의 노동력을 싼값에 착취하듯 부리는 잘못된 행동을, “이윤 극대화를 통해 경제 성장에 기여한다.”는 구실로 오히려 미덕으로 여기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신봉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비판하는 학자들은 이 체제가 오늘날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아무런 죄의식과 민감한 성찰 없이 금전적 가치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도록 만들고 있으며, 거기에서부터 인간의 가치가 상실되어 가고 있다는 점에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2015년 제48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를 통해 밝히신 ‘인신매매와 노예노동’에 대한 우려도 이와 같은 맥락 안에 있습니다. 교황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유감스럽게도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라는 한층 더 확산된 참상은 존중과 정의와 사랑으로 인간관계를 맺어야 하는 우리의 소명과 친교의 삶에 심각한 해악을 끼칩니다. 이러한 끔찍한 현상은 타인의 기본권 유린과 그들의 자유와 존엄의 말살을 초래하며, 이는 다양한 형태로 드러납니다.”

교황님은 현대의 노예노동 형태가 인간성을 거스르는 범죄라고 하시며, 이러한 노예노동의 원인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하는 이들의 부패”에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람이 아니라 돈이 경제제도의 중심에 있을 때 발생합니다.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어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책임이 있는 인간이 모든 사회제도나 경제제도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물신이 인간의 자리를 대신할 때 가치의 전복이 일어납니다.”


인간존엄성과 교회의 가르침

교황님이 그 중요성을 재차 강조하시며 훼손되는 것을 우려하시는 ‘인간존엄성’의 가치는 우리 가톨릭교회가 사회에 반포하고 있는 회칙들의 그 첫 번째 회칙에서부터 끊임없이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이 ‘인간존엄성’의 가치로부터 가톨릭 사회교리의 다양한 원리와 개념들이 이어져 나오고 있다는 점만 보아도, 우리 가톨릭교회에 ‘인간존엄성’이란 하느님에 대한 ‘신앙’ 다음 자리에 오는 매우 중요한 가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가톨릭교회의 주요 교회문헌들 중, 특별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현대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 ‘기쁨과 희망’에서 언급한 (인신매매와 노예노동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인간존엄성’에 관한 내용들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합니다.

- 인간은 만물에 앞서고, 또 인간의 권리와 의무는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보편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참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에 다가설 수 있어야 한다. 곧 의식주, 생활 신분의 자유로운 선택, 가정 형성, 교육, 노동, (…) 사생활 보호의 권리 그리고 종교 문제에서도 정당한 자유를 누릴 권리가 인간에게 주어져야 한다(26항).

- 사회 질서와 그 발전은 언제나 인간의 행복을 지향하여야 한다. 사물의 안배는 인간 질서에 종속되어야 하며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친히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참조) 하셨을 때에 이를 가리키신 것이다. 사회 질서는 날로 발전하며, 진리에 토대를 두고, 정의 위에 세워져 사랑으로 활력에 넘쳐야 한다. 또한 자유에서는 날로 더욱 인간적인 균형을 잡아야 한다(26항).

- 인간 이하의 생활조건, 불법 감금, 추방, 노예화, 매매춘, 부녀자와 연소자의 인신매매와 같이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 또한 노동자들이 자유와 책임을 지닌 인간이 아니라 이윤 추구의 단순한 도구로 취급당하는 굴욕적인 노동 조건; 이 모든 행위와 이 같은 다른 행위들은 참으로 치욕이다. 이는 인간 문명을 부패시키는 한편, 불의를 당하는 사람보다도 그러한 불의를 자행하는 자들을 더 더럽히며, 창조주의 영예를 극도로 모욕하는 것이다(27항).

- 사립이든 공립이든 모든 인간 단체는 인간의 존엄과 목적에 봉사하며 온갖 사회적 정치적 예속을 거슬러 줄기차게 투쟁하고 모든 정치체제 아래에서 인간의 기본권을 수호하도록 진력하여야 한다(29항).

- 노동의 보수는 각자의 임무와 생산성은 물론 노동조건과 공동선을 고려하여 본인과 그 가족의 물질적 사회적 문화적 정신적 생활을 품위 있게 영위할 수 있도록 제공되어야 한다. 경제활동은 대부분 사람들의 결합 노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어느 노동자에게든 손해가 되도록 경제활동을 조직하고 규제하는 것은 부당하고 비인간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노동자들이 어느 모로 자기 노동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일이 더 자주 일어난다. 이것은 이른바 경제법칙으로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67항).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새로운 노예노동, ‘간접고용 비정규직’ 문제

지난해 말, 찬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오던 서울 광화문 근처 세종대로의 한편, 서울파이낸스센터 앞 인도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씨앤앰’이라는 서울의 한 케이블방송회사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회사가 하청업체 간접고용 형태로 운영되면서, 자신들을 낮은 임금과 열악한 근무환경 아래 두고 착취하듯 부리는 것에 불만이 가득 차 있었고, 더욱이 해마다 하청업체 재계약 시즌이면 찾아오는 비정규직 고용불안에 지칠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씨앤앰’의 대주주였던 한 사모펀드 회사가 ‘씨앤앰’을 매각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109명의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시켰는데, 노동자로서 권리뿐 아니라 인간기본권인 생존권까지 심각하게 침해받은 이 사안에 그들은 결국 거리로 농성을 하러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간접고용 비정규직’이라는 이 심각한 사안이 오직 자신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 현재 한국사회의 힘없는 대다수 노동자들에게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는 문제라고 판단하였습니다. 또한 앞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될 청년들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커다란 위협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간접고용 비정규직’의 문제를 시민들에게 더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에 배수의 진을 치듯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파이낸스센터 옆에 있는 30여 미터 높이의 전광판에 올라 고공농성까지 시도하게 됩니다.

아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 가운데는 작년 12월에 서울대교구 보좌주교이신 유경촌 티모테오 주교님이 사다리차를 타고 그곳 전광판에 올라 농성 중인 노동자들을 만나고 위로와 격려를 해주시는 모습을 TV 뉴스 등을 통해 보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노사 상호 간에 존엄성을 존중해 주며 양질의 일자리를 늘려가는 성숙함이 그 경제제도 안에 깃들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아직 그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우리 사회는 시간이 갈수록 특정 기업인들의 이윤 극대화를 위해 노동자들을 노예처럼 전락시키고 있는데, 이런 모습의 사회와 경제제도라면 거기에는 분명 악한 요소들이 잔뜩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노동자들이 일하는 보람과 퇴근 후 가정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노동형태가 사회에 마련되어야 하는데, 일터에서나 일이 끝난 뒤에나 자유는커녕 쉴 여유도 없는 절박함으로 내몰리는 현재 우리 사회의 노동형태라면 거기에도 분명 악한 요소들이 잔뜩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하는 이들의 부패”가 노예노동의 원인이라 꼬집으신 그 말씀이 우리 사회에 강하게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미성숙하고 야만적이기까지 했던 400여 년 전 영국 귀족들과 ‘콤프라치코스’의 사례에서처럼, 그와 똑같은 사악한 탐욕의 요소들이 오늘날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신봉하는 우리 사회 안에서 ‘간접고용 비정규직’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노예노동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사회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염려하시는 것처럼 인간존엄성의 가치가 전도된 사회로 더 이상은 나아가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 사회 경제체제의 정의와 기능은 결국 그 체제 안에서 인간의 노동이 정당한 보상을 받느냐 하는 데에서 평가된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 모든 경우에 있어서 정당한 임금은 사회 경제체제 전체의 정의를 실증하는 구체적인 수단이며, 또한 어떠한 경우이든 그 체제가 정의롭게 운용되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구체적인 수단이 된다(요한 바오로 2세, 회칙 「노동하는 인간」, 19항 참조).

* 장경민 시메온 - 서울대교구 신부로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5년 3월호, 장경민 시메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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