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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ㅣ복음화

선교와 문화: 복음 선교에 필요한 문화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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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1-15 ㅣ No.348

[선교와 문화] 복음 선교에 필요한 문화 이해

 

 

1. 종교의 두 얼굴, 신성과 인성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두 가지 요소 곧 신성과 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기 초월적인 요소와 세계 내재적인 요소를 말하는데, 이를 굳이 구분하자면 성(聖)과 속(俗)이라 말할 수 있다. 흔히 초월적인 부분을 신학이라 말하고 내재적인 부분을 문화라 말한다. 신학은 신적인 요소를 다루기에 초월적이고 비인간적일 수 있다. 그러나 문화는 그 신적인 요소를 인간의 삶 안에서 표현하는 것이기에 당연히 인간적이어야 한다. 선교를 이해함에 있어 신적인 요소와 인간적인 요소를 구분하여 접근해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신적인 계시(때로는 명령)라 하여 인간적인 요소를 무시하고 타인, 타문화, 타국가에 접근하려 들면 문제가 생기게 된다. 가깝게는 한국, 중국, 일본에서 그리고 멀게는 고대 로마와 터키, 그리스에서 그리스도교가 타종교, 타문화와 만나면서 엄청난 충돌을 일으킨 이유는 인간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고 신적인 요소만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신적인 가르침 곧 교의를 지상절대주의로 상정하고 타문화, 타종교에 다가가면 공존할 여지는 많지 않다. ‘하나이신 천주를 흠숭하라’는 유일신 교의와 배타적 교회론은 타종교, 타문화가 지니고 있는 인간적인 요소들을 사악한 존재로 여기고 배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제사 논쟁, 의례 논쟁은 바로 선교의 문제에서 인간적인 요소를 제외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순교의 영적인 가치를 논하기 전에, 만약 가톨릭교회가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종교의 인간적인 요소와 신적인 요소를 정확히 이해하고 구분하여 선교의 현장에서 문화적인 요소를 고려하고자 노력했다면 그렇게나 많은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러했다면 아시아 교회는 아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교회가 선교 사명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종교의 인간적인 요소 곧 소통, 교류, 친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기까지는 몇 백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선교에서 문화의 위치와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올바른 대처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불과 50년 전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서였지 않은가. 

 

이제 한국 사회는 다종교,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고 한국 교회는 천 명의 선교사들을 파견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문화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문제이다. 올바른 선교를 위해서, 그리고 한국인들이 세계의 형제자매들과 공존과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문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한다. 

 

종교가 인간적이라 함은 종교는 문화적이라는 말과 동일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예외 없이 문화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표현되고 인식된다. 그러기에 종교의 인간적인 요소는 사람과 유리될 수 없고 사람과 같이 생명성을 지니고 생로병사 현상을 나타낸다. 이것을 문화의 유기체성이라 한다. 문화를 유기체로 이해한다는 말은 문화에 페르소나(persona)가 있어 그 존재와 위치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하는 의무가 포함되어 있음을 말한다. 타문화와 만나고 관계 맺고 대립하고 충돌하고 융합하는 전 과정 역시 생명체를 대하듯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본고는 선교를 교회론이나 교의신학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을 잠시 접어두고 유기적이고 생명체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의도로 서술될 것이다. 

 

 

2. 문화 이해, 복음 선교? 선행되어야 할 것은? 

 

초월적인 복음은 내재적인 문화의 옷을 입고 타문화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표면적으로는 외래문화와 본토문화의 만남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어떤 만남이 진정한 만남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우리는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에 나오는 어린왕자와 여우의 대화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문화의 만남에 필요한 요소들과 원칙들을 이해할 수 있다. 

 

어린왕자가 여우와의 첫 대면에서 함께 놀기를 요청하지만 여우는 정중히 거절한다. 그 이유는 ‘아직 서로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왕자가 여우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자 여우가 “넌 여기 애가 아니구나.”라고 말한다. 이질적인 요소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왕자는 정중한 태도로 ‘길들이다’가 무슨 뜻인지 여우에게 묻는다. 외래문화와 본토문화의 첫 대면이 낯설다고 해서 강압적이거나 일방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한국이나 중국에서처럼 선교사를 앞세운 서양 열강들이 총포를 들이대고 ‘우리 놀자’라고 말한 것은 만남의 비극을 잉태할 뿐이었다. 한 손에는 복음을 그리고 다른 손에는 무기를 들고 다가오는 식민주의 시대의 선교 태도는 사라졌을지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교회의 태도는 아직도 반성의 여지가 있다. 

 

여우가 길들인다는 의미를 풀어 그것은 ‘관계를 맺다’라는 뜻이라고 말해 준다. 그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하게 되는 관계 곧 서로는 서로에게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사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올바른 관계는 인격적이고 상호존중적이며 공존적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남미에서 그리스도교가 인디언 원주민들과 맺었던 관계는 일방적이고 강압적이며 폐쇄적인 것이었으니 올바른 관계가 아닌 것이다. 오직 금만을 필요로 하는 관계였고 복음 역시 인격적으로 교환된 것이 아니었으니 만남은 결국 비극으로 끝났다. 

 

여우의 말을 조용히 들어주고 공감해주며 동정해주는 어린왕자의 태도에 여우가 드디어 내면의 외로움과 고통을 토로하면서 ‘제발 나를 길들여 달라’고 요청한다. 남을 길들이는 것은 때가 되었을 때만이 가능하다.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열고 나와 소통하려고 하는 간절한 수준에 이르러야 가능한데 이는 복음 선교 이전에 ‘전(前)복음’ 혹은 ‘선(先)복음(pre-evangelization)’ 단계가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대만의 신학자 쟝춘션(張春申) 신부는 이것을 복음전도(福音前導)라는 고유 용어로 설명했는데, 이는 곧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와 같이 직접선교 이전에 복음을 준비시키는 작업을 의미한다.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이 했던, 길을 ‘넓히고 펴고 메우는’ 작업과 같은 일이다. 

 

왕자는 여러 이유를 들어 길들여 달라는 여우의 청을 정중히 거절한다. 그러나 여우는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지지 않으면 안 됨을 재차 강조한다. 친구 관계란 상점에서 물건을 사듯 그렇게 값싸게 얻어지는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들어 설득한다. 결국 왕자는 여우의 말을 수용하고 친구가 되는 과정을 묻는다. 여우의 대답 속에 참된 문화의 만남과 교류를 위해 꼭 지켜야 할 두 가지 원칙이 있다. 참을성과 시간의 준수이다. 

 

만남에는 우선 참을성이 요구된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길고 긴 과정이기에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많은 말을 하지 말고 매일 조금씩 다가오라’고 말하는데 이 과정을 통과해야 서로는 익숙해지고 길들여져 교우 관계가 형성된다고 말한다. 복음 선교를 과정으로 이해하지 않고 결과로 파악하면 세례자의 숫자에 사활을 걸게 된다. 과거 중국에서 서구 열강들이 이해와 소통 없이 서구적 문명을 강압적으로 제공하고 강요함으로 인해 생긴 복음에 대한 거부감의 흔적이 아직도 그리스도교를 ‘양교(洋敎)’라 부르는 데 남아있다. 

 

두 번째는 시간의 준수라는 의례 문제이다. 상호 약속한 시간은 서로에 대한 배려를 의미한다. 예기치 못한 시간에 남의 집에 불쑥 찾아가는 것은 방문이 아니라 침범이다. 인격적인 만남은 준비가 필요하며 그런 만남은 서로를 설레게 만드는 창조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네 시에 만남이 있다면 미리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것이라는 여우의 말은 상호 성숙과 발전의 에너지가 축적이 되어야 비로소 관계가 더욱 의미 있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임을 지적한다. 이러한 관계는 더욱 성장하여 결국 서로를 그리워하는 사이로 만들 것이다. 여우는 “마음으로 보아야만 잘 보인다. 중요한 것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라는 명언을 남기고 어린왕자를 떠난다. 

 

인류가 서로 공존하고 평화롭기 위해서는 선교보다는 복음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전투적인 의미로 알아듣던 몽매한 시대는 갔다. 복음이 타종교, 타문화 안에서 얼마나 성실하고 공손하고 품위 있는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것인지를 재삼 숙지해야 할 것이다. 타인을 대할 때뿐만 아니라 타민족, 타문화를 대할 때도 선교의 전략이 숨어있는 만남이나 대화는 결코 평화로 갈 수 없다. 타문화에 대한 이해가 선행이 된 뒤에 그 다음 목표인 복음 선교의 전략적이고 신앙적 차원을 강조한다 해도 늦지 않으며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땅끝까지 제85호, 2015년 1+2월호, 김병수 대건 안드레아 신부(한국외방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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