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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기도] 기도,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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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1-02 ㅣ No.1696

[조찬 세미나 01] 기도,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

(2020년 11월 17일, 명동 로얄호텔 그랜드볼룸)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인데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약 250년 역사를 가지고 있고, 자본주의의 모순 부분을 타파해보려는 다른 접근으로 칼 막스로부터 시작되었던 공산주의가 약 150년 정도 됩니다. 자본주의도 나름대로 여러 어려움과 문제가 있고, 공산주의는 그 답이 아니라는 것이 이미 밝혀졌고, 20세기 말에 영국, 스위덴에서 ‘제3의 길’과 같은 시도들도 있었지만, 자본주의의 어려움을 확실하게 개선하는 새로운 제도는 되지 못했고, 신자유주의로 인한 부의 양극화 같은 어려움을 해결해야 하는 문제 등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를 조금씩 개선하면서 가야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과 모순점들이 있지만 가톨릭신앙을 가진 우리 경제인들께서 기업과 직장에서 각자 확고한 신앙인의 자세로 사실 때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부터 조금씩 변화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주제는 ‘기도,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입니다.

 

기도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전에 여기 계신 한 분 한 분께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체험했다. 나는 하느님을 만났다.”라고 자신있게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 있다면 손을 들어보시겠습니까? 사실, 저는 하느님과의 만남, 하느님 체험이라는 부분이 신앙생활에서는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되고, 저희 사제들, 성직자에게는 무엇보다도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라서 신학교에서부터 하느님과의 체험을 깊게 해주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신앙인들도 코로나19와 같은 어려움이 있지만 하느님과 인격적으로 만난 상황이라면 외부 상황에 따라서 우리 신앙이 좌우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탈리아에 떼레시아눔이라고 영성신학으로 아주 세계적으로 명성이 있는 가르멜 대학이 있습니다. 거기에 교황청의 고해사제도 하신 유명하신 영성신학 교수 신부님께서 “우리들은 신비한 현상을 쫓을 것이 아니라 신비 자체이신 하느님을 추구해야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도 나주 율리아와 같이 이러한 식으로 뭔가 신비한, 혹은 성모님 상이 눈물을 흘렸다고 이야기하는 신비한 현상을 쫓는 사람들은 많은데, “정말 사랑의 신비, 생명의 신비, 신비 자체이신 하느님을 추구하는 삶의 자세가 신앙인의 본분이다.”라는 것을 그 영성신학자는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기도가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압니다. 그리고 기도를 열심히 합니다. 기도가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한 정의는 사람들마다 나름대로 표현을 하겠고, 아까 시작할 때 하느님을 만났다고 자신하실 수 있는 분 손들어 보시라 했을 때 아무도 손을 안 드셨지만, 다들 어떤 모습으로든 하느님을 체험하셨고, 하느님을 만나고 계시기 때문에 신앙인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기도란 이렇게 여러 학자들마다 표현이 다르겠지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하느님과의 만남이고 대화입니다. 그런데 그 대화가, “그냥 날씨 좋으냐?” “날씨 좋다.” 정도가 아니라 인격대 인격으로서의 만남이라는 측면에서 오늘의 주제인 ‘기도,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 어떻게 보면 기도의 정의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을 제목으로 삼아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영성신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의 길로 표현을 합니다. 기도와 성사입니다.

 

기도와 성사가 하느님께서 우리 편에 나누어 주시고자 하는 은총을 받는 두 길이 되는데, 아시다시피 성사(sacramentum)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 은총의 실재를 가시적으로 드러내 주는 표지’라고 정의합니다.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우리에게 드러내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성사다.’라고 이렇게 신학적으로도 이야기할 수 있고 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지상에 오늘도 드러내 보여주는 존재가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사다.’라고 신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 안에 지금도 당신의 은총을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시기 위해서 칠성사를 제정해 주셨습니다. 성사에는 신학적으로 질료와 형상이 필요합니다. 성사가 되기 위해서는, 예를 들면 성체성사라 하면 matéria(질료)로는 빵과 포도주라는 재료가 필요하고, 거기에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시켜주는 성찬기도문이 일종의 forma(형상)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칠성사에는 나름대로 materia(질료)와 forma(형상)가 필요한 것인데, 거기에 집전자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matéria와 forma가 있고 성직자가 있으면 거기에 성사가 이루어질 수 있고, 이 성사가 있는 곳, 즉 교회법적으로 합법적인 조건이 갖추어진 성사가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성사를 집전하시는 사제가 얼마나 덕이 훌륭한가 혹은 그 성사에 참여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죄가 있느냐 성덕이 있느냐와 무관하게 그 성사 안에, 그 성사 자체로 은총이 풍부하게 보장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학적으로 이미 많이 들어 보셨겠지만 사효적 효과, 사효성이라고 합니다. 성사는 matéria와 forma가 있는 곳에 성직자가 합당하게 성사를 거행하면 그 자체로 은총이 풍부하게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교회 안에 일곱 가지 성사를 제정하시고 거기에는 우리들이 언제라도 그 성사에 참여하면 그 성사 자체의 은총이 풍요하게 있는 것이고 그 성사를 통해서 우리들은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사에 참여하는 우리들이 얼마만큼 결실을 맺는가, 그 은총을 받아내는가는 우리 성사에 참여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합당한 준비와 마음자세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성사 때 하느님의 은총을 하늘에서 비가 내려오는 상황으로 비유해보면 하느님의 은총이 비처럼 막 쏟아질 때 그 비를 맞고 있는 착한 사람에게나 못된 사람에게나 똑같이 그 비는 무한이 무상으로 떨어지지만 그 은총을 내 마음이나 삶의 자세가 딱 닫혀 있어서 장독의 뚜껑 문을 열지 않으면 내가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지요. 내 마음의 뚜껑을 조금 열어 놓느냐 많이 열어 놓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 자세에 따라서 하느님 성사의 은총은 풍요롭게 혹은 덜 풍요롭게도 받아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당의 미사는 새벽미사, 저녁미사 딱 정해진 시간에만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거기에 내가 맞춰 가야 되고 신부님께서 집전을 하셔야 하는 상황인데 반해 또 다른 은총의 통로인 기도는 우리 신앙인이면 누구나,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든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통로로 남겨주신 것입니다.

 

기도는 크게 전례적인 기도와 비전례적인 기도, 공동기도와 개인기도, 통성기도와 소리 없이 하는 묵상기도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 기도 중에 묵상기도를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어떤 기도든 기도는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도 자체로 사실 우리는 은총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의 용광로로 비유를 해 보면, 기도는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대면, 하느님 앞에서의 대면, 하느님과의 만남이기 때문에 그 기도하는 순간, 그 시간 자체로 나는 이미 몸이 데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운 겨울, 꽁꽁 얼었을 때 벽난로 앞에 가 있으면, 벽난로 앞에 있는 것 자체로 열을 받아서 내가 따뜻해지고 훈훈해지고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우리는 하느님과 대면하는 것 자체로 은총을 풍성하게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라는 것은 내가 기도를 하고 나서 마음이 촉촉해지더라, 내 느낌의 좋다, 나쁘다에 따라서 기도가 잘되었다, 못되었다가 아니라, 그 대면 자체에서 이미 나는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기도 즉, 하느님과의 대면 자체로써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사랑으로 조금씩 젖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잘했다 못했다는 것은 내 느낌상으로 뭔가 촉촉해졌다 안 촉촉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기도 후의 내 행동이 사랑으로 변화되었느냐에 따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러한 것을 떠나서 기도 자체가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기 때문에 기도를 하면, 그 기도를 통해서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의 에너지를 받고 있는 시간이 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도란 ‘하느님과의 대면이다.’ ‘인격적인 만남이다.’라고 간단하게 정의를 내려보았습니다. 기도의 definition(정의)이면서 기도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17세기 가르멜의 수사님으로 부활의 로랑 수사님이 계셨습니다. <하느님의 현존 연습>(가톨릭출판사)이라는 제목으로 그분의 가르침을 정리한 책이 있습니다. 그분은 1600년대에 프랑스 가르멜 수도원에서 신부님도 아니고 평수사로 문간에서 빗자루질도 하시고 아주 겸손하고 소박하게 사셨던 수사님이십니다. 4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그분의 가르침이 내려오고 있다는 것으로 보아 굉장히 성덕이 출중하셨던 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분의 가르침 안에 자신이 볼 때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느님 현존 연습 만큼 중요한 것이 없고 자신이 설교하는 직분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디를 가나 하느님 현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을 것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분이 10대 후반, 지금으로 보면 청소년 말기쯤에 어느 순간 하느님의 깊은 현존을 느끼시면서 20대에 가르멜 수도원에 입회하셔서 하느님의 현존 안에 드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기도도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대면이기에 하느님 현존 안에 잠기는 것이다, 하느님 현존 연습이다. 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가르멜 수도자로, 수사 신부로 살다가 2013년 12월 말에 그 당시 로마 총본부 동아시아 담당 부총장으로서 총장, 부총장님들과 함께 연말회의를 하다가 갑자기 바티칸에서 연락이 와서 갔더니 “교황비밀이다. 언제까지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마라.”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이후 저녁부터 한 삼 일간을 제대로 못 잤습니다. 두려워서도 기뻐서도 아니고, 사실 수도자로 살면 교구의 역할을 맡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 삶이었는데, 제가 바란 것도 아니고 꿈꾸고 상상했던 것도 아닌 것이 하느님의 뜻으로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하느님께서 제 삶 안에 개입하셨다는 느낌을 너무나 뚜렷하게 받았습니다. 삼일 동안 하느님의 현존을 너무 생생하게 느끼며 낮에는 회의하고 일하고 밤에 기도를 마치고 잠자리에 누워도 하느님 현존 안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도란 하느님 현존 안에 대면하는 것, 하느님 현존 안에 잠기는 것, 하느님 현존 수업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제 묵상기도에 대해서 소개를 드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가르멜식의 성녀 데레사께서 가르치셨던 데레사적 묵상기도에 대해서 조금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가르멜 수도원에서는 묵상기도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다른 데에서는 ‘관상’이라는 표현도 하고 밖에서는 ‘명상’이라는 표현도 하고 혹은 묵상 기도가 아니라 그냥 ‘묵상’이라고도 하고 그 용어를 각각 달리 정의하기도 하는데, 기본적으로 가톨릭의 묵상기도와 불가, 혹은 요가식 명상하고 다른 점은 근본적으로 불가나 요가 쪽의 명상은 비워내는 것이고, 가톨릭의 묵상 기도는 비워내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비워내어서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소화데레사랑 구분하여서 대데레사라고도 표현하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께서는 16세기 스페인의 가르멜 남여수도원을 새롭게 개혁하신 분이신데, 십자가의 성요한과 더불어 이분의 가르침은 묵상기도를 굉장히 강조하셨습니다. 스스로 묵상기도를 통해서 성덕의 깊은 단계로 가신 분이시고, 묵상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성덕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묵상기도를 강조하셨는데, 데레사 성녀께서 가르쳐주시는 묵상기도를 가르멜의 묵상기도법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 안에 여러 가지 기도방법, 혹은 묵상방법이 있습니다. 그 안에 데레사적 묵상기도 방법이 있고 또 예수회의 이냐시오식 묵상기도 방법이 있습니다. 특히 이냐시오 묵상기도 방법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어서 많이 소개되고 있고 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가르멜의 데레사적 묵상기도 방법은 조금 덜 소개되어진 면도 있고 뭔가 막연하게 굉장히 고차원적인 것 같아서 우리에게는 너무 먼 것 같은 선입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데레사적 묵상방법은 굉장히 간단하면서 기도 안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데레사 성녀께서는 묵상기도를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함을 알고 그분과 단 둘이 나누는 사랑의 대화, 혹은 우정의 대화’라고 간단히 정의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부족하고 죄인이고 늘 모자란 죄인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고 계신다는,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함을 알고 그분과 단 둘이, 다른 세상의 모든 근심 · 걱정을 뒤로하고 사랑이신 하느님 그 앞에 나와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단 둘이 기도할 때 우리가 돌아갈 만남의 마지막 귀착역인 하느님과 단둘이 나누는 사랑의 대화, 우정의 대화, 이것이 데레사 성녀께서 정의하신 묵상기도입니다. 거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사랑의 대화, 우정의 대화이기 때문에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하느님 앞에 나와 있는 그대로 하느님과 만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회 창립자이신 이냐시오 성인께서 체계화 하신 이냐시오 묵상법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식별이라는 부분입니다. 간단한 이냐시오식 묵상법은 성경 텍스트를 묵상합니다. 예를 들어 겟세마니에서 예수님께서 피땀 흘리신 장면을 이냐시오 묵상법으로 묵상한다면 성경말씀을 미리 읽고 성경 장면을 그려 가며 그 안에 나를 위치시키면서 묵상을 진행해 나가는 게 이냐시오식 묵상이라고 한다면 가르멜식 묵상기도는 아주 간단하게 하느님 대면 앞에서 그때그때 내 상태에 따라서 대화를 해나가면 되기 때문에 내가 굉장히 기쁜 일이 있거나, 사업이 잘 되어서 기쁘고 고마운 경우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냥 성호를 긋고 하느님 앞에서 “감사합니다.”만 되뇌어도 훌륭한 묵상기도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슬프면 슬프고 힘든 그 마음자체로 하느님 앞에서 “제가 이렇게 힘듭니다.” 하고 눈물 뚝뚝 흘리고만 계셔도 그것이 훌륭한 묵상기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16세기 가르멜 수도원을 창립하신 성녀 데레사께서 당신이 창립하신 수녀원을 방문하셔서 할머니 수녀님과 면담을 하시며 “수녀님, 묵상기도 어떻게, 잘 하셔요? 어떻습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그 할머니 수녀님이 창립자이신 사모 데레사께(가르멜에선 원장님을 어머니라고 부름) “지는 배운 것도 별로 없고 해서 묵상기도를 잘 못해요.” 하셨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는데요?” 하고 다시 물었는데 “아는 게 없어서 그냥 주님의 기도만 바치는데, 어떨 때는 한 번도 제대로 못하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면서 하느님 앞에서 대면해서 있다 보면 어떨 때는 한 시간이 후딱 가버리고 말아요.” “주님의 기도도 한 번도 못하고 묵상기도도 잘 못해요.”라고 말씀하시더랍니다. 이 때 대데레사 성녀께서는 박수를 치면서 그 분 손을 꽉 잡으시면서 계속 그대로 하시라고, 그것이 굉장히 깊은 관상기도라고 하셨답니다.

 

그 하느님 현존 앞에 잠기면 아주 훌륭한 고차원의 묵상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녀 데레사께서는 묵상기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고즈넉이 하느님만 바라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대데레사 성녀께서는 <영혼의 성>이라는 책을 통해 우리 인간이 영혼을 마치 일곱 겹이 쌓여져있는 수정구슬 같다고 해서 ‘칠궁방’이라는 표현을 쓰시고, 일곱 번째, 가장 내밀한 영혼의 깊은 곳에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쨌든 우리 인간의 모든 영혼 가장 깊숙한 곳에는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묵상기도 때 하느님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데레사 성녀께서는 “예수님의 인성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성경말씀, 혹은 예수님의 상본이나 성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바라보려고 할 때 도움이 된다고 하십니다.

 

데레사적 묵상에 실질적 핵심은 하느님 현존 안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을 정리하면 방법론적으로 크게 성호를 긋고 묵상기도 하시기 전 1~2분간 양심성찰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매일 매일 크고 작은 죄를 짓습니다. 창세기에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동산을 거니시는 하느님 발자국 소리를 듣고는 나무 그늘로 숨어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죄인의 모습이고 죄가 빗어내는 죄의 결과입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 존재를 숨기고 하느님을 피해서 자꾸 등지게 만드는 것이 죄의 결과인데, 우리가 죄가 있는 상황에서는 빛이신 하느님, 진리이신 하느님과 대면하기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짧게나마 양심성찰을 통해서 우리의 잘못을 하느님께 고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시고자 하는 그 자비 속에 하느님의 현존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만나시게 되면 그때 정말 기쁘면 기쁜 대로 혹은 하소연 하고 싶으면 하고 싶은 대로 하느님 현존 앞에서 그날의 내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하느님과 사랑의 대화를 우정의 대화를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끝으로 마침 성호를 긋기 전에 짧게 감사드리며 한두 가지 그날의 결심을 바쳐드리는 것으로 마치시면 되는 것입니다. 사회생활 하시면서 어렵겠지만 30분만이라도 아니면 매일 10분, 15분 정도라도 매일 묵상기도를 해보시면 굉장히 도움이 되겠습니다.

 

처음엔 내 느낌상으로 현존 앞에 푹 잠기는 느낌까지 안 드시더라도 자꾸 묵상기도를 해보시면 아까 처음에 비유를 한 것처럼 벽난로 앞에 우리가 서는 것 자체로 벽난로의 열기를 받게 되는 것처럼 묵상기도를 하시는 만큼 하느님 현존 안에 깊이 잠기게 되고 하느님 현존 앞에 서게 되면 그 자체가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내가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용서하라는 계명을 알지만 계명만으로 갑자기 용서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웃을 용서하려는 마음이 되려면 내가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무상으로 용서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자연스럽게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묵상기도를 조금씩 맛들이고 하시다 보면 나도 모르게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차츰 느끼게 되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차츰 차츰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되어 이웃을 자연스럽게 더 용서하게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만 메마름과 분심만 짧게 설명하겠습니다.

 

기도를 하다보면 메마름이 올 수가 있습니다. 묵주기도와 달리 묵상기도는 사실 마음이 메마르면 집중이 잘 안됩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의 메마름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내적인 과정을 거쳐 나가는 좋은 의미의 메마름이 있을 수 있고, 또 하나 내 마음이 하느님께로 향하지 않고 세상적인 것에 내 관심이 붙들려 있기 때문에 오는 해로운 메마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메말라 기도해도 무미건조하고 무언가 기도했다는 촉촉한 기쁨이나 평화 같은 것이 잘 안 느껴지는 것 같지만 기도 후 계속 하느님을 찾고자하는 그러한 마음이 있다면 그 메마름은 좋은 메마름입니다. 좋은 메마름은 내가 정화를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면서 거쳐 가는 메마름입니다. 그게 아니고 세상적인 것에 메어 하느님과의 기도나 미사와 같이 신앙과 관련된 것들은 얼른 뚝딱 해치우고 빨리 다른 것, TV도 봐야겠고 술도 한 잔 마셔야겠다고 하면 그것은 해로운 메마름인 것이지요. 자신의 메마름이 어떤 메마름인지 스스로 짚어 보실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짧게 기도하다 생길 수 있는 분심에 대해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도 수도원에 있을 때 묵상기도가 한 시간씩 아침저녁으로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여기에 묵상기도 한다고 6시부터 7시까지 묵상기도를 했는데, 6시가 되어서 묵상기도를 하고 삼종기도를 하고나서는 자리에 앉아서 조용해지면 ‘아차, 옥상에 빨래 널었는데 안 걷었네’ 하는 그런 생각이 그때 막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묵상기도 때에 분심이 드는 것은 이렇게 표현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 물이 있고 그 안에 진흙이 있는데, 여기 흙탕물이 있다면 유리그릇이 계속 출렁대면 부유물이 붕 떠서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지요. 말하자면 우리가 지금 집중하지 않고 생활로 바고 분주할 때는 마음이 출렁출렁 대어서 부유물이 붕 떠 있어서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안 보이는 상황이라고 표현을 할 수 있습니다. 묵상기도를 한다고 성호 긋고 가만히 있으면 출렁 출렁대던 부유물이 든 흙탕물을 유리잔이 가만히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면 부유물들이 가라앉게 되고 그제야 뒤에 있는 무언가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아, 내가 지금 기도하려고 가만히 있어서 이제 부유물들이 조금 가라앉고 있다는 이야기구나.’ 이렇게 우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 분심들을 가지고 막 씨름하고 그 분심을 없애려고 혹은 그 분심을 이겨내려고 분심과 씨름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려고 앉아있는데 여러 가지 잡다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어떨 때는 해괴망측한 혹은 세상적인 욕심이나 결재해야 될 그러한 것이 떠오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는 지나가는 바람처럼 두어라, 그리고 분심 중에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로 향하고자 하는 내 마음만 간절하게 하느님을 향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분심하고 싸우지 말고 분심은 지나가는 바람처럼 두고 내 마음의 의지만 하느님을 찾는 마음만 놓치지 말고 하느님을 향하려고 노력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바람이 불 때 큰 아름드리나무가 서 있는데 바람이 불면 나무도 가지도 부르르 떨면서 막 소리도 내고 하는 것은 분심 중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서 있는 나무의 방향이, 바람이 지나간 후에도 여전히 하늘을 향해 굳건히 서 있는 것처럼, 분심이 들 때 분심하고 굳이 싸우려고 그래서 분심을 이겨내려고 싸우고 씨름하다보면, 기도하는 시간 내내 분심만 붙들고 있지,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그러지 마시고 분심은 그냥 지나가는 바람처럼 두고 내 마음의 의지만, 방향만 ‘하느님 지금 저는 분심 중에 괴롭고 집중이 안 됩니다만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하고 싶습니다.’ 하는 우리의 그 마음만 지향점을 하느님을 향하는 그 마음만 간직하면 그 자체도 훌륭한 기도가 되겠습니다.

 

오늘 저는 기도,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라는 주제로 특별히 가르멜의 데레사적 묵상기도 방법을 소개해드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하느님 현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하느님 현존을 떠올리는 방법은 사실, 하느님 현존 방식은 표현에 따라서 크게 두 가지 내지 세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하나는 무소부재의 하느님 현존방식, 아니 계신 곳 없이 곳곳에 계십니다. 하늘에 올라가서도 시편에서도 이야기 하듯이, 지옥에 내려가도 하느님이 거기 계시더라. 지금 이 순간에도 아니 계신 곳 없이 곳곳에 계시는 하느님 현존방식이 하나 있고, 또 하나는 국부적 현존방식이라고 해서 성체, 성당 감실 안에 성체의 모습으로 국부적으로 하느님께서는 거기에 현존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 하나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인격적 현존, 우리 모든 인간의 그 영혼 가장 깊숙한 곳에는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십니다. 현존하고 계신 그 하느님을 대면하는 것이 묵상기도이고 대면할 때 예수님을 바라보라, 예수님의 인성을 떠올려라, 이러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세상의 근심걱정을 비우고 예수 그리스도 인성을 취하여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마음으로 하느님 현존에 우리 마음을 모으며, 그 하느님 현존 앞에서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마지막으로 감사와 좋은 결심 한 두 가지로 마무리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30분, 30분이라도 어렵다면 매일 10분 만이라도 이 묵상기도를 꾸준하게 하신다면 벽난로 앞에 서는 것 자체로 차츰 우리 몸이 따뜻해지듯이 이 묵상기도를 매일 조금씩이라도 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 사랑으로 촉촉해질 수 있겠다고 말씀드립니다. 영광송으로 마치겠습니다.

 

[평화가 넘치는 샘물(전국가톨릭경제인협의회 발행), 2021년 가을호(Vol. 31), 정순택 주교(서울대교구 보좌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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