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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화기 · 일제시대 경기 북부 지역의 천주교: 본당 및 공소와 신자 수 변화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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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19 ㅣ No.670

개화기 · 일제시대 경기 북부 지역의 천주교


- 본당 및 공소와 신자 수 변화를 중심으로 -

 

 

1. 머리말 

2. 선교사의 활동과 공소의 설정
3. 본당의 설립과 교세의 확대
4. 본당의 분할과 공소의 지역적 확산
5. 맺음말

 

 

1. 머리말

 

현재 의정부교구가 설정된 경기 북부 지역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기부터 천주교 신앙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졌던 곳이다. 李檗이 양근의 權哲身 · 權日身 형제, 마재의 丁若銓 · 丁若鏞에 신앙을 전파하였고, 권일신의 전교 활동으로 천주교가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에까지 확산되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1) 


이처럼 경기 북부 지역의 초기 신앙사에 대해선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박해시대 이후의 역사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편이다. 특히 개화기 · 일제시대는 연구의 공백으로 남아 있다. 이 시기는 현대 한국 천주교회와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점에서 연구가 필요하다. 이에 이 글에서는 개화기 · 일제시대 경기 북부 지역의 천주교에 주목하여 논의를 전개하려 한다.

개화기 · 일제시대 경기 북부 지역의 천주교를 이 글에서 세세하게 모두 다루는 것은 어렵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특히 본당 및 공소와 신자수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 교세 통계표를 주로 이용할 것이다. 다만, 교세 통계표가 1882~1883년부터 1936~1937년까지만 남아 있고, 그마저도 중간에 누락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 두어야 할 것 같다.

또 한 가지 언급해야 할 점은 이 글에서 검토할 경기 북부 지역의 지리적 경계를 설정하는 문제이다. 행정구역상으로 경기 북부 지역은 의정부교구의 관할 지역 외에 가평 · 포천도 포함된다. 하지만 가평과 포천 지역까지 다루기에는 범위가 넓고, 또한 이 지역은 현재 춘천 교구의 관할 지역이다. 따라서 이번 심포지엄이 의정부교구사 심포지엄이니 만큼 이 글에서는 현재의 의정부교구의 관할 지역, 즉 고양 · 양주 · 연천 · 파주 지역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려 한다. 


이 글에서는 먼저 병인박해 이후 선교사들이 신앙 공동체를 재건해 가는 과정을 검토하려 한다. 그런 다음 1900년 개성 본당과 1909년 행주 본당이 설립된 이후의 경기 북부 지역의 공소와 신자 수 변화를 다룰 것이다. 마지막으로 1927년 신암리 본당과 1934년 덕정리 본당의 설립 이후의 경기 북부 지역의 현황을 검토하려 한다.


2. 선교사의 활동과 공소의 설정

1866년 2월 23일부터 시작된 丙寅迫害는 1873년 12월 24일 興宣大院君이 실각하면서 끝을 맺었다. 7년간의 박해로 1866년 약 2만 5천 명이었던 신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순교하였고, 살아남은 이들 대부분은 신앙을 포기하거나 숨어 살고 있었다.2)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崔智을 중심으로 한 신자들은 爀 중국으로 피신한 선교사들과 지속적인 연락을 취하면서 그들의 입국을 추진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1876년 5월 10일 블랑(G.M.J. Blanc, 白圭三)과 드게트(V.M. Deguette, 崔東鎭) 신부가 서울에 도착하였고, 1877년 9월 23일 제6대 조선대목구장 리델(F.C. Ridel, 李福明) 주교가 박해를 피해 조선을 떠난 지 11년 만에 다시 입국하였다.

선교사들이 중점을 두었던 것은 박해로 인해 무너져 버린 신자 공동체를 재건하는 일이었다. 신자들은 빈궁하여 신앙생활을 영위할 여력이 없었고, 교리문답이나 기도를 모르는 이들도 많았다. 따라서 숨어 지내는 신자들을 찾아내고, 그들을 다시 신앙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것이 선교사들에게 당면한 문제였다. 이를 위해 리델 주교는 교리서와 신심서적 등 교회서적의 출판을 계획하는 한편, 사목 구역을 나누어 블랑 신부는 전라도, 드게트 신부는 충청도, 두세(C.E. Doucet, 丁加彌) 신부는 서울 북서쪽에 위치한 공소에서 한글을 배우면서 그들을 돌보게 하고, 로베르(A.P. Robert, 金保祿) 신부는 강원도와 경상도 북부 지역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옛 공소를 복원하거나 혹은 새로운 공소를 세워 지방의 신자 공동체를 정비해 나갔다.3)

이러한 교회 재건 활동에 따라, 경기 각 지역에 공소가 설립되었다. 블랑 신부는 1876년 서울 문안과 문밖 공소를 세운 후, 공소 회장과 함께 경기 지역에 산재해 있는 교우촌과 옛 공소가 있었던 지역을 방문하여 새 공소회장을 선임하고, 공소를 세웠다.4) 공소는 고양 · 양주 · 광주 · 수원 · 남양 등 경기 각 지역에 설립되었다. 신자 수도 1884년 648명에서 1885년에는 865명, 1886년에는 1,264명, 1887년에는 1,621명으로 뚜렷한 증가세를 보였다.5) 이처럼 각 지역에 공소가 세워지자, 1883~1885년에는 뮈텔(G.-C.-M. Mutel, 閔德孝) 신부, 1885~1888년에는 푸아넬(V.L. Poisnel, 朴道行) 신부, 1889~1890년에는 파스키에(P.J. Pasquier, 朱若瑟) 신부가 공소를 순방하면서 성사를 주었다.6)

그렇다면 이 시기 경기 북부 지역의 공소 현황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이와 관련해선 당시의 교세 통계표를 통해 대략적인 파악이 가능하다. 1882~1883년 교세 통계표에 따르면, 경기 북부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공소는 양주 고령(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 가라비(현 양주시 광적면 우고리), 연천 밤골이었다.7) 그리고 1883~1884년에는 고양 청대(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1886~1887년에는 양주 덕두리와 교하 연다산(현 파주시 교하읍 연다산리) 등의 공소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지역별로, 양주에 3개, 연천 · 고양 · 교하에 각각 1개씩이었다. 신자 수에서는 1882~1883년 밤골이 121명으로 가장 많은 반면, 1886~1887년 연다산은 9명에 불과하였다. 신자 수 평균을 보면, 가라비는 44.8명, 덕두리는 26.5명, 연다산은 8.5명이었다.8)

한편 1886년 韓佛條約의 체결로 선교 활동이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면서 전국 각 지역에 본당이 설립되었다. 서울에서는 종현 본당(현 명동 본당)에 이어 두 번째 본당인 약현 본당(현 중림동 약현 본당)이 1891년 11월 9일 설립되었고, 초대 주임으로 두세 신부가 부임하였다. 약현 본당은 ‘문 밖 본당’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서울 도성의 경계였던 四大門을 기준으로 사대문 밖의 전 지역, 즉 도성 밖 인근 지역과 양주 · 교하 · 과천 · 광주 · 송도 등 경기도 일대뿐만 아니라 멀게는 황해도 배천까지를 관할하였다.9) 이에 따라 경기 북부 지역의 공소들은 1900년 개성 본당이 설립되기 전까지 약현 본당의 관할 하에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약현 본당 설립 후부터 개성 본당이 설립되는 1900년까지 약현 본당 관할의 경기 북부 지역 공소 현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1>을 통해 1891~1900년 양주 · 교하 · 파주 · 고양 지역에 공소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을 1882~1887년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은 점들이 주목된다. 첫째, 연천 지역의 공소는 없는 반면, 파주 지역에 공소가 설립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가라비를 제외하고는 1882~1887년에 있었던 공소들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교하의 연다산과 새말, 고양의 청대동과 행주가 인근 지역이라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공소의 이전 혹은 신자들의 이주 등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교하와 고양 지역의 신앙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다음으로 각 공소별 신자 수를 주목해 보자.

 


신자 수가 가장 많은 공소는 가라비로, 평균 209.6명이었다. 1882~1887년과 비교하여 약 165명이나 증가하였다. 이러한 까닭은 첫째, 천주교에 입교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성인 영세자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1891~1900년 매년 8.2명의 성인 영세자들이 세례를 받았다.11) 둘째, 타 지역 신자들이 가라비로 이주하였다는 점이다. 그것은 두세 신부의 1894년 연말 보고 가운데 ‘큰 옹기 마을인 가라비는 북쪽에서 온 몇몇 신자 가정 덕분에 더욱 커가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12) 이처럼 신자 수가 증가함에 따라 1899년 가라비에 교우촌이 두 곳으로 늘어났고, 신자들 가운데 일부는 파주나 강원도 철원 등지로 이주하였다.13)

가라비의 뒤를 이은 공소는 치울로, 신자 수가 102.5명이었다. 특히 치울은 1899년 65명에서 1900년 145명으로, 1년 만에 80명이 증가한 사실이 눈에 띈다. 성인 영세자 수가 1899년에는 4명, 1900년에는 2명인 것으로 봐서 영세자의 증가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1899년 가라비 공소 신자들 가운데 일부가 파주에 정착하였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타 지역 신자들의 이주가 중요한 원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3. 본당의 설립과 교세의 확대

약현 본당의 설립 당시인 1891년 경기 북부 지역의 공소는 가라비 · 고태골 · 새말 3개였다. 이후 1896년 양주 조은이 공소, 1899년 파주 치울과 고양 한들 공소 등이 설정되었으나, 1891년부터 1900년까지 경기 북부 지역에는 2~5개의 공소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공소들은 지역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두세 신부가 사목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점 때문에 두세 신부는 1897년 경기 북부 지역에 신자 가족을 보내어 정착시키고자 하였으나,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음을 토로하였다.14)

이러한 상황을 뮈텔 주교도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하였는데, 다음의 사료가 참고 된다.

가) 수도권 북부 지역은 두세 신부가 방문하였는데, 공소가 아직 몇 개 밖에 없는 곳입니다. 그 공소들은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따로 하나의 본당으로 모아질 수 없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일이 달성되기를 희망하며, 그 가장 좋은 방법은 큰 마을인 옛 감영 소재지 송도에 사제관을 건립하는 일일 것입니다.15)

위 사료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경기 북부 지역의 공소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두세 신부가 사목 방문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뮈텔 주교는 경기 북부 지역에 사제관 건립을 고려하였고, 그 소재지로 옛 감영이 있었던 송도(개성)를 염두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송도는 침체기에서 벗어나 천주교에 입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고 있었다. 송도 공소는 1882~1883년 교세 통계표에서 확인될 만큼 오랜 연원이 있었지만, 1895년 두세 신부가 ‘송도의 신자들은 너무 적고 초라하여 절망적’이라고 할 만큼 침체를 겪었다.16) 그러나 1898년 두세 신부는 송도에서 병인박해 이후 처음으로 6명의 영세자가 나왔다고 하면서 다시 전교가 시작될 것임을 전망하였다. 그러나 송도에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한 발전을 크게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더구나 이미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이 교회를 건립할 부지를 구입하고, 학교와 병원을 운영하고 있어 장차 송도가 프로테스탄트의 중심지로 성장될 것이 우려되는 상황이었다.17) 또한 송도의 신자들도 장차 신부가 거주할 거처를 마련하여 신부를 파견해 주길 고대하고 있었다.18)

이러한 점이 고려되어 1900년 개성 본당19)이 설립되고, 초대 주임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루블레(H.P. Rouvelet, 黃惠中) 신부가 임명되었다.20) 이후 개성 본당은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침묵의 교회가 될 때까지 8대에 걸쳐 주임 신부가 부임하여 활동하였는데, 그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본당 설립 당시, 공소는 개성의 읍내 · 여현진과 황해도 배천의 파능 · 불당골 4개였고, 신자 수는 310명이었다.22) 1902년 개성 본당은 관할 지역을 파주 · 양주 · 장단 지역으로 확대하였고, 1909년 이전부터 적성(이후 연천) 지역을 관할한 것으로 여겨진다.23) 또한 관할 공소 및 신자 수도 점차 증가하여 1918년에 이르러선 공소가 20개, 신자 수가 1,772명(본당 신자 수까지 포함하면 2,021명)을 기록하게 되었다.24)

한편 개성 본당에 이어 1909년 고양군 지도면 행주외리에 행주 본당이 설립되었다. 행주 본당의 설립은 1890년대 후반 고양과 김포 지역에서 전개된 개종운동에 힘입은 바가 컸다. 1898년 고양과 김포 지역에는 이미 20명 가량의 신자들이 있었고, 행주에서는 교리 공부를 시작한 가정이 30가구 이상이었다. 1908년경에는 새 영세자 가운데 100명 이상이 고양과 김포 등지에서 나왔다. 이러한 개종운동으로 고양에서는 1899년 한들 · 행주, 1902년 동포 공소가, 김포에서는 1902년 고잔, 1903년 고래 공소가 각각 세워졌다.25) 이러한 개종 운동에 힘입어 1909년 약현 본당으로부터 행주 본당이 분할 · 설정되었고, 초대 주임으로 金元永 신부가 부임하였다. 이후 행주 본당은 1942년 5월 본당이 폐지될 때까지 9대에 걸쳐 주임 신부가 부임하여 활동하였는데, 그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설립 당시 관할 구역은 고양 · 김포 · 양주 · 통진 · 양천 등으로, 공소는 고양의 용머리 · 미역절, 김포의 고잔말 · 거래 · 홍두평 · 은행정리, 양주 고태골, 통진 원산리, 양천의 읍내 · 염창 · 상사골, 부평의 오시 등 12개였다. 이 지역은 현재의 고양시, 김포시 걸포동 · 고촌면 신곡리, 인천시 서구 오류동, 서울시 은평구 신사동, 강서구 가양동 · 염창동 등지이다. 신자수는 행주 본당이 141명, 공소가 541명으로, 총 682명이었다.27) 본당 설립 후, 김원영 신부는 본당과 사제관을 건립하여 1910년 8월 17일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거행하였다.28)

이처럼 개성 본당과 행주 본당의 설립됨에 따라, 약현 본당의 관할 지역은 서울 · 과천 · 시흥 · 광주 · 양주 일부 지역으로 축소되었다.29) 게다가 1908년 3월 경기도 양평군에 설립된 양평 본당(현 용문 본당)이 조곡 · 덕소 등 양주 일부(현 남양주 일대) 지역의 공소를 관할함에 따라 1910년에 이르러서 경기 북부 지역 가운데 약현 본당의 관할 공소는 조은이와 광나루뿐이었다.

그렇다면 개성 본당과 행주 본당의 설립 이후 경기 북부 지역의 공소 현황은 어떠하였을까? 1901년부터 신암리 본당이 설립되는 1927년까지를 검토 시점으로 삼으려 한다. 그런데 1904~1905년부터 1908~1909년까지, 1924~1925년부터 1928~1929년까지의 교세 통계표가 누락되었기 때문에, 1901년부터 1924년까지의 현황을 정리하는 데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1901~1924년까지 경기 북부 지역의 공소는 총 40개로 확인된다. 먼저 지역별로 보면, 양주가 15개로 가장 많았고, 파주가 12개, 고양이 8개, 연천이 5개로 그 뒤를 이었다. 양주에서는 광적면 · 와부면 · 백석면 지역, 파주에서는 천현면 지역, 연천에서는 적성면 지역에 공소가 여럿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 가운데 양주 와부면 진중리, 파주 천현면 금곡리 등지에는 같은 시기에 각각 2개 이상의 공소가 있었다.

이처럼 각 지역에 공소가 설정된 주요한 원인은 본당 신부의 사목 활동 결과였지만, 신자들의 이동과 그로 인한 신앙의 전파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었다. 원당리 공소 신자들이 신암리로 이주하여 공소를 세웠고, 신암리에서 무건리 공소가 분리되었다는 점, 가라비 · 치울 · 송구암 공소 신자들에 의해 노파와 중산리 공소가 세워졌다는 점, 노파에서 가목리 공소가 분리되었다는 점 등은 이러한 신앙의 전파 과정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31)

다음으로 공소 설정 시기를 보자. 먼저 1901년 이전에 설정된 공소들이 눈에 띄는데, 행주 · 고태골 · 가라비 · 구룡동 · 새말 · 조곡 · 조은이 · 치울이 바로 그것이다. 1901~1924년 사이에 새로 확인되는 공소는 32개였다. 이를 시기별로 구분하여 그 변화 추이를 검토하고자 하는데, 1904~1905년부터 1908~1909년까지의 교세 통계표가 없기 때문에, 연도별로 정리할 수 없다. 따라서 4~6년 단위로 구분하는 것이 적합할 듯하다. 이를 정리해 보면, 1901~1904년에는 5개, 1905~1910년에는 8개, 1911~1915년에는 9개, 1916~1920년에는 7개, 1921~1924년에는 3개로, 1911~1915년에 가장 많이 공소가 설정된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1901~1924년 경기 북부 지역 공소의 지역 · 설정 시기별 특징을 검토하였다. 다음으로는 각 공소의 신자 수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려 한다.




신자 수를 보면, 가장 많은 공소는 파주의 치울 196.6명이었고, 연천의 신암리 174.9명, 양주의 가라비 154.7명 · 덕소 128명 · 중산리 119.3명 순이었다. 이 가운데 치울 · 신암리 · 가라비 공소는 앞에서 검토하였듯이 인근 지역으로 신앙을 전파하였던 곳이었다. 이 가운데 비교적 설정 시기가 늦은 중산리와 신암리 공소의 성장이 두드러졌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러한 주요 원인은 타 지역의 신자들의 이주에 기인한 것이었다. 공소 설정 초기, 중산리 공소의 대부분 신자들은 인근 가라비 · 치울 · 송구암에서 온 이들이었다.32) 마찬가지로 신암리 공소도 원당리 공소의 신자들이 이주함으로써 설정된 곳이었다.33) 하지만 신암리 공소는 이러한 요인 이외에 매년 영세자가 6.9명, 예비자가 9.1명일 정도로 입교하는 이들도 많았다. 반면 중산리 공소는 매년 영세자가 2.5명, 예비자가 2.2명으로, 신암리에 비해 낮았다. 따라서 중산리 공소의 신자 증가는 타 지역의 신자 이주에 의한 비율이 높았던 반면, 신암리의 경우에는 이러한 요인과 함께 전교 활동에 의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양주의 회암이나 파주의 노파는 현저한 신자 감소율을 보였다. 이 공소들은 중산리 · 신암리와는 반대로 신자들이 타 지역으로 이주한 것이 중요한 원인으로 여겨진다. 1902년에 설정된 회암 공소는 타 지역에서 모여든 옹기 제조공들에 의해 세워진 공소였다.34) 그런데 점차 옹기업이 쇠퇴하게 되자, 1911년 신자들 가운데 절반이 농사를 짓기 위해 양평 본당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신자 수가 급감하였던 것이다.35) 노파 공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918년 노파 공소의 신자들이 간도 등으로 이주함으로써 신자 수가 감소하였다.36)

이러한 사례에서 보듯이 공소의 신자 수 증가 및 감소는 전교 활동에 의한 것이기도 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경제적 이유 등에 의한 신자들의 이주와 깊은 관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공소별로 신자 수의 증감이 차이가 있었지만, 경기 북부 지역의 신자 수는 1914년을 기점으로 대략 1,700여 명 수준으로 꾸준히 유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4. 본당의 분할과 공소의 지역적 확산

개성 본당은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경기 북부 지역에 본당을 설립하고자 하였고, 그 결과 1927년 5월 연천의 신암리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켰다.37) 신암리 공소는 공소가 설정된 이래, 모범적인 신앙 공동체로 알려진 곳이었다.38) 공소 신자들은 수년간 본당의 설립을 위해 노력하였고, 1927년 2월부터 6월까지 경당을 증축하여 성당으로 개조하였다.39) 신암리 본당이 설립된 것은 이러한 배경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신암리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崔文植 신부가 부임하였다.40) 설립 당시 관할 공소는 양주의 우고리(가라비) · 기산리 · 송굴암 · 자일리 · 남방리, 파주의 갈곡리(치울) · 노파 · 쇠골 · 가목리 · 오미 등이었다.41) 이처럼 신암리 본당이 양주 북부와 파주 북동부 지역을 관할하게 됨에 따라 개성 본당은 개성과 장단 지역만을 관할하게 되었다.42) 이후 1932년에는 관할 구역을 포천과 가평 지역까지 확대하여 포천의 송우리설 · 운리 · 정교리 · 신팔리 · 화대리 · 오가리, 가평의 현리 · 신상리 등의 공소를 관할하였다.43)

그러나 신암리 본당은 1932년 9월 설립 약 5년 만에 본당이 폐지되었다. 본당이 폐지된 이유에 대해선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다음의 자료는 중요한 단서를 말해 준다.

나) 노파, 가목리, 쇠골, 송굴암, 오미, 자일리 등지에는 혹 산골에서 혹 평야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교우들이 많고, 다른 지방에는 옹기점 일을 하는 교우들이 많습니다. 농사하는 교우들이나 옹기점 교우들이나 모두 극도로 가난하여 전부가 남의 빚으로 살아갑니다. 이렇듯 가난한 중에도 내게 위로가 되는 것은 모두 순직하고 열심 수계하는 것입니다.44)

최문식 신부는 이와 같은 신자들의 생활난으로 주일학교와 같은 것을 생각도 못한다고 토로하였다. 더구나 성당터도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소유였기 때문에, 해마다 곡식으로 텃도지를 무는 형편이었다.45)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신암리 본당이 폐지된 주요한 원인은 신자들의 경제적인 곤궁함으로 본당을 유지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신암리 본당에 이어 1934년 양주군 회천면 덕정리에 본당이 설립되었다.46) 덕정리 본당의 설립은 1931년 이전부터 계획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개성 본당의 4대 주임 서병익 신부가 경원선 덕정리역 앞 부지를 매입하였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47) 서병익 신부가 덕정리에 본당을 설립하고자 한 이유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경원선 덕정리역 부지를 매입하였다는 사실을 통해서 볼 때, 발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나 한다. 하지만 그러한 계획은 바로 실행되지 못하였다가 1934년에 이르러서 본당이 설립되었다. 초대 주임으로는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피숑(L. Pichon, 宋世興) 신부가 부임하였다.48) 본당 설립 이후, 덕정리 본당에서 사목하였던 신부를 정리해 보면 〈표7〉과 같다.




다음으로 관할 지역을 살펴보자. 1932년 9월 신암리 본당이 폐지되자, 그 관할 공소는 행주 본당과 평강 본당으로 분할되었다. 즉 양주의 의정부 · 자일리(쇠골) · 남방리(우암이) · 기산리(고령) · 우고리(우골), 파주의 갈곡리(치울) · 금곡리(가목리), 연천의 신암리 공소가 행주 본당, 포천의 화대리 · 정교리 · 설운리 · 송우리 · 신팔리, 연천의 은대리, 가평의 신상리 · 현리 공소가 평강 본당의 관할 하에 각각 놓이게 된 것이었다.50) 하지만 1934년 덕정리 본당이 설립되자, 이 공소들은 행주 본당과 평강 본당에서 다시 분할되어 덕정리 본당에 편입되었다.51) 이로써 1935년 덕정리 본당은 20개 공소, 1,098명의 신자(본당 포함)를 관할하게 되었다.52)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피숑 신부는 성당을 세우고, 1934년 9월 8일 서울대목구 라리보(A.J. Larribeau, 元亨根) 주교의 집전으로 강복식을 거행하였다.53)

한편 1927년 4월 29일 백동 본당(혜화동 본당)이 설립되면서 관할 지역의 재조정이 있었다. 즉 약현 본당의 관할이었던 조은이 · 광장리(광나루) 공소와 양평 본당의 관할이었던 덕소 공소가 백동 본당의 사목 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고양의 중곡리와 전곡리 등에 공소가 설정되어 백동 본당의 관할 공소가 되었다.54)

그렇다면 신암리 본당의 설립 이후 경기 북부 지역의 공소 현황은 과연 어떠하였는지가 궁금하다. 그런데 1924~1925년부터 1928~1929년까지의 교세 통계표가 없다. 그리고 남아 있는 교세 통계표의 마지막 년도는 1936~1937년이다. 따라서 1930~1937년 교세 통계표를 가지고 신암리 본당의 설립 이후의 경기 북부 지역의 공소 현황을 검토하도록 하겠다.




지역별로 정리해 보면, 양주 13개, 고양 10개, 연천 5개, 파주 4개였다.56) 이를 합하면 총 32개로, 1901~1924년에 비해8개가 줄었다. 또한 1901~1924년에 있었던 공소들 가운데 단지 16개만을 이 시기에서 찾을 수 있다. 즉 고양은 8개 중에서 행주 · 고태골 · 용머리 · 미역절 · 광장리 등 5개, 양주는 15개 중에서 우고리 · 가운리 · 조곡 · 덕소 · 고령 · 진중리 등 6개, 파주는 12개 중에서 치울 · 등원리 · 가목리 등 3개, 연천은 5개 중에서 신암리 · 무건리 등 2개만이 그것이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 24개 공소는 더 이상 1930~1937년 교세 통계표에 등장하지 않는다. 


반면 1930~1937년 교세 통계표에 새롭게 기록된 공소는 총 16개였다. 특히 그 가운데 반 이상이 현 의정부교구의 중앙부를 기준으로 동부 지역에 설정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현재의 연천군 연천읍 · 전곡읍 은대리와 전곡리, 양주 1동 · 회천 1동과 의정부시 의정부동 · 자일동 등에 설정된 연천 · 은대리 · 전곡리 · 남방리 · 덕정리 · 의정부리 · 자일리 공소가 바로 그것이다. 이 지역은 기존에 공소가 없었거나 혹 있었지만 교세가 미약했던 지역이었다.57)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이후 이 지역에 신앙의 전파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그 결과 각 지역에 공소가 설정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934년 덕정리 본당의 설립도 이러한 배경 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으로 각 공소별 신자 수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신자 수가 가장 많은 곳은 신암리 본당으로 241.6명이었고, 그 다음이 행주 160.6명, 고태골 122.6명, 우고리 110명 순이었다. 1901~1924년과 비교해서 두드러진 신자 수의 증가를 보인 것은 신암리로, 174.9명에서 241.6명으로 약 67명이 증가한 것이었다. 이러한 성장세는 본당의 설립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가장 큰 감소폭을 보인 것은 갈곡리 공소로, 196.6명에서 92.9명으로 약 104명이 감소하였다. 이러한 원인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고, 다만 당시 파주 지역의 공소가 4개로, 1901~1924년에 비해 급감하였다는 상황과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 전체 신자 수를 보면, 1930년은 1920년대에 비해 약 400명가량이 감소하였다. 하지만 1934년 이후 신자 수가 증가하였고, 1936년에는 다시 1,700명대로 회복하였다.

1938년 이후의 경기 북부 지역 천주교의 상황에 대해서는 자료의 부족으로 자세하게 규명할 수 없기 때문에 간략한 사실만을 정리하는 것을 끝을 맺으려 한다. 행주 본당은 1942년 5월 9대 주임 이철연 신부가 안성 본당 주임으로 전임된 후, 더 이상 신부가 부임하지 않아 공소로 격하되었다가 2004년 11월 18일 본당으로 승격되었다.58) 덕정리 본당은 1946년 11월 김피득 신부는 의정부 지역의 발전 가능성을 보고 덕정리 성당을 매각한 후, 의정부 지역에 1,625평의 대지와 한옥을 매입하고 본당을 이전하였다. 이에 따라, 덕정리 본당은 설립 12년 만에 공소로 격하되었다.59) 개성 본당은 1950년 한국 전쟁의 발발 이후, 침묵의 본당으로 남아 있다.
 

5. 맺음말

이상으로 개화기 · 일제시대 경기 북부 지역의 천주교의 상황을 본당 및 공소와 신자 수 변화에 초점에 맞추어 검토하였다. 맺음말은 검토한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병인박해 이후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신자 공동체의 재건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각 지역에 공소가 설정되었는데, 경기 북부 지역에는 1883년 양주 · 연천 등지에 공소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후 1891년 약현 본당이 설립되면서 경기 북부 지역도 그 사목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 시기 경기 북부 지역에는 양주 · 교하 · 파주 · 고양 등지에 공소가 설정되었지만, 그 수는 2~5개에 불과하였다.

1900년 개성 본당, 1909년 행주 본당이 설립된 이후, 1901~1924년 공소와 신자 수는 크게 증가하였다. 개성 본당은 양주 · 파주 · 연천 등지를, 행주 본당은 고양 · 양주 등지를 각각 관할하였다. 그러한 결과 1901~1924년 사이에 공소는 총 40개였고, 신자 수는 1914년을 기점으로 약 1,700여 명에 이르렀다.

1927년 신암리 본당, 1934년 덕정리 본당이 개성 본당으로부터 각각 분할되었다. 1930~1937년의 공소는 총 32개로 이전에 비해 감소하였지만, 기존에 공소가 없었던 지역에까지 신앙이 전파되어 공소가 설정되었다. 신자 수는 이전에 비해 감소하였다가, 1934년을 기점으로 다시 증가하여 1936년에는 1,700명대를 회복하였다.

이 글은 개화기 · 일제시대 본당 및 공소와 신자 수 변화를 검토하기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기 북부 지역 신자들의 신앙생활이나 교육 등 문화 · 사회활동을 다루지 못하였다. 또한 포천 · 가평 · 김포 등 인근 지역의 본당 및 공소와의 관계도 앞으로 다뤄야 할 과제이다. 차후에 이러한 문제도 함께 다룰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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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46~50쪽.
2) 한국교회사연구소 편역, 〈1900년도 보고〉, 《서울교구연보》 I, 명동천주교회, 1984, 260~261쪽.

3) 장동하, 〈개항기 교회 재건 운동과 선교 정책〉, 《한국 근 · 현대 100년 속의 가톨릭교회》 (상), 가톨릭출판사, 2003, 14~18쪽 ; 〈가톨릭출판사 설립 기원에 관한 연구〉, 《가톨릭 출판문화의 어제와 오늘》, 가톨릭출판사, 2006, 9~15쪽.

4) 장동하, 앞의 글, 2003, 14~17쪽.
5) 교세 통계표(1884~1887).

6) 한국교회사연구소 편역, 〈1900년도 보고〉, 앞의 책, 명동천주교회, 1984, 32~102쪽 ; 교세 통계표(1883~1888 · 1889~1890).

7) 교세 통계표(1882~1883).
8) 교세 통계표(1883~1887).

9) 약현성당백주년사편찬위원회 편, 《약현 본당의 공소와 교세 통계표(1891~1991)》, 천주교 중림동 교회, 1991, 18~19쪽, 53쪽.

10) 표에서의 설정 시기는 교세 통계표에 처음 기록된 연도를 말한다. 예를 들어 가라비 공소의 설정 시기를 1883년으로 본 것은 1882~1883년 교세 통계표에 처음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제로 공소는 적어도 위 표에서의 설정 시기 이전에 세워졌다고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교세 통계표 이외의 자료를 통해 설정 시기가 분명한 경우가 있는데, 위 표에서는 조은이 공소가 그러하다. 그러한 경우에는 비고란에 준거 자료를 넣었다. 현 위치는 1910 · 20년대 공소의 위치를 기록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하였고, 그것을 확인하지 못한 경우에는 《한국 지명 총람》(한글학회, 1986)을 참고하였다.

11) 서울교구 연보에는 매년 성인 영세자수를 기록하였는데, 이것은 교세 통계표에서의 성인 영세자와 성인 대세자(1894~1895년 이후에는 ‘성인 대세자와 사망자’)를 합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의 성인 영세자는 성인 영세자와 성인 대세자(성인 대세자와 사망자)의 합계를 말한다.

12) 약현성당백주년사편찬위원회 편, 〈두세 신부 1894년 연말 보고〉, 《성직자 사목 서한과 약현 관계 자료》, 천주교 중림동 교회, 1991, 62~70쪽.

13) 약현성당백주년사편찬위원회 편, 〈두세 신부 1899년 연말 보고〉, 위의 책, 천주교 중림동 교회, 1991, 109~114쪽. 1901년 11월 8일 뮈텔 주교가 사목 방문한 강원도 철원군 귀변동(구변두리) 공소의 신자들 가운데는 가라비 공소에서 온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뮈텔 주교 일기》 III, 한국교회사연구소, 96~97쪽).

14) 현재 본인(필자 주: 두세 신부)이 오로지 소망하는 것은 서울에서 떨어진 곳에 새로 한 10리쯤 간격으로 몇 군데 공소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외교인들 가운데서 고립되어 살고 있는 몇몇 신자들이 주일이면 그들을 돌보게 될 회장과 함께 모일 수 있는 곳을 마련해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미 남부와 서부에서는 일이 잘 되었으니, 이제 북부와 동부가 남았습니다. 그 곳에 몇몇 가족들을 보내서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겠는데, 지금으로서는 본인의 재정 사정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한국교회사연구소 편역, 〈1897년도 보고〉, 앞의 책, 명동천주교회, 1984, 223~224쪽).

15) 한국교회사연구소 편역, 〈1898년도 보고〉, 앞의 책, 명동천주교회, 1984, 236~237쪽.

16) 약현성당백주년사편찬위원회 편, 〈두세 신부 1895년 연말 보고〉, 앞의 책, 천주교 중림동 교회, 1991, 71~78쪽.

17) 약현성당백주년사편찬위원회 편, 〈두세 신부 1898년 연말 보고〉, 앞의 책, 천주교 중림동 교회, 1991, 102~108쪽.

18) 약현성당백주년사편찬위원회 편, 〈두세 신부 1900년 연말 보고〉, 앞의 책, 천주교 중림동 교회, 1991, 119~124쪽.

19) 교세 통계표 등의 자료에는 송도와 개성을 혼용하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개성’이 보다 널리 알려져 있는 점을 고려하여 ‘개성 본당’이라 칭하기로 한다.

20) 약현성당백주년사편찬위원회 편, 〈두세 신부 1900년 세 본당 신설에 대하여〉, 앞의 책, 천주교 중림동 교회, 1991, 133~136쪽.

21) 〈최 신부주의 여행〉, 《경향잡지》 422호(1919. 5) ; 〈포교 담임자 변경〉 · 《경향잡지》 436호(1919. 12) ; 〈경성교구에 신부 전임〉, 《경향잡지》 543호(1924. 6); 〈새 신부 차정〉, 《경향잡지》 568호(1925. 6) ; 〈경성교구에 신부 전임〉, 《경향잡지》 613호(1927. 5) ;〈루수 최 신부 선종〉, 《경향잡지》 636호(1928. 4) ; 〈경성교구에 신부 전임〉, 《경향잡지》 709호(1931. 5) ; 〈경성교구에 신부 전임〉, 《경향잡지》 758호(1933. 5) ; 〈경성 · 평양 · 춘천 3교구 신부 이동〉, 《경향잡지》 943호(1942. 2) ; 〈개성 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 한국교회사연구소, 284~285쪽.

22) 개성 본당 교세 통계표(1900~1901).

23) 개성 본당 교세 통계표에서 적성 지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09~1910년이다. 당시 공소로는 원당리와 산암리가 있었다. 그런데 원당리 공소 신자들 가운데 일부가 신암리로 이주하였고, 그 결과 1909년 봄 신암리 공소가 설정되었다고 한다(르 장드르 신부 문서 1910년 4월 17일). 이 점을 고려해 본다면, 적성 지역은 적어도 1909년 이전에 개성 본당의 관할 지역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24) 개성 본당 교세 통계표(1917~1918).
25) 한국교회사연구소 편역, 〈1908년도 보고〉, 《서울교구연보》 II, 명동천주교회, 1987, 66쪽.

26) Bulletin, 122쪽 ; 〈신부 차정〉, 《경향잡지》 382호(1917. 9); 〈요셉 김 신부 별세〉, 《경향잡지》 410호(1918. 11) ; 〈황 신부 차정〉, 《경향잡지》 422호(1919. 5) ; 〈경성 교구에 신부 차정과 전임〉,《경향잡지》519호(1923. 6) ; 〈경성교구에 신부 차정과 전임〉, 《경향잡지》 590호(1926. 5) ; 〈경성교구에 신부 전임〉, 《경향잡지》 742호(1932. 9) ; 〈경성교구에 신부 전임〉, 《경향잡지》 797호(1935. 1) ; 〈행주 이 신부 별세〉, 《경향잡지》 803호(1935. 4) ;〈경성교구에 신부 전근〉, 《경향잡지》 829호(1936. 5) ; 〈경성 · 평양 · 춘천 3교구 신부 이동〉, 《경향잡지》 943호(1942.2) ;〈경성 · 평양교구에 신부 이동〉, 《경향잡지》 947호(1942. 6).

27) 행주 본당 교세 통계표(1909~1910).
28) 《뮈텔 주교 일기》 4(1906~1910), 한국교회사연구소, 480쪽.
29) 약현 본당 교세 통계표(1909~1910).

30) 당시의 위치는 1922년 연말 보고 : 서울교구 본당 공소 지명, 안학만 신부 문서 1922년 6월 7일, 1930년대 본당 · 공소별 교세 통계표를 참고로 하였다. 설정 시기와 관련해서, 1909~1910년 교세 통계표에 처음 등장하는 공소는 교세 통계표가 누락된 기간에 설정되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일단 1905~1910년으로 하였다.

31) 르 장드르 신부 문서 1910년 4월 17일 · 1912년 4월 18일 · 1913년 4월 14일 · 1916년 5월 1일.
32) 르 장드르 신부 문서 1912년 4월 18일.
33) 르 장드르 신부 문서 1910년 4월 17일.

34) 약현성당백주년사편찬위원회 편, 〈두세 신부 1903년 연말 보고〉, 앞의 책, 천주교 중림동 교회, 1991, 157~167쪽.

35) 르 장드르 신부 문서 1911년 4월 24일.
36) 르 장드르 신부 문서 1918년 4월 22일 ; 《뮈텔 주교 일기》 1918년 12월 8일.
37) 〈경성교구에 신부 전임〉 《경향잡지》 613호(1927. 5).
38) 〈신암리 교우와 청년회의 열성〉, 《경향잡지》 564호(1925. 4).
39) 〈새 본당의 새 경사〉, 《경향잡지》 617호(1927. 7).
40) 〈경성교구에 신부 전임〉 《경향잡지》 613호(1927. 5).
41) 최문식 신부 1928년 연말 보고.

42) 개성 본당 교세 통계표(1929~1930년). 황해도 배천(연백) 지역의 공소들은 1926년 5월에 부활한 해주 본당의 관할 구역으로 편입되었다(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황해도 천주교회사》,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 1984, 339쪽 ; 해주 본당 교세 통계표(1929~1930).

43) 신암리 본당 1932년 교세 통계표.
44) 최문식 신부 1928년 연말 보고.
45) 최문식 신부 1928년 연말 보고.

46) 덕정리 본당의 설립 시기를 1930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것은 덕정리 본당의 초대 주임 피숑 신부의 약전을 근거로 한 것으로 여겨진다. 파리 외방전교회 홈페이지에 게재된 약전에 따르면, 1930년 피숑 신부가 덕정리 본당의 설립을 위해 용산신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러한 판단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뮈텔 주교 일기》에 따르면, 피숑 신부는 1931년 2월까지 신학교에 몸담고 있었다는 점이다(1931년 2월 5일 일기 참고). 그리고 피숑 신부는 안질의 치료를 위해 1931년부터 프랑스에 머물다가, 1933년 한국에 귀국하였다(한국교회사연구소 편역, 〈1933년도 보고서〉, 《서울교구 연보》 II, 명동천주교회, 1987, 279쪽). 둘째, 1932~1933년 평강 본당의 교세 통계표를 보면, 관할 공소에 덕정리가 있었다.

47) 〈덕정리에 새 본당〉, 《경향잡지》 780호(1934. 4).
48) 〈덕정리에 새 본당〉, 《경향잡지》 780호(1934. 4).
49) 〈덕정리〉, 《한국가톨릭대사전》 3, 한국교회사연구소, 1701쪽.
50) 행주 본당 교세 통계표(1932~1933) · 평강 본당 교세 통계표(1932~1933).
51) 덕정리 본당 교세 통계표(1933~1935).
52) 덕정리 본당 교세 통계표(1934~1935).
53) 〈덕정리에 성당 강복식〉, 《경향잡지》 789호(1934. 9).
54) 백동 본당 교세 통계표(1929~1930).

55) 당시의 위치는 1930년대 본당 · 공소별 교세 통계표를 참고로 하였다. 설정 시기와 관련해서, 1929~1930년 교세 통계표에 처음 등장하는 공소는 교세 통계표가 누락된 기간에 설정되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일단 1925~1930년으로 하였다.

56) 광장리(광나루) 공소는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양주에서 고양으로 편입되었다(광장동 주민센터 홈페이지 참고). 그에 따라 1901~1924년에는 양주로 하였지만, 1930~1937년에는 고양으로 분류하였다.

57) 덕정리 공소와 가까운 곳에 회암 공소가 있었으나, 1923년 신자 수가 23명일 정도로 교세가 미약하였다.

58)〈경성 · 평양교구에 신부 이동〉, 《경향잡지》 947호(1942. 6) ; 〈의정부교구 본당 1곳 신설, 본당 2곳은 이름 바꿔〉, 《평화신문》 2004년 11월 28일자.

59) 〈덕정리 본당 이전〉, 《경향잡지》 981호(1946. 12) ; 《의정부 본당 50년사》, 천주교 의정부2동 교회, 1996, 52쪽.

[교회사 연구 제31집, 2008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양인성(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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