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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전쟁기 천주교회와 공산 정권: 초대 주한 교황사절 번 주교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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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30 ㅣ No.875

한국 전쟁기 천주교회와 공산 정권 - 초대 주한 교황사절 번 주교(Bishop Byrne)를 중심으로

 

 

국문 초록

 

이 연구는 한국 전쟁기 북한 공산 정권과 천주교회의 문제를 초대 주한 교황사절 번 주교를 중심으로 검토한 글이다. 이를 위해 메리놀 외방선교회와 골롬반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남긴 한국 관련 문서를 활용하여 보다 국제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하였다. 냉전에서 공산 정권은 주요한 저항 세력인 천주교회를 적대 진영으로 간주하여 공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 비오 12세는 1947년 4월 7일자로 번 주교를 교황특사로 한국에 파견하였다. 한국 천주교회와 정치인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에 교황청이 교황사절을 파견한 것은 한국을 독립 국가로 승인한 정의의 결단이라며 환영하였다.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도 미군정과 유엔, 그리고 천주교회의 긴밀한 교류 속에 이루어졌다. 미국의 교회 관련 신문과 잡지에는 대한민국이 천주교회의 축복 속에 탄생하였다는 보도가 잇따랐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무신론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로 규정되었다. 번 주교는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수립된 것을 하느님의 섭리로 이루어진 도덕적 결과물이라고 강조하였고, 국제 사회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적인 국가로 승인되도록 지원하였다. 이승만은 천주교회는 악과의 전투에서 가장 좋은 동맹이라며 번 주교를 치하하였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번 주교는 전혀 대항할 의사가 없다는 뜻으로 주교공관의 모든 문을 열어 둔 상태에서 북한군에게 체포 · 실종되었다. 정전을 눈앞에 두고서야 생환한 포로들을 통해 ‘죽음의 행진’ 끝에 악의적인 학대로 번 주교가 사망한 사실이 알려졌고, 공산주의자에게는 악마와 같은 무리라는 거센 윤리적 지탄이 가해졌다. 결국 한국 전쟁기에 공산 정권이 천주교회에 가한 행위는 반공(反共)을 한층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 머리말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을 비롯한 양측 동맹국 사이에 갈등과 긴장이 이어진 냉전에서 중심부는 전쟁이 ‘인식’이었지만, 주변부인 제3세계에서는 혁명과 폭력의 ‘현실’이었다.1) 한국도 냉전 속에 주변부 국가로서 내전인 동시에 국제전을 3년여 동안 직접 겪어내었다.2) 그런데 냉전에서 빚어진 여러 긴장과 충돌 가운데 종교는 매우 뚜렷하게 두 진영이 대립하는 영역이었다.3) 최근 구미학계에서 냉전의 형성과 발전에 종교, 그 가운데에서도 천주교에 주목한 연구를 발표한 것도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른 것이라 본다. 냉전에 대응한 천주교회의 동향을 분석한 커비(Kirby)는 연구의 목적이 “냉전 논쟁은 종교 문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며, “냉전은 역사상 가장 큰 종교 전쟁으로 신을 숭상하는 것과 신을 믿지 않는 것 사이의 국제 분쟁”이라고 하였다.4) 인보든(Inboden)도, “종교의 기능은 미국이 왜 소련 연방에 적대적인 관계를 취하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원인을 설명해 준다. 또한 반공을 강화시켜주는 기구이기도 하다”며 종교와 냉전과의 연관에 주목하였다. 그는, “냉전은 종교 전쟁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고 단언하였다.5) 켄트(Kent)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 체제 형성과 발전에 교황청의 대외 정책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분석하였다.6) 이러한 연구들은 주로 냉전 속 동유럽 천주교회의 상황과 바티칸의 동향을 검토한 것이지만, 한국 전쟁기 천주교회와 공산 정권의 문제를 이해하는데 매우 긴요하다.

 

하가(Kai Yin Allison Haga)는 냉전을 종교 기능과의 관련 속에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기하며 한국 전쟁과 그리스도교인의 활동을 종교의 성장, 반공의 강화 등과 관련지어 검토하였다. 그는 냉전의 소극장과도 같은 한국 전쟁은 동아시아에서의 마지막 선교지가 사라질 위험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전쟁으로 인한 파괴 속에 전개된 종교인(대개 천주교와 개신교)의 활동이 그리스도교의 성장을 불러왔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을 대상으로 전개된 그리스도교인의 활동, 한국으로부터 전해지는 종교 잡지 · 인쇄물 · 서신 등을 통한 소식, 한국 교회의 상황 등이 반공 정서의 증가와 맞물리면서 미국의 이익에 일정한 의미가 되었다고 하였다.7)

 

이러한 연구에 힘입어 이 글은 한국 전쟁기 교회에 대한 공산 정권의 공격과 그에 대한 천주교회의 동향을 보다 국제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특히 미국 메리놀 외방선교회의 선교사로서 초대 주한 교황사절로 활동한 번 주교8)를 중심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그는 주한 교황사절의 신분으로 한국에서 활동하던 미국 출신의 고위 성직자였지만 북한 공산군에 직접 희생된 인물이다. 이 점에서 번 주교에 관한 분석은 한국 전쟁기 북한 공산 정권이 천주교회에 가한 물리적 폭력이 냉전과 얽혀 일으킨 다양한 파장을 국내외적으로 추적하는 실마리가 되어 줄 것이다.

 

이 작업을 위해 각별히 메리놀 외방선교회와 골롬반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남긴 한국 관련 문서를 적극 활용하였다. 이 자료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의 한국 관련 기록으로 그 유용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글을 통해 해당 문서들을 학계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9)

 

 

2.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대한 번 주교의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 정권은 천주교회에 대한 탄압을 가중해 갔다. 헝가리(1949년), 루마니아(1947년), 불가리아(1946년), 폴란드(1947년), 체코슬로바키아(1948년), 알바니아(1946년) 그리고 유고슬라비아(1945년) 등 여러 동유럽 국가들에 친소 공산 정권이 들어섰고 교회는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천주교회는 교황 비오 12세를 중심으로 공개적으로 반(反)공산주의를 외쳤고, 소련은 천주교회를 미국과 함께 묶어 냉전의 적대 진영으로 보았다. 교황청과 서방 세계와의 관계는 강화되어 이탈리아 · 독일 · 프랑스 · 스페인 등에서 천주교회는 주요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소련이 유독 천주교회를 박해한 까닭은 동유럽에서 천주교회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당과 국가에 대한 거의 유일하고 중요한 저항 세력 내지 반대 세력이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천주교회가 외국과 연결되어 있는 점에 대해 ‘망상 편집’이라고 할 정도로 무척 경계했다. 소련은 천주교회에 로마와의 연결을 끊으라고 종용하였으며, 주교와 사제들이 이를 거부하면 투옥시키고, 악명으로 유명한 죄수 수용소로 보내기까지 하였다. 때로는 군인을 동원해 공격하거나 비밀경찰을 통해 살상하기도 하였다. 공산 정권이 천주교회를 특히 공격한 까닭은 그 조직력과 국제적 연결망을 매우 경계하였기 때문이었다.10) 이러한 사정은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 공산당은 새로운 종교 정책을 수립하면서 그리스도교(천주교와 개신교)에 서방 국가와의 관계를 청산할 것을 종용하였다. 1951년에는 천주교에 대해 중국인 사제가 부족한 경우에만 부득이하게 일정 기간 안에서 외국인 사제를 쓴다는 것, 어떤 외국에서건 기부금을 받지 않을 것 등을 공식화하였다.11) 북한에서도 천주교를 비롯한 종교에 대한 억압은 심화되고 있었다. 북한 정권은 서구와 단일한 조직망으로 연결된 천주교를 제1의 정치적 ‘불신분자’로 탄압하였다.12)

 

하지만 남한의 사정은 달랐다. 번 주교는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1947년 4월 7일 주한 교황특사로 파견되었다. 한국 천주교회는 교황사절 파견이 국제관례상 교황청이 남한을 주권국가로 승인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환영하였다. 장면(張勉) 역시 《경향신문》(1947. 10. 12)에 기고문을 통해 교황사절 파견은 교황청이 조선을 독립 국가로 승인해 준 정의의 결단이며, 조선의 국제적 지위를 크게 향상시켜 준 것이라고 평가하였다.13) 정부 수립을 위한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는 미군정과 유엔, 그리고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천주교회의 긴밀한 교류 속에 진행되었다. 교황 비오 12세는 제3차 유엔 총회에 대한민국 대표단을 지원할 것을 여러 교황대사에게 명하는 등 외교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14) 선거에 앞서 하지 장군은 번 주교에게 교회 입장에서 선거일이 일요일이어도 괜찮은지를 물었으며, 노기남 주교를 비롯해 천주교회는 ‘성전’(聖戰, holy war)이므로 동의한다고 하였다.15)

 

마침내 미군정 법령으로 국회의원선거법이 공포되어 5월 10일 선거가 치러졌으며, 선거 결과에 따라 1948년 5월 31일에 제헌국회가 열렸다. 임병직 외무장관은 성명을 통해 “로마 교황청이 우리 정부를 승인한 것은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승인한 것”이라고 발표하며 천주교회의 역할에 감사를 표했다.16) 교황청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환영한다고 발표하였으며, “소련 무신론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항한 2년여의 항쟁 끝에 천주교회의 축복과 축하와 더불어 신생 대한민국이 이번 주에 탄생하였다”고 하였다. 교황 비오 12세는 북쪽 지역을 러시아가 장악하였지만, 독립과 자치 정부가 남쪽에 탄생하였다며 번 주교에게 개인적 메시지를 보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축복하였다. 이어 1949년 4월 17일 대한민국을 정식 승인하고, 교황특사인 번 주교를 최초 주한 교황대사로 격상 · 임명하였다.17)

 

남한 정부 수립에 대해 천주교회는 <교황이 대한민국을 환영하다>, <최고의 선교국가가 UN의 도움을 받다>는 제목으로 보도하면서, 소련 무신론 공산주의와의 투쟁 끝에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를 천주교회가 축하하였다고 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국내만이 아니라 서구에도 소련 무신론 공산주의와의 싸움에서의 승리로 규정되었다. 미국의 교회 관련 신문과 잡지에는 신생 대한민국이 천주교회의 축복 속에 탄생하였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북쪽은 러시아가 장악하고 있지만, 남쪽은 이제 독립과 ‘자치 정부’를 갖게 되었다고 논평하였다. 이승만 대통령 취임식에 주 연설자로 초대된 번 주교는, 대한민국 정부가 가장 건전하고 영속적인 민주주의 정부 형태로 세워진 것은 하느님의 섭리 아래 이루어진 도덕적 결과물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는 한국이 주권국가로 수립된 것은 성령이 유엔을 통해 이끌어준 결과라고 축하하였다.18)

 

전후 일본에서 군정의 총사령관이던 맥아더 장군도 도쿄로부터 건너와, “한국을 나눈 ‘인위적인 장벽’은 현대사에 가장 최악의 비극의 하나이다. 이 장벽은 반드시, 그리고 언젠가는 무너질 것이다. 자유국가의 자유민으로서 당신 국가[한국] 사람의 절대적인 연합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며, 언젠가 자유국가 주도 아래 분단의 장벽이 무너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19)

 

이와 같이 천주교는 한미 관계는 물론 남한 체제의 안정 · 강화에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번 주교는 그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위해서도 발 벗고 나섰다. 제헌국회의 개회를 하루 앞두고 번 주교는 당시 캐나다 외무장관 루이 스티븐 생 로랑(Louis Stephen St. Laurent)에게 대한민국 승인에 관한 장문의 서신을 보냈다.20) 여기에서 번 주교는 대한민국 교황사절로서 “다가오는 유엔 총회에서 이 정부는 전적으로 ‘국가로’ 인정될 것”이라 호소하며 몇 가지를 각별히 강조 · 설명하였다. 첫째, 5월 10일의 선거는 강요나 어떤 소란도 없이 전적으로 한국인의 ‘자유’에 기초하여 성공적으로 치러졌다고 밝혔다. 둘째, ‘자유’에 기초한 선거였음은 현재 한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분명하게 지켜보고 깨달은 사실이며, 이 선거의 성공은 전 세계적으로 분명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였다. 셋째, 90% 이상의 사람들이 투표에 참여하였으며,21) “유엔 임시위원단은 단지 지켜보기만” 하였을 뿐이라고 못박았다. 넷째, 모든 국회의원은 취임 선서를 했으며, 이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국회를 갖게 된 역사적 순간이라고 하였다.

 

번 주교는 서신 서두를 “그리스도인으로서 한국에서의 최근 일에 대해 그리스도 선교사의 관점에서 관심이 있으리라 믿는다”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인이 한국의 일과 무관할 수 없다는 전제는 냉전에 그리스도교가 긴밀하게 얽혀있음을 의미한다. 번 주교는, “한국이 무너지면 유엔도 흔들리고 미국 뉴욕의 아름다운 건물들은 무덤이 될 것”이라 하며, 냉전의 최전방인 한국을 지키는 일은 서방 세계의 생존을 위한 일임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한국은 다른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가족들과 함께하기를 원한다”며 신생 대한민국을 ‘국가’로 지지해 줄 것을 적극 호소하였다.22)

 

다시 말하면 냉전 속에 천주교회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지지는 이념적으로는 물론 현실적으로도 공산주의를 약화시키려는 노력이었다.23) 번 주교는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적인 ‘국가’로서 국제 사회의 승인을 얻어낼 수 있도록 외교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과 동시에 강력하게 반공을 외쳤다. 메리놀회 캐롤 몬시뇰이 총장 신부에게 보낸 보고서를 보면, “번 주교는 한국에 온 이래 계속해서 공산주의를 호되게 비판했기 때문에, 빨갱이들이 그를 매우 힘들게 할 것 같아 걱정입니다”는 우려를 전할 정도였다.24) 번 주교는 북한을 “제1의 적”이라 규정하였고,25) 이승만은 “범세계적으로 악과 투쟁하는 전투에 천주교회는 가장 좋은 동맹”, “공산주의와 싸우는 이 나라의 큰 우방”이라면서 번 주교에 대한 공식적인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승만은 번 주교를 외교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며, 자신의 매우 좋은 친구라며 호의를 표하였다.26) 결국 번 주교를 비롯해 캐롤 몬시뇰 등 반공을 외치던 영향력 있는 미국 출신 천주교 성직자들은 공산주의를 공격하는 천주교회의 선봉에 서 있던 셈이었다.

 

 

3. 번 주교의 ‘죽음의 행진’과 종교 활동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을 기해 전면적으로 북한군이 밀고 내려와 이미 서울과 춘천 등은 전쟁터가 되었지만, 성직자들은 대개 사목활동을 계속하였다.27) 7월에 접어들면서부터 공산군은 본격적으로 성직자를 체포 · 살해하였다.28) 남하할 때부터 북한군은 이미 캐롤 몬시뇰29) 등 고위 천주교 성직자의 사진을 지니고 찾아다녔다. 번 주교는 모든 외국인 사제에게 서울에서 철수하고 체포되는 것을 피해 남하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주교 자신은, “만일 목자가 도망간다면 양들은 쉽게 흩어질 것이다”고 하며 잔류를 택하였다.30) 부드 신부 증언에 따르면, 번 주교는 북한군이 밀고 내려왔지만 서울을 떠날 것을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갈곳 없는 한국인 그리스도인들과 성직자들을 영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머무르기로 하였다.31)

 

번 주교의 결정에 대해 메리놀회의 캐롤 몬시뇰은 총장 신부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번 주교님과 부드 신부는 서울에 남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번 주교님은 노기남 주교가 지금 로마에 있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가 한국인 성직자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여 교황사절로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32)

 

번 주교가 한국을 떠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노기남 주교가 마침 한국에 없는 상황을 크게 고려해서였다.33) 공산군에 대항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공관의 모든 문을 열어 두었지만, 공산군은 7월 11일 번 주교와 비서 신부인 부드 신부를 체포하였다.34) 남하한 공산군은 성직자들에 대한 체포와 연행을 시작으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진행하였다.35) 그들은 한밤중에 사제관에 난입하거나36) 미사 도중에까지 교회를 공격하였다.

 

7월 2일 미사 드리고 있을 때 공산군이 와서 유리창을 부수고 성모상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다 파괴하였다. …우리는 트럭에 태워졌는데, 경호인이 우리에게 총을 겨누었고 우리는 이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였다. 우리 둘은 감옥으로 옮겨져 각각 독방에 갇혔다. 크로스비 신부의 소리도 들렸다. 거기서 우리는 7월 16일까지 있었다. …7월 16일 밤 우리는 기차에 태워져 서울로 후송되었다. 우리는 시내 큰 건물의 커다란 방에 인도되었는데, 그곳에는 전날 붙잡혀 온 교황사절 번 주교님과 그의 비서 부드 신부, 파리 외방 전교회의 프랑스 신부들, 5명의 가르멜 수녀회 수녀들, 샬트르 수녀원의 수녀 2명, 소수의 외국 시민, 약 200명의 한국인이 있었다.37)

 

공산군은 번 주교를 비롯해 민간인을 체포, 감금해 놓고 심문에 들어갔다. 그 와중에 포로가 실수하면 바로 사살하기도 하였으며, 이틀에 한 번 주먹밥과 물을 지급최하고, 아침에 한 번 화장실 사용을 허락하는 정도였다. 심문 과정에서 공산군은 번 주교에 대한 극도의 적개심을 드러내었다.38)

 

빨갱이들은 숙소를 무력으로 밀고 들어와 번 주교를 체포하였다. 그들은 번 주교를 체포하면서, “우리가 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너를 죽일 것이다!”고 하였다. 서울에 체포되어 있는 동안 번 주교는 맨바닥에서 잠을 자야 했으며 영양실조로 매우 허약해졌다.39)

 

공산군은 약식으로 인민재판을 열어 번 주교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번 주교가 자신은 미국인으로서가 아니라, 교황을 대신하여 선교사로서 종교를 전파하러 왔다고 하였지만, 공산당들은 “미국인을 죽여라!”고 소리를 지르며 핍박하였다.40) 서울에 집결된 외국인 성직자와 수도자를 포함한 민간인 포로들은 곧 북으로 압송되었다. 이들은 1950년 7월 19일에서 9월 5일까지 평양에 수감되어 조사를 받았다. 9월에 맥아더 장군이 북진해 옴에 따라 평양에서 떠나 주로 밤을 이용하여 압록강을 향해 북쪽으로 이동하였다.41) 1950년 9월부터 1951년 1월까지 평양-만포-중강진에 이르는 160여 km에 달하는 길을 걸어서 행군하면서 지속된 이 이동을 ‘죽음의 행진’(Death March, March Till They Die)이라고 부른다. 번 주교, 퀸란 주교 등 고위 성직자를 비롯해 고령에 접어든 수도자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 과정에 번 주교는 교황사절(외교관 신분)로 특별 대우를 거부하고 다른 포로들과 함께 이동하였다.42)

 

이 죽음의 행진을 지휘한 북한군 책임자는 포로들이 ‘호랑이’로 부른 사람이었다. 호랑이는 미국에 대한 극도의 적개심을 드러내며 포로들이 감당하기 힘든 일정으로 행진을 강행하였고, 낙오자에게는 가차 없이 굴었다.

 

이제 북한은 상황이 바뀌어 후퇴하고 비참한 패배의 고통에 처했다. 호랑이는 절대 미국인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는 거의 광분한 지경으로 미쳤으며 우리에게 그의 극심한 화풀이를 할 준비를 하였다.43)

 

더욱이나 번 주교는 남한에서 정치적으로 의미가 큰 인물이었으며, 반공을 외치던 미국인 천주교 사제였다. 번 주교의 비중과 상징성 때문에 공산 정권은 죽음의 행진에서도 그를 가혹하게 몰아댔다. 호랑이는 맨발과 여름옷이다시피 한 차림의 포로들로 하여금 혹한의 날씨를 무릅쓰고 걸어서 행진하게 하였다. 포로들의 신발은 체포 직후 이미 빼앗겼고 거의 담요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환자가 발생했지만 강제로 아침마다 속옷 차림으로 체조를 시키고 밤에는 강변에서 야외 취침을 하게 하였다. 누군가 대열에서 낙오되면 대개 사살하였고, 시신은 그냥 눈 더미에 던져졌다.44)

 

끊임없이 공산주의 사상 교육이 이어지고, 폭력의 위험에 처했지만 신부들은 사제로서의 종교적 활동을 펴나갔다. 죽음의 행진 도중에 번 주교는 공산당 간수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700여 명의 포로들에게 일괄 사죄(general absolution)를 베풀었다. 죽음의 행진을 함께 겪은 골롬반회의 오코너 신부는 번 주교의 굳은 의지가 모두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하였다.45)

 

그는 번 주교를 비롯해 17명의 선교사가 전쟁 포로들에게 기도, 사죄경 등의 종교 활동을 전개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오코너 신부는 공산주의자들이 천주교 선교사들을 체포하면서도 사제들이 전쟁 포로들에게 얼마나 영적인 위로를 가져다줄지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였다.46)

 

부드 신부의 수기인 <빨갱이가 감옥에서 사제를 구타하다>에 따르면, 포로로 억류된 기간 내내 부드 신부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었다. 고해성사를 베풀거나 숨을 거둔 군인에게 ‘영적인 위로’를 하였다.47) 만포의 수용소에 머물 때 부드 신부는 한국인 신자들에게 비밀리에 성사를 베풀기도 했다. 12년 전에 견진성사를 받았다는 이 요한이라는 청년이 수용소로 부드 신부를 찾아왔다. 공산군은 모욕적인 상황에 처한 외국인을 북한 인민들이 직접 보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면담을 허락하였다. 이 요한은 사제와 교리 교사가 단 한 명도 없어 몰래 자신의 집에서 천주교인들이 모임을 갖는다고 하였다. 이 요한은 자신들에게 사제로서 사죄경을 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고, 부드 신부는 간수들의 눈을 피해 이를 행하였다.48)

 

그러나 이러한 종교 활동이 목격되면 공산군은 성직자를 집단적으로 구타하거나 굶기는 등 처벌을 가하였다. 공산군은 종교 활동을 금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교에 대해 강한 적대 감정을 노출하였다. 공산군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상대로 종교의 유해성을 강조하며 자주 심문과 교화 교육을 병행하였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포로로 억류된 기간에도 종교 활동을 감행하며 종교인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였고, 이는 공산당으로부터 폭행을 당하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49)

 

 

4. 번 주교 실종과 송환 교섭의 난항

 

1951년 7월부터 유엔군과 공산군은 휴전을 위한 교섭을 진행하였지만, 포로 교환 문제는 1951년 7월 10일 이래 휴회와 속개를 거듭하며 난항을 겪었다. 그 까닭은 물론 ‘반공 포로’ 때문이었다.50) 그런데 북한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포함한 민간인 포로의 석방에 대해서는 협상조차 거부하였다.

 

남한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제는 대략 한국인 150명, 외국인 41명(골롬반회 사제 22, 파리 외방전교회 사제 13, 메리놀회 사제 6)입니다. 북한 공산당에게 억류된 사제 가운데 한국인이건 외국인이건 풀려난 사람은 없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한국 천주교 신자는 대략 200,000명이었습니다. 전쟁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죽음을 당하였는가는 헤아리는 일조차 불가능합니다.51)

 

북한 공산군에게 억류된 사제가 정확히 몇 명인지, 어디에 있는지조차 파악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저 일부가 북한 지역 포로수용소 어디인가에 수감되어 있을 뿐으로 짐작할 정도였다.

 

공산당은 남한에서 그들이 발견한 모든 서양인을 체포하였습니다. 천주교 선교사 31명과 비 천주교 외국인 선교사 10명을 포함하여 모두 70명이었습니다. 이 모든 죄수들은 분명히 북한 비밀경찰에 의해 구금되어 있습니다. …더 많은 외국인 죄수들이 10월 초에 평양에서 북으로 보내졌습니다. 이들 가운데 분명히 16개월 동안 평양에 수감되어 있던 원산 베네딕도회 소속원들이 있습니다. 아직 북한 정부는 포로에 관한 국제 협약을 준수하지 않고 있습니다.52)

 

판문점 휴전위원회 회담에서 유엔은 전쟁 중에 실종된 프랑스 신부 12명, 독일 베네딕도회 수도자 8명, 아일랜드 골롬반회 신부 7명(아일랜드인 5명, 미국인 2명), 미국 메리놀회 신부 1명, 벨기에 수녀 2명, 프랑스 수녀 1명과 번 주교, 브렌난 몬시뇰 등에 대한 정보를 공식적으로 요청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위에 보인 것처럼 포로에 관한 국제 협약을 준수하지 않은 채 성직자의 체포에 대해 부정으로 일관하였다.

 

천주교회 측은 메리놀회의 캐롤 몬시뇰을 중심으로 실종 성직자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전개하였다. 국제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된 맥아더는 한반도 정세를 전환하기 위해 인천상륙작전이 필요하다는 점을 본국에 설득하여 7월 25일 미국 합참을 통해 승인을 받았다. 마침내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였고, 북진을 계속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10월 25일 캐롤 신부와 클리어리(Cleary, Patrick H.) 신부는 노기남 주교에게 번 주교와 부드 신부를 찾기 위해 북으로 가는 문제를 논의하였고, 미군의 허락도 얻어냈다.53)

 

미8군 소속 군종 신부로 두 신부 일행은 국군 및 유엔군과 함께 10월 28일 오전 7시에 서울을 떠나 오후 4시 30분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캐롤 몬시뇰과 클리어리 신부는 한 달 열흘 정도 북에 머물며 군 당국에서 허가하는 범위 안에서 평안도 서포, 영유 지역 등을 다니며 실종 상태인 번 주교와 부드 신부의 행방을 수소문하였다. 10월 30일에 평양에서 캐롤 몬시뇰은 홍용호54) 주교를 비롯해 체포된 모든 신부의 소식을 전혀 모르며, 죽임을 당했으리라 우려된다고 보고하였다. 황해도에서 전덕균55) 신부를 교수형에 처한 사실도 전하였다. 북한에서 활동하던 UPI통신 특파원 베니호프56)에게도 번 주교를 비롯해 피랍된 사람에 대해 문의했지만, 그도 전혀 정보가 없었다. 진남포(鎭南浦)를 거쳐 평양 기림리(箕林里) 근처 대성산에 이르러 클리어리 신부 일행은 번 주교가 머물던 학교 건물을 발견하였지만, 일행은 이미 떠난 뒤였다.57) 그 밖에 여러 명의 수녀가 공산당에게 맞아 사망하였다는 소식 등을 전하며, 번 주교와 다른 사람들이 평양에 머물었던 것을 확인했지만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58) 남한에서는 공산 정권이 전쟁 포로와 일반인에 관한 협의 조항을 어기는 것을 비난하며 실종된 성직자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을 것을 우려하였다.59)

 

한국, 개성, 7월 20일 - 이곳에 정전 협상을 위해 북한에서 온 공산당 특파원은 북한에 수감된 사제, 수사, 그리고 수녀님들에 관한 정보를 줄 수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약 130명의 사제, 수녀, 그리고 수사님들이 공산당에게 잡혀 실종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평민복을 한 공산당 남자가 박양 하사(공산군 하사)에게 말하기를, “그들은 그들 자신의 자유의지로 북에 간 것이라고 그에게 말하라”고 하며 웃었습니다. 다른 특파원인 김 씨에게도 실종된 선교사에 관하여 물었습니다. 그는 다른 날에 영어를 하였었는데도 불구하고, 제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고집하였습니다. 다른 북측 특파원들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고 답변하였습니다.60)

 

남일 대장(공산당 측 협상 대표)은 “귀 군에 의해 체포된 선교사와 다른 종교적 활동가들에 관한 정보”에 대한 요구에 답변하지 않았습니다.61)

 

북한 측으로부터 정보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특파원이나 언론인 등으로부터 실종 성직자들이 북경이나 만주로 이송된 것이 아니라, 아직 북한 지역에 억류되어 있거나 살아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62) 남일 대장이 1951년 8월 2일에 적당한 기관에 조회하겠노라고 답장하였지만, 그해가 다 가도록 아무런 연락조차 없는 실정이었다.63) UPI통신과 THE KOREA TIMES를 비롯한 국내외 언론에서도 번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와 외국 시민권자의 실종 소식이 보도되었고, 메리놀회 본부도 미국 각계 인사에게 그들의 행방에 관한 소식을 조회하는 등의 노력을 펴나갔다.64) 북한의 미온적인 태도 속에 북한 공산당이 체포한 종교 인사들 문제를 의논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갔다.65)

 

한편 1950년 10월 20일에 탈출한 미군 알렉산더 마카루니는 1952년 인터뷰에서 1950년 초 가을에 마지막으로 목격하였지만, 실종된 5명의 골롬반회 사제들과 번 주교 등이 아직 살아있을 것이라고 하였다.66) 확실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판문점에서 가진 휴전위원회에서 유엔은 외국인 54명 가운데 천주교 선교사 31명67)에 대해 북한 측에 공식적 설명을 요구하였지만, 북측은 답변하지 않았다.

 

1952년에 들어와 연합군 최고사령부(ASH)는 공산주의자가 48명의 시민을 억류했음을 인정했다고 발표하였다. 그런데 북한과 연합군의 명단은 서로 차이가 있었으며, 명단에 없는 사람들은 ‘프랑스, 아일랜드, 벨기에 등에서 온 22명의 천주교 선교사, 4명의 개신교 선교사, 1명의 프랑스 외교관 등이 있다. 프랑스 신부 12명, 독일 베네딕도회 수도자 8명, 골롬반 신부 7명(아일랜드인 5명, 미국인 2명), 미국 메리놀회 신부 1명, 벨기에 수녀 2명, 프랑스 수녀 1명’ 등 대개 천주교 선교사 등이라고 발표하였다.68)

 

미국 천주교회 측에서는 교회 자체는 물론 이승만 대통령의 고문으로 당시 워싱턴에 거주하고 있던 올리버(Oliver, Robert. T.), 주한 정치 고문이었던 랭던(Langdon, William R.), 실종된 다른 종교인의 가족 등과 접촉하며 여러 방면으로 번 주교 생사를 수소문하였다.69) 다른 한편으로는 번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의 억류를 끝내 부정하는 북한 정권의 비도덕성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높아갔다.

 

공산주의자들이 포로 명단을 공개하였지만, 거기에 번 주교 이름은 없었다. 다른 천주교 선교사들 역시 명단에 없었으며, 아무런 소식도 알 수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만일 이 실종 선교사들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면, 이 정의에 위배되는 일에 대해 반드시 답해야 한다.70)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가 될 때, 전투 중 무장한 군인과 비무장 일반인의 경우는 당연히 다르다. 전쟁과 그에 따른 인간의 죽음은 그 자체가 물론 비극이지만 무장 군인에 의한 비무장 일반인의 죽음은 매우 부당한 사건이 된다. 특별히 그 피해자가 성직자인 경우 그 가해자는 더욱 부당한 행위자라는 비난이 쏟아지기 마련이다.

 

성직자를 비롯한 일반인의 실종과 죽음 의혹을 놓고 북한에 지탄이 쏟아지는 가운데 소련이 중재에 나섰다. 워싱턴발 UP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1953년 4월에 미 국무부는 번 주교를 비롯해 13명의 실종 미국인 석방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발표하였다.71) 곧이어 1953년 4월 10일자로 미국 국방부는 1950년 6월 한국 전쟁 발발 이후 북한 공산 정권에 억류된 13명의 미국인 송환을 위해 소련이 중재에 나설 것에 동의하였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흐루쇼프가 들어서면서 소련이 개입하고 나서자 포로 송환 문제는 진전을 보기 시작하였다. 소련은 북한 공산 정권에 억류되었던 몇 명의 영국인, 프랑스인 석방도 도운 것에 이어 미국인 석방도 적극 중재할 것임을 발표하였다. 미국 공사대리 빔(Beam, Jacob D.)72), 신임 소련 주재 미국대사 볼른(Bohlen, Charles E.)73) 등이 나서 모스크바에서 체결된 협정에서 소련은 이들이 풀려날 수 있도록 중재에 나설 것에 동의하였다.

 

소련이 적극 개입하고 나선 뒤에야 북한은 단지 7명의 미국인을 포로로 잡고 있다고 시인하였으며, 나머지 6명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북한이 억류한 것을 인정한 사람은 부드 신부, 4명의 감리교 선교사, 1명의 전 국무부 직원이었다.74) 그러나 번 주교를 비롯해 6명은 빠져 있었다. 소련이 북한에 억류된 13명 미국인의 석방을 돕기로 하였다는 소식이 계속 보도되는 가운데,75) 마침내 북한은 부드 신부의 석방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번 주교와 다른 두 명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하였다.76) 1953년 4월 18일자로 ‘빨갱이’가 7명의 미국인을 석방했다는 보도가 나왔고,77) 비로소 부드 신부는 풀려났다. 부드 신부는 인터뷰, 수기 등을 통해 번 주교의 사망 소식을 전 세계에 알렸다.78) 조심스럽게 번 주교의 죽음을 추정하던 천주교회 측에서도 번 주교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79)

 

 

5. 번 주교의 죽음과 반공(反共)

 

죽음의 행진에 대해서는 뒷날 생환한 사람들의 인터뷰, 수기 등을 비롯한 여러 기록이 발표되었다. 그 가운데 특히 번 주교의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기록이 쏟아져 나왔다. 거기에는 대개 죽음의 행진 도중에 고의적으로 번 주교를 죽음으로 몰고 간 과정이 기록되어 있었다.

 

여름옷 차림으로 체포된 번 주교는 이미 오래 감기를 앓아왔다. 죽음의 행진 도중에 점점 악화되어 폐렴으로 진전되었다. 그런데 ‘호랑이’는 매일 아침 웃옷을 벗고 야외에서 아침 체조를 하게 하였다. 번 주교는 폐렴이 심해 고열에 시달렸지만 거의 무너진 건물로 옮겨졌을 뿐이었다. 결국 차가운 바닥에 그대로 방치된 채 번 주교는 숨을 거두었다(1950년 11월 25일, 62세).80) 그 과정에 함께했던 감리교 선교사이며 간호사였던 스미스 양은 번 주교가 물이나 음식조차 없이 차가운 바닥에서 그냥 지내야 했다면서, 긴 행진 끝에 감기가 걸렸지만 그래도 병세에 따라 치료를 받았더라면 회복되었을 것이라고 증언하였다.81)

 

서방의 천주교회와 관료, 언론 등을 비롯해 교황청에서는 번 주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공산주의자에게 물으며 크게 비난하였고, 지면에는 연일 번 주교를 ‘빨갱이의 희생자’로 애도하며, 악의적인 빨갱이의 가혹행위로 번 주교가 사망에 이르렀다는 보도가 쏟아져 나왔다. 특히 수용소에서의 공포와 학대, 각종 가혹 행위 등을 비난하며 죽음의 행진을 지휘한 ‘호랑이’에게 책임을 물었다. ‘호랑이’는 서양인 포로들을 위협하였으며, 그에게 번 주교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몇 가지 예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죽음의 행진에서 살아 돌아온 부드 신부, 퀸란 주교 등은 북한 공산군에게 포로로 잡혀있던 기간의 수기를 언론에 기고하였다.83) 피해 당사자를 통해 공산 정권이 천주교회와 성직자에게 가한 폭력이 알려지게 되었고, 공산 정권에 대한 비난이 쏟아져 나왔다. 프랑스 파리에서도 <한국에서 프랑스 사제가 13명 중의 1명만 생존하다>는 제목으로 한밤중에 프랑스 사제들이 공산군에 의해 심지어 파자마 차림이나 목욕 가운을 입은 채로 체포되어 살해되거나 죽음의 행진을 강요당했다는 보도가 잇따랐다.84)

 

공산 정권이 전쟁의 수행과 관련 없는 성직자를 처형하거나, 극한적 상황에서 포로로 끌고 다니며 죽음에 이르게 한 행위는 반공 강화로 이어졌다. 이와 관련하여 조금 장황하지만 다음 기록을 보도록 하자.

 

이 공산주의자들은 사람이 아니라 악마입니다. 그들은 극악무도한 일을 자행하였습니다. 경상북도의 안동에서는 공산주의자가 감실의 문을 떼어 버리고, 제대 뒤의 벽에 과녁을 그려놓고 사격연습장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든 제의 · 성화 · 제구 · 십자가상 등을 한데 모아서 태워버렸습니다. 대전에서는 많은 사람이 감옥에서 살해되었으며,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서는 교회에서 훔친 제의를 찢어 만든 끈으로 많은 수사가 두 손을 묶였습니다. 프랑스 사제 카다스 신부의 시신이 발견되고 확인되었습니다. 성 골롬반 선교회의 아일랜드 신부인 콜리어의 시신은 춘천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번 주교 이외에도 실종된 사람이 춘천의 퀸란 주교, 3명의 아일랜드 신부와 1명의 오스트레일리아 신부, 몬시뇰 브렌난과 2명의 사제인데 그 가운데 1명은 미국 신부인 부드 신부입니다. 11명의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2명의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과 5명의 가르멜 수도회의 수녀들(4명이 프랑스인, 3명이 벨기에인), 홍용호 주교와 15명의 사제들, 그리고 서울교구의 한 부분인 황해도에서는 몇 명이 실종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많은 전교회장과 평신도 지도자들이 실종되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교회와 성직자를 극도로 미워하는 사람들입니다. 프로테스탄트도 우리가 당한 것과 같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모든 종교인은 한결같이 그들을 싫어합니다. 강계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은 감실에서 성체를 꺼내 치켜 올려 들면서 이를 조롱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와서 보라! 여기에 ‘위격’(位格)이란 없다. 그것은 단지 사제들이 사람들을 속인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체를 가져다가 짓밟고 모독했습니다.85)

 

종교인에게 폭력을 자행한 공산주의자는 악마였으며 공산 정권은 악한 정권으로 이야기되었다. 해방 정국 이래 천주교회는 공산주의를 공격하였지만, 종교적 열정에 기초한 이론적 · 종교적 비판의 반공이었다.86) 그러나 한국 전쟁을 거치며 공산주의는 이론적이나 논리적으로 시비를 가려내 비판하는 대상이 아니라 악으로 귀결되었다. 공산주의자는 모든 종교인을 증오하여 물리적 공격을 가하는 악한 존재였다. 《경향잡지》에서는 정전 뒤 간행을 재개하면서 <六 · 二五동란 후 인사의 말씀>이라는 논설에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공산군에게 잡혀가신 주교와 신부님들! 그들의 악마 같은 총 끝에 쓰러지기도 하고, 무진한 고난을 당한 후 병사하여 어딘지 알 수도 없는 땅속에 이미 외로운 백골로 묻혀있기도 하고, 지금까지 생사불명 그대로 어두움 속에 사라져버린 주교와 신부님들!87)

 

공산주의자에게는 성직자에 대한 폭력을 자행한 것에 대한 윤리적 비난이 가해졌다. 그들은 전쟁에서 적대 진영에 있던 군인을 넘어 악마와 같은 무리로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6. 맺음말

 

이 연구는 한국 전쟁기 북한 공산 정권의 천주교회 침학과 그에 대한 천주교회의 대응을 초대 주한 교황사절 번 주교를 중심으로 검토한 글이다. 이를 위해 메리놀 외방선교회와 골롬반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남긴 한국 관련 문서를 적극 활용하여 보다 국제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하였다.

 

냉전에서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 정권은 천주교회에 대한 탄압을 가중해 갔다. 공산 정권이 유독 천주교회를 박해한 까닭은 동유럽을 비롯한 공산 진영에서 천주교회는 당과 국가에 대한 거의 유일하고 중요한 저항 세력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스탈린은 천주교회가 외국과 연결되어 있는 점을 무척 경계했다. 중국도 천주교회에 서방 국가와의 관계를 청산하도록 종용하며 통제를 가하였다. 북한도 서구와 단일한 조직망으로 연결된 천주교를 정치적 불신분자로 탄압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 비오 12세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1947년 4월 7일자로 번 주교를 교황특사로 한국에 파견하였다. 이는 국제관례상 교황청이 남한을 주권국가로 승인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해석되었으며, 한국 천주교회와 정치인은 교황사절 파견은 교황청이 조선을 독립 국가로 승인해 준 정의의 결단이며, 조선의 국제적 지위를 크게 향상시켜 준 것이라고 환영하였다. 이어 정부 수립을 위한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는 미군정과 유엔, 그리고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천주교회의 긴밀한 교류 속에 이루어졌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국내만이 아니라 서구에도 소련 무신론 공산주의와의 싸움에서 승리로 규정되었다. 미국의 교회 관련 신문과 잡지에는 자치 정부를 가진 대한민국이 천주교회의 축복 속에 탄생하였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번 주교는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수립된 것을 하느님의 섭리로 이루어진 도덕적 결과물이라고 역설하였다. 일본에서 군정의 총사령관이던 맥아더 장군도 도쿄로부터 건너와 축사를 통해 언젠가 자유국가인 대한민국의 주도 아래 분단의 장벽이 무너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번 주교는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적인 ‘국가’로 국제 사회의 승인을 얻어낼 수 있도록 외교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이와 같이 천주교회는 한미 관계는 물론 남한 체제의 안정 · 강화에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번 주교는 그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번 주교는 매우 강력하게 반공을 외쳤다. 이승만은 “범세계적으로 악과 투쟁하는 전투에 천주교회는 가장 좋은 동맹”이라면서 번 주교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남한에 내려온 북한군은 천주교 성직자를 체포하거나 살상하였고, 전혀 대항하거나 싸울 의사가 없다는 뜻으로 공관의 모든 문을 열어 두었던 번 주교를 체포하였다. 심문 과정에서 공산군은 번 주교에 대한 극도의 적개심을 드러내었고 인민재판에서 사형을 언도하였다. 공산군은 번 주교를 포함한 민간인 포로들을 북으로 압송하여 평양에 수감하였는데, 맥아더 장군의 북진에 따라 압록강을 향해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이것이 1950년 9월부터 1951년 1월까지 평양에서 중강진에 이르는 160여 km에 달하는 길을 걸어서 행군한 ‘죽음의 행진’이었다. 이 죽음의 행진을 지휘한 북한군 책임자는 포로들이 ‘호랑이’로 부른 사람이었다. 호랑이는 포로들이 감당하기 힘든 일정으로 행진을 강행하였고, 낙오자에게는 가차 없이 굴었다. 그러나 번 주교를 비롯해 성직자들은 포로로 억류된 기간에도 사제로서의 종교 활동을 감행하였고, 그때마다 공산당에게 심한 폭행을 당하였다.

 

1951년 7월부터 유엔군과 공산군은 휴전을 위한 교섭을 진행하였지만, 포로 교환 문제는 난항을 겪었다. 북한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포함한 민간인 포로의 석방에 대해서는 협상조차 거부하였다. UPI통신과 THE KOREA TIMES를 비롯한 국내외 언론은 번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와 외국 시민권자의 실종 소식을 보도하였고, 천주교회 측은 실종 성직자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전개해 나갔다.

 

성직자를 비롯한 민간인의 실종과 죽음 의혹을 놓고 북한에 대한 지탄이 쏟아지는 가운데 소련이 중재에 나섰다. 마침내 1953년 4월 18일자로 북한이 7명의 미국인을 석방했다는 보도가 나왔고, 생존 성직자들이 풀려났다. 석방된 천주교 성직자들은 여러 매체를 통해 번 주교의 사망 소식을 전 세계에 알렸다. 서방의 천주교회와 관료, 언론 등을 비롯해 교황청에서는 번 주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공산 정권을 비난하였고, 연일 악의적인 빨갱이의 가혹 행위로 번 주교가 사망에 이르렀다는 보도를 쏟아내었다.

 

공산 정권이 전쟁의 수행과 관련 없는 성직자를 처형하거나, 극한적 상황에서 포로로 끌고 다니며 죽음에 이르게 한 행위는 반공의 강화로 이어졌다. 북한 공산군에게는 전쟁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군인이 아닌, 악마와 같은 무리라는 윤리적 지탄이 거세게 가해졌다. 공산군은 성직자로 있어야 할 곳에 있던 비무장 천주교 성직자 · 수도자를 체포 · 구금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대하고 살해하였다. 전쟁에서 포로가 되고 죽임을 당한 인간이, 무장한 군인과 비무장한 일반인인 경우가 매우 다름은 말할 나위없다. 전쟁의 윤리를 적용할 때 무장 군인에 의한 비무장 일반인의 죽음은 원통함이 더해진 비극이고 비도덕인 죽음이다. 그것은 매우 부당한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특히 한국 전쟁에서 북한 공산 정권은 성직자를 포로로 억류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대와 ‘죽음의 행진’ 끝에 사망하게 하였다. 이는 비전투 요원에 대한 폭력적인 죽음에서도 최악의 경우를 자행한 것이었으며, 이를 감행한 자들은 공존할 수 없는 절대 악으로 규정되었다. 독신 종교인의 죽음은 전쟁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일반인의 죽음과 달리, 가족 의례 문제에 구속될 필요가 없었으며 ‘원통함’이 덧입혀지는 성격도 약하였다. 그러나 성직자의 죽음이 ‘순교’, ‘거룩한 죽음’, ‘무고한 희생’으로 추모되면 될수록 공산주의자의 행동은 ‘악한 행위’로 질타받기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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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tad, Odd Arne · Leffler, Melvyn P. ed.,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Cold War, Vol. 1,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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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냉전에 관해서는 다양하고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있지만, 한국 전쟁과 관련해서는 냉전으로 가장 심각한 영향은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등 제3세계가 받았다는 점에 주목해 제3세계의 문제를 분석한 최근의 연구들이 크게 참고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루어진 웨스타드(Westade, Odd Arne)의 연구를 보면 냉전사에서 초강대국의 경쟁과 제3세계에서 일어난 혁명이나 내전과의 상관관계에 주목하였다. 이에 강대국의 이익이 얽힌 가운데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내전을 군사상의 전략, 중국 내 다양한 집단과의 관계, 항일 문제 등의 측면에서 비교 · 검토한 일련의 연구를 발표하였다. Westad, Odd Arne, Cold War and Revolution : Soviet-American Rivalry and the Origins of the Chinese Civil War, NY,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3 ; - - - - - - - -, Decisive Encounters : The Chinese Civil War, 1946-1950.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3, p. 305 ; - - - - - - - -, Restless Empire : China and the World Since 1750, 2012, p. 291.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가 스탈린, 루스벨트, 트루먼, 장제스[蔣介石], 마오쩌둥[毛澤東] 등을 모두 동등하게 ‘현실적인’ 대외 정책을 취한 것으로 접근한 것은 좀 더 숙고해야 할 문제라는 지적이 있다. 냉전의 주역이던 정치 지도자들이 취한 대외 정책은 서로 이익이 상충하기도 하고 때로 판단 착오나 합리적 자각의 결여 등이 있을 수 있는데, 그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웨스타드 연구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Shu Guang Zhang, “Review : Cold War and Revolution”, 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 Vol. 99, No. 2, 1994. 4, pp. 529~530 참조. 웨스타드를 비롯해 냉전과 제3세계의 내전을 포함한 폭력적 전쟁이나 혁명과의 문제에 관해서는 Westad, Odd Arne · Leffler, Melvyn P. ed.,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Cold War, Vol. 1,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에 수록된 일련의 연구가 참고된다. 한국 전쟁과 관련해서는 다음의 글이 있다. Niu Jun, “The birth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and the road to the Korean War”, Ibid. ; Stueck, William, “The Korean War”, Ibid.

 

2) 권헌익은, 냉전은 중심부의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공식’ 역사와 주변부의 ‘비공식’ 폭력으로 이루어진 구조를 가진다고 지적하였다. 중심부는 갈등을 상상의 전쟁으로 경험하였지만, 주변부는 폭력의 시대로 겪었다고 하였다. 즉 서구에서는 냉전이 상상의 전쟁이었다면 한국과 베트남 등 동아시아에서는 목숨이 걸린 폭력적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하였다. 권헌익 지음, 이한중 옮김, 《또 하나의 냉전 - 인류학으로 본 냉전의 역사》, 민음사, 2013, 19~20, 184~185쪽.

 

3) 한국 전쟁과 종교와의 관련에 주목한 연구는 일찍부터 강인철에 의해 이루어졌다. 강인철, <한국전쟁기 반공이데올로기 강화, 발전에 대한 종교인의 기여 : 천주교를 중심으로>, 한국사회학회 편, 《한국전쟁과 한국사회변동》, 풀빛, 1992 ; - - -, <미군정기와 이승만 정권하에서 교회와 국가>, 《교회와 국가》, 인천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997 ; - - -, <한국전쟁과 한국천주교회>, 《민족사와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 - - -, 《전쟁과 종교》,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3 ; - - -, 《한국 천주교의 역사사회학 - 1940~1950년대의 한국 천주교회》, 한신대학교출판부, 2006.

해방 이후 한국 전쟁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한국 천주교회의 활동과 방향에 대해 집중한 연구로는 한국사목연구소 편, 《한국천주교회사의 성찰과 전망 2 -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을 중심으로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1이 있다. 여기에 해방에서 건국, 분단으로 이어지는 역사에 천주교회의 활동과 방침에 관한 강인철의 연구, 공산주의와 한국 전쟁에 대한 여진천의 연구, 한국 전쟁에 따른 교회의 피해를 분석한 윤선자의 연구, 한국 전쟁 기간에 천주교회의 구호와 선교 활동에 대한 장정란과 장동하의 연구 등은 이 시기 천주교회의 동향을 이해하는 데 주요한 바탕이 되어주었다.

구미학계에서 이루어진 종교와 냉전과의 관계에 대한 최근의 연구 성과는 다음이 참고된다. Inboden, William, Religion and American Foreign Policy, 1945-1960 : The Soul of Containment,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 Kai Yin Allison Haga, Philip E Muehlenbeck ed., “Rising to the Occasion : The Role of American Missionaries and Korean Pastors in Resisting Communism throughout the Korean War”, Religion and the Cold War, Vanderbilt University Press, 2012.

이를 통해 냉전 체제의 형성과 발전에 종교가 국제 분쟁의 주요한 원인이 된 것에 대한 시사를 얻을 수 있었으며, 냉전 기간 중 종교가 미국의 대내외 정책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4) Kirby, Dianne ed., Religion and the Cold War, University College London, 2003, pp. 1, 20.

5) Inboden, William, Ibid., 인보든은 냉전 형성과 양 진영의 갈등에 한국 전쟁을 분석하지는 않았다.

 

6) Kent, Peter C., The Lonely Cold War of Pope Pius XII : The Roman Catholic Church and the Division of Europe, 1943-1950, Mcgill Queens Univ Press, 2002. 6.

 

7) Kai Yin Allison Haga, Ibid., 2012.

 

8) 번, 제임스 패트릭(Bishop Byrne, Patrick J., 방일은, 方溢恩, 1888~1950) 주교는 1927년 11월 평양에 부임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1937년 3월에 동경으로 부임, 1947년 4월 7일 주한 교황사절로 임명되어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한국 전쟁에서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죽음의 행진’ 도중에 사망하였다. 《한국가톨릭대사전》 5, 한국교회사연구소, 2005, 3239~3242쪽.

 

9) 이 글에 활용된 메리놀 외방선교회(이하 메리놀회)와 골롬반 외방전교회(이하 골롬반회)의 문서는 미국, 영국, 아일랜드 등의 출신으로 본국은 물론 한국과 필리핀, 베트남, 중국, 일본 등 아시아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남긴 한국 관련 문서이다. 해당 문서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는 최선혜, <한국 근 · 현대와 외방 선교회의 활동>, 《교회와 역사》 350호, 2004 ; - - -, <서양 선교사의 한국 전쟁 예견 - 외방 선교회 관련 문서에 대한 소개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23, 2004 참조. 그런데 다양한 문서가 아직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못한 채 박스(Box)나 파일(File)에 적절히 나누어 보관되어 있는 상태이다. 고유한 업무 이외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필자를 위해 문서의 열람과 복사 등의 작업이 가능하도록 친절하게 도와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 간사 유소영 선생에게 이 자리를 빌려 깊은 감사를 표한다. 선생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연구의 수행은 불가능하였다.

문서는 A4 용지에 복사 · 정리되어 있으며, 해당 선교회의 자체 문서 번호가 날인되어 있다. 메리놀회 문서는 Reel로 구분되어 있고, 그 아래 Folder로 나뉘어 각 문서 번호가 날인되어 있으며, 골롬반회 문서는 Volume으로 구분되어 있고, 그 아래 folio 번호가 있다. 따라서 이 연구에 보인 문서의 전거는 메리놀회 문서 경우 <메리놀 Reel 번호 - Folder 번호 - 문서 번호>(문서 날짜)이며, 골롬반회 문서 경우 <골롬반 Vol. 번호 - folio 번호>(문서 날짜)이다. 전거에 원문서의 출처를 가능한 한 밝히려 노력했지만, 복사 상태에 따라 판독이 불가능한 경우는 불가피하게 문서 번호만을 기록하였다. 

 

10) 동유럽 교회에 대한 소련의 침학은 Zugger, Christopher Lawrence, The Forgotten : Catholics of the Soviet Empire from Lenin Through Stalin, Syracuse University Press, 2001, 특히 pp. 417~418 참조. 공산 정권과 천주교회와의 관계에 대해 폴란드의 경우도 크게 참고된다. 이에 대해서는 이규영, 김경미, <폴란드 가톨릭교회 : 체제전환이후 20년>, 《유럽연구》 28-2, 2010 참조. 이 연구에 따르면 폴란드가 공산화되기 시작하는 1944년부터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는 1989년까지 천주교회는 당-국가에 대한 유일한 적대 세력으로 체제에 대한 반대 세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구였다.

 

11) 吳在環, <中國 共産黨의 宗敎觀 變遷>, 《中國史硏究》 38, 2005, 228~229쪽.

 

12) 북한 공산 정권 수립 이후 북한 교회의 상황과 피해에 대해서는 윤선자, <한국전쟁과 교회의 피해>, 《한국천주교회사의 성찰과 전망 2 -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을 중심으로 -》, 2001, 149~156쪽 참조.

 

13) 한국 천주교회는 교황사절 환영식에서 환영사를 통해 교황사절 파견은, “조선의 독립을 어느 나라보다도 먼저 인정하시는 것”이라 발표했다. 《가톨릭청년》은 “조선이 독립될 것은 카이로, 포츠담 회담에서 공약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느 한 나라도 독립을 승인하지 못하고 있는 이 마당에 교황청에서 제국(諸國)에 솔선하여 조선에 사절을 파견한 것은 조선 독립을 승인한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며 국제 공약 이행을 추진시키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러한 분석은 강인철, 앞의 논문, 2001, 52~53쪽.

 

14) Kent, Peter C., The Lonely Cold War of Pope Pius XII : The Roman Catholic Church and the Division of Europe, 1943-1950, Mcgill Queens Univ Press, 2002.

 

15) 메리놀 R20 Box4 F7(1948. 3. 9). 번 주교가 메리놀회 총장 레인(Lane, Raymond. A.) 신부에게 보낸 서신. Reel 20에 Box로 분류된 문서는 Folder가 나뉘어있지만, 그 아래 매 건의 문서에는 번호가 날인되어 있지 않다. 문서가 작성된 날짜를 최대한의 전거로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천주교회가 사용한 ‘성전’(聖戰)의 의미에 대해서는 조금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냉전 시대 공산주의에 대응하는 천주교회의 ‘성전’을 공격적인 전쟁을 지향한 것으로 해석하기는 주저된다. 교회의 대응 방식은 복음 전파, 반공 강조를 통한 공산주의 이념의 약화 등의 방법을 넘어서기는 어려웠다고 본다.

 

16) 이용원, 《제2공화국과 장면》, 범우사, 1999, 79~80쪽.

 

17) 해방 이후 정부 수립까지 이승만 정권과 천주교회와의 관계는 강인철, <미군정기와 이승만정권 하에서의 교회와 국가>, 《교회와 국가》, 인천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997, 631~632쪽 ; - - -, <해방공간의 명동성당과 서울교구 : 1945~1950>, 《민족사와 명동성당》, 2000, 130~131쪽 참조.

 

18) 메리놀 R20 Box4 F7(1948. 6. 30).

 

19) 앞의 각주 18)과 같음. 맥아더는 1945년 8월부터 1952년 4월까지 일본에서 군정을 이끄는 동안 자신의 거처와 사령부 집무실을 오갈 뿐 서울과 마닐라를 잠깐 방문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도쿄를 떠난 일이 없었다. 존 다우어 지음, 최은석 옮김, 《패배를 껴안고》, 민음사, 1999, 255~256쪽. 그 한 번의 서울 방문이 이때였다.

 

20) 메리놀 R20 Box4 F8. 1948년 6월 30일 서울 번 주교가 캐나다 오타와의 루이스 생 로랑(Louis S. St. Laurent) 외부무 장관에게 보낸 서신.

 

21) 선거관리위원회 기록에 따르면 1948년 5월 10일 투표의 투표율은 유효 투표율 96.4%였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대한민국선거사 : 1968 증보판》, 1968, 70쪽.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에 관한 미국 연락장교의 보고서에 따르면 등록자 대비 투표율은 95.2%, 유권자 대비 투표율은 71.6%로 집계되었다. 박찬표, 《한국의 국가형성과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7, 395쪽에서 재인용.

 

22) 번 주교가 이와 같이 강력하게 지지를 호소한 까닭은 당시 캐나다가 반대 여론이 있다는 이유로 남한 단독 선거를 반대하는 입장이기 때문이었다. 캐나다는 호주 · 중국 · 엘살바도르 · 프랑스 · 인도 · 필리핀 · 시리아 등과 더불어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한 8개 국가의 하나였다.

 

23) 강인철, 앞의 논문, 2000, 52~64쪽 참조. 그는 공산주의와의 타협을 철저히 배제하는 반공주의는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운동과 쉽게 결합할 수 있었고, 교황 비오 12세가 남한에 번 주교를 사절로 파견한 것은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굳히는 역할을 했다고 지적하였다. 한국 천주교회도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 지지에 나섰고, 단독  정권 수립을 무신론에 대한 유신론의 승리로 평가하였다.

 

24) 메리놀 R2 F4 2 246~248(1950년 6월 말 내지 7월 초). 한국 전쟁 발발 직후 6월 27일 밤, 한국을 떠나 일본 규슈의 하카타에 도착한 캐롤 몬시뇰이 메리놀회 총장 신부에게 보낸 보고서.

 

25) 메리놀 R11 F30 1 675, <1950년 이래 빨갱이에게 억류된 두 번째 미국인 주교가 사망한 것으로 공표되다>(1952. 10. 30)는 제목으로 Herald Times에 실린 기사.

 

26) 1952년 4월 3일, “이승만 대통령이 한표욱에게 보낸 서한”, <이승만 서한철>, 국사편찬위원회 D/B. 이 시기 천주교회의 활동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입장은 최선혜, <냉전시대 캐롤 몬시뇰의 구호활동과 그 의의>, 《교회사연구》 34, 2010, 170~178쪽 참조.

 

27) “사제는 그의 본당, 수녀는 그의 수녀원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교황의 말에 따라 중국, 필리핀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골롬반 Vol. 21 ff. 9-10(1950. 12. 1), <한국의 전쟁 상황>. 명동 성당에서도 주일 미사가 봉헌되었고, 가정 방문과 성사 집전 등 사목 활동도 계속되었다. 춘천 지목구에서도 미 군사고문단의 권유를 물리치고 퀸란 지목구장을 비롯해 여러 신부가 본당에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한국 전쟁>, 《한국가톨릭대사전》 12, 2006, 9477쪽.

 

28) 전쟁 직후 북한군에게 체포된 희생자들 가운데는 교황대사 번 주교, 광주 지목구장 브렌난 신부, 연길 대목구의 브레허 주교, 함흥 대목구의 사우어 주교, 평양 대목구의 홍용호 주교 등 주교(교구장)만도 5명이나 되었다. 한국 전쟁기 교회의 피해에 대해서는 여진천, <한국전쟁에 대한 교회의 입장>, 《한국천주교회사의 성찰과 전망 2》, 한국천주교중압협의회, 2001 ; 윤선자, <한국전쟁과 교회의 피해>, 위의 책, 2001 ; <한국전쟁>, 《한국가톨릭대사전》, 12,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9478~9479쪽.

 

29) 미국 메리놀회 소속 한국 선교사 캐롤 몬시뇰의 활동에 대해서는 최선혜, 앞의 논문, 2010 참조.

 

30)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을 침략하였을 때, 번 주교는 모든 외국인 사제에게 서울에서 철수하고 체포되는 것을 피해 남하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정작 주교 자신은 여전히 남아있는 사제들을 정신적으로 지지해 주기 위해 잔류할 것을 결정하였다.” 메리놀 R1 F30 1 675, <1950년 이래 빨갱이에게 억류된 두 번째 미국인 주교가 사망한 것으로 공표되다>(1952. 10. 30)는 제목의 Herald Times 기사 ; 메리놀 R1 F30 1 681~682, <로마 교황청이 번 주교의 사망을 공표하다>(1952. 11. 1).

 

31) 메리놀 R1 F31 1 768, <한국 공산당이 번 주교를 어떻게 포로로 잡았는지 메리놀 선교사가 말하다>는 제목으로 연재된 부드 신부의 수기.

 

32) 앞의 각주 30), 31)과 같음.

 

33) 한국 전쟁이 일어났을 때 노기남 주교는 성년 축하 사절로 로마에 이어 유럽 여행길에 올라 있었다. 한국 전쟁의 소식은 그 여정 중 6월 20일 파리 외방전교회 숙소에 머물던 중 듣게 되었다. 사태가 악화되어 가자 노기남 주교는 9월 23일에 귀국하였다. 박도원, 《노기남대주교》,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307쪽.

 

34) 메리놀 R1 F30 1 702와 메리놀 R1 F31 1 809(1953. 5. 28).

35) 윤선자, 위의 논문, 2001, 159쪽.

 

36) 메리놀 R1 F31 1 755(1953. 5. 16). “북한 빨갱이에 의해 교회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성직자들은 살해되거나 체포되어 죽었으며, 대개 한밤중에 체포되어 단지 파자마 차림이거나 목욕 가운을 입고 있는 정도였으며, 나중에 만주까지 행진을 강행해야 했다”고 죽음의 행진에서 생환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셀레스탱 코요스(Celestin Coyos) 신부가 파리에서 인터뷰한 기사.

 

37) 골롬반 Vol. 21. ff. 1-8.

38) 메리놀 R1 F30 1 677(1952. 11. 1) ; 메리놀 R1 F30 1 677, 699~700(1952. 11. 13).

39) 메리놀 R1 F30 1 677(1952. 11. 1).

 

40) 공산당 측의 인민재판 주관자가 “너는 왜 한국에 왔느냐?”고 묻자, 번 주교는 “종교를 가르치러 왔소”라고 답하였다. 그 와중에 고함지르며 “미국인을 죽여라!”는 공산당의 선동이 있었으며, 번 주교는 “나는 한국에 미국인으로 온 것이 아니오. 나는 종교를 가르치러 왔고, 교황을 대신해서 온 것이오”라고 하였다. 메리놀, R1 F30 1 699~700(1952. 11. 13).

 

41) 메리놀 R1 F31 1 781(1953. 5). 부드 신부가 <한국의 연옥 - 포로 일기>라는 제목으로 1950년 7월 11일 체포된 이래 1953년 4월에 풀려나기까지 직접 뉴욕 INS에 연재 기고한 글. 맥아더의 북진에 따라 수용소의 일상은 더욱 가혹해졌고, 9월 5일 압록강을 향해 북으로 이동하였다고 되어있다.

 

42) 메리놀 R1 F31 1 808~809(1953. 5. 28).

43) 메리놀 R1 F31 1 797(1953. 5. 27), 부드 신부의 수기.

 

44) 메리놀 R1 F31 1 794, <‘호랑이’가 죽음의 행진을 지휘하다> ; 802, <메리놀러가 포로의 죽음의 행진을 설명하다> ; 806, <한국의 연옥 - 주교는 영하의 날씨에 ‘건강체조’ 뒤 사망하다> ; 808, <주교는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외면하였다>.

 

45) 메리놀 R1 F31 1 846(1953. 11. 13), <번 주교가 빨갱이의 소총 아래서 포로들에게 일괄 사죄를 베풀다>.

46) 메리놀 R1 F31 1 847(1953. 11. 14), <철조망 너머의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골롬반회 오코너(Patrick O’connor) 신부의 글.

47) 메리놀 R1 F31 1 818(1953. 5. 28)과 822(1953. 5. 29), <한국의 연옥>으로 연재된 부드 신부의 수기.

48) 메리놀 R1 F31 1 790, <부드 신부가 독실한 한국인들에게 비밀리에 사죄경을 주다>.

49) 메리놀 R1 F30 1 782(1953. 5. 26)와 822~824(1953. 5. 2?), <한국의 연옥>으로 연재된 부드 신부의 수기.

 

50)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시작한 한국 전쟁 휴전 회담 과정에서 가장 협상에 어려움을 보인 문제가 포로 교환이었다. 포로 처리 절차에 한국 전쟁의 사례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정인섭, <한국전쟁이 국제법 발전에 미친 영향 - 포로송환문제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法學》 40-6, 2000 참조.

 

51) 골롬반 Vol. 22 ff. 38-40(1952. 11. 10).

52) 골롬반 Vol. 22 ff. 43-46(1951. 10. 8).

 

53) 클리어리 신부와 캐롤 몬시뇰이 북한 지역에 들어가서 한 활동에 대해서는 메리놀 R4 F144 629~633에 실린 클리어리 신부의  참고. 클리어리 신부가 북한에 들어간 주요한 목적이 번 주교와 부드 신부를 수소문하는 것이라는 언급은 메리놀 R4 F144 629(1950. 11. 1).

 

54) 제6대 평양 교구장 홍용호(1906~?) 주교. 해방 이후 공산 정권의 압박 속에 교회를 이끌어 가던 홍 주교는 1949년 5월 14일 서포의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의 첫 종신자 서원 면담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납치되었다. 그 뒤 평양 인민교화소 특별정치범 감옥에 수감된 것은 확인되었는데, 1950년 1월부터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는다.

 

55) 문서에는 전 안드레아 신부라고 되어 있다. 1946년 사제 서품을 받고 사리원 본당 보좌로 활동하던 중 1950년 10월 12일에서 13일 사이 납치되었다.

 

56) 베니호프(Bennyhoff, Bob)는 제2차 세계 대전에 공군으로 참전하였고, 한국 전쟁 시 UPI통신 특파원으로 낙동강 전투를 동경을 통해 뉴욕으로 소식을 전하는 등 종군기자로 활약하고 있었다.

 

57) 이상의 내용은 메리놀 R4 F14 4 632~633(1950. 11. 4), 클리어리 신부의 . 마을 주민들이 회벽의 학교 건물에 약 20명의 남자와 6명의 여성이 포로로 머물었다고 증언하였고, 남성은 번 주교와 부드 신부이며, 여성들은 가르멜 수녀회와 샬트르 수녀회 수녀들인 것이 확실하다고 하였다. 클리어리 신부는 나중에 부드 신부가 이를 증명하였다고 기록하여 두었다. 한편 마을 사람들은 그 주변에 묻혀있는 희생자들이 서울에서 잡혀 온 남한 공무원과 그 가족(부인 등)들이라고 증언하였다.

 

58) 메리놀 R2 F4 2 258(1950. 10. 30). 캐롤 몬시뇰이 문서에 언급한 성 바오로회의 김 안젤라 수녀와 김 마리안나 수녀는 김정자 수녀와 김정숙 수녀이다. 두 수녀는 매화동 본당 수녀원에서 활동하던 중 1950년 10월 15일 체포되어 인민재판을 받고 체포 · 처형되었다.

 

59) 골롬반 Vol. 23. ff. 19-22(1951. 7. 2), 오코너 신부의 보고서.

60) 골롬반 Vol. 23 f. 30(1951. 7. 23), <‘빨갱이’ 특파원들은 실종된 130명의 선교사들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없음>.

61) 골롬반 Vol. 23 ff. 31-32(1951. 7. 30), <북한 빨갱이 대표가 억류된 선교사들에 대한 조회를 무시했다>는 내용의 오코너 신부 보고서.

 

62) “체포된 천주교 선교사들은 지금 15개월째 갇혀 있고, 적어도 8개국 출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전히 65명의 독일 베네딕도회 사제와 수사, 수녀 등이 1949년 5월 북한 사람에 의해 체포되어 아직 수감되어 있습니다. 페루체(Perruche)의 전보에 따르면 수감된 사람들은 아직 북한에 있습니다.” 골롬반 Vol. 17 f. 37(1951. 9. 27).

“윌프레드 버르쳇(Wilfred Burchett, 오스트리아 좌파, the Communistic Paris daily Ce Soir 특파원)은 잡힌 사람들에 대해서 아는 것은 없지만, 그들 모두가 북경이나 만주에 있지 않고, 아직 대부분 북한에 억류되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골롬반 Vol. 23 ff. 33-34(1951. 6. 30).

 

63) “남일 대장(여기 휴전 회담의 북한 특파원)은 1950년 여름에 공산군에 의해 잡힌 선교사에 관한 어떤 정보도 주지 못하였습니다. …11월 9일에 그에게 이 문제에 대한 정보를 보내 준다면 고맙겠다는 편지를 보냈지만, 아직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골롬반 Vol. 23 f. 41-42(1951. 12. 3).

 

64) 메리놀 R20 Box5(1951. 10. 22). 메리놀회 레인 총장 신부가 올리버에게 보낸 서신.

 

65) “한국, 판문점, 12월 22일 - 여기 휴전 회담 동안에 북한 공산당에 의해 잡힌 종교 인사들에 대한 문제를 의논할 조짐은 보이지 않습니다.” 골롬반 Vol. 22 f. 47(1951. 12. 24).

 

66) 알렉산더 마카루니(Alexander G. Makarounis)는 1950년 7월 27일 포로가 되어 죽음의 행진에 끌려 다녔지만, 탈출에 성공하였다. 메리놀 R1 F30 1 662(1952). 5명의 골롬반회 소속 선교사는 쿠삭(Cusack, Thomas) · 매긴(Maginn, James) · 브렌난(Brennan, Patrick) · 카나반(Canavan, Frank) · 오브라이언(O’Brien, John) 신부이다.

 

67) 프랑스 신부 12명, 독일 베네딕도회 수도자 8명, 골롬반회 신부 7명(아일랜드인 5명, 미국인 2명), 미국 메리놀회 신부 1명, 벨기에 수녀 2명, 프랑스 수녀 1명.

 

68) 메리놀 R1 F30 1 663(1952. 1. 29). 북측이 공개한 명단에는 러시아인 등 연합군의 명단에 오르지 않은 21명의 시민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연합군의 명단 57명 가운데 27명만 있고, 연합군의 명단에 있는 30명은 북측 명단에 없었다. 즉 북측은 48명의 명단을 발표했지만 연합군에 따르면 57명이 억류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 57명 가운데 27명만이 있다는 것이며, 연합군 명단 가운데 있는 30명은 여전히 실종으로 남았다.

 

69) 메리놀 R20 Box5 F4, 1952년 11월 12일, 12월 13일 레인 총장 신부가 영국 런던의 홀트(Holt, H.D.G.)에게 보낸 서신. 홀트는 서울에서 북한군에 체포되었던 영국 목사 비비안 홀트(Holt, Vyvyan)의 형제. 교신한 서신의 내용에 따르면 비비안 홀트 목사도 1950년 7월 북한군에 체포되어 죽음의 행진을 겪고 수용되어 있다가 부드 신부와 함께 석방되었다. 메리놀 R20 Box5 F4, 1951년 10월 22일 레인 총장 신부가 워싱턴의 올리버에게 보낸 서신. 메리놀회는 교계와 정계 여러 곳에 번 주교의 생사를 수소문하며, 정확한 소식을 알려달라고 부탁하면서도 사망의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었다.

 

70) 메리놀 R1 F30 1 709(1952. 12. 16).

 

71) 메리놀 R1 F31 1 726(1953. 4. ?). 13명 가운데 번 주교, 부드 신부, 브렌난 신부 등 천주교 신부를 포함하고 있는데, 중간이 지워져 전체 명단은 보이지 않는다. 모스크바 주재 미 대사관은, “러시아가 북한 공산주의자에게 억류된 13명 미국인의 석방을 돕기로 미 국무부에 약속하였다. 어제 10일 모스크바 주재 미 대사관이 발표하였다. 한국 전쟁 발발 이래 실종된 미국인은 5명의 감리교 선교사, 4명의 천주교 사제, 2명의 공무원, 2명의 시민(한국에 사업차 있던)이다”고 발표하였다. 메리놀 R1 F31 1 728(1953. 4. 11).

 

72) 빔(Beam, Jacob D.)은 제2차 세계 대전부터 영국, 독일, 인도네시아,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을 거쳐 소련 주재 대사를 역임하였는데, 이력서에 1953~1956년은 빠져 있다. 메리놀회 문서에만 소련 주재 미국 공사대리였음이 확인된다.

 

73) 1953~1957년까지 소련 주재 미국대사.

 

74) 메리놀 R1 F31 1 727(1953. 4. 11). 7명은 부드 신부, 전 국무부 직원 루이 레오 댄스(Louis Leo-Dans), 넬리 아칸소 다이어(Nellie Arkansas Dyer), 앤더스 크리스천 젠슨(Anders Christian Jensen), 메리 헬렌 로서(Mary Helen Rosser), 베르타 애드키슨 스미스(Bertha Adkisson Smith), 로렌스 젤러스(Lawrence A. Zellers) 등 4명의 감리교 선교사로 발표되었다.

 

75) 1953년 4월에 소련이 중재에 나서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 석방을 돕기로 약속했다는 내용은 계속 보도되었다(메리놀 R1 F31 1 729~735).

 

76) 메리놀 R1 F31 1 734~735(1953. 4. 14), <북한 공산주의자가 미국 메리놀회 사제의 석방을 약속하다>.

77) 메리놀 R1 F31 1 732(1953. 4. 18).

 

78) 메리놀 R1 F31 1 733(1953. 4. 21). 모스크바발 AP통신에 따라 <영국인이 한국에서 미국 시민들의 사망을 폭로하다>는 제목의 기사에서는 부드 신부가 번 주교를 비롯해 1949년 한국에 간 광산 관계자, 광산기술자 등이 사망했다고 전했다. 이어 런던으로 돌아간 부드 신부는 여러 인터뷰와 수기를 통해 번 주교의 사망을 발표했고, 포로수용소에서의 경험을 수기로 연재하였다. 대표적 예로 <한국의 연옥 - 포로 일기>라는 제목으로 1950년 7월 11일 체포된 이래 1953년 4월에 풀려나기까지를 직접 뉴욕 INS에 연재 · 기고하였다. 메리놀 R1 F31 1 768~788(1953. 5).

 

79) 교황청이 이미 “사망으로 추정”이라 발표했었지만, 북한은 그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았으며, 부드 신부에 의해 ‘사망’이 확인되었다고 하였다. 메리놀 R1 F31 1 736(1953. 4. 24).

 

80) 앞의 각주 78) 부드 신부의 수기.

 

81) <번 주교의 죽음은 빨갱이의 학대 때문 - 감리교 선교사>라는 제목의 보도를 비롯해 스미스(Bertha A. Smith of Marshall, 당시 68세) 양의 증언은 여러 차례 관련 신문과 잡지에 보도되었다. 메리놀 R1 F31 1 763(1953. 5. 22)과 메리놀 R1 F31 1 766(1953. 5. 23).

 

82) 해당 문서들은 메리놀 R1 F30에 정리되어 있으며 표에 보인 것은 해당 문서 번호. F30은 이라는 제목으로 정리되어 있는데, 메리놀 문서에서 은 대개 Burrelle’s라는 회사에서 수집 · 정리해 준 문서이다. Burrelle’s는 신문, 잡지 등 대중매체의 보도를 수집 · 정리해 주는 회사(press clipping bureau)로 뉴욕 주 햄스테드(Hempstead)시에 소재하였다. 복사 · 정리된 각 문서에 보도된 날짜는 기록되어 있지만, 어느 매체의 기사인지 원 게재지명은 거의 나와 있지 않다.

 

83) 부드 신부가 <한국의 연옥 - 포로 일기>라는 제목으로 1950년 7월 11일 체포된 이래 1953년 4월에 풀려나기까지를 연재 · 기고한 글은 메리놀 R1 F31 1 768~829(1953. 5~?) 참조. 퀸란 몬시뇰의 수기는 메리놀 R1 F31 1 839~843(1953. 8)과 골롬반 Vol. 21 ff. 1-8, 골롬반 잡지인 THE FAR EAST 1953년 8월호에 수록되어 있다. 코요스 신부와 크로스비 신부의 수기는 단행본으로 출간 · 번역되었다. 쎌레스뗑 꼬요스 신부, 조안나 · 이혜자 옮김, 《죽음의 행진에서 아버지의 집으로》, 분도출판사, 1983 ; 조선희(Philip Crosbie), 《기나긴 겨울》, 가톨릭출판사, 2003.

 

84) 메리놀 R1 F31 1 755(1953. 5. 16).

 

85) 메리놀 R2 F4 2 258~259(1950. 10. 30). 평양에서 캐롤 몬시뇰이 당시 일본 교황사절 막시밀리안 데 푸르스텐베르그(Maximilien de Furstenberg, 1904~1988) 대주교에게 보낸 서신. 같은 내용의 문서가 중복 정리되어 있다(260~263).

 

86) 강인철, <해방정국과 한국천주교회>, 《한국천주교회사의 성찰과 전망 2》, 2001, 7~35쪽 참조.

87) 《경향잡지》 45권 102호, 1953. 7.

 

[교회사 연구 제44집, 2014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최선혜(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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