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현대 영성: 이웃 종교와 대화가 왜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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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7-23 ㅣ No.1840

[현대 영성] 이웃 종교와 대화가 왜 필요한가

 

 

종교 간 대화에 대해 언급할 때 혹자는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 좋은 것이 다 있고, 구원이 있는데 왜 굳이 다른 종교를 존중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기도 한다. 우선 현실적인 이유를 든다면 다양한 종교가 한 지역 안에 공존하면서 서로 충돌하거나 경제적, 정치적 이권 다툼이 종교적인 문제로 표면화되어 서로 분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9·11사태 이후로 북미에서는 종교 간의 대화가 큰 화두로 떠올랐다. 세계 평화를 위해 종교 간 대화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종교 간 대화는 그리스도교의 나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인간 사회를 위한 평화의 요인”이며 “상처 입은 세상에 대한 응답”이라고 강조했다. 종교 간 대화는 비단 세상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종교를 넘어 활동하시는 하느님 성령의 인도에 따르며 보편적 사랑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하느님은 가톨릭 신자이실까? 무슬림이실까? 그럼 불자이실까? 그 어느 특정 종교만을 위한 하느님이 아니시다. 하느님은 종교를 초월해 계신다. 종교를 넘어 모두가 당신 사랑으로 구원되기를 바라시는 보편적인 구원 의지를 지니신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따라서 종교 간 대화는 우리 시대에 종교인들이 자신을 넘어 더 큰 사랑을 나누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이번 호부터 종교 간 대화와 관련하여 그 중요성과 필요성,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 그리고 필자가 전공한 토마스 머튼의 종교 간 대화에 대한 이해와 방법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오늘날 다양한 매체와 종교와 지역, 문화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유럽이나 아메리카에도 불자와 무슬림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고, 아시아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한국에도 다양한 종교가 서로 공존하고 있다. 또 다른 양상으로 직접적인 종교 활동에 참여하는 이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종교를 넘어 다양한 영성에 관심을 갖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이렇게 다원화된 세상 안에서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복음의 정신을 살아갈 수 있을까? 다른 종교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며 그들과 어떤 방법으로 만나야 하는가? 다른 종교를 믿어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리스도교 신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과거에는 선교를 강조하고 그리스도인으로 개종시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오늘날에는 왜 그들이 선교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의 대상인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선불교의 좌선이나 힌두교의 요가를 해도 되는 것인가? 불상 앞에 절을 해도 되는 것인가? 이런 질문에 답을 찾다 보면 자연스럽게 종교 간 대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게 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종교 간의 대화는 결국 “나와 다른 타인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와 연결된다. 나와 다른 너와 어떻게 하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로 이어진다. 다양성 안에서 어떻게 서로 일치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는 우리 각자의 영적 성숙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종교를 넘어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의 공통점 중에 하나는 바로 자비와 사랑이다. 다른 이들을 배척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존중하고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을 갖게 된다. 예수께서도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에서처럼 경계 없는 사랑을 실천하셨다. 치유된 나병환자 10명 가운데 이방인에게 구원을 선포하셨다(루카 17,11-19 참조). 서로 배척하며 살았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오히려 생명의 물을 주셨다(요한 4,1-42).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사람, 다른 종교인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문제의 결론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우리가 이웃과 다른 종교인을 대할 때 아무런 오류에도 빠지지 않게 된다. 모든 식별의 기준은 ‘예수님’이어야 한다. 예수님의 태도와 자세, 가르침을 배우고 그것을 오늘날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에 대해 숙고하고 이를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그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분 곁에 머물며 자신의 뜻과 거짓 자아를 벗어 버리는 수행이 필요하다. 편협한 자기중심적인 생각이나 근본주의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하느님 중심의 더 큰 사랑의 마음으로 이웃 종교를 대하기 위해서는 오랜 명상과 자기 비움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2022년 7월 24일(다해)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 가톨릭마산 3면, 박재찬 안셀모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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