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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이벽, 황사영, 정하상의 천주교, 유교 인식의 동일성과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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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8-02 ㅣ No.982

이벽, 황사영, 정하상의 천주교, 유교 인식의 동일성과 차이점*

 

 

국문 초록

 

이벽, 황사영, 정하상은 18세기 후반~19세기 중반까지 천주교를 대표한 지식인이자 신자였다. 그런데 그들이 처한 사회, 사상적 상황이 달랐으므로 그들의 천주교, 유교 인식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이벽은 천주교 수용을 주도했고 유교와의 보완을 꿈꾸었다. 그의 구상은 보유(補儒)의 흐름 안에 있었고, 그의 주장은 경학(經學) 해석을 통해 재생시킨 정약용에 의해 계승되었다. 황사영은 이벽과는 대척점에 서 있었다. 신유박해라는 미증유의 고난을 겪었던 그는 〈백서〉에서 순교자들의 전기를 저술하여 천주교의 도입과 활동을 정당화, 계보화했다. 특히 당론서 형식을 빌어 천주교를 옹호한 사실은 새로운 정치 담론의 등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담론은 진영 논리로의 귀결을 의미하였고, 내외부의 반발을 일으켰다. 이벽의 주장을 계승한 정약용 또한 정치 담론을 빌어, 황사영에 대해 ‘붕당 내부의 잘못된 분파’라는 논리로 비판하였다. 이완된 세태와 긴박한 박해를 두루 경험했던 정하상은 두 사람의 면모를 고루 갖추고 있었다. 그는 보유의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상소라는 정치 문서를 빌어 호교론을 설파하였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와 새로운 인식이 나타나고 있음은 주목할 일이다. 〈상재상서〉가 교리 이해의 완숙함을 드러낸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한편 〈상재상서〉에는 양명학의 개념이 수용되는가 하면, 재화와 유통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1. 머리말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천주교가 조선에 뿌리내릴 무렵 천주교의 지도자들은 비교적 정체성이 뚜렷하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들 대부분은 기호남인 학맥에 속했고, 혈연적으로 매우 가까웠다. 천주교를 사학으로 배척하고 배교를 강요하였던 적대적 사회 환경 또한 비슷했다. 때문에 현대인은 그들에 대해 자연스럽게 동질성을 전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천주교, 적어도 정조대부터 병인박해 전후까지의 천주교는 동질성만큼이나 이질적인 요소들도 다분했다.

 

천주교 내에서 큰 단절을 가져온 사건으로는 고종 대 병인박해를 들 수 있다. 병인박해는 박해의 규모와 기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었다. 국내의 정치 · 사상적 요인이 주로 작용했던 앞 시기와 달리, 프랑스로 대표되는 ‘새로운 이적(夷狄)’과의 문명 충돌이 주원인이었다는 점에서 다른 시간대로 진입하는 계기성을 보여준다.

 

고종 대의 병인박해를 제외한 정조 중후반부터 철종 대까지는 상대적으로 균일해 보인다. 그렇지만 또 다른 변화 양상을 감지할 수 있다. 우선 물리적 시간이 꽤 길다. 1784년의 천주교 성립에서 철종 대까지는 대략 80여 년이다. 이 기간에 조선은 국가 기구의 이완, 세속화의 강화, 민심 이반의 가속화 등을 겪었다.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대응 또한 상황에 따라 이완과 박해를 오갔고, 천주교와 대척에 있던 유학 또한 기존의 춘추의리를 그대로 고수하는 흐름부터 대내외 변화에 조응하는 양상 등으로 다기하게 분화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여러 고민과 대응이 제각각이었던 양상들을 비교,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비교를 통해 그동안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모습들이 드러날 것이다.

 

본고는 이상의 문제의식하에 정조~헌종 대에 천주교를 대표하였던 이벽, 황사영, 정하상 3인의 삶과 관련 저작을 중심으로, 그리고 필요한 경우 정약용을 소환해 비교하였다.1) 당시 천주교의 중요 인물이었던 이들에 대해서는 물론 많은 연구가 있었다. 하지만 직접 비교한 사례는 없었다. 본고에서 굳이 이들을 선택해 비교하는 이유는, 당시의 동질성과 이질성에 상응하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공통점은 그들 모두 천주교회의 지식인들로서 유교와 관련된 간접적(이벽) 혹은 직접적(황사영 · 정하상) 저술을 남겼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이 처했던 시공간은 제각각이었다. 이벽(1754~1785)과 황사영(1775~1801)의 시기는 조금 겹치지만 사회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이벽의 천주교 수용과 저술은 정조 대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분위기의 소산이었다. 황사영의 문제작 〈백서〉는 순조 초반의 신유박해와 이로 인한 극단적 선택에 내몰린 상황이 반영되었다.

 

정하상(1795~1839)은 황사영의 죽음 이후 근 4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순교하였다. 따라서 시간 변화가 저술에 반영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그는 박해, 이완, 다시 박해가 점철하는 삶을 살았으므로 이벽, 황사영의 경험을 모두 체험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의 경험은 또 어떻게 반영되고 있었는가.

 

한편 본고는 3인에 대한 현 한국 천주교회의 입장에 대한 다소의 질문도 겸하고 있음을 밝힌다. 이벽의 역할, 최후에 대한 교회의 논쟁은 진행 중이고, 황사영에 대한 교회와 일반 사회의 평가는 인색하다. 두 평가는 한국 평신도를 대표하는 성인(聖人)으로 추앙받는 정하상과는 대조적이다. 이 대조는 당대의 정황과 사유의 맥락을 일정 부분 배제하고, 이벽의 경우는 유럽의 역사문화적 시각을, 황사영의 경우는 민족주의적 정서를 기계적으로 대입한 결과가 아닌가 한다. 따라서 본고와 같은 다양한 해석을 통해 당시의 맥락을 복원한다면 그들에 대한 평가에도 조금 도움이 될 듯하다.

 

 

2. 이벽, 보유(補儒)의 가능성

 

이벽의 직접 저술로 단정할 만한 자료는 현재로선 없다. 기존에 《만천유고》(蔓川遺稿)에 실린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와 〈성교요지〉(聖敎要旨)가 이벽의 저술로 인식되고 관련 논저가 이에 기반해 작성되기도 했지만 현재 위작임이 주장되었고, 결론이 나지 않았다.2) 다만 정약용의 〈중용자잠〉(中庸自箴)과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에 이벽의 글과 주장을 실은 대목이 있다. 이 저술에서 그의 사상의 편린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이벽을 알 수 있는 자료로는 정약용의 또 다른 기록, 박제가 · 안정복 · 성대중의 기록, 황사영의 〈백서〉 그리고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 작성된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 등이다. 여기서는 이벽과 동시대 인물이었던 정약용, 박제가, 안정복, 성대중의 기술을 통해 그의 지성사적 위치와 유교에 대한 인식을 가늠해본다.

 

이벽의 천주교 · 유교 인식을 가장 많이 전해주는 이는 정약용이다. 1784년(정조 8) 여름에 정조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중용》에 대한 제술을 부과했는데, 당시 정약용은 이벽과 함께 토론한 결과를 정조에게 올렸다.3) 사실 그 일 직전에는 더 큰 영향이 있었다. 음력 4월, 정약용은 큰 형수의 제사를 끝내고 이벽과 함께 배를 탔다가 그로부터 ‘천지조화의 시작과 육신영혼의 생사에 대한 이치’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정약용은 이로 인해 《천주실의》와 《칠극》을 읽었고 흔연히 마음이 쏠렸다.4) 정약용이 이벽으로부터 유학과 천주교를 망라해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알려주는 유명한 일화이다. 안정복에 의하면 이 해에 ‘평소에 불교를 배척했던 후배들이 지금 천주학에는 꼼짝 못하는데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별다른 문자가 있을 터이다. 때문에 (천주학 관련 서책을) 청했는데 지금 이벽이 얼마간의 서책을 가졌는데 이곳을 지나면서 그냥 지나쳤다.’5)고 했다. 이벽은 당시 서교를 주장하여 성호학파 내에서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런데 이벽의 교유와 영향은 동문에게만 국한하지 않았다. 박학하고 천문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성해응, 서명응도 이벽과 교류하며 백두산의 북위도를 논했다.6) 박제가와도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그의 이벽에 대한 추도시가 다음과 같다.

 

진인(晉人)은 명리를 숭상하여서 청담으로 그 시대 어지럽혔지.

덕조(이벽-필자)는 천지사방[六合] 논의했으니 어찌 실제에서 벗어났으리.

필부로 시운(時運)에 관심을 두고 파옥(破屋)에서 경제에 뜻을 두었지.

가슴 속에 기형(璣衡)을 크게 품으니 사해에 그대 홀로 조예 깊었네.

사물의 본성을 깨우쳐 주고 형상의 비례를 밝히었다네.

몽매함이 진실로 열리지 않아 이름난 말 그 누가 알아들으랴.

하늘바람 앵무새에 불어오더니 번드쳐 새장 나갈 계획 세웠지.

오두막집 남은 꿈을 접어두고서 푸른 산에 그 지혜를 파묻었구려.

세월은 잠시도 쉬지 않으니 만물은 떠나가지 않음이 없네.

긴 휘파람 기러기 전송하면서 천지간에 남몰래 눈물 흘리오.7)

 

박제가의 평가에 의하면 이벽은 세계의 진리를 궁구하였고, 현실의 변화와 경제에도 관심이 컸고, 천문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정약용은, 이벽이 빛의 굴절 현상을 설명했던 논리를 빌어 일식과 월식을 설명하기도 했다고 회상한다.8) 이벽은 천주교뿐만 아니라 서학 전반을 깊이 이해했고 북학 그룹을 비롯한 서학에 관심을 기울였던 지식인들과 폭넓게 교유했던 것이다.

 

이벽의 영향은 그의 사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정약용은 이벽이 죽고 난 후 8년이 지난 1793년에 《중용》 관련 글을 탈고했다. 하지만 견강부회한 설이 많아 다시 다산에 유배된 지 14년이 지나서야 《중용자잠》 2권과 《중용강의보》 6권을 완성하였다.9) 경학에 대한 공부가 정점에 이른 50대의 정약용이 30여 년 전에 사망한 이벽을, 그것도 20대에 불과했던 이벽의 견해를 잊지 않고 차용했던 것이다. 《중용강의보》의 서문에는 정약용이 이벽을 얼마나 인간적으로 그리워하고 학문적으로 신뢰했는지가 생생하다.

 

표연히 구름처럼 사라져 옥음(玉音)을 영영 들을 수 없으니 이제 질문할 곳도 없습니다. 광암과 토론하던 때를 생각하면 이미 30여 년이 흘렀습니다. 그가 지금도 살아 있다면 그의 덕행과 학문에 어찌 저를 비길 수 있겠습니까. 옛 의견과 지금 의견을 합해보면 반드시 분명해질 터인데 한 사람은 살고 한 사람은 죽었으니 아아 슬픕니다. 책을 어루만지며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10)

 

정약용의 절절한 토로를 보면 이벽의 입장을 충실히 전하는데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이벽의 유교 인식을 밝히는 첫 단추는 1784년에 《중용》을 논할 때, 이벽이 ‘이(理)는 도심(道心)이고 기(氣)는 인심(人心)이며, 심(心)의 성령(性靈)에서 발하는 것이 이발(理發)이고 심의 형구(形軀)로부터 발하는 것이 기발(氣發)이다.’라 하고 ‘퇴계가 옳고 율곡이 틀렸다.’라고 한 언급일 것이다.11) 이벽은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평소 견지했던 듯하다. 이(理)의 주재성을 강조하는 이황과, 성리설에서 호발설을 계승했던 이익의 견해를 계승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차이도 있다. 마음의 성령을 통해 주재성을 더 구체화한 것이다. 아마 이벽은 이(理)의 주재성이나 능동성을 보증하는 확실한 근거를 찾고자 했던 듯하다. 때문에 이벽과 정약용이 《중용》의 종지를 천명(天命)으로 강조한 점이 주목된다.

 

정약용은 ‘대저 《중용》은 구구절절 천명에서 시작하여 모두 천명으로 귀결하니 도(道)의 본말이 여기에 있다.’라는 이벽의 견해를 소개했다.12) 만사의 근원이자 귀결처인 천(天)이 강조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사고는 또 보인다. 정조가, 주자의 이론은 지(知) 일변도에 귀착한다는 단점을 지적하자, 정약용은 이벽의 논의에 의거하여 덕성은 천명(天命)이자 천덕(天德)으로서 지천(知天)이 중요하므로 먼저 덕성을 높이는 일을 선행한 후에 실천 방법으로서 학문에 정진할 것을 강조하였다.13) 성리학의 주류적인 주지주의(主知主義)적 경향을 배격하고, 마음의 근원인 천명 · 천덕 · 천의 존재를 아는 단계가 선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천명과 천덕을 도덕의 근원으로 체화하는 일은 천주의 존재를 마음으로 깨닫고 인정하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벽에게 유교의 종지와 천주에 대한 신앙은 자연스레 연결됨을 알 수 있다. 또 그러한 자세가 정약용의 유학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음도 주지하는 바이다.

 

서학에서 자극받은 두 사람의 새로운 유학 해석은 유학의 다른 주요 개념들, 이발(已發)과 미발(未發), 귀신 등에서도 확인된다. 미발 · 이발은 심(心)의 정체와 관련한 유학의 핵심 개념으로, 주희 본인에게는 물론 18세기 노론 학계에서 활발했던 이른바 호락논쟁(湖洛論爭)의 주요 주제이기도 했다.14) 정약용은 미발과 이발의 이상적 상태인 중(中)과 화(和)는 군자가 신독(愼獨)할 때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15) 특히 그 실천을 촉발하고 감시하는 존재로 상제(上帝)를 상정한 것은 일반적으로 정약용의 독특한 견해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두 견해를 밝히면서 정약용은 만약 이벽이 살아있었다면 반드시 의견이 합했으리라 예상하였다.16) 정약용 경학의 핵심 명제 가운데 하나인 상제를 통한 도덕률의 확립에 이벽이 미친 영향을 알 수 있으며, 한편 이벽 또한 유교에서의 인격적 지고(至高)의 존재와 천주의 존재를 혼용하여 사용했음을 가늠할 수 있다.

 

정약용은 한때 몰입하였던 천주교를 버리고 고대 유학으로 회귀했지만, 천주관은 사고 저변에 남아 새로운 유교 이해의 밑거름이 되었다. 귀신관 역시 그렇다. 정약용은 정이가 말한 ‘귀신은 천지의 공용(功用)이요 조화의 자취이다.’란 말을 ‘천지는 귀신의 공용이요, 조화는 귀신의 자취이다.’라고 도치하였고, 장재가 말한 ‘귀신은 이기(二氣)의 양능(良能)이다.’라는 견해에 대해 이기는 단순히 음양의 현상일 뿐 스스로 능력을 갖는 존재가 아니라고 비판하였다.17) 말하자면 귀신은 어떤 존재의 흔적이나 현상, 작용이 아니라 귀신 자체가 하나의 독립적 실체라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귀신의 존재가 증명되기란 매우 어렵다. 여기서 정약용은, ‘상천(上天)은 만물을 포괄하기 때문에 제사와 만물을 볼 때 징험할 수 있다, 상제에게 드리는 교사(郊社)를 통해 알 수 있다.’는 등 이벽의 주장 5가지를 인용하여 귀신을 징험할 수 있다고 하였다.18) 이벽은 정약용과 함께 《중용》을 공부할 때 상제, 귀신 등의 존재를 요령 있게 증명했던 것이다.

 

대체로 이벽은 이의 능동성을 중시하는 퇴계-성호의 성리학설에서 출발해 서학을 통해 전래된 상제의 개념을 보합하여 유교의 주요 개념 즉 천명, 미발 · 이발, 귀신 등의 적극성과 실재성을 강조했다 할 수 있다.

 

한편 현실 정치 윤리에서는 이벽이 유교의 위민 사상을 견지했음도 발견할 수 있다. 이벽은 성인이 징험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백성에게 얻는 신뢰를 말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진실로 백성에게 신임을 얻는다면 징험이 없더라도 상관없다 하였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신의 덕에 근본하여 신뢰를 얻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천명인 것이다.19) 또 군주가 성역(聖域)에 이른 후에야 예악(禮樂)을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부득불 제작하게 된 것이라 하였다.20) 두 대목은 이벽의 군주관을 알 수 있는 흔치 않은 자료이다. 군주의 지위나 자격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애민(愛民)의 마음에서 군주다움이 배태되는 것이다. 그 점에서 천명이란 고원한 것이 아니라 애물제인(愛物濟人)의 자연스러운 마음의 발로였다.

 

이상을 보면 전체적으로 이벽에게 유학의 개념 · 정신과 서학의 개념 · 정신은 융합하고 있었다. 유교적 정치윤리 역시 천주교와 불화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재구성되었다. 천주교는 유학의 보완재였던 것이다. 그 배경에는 서학이 크게 탄압받지 않았으며 새로운 대안으로도 수용되었던 정조 대 지성사의 흐름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3. 황사영, 증언과 정치 담론

 

1801년에 터진 신유박해는, 최초의 대박해라는 종교적 성격만큼이나 정치적, 사상적으로도 복잡했다. 영조는 대체적으로 사상시비에 간섭하지 않았고, 정조는 온건하게 대응했기 때문에 제한적이나마 사상의 자유를 누렸던지라 박해의 충격은 더욱 컸다. 이벽과 같은 동 · 서 이상론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융합은 오지 않았고 대신 분열과 불화가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박해로 인해 극단으로 내몰린 천주교 신자들 가운데는 반정부적 분위기가 전연 없지 않았다.21) 황사영의 문제적 문건 〈백서〉(帛書)는 이런 분위기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백서〉 후반부의 이른바 ‘감호(監護)와 대박청래(大舶請來)’라는 파격적인 주장으로 인해, 당대는 물론 현재에 이르기까지 〈백서〉에 대해서는 ‘민족 vs 신앙 자유’라는 프레임에 기초한 논란이 첨예했다.22)

 

그러나 ‘감호와 대박청래’는 〈백서〉 전체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일부 주장이 모든 연구와 판단의 종착지를 고정해버렸기 때문에 〈백서〉를 다양한 시각에서 조명하는 작업은 대체로 소홀해진 감이 있다. 여느 저술처럼 〈백서〉에서도 전통적 사고의 계승을 찾아볼 수 있다. 다음 구절을 보자.

 

성교(聖敎)가 천하에 널리 퍼져 만국의 사람들이 모두 성덕(聖德)을 노래하고 신화(神化)에 고무되었다. … 상주(上主)의 적자(赤子) 아닌 이는 없다.23)

 

이 짧은 구절에 등장하는 ‘성교(聖敎), 성덕(聖德), 신화(神化), 상주(上主), 적자(赤子)’라는 용어는 흥미롭다. 조선의 학(學) · 정(政) 방면에서 지고의 존재인 유학과 군주(와 백성)를 수식하는 ‘성학, 성덕, 교화, 주상, 적자’ 등의 용어와 대부분 겹치기 때문이다. 이미지의 중첩은 이중 작용을 한다. 하나는 익숙한 용어와 설명 체계에 포개어져 호감을 사는 효과이다. 그러나 보완하는 측면의 이면에는 균열의 가능성 또한 있다. 유학의 ‘가르침’[敎]의 권위와 결합한 군주의 이미지와 상징을 빌려 쓰는 차용의 효과 또한 있기 때문이다. 이런 중첩과 차용은 마태오 리치, 이벽 등으로 이어지는 보유(補儒)적 성격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백서〉는 전반적으로, 보유의 전통을 계승하는 측면보다는 단절의 성격이 더 커 보인다. 내용 대부분을 차지한 교인들의 일대기가 정치적 긴장과 판단에 기초해 저술되었기 때문이다. 몇 가지 특징을 추출해 보자.

 

첫째, 가장 많은 분량은 신앙인들의 이력과 행적이다. 전기와도 같은 이 부분으로 인해 〈백서〉는 신앙인에 대한 풍부하고 실증적인 정보를 전해주는 첫 문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사실 이 특징만으로도 이전 서술과는 다른 단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도 황사영은 가급적 신분과 정파를 기술하여 개인들의 정치사회적 좌표를 나타냈다. 이 점은 두 번째 특징을 예고한다.

 

둘째, 〈백서〉 곳곳에서 황사영은 박해의 정치적 동기, 전개 과정, 천주교도의 동향 등을 정치적으로 분석하였다. 〈백서〉 초반부터 천주교에 호의적이거나 중도적인 정조, 노론 시파, 남인 신서파(信西派)와, 천주교에 적대적인 정순왕후, 노론 벽파, 남인 공서파(功西派)를 짧지만 간명하게 대비시켰다.24) 또한 신유박해 당시의 정황 등을 생생하게 정리하기도 했으며25) 때론 치밀한 정치 분석을 시도했다. 특히 을묘년(1795, 정조 19) 이후 상황이 나빠진 두 가지 이유를 들고 박해가 소강상태가 되리라는 분석이나, 조선의 박해는 당론과 긴밀히 연결되었고 주자학에 대한 맹신이 높아 이단 배척에 열렬하다는 분석 등은 당론서의 전형성을 획득하고 있다.26)

 

셋째, 다양한 신분층이 참여하여 주도권을 행사하는 모습, 조정에서 중인 이하의 계층은 가급적 처벌하지 않는 분위기, 지방 천주교도의 동향 등27)도 〈백서〉가 가진 정보 전달과 분석의 성격을 강화하였다.

 

이상의 특징을 종합하면 〈백서〉는 전체적으로 순교자의 전기와 당론서(黨論書)식 저술의 결합으로 봐야 할 듯하다. 다시 말해 〈백서〉는 이전의 종교 저술에서는 볼 수 없던 증언과 정치 담론의 영역을 개척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남인계 당론서가 《동소만록》(桐巢漫錄) 이래 거의 없는 상태에서 짧은 분량에 정치 상황을 압축적으로 잘 보여주었기에 남인계 당론서의 한 맥을 이었다고 평가해도 무리가 없다.

 

이상의 성격을 포착하면 문제의 내복(內服) 청원에 대한 이해가 좀 더 선명해질 듯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황사영의 청원은 너무나 대담하고 몽상적이어서 교인들 사이에도 논란이 있었고 당시 북경 교회가 감행할 수도 없었다. 황사영 역시 ‘성세(聲勢)를 빌려 전교에 도움을 받자.’28)고 했듯이 압박 수단 정도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초점은 왜 그가 극단적인 구상을 전개했는가에 맞춰야 할 듯하다.

 

박해에 맞서고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황사영의 선택은 정치 담론화였다. 그 담론에서는 피/아를 구분하고, 진영을 공고히 한다. 당론서에 가까운 〈백서〉의 내용은 천주교 교리와 교인을 이상화하고, 이에 맞서는 적대적 타자를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박해라는 비상함 속에서의 울분, 정치적 해결에라도 기대야 하는 절박함은 십분 동감하지만, 종교의 보편 진리를 지향했던 그가, 피아의 구분을 명확히 하는 이분법에 기댄 일은 부조화이기도 했다. 그 고리에서는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서양/서교의 이상화와 조선/유학의 부정성이 더욱 극명히 대립하는 악순환밖에는 길이 없다.

 

물론 이 책임을 온전히 황사영에게 돌릴 수는 없다. 예수회를 통해 굳어진 ‘서교가 다스리는 서양’이란 이미지는 약한 자에 대한 배려와 형제애가 실현된 ‘이상적 사회’였다. 현실의 고통이 강할수록 이상적인 바깥 세계에 대한 동경과 기대는 증폭되기 마련이었다. 기독교적 형제애에 대한 갈망이 커질수록 전통적인 유교 윤리, 혈통 의식, 국제 관계 등은 무력하거나 부정적으로 보였을 법하다. 신유박해에 처했던 황사영은 외재(外在)하는 진리 기준에 지나치게 경도되기도 했다. 그가 현실에 대해 냉철하게 판단하지 않고, 선교사가 청 황제, 기독교 국가의 군대를 움직일 수 있다는 지나친 기대를 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런 복잡함이 내재해 있다.

 

이분법의 전략과 외재 기준으로의 경도라는 점에서 황사영은 유교와 서교의 긍정적 통섭을 시도한 이벽과는 구분된다. 부질없는 가정이긴 하지만 우리는 만약 이벽이 신유박해를 경험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 점은 이벽을 끝까지 추앙했던 정약용을 보고 간접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정약용은 〈백서〉보다 조금 후대에 이른바 ‘비본(祕本) 묘지명 7편’을 저술하였다.29) 다급한 상황에서 〈백서〉를 통해 증언한 황사영이나, 잔폐(殘廢)된 남인들의 억울함을 비본으로라도 증언한 정약용의 동기는 비슷하다. 그러나 정약용의 파악과 진단은 달랐다. 그의 시각은 이기양(李基讓)에 대한 묘지명 마지막에 잘 드러났다.

 

아, 정여립이 역적이 아닌 것이 아니나 사람이 기축옥사를 원옥(冤獄)이라 하는 것은 최영경 · 정언신 등 죄 없이 죽은 이가 많기 때문이고, 허견이 역적이 아닌 것이 아니나 경신옥사를 원옥이라 하는 것은 이원정 · 유혁연 등 죄 없이 죽은 이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록 역적과 관련된 사람을 다스리는 옥사라 할지라도 억울하게 죄를 받은 사람이 있으면 사화(士禍)인 것이다.30)

 

정약용은 옥사를 빌미로 억울한 이들마저 희생된다면 그것은 ‘사화’라고 규정하였다.31) 그러나 정여립과 허견 등에 대한 판단에서 알 수 있듯이 옥사 자체의 불가피성은 수긍하는 입장이었다. 즉 남인 일부가 이단으로 추죄되었던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정약용은 천주교를 독실하게 믿었던 셋째 형 정약종에 대해서는 묘지명을 기술하지 않았고, 조카사위 황사영과 그의 〈백서〉에 대해서는 ‘역적 황사영’이자 ‘하늘을 뒤엎을 흉계가 담긴 〈백서〉’로 단정했다.32) 남인 내부에 정여립과 허견 등에 비견되는 이들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 점에서 정약용의 입장은 내부의 잘못을 인정하지만, 이를 빌미로 옥사를 부당하게 확대하는 일 또한 잘못이라는 양비론이었다. 일정한 한계를 넘지 않았던 온건한 태도였던 정약용의 입장은, 양 진영을 극단적으로 설정하고 대립적 관점에서 파악한 황사영과는 크게 달랐다.

 

 

4. 정하상, 통합과 새 가능성

 

정하상은 1795년(정조 19)에 태어났다. 1801년(순조 원년)의 신유박해 때 부친 정약종과 이복형 정철상이 순교하였다. 숙부 정약용의 집에서 살았고, 부친의 뒤를 이어 신앙을 돈독히 하고 학문을 연마하였다. 혹독했던 유년을 조성했던 사회 현실은 1804년 순조가 친정하고 안동 김씨를 비롯한 시파계 인사들이 정권을 담당하면서 조금 나아졌다. 사상에 대한 통제가 상대적으로 느슨해졌고 정치적 격변도 덜했다. 1818년에 정약용이 오랜 유배에서 풀려났고, 1823년에 채제공의 관작이 회복되었던 것도 그러한 분위기의 소산이었다. 정하상은 천주교 재건에 힘썼고 1831년에 조선교구 설정을 이끌어냈다.33)

 

그러나 유화적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헌종 즉위 후 벽파에 뿌리를 둔 풍양 조씨 측의 성장이 두드러졌고, 1839년(헌종 5)에는 조인영 · 이지연 등이 주도한 이른바 ‘기해박해’가 일어났다. 이때 정하상은 순교를 예감하고 탄원서이자 호교서인 〈상재상서(이하 〈상서)〉(上宰相書)34)를 제출하고 순교하였다.

 

유년의 박해기, 35년 정도의 이완기, 다시 박해로 삶을 마감한 정하상의 일대기는 마치 이벽과 황사영의 두 상황이 고루 겹쳤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두 장면은 〈상서〉에도 투영되었다. 〈상서〉는 우의정 이지연에게 올리는 3,452자의 〈상재상서〉와, 192자의 〈우사〉(又辭)로 구성되었다. 대체적인 내용은 이벽의 교리서처럼 천주교에 대한 요약 · 소개이면서, 황사영의 정치 담론처럼 박해의 부당함을 정치적으로 탄원하였다. 잘 알려진 내용이지만, 우리는 교리 해설과 정치 담론이 어떻게 계승되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는지 재음미할 수 있다.

 

〈상서〉는 서론, 천주 존재 증명, 십계명, 영혼론 · 천당지옥론, 천주교회의 정당성, 천주교 비판에 대한 반비판으로 구성되었다. 추신에 해당하는 〈우사〉는 제사와 신주(神主)에 대한 견해이다.

 

전반부는 천주교와 유학의 정신이 상통하므로 상호 보완한다는 보유(補儒)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서론에서 천주교가 일용상행(日用常行)의 도리라고 강조하였다. 본론에서 양지(良知)는 하늘을 두려워하는 본성이자 인간의 양심이고, 양지의 보편성으로 인해 천주의 존재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또 《성경》은 경천(敬天)을 강조하는 유교의 경서와 지향이 같고, 고대 이래 동서양의 교류를 통해 이미 동양의 명현들도 알고 있었다고 하였다. 십계명의 핵심 역시 천주를 사랑하고 타인을 자기처럼 사랑하는 것으로 유교 윤리를 보완하거나 완성한다고 하였다. 영혼은 삼혼론(三魂說)에 입각하여 서술하였다. 모든 생물은 생혼(生魂), 각혼(覺魂), 영혼(靈魂)을 가졌는데, 그중 인간만이 영혼을 지니고 있으며, 유학에서 말한 '하늘이 명한 본성[天命之謂性]'이라고 하였다. 물론 교리를 설명하거나 옹호할 때에도 논리 구성이 정연하고 압축적이며, 심화한 면모가 드러나기도 했다.35)

 

전체적으로 〈상서〉는 더욱 정밀한 논리로 보유의 이상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 특징만으로 30여 년의 시간이 가져온 전진적인 면모를 다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한 세대가 흐른 후의 달라진 모습이나 새로운 가능성은 어떤 것일까. 필자는 세 가지 특징을 주목해 보았다.

 

첫째는 천주교에 쏟아지는 비판에 대해 천주교 교리가 아닌, 유교 윤리를 들어 반비판을 전개한 점이다. 이것은 기해박해 당시 정부의 명분이었던 〈척사윤음〉(斥邪綸音) 및 개인들의 벽위론(闢衛論)에서 천주교를 이단, 반인륜으로 비판하였던 상황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다. 이단에 대해서는 서론에서, ‘역대의 유학자들은 의리를 따져 이단을 규정했는데 지금 천주교에 대해서는 의리 여부를 묻지 않고 외면만 보고 박해한다.’고 반박하였다.36)

 

천주교가 반인륜적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상서〉의 후반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가장 큰 비중은 천주교가 ‘무부무군(無父無君)’이고 ‘재화와 여색을 탐한다.’[通貨色]라는 정형화된 담론에 대해서였다. 정하상은 충효는 만고불변의 진리라는 점을 인정하고, 천주교 역시 ‘부모에게 효를 하라.’는 십계명을 들어 충효를 강조한다고 했다. 여색을 탐한다는 비난에 대해서도 십계명에서 강력히 금지하는 일이라고 반박하였다. 뜨거운 쟁점이었던 제사와 신주 사용에 대해서는 〈우사〉에서 적극적으로 변호하였다. 영혼의 양식이 도덕이므로 음식을 갖추어 제사 지내는 일은 형식에 지나지 않고, 신주 또한 부모의 상징물이 될 수 없다고 피력하였다. 대체로 유교 윤리가 절대적 권위를 지녔던 조선 사회에서 천주교의 효도, 금욕 윤리를 강조하여 방어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상서〉의 후반부는 의미심장하다. 정하상은 천주를 천지의 대부모(大父母), 대군(大君), 대주재(大主宰)라고 강조하였다.37) 충효는 궁극적으로 천주에 대한 공경으로 귀속되었다. 유학이 이단을 공격할 때 썼던 ‘무부무군’이란 표현 또한 의미가 역전되어, 천주에 대한 불공(不恭)이 오히려 무부무군이 되었다. 이 논리에서는 천주교와 유교 윤리의 동질성이 아니라 천주교 윤리의 우위 속에 유교가 적극적으로 포섭되었다.

 

둘째는 유학의 개념, 시사 흐름을 활용한 점이다. 예컨대 양지에 대한 강조를 들 수 있다. 양지는 하늘을 두려워하는 본성이자 인간의 양심으로서, 그 보편성으로 인해 천주의 존재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양지는 주지하다시피 양명학의 핵심 개념이다. 이는 마태오 리치가 양능(良能) · 오성(悟性) · 영성(靈性)을 전거로 활용했던 점과 취지는 비슷하나, 《맹자》와 양명학의 논리를 적극적으로 인용했다는 차이가 있다. 조선에서 성리학을 보완하기 위해 심학(心學)에 관심을 가졌던 지적 전통의 소산으로 추정할 수 있다.38) 영혼과 《중용》의 천명을 일치시킨 것도 활용의 일례이다.

 

재화의 유통을 옹호한 대목에서는 시사 변화를 수용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상서〉는 대체로 보유 혹은 유교 윤리의 활용을 주된 논법으로 삼았다. 그러나 재화에 대해서는 사회에 필수적이므로, 금지가 부당하다고 반박하였다.39) 교리, 윤리와는 다른 방식의 반박이다. 사실 재화 유통은 유교 입장에서도 찬반이 가능하고, 천주교에서도 찬반이 가능한 사회경제적 범주의 문제이다. 당시 정부가 관행적 논리를 그대로 인용했다면, 정하상은 시세 적응 또는 경세적 필요를 내세웠다. 이 점은 교리를 떠나서도 매우 설득력이 있다.

 

셋째는 사유 변화의 가능성을 예고한 점이다. 정하상이 천주교와 유교의 위계를 정하고 포섭한 논리는 사회 질서에 대한 파장을 의미하였다. 천주라는 존재 앞에서 군(君) · 신(臣), 부(父) · 자(子)의 수직적 위계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천주교인들이 자신들은 충성과 효도를 어긴 적 없다고 아무리 강변해도, 대다수 지배층은 ‘천주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논리 속에 잠재한 현실적 파괴력을 알고 있었다. 백성 하나하나가 박해를 감내하면서 자신이 신앙을 결단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유교적 명분 질서의 소멸을 예고했다. 그 점에서 〈상서〉에는 교회에 대해 ‘지성(至聖), 지공(至公), 지정(至正), 지진(至眞), 지전(至全), 지독(至獨)’의 수식어를 쓴 것은 범상하지 않다. 절대적 존재로 설정된 천주 · 교회의 등장은 19세기의 시점에서 예견되는 미래상을 은연 중에 반영하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이 동향을 당시 학문, 종교의 흐름과 일맥상통할 수 있다고 본다. 최한기의 학문에서는 유학의 천리를 대체하는 ‘운화기’(運化氣)라는 절대 개념이 설정되고, 동학(東學)에서는 ‘지기’(至氣)가 등장하였다.40) 19세기 중반 이후 유학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학문 체계를 구상한 최한기, 유학 · 서학을 의식하고 영향받았던 동학 등이 모두 새로운 절대성을 지향하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유학의 구심력을 벗어나는 사상적, 심리적 경향이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한다. 물론 이 개념들의 관련성은 본고에서는 조심스러운 가정 수준이고, 심화된 비교는 앞으로의 숙제이다. 하지만 19세기에 가속화하는 탈유학의 다양한 내부 동력을 가늠할 수는 있다.

 

 

5. 결론

 

이벽, 황사영, 정하상은 18세기 후반~19세기 중반까지의 천주교를 대표한 지식인이자 신자였다. 그러나 그들이 처한 사회, 사상적 상황이 달랐으므로 그들의 천주교, 유교 인식과 지향은 다양한 맥락 속에서 새롭게 읽힐 수 있다. 이벽은 천주교 수용을 주도했고 유교와의 보완을 꿈꾸었다. 그 입장은 마태오 리치 이래의 보유(補儒)의 흐름 속에 있었고, 사후 수십 년 후에도 이벽의 입장은 경학 속에서 그를 재생한 정약용을 통해 계승되고 있었다.41)

 

황사영은 이벽과는 대척점에 서 있었다. 신유박해라는 초유의 상황에서 그는 전혀 다른 내용과 형식의 〈백서〉를 남겼다. 순교자들의 전기를 전면화하여 천주교의 도입과 활동을 정당화, 계보화했고, 당론서와 같은 진영 담론을 통해 천주교를 옹호했다. 파격적이고 한쪽 편에 경사된 그의 입장은 당국자는 물론 남인계의 온건한 지식인에게도 수용되기 어려웠다. 이벽을 그리워했던 정약용은, 황사영에 대해서는 내부의 그릇된 싹을 잘라내듯이 그를 부정하였다. 부정하는 형식도 비슷했다. 황사영이 〈백서〉에서 당론서를 차용했듯이, 정약용은 묘비명에서 붕당 안에서 잘못된 분파가 나왔다는 전통적 당론서 서술을 빌어 그를 비판하였다.

 

정하상은 두 사람의 면모를 두루 보이면서도, 시간의 흐름을 반영이라도 하듯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다소 이완된 시대와 긴박한 박해를 두루 경험한 그는 보유의 기조 속에 상소라는 정치적 문서 형식을 빌려 호교론을 설파하였다. 한편 교리 이해의 완숙함이 드러나고 곳곳에 새로운 개념을 또한 보였다. 양명학적 요소가 있는가 하면 재화와 유통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세 사람의 선택이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재고해보려 한다.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은, 천주교를 찬성하건 반대하건, ‘천리’(天理)와 ‘천주’(天主)의 대결이 가져올 파장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서로 대결한다면 그것은 문명 사이의 가치관 전쟁이자, 그에 동반한 사유와 많은 개념들을 재조정하는 일이 될 터였다. 그 지점을 유화적으로 돌파했던 선구자들은 16세기 천주교를 동양에 전파했던 예수회 선교사들이었다. 천주교 설명에 유교의 텍스트와 개념을 빌린 그들의 전략은 중국에서보다 조선에서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유교적 이상 사회를 가장 진지하게 고민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천주교에서 유학과 일치하거나 때론 유학을 뛰어넘는 가능성을 보았다. 이벽과 정약용은 인격적 상제관에 기초한 새로운 유학 틀을 구상하였다. 정약용에게 영향을 미쳤던 이벽 또한 천주교를 축으로 유학의 미비점을 보완하려 하였다. 천주교와 유교의 보완을 꿈꾸었던 이벽의 노력은 정약종, 정하상 등으로 맥을 이어갔다. 조화로운 이상을 꿈꾼 이벽은 그 점에서 적극적으로 재고되어야 한다. 이 점은 이벽과 정약용의 이탈이 비록 아쉬운 점이긴 하다. 하지만 진리를 향한, 그 점에서 유(儒)도 서(西) 아닌 진리 자체를 향한 열정은 높이 사야하지 않을까 싶다.

 

황사영의 경우는, 이상을 향한 열망은 높았지만 대립에 기초한 이상이라는 점에서, 융합의 지점을 이탈했다. 그리고 결과는 비극이었다. 비극은 단지 그 개인과 가족, 당대 교인들에게만 끝나지 않았다. 지배층과 일반 백성은 〈백서〉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인들을 정말로 무부무군의 무리, 나라를 팔아먹는 무리로 여기게 되었다.

 

현재의 우리는 세 사람의 선택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야 할까. 한국은 유교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으면서도 기독교[가톨릭과 개신교] 신자 수가 1위인 동아시아의 특이한 국가이다. 전근대의 보편 가치와 근대의 보편 가치를 상징하는 두 종교 사이에 현재의 우리가 놓여 있다. 그러나 인정과 대화 사이의 줄타기는 아슬아슬하다. 대화는 서로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겸손에서 출발하지만, 나 · 우리 혹은 타자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고정해버리면 성찰과 다양한 해석이 설 자리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황사영은, 박해라는 정황을 감안하더라도, 외재(外在)의 기준을 절대화해버렸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벽과 정하상은 교회의 생명력과 관련해 곰곰이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그들의 선택은 ‘내 안의 가치’와 ‘타인 안의 가치’를 동등하게 존중하고 서로 대화하는 자세였기 때문이다. 다원을 긍정하고 독선에 빠지지 않는 개방성은 세계화, 다문화, 정보화가 가속하는 지금에서 더욱 중요하다.

 

 

참고 문헌

 

1. 사료

朴齊家, 정민 등 역, 《정유각집》, 돌베개, 2010.

成大中, 《靑城雜記》

安鼎福, 《順菴集》

丁若鏞, 《與猶堂全書》

丁夏祥, 윤민구 역, 《상재상서》, 성황석두루가서원, 1999.

黃嗣永, 윤재영 역, 《黃嗣永帛書》, 정음사, 1981.

 

2. 논문 및 저서

김상홍, 〈茶山의 〈秘本 墓誌銘 7편〉과 天主敎〉, 《동아시아고대학》 30, 동아시아고대학회, 2013.

김선희, 《마테오 리치와 주희 그리고 정약용》, 심산, 2012.

박희병, 《운화와 근대》, 돌베개, 2003.

백승종, 《정감록 미스터리》, 푸른역사, 2012.

엄연석, 〈天主와 理氣의 관점에서 본 동학과 서학의 사상적 접변 양상〉, 《태동고전연구》 34, 태동고전연구소, 2015.

원재연, 〈조선후기 천주교 서적에 나타난 ‘良知說’에 대하여〉, 《양명학》 20, 한국양명학회, 2008.

윤민구, 《초기 천주교회사의 쟁점 연구》, 국학자료원, 2014.

이장우, 〈黃嗣永과 朝鮮後期의 社會變化〉, 《교회사연구》 31,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정성한, 〈황사영의 ‘백서’(帛書)에 대한 연구〉, 《장신논단》 33, 2008.

한국사상사연구회 편, 《조선 유학의 개념들》, 예문서원, 2002.

 

…………………………………………………………

 

1) 필자는 이벽, 황사영, 정하상에 대해 개념사의 시각을 대입하여 학술대회 발표문, 신문 기사, 해제 등을 저술한 바가 있다.(〈曠菴 李檗의 생애와 사상〉, 포천문화원 학술연구발표회, 2009 ; 《서울신문》 2012년 7월 23일 자, 21면, 〈선택! 역사를 갈랐다〉(21), “조선 천주교 개척 이벽 & 황사영” ; 한림과학원 편, 〈上宰相書〉, 《동아시아 개념연구 기초문헌 해제 Ⅲ》, 선인, 2015.) 이들 작업을 진행하면서 세 사람의 행적과 저서를 함께 비교할 필요를 느꼈다. 본고는 그 연장선에서 작성되었다. 다만 처음 이벽에 대해 발표한 글(위 발표문, 2009)에서는 〈성교요지〉, 〈천주공경가〉와 정약용의 이벽 관련 저술을 주 텍스트로 삼았다. 본 논문의 초고에서도 이벽과 관련해서는 〈성교요지〉, 〈천주공경가〉와 정약용의 이벽 관련 저술을 주 텍스트의 하나로 삼았다. 그러나 두 저작은 최근 진위가 논란 중이다. 애초 연구사 검토에 충실하지 못했던 것은 전적으로 필자의 잘못이고, 이 점을 적시해주었던 심사자분들께 지면을 빌어 감사를 전한다. 본고에서는 논쟁 중인 이벽의 저술을 제외하고, 정약용의 저술 등 이벽의 의견을 간접적으로 전하는 사료를 중심으로 수정하였다.

 

2) 김양선 목사가 1967년에 《만천유고》(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를 공개하였다. 이 책에는 이벽이 저술했다는 〈성교요지〉, 〈천주공경가〉를 비롯한 초기 천주교 사료들이 수록되었다. 교회사 학계에서는 엄밀한 사료 비판을 거치지 않고 이 저술을 이벽의 것으로 인정하고 연구를 진행하였다. 최근 윤민구가 《초기 천주교회사의 쟁점 연구》(국학자료원, 2014)에서 〈성교요지〉를 비롯한 《만천유고》의 저술 그리고 《이벽전》, 《유한당언행실록》을 비롯한 초기 천주교 관련사료에 대해 용어, 구성 등을 검토하여 위작임을 주장하였다. 이벽의 생전에 쓰이지 않았던 19세기 개신교 용어들이 사용되었다는 점이 근거였다. 아울러 윤민구는 1930년대 위작이 성행했던 정황까지 소개하였다. 이 점은 충분히 수긍할 만하고, 또한 이 문제 제기와 관련한 연구가 현재 진행 중이다. 본고에서도 일단 논란 중인 사료는 보류했다.

 

3) 丁若鏞, 《與猶堂全書》 2집, 권4, 〈中庸講義補〉, 序.

4) 丁若鏞, 《與猶堂全書》 권15, 〈先仲氏墓誌銘附見閒話條〉.

5) 安鼎福, 《順菴集》 권6, 〈答權旣明甲辰年〉.

6) 成大中, 《靑城雜記》 권5, 〈醒言〉.

7) 박제가, 정민 등 역, 《정유각집》 1책, 돌베개, 2010, 519쪽.

8) 丁若鏞, 《與猶堂全書》 권10, 〈碗浮靑說〉.

9) 丁若鏞, 《與猶堂全書》 2집, 권4, 〈中庸講義補〉, 序.

10) 丁若鏞, 윗글.

11) 丁若鏞, 《與猶堂全書》 2집, 권4, 〈中庸講義補〉, ‘朱子序’.

12) 丁若鏞, 《與猶堂全書》 2집, 권3, 〈中庸講義補〉, ‘鬼神之爲德節’.

13) 丁若鏞, 《與猶堂全書》 2집, 권4, 〈中庸講義補〉, ‘故君子尊德性而道問學節’.

 

14) 未發과 已發에 대한 주희의 舊說과 新說, 호락논쟁에서의 전개에 대해서는 《조선 유학의 개념들》(한국사상사연구회 편, 예문서원, 2002) 참조.

 

15) 丁若鏞, 《與猶堂全書》 2집, 권3, 〈中庸自箴〉, ‘喜怒哀樂之未發’.

16) 丁若鏞, 윗글.

17) 丁若鏞, 《與猶堂全書》, 2집, 권3, 〈中庸講義補〉, ‘鬼神之爲德節’.

18) 丁若鏞, 윗글.

19) 丁若鏞, 《與猶堂全書》 2집, 권4, 〈中庸講義補〉, ‘子曰吾說夏禮節’.

20) 丁若鏞, 《與猶堂全書》 2집, 권4, 〈中庸講義補〉, ‘子曰愚而好自用節’.

 

21) 眞人을 대망하며 기성질서를 부정하는 하층의 문화, 사상이 면면했고 부분적이나마 천주교와도 영향을 주고받았다.(백승종, 《정감록 미스터리》, 푸른역사, 2012) 신유박해 당시에도 황사영은 교우들이 난을 일으킬 가능성을 염려하고 있었다.(황사영, 윤재영 역, 《黃嗣永帛書》, 정음사, 1981, 112~113쪽)

 

22) 〈백서〉의 평가에 대한 정리는 이장우의 〈黃嗣永과 朝鮮後期의 社會變化〉(《교회사연구》31, 2008)과 정성한의 〈황사영의 ‘백서’(帛書)에 대한 연구’〉(《장신논단》33, 2008) 참조.

 

23) 《黃嗣永帛書》, 20쪽.

 

24) 정조에 대해서는 ‘聖敎를 의심하고 두려워했지만, 본래 무슨 일이든지 크게 확대하지 않으려 했다.’고 평했다. 그에 비해 벽파인 정순왕후는 ‘정조 사후 정권을 잡자 벽파를 끼고 선왕의 장례가 끝나자 시파를 내쫓았다.’고 혹평하였다. 또 노론 시파는 임금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여 정조의 심복이 되었고, 벽파는 정조에게 항거하였고 근래 대단한 위세라 하여 순조 초반 이른바 ‘정순왕후 수렴청정기’(1800~1803)의 동향을 생생하게 전했다. 남인의 동향 또한 천주교에 호의적인 신서파와 그렇지 않은 공서파를 나누어 전했다(황사영, 윗책, 22~33쪽).

 

25) 신유박해 초기인 1801년 2월 초의 상황에 대해서도 새로 임명된 포도대장 신대현의 관대한 처리, 소북 박장설, 노론 이서구, 남인 최현중 등의 비난 상소, 정순왕후의 의금부 이관, 이가환 · 정약용 · 이승훈 · 홍낙민의 체포 등을 생생하게 전했다(황사영, 윗책, 40~41쪽).

 

26) 황사영, 윗책, 95쪽, 110쪽.

27) 황사영, 윗책, 34쪽, 81쪽, 96쪽.

28) 황사영, 윗책, 113쪽.

 

29) 정약용이 ‘祕本’으로 작성한 묘지명은 自撰 2편을 포함한 총 7편으로 1935년에 공개되고 영인되었다. 대상 인물은 李家煥(《與猶堂全書》 권15, 〈貞軒墓誌銘〉), 李基讓(권15, 〈茯菴李基讓墓誌銘〉), 權哲身(권15, 〈鹿菴權 哲身墓誌銘〉), 吳錫忠(권15, 〈梅丈吳錫忠墓誌銘〉), 丁若銓(권15, 〈先仲氏墓誌銘〉), 丁若鏞 2편(권16, 〈自撰墓誌銘壙中本〉; 권16, 〈自撰墓誌銘集中本〉).

 

30) 丁若鏞, 《與猶堂全書》 권15, 〈茯菴李基讓墓誌銘〉.

 

31) 묘지명에 나타난 정약용의 입장에 대해서는 김상홍의 〈茶山의 <秘本 墓誌銘 7편>과 天主敎〉(《동아시아고대학》 30, 2013) 참조.

 

32) 丁若鏞, 《與猶堂全書》 권15, 〈先仲氏墓誌銘〉.

 

33) 정하상은 1816년 역관의 하인으로 위장해 북경에 들어갔고 이후 총 9차례에 걸쳐 몰래 왕복하면서 북경교구로부터 조선교구를 독립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34) 본서는 일찍부터 필사되어 알려졌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 블랑(Blanc) 주교의 서명이 있는 한문필사본과 임인년(연기 미상)에 필사된 한글 필사본 등이 전하고, 한국학중앙연구소에도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1887년 홍콩 納匝肋靜院에서 정하상의 약전인 〈丁保祿日記〉를 첨부하여 영인 출판되어 중국에서도 읽혔다. 1931년 서울 闢衛社에서 출간한 《闢衛編》(7권 2책) 7권에도 전문이 실려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는 일본인 稻葉岩吉이 소장한 원본을 1930년에 필사한 필사본이 전한다. 번역본도 다수인데, 본고에서는 《상재상서》(윤민구 역, 성황석두루가서원, 1999)를 활용하였다.

 

35) 정하상은 천주의 존재에 대해 萬物, 良知, 聖經을 통해 증명하였다. 이 중 만물에서는 4가지 속성[質 · 貌 · 作 · 爲]을 강조했다. 이 견해는 원래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인(material cause), 형상인(formal cause), 운동인(efficient cause), 목적인(final cause)을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 존재 증명에 이용했던 것이고, 다시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에 인용되었다. 천주교를 매개로 조선의 일부 지식인이 서양의 스콜라 철학을 원용하여 인간, 만물, 초월자에 대한 유교의 인식을 수정하거나 탈피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6) 정하상, 앞의 책, 12~13쪽.

37) 정하상, 앞의 책, 33~36쪽.

 

38) 조선후기 천주교와 양지설에 대해서는 원재연의 〈조선후기 천주교 서적에 나타난 ‘良知說’에 대하여〉(《양명학》 20, 2008) 참조.

 

39) 정하상, 앞의 책, 33쪽.

 

40) 최한기의 ‘운화’ 개념의 함의에 대해서는 박희병의 《운화와 근대》(돌베개, 2003), 동학의 至氣와 천주교 · 유교의 천주, 천리 등의 비교 · 同異에 대해서는 엄연석의 〈天主와 理氣의 관점에서 본 동학과 서학의 사상적 접변 양상〉(《태동고전연구》 34, 2015) 참조.

 

41) 마태오 리치와 정약용의 보유론적 이상주의에 대해서는 김선희의 《마테오 리치와 주희 그리고 정약용》(심산, 2012) 참조.

 

* 이 논문은 2018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8S1A6A3A01022568).

 

[교회사 연구 제52집, 2018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이경구(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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