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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정] 성령칠은8: 굳셈(용기)의 은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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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9 ㅣ No.53

[성령칠은 제8강의] 굳셈(勇氣, force)의 은혜 (1) (9월 8일 수요일 오후)

 

 

루가18:31-33:

 

(루가18:31)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에 대하여 예언자들이 기록한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32) 사람의 아들이 이방인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터인데 그들은 사람의 아들을 희롱하고 모욕하고 침뱉고 (33) 채찍질하고 마침내 죽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김신부님의 질문에 응답합니다. 김신부님의 질문은 “유혹이 어떻게 사탄의 유혹이 아니고 하느님의 방문으로 이해되는가?”이다. 루가 사가는 예수님이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서 유혹을 받은 것은 성령의 은총이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방문에 대해서 준주성범에서 언급한다. 하느님은 위로와 잡념으로 인간의 마음을 찾아오신다. 물론 유혹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다. 악마로부터 오는 것이다. 광야에는 고통이 있다. 예수님이 유혹을 받을 때에 그분의 반응은 즉시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약함을 아신다. 하느님의 사랑만이 그분을 힘있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약함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의 인성은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의 인성은 악마보다는 약하다. “하느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악마의 세력을 대결할 수 없다”는 것이 신비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유혹에 빠지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그래서 당신의 힘을 우리에게 주신다. 하느님의 힘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유혹은 당신 사랑의 힘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의 길이나 기회가 될 수 있다. 성령으로 가득 차서 유혹을 받으신 것은 필요한 것이었다. 비록 유혹을 받더라도 기도하는데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위대한 훈련이다. 유혹을 받는 것이 불편하지만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사랑의 힘을 간구하면서 그것을 견디어 내면 마침내는 그 유혹이 하느님 방문의 기회가 된다. 그것은 진정한 하느님의 방문이다. 기도를 통해서 위안을 받는 것보다 유혹을 받는 것이 환상이 적을 것이다.

 

저녁 화해성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서 묵상하길 권합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시면서 그분의 수난 안에 굳셈의 은총이 나타나는 것을 보시길 바란다. 이냐시오의 기도를 알지요. 그리스도의 수난이여 저를 굳세게 하여 주소서. 수난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면 그것이 우리에게 힘을 주고 평화롭게 한다. 루가복음 18장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있다고 한다. 루가 사가는 예수님의 전 생애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의 삶은 의도적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시는 걸음이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예루살렘을 향하셨다고 하신다. 예수님이 여러 마을을 방문하시는데 예루살렘에 가는 길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서 화해의 재물을 드리는 장소이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삶으로 이 화해의 제사를 드린다는 것을 의식하신다. 당신 형제 자매를 성부와 화해시키신다.

 

루가 9:22와 44 : (루가9:22) 예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9:44) “너희는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해 두어라. 사람의 아들은 머지 않아 사람들의 손에 넘어 가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은 예수님 생애의 지속적인 목표입니다.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이 한데 모으리라는 예언의 말씀이 선포된 만남의 장소이다. 마침내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라야 당신의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신 다음에라야, 성령 강림절의 성령이 내리시고 그 영이 모든 사람을 한데 모아서 하느님의 큰 백성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것은 우주적인 화해와 친교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간절한 바램이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를 바라신다.

 

루가12:49-50 : (루가12:49)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루가12:50)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 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

 

예수님이 고통받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다. 오직 화해를 이루어서 우주가 완전히 친교를 이루는 것이 예수님의 간절한 바램이다. 고난은 당신 사랑의 힘을 보여줄 뿐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희생이 하늘에서만 온전히 완성되리라는 것을 아셔서 여기에 대한 다른 환상이 없었다.

 

루가 22: 15-16 : (루가22:15)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너희와 이 과월절 음식을 함께 나누려고 얼마나 별러 왔는지 모른다. (16) 잘 들어 두어라. 나는 과월절 음식의 본뜻이 하느님 나라에서 성취되기까지는 이 과월절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빠스카의 완성은 종말론적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의 힘을 잃어버리고 쇠약해질 수 있다. 루가는 예수님의 전 생애를 악마와의 대결로 본다. 오전에 광야에서 당신 사명을 시작하시면서 악마와의 싸움을 보았다. 악마는 예수님을 3가지로 유혹을 한 다음에 다음 기회를 노리고 떠나갔다고 한다. 예수님이 싸우셨다면 우리도 싸우는 것에 놀라지 말아야 하겠다. 그러나 어떤 것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굴욕도 비방도 모욕도 함정도 박해도 끓임 없이 예수님 안에서 트집을 잡는 것도 예수님을 막지 못했다. 체포하려는 것도 사형 선고도 돌로 치는 것도 죽이려고 하는 것도 막지 못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사랑을 계시하시려고 오셨다. 당신 백성을 위해서 오셨다. 매일 역경을 체험하셨다.

 

모욕을 당하시는 장면을 보자.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는 이 사람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구나! 라고 말한다. 안식일에 금하는 짓을 왜 하느냐고 시비합니다. 예수님께 “보라 먹보요 술꾼이구나!”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 마귀의 괴수라는 말을 듣는다. 악마의 괴수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서 악을 몰아낸다고 비난한다. 순수하고 결백하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데 하느님의 아버지의 사랑의 능력을 가졌을 뿐인데, 마술사나 악마라는 비난을 받는다. 죄인들을 환영하시기 때문에 멸시를 받으셨다. 그것은 모욕이면서 박해이다. 예수님 회당에 가서 예언자 이사야의 두루말이를 받으신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루가4장) 그 말을 다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회당 밖으로 끌고 나가서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리려고 한다. 예수님을 트집잡으려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다. 예수님이 행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예수님을 잡을까 그것만 모의합니다.

 

(루가11:53) 예수께서 그 집을 나오셨을 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몹시 앙심을 품고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루가11:54) 예수의 대답에서 트집을 잡으려고 노리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릴 수 있을까 하고 감시를 한다.

 

(루가13:31) 바로 그 때에 몇몇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가까이 와서 ”어서 이 곳을 떠나시오. 헤로데가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자 사람들의 증오 때문에 예수님은 계속 피해 다니신다.

 

(루가19:47) 예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는데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잡아죽일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 가난한 사람들이나 단순한 사람들만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잡아죽일 생각만 하고 있다.

 

(루가19:14) 그런데 그의 백성들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대표를 뒤따라 보내어 ‘우리는 그자가 우리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고 진정하게 하였다.

 

(루가22:1) 무교절 곧 과월절이라는 명절이 다가 왔다. (루가22:2)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백성들이 무서워서 예수를 어떻게 죽여야 탈이 없을까 하고 궁리하고 있었다.

 

루가복음에는 예수께 대한 살의가 가득하다. 수난 복음을 보자. 화해성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수난을 묵상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죄에 대항하여 싸우는데 도움이 된다. 예수님의 사랑의 힘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사랑의 힘에 끌려서 죄에 대하여 잘 대항할 수 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죄를 극복할 수 없다. 예수님처럼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우리의 화해성사가 되어야 한다. 이런 성서를 늘 묵상하므로서, 우리 마음을 열어서 특별한 은총인 하느님의 사랑의 힘을 받아들이자. 겟세마니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자. 내일 더 보충하겠습니다만 오늘은 “예수님이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하는 말씀의 의미를 보자. 예수님은 인간으로 갖은 계획은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 뜻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 당신 생애를 걸어야 했습니다. 이제 이것이 다 끝났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에 패배로 끝났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관점으로 볼 때에 실패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투신한다는 것과 우리 마음은 다른 문제이다. 예수님은 당신이 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하느님의 뜻에 당신의 마음을 여신다. 예수님은 인간의 계획의 실패와 한계를 받아들이신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신뢰하신다. 깨뜨리지 않는 사랑의 충실성을 아버지 안에서 보시고 아버지를 신뢰하신다. 우리는 사도직을 하다가 인사이동된다. 그러면 우리 자신을 다 바쳐서 한 일을 내버려두기도 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사랑의 충실성이 우리가 하는 어떤 일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것을 버려두어야할 때에는 그것이 쉽지 않음을 체험한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온 마음을 바치기도 해야 하지만 그보다는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의 보편성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는 유다의 입맞춤을 봅니다. 사랑의 표지인 입맞춤으로 배반한다. 악마의 죄악이다. 이보다 더 큰 거짓이 있을 수 없다. 그 다음에 베드로의 부인이 나온다.  베드로는 그 말을 부인하면서 “여보시오, 나는 그런 사람을 모르오” 하였다(루가22:57). 예수님이 이곳 저곳을 끌려 다닌다. 빌라도에 갔다가 헤롯에게로 간다. 아무도 예수님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 다음에 갈바리아로 가신다. 예수님은 학대를 받으신다. 군인이 조롱한다. 십자가의 예수께서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고 기원하셨다(루가23:34).

 

예수님의 용서는 당신 사랑의 능력입니다. 그 후에 아버지 손에 당신의 영혼을 맡기신다. 예수님의 사랑의 힘이 아버지의 손에 맡겨집니다.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이끌려집니다. 그 사랑의 힘이 나를 끌어당깁니다. 저는 십자가의 길의 기도를 하곤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힘을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신의 사랑의 능력을 저에게 주십시오. 성령의 아름다운 선물을 주십시오.

 

수난 사화를 묵상하든지 십자가의 길을 하시든지 자유롭게 하시되 조용한 가운데 평화롭게 하십시오. 저는 때때로 다음과 같은 짧은 기도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서 돌아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해서 돌아가셨다.” 이것은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그 원천은 하느님이십니다. 십자가 밑의 마리아는 당신 아들의 사랑의 능력을 바라보시고 관상하신다. 마리아는 아들의 사랑의 힘으로 기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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