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6일 (목)
(백)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세계 교회의 흐름과 교계제도의 설정: 동아시아 선교 정책의 변화를 중심으로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12 ㅣ No.837

세계 교회의 흐름과 교계제도의 설정

- 동아시아 선교 정책의 변화를 중심으로 -

 

 

1. 문제 설정

 

천주교에서 교구(敎區)를 뜻하는 라틴 말 ‘디오에체시스’(dioecesis)는 원래 로마 제국에서 사용하던 행정 구획을 가리키는 용어였다고 한다. 즉 방대한 제국 영토를 적당한 수의 프로빈치아(provincia, 州)를 포함하는 넓은 구역인 디오에체시스로 구획하고, 여기에 황제의 대리자(vicarius)가 파견되어 통치(διοικησιs, administratio)하였던 것이다. 천주교는 이 용어를 4세기 무렵에 받아들여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그 후 13세기에 들어와서 비로소 교구라는 의미가 법적으로 확정되어 주교가 다스리는 지역 교회의 단위를 가리키게 되었다.1)

 

지역 교회로서 교구를 구성하는 인적 질서로는 성직자(주교, 사제, 부제), 수도자, 일반 신자, 예비 신자 등이 있다. 이 구성의 원리를 흔히 교계제도(敎階制度, hierarchia)라고 부른다. 교계제도라는 말의 어원으로 볼 때 이것은 원천적으로 신성성(神聖性, hieros)에 바탕을 둔 지배(archia)와 통치의 질서를 표현하는 말이다. 현대 교회에 와서야 성직자들의 직무를 봉사직으로 규정하면서 교계제도의 본질을 통치적인 의미보다는 일치를 위한 도구라는 의미에 더 강조점을 두게 되었다. 하지만 교계제도를 성직주의(clericalism)의 대표적인 상징처럼 여기는 분위기는 여전히 남아있다. 사실 2012년에 와서 한국 천주교에 교계제도가 설정된 지 50년이 되었음을 기념한다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경직된 성직주의라는 혐의를 벗기는 어려울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한국 천주교라는 지역 교회의 역사를 교구 설정 또는 교계제도 설정이라는 제도의 측면에서 조명한다는 작업은 어떤 의의를 지니는 것일까? 물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교구장 주교 또는 대목구장과 같은 지역 교회 직권자의 사목 방침과 통치 스타일이 당시의 교회 상황을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기 때문에 제도사의 분야를 간과할 수 없는 면도 있다. 게다가 지역 교회가 로마 교황청을 정점으로 하는 보편 교회와 결속하여 교회 내의 일치를 이루는 핵심적인 통로가 바로 교구나 대목구와 같은 제도라는 점 역시 교계제도 설정 전후의 제도적 변화상들을 중요하게 다룰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계제도 설정이라는 지역 교회의 제도적 변화를 외형적인 틀에 한정하여 다룬다면 그 의의가 반감될 우려가 있다. 제도적인 틀과 함께 호흡하면서 성직자, 수도자 및 일반 신자들의 신앙생활에서 어떤 유의미한 변화는 없었는지, 성직자 중심의 권위주의적인 사목 환경에 새로운 변화가 발생하지는 않았는지, 나아가서 국가나 시민 사회 등 세속적 영역과 교회의 상호 관계에서 새로운 징후가 등장하는 데 교계제도의 설정이 미친 영향은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지 등 끊임없는 성찰의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라고 본다. 그래야만 교회사 연구의 영역에서 제도사, 신앙생활사, 사목활동사와 같은 세부적인 연구 주제들이 서로 교직으로 엮여서 입체적인 역사상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세계 교회의 흐름 속에서 한국 천주교에 교계제도가 설정된 것의 역사적 맥락을 더듬어 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즉 앞서 말했듯이 지역 교회의 제도적 변화를 보편 교회와의 조직적 연결 속에서 이해하려는 것이다. 이런 작업이 필요한 이유는 교계제도 설정이라는 외적 형식 자체의 변화를 한국 그리고 한국 천주교라는 국내적인 상황과 관련짓기 이전에 우선 동아시아 천주교의 변화 그리고 교황청의 방침 등 국제적인 맥락을 검토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제도 속에서 살면서 제도의 울타리에 질식할 것 같기에 때로는 과감히 그 울타리를 허물기도 하고, 또는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더라도 울타리 속에서 나름의 생존 방식을 체득하는 하느님 백성들의 역동성을 가늠하는 작업이 병행되지 않으면 반쪽의 성취일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도록 하겠다. 우리가 거슬러 올라가 역사를 되짚어가면서 내려올 이야기의 출발점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1492년을 전후한 때이다.

 

 

2. 보호권 시대 동아시아 교계제도

 

동아시아 지역에서 천주교 교계제도의 효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1307년 7월 23일 클레멘스 5세 교황이 프란치스코회 소속으로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조반니 다 몬테코르비노(Giovanni da Montecorvino, 1247~1328)를 카타이 왕국의 수도 캄발릭(또는 칸발릭, 오늘날의 북경)에 정주하는 대주교로 임명한 일이다. 하지만 몬테코르비노 주교가 사망한 뒤에 그의 후임자들은 북경으로 부임하지 못했다. 게다가 당시 중국은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가 건국되는 혼란기였기 때문에 중국인 천주교 신자 공동체가 유지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 캄발릭 대주교좌는 폐지되고 말았다.2)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역사적 연속성을 지닌 동아시아 교계제도가 시작된 것은 이른바 ‘보호권’과 관련되어 있다.

 

주지하다시피 보호권(padroado, patronato)이란 교황이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국왕에게 부여한 권한이다. 즉 두 나라의 국왕에게 식민지 개척의 독점권을 인정하는 한편, 그 식민지에서의 선교 활동을 후원할 권한과 의무도 함께 맡도록 한 것이다. 니콜라오 5세 교황(1447~1455 재임)은 1452년 6월 18일 교황 칙서 〈둠 디베르사스〉(Dum Diversas)를 반포하여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Afonso) 5세에게 아프리카 지역에서 사라센인 및 이교도들을 정복하여 이들을 종신 노예로 삼는 것을 허가하였다. 그리고 1455년 1월 8일에는 교황 칙서 〈로마누스 폰티펙스〉(Romanus Pontifex)를 반포하고 그 권한을 확대하여 남아시아와 동양 지역에도 적용하였다. 그 이후 1514년까지 다양한 교황 칙서들을 통하여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국왕에게 식민지 개척과 그리스도교 전파에 관한 각종 권한들을 부여하였다.

 

특히 두 나라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하여 1493년 5월 3일에는 알렉산델 6세 교황이 교황 칙서 〈인테르 체테라〉(Inter Caetera)를 통하여 에스파냐 국왕에게 그리스도교를 전파한다는 조건으로 앞으로 발견된 지역에 대한 점유권을 보장하였다. 당시 포르투갈의 기득권도 인정하면서 아조레스 제도에서 100리그(league) 떨어진 공해상에 수직으로 경계선을 그어 서쪽 지역은 포르투갈, 동쪽 지역은 에스파냐에 할당하여 새로 발견되는 모든 섬과 육지에 대한 점유 독점권과 선교 사업을 위한 특권을 부여하였다. 1년 뒤인 1494년 6월 7일에는 다시 경계선을 재조정하여 카보베르데(Cabo Verde) 제도 서쪽에 위치한 서경 43도 37분 지점을 기준으로 동서의 에스파냐, 포르투갈 영토 경계를 확정하였다. 이를 토르데시야스(Tordesillas) 조약이라고 부른다.3)

 

교황이 부여한 보호권에 입각하여 국왕들이 행할 수 있는 권한에는 선교사 선발권과 배치권, 식민지에서의 교회 설립권, 주교 후보자 제청권, 십일조 징수권 등이 들어 있었다. 이 가운데 교계제도의 설정과 관련하여 주목할 부분은 식민지에서 교회를 설립하는 권한 그리고 주교 후보자를 제청할 수 있는 권한이다. 실제로 국왕이 교구를 설립하는 것은 아니고 교황에게 교구의 설정을 청원할 수 있는 권한일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교황은 거절할 수 없었다. 게다가 교구장 주교의 임명 역시 포르투갈 국왕이 추천한 포르투갈인 성직자를 교황청에서 승인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식민지 교구 설립과 관련하여 최초의 결정은 레오 10세 교황 때에 있었다. 즉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가 해외 교구를 신설하려고 북아프리카 서해안에 위치한 마데이라(Madeira) 제도의 수도인 푼샬(Funchal)에 주교좌를 설정해 줄 것을 교황청에 제안하였고, 이에 대해서 레오 10세 교황은 1514년 1월 12일 칙서 〈프로 엑스첼렌티 프래에미넨치아〉(Pro Excellenti Praeeminentia)를 반포하여 북아프리카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과 더불어 브라질에까지 재치권을 행사하는 푼샬 교구의 설립을 인가하였다. 또한 레오 10세 교황은 1514년 6월 4일에 반포한 칙서 〈둠 피데이 콘스탄치암〉(Dum Fidei Constantiam)과 6월 12일에 반포한 칙서 〈엠마누엘리 레지 포르투갈래 일루스트리〉(Emmanueli Regi Portugalliae Illustri)를 통해서 식민지 지역에 설립된 교회의 운영, 선교사 및 주교의 임명 등 각종 교구 관련 권한들을 포르투갈 국왕에게 위임하였다. 그 이후 포르투갈은 브라질, 아프리카 전역 그리고 인도, 중국, 일본 등지에서 보호권에 따른 임무를 수행하였다.

 

리스본 대교구에 부속되어 있었던 푼샬 교구는 1533년 1월 31일에 가서 독립된 대교구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1534년 11월 3일에 바오로 3세 교황은 교황 칙서 〈애쿠움 레푸타무스〉(Aequum Refutamus)를 통해서 인도의 고아에 주교좌를 설치하였다. 고아 교구는 푼샬 대교구에 부속된 교구로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557년 2월 4일 바오로 4세 교황이 〈엣시 상타 엣 임마쿨라타〉(Etsi Sancta et Immaculata)를 반포함으로써 고아 교구는 푼샬 대교구로부터 분리되었고, 인도 지역 전체를 총괄하는 수도 정주 대주교좌로서 아프리카 희망봉에서 중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관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날 교황은 칙서 〈프로 엑스첼렌티 프래에미넨치아〉(Pro Excellenti Praeeminentia)를 반포하여 인도의 서남부 해변에 위치한 코친(Cochin) 지역과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Malacca) 지역에 각각 고아 대교구의 부속 교구를 설치하였다.4)

 

1566년 비오 5세 교황은 에티오피아 총대주교였던 예수회 선교사 안드레아 오비에도(Andres Oviedo, 1517~1577)에게 배를 구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면 중국과 일본으로 가서 천주교 신자들을 돌보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나 오비에도는 교황의 편지를 받고 1567년 인도로 출발하였지만 배를 구할 수 없었으며, 에티오피아의 신자들에게도 필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결국 동아시아 선교를 포기하고 말았다. 한편 비오 5세 교황은 예수회 회원이자 에티오피아 총대주교의 부주교였던 니체아(Nicaea) 명의의 멜키오르 카르네이로(Melchior Carneiro, 1519~1583) 주교에게도 서한을 보내어 에티오피아를 떠나 일본으로 가도록 명령하였다. 카르네이로 주교는 1567년 혹은 1568년 무렵 마카오에 도착하였으며,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마카오에 머물면서 선교 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레고리오 13세 교황은 포르투갈 국왕 세바스티안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1576년 1월 23일 칙서 〈수페르 스페쿨라〉(Super Specula)를 반포하여 마카오에 정식으로 주교좌를 설치하고 말라카 교구로부터 독립시켰다.5) 이에 따라 마카오 교구는 고아 대교구의 부속 교구이면서, 일본과 중국 그리고 통킹 지역에 대한 재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로써 동아시아 지역에는 포르투갈 국왕의 보호권이 행사되는 정식 교구가 처음으로 설립되었다.

 

1500년대에 보호권 제도는 교황청이 애초에 의도하였던 선교의 수단으로서 기능하기보다는 군사 정복을 정당화하거나 식민지 지배를 위한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었다. 이에 따라 선교사는 원주민들에게 식민정책의 협조자로 비쳤고, 선교 지방의 교회 역시 유럽 백인들을 위한 곳으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교황들은 세속 군주에게 보호권을 부여함으로써 교회의 고유한 사명인 선교권을 포기한 셈이 되었고, 선교지 교회에 대한 교황의 명령과 지시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왕실의 동의가 없을 경우에는 그 효력을 발휘할 수조차 없었다. 따라서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이후 보호권 제도의 폐해가 점점 심각하게 드러나기 시작하였다.6)

 

보호권 제도의 폐단과 더불어 교황청과 포르투갈 사이에 갈등이 표면화된 것은 16세기 중반 포르투갈의 국력이 쇠약해지고 대외적 영향력이 쇠퇴일로를 걷기 시작하면서 빚어진 일이었다. 특히 1578년 포르투갈 국왕 세바스티안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전투에서 사망하자, 섭정을 맡았던 노년의 엔리케 추기경이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그 역시 후계자를 결정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그러자 왕국은 귀족들의 동의하에 에스파냐의 필리페 2세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이리하여 포르투갈은 에스파냐에 병합되었고 쇠퇴기를 맞이하였다.7)

 

그리하여 1622년 포교성성이 설립되면서 비서구 지역에서의 선교활동을 교황청이 직접 관할하기 위한 조치들을 강구하였다. 포교성성 초대 차관에 임명된 잉골리(Francesco Ingoli, 1578~1649) 몬시뇰은 해외선교의 실태를 조사하고 그 해결책을 문서로 제출하였다. 이 문서에서 잉골리 몬시뇰은 모든 선교 지방의 활동이 지역 교회의 주교와 수도자 사이에 재치권 분쟁, 예수회와 탁발 수도회의 갈등, 선교사들 사이의 국가적 대립 등을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하였다. 이에 따라 수도회와 국가에 따라 선교 지역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외국인 선교사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선교 정책과 활동을 공유하는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하는 일을 긴급한 과제로 제시하였다.8)

 

그러던 중 1649년에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알렉상드르 드 로드(Alexandre de Rhodes, 1591~1660) 신부가 로마에 도착하였다. 그는 코친차이나와 마카오 등지에서 활발하게 선교 활동을 펼치다가 코친차이나에서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추방당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선교 경험을 성찰하면서 동아시아 지역에서 현지인 사제들이 교회를 세우고 선교 활동에 나선다면 현지인들과 생김새도 다르고 말도 서투른 서양인 선교사들보다 훨씬 더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면 소수의 주교들을 파견하여 현지인 사제의 양성에 주력하는 새로운 선교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드 로드 신부는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건의 사항을 만들어 포교성성에 제출하였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 포르투갈의 보호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포교성성이 주교들을 파견하여 직접 선교 활동을 관장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이 지점에서 고안해낸 묘안이 바로 정식 교구의 재치권과 충돌하지 않는 교황 대리 감목구(Vicariatus Apostolicus, 이하에서는 대목구, 해당 직권자(ordinarius)는 대목구장으로 칭함)를 별도로 설치하고 교황의 대리자 자격으로 주교를 파견하여 포교성성의 선교 방침을 관철하는 것이었다.9) 그렇게 되면 포르투갈의 보호권에서 독립해 있으면서 수도회나 출신 국가의 이해관계와 무관한 대목구장 주교들을 파견할 수 있는 합법적인 길이 열리게 된다. 이 주교들은 자신의 활동 지역에서 현지인 성직자 양성에 전력하여 지역 교회를 뿌리내리게 하는 일을 최우선적인 과제로 삼을 것이었다.

 

로드 신부의 제안은 처음에 로마에서 별로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하지만 프랑스 파리로 간 로드 신부는 열렬한 지지자들을 확보하였으며, 이들이 나서서 동아시아 지역으로 교황 대리 감목들을 파견해달라는 청원을 포교성성에 제출하였다. 결국 포교성성은 이 청원을 받아들여서 1658년 프랑스 출신의 프랑수아 팔뤼(Francois Pallu, 1626~1684) 신부와 피에르 랑베르 드 라 모트(Pierre Lambert de la Motte, 1624~1679) 신부를 주교로 임명하고, 1659년에 각각 통킹과 코친차이나 지역을 담당하는 대목구장으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1660년에는 이냐스 코톨랑디(Ignace Cotolendi, 1630~1662) 신부를 주교로 임명한 다음에 중국의 남경, 북경, 산서, 산동, 하남, 섬서, 조선, 몽골 지역을 관할하는 남경 대목구장으로 파견하였다. 하지만 1661년 1월 6일에 파리에서 출발한 코톨랑디 주교는 1662년 8월 16일 페르시아를 지나 인도로 가던 도중에 병사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남경 대목구좌는 공석으로 남게 되었다.

 

 

3. 포교성성과 보호권 교구 사이의 갈등

 

대목구 제도를 운영하려는 포교성성의 방침은 보호권하의 교구들이 행사하던 재치권을 축소하고, 나아가서 보호권 교구들을 폐지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포르투갈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보호권을 사실상 무력화하려는 시도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저항이 심했다. 대목구장의 파견을 선교 보호권에 대한 침해로 단정하고, 대목구장들과 권력 다툼을 벌이면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려 하였다. 이 때문에 포르투갈의 입장을 달래기 위하여 알렉산델 8세 교황은 1690년 4월 10일 〈로마누스 폰티펙스〉(Romanus Pontifex)와 〈로마니 폰티피치스〉(Romani Pontificis)라는 두 칙서를 통해서 남경교구와 북경교구를 새로 설립하였다. 이에 따라 마카오 교구는 마카오 섬과 인근 도서들 외에 광동, 광서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는데, 신설 남경교구와 북경교구의 관할 지역은 별도로 지정하지 않고 포르투갈 국왕이 세 교구의 주교들과 합의하여 경계선을 정하도록 하였다. 세 보호권 교구의 교구장으로는 마카오 교구장에 조아웅 데 카살(Joao de Casal, 1641~1735) 주교가, 남경 교구장에는 최초의 중국인 주교가 된 도미니코회의 라문조(羅文藻, Gregor Lopez, 1617~1691) 주교가, 마지막으로 북경 교구장에는 프란치스코회의 베르나르디노 델라 키에사(Bernardino della Chiesa, 1644~1721) 주교가 임명되었다.

 

이처럼 포교성성이 마카오, 남경, 북경교구를 설치하여 중국 전역에 대한 보호권 교구들의 재치권을 인정하였지만, 정식 교구들이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지역들에 대목구를 세워서 동아시아 신자들의 영혼을 돌보려는 노력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즉 포르투갈의 항의에 교황청이 양보하여 세 개의 보호권 교구를 설치한 대가로 포교성성도 중국에 여러 곳의 대목구를 설치할 수 있었다. 즉 1696년 10월 15일 이노첸스 12세 교황이 〈에 수블리미 세디스〉(E Sublimi Sedis)라는 소칙서를 반포하여 새로운 대목구들을 설정하였다. 즉 북경교구로부터 산서 및 섬서 대목구, 사천 대목구가 신설되었으며, 남경교구로부터 복건 대목구, 호광 대목구, 강서 대목구, 절강 대목구, 운남 대목구, 귀주 대목구가 분리되었다. 이후 중국 지역에서는 포르투갈 국왕의 보호권이 적용되는 3개의 교구와 포교성성이 직접 관할하는 여러 대목구들이 병존하였다. 이 대목구들은 시기에 따라서 분할되기도 하고, 몇 개의 대목구가 병합되기도 하였다.10) 또한 중국과 인접한 동남아와 조선, 일본 등지로 대목구 제도는 확산되어 나갔다.

 

조선이 동아시아 지역 교회의 교구 또는 대목구의 관할 지역으로 명시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최석우는 알렉산델 7세 교황 때 포교성성이 1660년 남경 대목구를 설정하면서 그 안에 조선을 포함시킨 것을 효시라고 말한다. 그 뒤 클레멘스 11세 교황 때 북경 교구장 베르나르디노 델라 키에사 주교가 조선에 대한 재치권을 요청하여 로마는 1702년 북경 교구장이 조선 재치권을 갖는다고 인정하였다. 이로써 조선에 대한 관할권이 남경 주교에게서 북경 주교에게로 넘어갔다.11) 그러나 당시 이 관할권은 북경 주교 개인에게 15년간이라는 단서를 달고 위임된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델라 키에사 주교가 사망함과 동시에 조선 선교지 문제는 보호권 교구를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었던 동아시아 교계제도의 관심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밀려나고 말았다. 그러다가 1831년에 와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에 의해서 북경교구로부터 독립된 조선 대목구가 신설되었던 것이다.

 

한편 기리시탄 시대의 일본에 교구가 설치된 것은 언제인가? 예수회 동양 순찰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1539~1606) 신부가 12세에서 13세가량 되는 4명의 소년 사절단을 데리고 유럽을 방문한 것이 1582년부터 1590년 사이의 일이었다. 아마 이 일로 교황청에서 일본 교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되었으며, 일본 교회에 자율성을 부여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던 것 같다.12) 그리하여 1588년 2월 19일 식스토 5세 교황은 칙서 〈호디에 상티시무스〉(Hodie Sanctissimus)를 반포함으로써 후나이(府內, Funay)라는 명의로 분고[豊後] 지방에 주교좌를 설치하고 마카오 교구로부터 독립시켰다. 후나이는 오늘날 오이타이며, 규슈 섬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13) 후나이 교구는 고아 대교구의 부속교구로서 포르투갈 국왕의 보호권 관할 아래에 있는 교구였다. 그러나 1614년부터 선교사 추방령과 더불어 잔혹한 탄압이 이어지면서 일본 천주교회는 더 이상 조직적인 활동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후나이 교구는 유명무실해졌으며, 선교사들의 일본 입국 노력도 자취를 감추었다. 결국 후나이 교구는 1625년에 폐지되고 말았다.

 

동아시아 지역에 세워졌던 포르투갈 보호권 교구들의 존폐와 관련하여 중요한 상황이 1830년대에 발생하였다. 먼저 포르투갈에서 1834년 혁명이 일어나서 세속주의 성향의 정부가 들어섰고, 이듬해인 1835년 교황청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교황청에서는 1838년 4월 24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물타 프래클라레〉(Multa praeclare)라는 칙서를 반포하였다. 이 칙서를 통하여 교황은 인도와 중국 지역에 대한 포르투갈 국왕들의 보호권이 무효가 되었다고 선언하였다. 더 이상 포르투갈 국왕이 지배하고 있지 않은 지역에 대한 재치권을 폐지한 것이었다.

 

당시 포르투갈 국왕들은 후원자로서의 책무를 더 이상 이행하지도 않았으며, 또 이행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물타 프래클라레〉 칙서를 반포하여 과거 마카오 교구와 북경교구까지 부속 교구로 거느리고 있었던 고아 대교구의 권한을 축소하여 자기 대교구로 재치권을 한정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리스본 당국은 교황청의 방침에 격렬한 항의와 저항을 쏟아냈다. 특히 인도령을 총괄하던 포르투갈 직할령 고아 정부는 포르투갈 국왕의 승인이 없는 교황 칙서를 인정할 수 없다며 교황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이 일로 교황청과 인도 교회는 단절되었으며, 1857년에 가서야 교황청과 포르투갈이 이른바 정교협약을 체결하면서 관계는 조금씩 회복되었다.14)

 

이처럼 포르투갈의 거센 저항이 있었지만 로마 교황청은 새로운 대목구를 세우고, 선교사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선교 지역들을 새로운 선교 단체들에 맡기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그래서 마카오 교구의 재치권 아래에 있던 지역에 두 곳의 지목구를 설정하였다. 1844년 4월 22일에 설정된 홍콩 지목구와 1858년 9월 17일에 설치된 광주 지목구가 그것이다. 남경교구는 1839년 12월 19일 이후로 단순한 교구장 서리에게 맡겨졌으며, 북경교구에 대해서도 동일한 조치를 취하였다.15) 1846년 4월 교황청에서는 몽골 대목구장 조셉-마르시알 물리(Joseph-Martial Mouly, 1807~1868) 주교로 하여금 교구장 공석이던 북경교구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선교 보호권하의 북경 교구장을 교황청이 직접 임명하려는 시도였으므로 직접적으로 선교 보호권을 침해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북경교구의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즉각 반대 의사를 표명하면서 물리 주교의 착좌에 저항하였다. 하지만 결국 포르투갈의 보호권 주장은 이내 무력화되고 말았다. 그것은 이미 동아시아의 격변하던 정세에 포르투갈은 더 이상 개입할 수 있는 국력을 지니고 있지 못했던 탓이 컸다.

 

사실 교황청은 선교 보호권을 배척하고 직접 중국 천주교회에 관한 업무를 관할하고자 하였다. 특히 청나라 도광제가 천주교를 금지하는 칙서를 선포하자, 1848년 교황청에서는 교계제도 설립 등을 비롯하여 중국 천주교 관련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서 1849년과 1850년 사이에 홍콩에서 중국 지역의 주교회의를 개최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중국에 교계제도가 설립되면 기존 선교 보호권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프랑스와 포르투갈이 이에 반대하였고, 결국 교황은 회의 개최를 포기하고 말았다.16)

 

그러나 1851년이 되자 중국 지역의 주교들이 공동 현안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열기에 호조건이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1851년 9월에는 절강성(浙江省) 영파(寧波)에서, 그리고 1851년 11월 7일부터 12월 3일까지는 상해에서, 동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는 주교들의 회합이 열렸다. 두 번째 회합은 포교성성에서 제시한 34개의 의안들을 검토한 남경 교구장 서리 프란체스코 사비에르 마레스카(Francesco Xavier Maresca, 趙方濟, 1805~1855) 주교가 상해의 동가도(董家渡) 거리에 있던 주교관으로 중국에서 활동하던 주교들을 초청하여 회의를 개최한 것이다. 여기에 참석한 사람들은 몽골 대목구장 겸 북경 교구장 서리 물리 주교, 하남 대목구장 장-앙리 발뒤(Jean-Henri Baldus, 1811~1869) 주교, 일본 대목구장 테오도르 오귀스탱 포르카드(Theodore Augustin Forcade, 1816~1885) 주교, 남경 교구장 서리 마레스카 주교, 몽골 대목구 부주교 플로랑 다갱(Florent Daguin, 1815~1859) 주교, 그리고 남경교구 부주교 루이지 첼레스티노 스펠타(Luigi Celestino Spelta, 1818~1862) 주교 등이었다. 이들은 15차례 회합을 가졌으며, 12월 3일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축일에 회의를 마쳤다.17)

 

이 회의에서는 중국 선교와 관련한 다양한 주제들이 안건으로 상정되었다. 주교 선출, 현지인 성직자 양성, 교회 재산 운영 규칙, 교리문답 개정과 기도문 양식 정비, 성무 집행 시 사제 복장, 혼배 및 고해 규칙 등이 주요 토론 주제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사안으로 부각된 것은 중국에 교계제도를 설정하는 문제였다. 상해 주교회의에서 제1번 의안이기도 했던 교계제도 문제에 대해서 하남(河南) 대목구장이었던 라자로회의 발뒤 주교를 제외하고 전원이 만장일치로 찬성하였다. 발뒤 주교는 중국 대륙의 현 상황으로는 포교성성에서 파견한 대목구장들에게 직접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사도직 활동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당장 교계제도 설정을 건의하는 것에는 반대하였다.

 

당시 포교성성에서는 중국과 조선, 일본에 각각 대교구 하나씩만 세우자는 제안을 내놓았던 것 같다. 하지만 중국의 주교들은 이것으로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교계제도를 증설하자고 주장하였다. 또한 교구 설립의 문제에 대해서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부(府), 군(郡)과 같은 세속의 행정구역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또한 중국의 각 성(省)별로 대주교좌를 설치하고, 각 부에 주교좌를 세우자고 하였다. 그리고 잠정적으로는 중국 전역에 6개의 대교구를 설치하여, 북경(직예, 산동, 몽골, 만주 관할), 서안(섬서, 산서, 감숙 관할), 우창(호북, 호남, 하남 관할), 성도(사천, 윤남, 귀주 관할), 남경(강소, 양주, 강서 관할), 복주(복건, 절강, 광동, 광서 관할)의 체제로 하자는 주장을 제시하였다. 한편 조선과 일본은 중국 교계제도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보았다.18) 아마 조선과 일본은 독립된 국가이므로 중국과는 별개로 교계제도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또한 상해 주교회의에서는 주교 선출 방식에 대해서도 의견을 모았다. 즉 대주교 선출에는 해당 성(省)의 주교들과 대교구 소속의 유럽인 및 현지인 성직자들이 모두 선거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주교들과 유럽인 성직자들만이 대주교 피선거권을 지닌다. 반면에 주교 선출에서는 교구 소속의 모든 유럽인 및 현지인 성직자들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진다. 다만 유럽인 성직자를 주교로 선출할 때에는 모든 성직자들로부터 2/3의 동의를 받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현지인 성직자가 주교로 선출되기 위해서는 2/3의 동의 속에 모든 유럽인 성직자가 포함되어야 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19)

 

1851년 상해 주교회의에서 결정한 건의 사항들은 1852년 로마에 도착하였지만 승인을 받지 못하였다. 상당히 주의를 기울일 만하고 또 숙고할 가치가 있지만 그 제안 내용들을 다른 선교 지역에도 똑같이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20) 설혹 강력한 건의문을 올렸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포교성성에서 이를 수용하여 그대로 실천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동아시아 지역 전체가 제국주의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중국 내에서도 강력한 반선교사, 반천주교 운동이 전개되면서 천주교로서는 불리한 상황이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호권 교구가 아닌 정식 교계제도를 설정하는 문제는 당장 실현될 수 없었다. 하지만 동아시아 지역 교회에서 포르투갈의 보호권 교구들을 폐지하려는 작업은 계속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1856년 5월에 북경교구를 폐지하고 3개의 대목구로 분할하였으며, 남경교구는 강남 대목구로 변경하면서 포교성성 관할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1857년 2월 21일에 교황청과 포르투갈 정부 사이에 제2차 정교협약이 체결되면서 보호권은 중국 본토에서 광동 지역으로 제한되었다. 포르투갈 정부는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뒤인 1950년 7월 18일 교황청과 맺은 새로운 정교협약에 따라 보호권하의 여러 교구에서도 교구장 임명권은 포기하였다.21) 그리고 1999년 포르투갈이 마카오를 중국 정부에 반환함으로써 포르투갈이 행사하던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보호권은 마침내 소멸하였다.

 

정리하자면 동아시아 천주교에서 교계제도 설정의 역사는 포르투갈 국왕의 보호권하에서 교구들이 세워진 것과 궤를 같이한다. 하지만 이 교구들은 포르투갈 선교사들, 특히 각 수도회의 회원들이 운영하는 교구들이었다. 그래서 현지인 성직자들에 의해서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교구였다고 보기 어렵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교황청은 포교성성을 설립하여 새로운 선교 정책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보호권의 폐단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것을 보고, 보호권의 영향력을 축소하기 위하여 보호권 교구의 관할지역을 축소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목구 제도를 활용하여 대목구장들을 선교 지역으로 파견하여 교황청이 직접 통제하는 선교지로 바꾸어 나갔다. 아울러 포교성성은 선교 지역에서 현지인 성직자들이 양성되어 자립적인 지역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러한 교황청의 선교 정책에 부응한 대표적인 선교 단체가 바로 파리 외방전교회였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교황으로부터 받은 독립적인 권한을 활용하여 보호권 교구들의 횡포에 맞섰으며, 맡은 선교 지역에서 현지인 성직자들을 양성하는 일에 최우선적인 관심을 두었다.

 

하지만 포교성성의 탈 보호권 선교 정책은 동아시아 지역의 천주교에서 교계제도를 축소 내지 폐지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중국과 인접 지역들에서 보호권 교구들의 재치권이 축소되고, 결국에 가서 교구 자체의 폐지로 이어졌다. 하지만 19세기 동아시아 교회에서는 현지인 성직자들의 수적인 증가를 이루었다. 그러자 보호권이 폐지된 이후에는 새로운 교계제도를 설정하고, 현지인 성직자들의 완전한 자치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동아시아 선교 지역의 과제가 될 것이었다.

 

이것은 1851년 상해에서 열린 주교회의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던 바이지만, 그 구체적인 실현은 20세기에 들어와서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일에 물꼬를 튼 이는 바로 뱅상 레브(Vincent Lebbe, 1877~1940) 신부였고, 보편 교회 전체에 그 필요성을 각인시킨 것은 두 개의 교황 문헌 〈막시뭄 일룻〉(Maximum Illud)과 〈레룸 에클레시애〉(Rerum Ecclesiae)였다. 포스트 보호권 시대의 교계제도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장을 달리 하여 논하도록 하겠다.

 

 

4. 포스트-보호권 시대 또는 20세기 동아시아 교계제도

 

20세기 초반 동아시아, 특히 중국에서 반그리스도교, 반선교사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것은 서세동점 상황에서 그리스도교가 제국주의와 결탁해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것은 벨기에 출신의 라자로회 선교사로서 1901년부터 중국에서 선교하고 있었던 뱅상 레브 신부였다. 그는 중국 교회를 재건하는 길은 무엇보다 먼저 중국인 주교를 임명하여 중국인 성직자를 중심으로 한 교계제도가 설정되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동지인 코타(Cotta) 신부와 함께 1916년 교황청에 중국인 주교를 임명하여 주도록 탄원서를 보내고, 다시 1917년 2월에도 탄원서를 발송하였다. 이 서한은 1919년 11월 30일 베네딕도 15세 교황의 〈막시뭄 일룻〉의 초고에 결정적인 원천을 제공하였다. 또한 레브 신부는 지속적으로 중국인 주교 임명을 진언하여, 결국 1926년 10월 28일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서 6명의 중국인 사제들이 주교로 임명되었다.22)

 

하지만 레브 신부 이전에도 중국에서의 선교 현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들이 분명히 존재하였다. 중국 선교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포교성성에 제출한 적이 있었던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사 조셉 가베(Joseph Gabet, 1808~1853) 신부, 파리 노트르담 주교좌 성당의 명예 참사위원이었던 레옹 졸리(Leon Joly, 1847~1909) 신부 등은 중국에서 활동하는 유럽인 선교사들이 현지인 사제들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점들을 지적한 바 있었다. 그리고 레브 신부와 코타 신부가 중국 선교의 심각한 문제점을 절감하는 계기가 된 1914년 천진(天津) 사건, 그리고 1919년 7월 교황청에서 사도좌 순시관(Visitator Apostolicus)의 자격으로 중국과 인접 국가의 천주교 선교지 상황을 둘러보도록 파견하였고 1921년에 가서 파리 외방전교회 초대 총장이 된 드 게브리앙(Jean-Baptiste Budes de Guebriant, 1860~1935) 주교의 동아시아 선교 지역 순시 활동 등이 이어지면서 20세기 천주교 선교 활동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이 한 군데로 결집하면서 새로운 선교 정책을 제시하는 두 개의 교황 문헌이 출현하였던 것이다.23)

 

베네딕도 15세 교황(1914년부터 1922년까지 재위)은 1919년 11월 30일 ‘근대 선교에 관한 대헌장’이라고 불리는 교황 서한(Littera Apostolica) 〈막시뭄 일룻〉을 반포하여 현지인 성직자 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즉 유럽처럼 자력으로 공동체를 운영할 수 있는 사제들을 양성하는 일에 선교 지역의 대목구장들이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선교사의 의무 가운데 정치 문제 불간섭과 피선교지 문화에 대한 연구 등을 역설하였다. 그 밖에도 〈막시뭄 일룻〉은 현지인 사제단 양성을 위한 신학교 교육, 신자들의 애덕 사업에 대한 칭찬, 선교 지역에 대한 재정 지원에서 포교성성의 특별한 지위 등을 거론하였다. “동족들에게 신앙을 심어 주기에 가장 잘 준비된 사람”24)인 현지인 성직자들을 양성하여 그들로 구성되는 사제단이 지역 교회의 토대를 만들도록 하라는 〈막시뭄 일룻〉의 선교 방침은 1922년 비오 11세 교황의 재가를 받아서 시행되었다.

 

교계제도의 설정 문제와 관련하여 〈막시뭄 일룻〉의 영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1924년 5월 14일부터 6월 12일까지 상해에서 열린 중국 최초의 국가 공의회(Primum Concilium Plenarium Sinense)였다. 초대 교황 사절 첼소 코스탄티니(Celso Costantini, 1876~1958) 주교의 주재로 열린 이 회의에서 1917년에 반포된 새 교회법전과 교황 문헌에 의거하여 법조문과 로마 성청들의 훈령, 지역 시노드의 법령과 지역 선교지의 지침들을 검토하였다. 이에 따라서 현지인 사제단과 외국인 사제단의 동등한 자격 부여 등 다양한 결정들을 내렸는데,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새로운 대목구에 명칭을 부여하는 문제였다. 이 결정이 영향을 미친 것인지 1924년 12월 3일에 중국과 동남아 등지의 대목구 명칭들이 전면 개편되었다.25) 즉 중국의 북직예(北直隷) 대목구는 북경 대목구로, 서부 통킹 대목구는 하노이 대목구로, 서부 코친차이나 대목구는 사이공 대목구로, 그리고 캄보디아 대목구는 프놈펜 대목구로 명칭이 변경된 것이다.

 

기존 대목구 명칭을 대목구장 주교가 활동하는 지역 명칭에서 정주하는 주교좌 도시 명칭으로 바꾸기로 한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정식 교구로 승격하는 과정에서 일보 진전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11년 조선 대목구를 분할하여 조선 대목구를 서울 대목구로 명칭을 바꾸고 대구 대목구를 신설할 당시에 뮈텔 주교는 기존의 대목구 명명법을 버리고 정주 주교좌 도시 이름을 대목구 명칭으로 선택한 포교성성의 결정을 미구에 교계제도를 설정하려는 것으로 해석한 바 있다.26)

 

따라서 20세기 동아시아 교계제도 설정의 역사는 〈막시뭄 일룻〉을 기점으로 한다. 뱅상 레브 신부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노력이 모여서 결실을 거둔 〈막시뭄 일룻〉에 따라서 동아시아 현지인 성직자들이 중심을 이룬 독립적인 교계제도 운영의 필요성이 대두하였다. 그 가시적인 성과는 1924년에 동아시아 대목구들의 명칭이 교구에 버금가는 주교좌 도시명으로 결정된 것이다. 그리고 1926년에 들어와서 〈레룸 에클레시애〉에 따라서 본격적으로 교계제도 설정을 위한 노력이 가속화되었다.

 

비오 11세 교황(1922년부터 1939년까지 재위)은 1926년 2월 28일 선교 회칙 〈레룸 에클레시애〉에서 현지인 성직자 양성과 현지인 성직자들로 조직된 교계제도를 구축할 것을 강조하면서 특히 중국, 일본, 인도의 주교들에게 이 점을 역설하였다. 비오 11세 교황의 선교 정책은 무엇보다도 교회의 현지화였다. 즉 교회를 현지 문화에 적응시키고 또한 가능한 한 현지인으로 하여금 교회를 다스리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런 정책 덕분에 그의 재위 기간에 세계의 교구는 거의 2배로 늘어났다.27)

 

서울 대목구의 뮈텔 주교는 1928년 1월 21일자 교령을 《경향잡지》에 공포하여 황해도를 감목 대리구로 설정하고 김명제(金命濟, 1873~1960) 신부를 감목 대리에 임명했다. 그리고 대구 대목구에서는 드망즈 주교가 1931년 5월 10일 전라도 감목 대리구를 설정하고 김양홍(金洋洪, 1875~1945) 신부를 감목 대리에 임명하였다.28) 이러한 시도는 조선인 성직자들에 의해서 자치적으로 운영되는 교회 조직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1937년에 가서는 전주 지목구가 탄생하여 조선인 성직자에 의해서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교회 조직이 탄생하였다.29) 최석우에 따르면 1935년에 한국 최초의 현지인 수도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가 교황청의 인가를 얻은 것 역시 이러한 비오 11세 교황의 선교 정책과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30)

 

그런데 조선 교회에 교계제도를 설정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일본 동경 주재 교황 사절과 포교성성 장관 사이에 논의가 이루어진 적이 두 차례 있었다. 즉 1923년 1월 8일에 일본 동경 주재 교황 사절 마리오 자르디니(Mario Giardini, 1887~1947) 대주교가 일본 지역 공의회(Concilium Provinciale) 개최를 준비하면서 조선 교회 주교들의 일본 공의회 참석 여부를 타진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 서울 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비록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관습이나 언어, 정서, 전통, 사목 방법 등 여러 가지 점에서 조선은 일본과 다르기 때문에 일본 공의회에 참석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사를 전달하였다. 이에 자르디니 대주교는 해당 사안에 대해서 포교성성 장관 판 롯숨(Van Rossum, 1854~1932) 추기경의 의견을 구하였다. 그때 자르디니 대주교는 조선에 교계제도를 설립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의견을 개진하였다.31) 하지만 판 롯숨 추기경은 1923년 3월 5일 답장에서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에서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하였다.32)

 

또한 1938년 5월 28일에는 일본 동경 주재 교황 사절 파울로 마렐라(Paolo Marella, 1895~1984) 대주교가 포교성성 장관 피에트로 푸마소니 비온디(Pietro Fumasoni Biondi, 1872~1960) 추기경에게 서한을 보내어, 뮈텔 주교 사후 조선 교회의 상황에 대해서 우려를 표하면서 이참에 조선 교회에 교계제도를 설립하면 어떻겠는가 하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23년에 판 롯숨 추기경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푸마소니 비온디 추기경 역시 신중한 입장을 취하면서 포교성성의 다른 추기경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는 취지의 답장을 1938년 7월 9일에 보냈다.33) 그러므로 20세기 전반기에 있었던 조선 교회의 교계제도 설립 논의는 모두 무산되었고, 좀 더 시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동아시아 지역 전체로 보면 보호권 교구가 아니라 교황청에서 직접 교구장을 임명하는 교구의 설정이 실현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된 이후의 일이다. 먼저 중국에서 1946년 4월 11일에 교계제도가 설정되어 북경대교구가 출발하였다. 북경 대교구장에는 전경신(田耕莘) 토마스 주교가 임명되었다.34) 그는 북경 대교구장에 임명되면서 동시에 최초의 중국인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하지만 3년 뒤인 1949년에 모택동(毛澤東, 1893~1976)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이 중국 대륙을 장악하면서 새로운 박해가 발생하여 20개의 대교구와 79개의 교구 그리고 38개의 지목구로 구성된 교계제도는 몰락하고 말았다.35) 그리고 1957년 중국 천주교 애국교회가 생겨나면서 중국 천주교와 교황청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1978년에 와서 등소평(鄧小平, 1904~1997) 체제가 등장하고 개혁 및 개방정책이 실시되면서 이른바 지하교회가 부활하였지만, 교계제도를 재건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여전히 중국 당국과 교황청이 대립하고 있다.36)

 

대만의 경우에는 1913년 7월 13일에 포르모사(Formosa) 지목구가 설립되었다가, 1949년 12월 30일에 고웅(高雄) 지목구와 대북(臺北) 지목구로 분할되었다. 그리고 1950년 8월 10일 대중(臺中) 지목구가 세워졌다. 그 뒤 1952년 8월 7일에 대만에도 교계제도가 설립되었다. 이에 따라서 대북 지목구는 대북대교구로 승격되었고, 1952년 8월 7일 대북 대교구 산하에 가의(嘉義) 지목구와 화련(花蓮) 지목구가 세워졌다. 1961년 3월 21일에 고웅(高雄) 지목구는 교구가 되었으며, 같은 날 신죽(新竹) 교구와 대남(臺南)교구가 신설되었다. 가의 지목구와 대중 지목구는 1962년 4월 16일에, 그리고 화련 지목구는 1963년 3월 1일에 교구로 승격되었다.37)

 

베트남에서는 1960년 11월 24일 교계제도가 설정되었다. 이에 따라서 하노이 대목구, 후에 대목구, 사이공 대목구가 각각 대교구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북부 통킹 대목구의 후신인 박 닌(Bac Ninh) 대목구, 중부 통킹 대목구의 후신인 부이 추(Bui Chu) 대목구 등 14개 대목구가 정식 교구로 승격되었고, 다랏(đa Lat) 교구 등 3개의 교구가 신설되었다.

 

인도네시아의 경우에는 1961년 1월 3일에 교계제도가 설정되었는데, 당시 인도네시아에는 1841년 4월 3일에 설정되었던 바타비아 대목구가 1950년 2월 7일에 명칭을 변경한 자카르타 대목구를 비롯하여 20개의 대목구와 5개의 지목구가 있었다. 인도네시아에 교계제도가 설정됨으로써 이들은 자카르타 대교구를 비롯한 6개의 대교구와 19개의 교구로 승격되었다.

 

한편 일본 천주교의 경우는 약간 다른 역사적 맥락을 지니고 있다. 에도 막부 아래에서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던 일본 천주교회가 보편 교회의 역사 속에 다시 등장한 것은 일본의 개항을 조금 앞둔 1842년 무렵의 일이었다. 1842년 4월 12일 포교성성 장관이 남경 교구장 서리 루도비코 마리아 콘테 데 베시(Ludovico Maria conte De Besi, 1805~1871)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일본에 관심을 기울일 것을 촉구하면서 조선 대목구가 일본을 맡는다고 말한 바 있었다. 그러므로 19세기에 일본 지역은 조선 대목구장들, 그리고 홍콩의 파리 외방전교회 대표 신부들이 관할하였다. 1846년 5월 1일 일본 대목구가 처음으로 설정되었으며, 1873년 일본 정부가 금교령(禁敎令)을 철폐하면서 점차 일본 천주교가 발전할 기미를 보이자 1876년 5월 22일에 가서 도쿄를 중심으로 한 북일본 대목구와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한 남일본 대목구로 분할하였다.

 

1888년 남일본 대목구는 다시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중부 대목구와 원래의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남부 대목구로 분리되었다. 이듬해인 1889년에 선포된 일본 제국 헌법에 신앙의 자유 조항이 들어가면서 일본 천주교회는 공인된 종교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교황청에서는 1891년 6월 15일 일본 교회에 교계제도를 설정하여 1개의 대교구(도쿄 대교구)와 3개의 교구(하코다테 교구, 오사카 교구, 나가사키 교구)를 설치하였다.38) 1922년 2월 18일에 나고야 지목구가 분할되었고, 1937년 11월 9일에 요코하마 교구가 분할되었다. 아울러 1927년에는 최초로 일본인 주교가 탄생하였다. 즉 나가사키 교구장에 일본인 하야사카 규노스케(早坂久之助, 1883~1959) 주교가 임명된 것이다. 1937년에 가서는 동경 대교구장에도 일본인 도이 타츠오(土井辰雄, 1892~1970) 대주교가 임명되었다. 도이 타츠오 대주교는 1960년에 일본인 최초의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39) 한편 교황청은 1952년에 주일 교황 사절을 공사관으로 승격시켰으며, 아울러 일본 내의 모든 대목구와 지목구를 주교구로 승격시켰다.

 

일본 천주교에 교계제도 설정이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 까닭은 1889년 2월 11일 〈대일본제국헌법〉이 반포된 사실과 관련이 깊다. 즉 그 헌법 제28조에는 다음의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 신민은 안녕질서를 방해하지 않고, 또한 신민의 의무를 위반하지 않는 한 신교(信敎)의 자유를 갖는다.” 그리스도교는 이 조항에 따라 법적으로 신교의 자유를 보장받게 되었다. 헌법에 의한 신교 자유의 보장은, 교회 관계자들에게 일본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승리라고 느껴졌다. 교회 관계자는 ‘신교의 자유’를 환영하여 헌법 발포 당일에 동경 키비기쵸 후생관에서 연합축하회를 개최하였다고 한다.40) 따라서 제국 헌법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 1889년의 일이 1891년 교구 설정에 모종의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근대 일본 천주교회의 역사를 다루면서 직접적으로 제국 헌법에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조항이 들어갔기 때문에 일본 정부에 대한 천주교의 신뢰를 보여주기 위하여, 그리고 일본 천주교회의 발전에 대한 희망적인 관측 때문에 일본 교회에 교계제도를 설정하였다는 주장이 있다.41)

 

20세기 동아시아 교계제도 설정의 역사를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먼저 뱅상 레브 신부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시작된 현지인 성직자들의 자치적인 교회 운영에 대한 강조는 두 번의 교황 칙서를 통해서 보편 교회의 사명으로 부각되었다. 그리하여 동아시아 천주교회에 교계제도를 설정하려는 노력들이 시작되었다. 자체적으로는 감목 대리구의 형태로 현지인 성직자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경험을 축적하였다. 그리고 교황청에서는 대목구의 명칭을 정주 주교좌 도시의 이름으로 변경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내외적인 조건들이 무르익게 되면 결국에 가서 정식 교계제도가 설정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 말부터 시작된 국제 정세의 변화는 동아시아 천주교에서 교계제도를 설정하려는 노력들을 잠시 미룰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이어서 세계 대전이 벌어지고, 동아시아에서는 일본 군국주의의 팽창정책으로 말미암은 태평양 전쟁 때문에 모든 일은 전쟁 이후로 연기되었다. 이 때문에 1946년의 중국, 1952년의 대만, 1960년의 베트남, 1961년의 인도네시아에 이어서 1962년에는 한국 교회에도 교계제도가 설정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동아시아 교계제도 설정에 관한 시대적 흐름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각국 천주교회는 나름대로 독자적인 내적 맥락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러한 요인에 맞추어서 각국 천주교회에 순차적으로 교계제도가 설정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천주교에서 교계제도가 설정되는 과정의 시말을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5. 한국 천주교 교계제도 설정의 시말

 

한국 전쟁의 참화를 딛고 일어선 한국 천주교회는 1950년대에 지속적으로 교세 성장을 경험하였다. 휴전이 이루어졌던 1953년에 166,471명에 불과하던 천주교 신자는 1960년에 와서 451,808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1962년에는 드디어 50만 명을 돌파하여 530,217명을 기록하였다. 약 10년 사이에 3배가 넘는 성장세를 보인 것이다. 이러한 교세 성장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에 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먼저 전후 복구 과정에서 가톨릭 구제회를 비롯하여 독일과 미국의 천주교 구호단체들에서 보내온 구호물자를 배급하는 창구 역할을 하였던 천주교가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였던 점도 중요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아울러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한계 상황 속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종교로 몰리게 된 것도 큰 요인이 되었으리라 짐작한다.

 

한국 천주교의 이러한 교세 성장에 힘입어 1961년 6월 6일 요한 23세 교황은 1958년 10월부터 서울 대목구 내의 감목 대리구로 지정되어 있었던 강화도와 근방 도서들을 포함한 인천 지구에 새로운 대목구를 설치하였다.42) 신설 인천 대목구의 초대 대목구장으로는 청주 대목구에서 활동하던 메리놀 외방선교회의 윌리엄 존 맥노튼(William John McNaughton) 신부가 임명되어 투부르보 미누스(Thuburbo minus)의 명의 주교로 승품되었다. 이처럼 한국 천주교회는 1950년대 이후 크게 성장하면서 교회 조직의 구조에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드러난 것이 1962년의 교계제도 설정이었다.

 

하지만 서울 대목구를 중심으로 한국의 천주교회가 보편 교회 속에서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는 시도는 이미 대한민국 정부 수립 무렵부터 있었다. 물론 정식 교계제도의 설정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고, 다만 제8대 조선 대목구장 뮈텔 대주교가 누렸던 예우의 수준에 맞추어서 당시 서울 대목구장이었던 노기남(盧基南) 주교를 대주교로 승품해달라는 정도였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당시에 있었던 한국 천주교회의 동향을 살펴보자.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장면 박사는 국제연합(UN) 한국대표로 12월 7일 파리에서 열린 제3차 국제연합 총회에서 연설을 하였다. 이어서 그는 로마로 가서 12월 16일에 이승만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대통령 신임장과 한국 주교단의 서한을 가지고 비오 12세 교황을 예방하였다. 당시 한국 교회에서는 장면 박사 편에 보낸 서한을 통해 교황청에서 한국과 한국 교회에 보여준 관심과 지지에 감사를 표하였다. 아울러 이 서한에서는 한국에 대주교를 두는 문제와 패트릭 번 교황 사절을 주교위에 올리는 문제, 그리고 시복재판 과정에 있던 병인박해 순교자들을 복자로 선포하는 문제 등을 교황에게 건의하였다.43)

 

비오 12세 교황은 한국 천주교 신자들의 감사를 담은 서한을 받은 지 며칠 뒤인 1948년 성탄 축일 직전에 노기남 주교에게 직접 회답을 보냈다. 그 요지는 한국 교우들의 요청이 실현되도록 힘쓰겠노라는 내용의 격려와 위로였다. 하지만 서울에 대주교좌를 설치하는 문제, 노기남 주교의 대주교 승품 그리고 번 교황 사절의 주교 임명과 같은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언급은 들어있지 않았다.44)

 

장면 박사가 교황을 알현하면서 한국 교회의 감사 서한을 전달한 지 4개월 후인 1949년 4월 중순에 로마 교황청은 정식으로 대한민국을 승인하는 동시에, 번 교황 사절을 주교로 임명하여 주교 성성식을 거행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리하여 6월 14일 명동 성당에서 번 주교의 성성식이 거행되었다. 뉴욕 교구 스펠만 추기경의 보좌인 맥도날드 주교가 주례하고 라리보 주교와 노기남 주교가 보조한 번 주교의 성성식에는 이승만 대통령, 신익희 국회의장, 김구, 주한 미국 대사 무초, 유엔 한국위원단 등이 참석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50년은 25년마다 맞이하는 성년(聖年)이었다. 이해 2월 하순에 서울대교구의 명동 주교좌 성당에서는 처음으로 남한 전 교구 주교회의를 3일 동안 개최하였다. 노기남 주교는 이 회의에서 첫 외유를 나설 의향을 비쳤다. 노기남 주교는 1942년에 주교가 되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과 연이은 해방과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직 사도좌 정기방문(Ad Limina)을 실현하지 못했던 것이다.

 

노기남 주교는 성년을 축하하고 비오 12세 교황을 알현하기 위하여 성년 축하 사절단을 이끌고 1950년 5월 15일 김포공항을 떠나 로마로 향했다. 로마에 도착한 노기남 주교 일행은 1950년 6월 1일 오후 비오 12세 교황을 알현하였다. 라리보 주교가 단독 알현을 한 뒤에 노기남 주교도 단독 알현을 하였다. 불어로 진행된 노기남 주교와 비오 12세 교황의 대담에서, 노기남 주교는 조국의 독립과 정부 수립에 관하여 교황청에서 보여준 은혜에 대해서 극진한 감사의 뜻을 표한 뒤에 공산주의의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발전하고 있던 한국 교회의 상황을 보고하였다.

 

노기남 주교가 애초에 배정된 15분의 알현 시간을 넘기고 20여 분 뒤에 나오자, 이번에는 서울 대목구 상서국장 윤을수(尹乙洙) 신부와 당시 경향신문 사장이었던 평신도 대표 한창우(韓昌愚), 그리고 로마에 유학하고 있던 한국인 신부와 유학생들이 단체로 교황을 알현하였다. 그 자리에서 윤을수 신부와 한창우 사장은 한국에 대주교를 둘 것을 골자로 하는 라틴어 청원서(양피에 글자를 박아서 만든 것이었음)를 교황께 올렸다. 이에 비오 12세 교황은 만족해하면서 한국 교회의 발전을 기구하였다고 한다.45)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비오 12세 교황의 후임이었던 요한 23세 교황은 한국 교회가 충분히 성장하고 성숙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1962년 3월 10일 〈복음의 비옥한 씨앗〉(Fertile Evangelii Semen)라는 글귀로 시작하는 교황령(Constitutio Apostolica)을 반포하였다.46) 이 교황령을 통해서 한국 교회에는 교계제도가 설정된 것이다.

 

비오 12세 교황의 교황령은 서울, 대구, 광주의 세 대목구를 대교구로 승격하고, 나머지 대목구들은 교구로 승격하였다. 이에 따라서 그때까지 대목구 체제하에서 준주교좌 성당이었던 곳들은 모두 정식 주교좌 성당으로, 그리고 준본당은 모두 정식 본당이 되었다. 그리하여 서울의 노기남 주교, 대구의 서정길 주교, 그리고 광주의 헨리 주교도 각각 대주교로 승품되었다. 또한 한국 교회를 서울, 대구, 광주 등 세 관구로 구분하고, 나머지 교구들은 속교구(屬敎區)로서 세 관구에 예속시켰다. 그 결과 서울 관구는 평양, 함흥, 춘천, 인천, 대전의 다섯 교구를 속교구로 갖게 되었다. 한편 대구 관구는 청주와 부산의 두 교구를, 광주 관구는 전주교구를 각기 자신의 속교구로 관할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덕원 면속구, 오늘날의 용어로 하자면 자치 수도원구는 속교구에서 제외되었다. 그리고 만주 지역에 있던 연길 대목구는 해방 이전에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하였던 관계로 식민지 조선에서 활동하던 독일 베네딕도회가 관할하였지만, 1946년 중국 교회에 교계제도가 설정되면서 이미 교구로 승격되어 봉천대교구의 속교구로 중국 교회에 속해 있었다.

 

요한 23세 교황이 한국 교회에 정식으로 교계제도를 설정하여, 3개의 대주교 관구 아래에 11개 교구를 편제하고 서울과 대구 및 광주 대교구의 주교들을 대주교로 승품한다는 내용을 담은 교황령은 1962년 3월 10일로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로마 교황청에서 이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은 한국 시각으로 3월 24일 오후 9시였다. 그러므로 당시 한국 교회에서는 1962년 3월 25일부로 한국 교회에 교계제도가 설정되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왜 하필 1962년이며, 3월 25일이었을까? 교황청의 회의록이나 기타 문서들을 열람하지 않고서는 정확한 사정을 자세하게 알 길이 없다. 다만 교황청 주재 한국 교회 연락관으로 있다가 교계제도 설정 칙서 및 주교 임명장 그리고 3명의 대주교들에게 하사하는 팔리움(pallium)을 지참하고 급거 귀국하였던 백남익(白南翼) 신부의 증언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다. 즉 1959년 3월에 한국을 방문한 포교성성 장관 그레고리오 아가지아니안(Gregorio Agagianian, 1895~1971) 추기경이 한국 교회의 성장과 성령 강림 대축일 당시 한국 신자들의 신앙 열기에 감동하여 교계제도 설정을 준비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4.19 혁명과 5.16 쿠데타 등 국내의 정치적 변동 때문에 계속 연기되었으며, 1962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교황령을 반포하는 날짜에 관해서도 백남익 신부는 포교성성의 어느 대변인이 한 말을 전하면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즉 한국 교회의 주보인 무염 시태 성모 축일 12월 8일에 선포할 수도 있었지만 시기적으로 너무 늦기 때문에 적절한 성모 축일을 찾다 보니 성모 영보(聖母領報), 오늘날의 표현으로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인 3월 25일을 선택하였다는 것이다.47)

 

백남익 신부에 의해서 설정 칙서와 팔리움이 도착하자 1962년 6월 29일에 한국 천주교 교계제도 설정식이 열렸다. 6월 29일 오후 4시 명동주교좌 성당에서는 주한 교황 사절 직무 대리였던 찰스 버튼 무톤(Charles Burton Mouton) 몬시뇰의 주례로 서울대교구의 노기남 대주교, 대구대교구의 서정길 대주교 그리고 광주대교구의 해롤드 헨리 대주교의 승격식이 거행되었다. 주한 교황 사절 직무 대리 무톤 몬시뇰은 대례 미사를 끝내고 강론을 통해서 한국 천주교의 발전 상황을 언급하고, 요한 23세 교황이 순교의 역사로 빛나는 한국 천주교회를 높이 평가하였음을 강조하였다.

 

이어서 무톤 몬시뇰은 교황령 〈복음의 비옥한 씨〉를 낭독하고 이 교서의 사본과 대주교의 상징인 팔리움을 각 대주교에게 수여하였다. 이어서 서울대교구 노기남 대주교의 착좌식이 무톤 몬시뇰의 주례로 거행되었다. 이때 서울대교구 신부들이 순명과 공경을 표시하기 위하여 대주교의 반지에 친구(親口)하는 예식이 이어졌고, 사은 찬미가 〈테 데움〉을 노래함으로써 이날의 예식이 모두 끝났다. 오후 6시부터 명동 본당 구내 문화관에서 경축연이 벌어졌다. 여기에는 김동하 국가재건최고회의 고문, 멜로이 유엔군 사령관 부부 및 각국 외교사절들과 국내의 각계 인사들이 참석하였다. 그 뒤 7월 한 달 동안 각 교구별로 교구장 주교의 착좌식이 무톤 몬시뇰의 주례로 거행되었다.

 

 

6. 남은 과제들

 

이 글은 세계 교회의 흐름 속에서 교계제도 설정의 역사적 경위를 추적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래서 동아시아 천주교 전체의 변화상 속에서 교계제도 설정의 문제를 읽어야 한다는 점을 주로 강조하였다. 그리고 1962년에 가서 한국 천주교에 교계제도가 설정된 것도 바로 이 틀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논하고자 하였다. 우선 15세기 이후 선교 보호권 시대의 교계제도가 지닌 특성과 문제점을 검토하였다. 그리고 보호권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서 등장한 포교성성의 대목구 제도와 현지인 성직자 양성 방안이 동아시아 천주교회의 역사에서 새로운 방향타 역할을 하였음을 설명하였다. 그 성과에 힘입어 20세기에 들어와서는 현지인 주교의 임명과 현지인 성직자단의 자치 활동에 대한 강조가 교황청의 선교 정책으로 부상하였다. 이에 따라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아시아 각국에서 교계제도가 설정되기 시작하였다. 해방 이후 한국 천주교에서 교계제도가 설정되기까지의 과정도 이러한 배경하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앞으로의 연구 과제를 꼽으라면 아마도 19세기 후반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 교회에서 현지인 성직자 자치 교구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를 중국과 일본, 조선에서의 회의들을 통해서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각종 지도서에서 교계제도 설정의 싹이 어떻게 배태되고 있었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이런 작업들은 앞으로 동아시아 천주교회의 제도사를 연구할 때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근본적인 의문이 다시 떠오른다. 대목구는 무엇이고, 또 교구란 무엇일까? 도대체 대목구였다가 정식 교구가 된다고 무엇이 달라지는 것일까? 현행 교회법 제371조 제1항을 보면 “대목구 또는 지목구는 특수한 사정 때문에 아직 교구로 설정되지 아니하고 대목구장이나 지목구장에게 사목이 위탁되어, 그가 그것을 교황의 이름으로 통치하는 하느님 백성의 한 부분”이라고 되어 있다. 또한 제381조에는 “교구장 주교는 자기에게 맡겨진 교구에서, 그의 사목 임무 수행에 요구되는 일체의 고유한 직접적 직권이 있으며, 제368조에 언급된 기타의 신자들의 공동체(성직 자치구, 자치 수도원구, 대목구, 지목구, 직할 서리구)를 영도하는 자는 법률상 교구장 주교와 동등시된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대목구장은 교회법상 교구장 주교와 동등한 권한을 가지지만, 어디까지나 교황의 이름으로 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대목구장 주교의 권한은 교황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다. 굳이 들자면 교구장 주교가 되면 본인이 정주하고 있는 주교좌 도시 이름을 자신의 명의로 할 수가 있다거나 교구장 주교 또는 대주교로서 전례상의 예우가 달라지는 정도가 아닐까 한다. 그러니까 교구장이 아니라 대목구장이어서 할 수 없었던 일

은 없는 셈이다.

 

게다가 대목구에서 교구로 바뀐다고 행정 체계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물론 대목구에서는 주교좌 참의회(Capitulum catherale)를 구성할 수 없다거나 총대리(Vicarius generalis)를 임명할 수 없다는 제약조건이 있기는 하다. 대신에 선교사 3인을 선발하여 평의회(Consilium)를 설치할 수 있으며, 또한 감목 대리(Vicarius delegatus)나 대목구장 직무 대행(Pro-vicarius)을 임명하여 대목구장이 직무 수행을 할 수 없는 궐석(sede impedita) 상황을 대비할 수 있다.48)

 

그렇다면 한국 천주교에 교계제도가 설정되고 정식 교구로 승격되었다는 것은 한국 천주교의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1831년 조선 대목구 설정에 비할 때 한국 천주교는 새로운 단계의 역사적 시기로 접어들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 특징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교계제도의 설정이 교구민들의 자주적인 신앙생활을 고무하고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획기적인 태도를 낳았다는 등 긍정적인 면모들을 지적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막시뭄 일룻〉과 〈레룸 에클레시애〉에서 강조하였던 지역 문화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적응은 여전히 실현해야 할 목표로 남아 있으며, 더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 정신은 아직도 한국 교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미 제3차 바티칸 공의회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하고들 말하고 다니는 판국에 말이다. 지난 50년 동안 초고속 성장을 거듭한 교세 팽창의 단꿈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착각일지 모른다.

 

최석우 몬시뇰은 1984년에 한국 천주교회가 왜 여전히 인류복음화성성에 의존하고 있느냐고 의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아직 한국 교회가 재정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과연 아직도 그런 상황인가를 되물으며, 오늘의 한국 교회가 반성할 점이라고 하였다.49) 그로부터 28년이 흐른 지금도 이 질문이 유효하다는 것 자체가 슬픈 일이다. 2011년도 서울대교구의 재무제표를 보면 2011년 12월 31일 현재 총자산은 5,696억 원이고, 한 해 총수입은 1,114억 원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한국 천주교는 재정적으로 자립하기에 이미 충분한 상황이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의 천주교 신자는 이미 총인구 대비 10%를 넘어섰다. 그런데도 왜 아직 한국 교회가 인류복음화성성 산하의 선교 지역 교회로 남아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먼저 한국 천주교에 교계제도가 설정되던 1962년 당시에 보편 교회의 최고 규범이었던 비오-베네딕도 법전의 교회법 체계에서 대목구가 정식 교구로 승격될 때 교황청 내에서 그 관할 부서의 변동은 어떻게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었는지에 대하여 조사해야 할 것이다. 또한 과연 한국 천주교가 현재와 같이 계속 인류복음화성 관할로 존속하는 것이 적절한가에 관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현행 교황청 특별법상의 교황청 부서에 대한 편제들을 연구하는 작업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한국 천주교가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성직자와 일반 신자들 모두의 공동체가 지향할 바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할 때에만 교황청과의 관계 재설정도 의미 있는 과제가 될 것이라고 본다.

 

 

참고 문헌

 

고노이 다카시, 《일본 그리스도교사》, 이원순 옮김,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김선미, 〈인도〉, 《한국가톨릭대사전》 9,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김성태 외, 《한국천주교회사》 1, 한국교회사연구소, 2009.

김진소, 《전주교구사》, 빅벨, 1998.

노기남, 《나의 회상록》, 가톨릭출판사, 1969.

박동균, 〈교구〉, 《한국가톨릭대사전》 1, 한국교회사연구소, 2003.

박양자, 《일본 기리시탄 순교사와 조선인》, 순교의 맥, 2008.

백남익, 〈교황청에 비친 한국 천주교회〉, 《가톨릭청년》 제16권 제8호, 1962년 8월호.

서양자, 《중국 천주교회사》, 가톨릭신문사, 2001.

이영춘,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과 조선 대목구 설정》, 기쁜소식, 2008.

정진석, 《초기 한국 교회의 교계적 구조의 역사와 해설》, 크리스챤출판사, 1990.

- - -, 《교계제도사》, 가톨릭출판사, 2007.

정태화, 〈포르투갈의 보호권이 인도 교회에 끼친 영향에 관한 고찰〉, 부산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 2005.

조세프 메츨러, 〈1924년 제2차 도쿄 관구시노드〉, 《신앙과 삶》 25, 부산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12.

조현범, 〈파리외방전교회와 조선 대목구의 분할〉, 《교회사연구》 29, 한국교회사연구소, 2007.

최병욱, 〈프랑스 ‘保敎權’과 청조의 기독교 정책〉, 강원대학교 대학원 박사 학위 논문, 2006.

최석우, 《한국교회사의 탐구》 II,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클로드 쇠텐스, 《20세기 중국 가톨릭 교회사》, 김정옥 옮김, 분도출판사, 2008.

프란츤, 《세계 교회사》, 분도출판사, 2001.

한윤식, 〈1931년 한국 첫 지역 공의회 개최 - 공의회 개최에 관한 논의와 공의회 거행을 중심으로 -〉, 《신앙과 삶》 21, 부산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10.

- - -, 〈1931년 한국 첫 지역 공의회 - 현지인 선교지 설립과 한국을 위한 단일한 지역 신학교 설립 문제 -〉, 《신앙과 삶》 23, 부산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11.

- - -, 〈20세기 초반 교황청의 주요 선교지침〉, 마백락 선생 교회사연구 50주년 기념논총 간행위원회 엮음, 《발로 쓰는 한국 천주교의 역사》, 분도출판사, 2011.

- - -, 〈20세기 초 교황청의 주요 선교지침 실현을 위한 노력〉, 《신앙과 삶》 25, 부산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12.

Acta Apostolicae Sedis 54, 1962.

de la Serviere, J., Histoire de la Mission du Kiang-Nan, Tome I : Jusqu’a l’etablissement d’un vicaire apostolique jesuite(1840-1856), Zi-Ka-Wei (Chang-Hai) : Imprimerie de l’orphelinat de T’ou-se-we, 1914.

de Moidrey, Joseph, La Hierarchie catholique en Chine, en Coree et au Japon(1307-1914), Zi-Ka-Wei (Chang-Hai) : Imprimerie de l’orphelinat de T’ou-se-we, 1914.

Launay, Adrien, Histoire Generale de la Societe des MissionsEtrangeres, Tome Troisieme, Paris : Tequi, 1894.

Margiotti, Fortunato, “La Cina cattolica al traguardo della maturia”, Sacrae Congregationis de Propaganda Fide, Memoria Rerum III/1(1815-1972), Roma : Verlag Herder, 1973.

Marnas, Francisque, La “Religion de Jesus”(Iaso Ja-Ky?) Ressuscitee au Japon, dans la seconde moitie du XIXe siecle, Paris : Delhomme et Briguer, 1896 ; 久野桂一郞 飜譯, 《日本キリスト敎復活史》, 東京 : みすず書房, 1985.

Thomas, A., Histoire de la Mission de Pekin, Tome II Depuis l’arrivee des Lazaristes jusqu’a la revolte des Boxeurs, Paris : LouisMichaud, 1925.

チ一スリク, H., 《キリシタン時代の日本人司祭》, 東京 : 敎文館, 2004.

 

-------------------------------------

1) 〈교구〉, 《한국가톨릭대사전》 1(한국교회사연구소, 2003), 569쪽 참조.

 

2) Joseph de Moidrey, La Hierarchie catholique en Chine, en Coree et au Japon(1307-1914), Zi-Ka-Wei(Chang-Hai) : Imprimerie de l’orphelinat de T’ou-se-we, 1914, pp. 1~3.

 

3) 보호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김성태, 〈제1장 가톨릭교회의 세계 복음화〉, 《한국천주교회사》 1, 한국교회사연구소, 2009, 42~48쪽을 참조할 것.

 

4) Moidrey, op. cit., p. 175. 천주교의 인도 선교에 관해서는 양인성, 〈제2장 선교회의 아시아 선교〉, 《한국천주교회사》 1, 한국교회사연구소, 2009, 67~76쪽을 참조할 것.

 

5) Moidrey, op. cit., pp. 5~8, 176 ; 이영춘,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과 조선 대목구 설정》, 기쁜소식, 2008, 16쪽. 이영춘은 《아프리카, 아시아 및 오세아니아 교회에서 포르투갈 왕들의 보호권 칙서집》(Bullarium Patronus Portugalliae Rugum in Ecclesiis Africae, Asiae atque Oceaniae)이라는 문헌 자료에 실린 교황 칙서 〈Super Specula Militantis Ecclesiae de 23-1-1575〉에 근거하여 마카오 교구 설정 칙서가 반포된 것을 1575년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에는 주의할 사항이 한 가지 있다. 1500년대 교황청 문헌에서 “주 강생 후 몇 년”(Anno Incarnationis Domini)이라고 하면 이것은 성모 영보 축일인 3월 25일을 기준으로 계산된 연도라고 한다. 흥미롭게도 예수의 탄생 시점이 아니라 잉태 시점을 연도 계산의 기점으로 삼은 것이다(정진석, 《교계제도사》, 가톨릭출판사, 2007, 51쪽 참조). 그렇다면 주 강생 후 1575년 1월 23일을 세속적인 날짜 계산법으로 환산할 경우 1576년 1월 23일이 된다.

 

6) 김성태, 앞의 글, 53쪽.

7) 정태화, 〈포르투갈의 보호권이 인도 교회에 끼친 영향에 관한 고찰〉, 부산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 2005, 73~75쪽.

8) 김성태, 앞의 글, 55쪽.

 

9) 포교성성 내에서 보호권 교구의 폐단에 대처하는 방안으로 기존의 대목구 제도를 활용하자고 입안한 인물이 누구였는지, 또한 최초로 설치된 보호권 시대의 대목구가 어디였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참고로 1637년 인도에 데칸(Deccan) 대목구가 세워졌다는 주장이 있다. 이것을 신뢰한다면 로드 신부가 로마에 가기 이전에 이미 대목구 제도가 실행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인도〉, 《한국가톨릭대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7137쪽 참조.

 

10) 무아드레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설립자 주교들이 파견된 1659년 이후 중국에서의 보호권 교구 및 대목구 변천사를 시기별로 나누고 관할 지역을 지도로 정리하였다. Moydrey, op. cit., pp. 246~261.

 

11) 최석우, 《한국교회사의 탐구》 II,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537~539쪽.

12) H. チ一スリク, 《キリシタン時代の日本人司祭》, 東京 : 敎文館, 2004, pp. 73, 224.

13) Moydrey, op. cit., p. 16.

14) 정태화, 앞의 글, 83쪽.

 

15) A. Thomas, Histoire de la Mission de Pekin, Tome II Depuis l’arrivee des Lazaristes jusqu’a la revolte des Boxeurs, Paris : Louis-Michaud, 1925, p. 245.

 

16) 최병욱, 〈프랑스 ‘保敎權’과 청조의 기독교 정책〉, 강원대학교 대학원 박사 학위 논문, 2006, 44쪽.

 

17) J. de la Serviere, Histoire de la Mission du Kiang-Nan, Tome I : Jusqu’a l’etablissement d’un vicaire apostolique jesuite(1840-1856), Zi-Ka-Wei(Chang-Hai) : Imprimerie de l’orphelinat de T’ou-se-we, 1914, p. 190.

 

18) Ibid., pp. 191~192.

19) Ibid., p. 192.

 

20) 쇠텐스에 따르면 상해 주교회의의 결정 사항은 로마의 승인을 받지 못했고, 중국 내 다른 선교지에 적용할 정도의 인정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클로드 쇠텐스, 《20세기 중국 가톨릭 교회사》, 김정옥 옮김, 분도출판사, 2008, 47쪽. 1851년 상해에서 열렸던 주교회의의 개최 배경과 이후 경과에 관한 연구로는 다음의 것이 있다. Fortunato Margiotti, “La Cina cattolica al traguardo della maturia”, Sacrae Congregationis de Propaganda Fide, Memoria Rerum III/1(1815-1972), Roma : Verlag Herder, 1973, pp. 523~526. 이 자료를 소개해 주신 한윤식 신부께 감사드린다. 본고에서 직접 인용하지는 못했지만 그 서지 정보를 수록함으로써 관련 연구자들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한다.

 

21) 이영춘, 앞의 책, 133~134쪽.

22) 김진소, 《전주교구사》, 빅벨, 1998, 785쪽.

 

23) 베네딕도 15세의 교황 서한(〈막시뭄 일룻〉)과 비오 11세의 선교 회칙(〈레룸 에클레시애〉)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초반에 벌어졌던 교황청의 선교 정책 전환에 관한 상세한 연구로는 다음을 참조할 것. 한윤식, 〈20세기 초반 교황청의 주요 선교지침〉, 마백락 선생 교회사연구 50주년 기념논총 간행위원회 엮음, 《발로 쓰는 한국 천주교의 역사》, 분도출판사, 2011, 409~434쪽.

 

24) 쇠텐스, 앞의 책, 121쪽.

 

25) 필자가 1924년 중국의 첫 국가 공의회와 대목구 명칭 변경 사이의 관련성을 알게 된 데에는 한윤식 신부의 조언이 있었다. 지면을 빌어 감사를 표한다.

 

26) 조현범, 〈파리외방전교회와 조선 대목구의 분할〉, 《교회사연구》 29, 한국교회사연구소, 2007, 52~53쪽.

27) 최석우, 앞의 책, 557쪽.

 

28) 한윤식, 〈1931년 한국 첫 지역 공의회 - 현지인 선교지 설립과 한국을 위한 단일한 지역 신학교 설립 문제 -〉, 《신앙과 삶》 23, 2011, 51, 57~58쪽.

 

29) 김진소, 앞의 책, 786~797쪽 참조.

30) 최석우, 앞의 책, 557쪽.

 

31) 한윤식, 〈1931년 한국 첫 지역 공의회 개최 - 공의회 개최에 관한 논의와 공의회 거행을 중심으로 -〉, 《신앙과 삶》 21, 부산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10, 111~112쪽.

 

32) 조세프 메츨러, 〈1924년 제2차 도쿄 관구시노드〉, 《신앙과 삶》 25, 2012, 245쪽.

 

33) 자르디니 대주교와 마렐라 주교가 조선 교회에 교계제도를 설치하자고 건의한 적이 있다는 사실은 한윤식 신부께서 알려주었다. 지면을 빌어 감사를 표한다.

 

34) 한윤식, 〈20세기 초 교황청의 주요 선교지침 실현을 위한 노력〉, 《신앙과 삶》 25, 부산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12, 110쪽.

35) A. 프란츤, 《세계 교회사》, 분도출판사, 2001, 376쪽.

36) 서양자, 《중국 천주교회사》, 가톨릭신문사, 2001, 499~511쪽.

37) 대만과 베트남, 인도네시아 교계제도에 관해서는 인터넷 자료(www.catholic-hierarchy.org)를 참고하였음.

38) Adrien Launay, Histoire Generale de la Societe des Missions-Etrangeres, Tome Troisieme, Paris : Tequi, 1894, p. 536.

39) 박양자, 《일본 기리시탄 순교사와 조선인》, 순교의 맥, 2008, 401~409쪽 참조.

40) 고노이 다카시, 《일본 그리스도교사》, 이원순 옮김,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434~435쪽.

 

41) Francisque Marnas, La “Religion de Jesus”(Iaso Ja-Ky?) Ressuscitee au Japon, dans la seconde moitie du XIXe siecle, Paris : Delhomme et Briguer, 1896 ; 久野桂一郞 飜譯, 《日本キリスト敎復活史》, 東京 : みすず書房, 1985, p. 576. 필자에게 이 자료를 소개해주신 분은 2011년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에서 〈1910~20년대 일본천주교회의 조선 인식〉이라는 제목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나카사키 교구청에서 근무하고 있는 미야자키 요시노부[宮崎善信] 선생이다. 아울러 필자는 미야자키 선생에게 일본 천주교회가 교황청 어느 기관에 소속되어 있는지를 문의하였다. 일본 천주교 역시 한국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현재 교황청 복음선교성(福音宣敎省 : 일본 교회에서 인류복음화성성을 가리키는 용어) 산하에 있으며, 교황청 사교성(司敎省 : 일본 교회에서 주교성성을 가리키는 용어) 관할이 아닌 이유는 일본 천주교 신자들이 전체 일본 인구 중에 차지하는 비율이 낮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미야자키 선생이 나가사키 교구장 주교께 직접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42) Acta Apostolicae Sedis 54(1962), pp. 265~266.

43) 《경향잡지》 1948년 10월, 150~151쪽.

44) 《경향잡지》 1949년 2월, 18~19쪽.

45) 노기남, 《나의 회상록》, 가톨릭출판사, 1969, 357~360쪽.

 

46) Acta Apostolicae Sedis 54(1962), pp. 552~555.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라틴어 교황령 원문에는 대구 대목구 서정길 주교를 서봉길(Sye Bong-Kil)이라고 표기하였다. 교황령의 한국어 번역문은 다음을 참조할 것. 《경향잡지》 1962년 8월, 4~6쪽.

 

47) 백남익, 〈교황청에 비친 한국 천주교회〉, 《가톨릭청년》 1962년 8월, 20쪽.

48) 정진석, 《초기 한국 교회의 교계적 구조의 역사와 해설》, 크리스챤출판사, 1990, 68~72쪽.

49) 최석우, 앞의 책, 560쪽.

 

[교회사 연구 제40집, 2012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조현범(한국교회사연구소)]



파일첨부

2,693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