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6일 (목)
(백)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교회사 에세이42-43: 총대주교좌의 기원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3-07 ㅣ No.741

교회사 에세이 (42) 총대주교좌의 기원 (1)

 

 

지금까지는 주교직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주교는 이제 한 교구의 신앙의 상징적 존재요, 실질적인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확립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주교직과 교구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그들 사이의 구별 또한 가져오게 됨도 언급하였습니다. 이제 앞으로 몇 회 동안은 그 구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교회는 그 자신의 역사적 시작에서부터, 즉 교회가 지역적으로 전파되면서 어떤 명확한 조직화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조직화는 로마 제국의 정치적 하위구조와 전체적으로 일치하는 모습을 띄게 됩니다. 어쩌면 교회의 입장에서는 가장 자연스런 해결책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교회의 현실화는 자연스럽게 정치적, 사회적 삶에 있어서 그 지역의 중심지역이 그리스도교 공동체 가운데에서도 그 지역 교회를 대표하는 공동체가 되게 했던 것입니다. 여러 도시들이 정치적, 사회적인 중요도와 영향력에 따라 구별되었던 것처럼 그들의 관계가 교회 공동체 안에도 자연스럽게 이식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치적 무게와 구별에 상응하는 특권에 있어서의 불균등이 교회 안에서도 발생했던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교회가 자신의 문제와 문제 해결을 위한 소통의 과정에서, 또 자신의 규모에 걸맞게 교회를 조직하고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됩니다. 특히 3세기부터 시작된 시노드들은 매번 그 지역의 수도에서 열리게 되는데, 자연히 시노드가 개최되면 시노드는 그곳 주교에 의해서 인도되었고, 이런 특별함을 통해 그 주교는 지역의 다른 주교들에 비해 우월함을 획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수도가 차지하는 관할권과 그 지역 전체에 미치고 있던 정치적인 실천에 그대로 부합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관구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한 주교가 그 지역의 교구들에서 다른 주교들에 대한 우월권을 소지하는 것이었고, 교회의 법적인 특성에서의 더 높은 권한을 가짐을 의미했습니다. 그는 교회의 규율을 감독하고, 주교들의 선출을 조정하고, 확인해 주었고, 그 지역전체를 위한 시노드를 소집하고 인도하였습니다. 서기 약 400년경이 되면 이 모습은 그 절정에 이르게 되는데, 모든 지역은 관구를 갖게 됩니다. 관구의 대주교좌는 하나만이 있었고, 이것은 이론적인 기초에서가 아니라 실천적인 이유 때문에 생기고 발전하였지만, 교황과 공의회들을 통해 다시금 확인되게 됩니다.

 

니체아 공의회는 이미 존재하고 있던 관구, 대주교좌의 구성에 있어서 한층 더 상위의 조직을 확인해 주는데, 공의회 6항은 “고대의 서열에 따라서, 알렉산드리아, 로마 그리고 안티오키아의 주교들이 자신들의 지역과 그 이외의 지역에 대해서도 더 높은 권위를 갖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이론적 기초 위에 생겨난 것이 아니고, 상황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교회 구조가 로마 제국적 조직에 적응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로마 제국은 실제 교구로 구분되었고, 또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더 많은 지역으로 나뉘게 되었고, 각 교구는 하나의 공적 상위기관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적응은 하나의 규칙이 되어갔고, 교회는 정부의 행정적 재구성을, 교회 자체의 분할을 통하여 실현해 갔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들의 주교들은 더 크고 많은 권위와 특권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런 발전의 결과로 고대 교회는 6세기경부터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되지만, 총대주교좌란 개념을 갖게 됩니다.

 

총 대주교좌는 다섯 개로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예루살렘이었습니다. [2016년 3월 6일 사순 제4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43) 총대주교좌의 기원 (2)

 

 

지난 호에서 짧게 언급하였던 것처럼 총대주교좌는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로마, 코스탄티노폴리, 그리고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이 다섯 총대주교좌는 다른 나머지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도달하게 되는데, 고대 총대주교좌들 중, 4개는 동방에 위치하고 있었고, 오직 로마만이 유일한 서방에 위치한 총대주교좌였습니다. 앞서도 보았듯이 이런 총대주교좌는 로마 제국의 행정조직과 하나가 되는 적응과 교회의 제도화를 통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 총대주교는 권한이 더욱 높아지며, 주교의 서품과 면직, 시노드의 주재, 그리고 논쟁과 그에 따른 단죄와 벌에 대한 결정권 등을 갖게 됩니다.

 

이들 총대주교좌의 탄생과 발전은 정치적 실용적 토양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고, 신학적 성찰이 후에 따라오는 것입니다. 서방의 로마는 주교좌의 사도적 기원을 강조하였고, 그의(베드로) 수위권에 기초함을 역설하지만, 동방의 교회들은 많은 교회들이 사도적 기원을 갖고 있었고, 오히려 코스탄티노폴리의 주장처럼, 사도적 기원에서 그들은 안드레아 사도에 의해 창립되었음을 강조하여 먼저 사도가 된 안드레아의 권위를 요청하기도 합니다. 총대주교좌의 역사는 광범위한 요소들의 경쟁과 상호작용을 통해 완성되어 갑니다. 서로 다른 교의적 경향과 주교좌의 영향력, 상호적 선전들을 통해 결정되게 되는 것입니다. 서방은 로마 주교의 인도에 모든 교회를 맡김으로 단일성의 보증으로 삼았다면, 동방은 여러 사도 기원의 교회들이 있었기에 그 중요성보다는 정치적 설립이란 전망 안에서 교회들 간의 위계를 만들어갔습니다. 결국 서로 다른 신학적 전망과 전통들이 서로 다른 모습의 교회로 이끌어 갔던 것이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두 번의 유다 전쟁을 통해서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아주 특권적인 지위를 잃고 맙니다. 하지만 4세기가 되면 코스탄티노 황제의 업적으로 거룩한 땅(Terra Santa)에 대한 신심과 이 도시에 대한 순례가 시작되었고, 교회 기원의 장소로서 그리고 모든 교회들의 어머니의 교회로서의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게 됩니다. 그러나 현실은 역사에 상응하지 못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팔레스티나 3개 지역의 총대주교좌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총대주교좌가 된 것은 코스탄티노플(Costantinopoli)입니다. 첫번째 그리스도인 황제 코스탄티노는 그리스도교 제국의 도시를 새롭게 건설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330년 새로운 두번째 로마의 시대를 열고 자신의 이름을 딴 ‘코스탄티노폴리’라 부르게 됩니다. 사실 로마는 코스탄티노 이전에 이미 로마 황제의 거처는 아니었고, 밀라노(Milano), 트레비리(Treviri), 니코메디아(Nicomedia) 등이 황제의 거처일 때가 많았습니다. 이런 정치적 결정은 특별함과 중요성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로마의 주교는 자연스런 논리적 귀결로 그의 우월성을 인정받았던 것입니다. 초기에는 로마 교회와 비교할 때, 코스탄티노폴리의 경쟁력은 전혀 없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와 비교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과정, 즉 동방과 서방 교회의 분열과 이 총대주교좌의 상황은 연결되게 되었고, 고대의 로마(Roma)와 새로운 로마(Costantinopoli) 총대주교좌 사이의 경쟁은 1054년 결정적으로 교회의 분열이 완성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들 총대주교좌의 탄생과 발전은 정치적 실용적 토양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고, 신학적 성찰이 후에 따라오는 것입니다. 서방의 로마는 주교좌의 사도적 기원을 강조하였고, 그의(베드로) 수위권에 기초함을 역설하지만, 동방의 교회들은 많은 교회들이 사도적 기원을 갖고 있었고, 오히려 코스탄티노폴리의 주장처럼, 사도적 기원에서 그들은 안드레아 사도에 의해 창립되었음을 강조하여 먼저 사도가 된 안드레아의 권위를 요청하기도 합니다. 총대주교좌의 역사는 광범위한 요소들의 경쟁과 상호작용을 통해 완성되어 갑니다. 서로 다른 교의적 경향과 주교좌의 영향력, 상호적 선전들을 통해 결정되게 되는 것입니다. 서방은 로마 주교의 인도에 모든 교회를 맡김으로 단일성의 보증으로 삼았다면, 동방은 여러 사도 기원의 교회들이 있었기에 그 중요성보다는 정치적 설립이란 전망 안에서 교회들 간의 위계를 만들어갔습니다. 결국 서로 다른 신학적 전망과 전통들이 서로 다른 모습의 교회로 이끌어 갔던 것이라 할 것입니다.? [2016년 3월 13일 사순 제5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2,69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