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화)
(백) 부활 제3주간 화요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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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별별 이야기: 설마 그럴까? 아니야 혹시 그럴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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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1-16 ㅣ No.1020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48) 설마 그럴까? 아니야 혹시 그럴지도 모르지!

 

 

한 건설회사가 돈을 더 벌기 위해 자재비를 아껴 건물을 짓다가 그만 신축 건물이 무너지는 사고를 냈다. 인사사고가 발생하자 경찰은 건설 관계자를 불러 심문을 했다.

 

경찰: 건물이 무너질지도 모르는데 왜 노동자들을 대피시키지 않았소?

 

관계자: ‘설마’ 무너질까 생각했지요.

 

경찰: 그럼 왜 회사 간부들은 대피시켰소?

 

관계자: ‘혹시’ 무너질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설마가 사람 잡는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는 말이 생각나는 유머이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라는 안심과 “‘혹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지?”라는 근심 사이에서 살아간다. ‘설마’에 한 표를 던지며 사는 사람들은 웬만하면 만일에 대비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즐겁게 살아가지만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반면 ‘혹시’에 한 표를 던지는 사람들은 언제나 만일을 대비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근심과 걱정으로 찌들어 있지만 적어도 최악의 상황은 모면할 것이라는 안정감으로 살아간다.

 

‘설마’와 ‘혹시’ 사이를 결정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타고난 기질적 차이일까? 아니면 상황에 대한 인식 차이일까? 성격심리학자들은 세상에는 타고난 낙관주의자와 회의주의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 유전자는 신체뿐 아니라 심리나 정신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중요한 생물학적 변인이다. 긍정심리학을 창시한 마틴 셀리그만도 매사에 감사하고 긍정적인 타고난 낙관주의자가 있음을 인정한다. 이들은 아무리 환경이 어렵고 힘들어도 웬만하면 우울하거나 불안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항상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유지한다. 반면에 유전적 요인으로 타고난 비관주의자나 회의주의자들은 환경에 변화와 상관없이 대체로 우울하고 불안하며 무기력하다.

 

이와는 달리 사회심리학자 혹은 인지심리학들은 원래 타고난 기질은 없다고 말한다. 아니, 실제로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기질의 유형과 상관없이 모든 행동은 그 상황을 어떻게 인지하느냐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회사에 자주 늦는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게으르거나 꾸물거리는 성향의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출근 시간에 지각할 수도 있다는 인식 때문에 늦게 된다는 것이다. 약속시간에 자주 늦는 사람들이 입사면접이나 자격시험에는 결코 늦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앞의 우스갯소리는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안에 대한 중요성 판단이 결국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는 사회·인지심리학자의 관점을 일깨워 준다. 건설 관계자는 무의식적으로 회사 간부의 생명이 노동자들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고 인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혹시’하는 마음에 간부들은 대피를 시켰지만, ‘설마’하는 마음으로 노동자들은 계속 일을 시켰기 때문이다. 똑같은 사람이지만 그 생명의 가치는 모두 동일한 것이 아닌 듯싶다. 신분에도 차이가 있듯이 생명에도 차별이 존재하고 있는 현실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씁쓸하였다.

 

우리는 어떤 가치관과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일까? 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 ‘인간의 생명’ 그 자체일 것이다. 하지만 요즘 정치인과 연예인, 심지어 사람들에게 기쁨과 웃음을 선사하는 개그맨에 이르기까지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종종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자주 접하게 된다. 하느님의 나라는 생명에 등급을 매겨 차별하는 세상도 아니지만, 더 이상 살아갈 힘이 없어 스스로 생명을 포기하는 세상은 더더구나 아닐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삶의 귀로에 서서 고민하는 영혼은 없는지 주변을 살펴보아야 할 때다. 설마 무슨 일 있겠어? 라고 넋을 놓고 있는 중에 절실한 도움이 필요한 한 영혼이 삶의 끈을 놓아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르 13,33)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1월 15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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