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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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아! 어쩌나: 가난과 배고픔이 행복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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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28 ㅣ No.618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196) 가난과 배고픔이 행복이라고요?

 

 

Q. 새내기 신자입니다. 세례 받은 후 매일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루카복음 6장 20절을 읽다 보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 문의합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저는 집안이 매우 가난해 식구들이 모두 직장에 다니면서 한 푼이라도 더 돈을 벌려고 애쓰고 삽니다. 일이 없을 때는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마음고생 몸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 말씀은 왠지 현실감이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또 부자를 미워하고 가난한 사람 편을 드는 것 같아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을 갖는 것이 죄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A. 형제님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한때 일부 젊은이들이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 공산 혁명을 생각하셨다'고 주장할 정도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해석에 무리가 따를 수 있습니다. 말씀 그대로라면 현실에서 말도 안 되는 삶을 살아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지요.

 

주님이 하신 말씀의 진의 즉, 가난한 사람의 행복이란 100% 채우는 것이 아닌, '삶이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굶주린 사람들 역시 심리적으로 희망과 갈망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것이지 정말 굶주린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정말 가난에 찌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사람, 더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는 흔히 행복이란 모자람 없이 충분히 가진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벌어 행복을 사들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런데 내가 가진 것보다 더 좋은 것들은 늘 있기 마련이고, 완전하게 모든 것을 갖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다 가진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여긴다면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갖지 못한 마음은 늘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철학자 메네데모스는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행복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행복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았습니다. 물론 갖지 못한 것에 미련을 갖는 것은 마음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지고 싶어하는 욕구를 억압하는 것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기에 메네데모스 식의 논리를 ‘궤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더 많은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지금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늘 배고픈 심정으로 공부하고 무엇인가를 창조해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언젠가 연승가도를 달리는 프로팀 코치가 승리했음에도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 나는 지금의 승리에 웃을 때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얼굴이 얼마나 행복해 보이던지요.

 

이처럼 무엇인가를 더 추구하는 사람은 마음에 생동감이 있어 행복합니다. 그러나 감각적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강렬한 행복감을 안겨주는 본능을 충족시키는 행위들은 애석하게도 수명이 짧기 때문입니다. 마치 확 피어올랐다가 금방 사그라지는 불꽃과 같습니다. 이런 행복감은 순간의 황홀함이 지난 다음에는 깊은 어둠이 오고, 더 길고 깊은 공허감이 따라오기에 위험한 감정입니다.

 

그렇다면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행복은 크게 세 단계로 이뤄져 있습니다. 생리적 욕구, 정신적 욕구, 영성적 욕구입니다. 이 세 가지 모두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욕구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영성적 욕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생리적, 정신적 욕구가 좋지 않은 것이라고 치부하고, 오로지 영적인 것만을 추구하려고 하면 심리적으로 상당한 부담이 되기에 주의해야 합니다.

 

신자들 가운데 생리적, 정신적 욕구는 세속적이라며 오로지 영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사람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개개인의 인생길이 어땠는지는 고려하지 않고 자기 콤플렉스에 밀려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삶을 강요하는 미성숙한 사람들입니다.

 

대개 이런 분들은 자신의 무력함을 감추고 위장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생리적 욕구, 정신적 욕구는 적당히 채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영성적 삶을 추구하는 데 무리가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주님 말씀은 깊이 공부해야 합니다. 

 

[평화신문, 2013년 4월 14일, 홍성남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생활상담소장), 상담전화 : 02-776-8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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