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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이류사의 천주교 선교 활동과 그의 역 · 저서 중 주교요지의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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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27 ㅣ No.868

이류사의 천주교 선교 활동과 그의 역 · 저서 중 《주교요지》의 위상

 

 

2001년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순교자현양회에 일원으로 몸담고 있었던 필자는, 이 단체에서 상당한 지원을 부담한 정약종(丁若鍾)에 관한 심포지엄이 기획되고 실행되는 것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면서 기대를 한껏 하고 있었다. 이제는 정약종에 관한 연구에 좀 진척이 있으려니 하는 것이었는데, 다름이 아니라 그의 저서 《쥬교요지》가 과연 서지학자(書誌學者) 모리스 쿠랑(Mouris Courant)의 《한국서지》(韓國書誌)에 적혀 있는 바와 같이 예수회[耶?會] 신부(神父) 이류사(利類思)의 같은 제목의 책 《주교요지》(主敎要旨)의 영향을 과연 받은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진즉부터 관심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심포지엄에서 발표될 요지문을 하루 전쯤인가 얻어 읽어 보았는데 어디에도, 내 관심을 충족시켜 줄 대목이 없어 실망한 나는, 그러면 이제는 감히 내가 나서서 이류사의 《주교요지》를 구해 읽고 이 책과 정약종의 《쥬교요지》를 전면적으로 비교 · 검토를 해야겠다고 마음 다지기에 이르렀다.

 

마음먹은 지 며칠 걸리지 않아 마치 꿈결과 같이 정말 너무나도 어렵지 않게 이류사 《주교요지》의 원문이 CD 형태로 내 눈앞에 놓여 있었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이류사 《주교요지》의 원문을 입수하여 분석에 착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목차만을 얼핏 살폈어도 두 책이 전혀 서로 다른 내용의 책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하지만 연구자로서의 도리라 여겨, 앞의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논문들이 2002년 학술지 《한국사상사학》(韓國思想史學) 제18집에 게재되는 것을 보고 내용을 재차 확인한 후에야 즉각 이 학술지를 간행해내는 한국사상사학회(韓國思想史學會)에 발표를 신청하였다. 제목은 <丁若鍾의 《쥬교요지》와 利類思의 《主敎要旨》 比較 硏究>였고, 이 논문은 곧 같은 해 2002년 간기(刊記)의 《한국사상사학》 제19집에 게재되었으며, 한국 천주교회사에 관한 내 첫 저서를 2008년에 간행해낼 때 함께 묶었다.1)

 

그 후 이 주제와 관련된 논문들이 간혹 발표되어 구해 읽어봐도 내 논문과 저서에서 밝힌 내용을 전혀 언급조차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아마도 원문을 내가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여기며 지내왔다. 실제로 나 자신도 2004년에 가톨릭대학교 인간학연구소의 일원으로 재직할 때 로마 예수회 고문서고(古文書庫)를 직접 방문할 기회를 만들어 이류사 《주교요지》의 원문을 혼자 살피며 감격의 눈물을 찍어내 본 경험에 비춰볼 때, 연구자들이 노력해서 구하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을 테지만, 국내에서는 아직도 소개조차 된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이제 벌써 10여 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게 안쓰러워, 얼마간의 설명을 붙이고 한글번역을 하여 제공하면서 함께 이류사 《주교요지》 원문의 영인본(影印本)을 학계(學界)에 내놓기로 한 것이다.

 

 

1. 이류사의 선교 활동과 《주교요지》 저술

 

이류사가 중국에서 한 천주교 선교 활동의 세세한 면모를 살피기 위해 그간 눈에 띄는 모든 책을 뒤지고 또 기회가 닿는 대로 살펴보았지만, 지금껏 그리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던 터에 출판된 지 얼마 안 된 경승(耿昇)의 역서(譯書) 《16-20세기입화천주교전교사열전》(16-20世紀入華天主敎傳敎士列傳)2)을 손에 넣고는 설레는 마음으로 하염없이 뒤졌으나 별반 새로운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허망한 마음을 추스르며 그간에 수집한 자료들을 곰곰이 되짚어가며 검토해보니, 되레 소약슬(蕭若瑟, Johannes Rodorigues)의 저서(著書) 《천주교전행중국고》(天主敎傳行中國考)3) 여기저기에서 세밀하게 언급한 사실들이 크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새삼 되새기기에 이르렀고, 그래서 이를 바탕으로 삼아 이미 예전에 기술한 바를 중심으로, 이류사의 《주교요지》 저술과 관련된 선교 활동의 핵심만 간략히 추리면 아래와 같다.

 

벨기에 태생 예수회 신부 남회인(南懷仁)의 《교요서론》(敎要序論) 1677년 초판 <서문>(敍文) 가운데에는, 이태리 태생 예수회 신부 이류사가 쓴 <자서>(自敍)도 담겨 있음을 무엇보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럴 정도로 무엇보다도 남회인과 이류사는 동일한 예수회원으로서 같은 시기에 중국에서 선교 활동에 매진하게 되면서, 또 다른 한 명의 포르투갈 태생의 예수회 신부 마갈엔스(Gabriel de Magalhaens, 영문 표기 Gabriel Magailians, 安文思)와 일치 속에 항상 동행하는 경우가 많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들은 각기 출신 나라는 달랐지만, 예수회 신부로서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맹렬한 선교 활동을 함께 펼쳤던 것이다. 당시 중국에서 천주교 선교 활동 중이던 예수회 신부 가운데 ‘핵심 3인방’이라 불러도 좋지 않나 생각한다.

 

특히 1668년에 강희제(康熙帝)가 이 3인의 예수회 신부들을 불러 서양의 풍토와 인심에 대해 물은 것에 대한 답변으로서, 같은 해에 이류사가 《주교요지》를 저술하였고, 이듬해 즉 1669년에 서양의 실상을 정리한 《서방요기》(西方要紀)와 교리서 《천주정교약징》(天主正敎約徵)을 아울러 저술하여 봉정하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는 그 이듬해인 1670년에 이르러 이 3인 중의 하나인 남회인이 저술한 것이 바로 《교요서론》(敎要序論)인데, 남회인이 저술한 이 책은, 이미 그 직전에 이류사가 저술했고 그 자신과 동료 안문사(마갈엔스)가 전정(全訂)해 준 《주교요지》는 말할 것도 없고, 3인이 공동으로 마련하여 강희제에게 봉정한 《천주정교약징》 역시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1670년에 남회인이 이류사와 안문사의 도움을 충실히 받아 《교요서론》을 저술하여 1677년에 간행할 때, 역시 이류사가 협력하여 <자서>를 같이 썼던 것으로 파악된다.4)

 

그러므로 이류사 자신의 중국에 대한 천주교 선교 활동 가운데 《주교요지》 저술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게다가 그가 천주교 선교 활동에 혼신의 힘을 쏟고 《주교요지》 저술에 온갖 정성을 기울인 것은, 당시 강희제의 고임(苦任)을 받아 제대로 천주교를 중국에서 전교할 수 있겠다는 확신에 따른 것임도 헤아릴 수 있다고 하겠다.

 

 

2. 이류사의 역서와 저서

 

《주교요지》를 비롯하여, 이류사가 중국에서 천주교 선교 활동을 하면서 한문(漢文)으로 간행해낸 서적들에 대한 종합적인 정리는 지금까지 별반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최근 간행되어 나온 장효(張曉)의 편저(編著) 《근대한역서학서목제요 명말지1919》(近代漢譯西學書目提要 明末至1919)5)에서조차도 그러하다. 이 책 역시 개인별 저술물(著述物)들을 분야별로 구분하여 나열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나마 비교적 정확히 개별적인 사항이 제시되는 것으로 판단되어, 이를 토대로 정리하여 이류사의 역서와 저서 목록(目錄)을 작성해보았다. 먼저 이류사의 역서 목록을 제시해보면 다음의 <표 1>이다.

 

보듯이 내용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이 서명만 제시되다시피 한 경우도 여럿 있으므로, 이류사가 낸 역서 하나하나에 대해 죄다 알아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이들 역서는 내용상 3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고 본다. 첫째 부류는 1~2의 책으로, 이는 내용 소개로 보나 제목으로 보나 신학(神學) 관련 서적인 게 분명하다. 둘째 부류는 3~9의 책으로, 사제(司祭)로서 요긴한 미사 경본과 일과에 관한 서적들이다. 이 첫째와 둘째 부류의 역서에서 하나의 공통점은 천주교 관련 서적이라는 데에 있다 하겠다.

 

그런데 매우 이채롭게도, 셋째 부류는 10~11의 책으로, 동물 가운데 각각 새매와 사자에 관한 설명을 담은 책이다. 그것도 서양의 원전 중 이것들과 관련된 항목을 추려서 번역하여 강희제에게 제공한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음이 주목된다. 이류사가 이렇게 하였던 것 자체가 그를 위시한 ‘천주교 중국 선교의 핵심 3인방’으로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교를 위한 방략(方略)이었기 때문이라 보인다. 즉 이들로서는 세상 그 어떤 궁금함일지라도 강희제가 궁금해하고 설명을 요청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해소해 주어야지만, 천주교의 교리 자체를 중국에서 제대로 선교할 수 있겠다는 일념, 오로지 그것 하나의 실현을 위해서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았을 뿐이었음이 드러난다고 하겠다.

 

이어서 앞서와 같이 장효의 편저 《근대한역서학서목제요 명말지1919》을 전거(典據)로 삼아, 이류사의 역서 목록을 작성하였다. 이를 제시해 보이면 아래의 <표 2>이다.

 

이 <표 2>에서 무엇보다도 주목하여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은, 《주교요지》 자체가 3번째와 같이 《성교요지》(聖敎要旨)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비록 이러한 한계가 있기는 하나6), 이 <표 2>를 통해 이류사의 저서들에 대해 천착해 보면, 내용상 4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고 본다. 첫째 부류는 1~6의 책으로, 이는 내용 소개로 보나 제목으로 보나 신학 및 천주교 신앙 관련 서적인 게 분명하다. 둘째 부류는 7~8의 책으로, 비록 7의 경우는 앞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저자명이 오기(誤記)되어 있을 정도여서 파악하는 데 있어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천학진전》(天學眞詮, 이는 곧 뒤에서 언급하는 바대로 《천학전개》[天學傳槪]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이라는 제목으로 보아 8의 《부득이변》(不得已辨)과 함께 천주교 교리에 관한 해설서임이 분명하다. 셋째 부류는 9~11의 책으로 강희제가 궁금해하는 서양의 실정과 천문학 연구에 관한 해설서라고 보아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넷째로는 12의 《안공행술》(安公行述)은 소개한 내용과 같이 이류사가 지은 안문사의 전기(傳記)인데, 오늘날에는 《안문사전략》(安文思傳略)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안문사의 저서로 하고제(何高濟)의 역서인 《중국신사》(中國新史)를 손에 들고 읽다가 그 뒤편에 편집되어 있는 이류사 저(著)의 《안문사전략》을 접하게 되었던 것인데, 더욱이 표제(標題) 뒷면의 다음과 같은 안내가 눈에 확 들어왔다.

 

譯自 Gabriel de Magailles, A New History of the Empire of China,

附錄 : An Abridgment of the Life and Death of F. Gabriel Magaillans, of the Society of Jusus, Missionary into China, written by F. Lewis Buglio, his inseparable Companion for six and thirty years ; and sent from Pekim in the year 1677, London, 1689.7)

 

친절하게 밝혀놓은 이 소개에 따라 1689년 영국 런던에서 발행된 영어 원문을 입수하여 일일이 대조하며 읽어본 결과, 역시 인용한 앞의 표현에도 쓰여 있듯이 중국 선교 ‘36년 동안의 뗄 수 없는 동료’(중국 번역에서는 ‘不可分離的伴侶’라 하였다)로서 구구절절한 애정의 표현이 그득히 담긴 전기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이류사가 안문사의 전기를 지어 출판한 것은 당시 ‘중국에서 천주교 선교 활동 중이던 예수회 신부 중 핵심 3인방’으로서, 그간의 우의를 거침없이 드러내면서 자신들의 선교 활동의 결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인다. 그리고 한문으로 중국에서 널리 읽히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예수회의 본부가 있는 로마를 비롯한 유럽, 그것도 영국과 같은 영어 문화권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익히 알게 하려고 영문판(英文版)까지 출판하는 주도면밀함을 보여준 게 아닐까 한다.

 

 

3. 이류사의 역 · 저서 중 《주교요지》의 위상

 

《주교요지》는, 앞서 간단히 이미 밝혔던 바와 같이 서명(書名)을 달리하여 《성교요지》라고 전하기도 하는데, 1668년에 이를 간행해내기를 전후하여 유사한 종류의 교리서(敎理書)로서 각각 1665년에 《성교간요》(聖敎簡要)와 1669년에 《천주정교약징》을 간행해 내고 있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중에서《성교간요》는 특히 양광선(楊光先)의 《부득이》(不得已)에 대한 답변으로 찬술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교간요》는 천주교(天主敎)에 대해 극렬히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던 양광선의 논조에 대항해 천주교의 핵심 교리를 정리하여 제시한 것이었는데, 이것 이전에도 양광선의 천주교에 대한 방서(謗書), 즉 《부득이》에 대한 답변서는 이미 저술되었으니 그것은 3년 앞선 1662년에 찬술된 《천학전개》였다.

 

이 《천학전개》는 서문 10쪽, 본문(本文) 14쪽 분량의 소책자로8), 비뢰지(費賴之, Louis Pfister)가 《천학진전》(天學眞銓)이라 표기했었다가 후에 이렇게 바뀌어 불리게 된 것으로, 원래는 이류사와 안문사의 저술인데 출간할 때 이조백(李祖白) 저 · 허지점(許之漸) 서(序)라 하여 표면적으로 밝혀져 놓은 것이었다.9) 하지만 양광선이 《부득이》 저술을 통해 《천학전개》에 대해 공격을 집중하여 천주교 비판의 각을 세우자, 이에 대한 재차 반격을 꾀하였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앞서 살핀 바 있는 《성교간요》의 간행이었으며, 아울러 같은 시기에 간행된 또 하나가 《부득이변》(不得已辨)이었다. 다만 《부득이변》은, 양광선이 《부득이》에서 주장한 바를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어 내용이 상당한 양의 것으로 논리적이고 학문적인 것인데 비하여10), 《성교간요》는 제목 자체에서 풍기듯이 그 요점만을 간추려 내어 정리하여 일반인들에게 널리 읽히기 위한 대중적인 것으로 보아 틀림이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성교간요》는 양광선의 공격에 대한 답변을 위해서 저술되었으므로 일반인들에게 천주교 교리(敎理)의 진면목을 알리기에는 부족한 대목이 있다고 여겨져 이를 보완하여서, 1668년에는 《주교요지》, 곧 《성교요지》란 제목으로 거듭하여 교리에 대한 정리 소개를 꾀하고 있는 듯하다.

 

이에 뒤이어 이듬해에도 재차, 지금까지의 《천학전개》 · 《성교간요》 · 《성교요지》 등을 토대로 삼아 천주교 교리의 핵심을 정리하여 간행한 것이 《천주정교약징》이었는데, 이 책의 간행은, 당시의 강희 황제(康熙皇帝)에게 봉정(奉呈)하기 위하여 1669년에 《서방요기》와 같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강희제에게 봉정된 이 책들 그리고 그에 앞서 저술된 천주교 교리서들은, 이들이 북경(北京)을 중심으로 전교 활동하면서 천주교에 관심을 표명하는 한문(漢文)을 해독할 수 있는 누구에게나 제공되었을 것이며, 더욱이 교리를 배우는 이들에게는 귀중하게 여겨져 영세 이후에도 여전히 소중히 지녔을 것임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고 하겠다. 요컨대 이류사가 중심이 되고 동료 예수회 신부들이 힘을 합하여 찬술한 《천학전개》 · 《성교간요》 · 《성교요지》(즉 《주교요지》) 그리고 《천주정교약징》(즉 《성교약징》[聖敎約徵]) 등은 천주교 교리서로서 당시에 뿐만 아니라 북경을 중심으로 한 같은 예수회 신부들의 천주교 전교에 있어 매우 요긴하게 활용되었던 것이다.11)

 

이러한 이류사의 천주교 교리서 간행과 관련된 일련의 역정(歷程)을 되짚어가며 상세히 살피다 보면, 그 가운데서도 무엇보다 《주교요지》의 저술 및 간행이 중국 천주교회사 자체에서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결코 소홀히 다룰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류사의 역 · 저서 중에서 점하는 《주교요지》의 위상(位相)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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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용필, 《한국천주교회사의 연구》, 韓國史學, 2008. 앞서 잠시 거론한 바 있는, 利類思의 《主敎要旨》 원문 입수 경위에 대해서도 이 책의 83쪽에 적어 두었다.

 

2) [法]榮振華 等著, 耿昇 譯, 《16-20世紀入華天主敎傳敎士列傳》, 桂林 : 廣西師範大學出版社, 2010. 참고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까 하여, 譯者가 밝혀놓은 이 책의 구성을 소개하면 다음이다.

(1) [法]榮振華 著, 《1552-1800年在華耶?會士列傳》, 羅馬耶?會硏究會 · 巴黎拉杜宰和阿奈出版社聯合出版, 1973.

(2) [法]方立中 著, 《1697-1935年在華遣使會士列傳》, 北平遣使會書局, 1936年版.

(3) [法]熱拉爾 · 穆賽 [法]布里吉特 · 阿?烏 主編, 《1659-2004年入華巴黎外方傳敎會會士列傳》, 巴黎外方傳敎會?案館, 2004年版.

다만 이 중에서 (3)의 書名은 원래 《1659-2004年遣使會士列傳》이지만, 譯者 耿昇이 그 가운데서 入華한 遣使會士의 列傳만을 選譯하면서 이렇게 ‘更名’하였다는 사실을 자신의 <總序>, 001쪽에서 밝히고 있음을 주목하고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3) 蕭若瑟, 《天主敎傳行中國考》, 河北省獻縣天主堂, 1931 ; 民國叢書編輯委員會 編, 《民國叢書》 第1篇 11 哲學 · 宗敎類, 上海 : 上海書店, 1941.

 

4) 노용필, <해제 : 페르비스트의 생애와 《교요서론》 저술의 역사적 의의>, 《釜山敎會史報》 63호, 2009 ; 修訂 加筆, 페르비스트 지음, 노용필 옮김, 《교요서론 : 18세기 조선에서 유행한 천주교 교리서》, 한국사학, 2013, 13쪽.

 

5) 《近代漢譯西學書目提要 明末至1919》, 北京 : 北京大學出版社, 2012.

 

6) 이는 아마도 《近代漢譯西學書目提要 明末至1919》의 編著者 張曉가, 오늘날 中國에서 국가적인 사업으로 진력하는 ‘漢學’(Sinology) 연구 사업의 일환으로 이 編著를 냈을 뿐이고, 또한 그 자신이 天主敎를 단지 연구 대상의 일부로 여길 뿐 이해의 정도가 낮은 데에서 말미암은, 그래서 중국 漢學 연구의 수준을 여실히 드러내 주는 사안이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측면의 노출은 이 <표 2>의 12번째 서적 《天學眞詮》의 저자명이 ‘利類斯’라고 표기가 되어 있지만, 기실은 이 책의 저자 역시 ‘利類思’이나 잘못 표기됨으로써 저자명 색인의 ‘利類思’에서도 누락되어 있는 데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7) [葡]安文思 著, 何高濟 · 李申 譯, 《中國新史》, 鄭州 : 大象出版社, 2004 ; 重印, 2007, 180쪽. 이 인용한 글 가운데는 당시의 영문 표기가 현재와는 달라 혹 誤字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讀者가 있을 줄 안다. ‘Jusus’ 같은 게 그 실례인데, 원문 그대로 인용하는 것임을 헤아리시라.

 

8) 吳相湘 主編, 《天主敎東傳文獻續編》 2, 臺北 學生書局, 1966, 1045~1068쪽.

9) 方豪, 吳相湘 主編, <影印天學傳槪序>, 《天主敎東傳文獻續編》 1, 臺北 學生書局, 1966, 41~42쪽.

10) 利類思, 《不得已辨》, 1665 ; 吳湘相 主編, 《天主敎東傳文獻》, 1966, 225~322쪽.

 

11) 이상의 상세한 내용은 노용필, <丁若鍾의 《쥬교요지》와 利類思의 《主敎要旨》 比較 硏究>, 《韓國思想史學》 19, 2002 ; 《한국천주교회사의 연구》, 韓國史學, 2008, 92~95쪽.

 

 

《주교요지》의 역문(譯文) 및 원문(原文)의 영인본(影印本)

 

 

▶ 《주교요지》의 역문

▶ 《주교요지》 원문의 영인본

 

 

주교요지 짧은 서문

 

天主의 성스런 가르침의 그 도는 깊고 오묘하다. 그 뜻에는 실제 요점이 있다. 요점은 어디에 있는가? 천주를 인식하는 것이다. 천주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사람을 위하여 천지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을 위하여 降生하셔서 고통을 받으셨으니, 천당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으며 사람의 영혼이 불멸함을 믿지 않을 수 없다. 十戒를 정한 바, 힘써 행하고 지켜서 천주를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기를 구해야 한다. 이것이 요지와 차례의 서술이 있게 된 이유이다. 참 근원과 실제의 맥을 따라서 가르쳐 함께 보고 道의 깊고 오묘한 것이 다 갖추어져 있으니, 각각의 사람으로 하여금 점차 세상의 더러움을 버리고 머리를 들어 법을 따르고, 크나크신 천주를 믿고 인식하게 하여, 사랑할 바가 여기 있고 저기에 없음을 안다면 나의 간절하여 그만둘 수 없는 마음이 혹여 조금은 위안이 될 것이다.

 

강희 무신(1668) 국월(9월) 예수회사 이마두 씀

 

 

만물에는 만물을 만든 자가 있다

만물을 만든 자는 오직 하나다

만물을 만든 자가 만물을 주재한다

천주는 체가 하나이며 위가 셋이다

하늘 · 땅 · 사람 조상의 근본을 캐다

천주께서 강생하시다

영혼은 멸하지 않는다

천당과 지옥

십계

영세

고해

주님의 가르침이 세상을 다스리는 증거

 

주교요지

 

서쪽 끝 예수회 선교사 이류사 지음

같은 회 안문사 · 남회인 전체 교정

 

 

만물에는 만물을 만든 자가 있다

 

모든 만물은 스스로 만들어질 수 없고 반드시 만든 자가 있으니 所以然[그렇게 된 까닭]은 한 물(物)이 스스로 만들어짐이 있음과 같다. 즉, 이 한 物에는 자기의 앞이 있고 또 자기의 뒤가 있다. 자기의 앞에 있는 것이 자기의 소이연이 되고, 자기의 뒤에 있는 것이 자신의 效가 된다. 천하에 한 物이 능히 그러한가? 그러므로 여러 만들어진 소이연을 연유하여 번갈아 서로 추구해 보면 역시 궁극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반드시 이르러 그친 바가 있으니 그것을 모든 만물이 최초로 만들어진 소이연이다.

 

처음 소이연은 중간의 소이연이 되고 중간의 소이연은 마지막의 소이연이 된다. 만약 처음 소이연이 없다면 중간의 소이연도 없게 되는데 하물며 마지막 소이연이 있겠는가? 이것으로 만물이 지어진 소이연을 미루어 찾아보면 반드시 최초의 만들어진 소이연에 이르러서 그치게 될 것이니, 이를 造物者의 天主라고 말한다.

 

천주는 만들어짐이 없으시고 스스로 존재하셔서 늘 있음을 만물에 주시면서도 스스로는 있음을 받음이 없고 등급과 한계를 받음이 없으시고, 오직 스스로 아름다우시다. 항상 만물에 각기의 아름다움을 주시지만, 스스로는 등급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등급과 한계를 받지 않는다고 하는가? 유일하고 스스로 아름다워 항상 만물에 각기 아름다움을 주시지만 스스로는 등급을 받지 않으신다.

 

만물의 덕은 비록 각각 온전함을 이루지만, 그 아름다움을 논해보면 그 존귀함은 매우 같지 않다. 조금 아름다운 것도 있고 많이 아름다운 것도 있다. 존귀함도 역시 그러하니 온갖 부류가 고르지 않아서 매 무리마다 각각 많고 적은 지칭이 있다. 하나에서 지극함에 이르는 것으로 준칙을 삼는다. 예를 들어, 두 가지 뜨거운 것을 함께 비교하면 피차가 같지 않아서 혹은 많이 뜨겁기도 하고 혹은 조금 뜨겁기도 하니, 각기 지극히 뜨거운 것에 혹은 가깝기도 하고 혹은 멀기도 한 것으로 인하여 구별하는 것이다. 이것은 만물 가운데 반드시 한 가지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존귀한 것이 있으니, 한 있음이 만물의 준칙이 된다. 만물은 각각 부여받은 분수가 같지 않아서 다소 다름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극히 존귀하고 아름다운 것은 만물의 존귀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소이연이 됨을 알 것이다. 만물은 순순히 받으니 이를 天主라 한다.

 

혹자는 말하기를 “만물을 나누어 靈이 있는 것과 없는 것 두 品類가 있으니, 각각이 본래의 始原으로 돌아가지 않음이 없다. 영이 있는 것은 이른바 理로 돌아가고 영이 없는 것은 이른바 性으로 돌아간다. 이것으로 충분한데, 어찌 반드시 만물의 원시를 천주라고 말하는가” 하였다.

 

(답하여) 말하였다. “아니다, 아니다, 性과 理는 만물의 原始가 될 수 없다. 性과 理는 스스로 있는 物이 되는 것이 아니고 각각 一元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性은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각 物마다의 본연이니, 靈物에 있는 것은 靈性이라고 이르고 다른 物에 있는 것은 物性이라고 이른다. 물성은 지각이 없어 행함에 반드시 중간에 향하는 목적이 있으면 영자가 끌어 움직이는 데로 돌아가 각기 제 자리를 얻게 된다. 이것은 性이 物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物性을 끌어 움직이는 것이 物의 근원이 됨을 알 수 있다. 이를 천주라고 이른다. 오직 性의 처음을 알아야 理를 말할 수 있다. 理는 스스로 있는 物이 아니고 바로 靈性이 갖추어짐이니, 사물을 궁구하여 이르는 것이다. 理는 혹 인성에 있기도 하고 혹은 사물에 있기도 하니, 理가 物에 있으면서 人心에 합해지면 사물이 진실하게 된다. 인심이 저 物에 있는 理를 궁구하면 格物(致知)이라고 한다. 이것은 理가 物에 있거나 마음에 있어서 모두 의뢰함에 속하기도 하고 변함에 속하기도 하여 物의 뒤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찌 物의 근원이 될 수 있겠는가? 物의 근원이 됨에는 반드시 지극히 처음이고 지극히 스스로여서 바꾸어지지 않는 有가 필요하니 만물의 지극한 원조가 된다. 이 분을 天主라고 이른다.”

 

 

만물을 만든 자는 오직 하나다

 

만물에게 각각 다른 아름다움이 주어지는 것은 반드시 본래 갖추어진 만물의 아름다움이다. 무릇 이미 없는 것은 남에게 베풀 수가 없으니 이를 기준으로 하면 조물주는 유일할 뿐이다. 하나가 아니어서 반드시 서로 달라 저기에서는 마땅히 아름답고 여기에서는 반드시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이것이 소유한 것을 혹 저것이 가지지 못한다면 만물의 아름다움이 본래 갖추어진 것이라 이를 수 없다. 더구나 우주 만물은 지극히 번다하고 지극히 다르나, 상하 각각이 일정한 만들어짐이 있고 베풀어진 命이 있다. 명을 받들어 마침내 모두 화합하니 하나와 같다. 여기에서 상상할 수 있으니 유일하지 않은 것으로 하여금 각각 차례를 매김으로써 합일로 돌아가는 것은 반드시 그렇게 될 수 없다.

 

대개 하나는 하나의 근본 소이연이 될 수 있으나, 많은 것은 하나의 근본 소이연이 될 수 없다. 곧 많은 것으로 하여금 하나의 소이연이 되게 하려면 역시 먼저 많은 것을 하나로 합한 후에 하나가 그 소이연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근본 소이연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우주 안의 만물과 인륜은 본원이 하나가 아니라 마치 강의 발원지가 각각 그 원조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아 만물의 무리가 모두 하나의 물의 근원을 지녔다고 하는 것은 거의 믿을 수가 없다”고 한다.

 

(답하여) 말하기를, “각 만물의 사적인 근원은 진실로 하나가 아니다. 저것은 만물의 덕성에 있어서 근원이 모두 갖추어지지 않으면, 각 인류에게 그 덕성은 각각의 한계가 생기니 어찌 하나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만일 무릇 만물의 공공의 근본이라면 만물의 덕성을 모두 아울러 초연히 원만한 것이니, 어찌 두 개를 얻을 수 있겠는가.”

 

 

만물을 만든 자가 만물을 주재한다

 

어떤 나라에 들어간 자는 그 나라의 규모와 움직여 만들어 내는 것들을 보면, 비록 그 나라의 임금을 보지 않아도 그 임금과 벼슬아치들이 다스리는 바를 알 수 있다. 어떤 집에 들어가 그 재산의 운용되는 것을 보면 가장을 보지 않아도 가장이 집안을 감독하고 다스리는 바를 알 수 있다. 하늘과 땅의 넓고 두터움을 본다면, 하늘에서 시행되는 것은 日月星辰이 있어 밤낮으로 운행하여 四時의 순서가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 땅에서 시행되는 것은 날고 움직이는 것과 식물들로 각각 유전되어 그 대를 잇는 것들이 뒤섞어 어지러워지지 않는다. 나에 이르러서는 기관, 뼈, 五臟, 六腑가 서로 같지 않은 것이 없다. 만물이 모두 그러하니 조물자는 큰 능력과 지혜를 갖추고 그 사이를 주재하신다. 이것은 논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소이연을 미루어보면, 대개 만드는 자의 행위는 반드시 향하는 바가 있으니, 무릇 처음 만든 자의 행위에 속한 차례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으니, 만약 그 차례에 속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 행위에 속하지 않는다. 두 가지가 서로 있고 없음이 되니, 지금 만물이 모두 조물자가 만드는 것에 속하여, 만물이 조물자에게 다스려짐에 속하지 많을 수가 없다. 조물자가 만든 물건을 얻는 데에는 장인이 물건을 제작하는 것과 같다. 장인이 물건을 제작하는 데에는 일일이 차례대로 하여 각각 그 마땅한 바를 얻게 되니, 어찌 조물자는 안 그러하겠는가.

 

반드시 만물을 만들 때 일일이 일의 순서대로 만든다. 여러 가지를 다스리는 데 잘 다스리는 자는 이로운 것을 이루고 나쁜 것은 제거한다. 만약 만물이 모두 조물자가 미리 구상한 대로 이루어진다면, 만물은 마땅히 다 선하고 악한 것은 없으며 모두 이롭고 나쁜 것은 없을 것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많은 것이 선하지 않고 서로가 해치는 것은 어째서인가. 

 

무릇 조물자가 그 物의 악한 것을 용납해 주어, 다스리려고 하여도 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다스릴 수 있는데 다스리지 않는 것인가. 나는 모두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 우주 중에 악한 것이 많은데 천주가 이를 제거하지 않은 것은 만물을 주재하고 다스리는 데 올바르게 연유하면 그 이치와 형세가 마땅하게 되나, 그렇지 않으면 不能과 不治가 있는 것이다. 무릇 물건은 公司[공적으로 맡겨진 것]와 私司가 있는데, 私司에 속한 물건은 해롭게 할 수 없고 公司가 맡지 않은 바가 없어 그 형상이 사사로이해로운 것으로 공익을 돌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무릇 물건 안에 빠진 것이 있어 개인적인 성품을 거스르더라도 반드시 공적인 성질에는 따르게 된다. 공적인 성질로 이것을 잃어 저것을 얻고 아울러 만물의 공리를 향하는 것으로 이것이 죽으면 저것은 산다. 만물의 종류는 이로 인하여 존재를 얻게 된다.

 

천주가 만물을 지극히 공적이고 지극히 마땅하게 주재하니, 매번 특히 사사로운 한 가지를 허락함으로써 한 宗類의 이로움을 보존하니 우주의 아름다움이 이에 온전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아름다움에 흠이 생겨 주장하여 다스린다고 칭할 수 없다.

 

혹자는 말하기를 “물물마다 모두 천주가 끌어 안배하니 우주 만물이 절대 우연히 나타난 것이 없어 원래 모두 그러한 것이다”라 하였다.

 

(답하여) 말하기를 “공공의 소이연은 반드시 우연히 나타난 것이 없고, 오직 사사로운 소이연이 우연을 가진다. 대개 우연이라는 것은 본래 만든 자가 지향했던 것과 같지 않음에 인한다. 비록 본래 만든 자가 지향하는 바와 같지 않더라도 공공의 소이연에 연유하지 않음이 없다는 뜻이다. 마치 갑이 작용하는데 본래 작자가 하려는 것을 돕지 않으나 을이 이를 막음에 인하는 것과 같고, 마치 나무가 불에 가까이 가도 타지 않는 것은 물이 실지로 이것을 막고 있는 것과 같다. 무릇 사사로운 소이연은 공공의 소이연의 명령을 듣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나타나는 바이다. 또 공공의 소이연이 지향하는 바를 존숭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효험이 있다고 이르는 이유이다. 사사로운 소이연이 지향하는 바를 피하는 것은 괜찮으나, 공공의 소이연이 지향하는 바를 피한다고 하면 안 된다. 그러나 만든 것이 나타낸 것이 비록 본래 이를 만드는 이가 하려고 것과 같지 않은데 이르더라도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 공공으로 작자의 하려는 것을 존숭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절대 우연이 될 수 없다. 모두 주재자의 뜻이 나타내는 것에 연유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집안의 감독하는 이가 두 명의 하인을 시장에 보냈는데, 그들은 서로 간 일을 듣지 못하고 문득 서로 마주쳤다면, 두 하인은 혹 우연이라고 여기나 집안의 감독관은 어찌 이를 우연이라고 하겠는가” 하였다.

 

 

천주는 체가 하나이며 위가 셋이다

 

천주의 體는 하나요 位는 셋이니, 이는 성스러운 가르침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우리가 본성의 능력을 증거하는 것은 오직 피조물로 인하여 조물자를 알 수 있고 여러 가지 드러난 것을 미루어 그러한 바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오직 체가 하나임을 알고 그 위가 셋임은 알지 못한다. 세 위를 모두 알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여 천주께서 묵묵히 비추는 것이니 반드시 그 연유한 바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비록 천부의 총명함을 초월하는 앎이어도 진실로 이치의 마땅함을 초월하지는 못한다. 모름지기 신성함이 있는 자는 본디 총명함[환히 깨달음]이 있고 애욕 역시 있다. 총명함을 맡은 자는 먼저 이를 끌어 알게 하고 애욕을 맡은 자는 후에 이를 따라 행하게 한다. 총명한 자는 이미 사물을 밝히고 반드시 사물의 형상을 내어 존재하게 하니 이것은 神性의 오묘한 능력이시다.

 

무릇 신성함이 있는 것은 모두 그러한데, 천주께서 지극히 신령스러워 모두 밝게 사리에 통하는 것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미 성정의 오묘함을 다 밝히어 그 형상을 내시니, 이 형상은 천주 내부에서 발한 온전한 형상이다. 그러므로 천주는 반드시 性과 體가 같으나 位는 같지가 않다. 대개 주고받는 차례가 있는 것이다. 주는 데에 나아가는 것을 일러 아버지라고 하니 一位이다. 받는데 나가는 것을 일러 자식1)이라 하니 二位이다. 또 아버지가 자식을 낳는 것을 밝히는데 반드시 사랑으로 하고 자식은 아버지에게 생명을 받는 것을 밝히는데 반드시 친히 여긴다.

 

서로 친애하니 사랑하는 성정이 나타나는 이유이다. 이 애정은 천주께서 내부에서 발하는 정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천주께서는 반드시 성과 체가 같다. 다만 그 두 위치되는 것[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친한 이유로 말미암아 차례가 다를 수밖에 없으니, 이에 聖神은 三位라고 이른다. 아들이 비록 아버지로부터 연유하고 성신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연유하지만 다만 그 내고 발하는 것은 잠시도 기다리지 않고 하나가 되니 無始[처음이 없는 것]가 진정한 천주이다. 오직 선후가 근원적으로 있는 것이지 선후를 정하는 때가 있는 것이 아니다.

 

대저 三(位)이 一(體)이 되는 오묘한 뜻은 천주의 全能 · 全善에서 연유하며, 또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대개 천주가 무궁한 능력과 선함은 비록 인간 세상 안에서 이루어짐이 분명하게 나타나니(이른바 外傳이다), 따라서 함이 없어도 있을 뿐이다. 근본 증거와 큰 능력에는 다함이 없어 각 만물에 아름다움을 전달하여도 무궁하여 다할 수가 없고 무궁한 선으로 바로 잡는다. 다만 피조물에 인해서는 가질 수 있는 것(?2))만이 있고 ‘무궁한 있음’(無窮之有)은 받을 수 없다. 오직 이 셋이 하나가 되는 오묘함(이른바 內傳이다)은 실제 무궁한 있음이다. 第一位가 第二位를 내어 이미 제2위에 本體를 실로 그 능력을 다하는 것이며, 두 位가 서로 애정을 발하면 실제 끝없이 주는 것을 다하는 것이다.

 

이 오묘한 이치를 인성에 대략 비유해본다. 갑 · 을 · 병 세 사람이 있는데, 비록 많은 사람으로 나누어도 인성은 오직 하나여서 온전히 갑에게도 있고 을에게도 있고 병에게도 있다. 또 마치 사람의 영혼이 온전하게 온몸에 있고 각 사지에 온전히 있는 것 같아 모두 수와 양이 많고 적음과 등급이 다름이 없다. 천주의 성과 체는 온전히 세 위에 있으시니 각 위치에 온전히 있는 것 역시 수와 양이 많고 적음, 등급이 다름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위에서 비유로 들은 것은 이와 비슷할 뿐이고 천주의 오묘한 성정을 어찌 피조물에 비유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요약하여 밝히면 반드시 格物致知의 학문으로 시작하여 성정을 초월하는 학문을 이은 것이니, 이 책을 잘 살펴서 점차 구하면 통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 · 땅 · 사람 조상의 근본을 캐다

 

오직 천주께서 無始함에서부터 있으시니, 저 피조물은 반드시 有始하여 있는 것이다. 대개 만물이 있고 없고는 천주께서 하고자 하는 뜻이 있고 없음에 연유한다. 천주께서 만물을 만들고자 하는 데 인연이 되어 있음의 所以然이 된다. 그런즉 만물이 원래 그렇고 아니고는 천주께서 원래 그러하려고 했는지 아닌지에 연유한다. 천주께서 원래 그러하고자 한 바는 오직 그러할 뿐이다. 다른 물건을 논해보면, 하고자 할 수도 있고 또 하고자 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만물이 無始을 따라 만들어짐을 받고 못 받는 것은 천주께서 이미 정하신 데에 연유한다. 다만 모든 물건의 이치는 추측할 수 있으나, 오직 천주의 뜻은 다 추측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천주께서 어떤 날에 우주를 만들고서 해가 얼마간 지나 천주께서 묵묵히 인도하시는 바를 기다리지 않는다면 진실로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옛날에 천주께서 옛 성인의 아름다운 가르침을 친히 깨우치고 책에 기록하도록 명하셔서 후세에 알리었다. 천주께서는 경의 앞 권에 천지를 만들고 인물을 낸 것과 역대의 인명과 갈라져 나간 계보까지 다 실으셨다. 다만 여러 나라의 역사서가 천지개벽의 시작과 여러 왕조의 햇수를 기록하였는데, 모두 천주께서 기록한 것과 현격히 떨어진 것이다. 宋나라 유학자들이 만든 것과 諸子家의 잡언을 취하였고 도가의 말을 모아서 역사를 만들었다. 천지개벽부터 春秋가 지어지기까지 270만 년에 邵雍의 元會運世의 說 역시 그러하니, 更生五行에 견강부회한 것이 많다. 불경에서 이르길 항상 물가의 모래 한 알이 천지를 한번 열고 닫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괴이하고 허망한 소리이다. 모두 진실로 전할 것을 얻지 않고 각각 나름의 뜻대로 추측하고, 추측하기 어려운 일은 책에서 빼버렸다. 唐虞[堯舜 시대] 때부터 끊어져 이 전의 것을 밝히고자 하나 모두 헤아리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들이다. 지금 내가 經 안의 여러 왕조의 지난날을 의거해 보면, 천지가 있은 때부터 康熙 乙巳年 6,865년 중국 역사서에 伏羲神農氏 때에 문예를 제정하고 법도를 일으키고 관청 제도가 시작되고 농사를 시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와 원초의 시기 사이의 거리가 아주 멀지 않은데, 어찌 이전 몇 만 년 전에는 사람들이 모두 어리석어 신농씨가 농사를 시작하고 황제가 옷을 만들기 시작하기만을 기다렸겠는가?

 

천지가 만들어진 순서를 상고해본다면, 經에 天主께서 천지 만물을 만든 것을 실어야 한다. 이는 6일 동안 이루어졌으니, 첫째 날에 천지우주의 시초가 지어졌고 아울러 태초의 빛의 선행이 이루어져 낮과 밤이 나누어졌다. 두 번째 날에 별자리를 늘어놓고 불기운과 함께 하늘땅 두 가지를 행하셨고, 셋째 날에는 이에 더하고 보태어서 땅 위에 물이 돌아가는 한곳으로 하여금 여러 물건을 생장하게 하셨다. 넷째 날에는 태초의 빛을 모아 다시 해와 달과 여러 별을 만드셨다. 다섯째 날에는 물속에 헤엄치는 여러 水族들을 만들었고, 육일에는 땅에 달리는 짐승들과 인류를 만드셨다. 천주께서 잠깐 사이에 만물을 만들고 육일 동안 인간을 내었으니, 점차 만물을 만들어낸 공이 있으시다. 천지의 주인과 조물자는 유일한 주인이시다. 여섯째 날에 인류 남녀를 각 하나씩을 내시어 남자를 아담[亞當], 여자를 에와[厄襪]라 하여 인류의 원조로 하셨다. 천지 만물을 만들고 인간을 만들고 올바르게 세상의 여러 종을 내시었으니, 모두 우리가 되어 베풀어진 것이다. 먼저 흙으로 몸을 만든 후에는 그 안에 영혼이 만들어 이루지 않았었는데, 서로 맺어져 사람이 되었다. 그 영혼과 성정을 품부 받음이 당연하게 되어,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며 떳떳한 常道를 이루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짝을 지음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으니, 萬歲의 夫婦의 正道를 보인 것이다. 인류가 모두 한가지 근원으로 함께하여 나왔으니, 인간은 마땅히 서로 사랑함을 보이는 형제이다. 천지를 열은 功이 일곱 번째 날에는 다하여 聖日이 되었다. 우리 세상 사람들을 인도하기를 육일에 인간사를 다루고 제 칠일에 本靈의 일을 다스리니, 크나크신 천주가 천지인물을 만드신 은혜를 기리는 것이다.

 

천주께서 천당에 원조를 두어 가장 아름답고 즐거운 곳으로 만드셔서 바람과 비와 춥고 더움, 병과 고통을 없애고 만물이 자신의 命을 따르게 하고, 나고 자라는 것이 인공으로 되게 하지 않고 각 이치가 학습되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게 하셨다. 오직 천주의 명을 지키면 영원히 살고 죽지 않으며, 세상에서 다 하면 천당으로 올라가 천주를 만나보게 하셨다. 때로 마수가 우리를 시샘하고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게 꾀어내니, 이를 따르게 되면 천주께서 하사해 주신 것을 실추시켜 마침내 지옥으로 쫓겨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병마와 늙음, 근심과 우환이 이를 따라 일어나니, 땅에는 가시나무가 자라서 힘껏 밭을 갈고 물을 대어도 다할 수 없으니, 百果가 나지 않고 천당의 문이 닫혀서 막혀버린다. 인간이 천주의 명을 해치면 금수가 인간의 명을 해친다.

 

비록 본성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외부에서 주어진 아름다움으로 성품이 윤택하더라도 모두 뺏겨 없어지니, 천주께서 후세에 남기어 父子의 죄는 각기 서로에게 미치며 元祖의 더러운 죄가 후세에 남겨지는 것이다. 대개 아담이 인류의 원조요, 몸체이니 모두 한 인간에게 달린 것이다. 나무에 비유하면, 뿌리에 독이 들어가면 결국 과일과 잎에 나타나니, 모든 體는 이 뿌리의 독인 것이다. 다만 후세 사람이 비록 원조의 뿌리로 인해 그 기세와 품부받은 성향이 열악하더라도, 본성이 아름다우면 오히려 그 폐단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선이 되고 악이 되는 것은 주인으로부터 속해 있는 것이니, 원조로부터 허물을 다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아담이 이 끝없는 죄를 짊어지고, 지난 과오를 매우 후회하는 마음이 있어 스스로 책망하고 스스로 죄를 주며 때로 천주에게 바라며 슬프게 부르며 면죄를 받고 하려고 930년이 걸렸으나 죽고 말았다.

 

 

천주께서 강생하시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의심하며 쾌히 여기지 않는 것으로 天主께서 降生한 일만 한 것이 없다. 혹은 그것이 마땅하지 않음을 의심하고 혹은 할 수 없음을 의심하고 혹은 그 형세를 의심한다. 각각 일정 부분을 밝히려 하나 천주의 전지, 전능하며 온전히 선함은 그 정도를 추측하기 힘드니, 강생의 오묘한 뜻이다. 고금의 여러 해석이 그치지 않는 것 역시 천주께서 강생한 일만 한 것이 없다. 그 원함과 힘과 뜻과 효험 등을 알리는 것으로 서양에는 수많은 서적이 있으나 다 번역되지 않았다. 내가 옛날에 저술한 超性學要 중에 강생의 실제 의미가 있는데, 이것은 그 요지 3가지 실마리를 취한 것이다.

 

첫째, 강생의 뜻을 말하고 둘째, 강생의 설을 말하고 셋째, 강생의 일을 말한 후에 그 의심스러운 것에 대해 답하겠다. 모름지기 천주께서 인간을 만들고 천지 만물을 만들어 영원토록 복을 누리게 만든 사실을 알고 있다. 천지 만물을 다 만든 후에 인간을 만드셨으니 올바름으로써 종류마다 모두 우리가 되게 하시니, 베풀어주심에 우리에게 無量으로써 구실할 바를 받게 하시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우리 마음에 충만할 수는 없었다. 올바름으로써 우리가 천상의 영원한 복을 얻게 하시니 비로소 인간이 원하는 것을 채우게 되었다. 세상에 사람이 없으면 천지만물을 만들 수 없고, 천상에 영원한 복이 갖추어 있지 않으면 사람을 낼 수가 없다. 이에 인간의 조상이 천주의 명을 거스른 후에 그 원죄가 남아 인류가 하늘로 올라가 영원한 복을 누릴 수 없게 하였고 재앙의 그물로 떨어뜨렸다. 그러나 이것은 어찌 천주께서 인간을 만든 본래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천주의 인자함은 끝이 없으니, 어찌 인간을 버리고 돌아보지 않으시겠는가. 인간을 만들고 반드시 인간을 구원하시니 단지 인간을 구하는 법을 얻으셨다. 대개 천주께서 행하시는 일은 반드시 완전하고 仁義가 빠진 것 없이 각각 드러나니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드러내지 않는 것이 義이고, 남의 죄를 벌주는 데 드러내지 않는 것이 仁이다. 때문에 그 전지전능함을 이용하여 仁義를 모두 온전하게 드러내어 몸소 강생한 것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天主와 子弟라는 두 위치에서 인성과 본래의 성질을 취하여 예수라는 하나의 위치에서 서로 맺어지니, 이 예수는 실제로 천주이면서 실제로 인간이다. 그 사람됨을 논하면 남을 대신하여 책임을 지고 고통을 받을 수 있는 이다. 그 천주됨을 논하면 남을 대신하여 책임을 돌려 속죄하도록 도우는 이다. 남을 대신하여 책임을 지고 고통을 받는 것은 그 인자함이 끝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남을 대신하여 속죄하는 것은 지극히 공정하고 엄한 뜻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대개 죄의 경중은 범하는 바로써 하고, 아울러 죄를 범하는 것이 다하는 것을 준칙으로 삼으니 천주가 지극히 높은 이상이 아니고 우리가 지극히 낮은 이하도 아니다. 무궁함으로 이를 돕고자 하니, 무한의 덕이 아니면 죄의 만분의 일도 속죄 받을 수 없다. 그러니 하물며 온 세상 사람들의 죄를 다 보상하고자 함에 있어서랴! 또 천상의 여러 신은 유한의 덕이니 대신 속죄하는 것은 오직 천주가 강생하는 일이다. 인류가 용서받는 것은 천주가 인간을 만든 본래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降生을 설명하는가. 천주께서 강생하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천주의 성정이 인성과 맺어져 예수라는 한 위치가 되었다. 예수는 인간과 천주가 된 것이다. 그 사람됨을 논하면 피조물에 속하여 그 지능과 여러 덕의 양이 모두 한계가 있다. 그 천주됨을 논하면 조물주이니, 전지전능과 온전한 선을 갖추어 무한한 덕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시작과 세상에 나기 시작함이 있다고 말한다. 천주는 시작이 없으니 無始를 따라 세상에 나기 시작함이 없다. 無始生[시작함이 없이 태어나는 것]을 일러 降이라고 하고 인간이 되었다고 한다. 하늘에 있을 것을 구하지 않은 연후에 땅에 내려오니, 천주께서 있지 않은 바가 없으시다. 아직 강생하지 않은 것은 세상에 본래 있어서이고, 그 강생함에 이르러서는 역시 하늘과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극히 높아 마주할 수 없는 천주께서 지극히 낮은 사람과 맺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降이라고 한 것이다. 또 예수가 아니면 그 인성을 변화하여 천주를 이루고 또 두 성질이 교화하여 합일될 수가 없다. 이에 천주의 성질과 인성이라는 각각 다른 것이 예수라는 한 위치에 머무르는 것이다. 마치 우리의 영혼과 육신이 한 사람을 이루는 것과 같다. 이는 천주와 인간이 하나의 예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예수가 두 성질을 갖추고 있으나 그 지위가 유일하여 대개 각 성질이 본래의 위치에서 발하니, 하늘에서는 천주이고 강생하여서는 오직 인성을 취한다. 인간의 위치를 취하지 않으면 인성이 막혀 본래의 위치에서 발하지 않는다. 인성이 비록 본래의 위치에서 발하지 않더라도 본래의 성정은 발한다. 이에 예수가 배고프고 피로하고, 덥고 추운 생사와 같이 인성의 일에 걸려서 오르내리는 것이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천주의 성질을 논하면 오르지도 않고 내리지도 않으며 움직임이 바뀌지 않는다. 강생을 하기 전이 이와 같으니 강생한 후에 역시 이와 같다. 다만 예수가 비록 두 가지 각기 다른 성정을 갖추었지만 천주의 성질과 인성이 맺어졌기 때문에 두 가지 성질의 명칭에 따라 함께한다. 이에 예수를 천주이고 사람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천주가 세상에 내려와 고통과 죽음을 받고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간 것이라 말한다. 마치 인간의 몸이 상처를 받고 오직 영혼은 상처받지 않는 것과 같다. 다만 영혼과 육신이 맺어진 것이다. 예수를 따르지 않는 이는 인간 형태의 몸이 상처를 받았다고 말하고, 바르게 말하면 어떤 사람이 상처를 받았다고 해야 한다. 천주가 인간의 몸과 맺어진 것이기 때문에 예수를 따르지 않은 자가 말하기를 인간이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나, 바르게 말하면 천주께서 어려움을 겪으신 것이라 해야 한다.

 

강생한 일은 무엇인가. 경전에 이것이 상세하다. 먼저 그 대략을 들면, 開闢하던 처음에 천주가 그 뜻을 이미 보이셨는데, 강생하기 1,500년 전 역사 기록 옛 가르침에 聖人이 서로 바라는 바를 서로 전하였다. 降生하실 때에 이르러 천주께서 天神을 지어 보내어 세상에 降生할 수 있도록 모친을 선택하여 알려, 童貞의 몸을 지키길 원하였으나 이미 이 일을 들으니, 남녀의 교감으로 말미암지 않고 마침내 천주의 전능함으로 그 모친이 아이를 잉태하여 낳을 것이라 하였다. 이에 그러나 처녀로서 겸손한 말로 허락하여 이에 삼가 곧 잉태를 하였다. 아홉 달 만에 태어나시니, 한결같이 천신이 알린 바대로 漢 哀帝 元壽 2년 동지 후 제4일 밤이었다. 태어나실 때 집안 가득 빛이 밝아서 낮과 같았고, 천신들이 와서 비호하였다. 공중에서 음악이 들리며 칭송하기를 “위로는 하늘이 크나크신 천주에게 복을 내리고 아래로는 땅이 善人을 화평하게 한다”라고 하였다. 하늘에서 이상한 별이 보여 외국의 세 임금을 인도하였으니, 그들은 각각 바칠 특산물을 가지고 천주를 만나 뵈러 갔다. 강생한 땅은 德亞國인데 천하 유일하게 진정한 전함[眞傳]이 있어서 異端에 물들지 않은 나라로, 또 천주가 개벽하던 초기에 인류의 조상을 화생하게 한 땅이다.

 

앞서 성인이 강생할 일을 미리 말하여 알고 있었으니, 그 날 이후 근거가 되어 경전에 실었다. 모두 이 나라에 존재하여 천주께서 강생하신 이름을 耶蘇라 하였다. 이를 해석하면 세상을 구한다는 것으로써, 강생하여 와서 세상 사람을 구함을 나타낸 것이다.

 

33년을 세상에서 사시면서 신령스럽고 기이함을 드러낸 것을 전부 기술할 수는 없다. 죽은 자를 살려내고, 벙어리를 말을 하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장님을 밝게 보게 하고, 병자의 병을 낫게 하고, 거대한 파도와 웅장한 바람을 멈추게 하고, 천지간의 온갖 신들이 모두 그 명령을 듣는 것과 같은 것들이니, 천지만물의 진정한 주인임의 증거이다.

 

훈계를 내리고 가르침을 세워 인륜의 지극함을 큰 요지로 하고 天學의 오묘함을 주요 가르침으로 삼았다.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의 도덕을 즐겁게 하고 후세인이 천주가 준비한 복됨을 누리게 하여, 인간이 하늘의 가르침을 따라가게 하였다. 오직 司敎가 오만함으로 예수의 때와 일을 살피지 않아 古經과 부합하여 참람하게 인간을 천주라 칭하여 그를 죽이려 도모하였다. 예수가 이로 인하여 세상을 구하는 공을 이루고자 드디어 저들이 해를 가함을 들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때는 춘분 보름 午時로 해와 달이 정확히 서로 마주하여 부분 일식, 월식에 응하지 않고 달은 일정한 운행을 어기고 해를 가려 버렸다. 우주가 어두워지고 전 대지가 진동을 하고, 돌이 서로 부딪혀 깨지고 무덤이 저절로 열려, 예수가 이미 죽어 세상에 다 드러나니 천지만물이 모두 천주를 애닮아 하였다. 3일 후에 부활하시어 세상에 40일을 거하셨다. 거듭 교리와 규범을 정하여 20개 지위의 종주들에게 명하시어 두루 만방을 비추시고 말을 다 마치신 후에 하늘로 돌아가셨다.

 

이제 앞서 말한 의문점을 풀려 한다. 한 가지 의문점은 천주의 무능함이다. 천주께서 전능하신지 명확하지 않다는 뜻이다. 무릇 이치에 어그러짐이 없이 모두 전능한 세계에 있는 것은 어떤 物에도 한계가 없어 만물의 덕의 능함이 모두 갖추어진 것이다. 지금 천주의 성질과 인성이 하나의 위치로 합해져서 실지로 인간의 마음과 생각과 상상을 초월하였다. 그러나 혹 천주의 성질과 인성이 예수에게 합해져서 하나의 物을 이루니, 두 성질의 명칭이 같은지와 두 성질의 실제가 각각 다른지 알 수가 없다. 혹은 강생한 후를 천주의 성질이 변하게 되었다 여기는데, 천주의 묘함이 있어 無始를 좇아 항상 일정한지 알 수 없다. 비록 강생하여 인성과 맺어졌으나 천주의 성질이 아주 바뀌지 않아 오직 인성이 높은 지위에 오른다는 것이다. 혹은 천주가 형상하고 ‘있는 몸’의 때에 구애를 받아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권리를 쉬게 된다고 여기는데, 강생하여도 천주의 성질이 보존되어 천지만물을 다스리는지 알 수 없다. 대개 천주의 성질은 무궁하고 묘함이 있어서 형상에 있을 때에도 그 형상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物에 머물러 있다고 物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니, 각 만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또 어째서 천주가 강생함을 의심하느냐는 것은 어째서 불능하냐는 것이다.

 

두 번째 의심은 천주가 강생하심이 마땅하지 않다는 것이다. 각 물이 서로 본성을 칭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천주의 본성은 만 가지 선의 근원이니, 모든 선을 잇는다는 뜻이다. 마땅히 천주는 선하여 덕으로 그 아름다움을 만물에 전하여 준다. 선이 더욱 커져 그 아름다움을 만물에 전하는 것이다. 더욱이 천주는 천주의 선으로 지극한 선이 되게 하여 만물에 본래의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한 일이다. 이러하면 천주가 강생하여 사람이 되는 것만 같지 못하니 피조물로 하여금 조물자의 본래 오묘함과 맺어져서 천주가 강생하여 인간이 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하다.

 

또 마땅히 천주가 그 아름다움을 만물에 전달하는데 각각 등급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천지의 火氣水土金石 등 같은 것은 ‘있게 함’에는 이르지만 나지를 못하고[無生] 초목은 나는 것[生]에는 이르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금수는 깨닫는 데는 이르지만 신령스러움이 없다. 인류는 비록 신령스러우나 순수하지 못하고 天神은 비록 순수하고 신령스러우나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그 아름다움을 전하는 데 모두 등급의 한계가 있다. 오직 이 천주의 성질이 인성에 맺어진 것이 피조물에 그 아름다움을 다 전할 수 있다. 사람으로 하여금 선과 여러 덕을 무궁하게 알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면 이를 칭하여 천주라고 한다.

 

지금 사람들이 오직 천주가 천지만물을 만들어 존엄을 드러낸 것은 알고 있으나, 강생하여 세상을 구하여 더욱 인과 여러 덕을 드러낸 것은 알지 못한다. 천주께서는 인의와 지능과 여러 덕을 끝없이 갖추셨기 때문에 지극히 높음에 그 이상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인의가 끝이 없음은 강생하여 다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미천한 인류가 비루하지 않은 이유는 지극히 어지심을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죄를 용서받지 못하자 강생하셔서 대신 속죄하고 지극히 의로움을 나타냄은 인류를 구하는 좋은 법을 얻어 지극한 지혜를 드러냄이다. 인간과 천주 두 物의 서로 거리가 무궁하나 한 위치로 합쳐지니, 그 지극히 능함을 보이는 것이다. 남은 덕은 유추할 수가 있다.

 

세 번째 의심은 강생의 형세이다. 천주가 인간 세상에 강생하고자 하여 하늘로부터 세상에 내려왔는데 여자의 배 속에서 태어났다. 降生해서 잉태하여 난 이가 진짜 사람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니 근본에 속하지 않고 인류와 같지 않은데, 어찌 사람이 보고 듣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그러나 제왕의 집과 화평한 땅과 편안한 시기를 선택하여 이에 실지로 의탁한 데는 깊은 뜻이 있다. 대개 천주가 강생한 뜻은 단지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고 그 뿌리를 없애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의 여러 죄 중에 가장 큰 것이 세 개가 있다. 그 하나는 부유함을 좋아하는 것이고 둘째는 귀함을 좋아하는 것이고 셋째는 쾌락을 좋아하는 것이다. 천주께서는 지극히 높은 위치로 지극히 미미한 곳으로 강생하셔서 나의 오만함을 억누르시고자 한 것이다. 천지의 주인으로서 가장 가난한 땅으로 강생하시어 우리의 탐욕을 부수고 온전한 복을 갖춤으로써 괴로운 날을 가리시고 또 우리의 탐욕을 치료해 주고자 함이시다. 예수께서 고통을 받는 것을 논한다면 한번 움직이시고 한번 고요히 하시어 온 세상의 죄를 모두 구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단계의 고난을 받음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독한 형벌을 당하셨다는 것이다. 그 뜻은 두 가지가 있으니, 한 가지는 참는 덕의 아름답고 중요함을 보이는 것이다. 나를 훈계하시니, 천주께서는 강생하여 고난과 험한 일을 겪으면서 모든 것을 흔쾌히 받으셨다. 두 번째는 흉악한 죄를 범하면 차라리 무거운 재앙과 해를 달게 받아 주어진 명에 이르러야 함이니, 천주의 명을 다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다.

 

 

영혼은 멸하지 않는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애초에 생겨나는 바도 없는 것은 오직 천지 만물의 주인일 뿐이다. 그 외에 피조물들은 모두 처음과 끝이 있으니, 새나 물고기 동물 · 식물과 같은 것들이다. 때로는 천지의 귀신과 사람의 영혼처럼 시작은 있으되 끝은 없는 것들이 있기도 하다. 그런데 끝이 없는 이유는 ‘제 스스로 끝이 없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천주에게 받은 것이기에 천주만이 그것을 ‘본래 없는 것’[本無]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의 영혼이 끝이 없다는 것을 네 가지 단서를 들어서 증명해보겠다.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이 사람이 되는 이유는 정신과 육체 이 두 가지일 뿐이다. 이것이 결합되면 살아가게 되고, 분리되면 죽는다. 사람의 육체는 火氣 · 水氣 · 土氣 등으로 이루어지므로 차갑기도 뜨겁기도 하고 건조하고 습기가 있기도 하여 그 성질이 똑같지 않다. 이 기운들이 적절히 잘 조화가 되면 사람은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하나라도 어떤 기운이 더 많아지게 되면 병이 생겨나고 심할 경우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것이다. 육신이 죽으면 정신 또한 떠나가게 된다. 그러므로 영혼은 정신의 바탕이다. 형체나 색깔도 없고 火氣 · 水氣 · 土氣 등이 결합되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건조함과 습기, 차가움과 따뜻함이 서로 침범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영혼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어서 영원히 생존하여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그 첫 번째다.

 

格物家들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할 때 사물의 情을 통해서 사물의 性을 유추하여 알게 된다. 靈性을 갖추고 있는 것은 모두 항상 살고자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어서 영구히 살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이를테면 어떤 이는 훌륭한 공적을 세워 비석에 새겨 넣기도 하고 어떤 이는 책을 써서 후세에 자신의 말을 남겨두기도 하는 것들이니, 몸이 죽은 뒤에도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오래 살고자 하는 情이 있게 되면 반드시 영원히 살고자 하는 실체가 있게 된다. 예를 들면, 火情은 위로 타 올라가고자 하니 위로 올라가지 못하면 불안해지고, 水情은 아래로 흘러가고자 하니 아래로 흘러가지 못하면 불안해진다. 火와 水가 지닌 性을 통해서 볼 때, 만물이 모두 그러한 것이다. 하물며 사람이야 어떠하겠는가? 조물자는 사람에게 이러한 情을 부여하였으니, 이러한 性을 부여하지 않은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영혼이 없는 사물은 그렇지 않다. 현세에 그쳐고 말뿐 후세에 대한 생각이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통해서 유추해 본다면 짐승의 영혼은 육체가 죽으면 따라서 흩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고, 사람의 영혼은 육체가 비록 허물어진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 두 번째다.

 

육체에는 강하고 약함, 그리고 어리고 늙음이 있을 수 있지만 영혼은 그렇지 않다. 몸이 쇠약해진 사람이라도 그 정신은 더욱더 또렷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몸은 죽더라도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징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그 세 번째다.

 

사람은 ‘영혼과 육신이 함께 죽어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은, 사람이 크게 현명하지 않더라도, 영혼은 스스로 그것을 자각한다. 일반적으로 몸이 죽을 때는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만약 영혼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무엇을 통해서 마음속으로 자연스럽게 그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고 하겠는가? ‘아무런 이유 없이 情이 생겨나는 것’을 모든 사람이 다 그러하다고 해서, 우연이라 하고 환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분명 그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다. 靈性은 어리석음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의 몸은 비록 죽어 없어진다 하더라도 영성은 불멸한다. 이것이 바로 그 네 번째다.

 

 

천당과 지옥

 

사람의 영혼은 불멸한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선행이나 악행을 하게 되면 후세에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상과 벌이 뒤따른다. 그것은 이치상 반드시 그러하다. 그러나 현재 세상에서의 상과 벌은 모든 선악의 행동에 다 나타나지는 않고, 설령 선행과 악행에 대한 상과 벌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또한 완전하지 않다. 또 완전히 그에 상응하는 상과 벌이 행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천주께서 선한 사람을 사랑하고 악한 사람을 미워하시는 마음을 분명히 밝혀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현재 세상에서의 상과 벌은 모든 선악의 행동에 다 나타나지는 않는다’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선행과 악행에 따른 응분의 보상이나 처벌을 받는 경우는 천 가지 가운데 하나둘에 지나지 않으며, 어떤 사람이 그 상과 벌을 직접 받게 되는 경우 또한 천 명 중에 한두 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약 후세의 상과 벌이 없다면 선과 악은 응분의 보상이나 처벌을 전혀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설령 선행과 악행에 대한 상과 벌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또한 완전하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 세상에서 아름답고 좋은 것으로 ‘道德’만한 것이 없으니, 세상의 작록을 모두 다 준다고 할지라도 그 아름다움을 모두 보상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뛰어나고 훌륭한 선비 중에 세상의 모든 벼슬과 영화를 내던져 버리고 돌아보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 세상에서 흉악한 것으로 말하면 ‘罪惡’만한 것이 없으니, 세상의 모든 형벌을 다 행한다고 하더라도 그 죄를 응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흉악하고 간사한 사람으로서 세상의 처벌을 모면하고 종신토록 영화를 누리는 사람도 있다.

 

‘천주께서 선한 사람을 사랑하고 악한 사람을 미워하시는 마음을 분명히 밝혀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천주께서 어진 이를 좋아하고 어질지 않은 자를 미워하시는 마음은 지극하다. 그런데 만약 끝없이 상과 벌을 통해 그들을 보상하고 처벌해 주지 않는다면 선한 이에게 복을 내리고 음탕한 이를 미워하는 지극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선한 일을 한 사람이라도 가난에 고생하고 사는 사람도 있고,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면서도 부귀하고 편안하게 사는 사람도 세상에는 적지 않다. 천주께서는 지극히 공정하셔서 선을 행한 사람에게는 온갖 복을 내려주시고 악을 행한 사람에게는 모든 재앙을 내려주신다고 하는데,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는 것인가? 世主는 비록 선행과 악행을 완전히 다 알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공이 있는 사람에게는 봉토와 상을 내려주고, 죄가 있는 사람이 있으면 형벌을 내린다. 하물며 천주께서는 全知하심에도 불구하고, 상을 내리지 못하는 선한 사람과 벌을 주지 못하는 악한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도리어 천주의 능력이 세주의 능력에도 미치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인가?

 

후세의 보답이 있다는 것은 또한 인간의 性이 지향하는 바를 통해 그것을 유추해서 알 수가 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지향하는 바가 있고, 그 지향하는 바를 얻게 되면 만족하게 된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부유하게 되어 온 세상을 차지하고 귀한 신분이 되어 천하 사람들을 부리면서 명성이 사방에 알려지고 온갖 복이 모두가 모여들게 되더라도 사람 마음은 여전히 만족하고 편안해 할 줄 모른다. 이것은 사람 마음이 지향하는 바가 끝없이 더 좋고 훌륭한 것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 세상에서는 그것을 모두 얻지 못할지라도 후세에서는 반드시 그 마음이 추구하는 바를 충족할 수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세상의 모든 만물이 그 본성이 지향하는 바를 가지고 있는데, ‘인간만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은 결코 그렇지 않다.

 

혹자는 말하기를, “선과 악에 대한 보상과 처벌은 지금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치를 어긴 사람은 마음이 항상 불안하고, 이치를 잘 따른 사람은 마음이 편안한 것을 보지 못했는가? 그러니 어찌 후세의 천당과 지옥에서 선악의 보상과 처벌이 있기를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답하여) 말하기를, “지금의 근심과 즐거움이란 것은 바로 후세에 항상 근심하고 항상 즐거워하게 될 그 그림자에 불과할 뿐이며, 사람에게 악을 금하고 선을 장려하려는 하나의 교훈일 뿐이다. 그러니 어찌 한때의 거짓된 즐거움과 근심을 가지고 선과 악에 대한 진실된 보상과 처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집안에 잔치가 있어서 주인이 樂師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고 하자. 그 악사는 마음으로 기뻐하면서 연주를 하였다. 그런데 잔치가 끝나고 주인이 악사에게 “너는 오늘 기쁘고 즐거워하였으니 스스로 즐긴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내 너에게 음악 연주비를 주지 않겠다”라고 한다면, 이것이 이치에 닿는 말이겠는가? 덕을 닦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굉장히 즐겁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천지의 주인께서 어찌 그 덕에 대한 마땅한 보답을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본다면 후세의 상과 벌이 천당과 지옥에서 행해진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십계

 

物主가 처음 천부받은 성질을 백성들에게 내려주었다. 마땅히 품부받음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고 떳떳함을 잡아 벗어날 수 없으니 모든 성질이 그러할 뿐이다. 소위 性敎가 이것이다. 다만 성질이 사물과 만나 처음 좋았던 성질이 줄어들고 이에 천주께서 매번 훌륭한 성인을 내시어 말과 몸으로써 그 미혹함을 이끌어주고 그 약함을 도와주셨다. 그러나 인간의 성질은 어둡고 나약하여 道心이 적어지고 날로 약해졌다. 가르침이 점차 쇠약해져 성질이 더욱 어지러워졌으나, 천주의 자애로는 차마 버리지 못하였다. 이에 책의 가르침으로 이어 천지개벽하여 이천칠백 년 후에 훌륭한 성인의 말씀을 보내어, 글자를 두 개의 돌 조각에 받아 십계의 목록을 만들었다. 천주를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강령을 만들어 포함시키니, 내려진 명령을 두루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앞의 세 가지 훈계를 새겨 사람들에게 마음과 말과 행동으로써 천주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을 가르쳤다. 뒤의 일곱 가지 훈계를 새겨서 사람들에게 마음과 말과 행동으로써 同類와 화목하도록 가르쳤다. 오직 이 두 가지 사랑이 거의 지극히 다함이니, 실제로 오륜의 강령이고 성스러운 가르침이 지시하는 바로 귀결된다.

 

十戒는 첫째, 한 천주를 만유 위에 흠숭하라. 둘째, 천주의 성스러운 이름으로 헛된 맹세를 하지 마라. 셋째, 첨례일을 지켜라. 넷째 부모에게 효도하고 공경하라. 다섯째, 살인을 하지 마라. 여섯째, 사악한 간음을 하지 마라. 일곱째, 도둑질 하지 마라. 여덟째, 망령된 증언을 하지 마라. 아홉째, 다른 이의 처를 원하지 마라. 열째, 다른 이의 재물을 탐하지 마라.

 

 

영세

 

입교함에 영세하는 것은 죄를 씻어내는 것을 보이는 뜻이다. 사람이 모두 元祖에게 원죄를 받아서 인성이 마땅히 밝아야 할 것에 어리석고, 마땅히 행해야 할 일에 나약하고, 또 스스로 만들어 쌓인 잘못이 있으니 만약 주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용서받을 길이 없다. 그러므로 천주가 세상에 내려와 몸소 가르치던 처음에 성세의 예를 세워 원죄와 자신의 잘못 두 가지를 없애는 방법으로 삼아서 사람의 성품을 본원으로 돌아오게 하여 마땅히 행할 바에 힘씀을 밝혀 죄 사함을 받게 하였다. 밖으로는 맑은 물로 얼굴을 닦으며 안으로는 곧 천서가 聖(靈)을 내려 악을 씻는 것이다. 사람들은 형상이 있는 사물에 의탁하지 않으면 형상이 없는 일을 밝힐 수 없다. 천주의 성총은 형상이 없음에 속하여 눈과 귀로 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에 형상이 있는 물로 형체를 씻는 것에 의탁하여 그 형상이 없는 성우와 죄와 잘못을 깨끗이 하는 것을 보였다. 어찌 유독 기독교의 일만 그러하겠는가? 세상에 법 중에도 종종 있으니 조정에서 관직을 세울 때 볼 수 있지 않은가? 그 형상이 있는 것은 부전이요, 형상이 없는 것은 권한이니, 조정에서 부전을 관리에게 주어 권한을 주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사람들이 부전을 보면 즉 이 관원의 권한과 어떠한 일을 맡을지 안다. 저 물은 형상이 있는 물이며 성총은 형상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영세를 받음에 천주가 성총을 사람에게 더하고 그 죄를 사함을 알 것이다. 단 무릇 영세만 받으면 용서받는 것이 아니니 반드시 진실한 마음으로 이전의 죄를 통렬하게 뉘우치고 개과천선을 맹세할 때 즉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혹 말하기를 ‘스스로 새롭게 하면 족하지 어찌 반드시 영세가 필요한가?’라 하는데 이것은 천주가 세워 정한 예의니 감히 존중히 따르지 않을 수 없으니 즉 사죄를 천추가 이것에 붙인 것이니 관리의 권한을 조정에서 부전에 붙인 것과 같다. 또 죄악의 거류는 무형이라 볼 수 없으니 만약 이러한 外禮를 존중하지 않으면 반드시 시기 의심하는 마음을 품게 되고 죄과가 아직도 있고 없고 간에 과거를 향하여 마음이 태만해질 것이니 어떻게 스스로 새로워질 수 있겠는가? 만약 이 예에 의하면 이전의 잘못을 없애 벗어버려 마음 편안히 아무 걱정 없이 힘써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고해

 

고해 또한 천주가 강생하여 친히 만든 예이다. 聖寵의 샘을 맞아들여 사람의 精神의 병을 치료하는 요긴한 방법이다. 사람의 몸에 병이 있으면 약을 복용하여 고친다. 사람의 정신에 병이 있는 것은 더욱 중하고 또한 귀한 문제니 어찌 치료하는 처방이 없을 수 있겠는가? 사람이 세상에 접하면서 세속의 때에 오염되는 것을 면하기 어려우니 정신에 병을 얻으면 성인이라도 스스로 보존하여 허물이 없기를 할 수 없으니, 하물며 그 아래에야. 만약 그 일어난 소이를 구하지 않으면 그 죄에 빠짐이 더욱 무거워 스스로 벗어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하늘로 돌아가기에 앞서 고해의 예를 정하셨다. 모든 생각과 언사와 행동이 도에 벗어나서 천주에게 부합하지 않음이 사람에게 그리고 자기에게 미치면 정성스런 마음으로 통렬하게 뉘우쳐 후에 반드시 고칠 것을 경계하고 죄업을 두려워하고 명명백백하게 사실대로 고하여 이에 죄 사함을 받는 것이다. 告解의 一節은 비단 이전의 잘못을 용서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주의 성총을 맞이하고 아울러 이후의 잘못을 스스로 녹여 죄가 몸에 쌓이지 않도록 하여 용맹하게 전진하여 덕 있는 군자를 이루는 것이다. 위에 계신 주님께서 인자하고 애련함으로 이러한 고해의 문을 열어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하지 않았다면, 이전의 죄를 없애지 못하고 날마다 죄가 더욱 많아져 천하에 선한 사람이 더욱 드물었을 것이다. 혹은 말하기를 ‘이 고해를 믿고서 잘못을 짓고 와서 풀고, 풀고 나서 다시 잘못을 저지를 것이니 아마도 구차한 문을 열어 놓은 것이 아닌가’라고 한다. 이 무슨 말인가? 고해는 나의 마음에서 통렬히 뉘우침과 진정함에서 나와 만 번 죽어도 다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니 이 마음이 없다면 즉 고해는 무용한 것이니 어찌 용서를 받겠는가? 대개 고해는 약과 같은 것이다. 만부득이하여 병을 얻으면 약을 복용하지 어찌 약을 찾아 병의 누룩을 얻겠는가? 다만 고해는 비록 永苦의 獄은 면하나 진실로 煉罪의 獄은 면하지 못하여 그 찌끼와 앙금을 태우니, 이곳의 형벌은 영고의 옥과 다를 것이 없으나 다른 것은 단지 (?3))일 뿐이다. 이곳 형벌 받음의 많고 적음과 짧고 오램은 반드시 악의 많고 적음과 크고 작음 등에 각기 따르며 총괄하기를 위에 계신 주님께서 사람에게 맞게 하니 자세히 반드시 궁구하여 한 점의 의혹도 없이 오직 순전히 선하고 허물이 없는 사람만이 죽은 후 바로 올라가 영복을 누릴 수 있다. 그 평생토록 공을 세움이 작은 잘못을 보충하여 연옥의 고통을 면하게 하니 이것이 告解의 一節이다. 정신에 병을 얻은 후 부득이하여 이 약을 복용하면 정신이 병들기 이전이 될 수는 없더라도 진실로 장차 문을 열어놓은 것이다.

 

 

주님의 가르침이 세상을 다스리는 증거

 

세상을 다스리는 큰 단서는 가르침을 베푸는 데서 시작하여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데로 끝이 난다. 처음 나라가 다스려지고 천하가 평화로워지는 근본에서 시작하는데, 요점은 오직 사람의 마음이 피하고 추구하는 진실을 정하는 것이다. 상벌을 마땅히 주어 사람을 선함에 권면하고 악함을 금지시켜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면 세상은 다스려진다. 무엇을 사람의 마음이 피하고 추구하는 진실을 정하는 것이라고 이르는가? 대개 천주께서는 모든 인간의 품부받은 성질이 본래 지향하는 바가 있어서 위로는 원시 진정한 주인에게 합하고 아래로는 동류와 화합한다. 취하는 것은 믿음, 인자함, 신중함, 참을성 등의 여러 덕이고, 피할 것은 도리에서 어긋나고 거스르는 것, 오만과 시샘 등 여러 악이다. 그러므로 의롭지 못한 이익은 부귀영화에는 도달하나 그 마음을 끌어오지는 못하고 뜻밖의 가난과 욕됨과 고난은 그 뜻을 굽히게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가르침을 주는 데 모두 종류마다 좋은 규범이 있는 것이다. 지금 세상에 泰山의 편안한 곳에 사람을 두고 후세에는 진실로 복된 지역에 사람을 두니, 소위 사람 마음으로 하여금 피하고 추구하는 진실을 정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무엇을 일러 상벌의 마땅함으로 사람을 선함에 권면하고 악함을 금지시키는 것이라 하는가? 상벌을 주는 것을 지극히 다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극히 공정히, 지극히 다한다는 것은 영원한 복과 화가 선악에 응함으로써 지극히 공정함을 말하는 것이다.

 

아주 작은 선악으로도 천주의 全知함을 피할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을 공경함으로써 부지런히 선을 행하고 삼가고 삼가며 악을 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히려 외부의 난이 싹 트면, (내부의) 법이 무너지고 기강이 어지러워지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 곧 국가가 오래도록 편안하고 다스려지도록 돕고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소위 상벌의 마땅함으로 사람에게 선을 권면하고 악을 금하게 하는 것이 이것이다. 또 지난 역사 중 上古에 크게 잘 다스려졌다고 칭해지던 때도 말년이 되지 않아, 수백 년의 편안함을 구하려 해도 얻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임하여 쫓는 자들은 헛되이 다스려지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으나, 반드시 다스려지는 기술이 없는 것이 한이었다. 이에 거짓된 釋迦와 道家 두 氏의 설로 이를 보충하였다. 그러나 신선의 궁전과 부처의 사원이 온 세상에 가득하고 세도와 인심이 날로 입만 쫓아가니 높은 이치에는 이르지 못하고 세운 가르침의 근처만 맴돌 뿐이다. 한두 개의 선한 일을 취해 보면 다른 의론들은 진실하지도 않고 확실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부처의 윤회정토와 살인을 경계토록 하고 감옥을 없애는 등은 여러 가지 허탄한 말들이다. 만물의 근원과 인류가 향하는 바와 영혼의 성정을 알지 못하고 살고 죽는 경지를 궁구하는 것이다. 또 진정한 주님을 부처의 밑에다 망령되이 굽히니 잘못됨이 매우 심하다. 이것은 성현들의 진정한 학문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다. 부연하여 老莊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미묘하고 아득하여 마땅하지가 않으니, 잡다한 符?으로 이치를 어그러트린다. 예를 들면, 신선이 되어 허공에 오르나 역시 형체가 있고 속세에서 떠나지 않으며, 또 모든 것이 반드시 아무 일 없다. 하물며 玉皇을 하늘 중심의 至尊으로 삼음에 있어서야. 道家에서는 天主에 대하여 사람이 그 이름을 훔치고, 佛家에서는 천주에 대해 사람이 그 위에 처하니, 하나도 마땅한 것이 없고 하나도 공손한 것이 없으며, 모두 일의 밝히는 뜻이 합당하지 못하다. 또 도가 ? 불가의 가르침은 중국 땅에서 행해진 지 이미 1,800년이나, 사람의 마음과 세상의 도는 도리어 지금이 옛날과 같지 못하다. 만약 부처와 노자를 받드는 것처럼 천주를 받든다면, 흥하여 이치에 다다르게 되어 반드시 唐虞 三代의 시대와 같아질 것이다. 서방의 30개 많은 나라 같은 경우 (천주)교를 받든 후, 1,600년이 크게 안정되게 길게 다스려졌다. 인심과 풍속이 모두 선하고 아름다우며, 상하가 서로 평안하고, 집안과 사람들이 넉넉하여 다툼과 분쟁이 없이 각각 본업을 즐겼다. 이 나라가 다스려지는 모양은 다르다고만 하기에는 부족할 것 같다.

 

대개 生死와 理解의 이유를 말하는 것이 매우 갖추어져 있고 또 진실하다. 賞罰을 주는 이치는 매우 공정하고 마땅하고, 아침과 저녁으로 성찰하는 공교로운 일은 매우 자세하고 엄하다. 聖寵이 도와서 죄를 뉘우치고 날로 새로워지고, 몸을 닦는 선비들은 타이름을 이끌고 좋은 벗들은 권면하고 앞선 성현들의 가르침이 많다. 그러니 가지가지 모두 악을 멀리하고 선에 나아가는 正道가 있으니 천주의 올바른 가르침은 진실로 인심을 편안하게 다스릴 수 있고 세상도 지극한 궤도로 다스려짐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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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문의 者는 子의 오타인 듯하다.

2) 원본의 字體가 불명확하다.

3) 원문의 字體가 불명확하다.

 

[교회사 연구 제43집, 2014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노용필(한국사학연구소 소장)]

 

※ 본문 중에 ? 표시가 된 곳은 현 편집기에서 지원하지 않는 한자 등이 있는 자리입니다. 정확한 내용은 첨부 파일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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