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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갑질 민국, 갑질 사회: 영화 컴플라이언스를 통해 본 갑을관계의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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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4-21 ㅣ No.1237

[경향 돋보기 - 갑질 민국, 갑질 사회] 영화 ‘컴플라이언스’를 통해 본 갑을관계의 심리학



한 통의 전화로 시작된 성폭행

모든 것은 한 통의 전화에서 시작되었다. 패스트푸드 매장의 여성 매니저에게 경찰한테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경찰은 매장 직원이 손님의 돈을 훔쳤다는 신고가 접수되었다며 직원 가운데 금발이 있지 않느냐고 했다. 마침 그때 매장에는 금발의 아르바이트생 베키가 주문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그동안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일을 잘했던 18세의 소녀. 매니저는 매장에 있던 베키를 작은 창고 방으로 데려간다.

전화기 너머 그 경찰은 매니저에게 당장 베키의 몸을 수색하라고 명령한다. 매니저가 머뭇거리자 경찰은 당장 몸수색을 하지 않으면 그녀를 자기들이 검거해서 유치장에 가둔 상태에서 조사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자신은 아무 죄가 없다고 울먹이는 베키. 매니저가 몸수색을 주저하자 경찰은 그녀를 바꾸라고 요구한다. 경찰은 베키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소리친다. 경찰에 체포되어서 유치장에 갇힌 상태에서 조사를 받든지, 아니면 지금 당장 몸수색을 받든지.

감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 베키는 그 순간부터 전화기를 통해서 전달되는 경찰관의 명령에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거나 저항하지 않는다. 경찰의 요구에 따라 매니저는 그녀가 옷을 모두 벗도록 만든다.

결국 베키는 나체 상태에서 매니저의 몸수색을 받는다. 그녀가 돈을 훔쳤다는 증거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경찰은 베키를 계속 의심한다.

앞치마 한 장으로 몸을 겨우 가리고 있는 베키는 곧 자신의 혐의가 풀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체로 몸수색까지 받았고, 훔쳤다는 돈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경찰의 요구사항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녀를 감시하는 사람을 남자로 바꾸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매니저는 자신의 약혼자를 부른다.

매니저를 창고에서 내보낸 경찰은 매니저의 약혼자에게 상상을 초월한 명령을 내리기 시작한다. 중년의 남자인 약혼자가 보는 앞에서 베키의 앞치마를 벗게 한 뒤, 나체 상태에서 팔 벌려 뛰기를 하라고 지시한다. 몸에 숨겼을 동전이 떨어지게 해야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말도 안 되는 명령에 약혼자도 처음에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며 머뭇거린다.

하지만 그는 결국 식은땀을 흘리며 전화기를 통해 전달되는 경찰의 명령에 복종하기 시작한다. 경찰은 약혼자에게 나체 상태인 베키의 엉덩이를 소리가 나도록 손바닥으로 때리라고 명령하기까지 한다. 결국 4시간여에 걸쳐 진행된 이 사건은 성폭행으로 이어지고 만다.


전화 속 가짜 경찰의 명령

크레이그 조벨 감독의 2012년작 ‘컴플라이언스(Compliance)’는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다. 이 영화는 90분 동안 패스트푸드 매장의 작은 창고 안에서 일어났던 악몽을 냉정하게 기록하고 있다. 매장에 온 손님들이 평화롭게 햄버거를 먹고 있는 동안 바로 옆에 있는 창고 안에서는 성폭력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매장 매니저와 그녀의 약혼자는 가짜 경찰이 지시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명령에 따라 어린 소녀에게 성적 폭력을 가했고, 베키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폭력을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받아들인 것이다.

‘보이스 강간’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사건 속의 인물들은 아무 죄도 없는 선량한 18세의 소녀에게 참혹한 폭행을 가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사건이 베키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32개 주에 있는 70개의 레스토랑에 이런 전화가 걸려왔고, 그곳의 매니저들도 전화 속 가짜 경찰의 명령에 저항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권력, 관계의 역할을 결정한다

우리는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현실세계의 인간관계는 평등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대부분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상황과 맥락에 따라 분명히 지각할 수 있는 권력이 관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보이스 강간 사건에서 경찰은 매니저보다, 그리고 매니저는 아르바이트 직원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권력관계를 인지하고 이에 따라 자신이 어떤 태도와 행동을 취해야 할지를 결정한다.

관계에서 두 사람의 역할을 결정하는 것은 권력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은 자신보다 권력이 약한 상대에게 지시를 내리는 역할을 한다. 곧, 관계에서 강자는 약자에게 요구하고 명령한다. 반대로 약자의 위치에 선 사람은 강자의 지시를 수행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강자는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는 약자를 야단치고 훈계한다.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욕하고, 위협하고, 심지어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이런 행동들은 보통 어른이 아이에게 또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행동이다. 따라서 관계에서 자신이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심지어는 자신이 강자라는 사실을 주변에 알리려고 강자의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다. 이른바 ‘갑질’이라고 부르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상대에게 명령하고, 야단치고, 훈계하고, 언어와 물리적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자신과 상대의 권력관계를 자신과 상대,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명확히 인식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약자는 강자의 이런 행위에 저항하기 힘들다. 강자의 요구가 비합리적이어도, 강자가 욕설을 퍼붓고, 폭력을 행사해도 저항은 매우 어려운 선택이 된다. 강자가 가지고 있는 권력 때문이다. 강자는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거나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약자에게 처벌을 가하거나 제재를 가할 수 있다. 이것이 강자가 관계에서 가지고 있는 권력의 핵심이다.

아르바이트 직원이 명령을 거부했을 때 매니저는 바로 해고라는 처벌을 내릴 수 있다. 매니저의 비합리적인 요구와 폭력에 저항했다가는 실직이라고 하는 자신의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에 놓이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관계에서 약자들이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합리적인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는 이유다.

약자 또는 ‘을’의 기본권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제도가 확립되지 않는 한 약자는 강자의 불합리한 ‘갑질’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갑을’ 논란에서 가장 먼저 세워야 할 대책이 ‘을’의 권리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견고하고 단호한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강자의 부당한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착한 사람 콤플렉스다. 영화 ‘컴플라이언스’에서 베키라는 이름으로 나왔던 실제 사건의 피해자는 심리치료 과정에서 자신이 저항하지 못했던 이유를 자신이 살아오면서 늘 겪어왔던 경험 때문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어른들에게 “말 잘 듣는 아이가 착한 아이”라고 들으면서 자랐던 경험이 자신에 대한 폭력을 스스로 수용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착한 사람이 되어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배우면서 자란다. 울지 말라고 했는데도 “우는 아이는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안 주신다.”고 노래한다. 그 마음씨 좋아 보이는 산타 할아버지조차도 말을 듣지 않는 아이한테는 냉정한 것이다. 말 잘 들어야 착한 사람이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믿음은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만든다.

사실 우리는 모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조금씩은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착한 사람 콤플렉스는 다른 사람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는 데 있다. 착한 사람은 말을 잘 듣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는 비합리적인 요구도 당당하게 거절하지 못하게 만든다. 너무 아니다 싶어서 거절하고 나면 후회와 죄책감이 밀려온다. ‘그냥 내가 참고 말걸.’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다. 그래서 복종의 습관이 길러지고, 거절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이제는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인 명령도 거절하기 힘들어지게 된다.


‘을’을 힘겹게 하는 다른 ‘을’들의 비난

착한 사람 콤플렉스의 최악의 형태는 강자들의 비합리적인 행동에 저항하는 약자들을 비난할 때 나타난다. 우리 사회에서도 ‘갑’의 횡포에 맞서는 용기 있는 소수의 ‘을’들이 간혹 출현하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을’은 ‘갑’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권력과 싸워야 한다.

하지만 정작 용기 있는 ‘을’을 가장 힘겹게 하는 것은 다른 ‘을’들의 비난이다. 용기를 낸 ‘을’들은 보통 “대가 세다. 보통은 넘는다. 조용히 살지 왜 나대는지 모르겠다.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와 같은 다른 ‘을’들의 비난에 직면한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용기 있는 ‘을’을 공격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다.

‘갑’의 권력에 굴복한 결과는 생각보다 참혹할 수 있다. 거절하거나 저항했다면 제거되었을 작은 악의 씨앗이 시간이 지날수록 몸집을 키우기 때문이다. 베키가 매니저나 가짜 경찰의 명령을 처음에 단호하게 거절하고 저항했다면, 이 사건은 하나의 장난 전화로 끝났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침묵과 복종의 습관이 작은 악을 악마로 성장시키는 것이다.

어쩌면 너무 착하기만 한 사람들밖에 없는 사회는 미래가 없는 사회인지도 모른다.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작은 악에 복종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 사회의 희망은 사라진다. 너무 말을 잘 듣는 착한 사람들만 있는 세상이 지옥으로 변하기 쉬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용기 있는 ‘을’은 보호받아야 한다. 최소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착한 사람 콤플렉스로 ‘갑’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을’을 끌어내리지는 말아야 한다. 우리 사회는 그들의 용기 덕분에 조금씩 합리적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 전우영 - 연세대학교 심리학 박사. 충남대학교 심리학 교수. 주요 일간지에 사회적 쟁점을 심리학으로 풀어보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주요 저서로 「심리학의 힘 P :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11가지 비밀」, 「프라이밍 : 나를 움직이는 무의식」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5년 4월호, 전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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