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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기후는 공공재입니다9: 기후위기, 인권의 관점에서 행동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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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6-13 ㅣ No.1836

[기후는 공공재입니다] (9) 기후위기, 인권의 관점에서 행동하기


환경파괴 책임 주체 규명, 사회 불평등 바로잡는 첫 단추

 

 

-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에서 ‘기후정의’는 중요한 요소다. 2020년 9월 2일 영국 런던 의회 광장에서 그리스도인들과 불자들이 정부에 기후위기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CNS 자료사진.

 

 

대략 1500만 종으로 추정되는 지구상의 생물종 중에서 가장 유명한 ‘멸종위기종’은 아마도 북극곰일 것이다. 1970년대부터 과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지구온난화’ 현상은 1992년 브라질 리우에서 열린 ‘유엔 환경개발회의’에서 처음으로 국제적 의제가 되었다.

 

그 이후부터 북극곰은 지구온난화의 상징이 되었다. 북극의 얼음이 녹아서 사냥을 하지 못해 삐쩍 마른 북극곰의 이미지와 함께 귀엽고 사랑스러운 북극곰을 살리기 위해서 온실가스를 줄여야 한다는 학교 환경교육과 국제환경단체의 캠페인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북극곰으로 대표되는 멸종위기종의 증가는 기후변화로 인한 생물다양성 감소라는 파국적 현실의 한 측면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북극곰이 기후변화를 상징한다는 것은 한편으론 기후변화를 기후위기로, 자신의 삶의 위기로 진지하게 마주하지 않는 태도와 쉽게 연결되기도 한다.

 

 

기후변화를 ‘삶의 위기’로 인식하기

 

지난 몇 년 사이, 지구적 기후운동의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바로 기후변화로 인한 ‘멸종위기종’에 인류를 포함시켜야 한다는 인식이다. 영국을 중심으로 활발히 조직된 기후운동 단체인 ‘멸종 저항’(Extinction Rebellion)이 대표적이다. 한국도 비슷하다. 2019년에 결성된 전국적 기후운동 연대체인 ‘기후위기 비상행동’이 기후변화가 아닌 기후위기를 내걸고, 환경운동단체들의 연대체가 아닌 노동·인권·종교·여성·환경 단체와 개인들의 연대체를 표방한 이유다. 기후변화가 단지 소중한 자연의 동식물이 사라지고 파괴되는 ‘자연 현상’에 그칠 수 없고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인류의 삶의 위기라는 자각이었다. 인권의 눈으로 기후위기를 본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전환을 의미한다.

 

기후위기로 인한 인권 침해가 무엇일지는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매년 더 강해지고 잦아지는 태풍과 폭염 그리고 한파는 ‘자연재해’라고 불리며 큰 피해를 입히고 있다. 직접적인 재해 피해뿐만 아니라, 건설 노동자, 배달 노동자, 농어민과 같이 옥외 노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일을 하지 못하고 농작물 피해를 겪으면서 생계의 위협을 겪게 된다. 생명권, 건강권, 생존권을 침해당하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기후변화가 가져올 위험으로 지목되었던 감염병은 또 어떤가. 우리가 지금 코로나19를 통해 생생히 경험하고 있듯이 생존권, 교육권의 침해는 말할 것도 없고 일상의 모든 측면에서 과거와 같이 살아가기 어려운 제약과 침해를 경험하고 있다.

 

이렇듯 기후위기로 인한 삶의 조건의 악화는 인권 수준의 전반적인 하락과 악화를 야기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를 ‘인권 침해’라고 규정하는 것은 이러한 상황이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가 아니라, 문제의 원인이 인간 스스로에게 있음이 분명하고 문제를 일으킨 이들에게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어떤 상황이나 문제를 ‘인권의 문제’로 규정할 때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책임’을 물을 수 없을 때 흔히들 ‘불운’이나 ‘운명’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2020년 3월 청소년 19명이 대한민국 정부와 국회를 상대로 낸 헌법소원과 건설 노동자, 농민, 청소년들이 국가 인권위에 낸 진정 사건은 모두 기후위기를 초래하고 제대로 대처하지 않는 정부의 책임을 묻고자 했던 것이다.

 

 

기후위기의 책임은 기업과 정부에게, 바로잡을 권리는 시민들에게

 

‘기후위기 비상행동’이 그동안 기후 침묵 사회였던 한국 사회에 기후위기의 심각성과 자각을 호소해왔다면, 올해부터는 ‘기후정의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정부도 기업도 모두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강조하고 이를 극복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제는 행동이 필요하다고 공감하는 시민들도 매우 많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온실가스 배출은 줄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모두 공감하고 동의하는 것 같지만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근대사회는 흔히 화석연료에 기초해 생산, 유통, 소비를 조직해온 사회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동안 가장 큰 책임을 소비자 ‘개인’에게 물어왔다. 우리의 생활 방식이 근본적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인권의 관점에서는 문제를 뒤집는다. 우리에게 어떤 물건을 어떻게 생산하고 누구와 나눌 것인지를 결정할 권리가 있었는가? 우리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권리는 소비할 권리뿐이었다. 그마저도 손에 돈을 쥐고 있을 때 이야기다. 바로 이런 경제체제를 ‘자본주의’라고 부른다.

 

자본 소유자들이 기업의 모든 생산 활동을 좌지우지해 왔고 정부는 이를 법 제도를 통해 뒷받침해왔다. 심각한 불평등과 함께 기후위기를 초래한 책임은 기업과 정부에게 있는 것이다. 이제 시민들이 바로 그 권리를 돌려받아야 한다. 이윤이 아닌 인간과 자연을 살리는 삶의 풍요를 생산하는 사회 시스템으로의 전환은 기후위기 대응의 책임 주체와 권리 주체를 제대로 세우는 인권에 기반한 ‘기후정의운동’을 통해서 가능하다. [가톨릭신문, 2021년 6월 13일, 정록(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기후정의’ 개념과 의미는 - 고통 초래한 당사자가 책임지고 회복 노력해야

 

 

기후위기 대응에서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기후정의’다. 이는 엄청난 양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부유한 나라들의 책임과 지구 환경의 변화로 고통받는 기후변화 취약국, 즉 가난한 나라들의 고통에 주목한다. 고통의 원인을 제공한 이들과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이들은 서로 다른 이들이다. 고통을 초래한 이들은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며 이는 윤리, 나아가 정의의 문제다.

 

기후위기의 책임을 따지는 일은 그 해법을 추구하는 일에 영향을 준다. 선진국의 탄소 배출량은 압도적이다. 1951년 이래 전체 탄소 배출량의 4분의 1을 미국이 배출했다. 사하라 사막 이남에 거주하는 저개발국 국민 10억 명이 배출하는 양은 미국 인구 평균의 20분의 1에 불과하다. 화석연료를 추출하고 사용하는 거대 기업들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전 세계 주요 탄소 배출 기업들에 대한 2017년 보고서(Carbon Majors Database)에 의하면, 1988년 이래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71%가 100대 화석연료 기업으로부터 나왔다.

 

교회 역시 기후정의에 민감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는 기후 변화에 관하여 ‘차등적 책임’이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인식해야 한다”(「찬미받으소서」 52항)며 ‘생태적 빚’의 개념을 명확하게 지적한다. 특히 교회는 환경 파괴에 대해 큰 책임이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로 인한 감당할 수 없는 피해를 입고 있는 현실을 개탄한다.

 

기후위기 대응에서 모든 개인이 자기 몫의 책임을 져야 함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말은 적지 않은 위험성을 내포한다. 실제로 결정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이들의 불의한 행태를 가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후위기 대응에서 윤리와 정의의 측면은 결코 소홀하게 다뤄질 수 없다.

 

오늘날 ‘기후정의’는 정당한 개념으로 인정된다. 2007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개최된 13차 기후변화 당사국 총회에서는 ‘기후정의 네트워크’(CJN: Climate Justice Now)가 결성됐다. 기후정의네트워크는 기후정의 운동에 동의하고 함께하는 전 세계 환경 네트워크다.

 

기후정의네트워크와 소속 단체들은 선진국이 자신들이 배출하는 온실가스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져야 하며, 고통받는 취약 국가들을 위한 기금이나 펀드를 마련할 것을 국제기구에 촉구하고 있다. 또한 기술이전 등 개도국들을 위한 선진국의 직접적인 보상도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회는 모든 이들이 생태적 회심을 통해 지구 환경의 회복을 위해 각자 노력할 것을 호소한다. 동시에 교회는 ‘차등적 책임’의 측면에 주목해 기후위기에 큰 책임이 있는 이들이 그 책임을 인식하고 기후정의 실현을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한다. [가톨릭신문, 2021년 6월 13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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