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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최양업 신부에 대한 연구현황과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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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1-10 ㅣ No.1464

최양업 신부에 대한 연구현황과 과제*

 

 

국문초록

 

한국 천주교회는 2021년에 한국인으로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를 맞이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에 대한 연구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모색이 요구된다. 우리가 신앙의 조상들을 제대로 공경하고 현양하기 위해서는 그분들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최양업 신부에 대한 연구의 역사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볼 수가 있다. 1996~1997년에 청주교구의 배티 성지에서 모두 4권으로 된 최양업 신부에 대한 자료집들을 간행함으로써 중요한 분기점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료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은 이전까지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평가되는 최양업 신부에 대한 연구를 새로운 단계로 들어가게 해주었다.

 

최양업 신부에 대한 연구에서 지금까지 크게 주목된 주제들은 가문, 유학, 사목 지역, 교회사 연구, 교리교육, 대외인식, 그리고 선종 장소에 대한 내용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주제에 대해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어야 부분들이 많으며, 여러 논쟁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분석이 앞으로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서 확인되는 사실은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에서 최양업 신부를 비롯해서 개별 인물을 연구하는 방법론에 대한 새로운 모색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다루어지는 인물들이 조금은 더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도록 서술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는 보다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더욱 많은 질문들이 제기되어야 하며, 그러한 질문들을 바탕으로 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해석이 새롭게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한국 천주교회사연구가 시대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삶과 신앙을 살아갔던 사람들의 살아있는 역사로 채워질 수 있을 것이다.

 

 

Ⅰ. 머리말

 

한국 천주교회는 2021년에 한국인으로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와,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특히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희년을 보내고 있다. 이러한 기억과 기념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현양과 연구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모색이 요구된다. 사실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의 발전을 위해서 개별 주제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가 보다 적극적으로 진행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이때 20여 년 전에 성 김대건 신부의 순교 150년을 맞이하여 이러한 현양과 연구의 역사에 대해서 언급한 최석우 신부의 말을 되새기게 만든다. 김대건 신부의 역사연구가 영웅주의적 역사 서술 방법으로 기울지 않았나를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김대건 신부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와 현양의 역사는 그런대로 발전을 해왔다고 본다. 다만 연구와 현양이 병행되었더라면 두 분야가 좀 더 발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연구와 현양은 상관관계에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서로가 서로를 뒷받침할 때 모두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뜻이다. 일례로 위에서 언급한 사적지의 고증 문제를 들 수 있다. 문제가 생긴 것은 이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가 선행되지 못한 때문이고, 학문적인 연구가 선행되지 못한 것은 현양 사업으로부터 뒷받침을 받지 못한 때문이다.”1)

 

이러한 내용은 최양업 신부의 연구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오늘의 교회사연구를 돌아보게 하는 이러한 지적은 우리가 신앙의 조상들을 제대로 공경하고 현양하려면 그분들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학문적인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들에 대해서 올바르게 알려면 그 분들에 대한 연구가 그만큼 폭넓고 깊이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경과 현양의 정도만큼 연구는 다양하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2) 두 분에 대한 제대로 된 단독 연구서 하나가 없는 상황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최양업 신부에 대한 연구의 역사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볼 수가 있다.3) 서울대교구의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1984년에 최양업 신부의 서한집을 만든 적이 있었지만, 1996~1997년에 청주교구의 배티성지에서 모두 4권으로 된 ‘최양업 신부의 전기 자료집’을 간행함으로써 중요한 분기점을 맞게 되었다.4) 이제 연구자들이 마음껏 활용할 수 있는 훌륭한 기본자료들을 통해서 최양업 신부에 대한 연구의 새로운 출발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교회사연구에서 사료에 대한 깊은 관심은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지나치지 않는다는 점에서이다. 그 결과 이전까지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평가되는 최양업 신부에 대한 연구를 극복하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이다.

 

이후 1999년에 들어와서 사제 서품 150주년을 기념하여 배티성지와 한국교회사연구소와 가톨릭대학교가 공동으로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영성에 관련된 연구발표회를 개최하면서 최양업 신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기에 이르렀다. 차기진과 관련되는 양업교회사연구소가 그 연구를 주도하였다고 하겠다. 그러한 흐름은 수원교회사연구소의 깊은 관심으로도 이어져 나갔다. 따라서 최양업 신부의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열리는 오늘의 학술발표회는 비록 조그맣지만, 최양업 신부에 대한 연구의 역사에서 3번째의 새로운 시기를 열어주는 의미 있는 계기로 이해된다. 이러한 작업은 동료 사제였던 김대건 신부에 대한 연구에도 유기적으로 연결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를 발판으로 앞으로 최양업 신부와 관련한 보다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더욱 미시적인 접근이 풍부하게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본다.

 

이 글에서는 최양업 신부에 대한 연구의 역사에서 두 번째 시기에 해당되는 내용들을 다루어보고자 한다. 그러나 다급하게 이루어진 준비 때문에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최양업 신부에 대한 모든 연구와 많은 내용을 다룰 수 없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최양업 신부와 관련된 자료의 문제나, 영성에 대해서는 다른 발표에서 다루어지고 있어 여기서는 제외시켰다. 그 결과 이 글에서는 최양업 신부에 대한 연구에서 주목되어야 할 주제라든가, 쟁점 등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정리해보고자 한다.

 

 

Ⅱ. 가문

 

최양업 신부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는 최양업 신부의 가문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늦게 이루어졌다. 이성례의 순교 여부가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셋째로 그의 신앙은 그 집안이 신앙과 더불어 성가정의 모범으로 추앙될 수도 있을 것이며, 이러한 점에서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모친 이성례 마리아 순교자의 신앙도 앞으로 새롭게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중략) 특히 1839년 12월 27일 이래 순교한 최양업 신부의 모친 이성례 같은 경우에는, 모성애 때문에 배교했으나 후에 모성애를 극복하고 배교를 취소한 뒤에 용감하게 순교에 응하였다. 그런데 다블뤼 주교는 이를 혁혁한 행위로 보지 않았으니, 모성애를 극복한 것이 어찌 고문을 이겨낸 경우보다 덜 혁혁한 상황이라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최양업 신부의 서한이나 순교자들의 행적, 다블뤼 주교의 또 다른 자료들을 토대로 검증되어야 할 것이다.”5)

 

최양업 신부의 가문이 가지는 신앙의 특성으로 성가정의 모범이 된다는 사실과 함께 이성례의 순교에 대한 재검토를 계속해서 언급하였다. 그러한 노력 속에서 이성례의 순교가 마침내 복자가 됨으로써 인정받았으며, 그와 함께 수원교회사연구소에 의해서 최경환 성인과 이성례 복자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나타났다.

 

아버지인 최경환 성인에 대해서는 필자의 검토가 있다.6) 여기에서는 최양업 신부 가문의 신분에 대한 문제를 주목하였다. 일반적으로 양반 신분의 집안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때 이러한 양반 신분의 최양업 신부가 왜 그토록 신랄하게 조선의 양반제도를 비판하였는가의 질문이 제기된다. 페레올 주교가 양반 출신의 복사를 채용한 뒤 매사를 그들과 의논함으로써 일반 신자들로부터 원망을 듣게 되자, 최양업 신부는 주교에게 여러 차례 양반 복사들을 내보내도록 건의하였다가 꾸중을 들었을 정도였던 것이다. 최양업 신부가 한 번도 그의 양반 신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드러내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가 있다.

 

최양업 신부가 조선의 양반제도를 비판한 것은 무엇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에 의하면 천주교의 가르침이란 차별이나 배제가 아니라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1801년 최양업 신부가 살았던 청양을 비롯하여 내포지역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전해주는 『노상추일기』의 내용을 통해서도 쉽게 확인된다. 노상추는 당시에 천주교만큼 평등을 강조하는 종교가 없었다고 하면서, 천주교 신자들이 믿음을 법으로 삼고서 살아간다고 서술하였다.

 

최양업 신부의 이러한 정신은 가문의 전통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최양업 신부가 할아버지인 최인주의 삶과 신앙에 크게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집안의 종들에게 자기들을 영감님이나 마나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명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최인주가 천주 앞에서 모두가 한 형제임을 인식하고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그는 천주교라는 신앙의 실천을 위해서 평등사상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최인주가 보여준 또 다른 움직임은 자신의 신분을 상징하는 족보를 없앴다는 사실이다. 「최 바시리오 이력서」에 의하면 최인주는 서울을 떠나 낙향하면서 자기의 집안에서 중요시하였던 문적(文籍)을 없애버렸다고 한다. 이런 것이 자손의 교만을 낳게 한다고 말한 점에서 족보로 여겨진다. 그가 남긴 세 가지 유언의 하나로, 남의 앞에 근본을 자랑하지 말라는 점을 당부한 점에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양반 신분임을 드러내거나 내세우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조선사회에서 신분을 알려주는 족보를 없앴다는 것은 이제 그가 양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양반임을 포기하는 것으로 선언한 것으로 이해된다고 하겠다.

 

이는 최인주의 자녀들의 혼인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그는 교우와의 혼인을 중요시하였을 뿐 양반인지 아닌지를 중요시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최경환으로 하여금 양반 신분의 사람이 아닌 이존창 가문의 사람과 혼인을 하게 하였다. 잘 알려지고 있듯이 이존창은 사천(私賤)출신의 양인 농민이었다. 결국 이것은 최인주의 신분관을 말해주는 것으로 그가 사람들의 평등을 강조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이러한 그의 정신은 최경환 성인을 거쳐서 최양업 신부에게 이어졌으며, 양반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났다고 하겠다.

 

한편 최양업 신부의 신분관이 김대건 신부의 그것과 다르다는 견해가 나와 있어서,7) 이에 대한 검토가 또한 필요하다. 김대건 신부가 양반 신분임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그가 페레올 주교와 같이 행동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는 양반이 아니라 양인 신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8) 그러한 견해를 따르기는 어려울 듯하다. 오히려 서로 같은 신분관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는 신학교에서 생활하면서 조선의 사회적 모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즉 김대건 신부의 신분관은 최양업 신부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그와 마찬가지로 비판적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평민 출신의 김대건 신부나, 양반 출신이었지만 평민출신과 같이 자신의 신분을 낮추었던 최양업 신부와의 만남이 가지는 의미는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어머니 이성례 복자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다루어졌다.9) 이성례의 집안에 대해서 우선 검토되었다. 이성례가 이존창의 여성 형제 쪽의 딸이며, 경주이씨가 아니라, 전주이씨였다고 언급하였다. 성이 이씨로 표기되어 같은 집안이라고 이해해 왔으나, 이존창과 이성례는 외가 쪽의 연결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비교적 낮은 신분의 이존창을 고려할 때 언제 어떻게 본관을 가졌으며, 전주이씨와 경주이씨의 구별이 가능한가, 또한 그러한가에 대해서는 더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성례 복자가 당대의 시복대상에서 빠지게 된 이유를 계속해서 다루었다. 다블뤼 신부가 동료 신부의 어머니에 대한 순교 문제여서 더욱 고려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엄격하게 순교기록을 찾고 기록했던 그가 이성례의 순교를 분명히 인정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다블뤼 신부가 이성례의 순교 인정을 보류한 것은 교리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였을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당시 활동하고 있는 신부의 어머니의 배교이기에 사회에 미치는 파장을 더 크게 생각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배교란 회두하면 용서되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그것이 미치는 사회적 영향 때문이라는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듯싶다.

 

최양업 신부의 부모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최양업 신부의 형제들과 후손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그들이 남긴 증언록이나, 이주나 신앙 등에 대해서 보다 자세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최양업 신부의 사촌 형인 최지혁에 대한 최근의 연구가 잘 말해주고 있다.10) 이때 최양업 가문의 천주교 신앙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가 비로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Ⅲ. 유학

 

최양업 신부는 1836년 초에 최방제나 김대건 보다 먼저 첫 번째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이때 일어나는 첫 번째 문제는 누가 최양업 신부를 신학생으로 선발하였는가이다. 이에 이전까지 모방 신부로 알려진 사실을 새롭게 검토하게 되었다.11) 1836년 1월에 조선에 입국하였던 모방 신부가 한 달 만에 교우들의 실정을 파악하고 신학생을 선발할 상황은 아니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모방 신부의 서한을 통해서 최양업과 최방제를 신학생으로 선발 추천한 이들이 신자들이었음을 밝혀주었다. 이와 함께 유방제 신부를 주목하였다. 최양업 신부도 유방제 신부가 일단 신학생으로 선정해 놓았던 것을 지도층 신자들, 즉 모방 신부와 함께 서울의 후동에 거주하던 정하상과 남이권 등이 추천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이들의 동료인 김대건은 모방 신부에 의해 그해 7월에 신학생으로 직접 선발되었다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모방 신부가 최양업 신부를 선발했다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구체적인 검토를 통해서 최양업 신부를 비롯하여 신학생이 되는 과정을 보다 자세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와 같이 당시의 지도층 신자들이나, 유방제 신부에 의해서 추천 혹은 선정되었다고 하더라도, 최양업 신부가 모방 신부와 함께 한 달 이상 함께 있었다는 사실과, 최종적인 선발 권한을 가지고 있었을 모방 신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여전히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일어나는 문제는 어디에서 최양업 신부가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는가의 문제였다.12) 그동안 일반적으로 언급되었던 경기도 과천의 수리산 성지인가 하는 것이었다. 최경환 성인이 1836년 이전에 수리산으로 이주하여 교우촌을 형성하였고, 여기에서 최양업 신부가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최양업 가문의 이동 시기에 대한 자세한 검토를 통해서 그것이 아니라, 경기도 부평지역임이 새롭게 밝혀지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1836년 초에는 수리산 성지에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선 청양에서 서울로 온 것은 늦어도 1824년에서 1827년 사이가 될 것이며, 다시 박해를 피해 서울을 떠난 것은 1827년에서 1830년 사이가 될 것이라고 정리하였다. 그런 다음 최양업 신부의 첫째 동생인 최의정의 연령을 바탕으로 12살 때인 1838년경에 수리산으로 이주하였다고 파악하였다. 따라서 최양업 신부는 1836년 초에 부평에서 신학생으로 선발되었으며, 그의 가족은 최양업 신부가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뒤인 1838년에야 수리산으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청양에서 서울의 낙동, 강원도의 금성, 부평을 거쳐, 수리산으로 이르기까지의 최양업 신부의 가문에 대한 행로에 대한 정밀한 추적이 더욱 필요함을 알려준다.

 

최양업 신부가 신학생으로 선발된 이후 12월 3일에 마카오로 출발하게 된다. 이에 1836년 12월 3일부터 6개월 동안 이어진 서울에서 중국 마카오까지의 여정이 다루어졌다.13) 이는 조선 최초로 서양식 교육을 받기 위해 마카오까지 가야만 했던 조선 신학생들의 유학로라는 의미와 함께, 첫걸음을 뗀 천주교 사제 양성사의 한 과정을 규명한다는 교회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동안 막연하게 설명되어 왔지만, 비록 어렵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최양업과 동료 신학생들의 유학로는 ‘변문-심양-마가자-서만자-장치’임이 분명하다고 설명한다. 그들 일행에게 휴식처이며 연락처가 될 수 있었던 장치를 포함시킨다면 이 거리는 대략 1,690km 정도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산서성의 장치에서 최종 목적지인 마카오까지의 여정은 추후의 과제로 남겨 두었다. 대륙을 종단하는 육로를 택했다는 것 이외에는 추정할 만한 자료를 발견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꾸준한 현지 답사와 함께, 중국 천주교회사에 대한 보다 폭넓은 관심을 촉구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접근이라고 할 수가 있다.

 

최양업 신부가 마카오의 신학교에서 배운 교육과 스승 신부들로부터의 영향에 대해서도 현재 간단한 설명이 나와 있다.14) 어떠한 과목을 어떤 신부에게서 배웠는가에 대해서도 대략적으로 밝혀져 있는 것이다. 르그레즈와 신부라든가, 메스트르 신부나 리브와 신부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이에 대해서 신학, 철학, 라틴어, 성가, 교리 등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신학 분야를 고려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와 있어 참고가 된다.15)

 

최양업 신부의 신앙에 영향을 준 파리외방전교회의 신학 사상에 대해서도 짧게 서술되고 있을 뿐이다.16) 그가 프랑스 선교사들의 신심과 선교 열정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면서, 이를 주어진 상황 아래에서 최선을 다한 주지주의(主知主義)로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금욕주의적인 혹은 엄격주의적 신심도 함께 지적되기도 한다.17) 특히 파리외방전교회의 설립목적에 주목하여 교도권을 거부하는 얀세니즘을 극복하려고 한 측면도 검토되었다. 즉 교도권에 대한 절대적인 순명과, 아주 엄격하지도 않고, 방임적이지도 않은 중도, 그리고 화합하는 영성과 신학적인 이론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최양업 서한에 깔려 있는 바탕이 온유함 그 자체였다고 강조하였다.

 

사실 최양업 신부는 중국에서 신학생을 지도한다든지, 조선의 신학교에서도 지도를 맡았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든지에서 그의 신학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최양업 신부의 신학공부와 관련해서 예수회의 서가회 신학원에서 신학공부를 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가 존경하는 성인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였다는 점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이외의 예수회를 비롯한 다른 수도회의 영향도 함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가 필리핀에서 잠시 머물렀던 도미니코 수도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파리외방전교회의 역사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자들의 관심을 촉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 최양업 신부가 배우고 만나고 배웠던 개별 프랑스 선교사들에 대해서도 보다 깊은 관심이 있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 천주교회사에 대한, 더 나아가 세계 신학사의 이해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함을 말한다.18)

 

 

Ⅳ. 사목지역

 

최양업 신부의 사목활동은 크게 두 지역으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가 있다. 중국과 조선으로 나누어진다. 이에 대해서는 『최양업 신부의 사목 지역과 선종지 연구』(2007)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졌다.

 

1. 중국에서의 사목

 

최양업 신부의 활동 가운데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가 중국에서 첫 사목을 시작하였다는 사실일 것이다. 때문에 최양업 신부의 중국 사목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가 크게 강조되었다.19) 그의 중국 사목은 서품 직후 상해를 떠나 요동에 도착한 이후에 시작되었다. 1849년 5월부터 귀국하기 이전인 12월까지의 7개월 동안의 일이었다. 베르뇌 신부의 정식 보좌신부로서 그가 사목한 지역은 요동반도 남단에 위치한 차쿠 성당이었다고 한다.20) 최양업 신부와 김대건 신부가 신학생이던 1842년 말에 유숙했던 백가점 교우촌과 같은 마을이라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병자성사를 집전하며, 주일과 축일의 강론을 맡고 어린이 교리와 고해성사를 담당하였던 것이다. 이에 그는 중국 땅에서 중국 신자들에게 최초로 공식적인 사목을 담당한 한국인 사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21세기 한국천주교회가 중시해야 할 북방선교와 관련하여 좋은 모범이 될 수 있다고 언급된다.21)

 

2. 조선에서의 사목

 

최양업 신부는 1849년 12월 말에 변문을 통해서 육로로 귀국하게 된다. 그 이전까지 그는 조선으로의 입국을 위해서 해로와 육로를 통한 입국이 함께 모색되었지만, 결국 육로로 들어오게 된다. 현재 그가 시도했던 여러 입국로에 대해서는 그 경과를 중심으로 다루어지고 있다.22)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보다 본격적인 검토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김대건 신부 당시에 개척된 해로 입국의 문제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김대건 신부처럼 왜 다시 훈춘을 거쳐서 함경도 경원에까지 육로로 가려고 했는지, 그리고 마카오나 중국에 머물렀던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로에 대한 선택이 시기별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등에 대해서 더욱더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아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23)

 

조선에 귀국한 이후 최양업 신부의 활동은 사목 순방에서 시작되어 사목 순방으로 끝났다고 언급될 정도이다.24) 거의 대부분의 시기 5개 도에 걸칠 정도로 그의 사목 순방지역은 매우 넓고 많았다. 조금은 변동이 있었지만, 선종하기까지 프랑스 선교사들이 방문할 수 없는 지역이나, 멀리 떨어진 지방들에 대한 사목순방은 여전히 그의 몫이었다. 때문에 그가 담당한 교우촌이나, 신자수가 매우 많았던 것이다. 신자의 숫자는 1850년에는 34.7%, 1851년에는 52.1%, 1857년에는 26.8%를 차지하고 있다. 1851년에 그의 담당구역 안에 산재해 있던 교우촌은 127개 정도였다. 이후 1858년에 이르기까지 계속 늘어났다고 한다.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 나타나는 교우촌의 이름은 극히 제한되어 있는데, 작성지나 발신지와 함께 이들 지역의 위치 비정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도앙골 절골, 동골, 소리웃, 불무골, 오두재, 죽림 등의 위치가 어디이냐는 것이었다. 약간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정리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 들어와서 기존의 견해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를 요구하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기는 하다.25) 그러나 새로운 견해는 그대로 따르기 어려울 것 같다. 거의 모든 지역이 경상북도에만 비정되고 있다는 점에서 최양업 신부가 사목한 지역이 광범위하다는 사실과 이를 연결시킬 때 서로 어긋나는 설명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또한 논란이 되는 것은 사목 중심지의 문제이다.26) 지역 본당의 중심지라는 개념으로 이를 설명하고 있다. 박해기의 본당은 한 두 개의 도 혹은 몇 개의 군을 사목 관할 지역으로 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지역 본당이었다는 것이다. 이때 서한 작성지나 발신지를 사목 중심지로 파악하고 있다. 최양업 신부의 경우 조선으로 귀국한 뒤 첫 번째의 사목 중심지로 삼았던 곳은 진천의 동골이며, 두 번째의 사목 중심지는 배티 교우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편지의 작성지나 발신지를 곧바로 사목 중심지로 설정할 수 있을지는 역시 의문이다. 물론 교우촌을 벗어난 익명성이 보장된 휴식처일 수도 있다는 주장27) 또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때문에 어떤 조건이 충족되거나, 어떻게 하면 사목 중심지가 되는 것인지 등에 대한 물음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 첫 번째 지역에서 최양업 신부가 과연 2년 동안 동생 가족들과 함께 거주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상당히 넓은 지역을 사목 방문하였으며, 서한에서 볼 수 있듯이 1850년에는 7월 한 달 동안만 같은 집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그러한 장기거주가 어떻게 가능하였는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더욱이 프랑스 선교사들의 사목 중심지와 관할 구역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에 대해서 보다 자세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배티 교우촌의 경우 다블뤼 신부나, 프티니콜라 신부 그리고 페롱 신부 등의 선교사들과 함께 공동으로 사목중심지로 삼았다는 설명 역시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둘 때 어쩌면 최양업 신부의 경우 분명한 사목 중심지라든가, 관할 구역이 구체적으로 설정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까지를 가지게 된다. 때문에 사목 중심지이란 용어에 대해서는 더욱 자세한 새로운 설명이 요구된다고 하겠다.28) 그것은 사목과 관련된 다른 여러 용어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29)

 

한편 경상도 지역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견해와 마찬가지로 최양업 신부의 사목중심지를 진천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설명 역시 특정한 지역에 한정시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에 대해서도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이것은 배티 신학교의 문제와 맞물린다.30) 배론 신학교가 한국교회 최초의 신학교로 평가된 온 기존의 견해와 달리 배티 신학교를 크게 주목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블뤼 신부가 1850년 9월 이전에 배티에 동계신학교 교사를 마련하고, 10월부터 머물다가 1851년 11월부터는 신학교만을 전담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1853년 여름에 들어오면 그를 대신해서 최양업 신부가 조선 대목구의 신학교 지도신부로 부임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 그의 다른 사목방문 등이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은 없다.

 

이에 대한 반론도 역시 찾아진다.31) 1851년 5월 이전에 배티로 신학교를 옮겼지만, 그것은 임시 신학교로서 1854년에 페낭 신학교로 떠난 신학생의 유학을 준비하는 기능을 담당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페레올 주교가 병이 나고, 이어 다블뤼 신부에게 사목구역이 새로 배정된 1852년 중반 이후부터는 신학교로서의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 시기에 들어오면 다블뤼 신부가 신학생 교육이 아니라 다른 사목활동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배티의 신학생들은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지는 등 조금은 방치된 상태에 있다가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그 사람이 최양업 신부라고 확정짓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이후 1855년 1월에 들어오면 메스트로 신부에 의해 배론에 최초의 신학교가 설립되었다고 이해한다. 이러한 해석을 모두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배티 교우촌을 최양업 신부의 사목중심지라고 하는 견해에서는 또 다른 설명이 필요한 것임은 분명하다.

 

이러한 점과 관련해서 최양업 신부의 사목 순방로를 설정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32) 현재 논란이 되는 그의 사목지역은 그가 방문했던 많은 교우촌 가운데 일부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것을 밝히는 작업이 쉽지는 않겠지만, 당시의 교우촌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조사를 통해서 그의 사목 순방코스를 대략적으로 검토해가는 방법이 요구된다. 이러한 점에서 당시 각 지역에서의 교우촌을 파악해보려는 꾸준한 노력이 더욱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33) 이를 통해서 특히 시기별로 개별 성직자의 사목 순방지역을 구분하고 변화를 찾아보는 시도를 해 볼 수 있을 것이며, 최양업 신부의 사목활동이 보여주는 양상이나 내용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34)

 

 

Ⅴ. 교회사연구

 

최양업 신부의 활동 가운데에서 잊을 수 없는 것은 그가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해서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그는 부제일 때 1847년 초에 페레올 주교가 보내준 프랑스어본 『기해·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그 일부를 제외하고 라틴어로 직접 번역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최양업 신부의 교회사연구에 대해서는 그의 라틴어 번역과 관련해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에 파리외방전교회의 고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는 라틴어 수정본을 바탕으로 판독하였으며, 그리고 다시 한글로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 신자들이나 연구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을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이다.35) 여기에서 서지학적 분석도 함께 이루어졌다. 이른바 ‘행적’의 제목을 페레올 주교가 아니라, 당시 부제였던 최양업 신부가 붙였다는 것이다. 즉 페레올올 주교가 두 차례에 걸쳐서 기해 · 병오박해의 순교자료를 정리하여 홍콩으로 보냈는데, 최양업 신부가 이 둘을 합쳐서 번역하였던 것이다.

 

또한 라틴어 번역작업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도 주목하였다. 1847년 교황청 예부성에 라틴어로 번역된 ‘행적’이 접수된 뒤 시복절차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1857년에 전원이 가경자로 선포되었으며, 훗날 3명만이 시복에서 누락되었을 정도였다. 즉 조선에서의 순교자들에 대한 첫 번째 시복과정에서 최양업 신부의 라틴어 번역본이 중심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36) 이것은 한국에서의 순교자들 가운데에서 기적과 함께 성인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랐던 그의 염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다.

 

최근에 들어와서도 페레올 주교가 정리한 자료에 대한 분석이 계속해서 이루어졌다.37) 우선 최양업의 라틴어 번역본이 이탈리어로 다시 번역한 사실이 드러났다.38) 이와 함께 페레올의 두 자료와 그 자료에 대한 최양업 신부의 번역본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함께 지적하였다. 기존에도 지적되었지만, 몇 가지 부분에서 더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권득인의 체포시점에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순교했을 당시의 나이 표기에도 차이가 있는 순교자가 찾아진다고 한다. 김대건 신부와 관련된 부분에서도 최양업이 다 옮기지 않고 다소 요약한 흔적이 드러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럼에도 최양업 신부가 전반적으로 충실하게 전달해주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귀국한 이후에도 최양업 신부의 교회사연구에 대한 관심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러한 내용들에 대해서 필자는 최양업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연구를 초기 천주교회사에서 한국인 신자에 의한 교회사연구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고자 하였다.39) 『백서』를 쓴 황사영이나, 『기해일기』를 저술한 현석문과 같은 평신도의 교회사연구가 있었으며,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쓴 김대건 신부와 같이 한국인 사제에 의한 교회사연구라는 두 흐름이 있었다고 정리하였다. 이때 최양업 신부는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관심을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제 한국인 사제들에 의한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을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앵베르 주교나 페레올 주교와 같은 프랑스 선교사들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관심과도 다른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초기 한국천주교회의 순교사에 대한 정리와 관련된 최양업 신부의 활동 역시 새롭게 주목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한편 최양업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 이해는 특히 자기 가문의 순교사에 대한 정리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기해박해 때 순교한 부모인 최경환과 이성례에 대한 전기를 새롭게 저술하였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기해박해의 순교자로서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인물로서, 그의 먼 친척인 최해성에 대한 전기를 전해주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해서이다. 이는 초기 한국천주교회가 보여주었던 순교자들의 전기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이제 최양업 신부에 의해서 보다 체계화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이 최양업 신부가 시도한 가문의 순교사 정리는 그의 후손들에게도 이어지는 측면을 지니고 있음도 지적하였다.

 

최양업 신부가 자신과 당시의 신자들이 고민하였던 배교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점을 주목하였다. 이때 최양업 신부는 어머니와 동생처럼 자신의 가문에서 일어난 배교의 문제를 직접 다루었던 것이다. 그는 천주교 신자가 한때 배교하였더라도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 사람이 최종적으로 그것을 철회하고 형장에서 신앙을 바탕으로 죽음을 맞이한다면 역시 순교로 파악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여주었다. 최양업 신부가 열 다섯 번째 편지에서 관심을 두었던 사천성 시노드 역시 이러한 점과 관련해서 이해하였다. 당시 사천성 시노드에서는 배교자에 대한 사목이 중요한 주제였기 때문이다.40)

 

그러나 조선에 돌아온 이후 한국천주교회사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최양업 신부의 작업은 다블뤼 주교의 서술에서 보이듯이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하여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페레올 주교나 다블뤼 주교의 순교사 연구에 대한 체계적인 검토가 진행될 때 그 이유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자료수집을 꾸준히 해오던 최양업 신부의 노력이 베르뇌 주교의 지시에 따라 1856년부터 다블뤼 주교가 이러한 작업을 담당함으로써 중단된 배경에 대한 이해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하겠다. 이때 최양업 신부가 노력한 한국천주교회사 자료들이 다블뤼 주교에 어떻게, 어느 정도로 반영되었는가도 밝혀질 것이다.

 

 

Ⅵ. 교리교육

 

최양업 신부는 신자들의 신앙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사제로 잘 알려져 있다. 때문에 그는 한글의 유용성을 인식하면서 한글로 된 교회서적의 편찬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이에 그는 1859년부터 다블뤼 주교와 함께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와, 교리서인 『성교요리문답』의 한글 번역 및 편찬사업에 참여하였다. 이들 서적은 그의 사후에 간행되었다. 최양업 신부가 편찬에 관여한 두 책에 대해서도 본격적인 관심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와 함께 최양업 신부가 한글로 된 천주가사의 저술을 통해서 신자들의 교리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실이 크게 강조되었다. 그의 천주가사에 대해서는 『최양업 신부의 선교활동과 천주가사』에서 다시 검토됨으로써 새로운 국면에 들어가게 되었다.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 천주가사에 대한 저술이 언급되지 않는 점과 관련해서 생존 당시에는 천주가사로 부르지 않았을 것이며, 신심서 혹은 교리서라고 표현했을 것이라고 먼저 말한다.41) 그리고 최양업 신부가 여성 신자나 하층민 출신의 신자들이 점점 증가되는 현실 속에서 누구나 암송하기 쉬운 대중적인 교리서 교리서 · 신심서의 편찬에 관심을 가졌던 점이 천주가사의 저작과 유포에 중요

한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가 천주가사를 지은 또 다른 목적은 일반 신자들에게 재교육의 측면에서 다시 한번 주요 교리를 가르쳐주고, 이를 통해 그들 스스로 묵상과 교리실천, 신심 함양에 힘쓰도록 하려는 데 있었다고 이해하였다.42)

 

그런데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와 관련해서 가장 논란이 된 부분은 그가 직접 지은 천주가사가 어디까지냐 하는 문제였다. 1860년대 이전에 불려진 천주가사 9편 가운데 「사향가」와, 사말(四末)을 노래한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에 대해서 최양업 신부의 저작이 분명하다고 말한다.43) 이들 천주가사 서로 간에 동일한 용어나 표현 형식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거기에는 한글본 『성교요리문답』과 『천주성교공과』에 나오는 용어와도 동일한 부분이 많다고 한다. 그 저작 시기에 대해서는 1859년에서 멀지 않은 시기였을 것이고, 네 편의 천주가사 중에서 「사향가」가 가장 늦게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하였다.44)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사향가」가 포함되느냐 아니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사향가」는 확실히 작자 미상으로 해야 하는 것이 온당할 듯하다면서, 다른 작품까지를 포함시켜 모두 16편을 최양업 신부의 저작으로 보아야 하는 견해도 찾아진다.45) 한편 김진소 신부는 「사향가」만은 최양업 신부의 작품이라고 단정해도 좋을 듯하다고 하면서도, 하느님 나라를 위해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기를 힘쓰도록 독려하는 「피악수선가」를 추가시키자고 제안하였다.46) 한편 용어의 동일성 부분에 대해서 그것만으로 작자를 추정하는 것에 대해서 신중해야 한다는 견해도 제시되었다.47) 그 일부만이 아니라 다른 교리서나 신심서와도 관련지어서 보다 다양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서로 가락이 다르다는 문제도 언급한다. 호흡이라든지 톤이라든지, 문투도 다른데, 「사향가」의 문투는 훨씬 고문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천주가사 연구에 있어서 여러 기초적인 부분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가 더욱 요구됨을 알려주고 있는 것 같다.

 

한편 천주가사가 내포하고 있는 사상적 의미에 대해서는 최양업 신부의 신앙과 영성을 담고 있는 교리서요, 기도서라고 설명하면서, 인유론(引儒論)에 바탕을 두고 저술된 교리의 토착화 작업 과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48) 당시의 신자들이 외우고 배우던 주요 교리와 기도문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현실적으로는 당위(유교윤리)와 존재(천주교 교리) 사이의 갈등이 생생하게 반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천주가사가 여성신자나 하층민을 대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과연 최양업 신부가 이들에게 이러한 유교와 천주교의 갈등까지를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만든다. 그리고 한국인 사제가 담당하는 교리교육의 단계에서도 이전과 같이 유교와 관련된 인유론적 방식이 여전히 필요할 것인가에 대해서 물음이 일어난다.

 

이때 「사향가」에 천주교 반대자를 비판하는 구절이 찾아지며, 대부분 천주교 신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전문용어까지를 포함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또한 참고가 된다.49) 때문에 “사실 사본문답(四本問答 ; 영세 · 고해 · 성체 · 견진 문답)을 완벽하게 익혀서 세례 준비를 마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사본문답을 전부 배우려면 몇 해가 걸려야 하는 사람이 대다수입니다.”라는 최양업 신부의 언급을 고려할 때, 당시의 신자들이 교리서를 통해서 어느 정도의 교리지식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검토도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천주가사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관련해서 토착화 부분이 또한 강조되고 있다.50) 최양업 신부가 한국 천주교 토착화의 선각자라는 것이다. 그가 사대부 양반들의 글인 한문도 우리나라 글이 아닌 외국어라고 말하면서, 서양의 천주교회에 예속화 내지 종교 식민화된 천주교가 아니라 한국의 땅에서 사는 천주교가 되도록 토착화 작업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가 세계와의 교류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 부분에 대해서도 조금 더 주목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그 시기에 있어서의 토착화가 무엇을 의미하며, 당시 서양 선교사들과 함께 활동했던 한국인 사제로서 그것이 어느 정도로 가능했을까에 대해서 궁금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최양업 신부가 천주가사를 저술한 시기, 특히 「사향가」가 제일 마지막에 만들어졌다는 데에는 새로운 검토가 있어야 할 것 같다. 기존의 연구에서 1859년 무렵을 주목한 것은 베르뇌 주교가 1858년에 「사본문답」을 모두 외운 사람에게만 세례를 주도록 한 것이 작용한 듯하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가 다블뤼 신부에게 순교자들에 대한 조사를 넘겨준 1856년 무렵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종말론적 영성을 담고 있는 「사향가」가 그 자신이 따르고자 했던 순교자의 교리 실천과 신심, 순교의 용덕을 천주가사 안에서 드러내고자 했다는 점과 관련해서이다.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다면 최양업 신부 가문의 신앙전통도 함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순교의 길을 걸어갔던 아버지인 최경환 성인 역시 가난하고 무식한 신자들에 대한 교리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때 이들이 교우촌에서 생활하면서 만들거나 사용했던 교리교육의 방식과도 천주가사의 형성과도 밀접한 연관을 가졌을 것이다. 더욱이 1850년에야 본격적인 사목활동을 했던 최양업 신부의 사정을 고려하면 암기나 구송의 형식으로도 이루어졌을 가문의 신앙교육방식을 바탕으로 전해내려오는 기존의 내용을 그가 최종적으로 정리하였을 가능성도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점에서이다. 이러한 점에서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에 대한 연구는 보다 체계적으로 진행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Ⅶ. 대외인식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교육을 받은 최양업 신부의 대외인식은 어떠하였을까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어 왔다. 최양업 신부가 그의 귀국에서나, 자유로운 선교활동, 합법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는 데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나 프랑스 함대가 어떤 소용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하였으며, 프랑스의 일관되지 않은 정책 때문에 오히려 천주교에 대한 탄압 내지는 소멸이 초래되지나 않을까를 우려하였던 것으로 설명하였다.51) 때문에 선교주의 입장에 치우친 나머지 은연중에 식민세력을 용인한 듯한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은 곧 그가 지니고 있던 인식과 선교 방법상의 한계성으로 지적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렇지만 그의 프랑스나 프랑스 함대의 이용은 무력에 의해 상업적 이득을 구하려는 제국주의 노선에서가 아니라 조선의 복음화에 노력하는 선교주의의 입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정리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호교론적인 선교주의 입장에서 살펴보았다는 비판이 있었다.52) 조선왕조를 부정하거나 일부 선교사들처럼 양심의 자유를 얻기 위해 서유럽의 침탈을 용인하지는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지만, 그가 프랑스 함대의 출동이 정복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으면서도 그 프랑스 함대에 계속해서 동승하였다면 아무리 선교에 목적을 둔 행위라 할지라도 조국의 침략을 방조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현재의 관점에서 당시의 상황을 평가한 것으로 지나친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이와 같은 견해에 대한 대답에서 파악할 수가 있다.53) 민족사의 시각에서 볼 것인가, 교회사의 시각에서 볼 것인가, 즉 선교주의에서만 볼 것이냐의 문제라고 말한다. 물론 선교주의에 치우친 나머지 프랑스의 정복주의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묵인 내기 방조하지 않았느냐는 측면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페레올 주교나 메스트르 신부와 같은 프랑스 선교사들의 그것과 최양업 신부의 이해와 깊이가 같았느냐, 아니면 단순히 묵인의 차원이었느냐 하는 측면은 앞으로 더 연구가 되어야 한다고 언급한다. 그럼에도 최양업 신부의 서한만을 놓고 본다면 묵인 내지는 방조의 입장을 강조하기 보다는 분명히 선교주의의 입장이 더 강하였다고 이해하는 편이 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점은 페레올 주교 주교의 대외인식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확인되었다.54) 페레올 주교에게 나타난 대외인식의 변화를 새롭게 주목한 것이었다. 1846년 병오박해 직후부터 이전의 무력개입에 대한 강한 긍정론이 서서히 회의적인 인식으로 바뀌다가 1848년 이후부터는 무력개입이 아닌 외교적 교섭론으로 분명히 전환되었다고 파악한 것이다. 병오박해를 전후하여 김대건 신부를 구출하고 교우들을 보호하는데, 기대를 걸었던 프랑스 군함의 무력시위가 아무 소용이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고, 이에 무력적 방법을 완전히 포기하고, 재중국 프랑스 영사의 외교적 중재나 중국 황제와의 교섭에 큰 기대와 희망을 거는 쪽으로 조선 전교의 방법론이 크게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조선출병 반대론의 선구자였다고까지 이해한다. 여기에는 신앙의 자유를 얻게 해줄 방안으로 평화적 외교교섭론을 제기한 김대건 신부의 대외인식이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와 함께 다블뤼 신부나 푸르티에 신부 등의 경우처럼 일부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과 조선사람, 조선문화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는 최근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55) 이들 선교사의 조선 선교를 새롭게 검토하였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이제 서구 문명 우월주의 의식에 입각하여 조선사회의 문화와 전통을 비하하거나 야만시하는 경향에서 점차적으로 조선의 전통문화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고 조선사람들의 긍정적인 장점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페레올 주교가 다블뤼 신부로 하여금 조선 선교의 활성화를 위한 선교지 문화와 역사에 대한 연구활동을 할 수 있는 기초적 여건을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그의 사후 교구장이 된 베르뇌 주교 역시 그가 입국한 1856년 연말부터 다를뤼 신부가 사목순방 보다는 선교전략을 위한 연구작업, 즉 교회내 문화사업에 더욱 집중할 수 있도록, 그 결과 순교자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천주교회사연구에도 본격적으로 돌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의 대외인식에서 무력 개입의 무용성을 인식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들에 대해 김대건 신부나 최양업 신부가 어떻게 생각했으며,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가 궁금하지만, 현재까지는 구체적인 관련 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이러한 변화가 이들에게도 분명히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때 최근에 새로이 발견된 최양업 신부의 두 서한들은 이러한 부분에 대한 이해에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 모두 프랑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최양업 신부의 대외인식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말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그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56)

 

“날로 조선 전체에, 심지어 외교인들까지도 거의 모두가 프랑스 배들이 왔으면 하고 기대하고 있는데, 프랑스를 통해서 조선이 보다 개선되리라는 이런 속된 전반적인 감정이 어디에서 연유하였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확실한 것은 저들(프랑스 배)이라도 빨리 왔으면 하는 어떤 필연성이 충분히 납득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지고하신 섭리라 하더라도 말세가 아니고서는 믿지 못할 고질적인 그런 일들이 있는데, 예컨대 이렇듯 심한 폭정이라든지, 가난한 백성들에 대한 양반과 관리들의 횡포, ‘이제 거의 끝이 왔구나’ 할 정도의 완전한 무질서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 자체로는 어떤 치유책도 없어 보입니다.”(1857년 10월 20일 소리웃에서 베롤 주교에게 보낸 서한)

 

“또한 그 편지들을 통해서 중국 전역에 두루 퍼진 그곳 선교회 안에서, 프랑스 군대의 다행스러운 효과에 대해 축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가련한 우리 조선에서도 마침내 고대하던 자유를 볼 수 있으리라는 소망이, 저라고 왜 용솟음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도처에서 큰 성과를 거둔다는 프랑스 군대의 언급이 여기서는 전혀 없습니다.

 

고군산도의 난파 사건이 지난 후, 그 당시에는 나머지 난파자들을 위해서 협상 차원에서 조만간 돌아오겠노라고 조선 조정에 말했습니다만, 특별히 우리 앞에는 때로 대단히 태만하고 때로 속이는 자들이 있어서 많은 해가 지난 여태껏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당시 조정에서는 그 극한 상황에 처한 자들(난파자들)에게 도움을 베풀었습니다.

 

북경과의 연락을 통해 중국에서 무시할 수 없는 준통치권을 행사하고 있는 저들(프랑스 군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조선 조정은 공적으로 대놓고 우리 신자들을 박해하거나, 적어도 대략은 행방을 알고 있을 우리 신부님들을 체포하지 않는 듯합니다.”(1859년 10월 13일 안곡에서 베롤 주교에게 보낸 서한)

 

위의 두 서한은 중국에서의 프랑스 움직임을 소개하면서, 그것이 조선의 조정과 백성들에게 일정한 영향을 주고 있음을 전해주고 있다. 프랑스 배가 와서 조선사회를 변화시켜 줄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프랑스 정부의 외교적인 노력을 기대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기존의 서한에 나오는 내용과 이를 연결시켜 더욱 자세히 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57)

 

 

Ⅷ. 선종 장소

 

최양업 신부에 대한 연구에서 크게 논쟁이 되는 부분은 어디서 선종하였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문경설과 진천설이, 진천설의 경우에도 배티 선종설과 진천군 내 어느 장소설로 나누어진다.

 

먼저 주장된 견해는 1929년 정규량 신부에게서 나온 진천의 어느 공소설이었다.58) 최양업 신부가 진천의 어느 공소에서 병이 들어 선종했다는 것이다. 1956년도에 오면 유영근 신부에 의하여 진천의 배티설이 다시 나온다. 문경에서 병을 얻었고, 진천 배티에서 앓다가 선종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티 선종설은 통사인 유홍렬의 『증보 한국천주교회사』(1962)에도 반영되었다. 이와 달리 문경 선종설은 최양업 신부의 후손에 의해서 1939년과 1945년에 계속해서 제기되었다. 문경에서 선종하고 배론으로 옮겨 매장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경설은 주재용 신부의 진천설에 대한 비판과 함께 1990년대 이후에는 대세를 점하는 듯했다.

 

그런 가운데 2005년에 이르러 청주교구의 류한영 신부가 진천의 어느 공소설을 다시 제창하였다.59) 이에 의하면 발병지는 경상도 문경이고, 선종지는 진천의 어느 공소이며, 가매장지는 진천의 배티 교우촌이고, 최종 매장지인 무덤의 소재지는 배론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문경이 최양업 신부의 선종의 출발지라면, 배티는 그 선종의 경유지이며, 배론은 그 선종의 종착지라는 것이다. 이에 이전까지 문경 선종설을 지지하던 차기진 역시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이는 한편, 진천군의 어느 공소설을 주장하였다.60) 유영근 신부의 설명보다는 정규량 신부의 기록이 가장 원형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여전히 문경 선종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61) 여기에서는 문경에서 발병하여 선종하고, 최양업 신부의 첫째 동생 내외와 자식들이 살고 있던 진천의 한 교우촌이 가매장지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며, 최종적으로는 배론에 매장되었다고 이해한다. 진천설에서 언급되는 가매장지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 신부의 기록에 나오는 이동거리에 대해서 어떤 교통로를 이용하였는가를 알려주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처럼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는 등 왜 이러할까 싶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진천 공소설의 경우에는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우선 사료 비판의 문제가 있다. 몇 줄 되지 않는 정규량 신부의 기록이 가장 원형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는 견해는 검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문경 선종설이나 문경 발병설을 언급하는 견해 모두 「최 바시리오 이력서」 등 최양업 신부의 후손이 남긴 기록이 오히려 더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최양업 신부의 집안에서 나온 문경 발병설과 선종설에 대한 부분은 여전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문경읍내의 이씨 성을 가진 교우 약국이 언급될 정도로 매우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한편 다른 주제와 관련해서는 「최 바시리오 이력서」와 같은 자료들을 빈번하게 인용하면서 이 부분에 대해서만 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인지도 궁금해지는 것이다.

 

진천의 어느 공소설의 경우에는 최양업 신부가 어디에서 장티푸스에 걸렸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지 않다. 문경 지방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는 것이다. 이때 병에 걸린 최양업 신부가 왜 당시의 선교사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진천의 한 작은 교우촌을 찾아갔는지도 알 수 없게 한다. 여기에는 이곳에 최양업 신부의 후손이 거주하고 있었는가의 여부와도 관련이 있다. 진천 공소설에서는 거주하지 않았다고 보고 있지만, 또 다른 견해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견해도 나와 있기 때문이다. 문경에서 선종한 최양업 신부가 진천에 가매장된 것은 그의 후손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진천의 공소에서 최양업 신부가 15~16일 동안 앓아 누웠다가 선종하기 8시간 혹은 9시간 전에야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는 설명 역시 잘 납득이 되지를 않는다. 복사까지 동행한 최양업 신부의 행로를 고려할 때 그가 병에 걸려서 힘들어할 때 곧바로 배론 성지에 있는 선교사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 것이 합리적인 순서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왜 진천의 배티 교우촌에 최양업 신부를 가매장했으며, 이후 몇 달 뒤에야 배론으로 이장을 해서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진다.

 

진천 배티설의 견해에서도 그러하다. 역시 문경에서 발병한 최양업 신부가 왜 배티로까지 왔는가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심한 과로의 상태에서 장티푸스까지 걸린 최양업 신부의 상태로 배티에까지의 이동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해서도 밝혀져야 할 것이다. 문경의 신자 약국에서 어떠한 치료를 받았는가도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또한 질병의 성격이나, 경과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장티푸스이냐, 최상종의 기록에 언급되고 있듯이 고기를 잘못 먹은 급체이냐에 대해서도 따져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왜 서로 다르게 최양업 신부의 질병을 설명하고 있는가이다. 그리고 배론의 프랑스 선교사에게 왜 발병 소식이 늦게 전달되었는가는 여전히 같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잘 지적되고 있듯이, 배티 지역이 최양업 신부가 선종하기 한 달 전인 1860년 5월까지 페롱 신부나 프티니콜라 신부 등 프랑스 선교사들의 사목관할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발병지와 선종지와 가매장지와 최종매장지가 왜 그렇게 복잡하게 되었는가의 문제도 함께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최양업 신부의 선종일은 6월 15일이고, 장례일은 11월 초순이다. 왜 이렇게 장례가 늦어졌는가 하는 문제가 또한 제기된다. 문경 선종설에서는 이 기간이 여름철에 해당되고, 특히 최양업 신부가 처음에는 식중독 비슷한 증세로 병을 얻었지만, 나중에는 이것이 장티푸스로 전화되어 사망했으므로 돌림병에 극히 취약했던 당시 사람들에게 최양업 신부의 시신은 어떤 경우에라도 일정하게 엄폐되어야 했을 것이며, 따라서 돌림병을 예방하기 위해 가장 손쉬운 방법 중의 하나가 그의 시신을 임시로 땅에 가매장하는 것이었다고 이해하고 있다.62) 만일 그런 상태라고 한다면, 문경에서 그 여름에 시신을 진천으로까지 옮겨서 가매장할 수 있을까도 물어지게 된다. 이러한 점들은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가 어디이냐 하는 문제를 검토하기에 앞서 당시 최양업 신부가 걸린 병에 대해서 한국인 신자와 프랑스 선교사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부터 먼저 검토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에 따라서 최양업 신부에 대한 장례 방식이 결정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에서 사망한 프랑스 선교사의 장례에 대한 검토도 함께 요구한다.63)

 

 

Ⅸ. 맺음말

 

지금까지 최양업 신부에 대한 연구현황과 과제에 대해서 간단하게 알아보았다. 한 두 가지 느낌을 언급하면서 맺음말에 대신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같은 해에 태어나서 탄생 200주년을 함께 기념하는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에 대한 비교사적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한다. 같은 내포지역에서 탄생하여, 같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서 한국인으로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제가 된 두 사람의 삶과 신앙에서 어떠한 점이 같고, 어떠한 점이 다른가를 알아낸다는 것은 한국천주교회사에서 평신도의 역사와 함께 사제들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도 커다란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이들 두 사제가 세계천주교회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새롭게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한국천주교회사연구에서 최양업 신부를 비롯해서 개별 인물을 연구하는 방법론에 대한 새로운 모색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여전히 실증적인 부분에서 논란이 있다는 현실을 고려하더라도, 다루어지는 인물들이 조금은 더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도록 서술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보다 새로운 관점에서 많은 질문들이 제기되어야 하며, 그러한 질문들을 바탕으로 보다 풍부한 해석이 새롭게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가 시대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삶과 신앙을 살아갔던 사람들의 살아있는 역사로 채워질 수 있다는 점에서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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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석우, 「성 김대건 신부에 대한 연구와 현양의 역사」, 『교회사연구』 12, 한국교회사연구소, 1997, 24쪽.

 

2) 서종태,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에 대한 연구」, 『교회사학』 5, 수원교회사연구소, 2008, 171쪽.

 

3) 최석우, 「최양업 신부의 선교활동과 영성」, 『교회사연구』 14, 한국교회사연구소, 1999와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활동의 배경」, 『교회사연구』 14, 한국교회사연구소, 1999 ; 「최양업 신부의 선교활동과 천주가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3의 머리말을 참고할 것.

 

4) 1권은 『최양업 신부의 서한』, 2권은, 『스승과 동료 성직자들의 서한』, 3권은 『증언록과 교회사자료』, 4권은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이다. 1권은 2009년에 들어와서 수정 보완되어 다시 나왔다.

 

5) 최석우, 앞의 글, p.2와 「최양업 신부의 선교활동과 시복 추진의 의미」, 『최양업 신부의 선교활동과 천주가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3, 15~16쪽.

 

6) 김수태, 「최경환 성인의 천주신앙과 순교」, 『교회사학』 6, 수원교회사연구소, 2009와 「최경환 가문의 천주교 수용」, 『한국천주교회사의 빛과 그림자』, 디자인흐름, 2010.

 

7) 원재연, 「페레올 주교의 조선 입국 후 사목활동 - 김대건 신부 현양과 양반 중심 교회 운영을 중심으로」, 『교회사학』 5, 수원교회사연구소, 2008, 134~144쪽.

 

8) 김수태, 「김대건 가문의 신분에 대한 재검토」, 『교회사연구』 37, 한국교회사연구소, 2011.

 

9) 김정숙, 「수리산 순교자 이성례와 이 메렌시아의 생애와 신앙생활」, 『교회사학』 6, 수원교회사연구소, 2009.

 

10) 이석원, 「‘하느님의 종’ 최지혁 요한과 최양업 신부 집안 - 최지혁, 최경환 성인의 큰 조카이자, 최양업 신부의 사촌 형 -」, 『상교우서』 68, 수원교회사연구소, 2020. 이에 앞서 원재연은 「최경환 성인 가문의 삶과 신앙」, 『교회사학』 6, 수원교회사연구소, 2009에서도 최경환 이후 후손들의 삶과 신앙이 다루어졌다.

 

11)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활동의 배경」, 『교회사연구』 14, 한국교회사연구소, 1999, 20~21쪽.

 

12) 방상근, 「수리산 공소와 최양업 신부」, 2000 ; 『한국사회와 천주교』, 2007을 참고할 것. 차기진 역시 처음에는 앞의 논문, 26쪽에서는 수리산으로 이해하다가, 이를 받아들여 부평으로 수정하였다(류한영 · 차기진, 『교우촌 배티와 최양업 신부」, 2000, 61쪽). 그것은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활동의 배경」, 20쪽에도 반영되어 있다.

 

13)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행적에 대한 재검토 - 유학로와 선종지를 중심으로」, 『교회사학』 7, 수원교회사연구소, 2010, 9~24쪽.

 

14)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활동의 배경」, 『교회사연구』 14, 한국교회사연구소, 1999, 28~31쪽.

 

15) 하성래, 차기진의 위의 논문에 대한 토론, 192쪽.

 

16) 차기진, 앞의 논문, 29쪽.

 

17) 류한영, 차기진의 위의 논문에 대한 토론, 202~203쪽. 

 

18) 최석우, 「성 김대건 신부에 대한 연구와 현양의 의의」, 24쪽.

 

19)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사목중심지에 대한 연구」, 『최양업 신부의 사목지역과 선종지 연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7, 10~15쪽.

 

20) 차기진은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활동의 배경」. 44쪽에서 포함시킨 양관 지역은 제외시키고 있다.

 

21) 최석우, 「최양업 신부의 선교활동과 시복 추진의 의미」, 『최양업 신부의 선교활동과 천주가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3, 14~15쪽.

 

22) 양인성,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활동」, 『한국천주교회사』 3, 한국교회사연구소, 2017, 151~157쪽에 잘 정리되어 있다. 신시도에 대해서는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귀국로 탐색과 신시도 체류에 대한 연구」, 『최양업 신부 신시도 행적 기념 심포지엄 자료집』, 호남교회사연구소, 2013가 있다.

 

23) 김수태, 「프랑스 선교사의 조선 입국로 모색 방안」, 「교회사연구』 41, 한국교회사연구소, 2013이 참고가 된다.

 

24)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활동의 배경」, 45~49쪽.

 

25) 신대원,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교회사적 몇 가지 쟁점 고찰」, 『교회사학』 8, 수원교회사연구소, 2011, 140~145쪽.

 

26)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사목중심지에 대한 연구」, 8~9쪽.

 

27) 신대원, 앞의 논문, 143쪽과 154쪽.

 

28) 신대원, 앞의 논문, 140~141쪽.

 

29) 필자의 논문에 대해서 토론을 한 차기진은 박해기의 사목(본당)중심지는 전이형(이동형)사목 중심지로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면서, 사목 중심지에는 사제관 혹은 휴식처의 성격도 포함되어 있다고 새롭게 설명하였다.

 

30) 차기진, 앞의 논문, 27~40쪽

 

31) 방상근, 「1850년대 신학교의 설립과 성격에 대한 연구」, 『교회사연구』 41, 한국교회사연구소, 2013.

 

32) 서종태, 「최양업 신부의 사목순방지 연구」, 『최양업 신부의 사목지역과 선종지 연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7.

 

33) 배티의 교우촌에 대해서는 류한영·차기진, 『교우촌 배티와 최양업 신부』, 배티성지 · 양업교회사연구소, 2000이 있다. 서종태 역시 앞의 논문, 77~79쪽에서 최양업 신부가 활동할 당시 전국의 교우촌을 살펴보고 있다.

 

34) 한편 최양업 신부와 그의 사목지였던 제주도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보다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중국 광동에서 표류하여 홍콩에서 세례를 받은 제주의 순교자인 김기량을 배티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대한 사목에서 제주도가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35) 최승룡, 「해제」,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최양업 신부의 전기 자료집 부록), 청주교구, 1997.

 

36) 안재원, 「『바티칸 문서』와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은 어떤 관계인가?」, 『교회사학』 11, 수원교회사연구소, 2014, 59~60쪽. 한편 1857년에 출판된 『코레아, 통킹, 코친차이나에서 순교한 갑사의 앵베르 주교와 동참자들에 대한 시복 승인 혹은 설명보고』도 최양업 신부가 번역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보다 자세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37) 김규성, 『조선 천주교회의 순교자 관련기록연구』, 서강대박사학위논문, 2017, 41~48쪽.

 

38) 윤민구, 「103위 순교자 시복시성과정에 대한 종합적 연구」, 『교회사연구』 45,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21쪽.

 

39) 김수태, 「최양업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연구 - 가문의 순교자 전기를 중심으로 -」, 『교회사학』 10, 수원교회사연구소, 2013.

 

40) 조현범, 「1803년 사천성 시노드 연구」, 『교회사연구』 24, 한국교회사연구소, 2005, 26쪽 및 방상근, 「박해시기 조선 천주교회의 배교자와 회심자」, 『교회사연구』 55, 한국교회사연구소, 2019, 114~116쪽. 열다섯 번째 서한에서는 특히라고 하면서 신자들에 대한 선교사들의 행동 지침을 강조하고 있지만, 시노드 회의록을 요구하고 있는 점에서 이러한 부분에 대한 관심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한편 방상근은 베르뇌 주교의 경우 사천성 시노드의 내용과 달리 1858년에 들어오면 상당히 엄격해지는 변화에도 주목하였다(앞의 논문, 116~117쪽).

 

41)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활동의 배경」, 50~53쪽 및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와 저작배경」, 『최양업 신부의 선교활동과 천주가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3.

 

42) 이밖에 김문태, 「천주가사 「사향가」의 교리 실현화 양상」, 『신학전망』 184,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연구소, 2014도 참고가 된다.

 

43)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와 저작배경」, 246~247쪽.

 

44)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활동의 배경」, 52~53쪽.

 

45) 조지형, 「최양업 신부 소작 천주가사의 목적과 특성」, 『누리와 말씀』 34, 인천가톨릭대학교 복음화연구소, 2013. 한편 김문태는 「천주가사 〈션죵가〉 · 〈심판가〉 · 〈공심판가〉의 창작기반 고찰」, 『교회사연구』 53, 한국교회사연구소, 2018에서는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에 대해서 특정할 수 없는 세 천주가사의 작자는 교회서적의 번역과 필사에 힘을 쏟던 양반 내지 중인 신분의 신심 깊은 지식인 신자로 보인다고 주장한다.

 

46) 김진소,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 연구의 의의」, 『최양업 신부의 선교활동과 천주가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3, 234쪽.

 

47) 하성래 · 차기진의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와 저작배경」에 대한 토론, 324~326쪽.

 

48) 차기진, 앞의 논문, 253~254쪽.

 

49) 조원형, 「천주가사 「사향가」에 대한 텍스트언어학적 검토」, 『텍스트언어학』 24, 한국텍스트언어학회, 2008, 162쪽.

 

50) 김진소, 앞의 글, 234~235쪽.

 

51)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활동의 배경」, 42~44쪽.

 

52) 하성래, 차기진의 앞의 논문에 대한 토론, 92쪽.

 

53) 차기진, 하성래의 토론에 대한 답변, 95쪽.

 

54) 원재연, 「페레올 주교의 조선 입국 후 사목활동 - 김대건 신부 현양과 양반 중심 교회 운영을 중심으로」, 145~159쪽. 차기진은 메스트르 신부에 대하여 그가 1842년에 이미 프랑스 함대는 정치적·상업적 이득을 추구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으며, 자신은 이러한 목적을 위한 통역으로 이용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적이 있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페레올 주교에 대해서는 신앙의 자유을 얻는데, 프랑스의 무력을 이용하려고 하였다는데 그쳤다(앞의 논문, 42~43쪽).

 

55) 조현범, 『조선의 선교사, 선교사의 조선』,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56) 한국교회사연구소편, 「최양업 신부가 베롤 주교에게 보낸 서한」, 『교회와 역사』 459, 한국교회사연구소, 2013.

 

57) 방상근, 「해제」, 앞의 책을 참고할 것.

 

58) 연구사는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행적에 대한 재검토 - 유학로와 선종지를 중심으로」와 원재연,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 연구 : 교회 안의 전승을 중심으로」, 『최양업 신부의 사목지역과 선종지 연구」에 잘 정리되어 있다.

 

59) 류한영, 「동료 선교사들의 서한을 중심으로 한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 연구」, 『최양업 신부의 사목지역과 선종지 연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7.

 

60) 차기진, 앞의 논문을 참고할 것.

 

61) 원재연, 앞의 논문과 신대원, 앞의 논문.

 

62) 원재연, 앞의 논문, 91쪽.

 

63) 한편 최양업 신부가 일곱 번째 편지에서 조선의 비위생적인 물을 개량할 처방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던 점에서 그의 질병관이나 의학관에 대한 커다란 관심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 이 논문은 2020년도 충남대학교 학술연구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작성하였음.

 

[학술지 교회사학 제19호, 2021년(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수태(충남대 국사학과 교수)]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400937&Page=1&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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