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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그들은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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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1-25 ㅣ No.1947

[특별기고]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 그들은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 (1)


“젊은 조선의 첫 사제는 한분이신 하느님 위해 목숨을 바쳤다”

 

 

네덜란드어로 인쇄된 교황청 전교기구 베드로 사도회 소식지. 1922년 4호, 이돈수 가밀로 소장.

 

 

그들은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는 1846년 9월 2일 편지로 김대건 신부의 ‘체포 소식’을, 11월 3일 편지로 그의 ‘순교 소식’을 전했다. 이후 김대건 신부에 대한 소식은 유럽 전역에 빠르게 전파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이야기와 한국 천주교회의 박해사와 순교사는 신문과 잡지는 물론 당시 출판된 여러 단행본의 매력적인 소재가 되었다. 세계인들에게 한국인 첫 사제이며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는 어떻게 소개되었을까.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19세기에는 새로운 선교회들이 많이 창설되었다. 특히 1817년 교황청 포교성성의 기능과 활동이 활성화되면서 근대 선교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될 선교회들이 복구되거나 새롭게 생겨났다. 이러한 선교회들의 활동을 돕기 위한 정책과 예산을 후원하기 위한 단체들도 잇따라 설립되었는데, 교황청 전교회, 교황청 어린이 전교회, 교황청 베드로 사도회, 교황청 전교 연맹 등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교회의 사명인 선교에 헌신하고 선교를 증진시키기 위해, 즉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파하기 위해 설립된 여러 선교회에 선교지의 현지인 사제의 탄생과 죽음은 극적인 사건이었다. 더욱이 사제 없이 평신도들이 서학을 공부하여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젊은이가 자신의 동료와 함께 신자 공동체를 결성하고 성사의 은총을 완성하기 위해 북경 주교에게 또 교황에게 사제를 보내달라고 청하는 편지를 수차례 썼다는 한국 교회의 역사는 여러 나라의 선교 소식지에 흥미롭게 등장했다.

 

가톨릭평화신문은 성 김대건 신부 희년을 맞아 ‘그들은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를 제목으로 총 5회에 걸쳐 세계인에게 소개된 김대건 신부 관련 자료를 연재한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사문화부장 송란희 선생의 특별 기고이다. 프랑스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등 여러 유럽 언어로 출판된 이들 자료는 신문, 잡지, 리플릿, 소책자 등 형식도 다양하다.

 

 

1922년 베드로 사도회 소식지 표지 장식

 

“누구도 성소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모토 아래 각 선교 지역의 현지인 사제 양성을 후원하는 교황청 전교기구 베드로 사도회의 네덜란드 지부에서 발행한 선교 소식지이다. 1922년 11월 발행된 4호에 김대건 신부의 초상화가 표지로 실렸으며, 2면에 걸쳐 김대건 신부의 일생과 순교 장면이 소개되었다. 표지는 우석 장발(루도비코, 1901~2001)이 1920년에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기낭 교장 신부의 은경축 기념 선물로 그린 초상화로 김대건 신부의 초상화 아래에는 “가경자 김 안드레아 1845년 8월 17일에 사제품을 받은 한국의 첫 현지인 신부로, 1846년 9월 16일에 신앙을 위해 순교했다”는 사진 설명이 달려 있다.

 

1921년 5월에 창간된 이 소식지는 중철 제본의 소책자 형태로 앞뒤 표지를 제외하고 총 16쪽으로 되어 있으며, 크기는 가로 10.3cm, 세로 22.9cm이다. 유가지로 판매가는 20센트이며, 베드로 사도회에 가입된 회원의 가정에는 무료로 제공되었다. 당시 발행인인 얀 슈미트(Mgr. Dr. Jan Olav Smit, 1883~1972) 주교는 파라루스(Paralus)의 명의 주교이자 노르웨이와 스핏츠버겐(Spitzbergen)의 교구장이었다.

 

교황청 베드로 사도회는 네덜란드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1920년 포교성성 장관 반 로숨(Van Rossum, 1854~1932) 추기경이 얀 슈미트 주교를 교황청 베드로 사도회의 네덜란드 지부장으로 임명하면서 크게 성장하게 된다. 이후 얀 슈미트 주교는 네덜란드 선교 사업의 중심인물로, 교황청과 일치를 이루며 네덜란드의 선교 사업에 크게 기여했다.

 

소책자의 주요 내용은 네덜란드 각 교구에서 모은 후원금이 전 세계 현지인 신학교에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에 대한 소식 전달이다. 당시 네덜란드는 아프리카, 인도,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 베트남의 통킹, 말라카 해협의 폴로 피낭, 중국 동몽골과 귀주, 일본 삿포로와 나가사키 등에 있는 신학교를 지원하고 있었다. 한국 교회 소개에서는 원산의 덕원 신학교 신학생 3명을 후원하고 있으며 그들이 김대건 신부의 뒤를 이어 진정한 사제가 되기를 바란다는 희망도 담았다.

 

교황청 전교기구 베드로 사도회의 네덜란드 지부 선교 소식지 4호의 10~13쪽.소식지는 당시 네덜란드 각 교구에서 모은 후원금이 전 세계 현지인 신학교에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그 가운데 2개 면에 걸쳐 김대건 신부의 일생과 순교를 자세히 담았다.

 

 

몇 번의 고문 끝에 여덞 번 칼 맞고 순교

 

김대건 신부에 대한 소개는 “한국은 100년 전에 이미 사제 순교자를 배출한 나라이며 그 장본인은 가경자 김 안드레아로, 한 젊은 한국인 신자가 그린 그의 초상화가 본 팸플릿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사제 양성을 위해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가 1831년(1836년의 오기)에 선택한 3명의 젊은 한국인 중에는 1821년생인 김 안드레아도 있었다. 그는 학업을 마치기 위해 중국으로 보내졌고 1842년까지 마카오 신학교에서 수학했다. 그해 중국과 유럽 사이에 소위 아편전쟁이 발발해 프랑스가 두 척의 군함을 보냈다. 그중 한 척은 조선과의 무역 관계를 시작할 의도를 가졌고, 그 선장은 신학교장에게 통역관을 주선해 주라고 부탁했다.… 위험한 여정 끝에 김 안드레아는 1845년 8월 17일 한국인 최초로 사제 품을 받는다. 8일 후 그는 주교와 다른 선교사와 함께 다시 뱃길을 나선다. 또 한 번의 위험천만한 여정 끝에 세 선교사는 조선에 도착해 아주 조용히 그들의 임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한다. 다시 안드레아 신부는 [조선] 밖으로 보내지는데, 이번에는 중국과 동료 선교사들과의 연락을 시작하라는 임무였다. …성공했다고 생각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천주교 신자로 발각된다.

 

그는 투옥되어 외국인들에게 협조한 죄로 고문당하지만, 심문관들에게 천주교 신앙에 대해 설득하였다. 판관은 황제(왕의 오기)에게 그의 면죄부를 청하지만 프랑스 해군으로부터 실종된 선교사들에 대해 설명하지 않으면 보복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협박 편지를 받는다. 이것은 끝을 불러온다. 놀란 황제는 김 신부를 참수형에 처할 것을 명령한다. 몇 번의 고문 끝에, 젊은 조선의 첫 사제는 8번 칼을 맞고 1846년 9월 16일에 한 분이시며 참되신 하느님과 하나이며 참된 교회를 위해 그의 목숨을 바쳤다.

 

한국 원산에 있는 신학교에는 네덜란드가 후원하는 세 명의 신학생이 있다. 이 대목구에는 파리외방전교회의 프랑스인 선교사들 외에 상트 오틸리엔 베네딕도 수도회의 독일인 선교사들만 활동 중이다. 가경자 김 안드레아를 본받아 우리의 세 학생이 그들 고국의 진정한 사도가 될 수 있기 바란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월 10일, 송란희(가밀라,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사문화부장)]

 

 

[특별기고]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 그들은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 (2)


 20세기 초 프랑스 교회 주간지에 김대건 신부의 순교 장면 삽화 실려

 

 

「르 펠르항」 제2519호 표지.

 

 

「Le Plerin」(르 펠르항)의 제호는 ‘순례자’라는 뜻으로 프랑스 3대 가톨릭 출판사 가운데 하나인 바야르 프레스(Bayard Press)에서 1872년 창간했다. 창간 당시에는 뉴스레터 형식이었으나 1877년에 기사와 삽화를 게재하는 주간지로 체제를 바꿔 발행하기 시작했다. 주간지의 크기는 가로 18.3cm, 세로 25.5cm이다. 「Le Plerin」은 교회 소식 외에도 조선에 대한 다양한 소식을 원색 삽화와 함께 실었다.

 

19세기에 발행된 삽화 중심의 신문이나 잡지는 독자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시각적 자극과 환상을 주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경향은 1839년 최초의 사진이 만들어지고, 1844년 카메라가 상용화되어 아시아를 여행한 서양인들이 직접 촬영한 사진들로 대체되기 전까지 글을 읽지 못하는 일반 대중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이번에 소개하는 「Le Plerin」은 흥미로운 삽화 때문에 근현대 역사를 주제로 다루는 전시에 자주 활용되고 있다. 당시 해외에서 출판된 자료들은 연도나 날짜, 호칭 등에 다소 오류가 있는데 여러 언어로 번역되고 편집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실수일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독자들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본토인 첫 순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이야기를 읽으며 선교지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했을 것이다.

 

「르 펠르항」 1528호 1906년 4월 5일 자. 김대건 신부의 순교 장면을 묘사한 삽화가 크게 그려져 있다. 이돈수(가밀로) 소장.

 

 

Le Plerin 제1528호(1906년 4월 15일 자)

 

김대건 신부의 순교 60주년을 기념하는 해인 1906년 4월 15일에 발행된 「Le Plerin」에는 김대건 신부의 순교 장면을 묘사한 삽화와 함께 그의 일대기가 실려 있다. 삽화 아래는 “가경자 김대건 신부 첫 한국인 사제 순교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참수, 순교자의 머리는 칼을 8번 내리치고 나서야 떨어졌다”라는 다소 긴 설명이 달려 있다.

 

삽화의 처형장 모습이나 처형에 참여한 등장인물을 볼 때 조선인이라 보기 어렵다. 아마 삽화가가 아시아 각 나라의 전통 복장이나 생김새를 구분하지 못해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을 섞어 그렸을 것이다. 실제로 1968년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 때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에 내건 한국인 순교 복자화를 그린 이탈리아 화가는 한국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순교 복자를 일본인처럼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참수를 앞둔 순교자 김대건 신부의 자세는 압도적이며 하늘을 향한 그의 눈빛은 형형하다.

 

「Le Plerin」은 김대건 신부를 총 4면(21~24쪽)에 걸쳐 소개하면서 ‘순교자 집안’, ‘조선으로 입국’, ‘갑자기 뱃사람이 된 첫 한국인 신부’, ‘체포’, ‘처형’ 등 5개의 소제목을 두어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했다. 그리고 기사의 마지막에는 1846~1847년 전교회 연보(Annales de la Propagation de la Foi)에 실린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의 편지를 인용했음을 밝히고 있다.

 

“순교자 집안 : 김대건은 1821년 8월 한국의 충청도 지방에서 태어났다. 왕족 혈통인 그의 가족은 천주교 순교자를 여러 명 배출하는 영광을 가졌다.…모방 신부는 1836년에 김대건을 다른 두 한국인 젊은이들과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신학생 김대건의 발전은 그의 덕성만큼이나 학문에서도 빨랐다. 그는 곧 3개 외국어를 구사했는데 중국어는 원어민만큼, 라틴어는 수월하게, 그리고 프랑스어는 곧잘 했다. 아편전쟁 끝 무렵(1842)에 영국(프랑스의 오기)의 세실 장군은 청나라와 조선과 이야기할 때 그를 통역으로 고용했다. 조선대목구장인 페레올 주교는 ‘통역가로 일하는 동안 그의 사고가 성장하고 용기가 생겼다. 차츰 그의 영혼은 대담해졌고 주님께서 그의 앞날에 주신 뜻을 이루도록 인도하셨다. 이후의 위험한 원정들은 그를 두렵게 하기는커녕 더 큰 용기를 가져다주었다’고 기록했다.”

 

“갑자기 뱃사람이 된 첫 한국인 신부 : 서울에서 김대건은 자신의 입국을 철저히 비밀로 하기 위해 심지어 그의 어머니에게까지 귀국을 알리지 않았다. 9년 만에 만났을 것인데도! 그는 비밀리에 120피아스터(piastres)에 배를 하나 샀는데 고틀랑 신부가 말하길 그것은 그저 쇳덩어리(목선의 오기)로, 바다를 항해하기 위해 만든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어느 화창한 날, 그는 가장 신실한 교우들을 불러 그들에게 어디로 가는지 언질도 없이 배에 태웠다. 급조된 선장인 그는 마찬가지로 급조된 선원들과 함께 망망대해로 떠났다. 조잡한 나침반 하나로 중국을 향해 전혀 모르는 바다를 항해했다. 김대건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제작한 성모 상본을 지니고 왔다. 용감한 항해사들은 모두 순교자의 가족이었기에 하느님의 가호를 믿었다.”

 

“체포 : 김대건의 원정은 거의 다 성공했지만, 동료들의 파렴치한 배반으로 체포되었다. 순교자가 직접 쓴 참수되기 전까지 견뎌낸 고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페레올 주교에게 자신의 체포 상황을 이야기하고 아래와 같이 덧붙였다. ‘포졸들이 사납게 제게로 달려들어 제 머리채를 잡아 쥐어뜯더니, 밧줄로 저를 묶고 세차게 발길질하고, 주먹질하고, 막대기로 때렸습니다. 이후 그들은 제 옷가지를 벗기고 다시 나를 조롱하며 묶고 때리더니 저를 재판관 앞에 끌고 갔습니다. 그 관리가 제게 말하길, ‘당신은 그리스도교인인가?’ 제가 그에게 답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르 펠르항」 제2519호 7월 5일 자. 순교 장면 삽화에 무릎 꿇고 있는 김대건 신부 뒤로 지켜보는 대신들과 태극기가 살짝 보인다.

 

 

Le Plerin 제2519호(1925년 7월 5일 자)

 

김대건 신부를 포함한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 79위의 시복식 당일인 1925년 7월 5일 자 「Le Plerin」에는 김대건 신부의 순교 장면을 그린 흑백 삽화가 실렸다(3면). 삽화 속에서 희광이는 큰 칼을 들고 서 있고 두 손을 모아 십자가를 든 김대건 신부가 무릎을 꿇고 있다. 참수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왕과 대신들 뒤로 반쯤 보이는 태극기가 눈길을 끈다.

 

‘한국의 순교자들’이라는 제목 아래 김대건 신부를 소개했다. “불과 1784년에서야 시작된 한국 교회의 역사는 하나의 긴 순교록이라 하겠다. 7월 5일에 이들 순교자 중 세 명의 파리외방전교회 성직자와 한 명의 한국인 사제가 시복될 것이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 그리고 ‘김’이 바로 그들이다. 한국인 사제 안드레아 김은 앵베르 주교의 뒤를 이은 페레올 주교의 오른팔이었다. 그는 메스트르 신부의 입국을 준비하다가 1845년(1846년의 오기)에 체포되었다.

 

그의 위대한 영혼과 지혜는 정부 대신들조차 매료시켰다. 그들은 왕에게 김대건 신부를 죽이지 말도록 청했으나 집행할 준비가 된 왕은 버텼다. 형벌이 준비되는 동안 안드레아는 자신의 사형 집행자들과 대화하며 ‘이렇게 해서 나는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겁니다’라고 말하고 ‘편안하게 마음껏 치시오. 나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젊은 신부의 머리는 땅 위로 뒹굴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월 17일, 송란희(가밀라,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사문화부장)]

 

 

[특별기고]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 그들은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 (3)


복자 김대건, 전교기구의 ‘본토인 신학생 후원 안내’ 모델이 되다

 

 

앞면 : 김대건 신부 초상화 아래 ‘복자 김 한국의 순교 사제’ 그리고 ‘본토인 신학생을 위한 기도’라고 되어 있다.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교황청 전교기구 베드로 사도회의 프랑스 파리와 리옹 지부에서 발행한 「본토인(邦人) 신학생을 위한 기도문」이다. 앞면은 복자 김대건 신부의 초상이고 뒷면은 기도문과 후원회원 관련 내용이다.

 

복자 비오 9세 교황은 1857년 9월 24일 김대건 신부를 가경자로 선포했고, 비오 11세 교황은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김대건 신부를 한국의 순교자 78위와 함께 시복했다. 시복식에 참석한 한국인은 한기근(바오로, 1867~1939) 신부 외에 장면(1899~1966)과 장발(1901~2001) 세 명이었다. 시복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한기근 신부는 로마 여행기를 썼고 장발은 복자화를 그렸다.

 

장발은 김대건 신부 초상을 두 차례 그렸는데 첫 초상화는 얼굴을 중심으로 그렸고, 두 번째는 전신을 그렸다. 장발 스스로 후자에 대해 “모든 형체를 가성적으로 직선화하였고, 성선(聖線)을 다시 균제(均齊)의 배열법으로 처리한 결과 고요로운 평화가 최대한도로 달성된 그림”이라고 평했다.(「가톨릭청년」 1936년 2권 2호) 김대건 신부의 수직적 자세와 수평적 배경이 화폭에 십자가를 구성함으로써 종교화로서의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했다고 본 것이다. 장발이 그린 김대건 신부의 초상은 이후 작은 상본으로 제작되어 선교사들에 의해 전 세계로 보내졌고, 각 지역에서 한국 교회와 한국의 첫 사제 순교자를 소개하는 자료에 활용되었다.

 

이 기도문에 사용된 그림은 모사본이다. 장발이 그린 김대건 신부 초상은 여러 차례 모사되었다. 옛 용산예수성심신학교 성당(현 원효로 성심 수녀회 성당) 모사본은 캔버스에 유채로, 가톨릭전례박물관의 모사본은 독특하게 함석판에 그렸다. 현재 원본은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에 있다. 원본은 화면의 아치형 구조에 “나를 위하야 무궁셰가 곳 시작하리니 그대들도 사후 진복을 누리려 하거든 셩교를 봉행하라(위)/ 네가 영원히 탁덕이로다(아래)/ 복자 김 신부 탄생 一八二一년 탁덕승품 一八四五년(오른쪽)/ 참슈치명 一八四六년 로마에셔 시복식 一九二五년(왼쪽)”이라고 적혀 있다.

 

원본과 비교해 보면 기도문에 사용한 그림은 얼굴 모습이 이국적이며 글자 대신에 김대건 신부가 들고 있는 순교자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를 장식적으로 그려 넣었다. 모사본이지만 보편 교회에, 나아가 세계인에게 ‘한국인 첫 본토인 사제 순교자 김대건 신부’를 알리기에는 충분했다. 더욱이 본토인 성직자와 수도자 양성에 목적을 두고 있는 교황청 산하 전교기구 자료에서 김대건 신부가 계속 등장하는 것을 보더라도 김대건 신부의 신앙과 삶은 보편 교회에서 함께 공감하는 ‘결실이자 기쁨’이었을 것이다.

 

뒷면 : 본토인 신학생을 위한 기도문과 베드로 사도회 후원회원 소개글. 이돈수(가밀로) 소장.

 

 

본토인 신학생을 위한 기도문

 

“모든 사람이 진리를 깨달아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 저희에게 당신의 열매를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그들이 확신을 가지고 당신의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어 당신의 복음이 널리 퍼져 세상에 드러나, 마침내 모든 이가 당신을 참 하느님, 당신과 당신이 보내신 분, 예수 그리스도, 당신의 아들, 우리의 주님으로 알아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전교 미사 참조)

 

 

목적

 

신학교 설립 및 선교지의 본토인 성직자 모집을 위해 기도와 자선으로 돕는다. 이와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업회는 ‘성 아기 예수 데레사의 선교사 장미 나무’를 조직했다. 한 그루의 선교사 장미 나무는 다음과 같은 회원들에 의해 유지될 수 있다.

 

a) 창립 회원 : 한 명의 본토인 신학생 유지에 필요한 총비용을 한 번에 혹은 분할로 기부하는 회원

 

b) 후원자 회원 : 한 명의 신학생이 공부하는 동안 한 그루의 선교사 장미 나무를 제공하는 후원자 혹은 단체(개인 또는 지역 사회, 교구, 신학교, 기관 등). 즉 연 1200프랑 또는 월 100프랑 후원

 

c) 열성적인 지지자 회원 : 장미 스무 송이, 즉 연간 120프랑 또는 월 10프랑

 

d) 일반 준회원 : 장미 한 송이, 즉 연간 최소 6프랑 또는 월 0.5프랑

 

모든 정보는 다음 연락처로 문의하십시오

PARIS, 5, r. Monsieur 7―Ch. postal Paris 618.25

LYON, 12, rue Sala―Ch. postal Lyon 72.71

 

뒷면에는 선교지를 위한 기도문과 후원회 설립 목적 및 후원금액에 따른 회원의 종류를 소개하고 있다. 하단에는 후원회 가입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문의처인 파리와 리옹의 사도회 주소를 밝히고 있는데 구글 지도로 찾아보면 두 곳 모두 현재도 같은 주소지에 있다.

 

교황청 전교기구 베드로 사도회는 선교 지역의 성직자와 수도자 양성에 영적ㆍ물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기구이다. 1889년 나가사키대목구장 쥘 알퐁스 쿠쟁(Jules-Alphonse Cousin, 1842~1911) 주교가 스테파니 비가흐(Stphanie Bigard) 여사와 그녀의 딸 잔 비가흐(Jeanne Bigard) 양에게 사제 지망생인 일본 소년들을 후원해 달라고 부탁했고, 이를 시작으로 프랑스 서북부 바스노르망디 칼바도스에 있는 도시 캉(Caen)에 전 세계 현지인 사제 양성을 돕는 베드로 사도회가 세워졌다. 베드로 사도회는 1890년 레오 13세 교황의 인준을 받았고, 1922년 5월 3일에 비오 11세 교황의 공표로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산하 기구가 되었으며 현재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월 24일, 송란희(가밀라,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사문화부장)]

 

 

[특별기고]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 그들은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 (4)


파리외방전교회 소식지에 김대건 신부 자필 서명이 그대로 실리다

 

 

복자 김대건 신부의 자필 서명이 실린 「아날」 내지. 편의상 자필 서명지가 옆으로 실렸다. 위의 것은 복자 샤스탕 신부의 것이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파리외방전교회는 아시아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프랑스 교구 소속 신부들로 이루어진 선교회이다. 파리외방전교회는 파견 선교사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시기마다 다양한 잡지를 발행했는데 이는 선교 경비 마련은 물론 성소자 모집을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실제로 1870년에 1036명이었던 선교사 숫자는 1910년에는 3046명까지 늘어났으며 매년 50여 명씩 떠나는 선교사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파리외방전교회 잡지들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시작한 잡지는 1841년에 발간된 「콩드 랑뒤」(Comptes Rendus)이다. 각 선교지의 교세를 정리한 선교사들의 ‘연례 보고서’ 모음이라고 볼 수 있다. 각 지역의 보고서 형식(신자 수, 성인 영세자 수, 외교인 자녀 영세자 수 등 표기)은 대동소이하여 앞쪽에는 각 선교지의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교세 일람표를 두었으며 책의 뒤쪽에는 그해 사망한 선교사의 약전을 실었다.

 

「콩드 랑뒤」의 경우 처음에는 석판에 글씨를 새겨서 찍어내다가 1871년부터는 성 쉘피스 성당 근처에 있는 빅터 구피(Victor Goupy)사에서 활자로 인쇄하기 시작했다. 1658년에 간행하기 시작한 「tat de la Socit des Missions trangres」(파리외방전교회 보고서)는 1994년까지 간행되었으며, 「Œuvre des Partants」(선교사 보고서)은 1885년에 시작하여 1897년까지 비교적 짧은 시기 동안 발행되었다.

 

복자 김대건 신부의 자필 서명지 사본.

 

 

이번에 소개할 자료인 「Annales de la Socit des Missions trangres et de l’Œuvre des Partants」(외방전교회와 파견 선교 연보)은 1898년 2월호부터 간행을 시작하여 1940년까지 발행되었다. 「Bulletin de la Socit des MEP」(파리외방전교회 회보)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을 위해 선교지 관련 문서와 편지를 엮은 것이다. 홍콩 나자렛 인쇄소에서 간행되었으며 첫 번째 볼륨은 1922~1941년까지 두 번째 볼륨은 1948~1961년까지 발행되었다.

 

그 밖에 「chos de la Rue du Bac」(파리외방전교회 소식)도 두 볼륨으로 나누어 발행되었는데 첫 볼륨은 1921~1967년, 두 번째 볼륨은 1967~1992년에 간행되었다. 이후 「chos Missionnaires」(선교사 소식, 1942~1947년), 「Missionnaires d’Asie」(아시아의 선교사, 1948~1960년), 「Missions trangres de Paris」(파리외방전교회, 1961~1967년) 등의 잡지들도 제목과 체제 등을 바꾸면서 이어져 왔다. 이 잡지들에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주요 선교지 가운데 한 곳인 한국 천주교회의 소식과 함께 김대건 신부에 대한 내용이 다수 실려 있다.

 

 

김대건 신부의 자필 서명 실려 있는 「Annales de la Socit des Missions-trangres et de l‘OEuvre des Partants」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후원회원들을 위해 선교지의 생생하고 흥미로운 소식을 엮은 일명 「아날(Annales)」의 1925년 제166호에는 김대건 신부의 자필 서명이 실려 있다.

 

“무익하고 부당한 종, 그리스도를 위하여 묶인 조선의 교황 파견 선교사 1846년 음력 6월 8일(inut. ind. servus Andreas Miss. AP. Cor. Pro. Christo vinctus 1846 Lunae 6ae die 8a).”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기 전 감옥에서 쓴 19번째 편지. 현재 남아 있는 김대건 신부의 편지 가운데 유일하게 한지에 붓으로 적었다.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소장.

 

 

이 자필 서명은 김대건 신부의 19번째 편지의 마지막 서명 부분을 옮겨 실은 것이다. 19번째 편지는 김대건 신부가 감옥에서 베르뇌, 매스트르, 리브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것으로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들에게 한 장의 편지를 보내게 되어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곳의 환경과 공경하올 신부님들에 대한 생각과 애정이 이렇게라도 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로 시작한다. 특히 최양업 신부에게 “천당에서 다시 만나자는 마지막 인사와 함께 어머니 우르술라를 특별히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는 바로 그 편지이다. 편지를 쓴 음력 6월 8일은 양력으로 7월 30일이니 그가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48일 전이다.

 

 

김대건 신부의 탄생 100주년과 곧 있을 시복 소식 전하는 「Bulletins de la Socit des Missions-trangres」

 

「뷜탱(Bulletins)」은 파리외방전교회가 홍콩 나자렛 인쇄소에서 발행하던 월간 잡지로 선교지 관련 문서와 편지들이 주로 실렸다. 창간 첫해인 1922년 10월호에는 한국 본토인 신부 양성의 역사를 소개하며 김대건 신부 약전과 그의 탄생 100주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특히 본토인 신부 양성의 성공적인 사례로 김대건 신부뿐만 아니라 최양업 신부도 소개했다.

 

최양업 신부가 라틴어로 쓴 ‘친필 서약서’ 사본. 원본은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에 있으며 고 최승룡 신부가 발견했다.

 

 

“바로 작년 한국 교회는 김대건 신부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했으며 곧 그가 시복되는 더 좋은 소식이 있을 예정이다. 페레올 주교는 그의 죽음을 알리고 그를 추모하며 아들과 다름없는 그를 잃은 것은 개인적으로도 너무나 잔혹하고 교회에는 큰 손실이라고 했다. 그는 사제직에 오른 처음이자 유일한 조선인 사제였던 김대건 신부의 신심과 업적을 칭찬했다.”

 

사본이지만 한국교회사연구소는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서약서’를 소장하고 있다. 두 신부 모두 공통으로 클레멘스 11세 교황의 칙서 「엑스 일라 디에」(Ex illa die)에 따라 조상 제사와 같은 전통 의례를 실행하지 않을 것이며 교우들이 이를 행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적었으며 맨 마지막에 “나 자신이 손수 서명했습니다”라고 자필 서명을 했다.

 

김대건 신부는 1845년 8월 30일에 상해에서 선서문을 작성했다.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라파엘 호’를 타고 상해에서 출발하기 바로 전날(8월 31일) 쓴 것이다. 신부의 자필 서명 아래는 “벨리노 명의 주교이자 조선대목구장 조제프”라는 페레올 주교의 서명이 있다.

 

최양업 신부의 서약서는 1849년 6월 21일에 적었는데 “중국 교우들을 영신적으로 지도하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으며 베르뇌 주교의 확인 서명과 주교 인장이 찍혀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월 31일, 송란희(가밀라,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사문화부장)]

 

 

[특별기고]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 그들은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 (5 · 끝)


장발 화백의 김대건 신부 전신 초상에 ‘한국의 첫 사제 순교자’라 소개

 

 

‘복자 김대건 신부’ 에카르트는 “루도비코 장이 그린 복자 김 안드레아 신부 용산 서울 신학교의 한국의 첫 사제 순교자”라고 소개했다.

 

 

「그리스도교 미술(Die christliche Kunst)」 1929년 3월호에 김대건 신부의 초상화가 소개되었다. 「그리스도교 미술」은 1904년~1937년 그리스도교 미술과 미술사를 주제로 독일 뮌헨에서 간행하던 잡지이다. 표지와 본문 17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잡지의 크기는 세로 29.5㎝ 가로 21㎝이다.

 

김대건 신부의 초상화를 소개한 사람은 안드레아 에카르트(Andreas Eckardt, 1884~1974)이다. 한국 이름 옥낙안(玉樂安)인 그는 한국의 문화 예술 분야에서 뚜렷한 공을 세운 외국인 가운데 한 명이다.

 

에카르트는 1884년 바이에른 지방에서 태어났다. 1905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회에 입회한 그는 성 베네딕도회 회원으로 1909년에 사제품을 받고,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성 베네딕도회가 한국에 진출한 첫해에 입국한 에카르트는 서울 백동(현 혜화동)에 위치한 성 베네딕도 수도원 내에 설립된 사범학교인 숭신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물리학과 화학 교과서와 한국어 문법책을 저술했다. 1920년 성 베네딕도회가 원산대목구를 책임지게 되면서 원산본당과 팔도구본당에서 사목하기도 했다.

 

1925년에 서울 수도원으로 돌아온 그는 도서관 관리를 맡는 한편, 새로 한국에 도착하는 선교사들에게 극동의 언어와 문화를 가르쳤다. 그는 한때 경성제국대학에서 중국어와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는데 5개 국어 이상을 능통하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1927년 10월 백동수도원이 덕원으로 완전히 이전되자, 이듬해 7월 시베리아를 거쳐 본국으로 돌아갔다. 1928년 독일로 돌아간 이듬해에 ‘한국 미술을 세계 미술로 본 최초의 저술’이라는 평가를 받는 「조선 미술사(Geschichte der Koreanischen Kunst)」를 썼다. 이 책은 독일어와 영어로 동시에 출판되었다.

 

- 「그리스도교 미술(Die christliche Kunst)」 표지. 하단 박스 안에 덕원(한국) 베네딕도회원 안드레아 에카르트의 이름과 논문 제목(Ludwig Chang und Die christliche Kunst in Korea)이 있다.

 

 

에카르트는 1931년 브라운슈바이크(Braunschweig) 대학에서 「한국의 학교 제도(Das Schulwesen in Korea)」라는 주제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 교육학연구소 동양부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였다. 그러나 나치 정권에 의하여 연구소가 폐쇄되자 바이에른으로 돌아가 뮌헨대학에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쳤으며, 이 무렵 수도회를 탈회했다. 에카르트는 한국어와 한국 전래 동화, 한국 미술 등을 주제로 여러 저서를 남겼으며 독일에서 한국학을 출발시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잡지에 실린 에카르트 논문의 제목은 「루도비코 장과 한국의 그리스도교 미술(Ludwig Chang und Die christliche Kunst in Korea)」이다. 그는 논문의 제목에서처럼 장발(루도비코)의 작품을 통해 한국의 그리스도교 미술을 소개했는데, 이때 사용한 도판은 ‘김대건 신부 초상’, ‘김효주 아녜스와 김효임 골룸바 자매의 초상’, ‘14사도’ 등이다. 이와 함께 실린 김대건 신부의 초상 드로잉은 1896년에 간행된 「조선과 프랑스의 선교사들(La Core et Les Missionnaires Franais)」과 1918년에 간행된 「가톨릭 선교지(Les Missions Catholiques)」에 실린 플러레(Fleuret)의 동판화와 유사한데, 1920년 용산 신학교장 기낭 신부의 은경축 기념 선물로 김대건 신부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한 선행 작업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에카르트는 김대건 신부의 전신 초상화를 소개하면서 도판 하단에 “루도비코 장이 그린 복자 김 안드레아 신부 용산 서울 신학교의 한국의 첫 사제 순교자”라고 설명했다. 물론 김대건 신부가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한국인 성직자 양성의 요람인 용산신학교와 첫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관계를 강조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에카르트는 장발이 그린 주교좌 명동대성당의 ‘14사도’와 14사도의 다양한 손의 형태를 직접 촬영하여 함께 소개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화가였고, 장발이 일본으로 유학 가기 전 수 개월간 자신에게 유화를 배웠다”고 언급하며 주교좌 명동대성당의 ‘14사도’를 그린 캔버스 앞에서 팔레트를 들고 앉아있는 장발과 자신의 초상화(사진 오른쪽 아래)를 함께 놓고 직접 찍은 사진도 실었다.

 

 

- 논문과 함께 소개된 도판들. 상단은 ‘14사도’ 손 스케치와 ‘김대건 신부의 초상’ 드로잉이고, 하단은 ‘김효주 아녜스와 김효임 골룸바 자매의 초상’과 주교화 명동대성당의 ‘14사도’이다.

 

 

 

- 캔버스 앞에 앉아있는 장발 화백과 에카르트(오른쪽 아래) 초상화.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2월 7일, 송란희(가밀라,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사문화부장), 자료 소장: 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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