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교육ㅣ심리ㅣ상담

[상담] 아! 어쩌나: 소금 같은 삶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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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28 ㅣ No.613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191) 소금 같은 삶이란?

 

 

Q. 요즘 성경 말씀 나누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는 말씀 모임을 이끄는 봉사자가 “그리스도인은 소금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돼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그 말을 들을 때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막상 어떻게 사는 것이 소금 같은 삶인지 개념이 잡히지 않네요. 어떤 분은 세속을 떠나 산중에서 홀로 기도하는 삶이라고 하는데, 정말 그렇게 살아야 하나요?

 

 

A. 자매님이 들은 말씀은 루카복음 14장 34-35절에 나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겠느냐? 땅에도 거름에도 쓸모가 없어 밖에 내던져 버린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우리가 잘 모르는 어떤 일에 부닥쳤을 때 도움을 청하려 한다면 누구를 찾을까요? 착한 사람일까요? 기도만 하는 사람? 봉사만 하는 사람? 아니면 인생경험이 많은 사람일까요? 당연히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체험하고 성공한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즉, 소금 같은 사람이란 인생경험이 많은 사람을 뜻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고 도움을 준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기본 성향은 새로운 경험을 하기보다는 살던 대로 살고 싶어하는 편안함에 안주하고자 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는 것입니다.

 

어머니 자궁 안에서 살던 습관이 무의식적으로 배서 조금만 힘들면 자궁 안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어한다고 합니다. 또 사람을 만나도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 만나고, 세상 모든 일이 다 순탄하기만을 바랍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것은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답답하고 아둔하며 미성숙한 인생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면 심리적으로 편중되고 세상을 보는 눈이 얍삽해져 마치 새장 안에서 사육되는 새처럼 살 가능성이 큽니다.

 

친구를 사귀려 하지 않고 엄마 치마폭에서 떠나질 않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흔히 ‘마마보이’라고 하지요. 이런 아이들은 결혼해도 자기에게 엄마 역할을 해줄 사람을 구하고, 조금만 힘들면 일에서 손을 놓아버리고 다른 사람이 뒤치다꺼리해주길 기다립니다. 말 그대로 허우대는 멀쩡한데 ‘심리적 기형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아이들일수록 방에서 쫓아내어 바깥세상을 구경하게 하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는 비단 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은 좋지 않은 환경,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과의 여행, 불편한 상황과의 마주침 등 우리가 원치 않는 것들과도 상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통해 우리 속이 뒤집어지는 참담한 경험을 하게 되고, 우리 마음 안에 가라앉은 수많은 것들을 목격하는 기회를 잡게 됩니다. 이것을 ‘내적체험’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체험을 하고 나면 자신이 그리 잘난 사람이 아님을 인식하게 돼 저절로 겸손해지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못하게 되지요. 그리고 함부로 깨달음 운운하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고 경거망동하지 않고 자신의 무지를 부끄러워하면서 평생을 공부하는 마음가짐으로 살려고 하지요.

 

이런 자세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을 청하는 이들이 줄을 섭니다. 그가 바로 ‘소금’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적 체험은 내적 건강을 위해 필수적입니다. 이것을 태풍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바다에 태풍이 불면 바다 밑바닥이 뒤집어지는데, 그래야 바닥에 살던 플랑크톤이 위로 올라와 물고기 먹잇감이 되고, 바다도 숨통이 트인다고 합니다.

 

사람 마음 역시 그렇습니다. 이렇게 설명은 쉽지만 이런 삶을 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 그런가요? 심리적 혼란 때문입니다. 심리적 혼란은 불안을 일으키기에 본성적으로 편안함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힘겨운 통과의례입니다.

 

그래서 회피하기 위해 기도 속으로 들어가려 하거나 관심을 다른 곳에 두려 하는 등 회피성 행위들을 하는데, 이런 때에는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혼란은 정서적 붕괴가 아니라 새로운 정신세계를 열어가는 원동력입니다. 죽음과 생명이 동전의 양면인 것처럼 혼란과 창조도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한 얼굴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 심리적 혼란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고 오히려 심리적 혼란이 가중될 때 정신을 차리고, 그 혼란 속에서 면면히 흐르는 새로운 질서의 흐름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비롯한 세계 모든 창조설화는 혼돈에서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심리적으로 혼란스러울 때는 자기 의지로 어떻게 하려 하지 말고 하느님께 의탁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 무의식 안에 잠재한 새로움을 향하려는 정신적 유전자를 가동해주시어 우리 삶이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 가게끔 인도하실 것입니다. 모세가 이집트를 벗어나듯이 말이지요.

 

[평화신문, 2013년 3월 10일, 홍성남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생활상담소장), 상담전화 : 02-776-8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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