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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930년대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선교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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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12 ㅣ No.664

1930년대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선교활동

 

 

1. 미국 천주교회와의 만남

2. 평신도 쇄신운동
3. 문서 선교의 강조
4. 교회사 연구의 추진
5. 신사 참배의 거부
6. 프로테스탄트와의 교류
7. 나머지 말



1. 미국 천주교회와의 만남

지난 2007년 9월 30일 한국 천주교회는 천주교 평양교구 설정 80주년을 기념하고, 평양교구의 선교에 기여한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비석 제막 행사를 미국 뉴욕주 어씨닝의 메리놀 외방전교회 본부에서 개최하였다. 비문에는 평양교구에서 활동한 선교사 92명의 이름이 새겨졌다. 이와 같이 한국 천주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메리놀 외방전교회는 1911년 아시아 지역의 선교를 목적으로 미국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외방전교회였다. 이러한 까닭에 ‘미국 외방전교회’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한국 진출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한국 천주교회와 미국 천주교회의 새로운 만남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한국 진출은 그 이전까지 천주교에 대해 갖고 있던 한국인들의 이해를 크게 바꾸어주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개화기 이래 천주교는 프랑스의 종교로, 프로테스탄트는 미국의 종교로 구별하여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1) 다시 말해서 미국은 프로테스탄트와 연결된 것으로만 이해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교리를 연구한 뒤에 얻은 결과라기보다는 국가의 차이에 중점을 둔 결과였다. 그러므로 그동안 프로테스탄트의 나라로 이해되고 있던 미국에서도 천주교회가 있다는 사실은 한국인들에게는 놀랄만한 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敎案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충돌한 까닭에 한국인들에게는 제국주의의 나라로 인식되었던 프랑스와 달리 신사의 나라이며 공평무사하고 영토에 야심이 없는 나라로 받아들여졌던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천주교가 한국에 새롭게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진출은 프랑스의 파리 외방전교회가 중심이 된 한국 천주교회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남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가 미국 천주교회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왜 동아시아의 선교를 목표로 창설되었는가 하는 점, 한국이 초기 진출 지역으로 결정된 과정에 대한 내용이나 당시 한국 천주교회를 이끌면서 메리놀 외방전교회를 받아들여야만 했던 파리 외방전교회의 내부 사정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도 물론 중요하겠지만,2)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한국에 진출하기 이전까지 한국 천주교회가 미국의 천주교회와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었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체계적인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한국이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병합될 때까지 한국 정부가 보여준 미국에 대한 기대와 우호적인 태도를 고려할 때에도 그러하다. 즉 한미관계사 연구에서 천주교의 비중이 높아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 천주교회가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진출 이전에도 미국 천주교회에 대해 일정한 이해를 하고 있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한국인의 미국 이주나 미국인의 한국 거주를 통해서 그 단편적인 모습만을 그려두고자 한다.

한국 천주교회가 미국 천주교회를 간접적으로 접하게 되는 일은 한국 최초의 미국 대학 졸업생으로 알려진 변수(1861~1891)와 관련이 있다.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후인 1883년 보빙사로 미국을 처음 방문하였던 변수는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1886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대학을 마친 후 농무성에 취직을 한 인물이었다. 그는 1891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는데, 그와 친분을 가지고 있던 앰멘 가문의 가톨릭 묘지에 묻히게 되었다. 이때 앰멘 제독이 한국에 있는 변수의 가족에게 그의 사망 소식과 유품을 전달하겠다는 의사를 미국 국무성에 표명함에 따라 한미간의 외교교섭이 전개되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러한 가운데 1892년 2월 하순 뜻밖에 변수의 어머니가 뮈텔(G.-C.-M. Mutel, 閔德孝) 주교를 찾아와서 이 사실을 묻고 부탁함으로써 마침내 해결되었다.

여기에서 변수가 미국에서 가톨릭 신자가 되었을까 하는 문제가 파생된다. 그렇다면 그는 최초로 확인되는 미국에서의 한국인 신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연구는 그가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던 것으로 이해하였다.3) 즉 그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앰멘 일가와 접촉을 하면서 영향을 받았을 것은 틀림이 없지만, 신자가 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변수가 가톨릭 묘지에 묻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앰멘 일가의 호의에 의한 것이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변수의 어머니가 유품을 전달받기 위해 다른 인물이 아니라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뮈텔 주교를 직접 찾아왔다는 점에서 변수의 천주교 신자 여부와 미국 천주교회와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보다 자세한 분석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구한말 한국에서 미국을 처음으로 방문한 인물부터 미국 천주교회와 일정한 관련을 가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보다 분명한 사실은 대한 제국시기 궁내부 고문관을 지낸 미국인 샌즈(W.F. Sands, 1874~1946)라는 인물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4) 매우 호의적인 한국관을 가지고 있던 백인계 엘리트 지식인이자, 직업 외교관이었던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그는 1898년부터 1899년까지 주한 미국 공사관 제1등서기관을 역임하였고, 1899년부터 1904년까지 대한제국의 궁내부 고문직을 담당하였다. 당시 샌즈는 한국의 독립 유지와 근대화 달성이라는 두 과제를 동시에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귀국 이후에도 한국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한국인 지인들과 교류하는 한편, 극동 정세의 변화를 탐지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등 한국 전문가로서 계속 활동하였다. 그는 루즈벨트 대통령과 국무성 관리를 만나서 미국 정부의 친일정책과 한국 포기 의도에 대해 비판을 가하였고, 또한 한국 황제의 전직 고문이라는 직함을 걸고 일본의 잔학 행위와 식민지화의 기도를 폭로하였으며, 한국이 근대화 및 독립을 유지할 수 있다는 글들을 계속해서 발표하였다. 이것은 당시 친일적인 경향을 띠고 일본의 한국 침략을 추인했던 국무성 관리들과 지식인층의 한국 인식과 비교할 때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처리 과정에서도 한국이 주요 이슈로 떠오르자 미국 정부가 이 지역에서 취해야 할 정책을 언론이나 미국 정계에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장기간 거주하며 한국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그가 한국 천주교회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그는 한국 내의 천주교회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여 미국의 가톨릭 선교 본부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1929년 세계 평화를 위한 천주교회의 회원으로서 멕시코에서 종교와 국가 간의 갈등을 중재하였으며, 미국 내의 가톨릭 선교 문제에 대해 강연을 하였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의 한국관에는 가톨릭 신자로서 갖고 있는 약자에 대한 동정심과 불의에 대한 적개심이 바탕이 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는 선과 악의 대결 구도로 한국과 일본을 보았다. 근본적으로 선한 민족인 한국인들은 선이고, 잔인하고 비열한 일본인들은 악으로 규정하면서 그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자연의 실수라고까지 극언을 퍼부었다. 그만큼 그의 활동에는 천주교 신앙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샌즈가 보여준 가톨릭 신자로서의 활동은 현재 매우 단편적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한국에 머물고 있었을 때 한국 천주교회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것은 뮈텔 주교의 일기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5)

뮈텔 주교는 샌즈가 매일 첫 미사에 참례하는 등 매우 열심한 신자였음을 말하였다. 그는 또한 제주도에서 일어난 신축교안과 관련된 샌즈의 활동을 비중있게 기록하였다. 1901년 6월 4일자를 보면 샌즈는 조선 정부가 군대를 제주도에 파견하기 위해 세를 낸 자오조푸 호를 타고 제주도에 도착하였는데, 난의 진압을 위해 무력 사용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군대의 증파를 요청하였다. 그는 6월 16일 돌아와서 뮈텔 주교를 만나 난이 진압되었으며, 모든 관장과 아전들이 천주교회의 반대편임을 숨김없이 전달하였다. 그리고 샌즈는 7월 28일부터 시작된 재판 과정에도 깊이 관여하였는데, 피고인들과 유죄인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프랑스 선교사들의 영향력에 대적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음을 뮈텔 주교에게 알렸다. 뮈텔 주교는 재판을 둘러싼 드 플랑시와 샌즈의 대립 또한 언급하였다. 특히 이러한 외교적 대립과 관련하여 샌즈가 법정에 들어오려 했을 때 일본인 2명이 그를 때린 사실과, 이 사건의 배후에 일본인 공사가 있었음도 알려주고 있어 주목된다.

샌즈는 제주뿐만 아니라 해서교안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1903년 그는 해서교안으로 미국에 퍼진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 중상에 대하여 반박할 생각으로 쓴 자신의 편지 초고를 뮈텔 주교에게 가지고 오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샌즈는 뮈텔 주교에게 미국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이 한국 천주교회에 대해서 계속하고 있는 중상모략에 대하여 반박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샌즈는 미국 천주교회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뮈텔 주교는 교황이 고종황제에게 편지를 보낼 것이라는 사실을 샌즈에게 전달해줄 것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구한말 한국정부에서나, 미국의 학계와 외교계에서 일정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샌즈의 활동은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한국진출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임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가톨릭 신자로서 그의 활동에 대해서 앞으로 자세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사실만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이러한 가운데 중국에 먼저 진출한 메리놀 외방전교회는 새로운 선교지역으로서 한국 진출을 모색하게 된다.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총장인 월시(J.A. Walsh) 신부가 1916년 내한하여 뮈텔 주교를 만나는 등 현지 사정을 시찰하면서 한국 진출에 관심을 표명하자, 파리 외방전교회는 평안도 지방의 관할을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과 국적이 같은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맡기는 데 동의하였다. 당시 평안도 지방에서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활동이 매우 부진하였는데, 그 원인은 다름이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적극적인 활동 때문이었다. 일제 강점기 평양은 프로테스탄트가 가장 성행하고 있는 곳이었다. 이에 메리놀 외방전교회는 1922년 교황청 포교성성으로부터 평안도의 포교권을 위임받고, 그 다음해인 1923년부터 신부들을 평양 지역에 파견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2. 평신도 쇄신운동

일제 강점기 한국에서의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역사는 몇 시기로 나누어서 이해할 수 있다. 그 첫 번째 시기는 1923년 5월부터 1930년 4월까지로, 1927년 평양교구가 설정되는 등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한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시기이다. 번(J.P. Byrne, 方溢恩, 1888~1950) 신부가 지목구장으로 활동한 시기이기도 하다. 두 번째 시기는 모리스(J.E. Morris, 睦怡世, 1889~1987) 몬시뇰이 지목구장으로서 활동한 1930년 4월부터 1936년 7월까지이다.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한국에 정착하고, 그 활동 방향을 설정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신설된 평양교구를 중심으로 기존의 파리 외방전교회와는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본당과 교구를 운영하는 선교 정책을 본격적으로 보여준 시기이다. 그 세 번째 시기는 신사참배 문제로 인하여 모리스 몬시뇰이 평양교구장직을 사임한 이후부터 태평양 전쟁이 발생한 다음 해인 1942년 6월 메리놀 외방전교회 선교사 전원이 미국으로 강제 송환된 시기이다. 1937년에 평양교구 설정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지만,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활동이 일제의 탄압으로 크게 위축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제 강점기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선교 활동은 1930년대를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고 하겠다.

1930년대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선교 활동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지적할 수 있는 일은 평신도 쇄신운동이었다.6)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한국에 진출한 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진 일은 바로 평신도와 교회의 상호 관계를 새로이 설정하는 일이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성립은 평신도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이들이 상당 기간 동안 커다란 역할을 하였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성직자가 들어오게 된 이후부터 평신도의 역할은 점차적으로 줄어들어갔다. 성직자가 교회 안에서 가지고 있는 위치와 영향력이 크게 강조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구한말을 거쳐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메리놀 외방전교회는 평양교구를 중심으로 평신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교회의 현실과 고민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는 교세의 정체, 일제의 천주교회에 대한 압박, 공산주의의 대두 등 여러 가지 문제에 계속적으로 부딪치고 있었다. 따라서 메리놀 외방전교회는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메리놀 외방전교회는 교회의 발전에 무엇보다도 평신도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인식시키고자 하였고, 이에 평신도 쇄신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위해서 메리놀 외방전교회는 가톨릭운동을 전개하였다. 가톨릭운동은 교회 당국의 위임과 지도 아래 행하는 평신도의 조직적 활동으로, 평신도의 교계적 사제직 참여라는 명확한 개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에 평신도가 교회의 활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가톨릭운동이 한국 천주교회에서 가장 먼저 수용된 곳은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관할한 평양교구라고 할 수 있다. 가톨릭운동은 1920년대 후반에 찾아볼 수 있지만, 그것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1930년대의 일이었다.

메리놀 외방전교회는 1931년에 들어오면서 가톨릭운동을 한국 천주교회 전체의 문제로 확산시켜 나갔는데, 그 결과 한국 지역 시노드에서 가톨릭운동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평양교구와 다른 교구 사이에는 가톨릭운동을 둘러싸고 일정한 입장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공교진행’, ‘가톨릭 진행’으로 표현되기도 하였지만, 그와 달리 평양교구는 가톨릭운동으로 용어를 확정지으면서, 평양교구가 이 운동의 중심지임을 선언하였다.

활동 목표에서도 한국 천주교회는 가톨릭운동의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평신도의 교회 장상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강조하면서, 정치 문제, 계급 문제와 같이 교회 내부의 불화를 야기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피할 것을 요구하였다. 즉 가톨릭운동이 단순히 천주교의 전파와 자선 사업 등 종교적인 일임을 분명히 규정하였다. 이에 대해서도 메리놀 외방전교회는 입장을 달리 하였다. 가톨릭운동은 신자 개인의 완덕을 추구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평신도의 사도직 참여와 함께 여러 가지 사회적 활동의 중심 기관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평신도로 하여금 개인적이고 종교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그들과 관련된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관심을 가질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전개한 가톨릭운동은 1934년 평양교구 평신도 대회의 개최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평신도 대회를 개최한 것은 가톨릭운동을 위해 평신도의 각성과 성직자들과 평신도의 단결 일치라는 두 가지 요소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평신도들에게 신앙과 생활의 쇄신을 통해 세상의 잘못된 풍조에 과감하게 대항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아울러 평신도가 성직자를 후원하며 그들과 잘 협조하여 교회 사업을 추진해 나가야 한다고 말하였다. 성직자와 평신도가 단결과 일치를 잃게 되면 교회가 제대로 발전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평양교구 평신도 대회는 1934년 8월 15일부터 19일까지 5일 동안 열렸는데, 전체 15개 가운데 중강진을 제외한 본당에서 참여한 2~3인의 신자 대표들을 포함하여 모두 100명의 신자들이 모여 가톨릭운동의 활동 목적과 방법을 다루었다. 토의 방식은 각 지방의 의견을 먼저 종합하고, 그것을 결정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는데, 이것은 비록 지방 대표들이 결정한 것이지만 평양교구에 속한 교우 전체가 결의한 것으로 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평양교구 평신도 대회는 한국에 천주교가 수용된 이래 처음 있는 행사로서, 외국에서도 유례가 드문 역사적 회합으로 평가되었다. 그리고 장차 전국적으로 통일된 가톨릭운동의 조직화를 위해 평양교구 가톨릭운동연맹을 결성하였다.

한편 평양교구 교구장인 모리스 몬시뇰은 평양교구 가톨릭운동연맹의 결성과 함께 선발된 가톨릭운동연맹 위원들에게 새로운 당부를 하였다. 그는 위원들에게 이 시대에 대한 통찰을 가질 것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위원들은 민중이 자원하여 선발한 책임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며, 따라서 위원들은 민중을 보호하고 지도하는 커다란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민중으로 표현된 것은 주목되는 사실이다. 단순히 가톨릭 신자만을 의식하지 말고, 가톨릭 진리의 대상인 한국 민족을 염두에 두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때문에 한국 천주교회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청하고 기다리고 있는가, 그리고 현재의 한국 천주교회가 어떠한 모양이며, 장래에는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인지를 머릿속에 분명히 인식하라고 요구하였다. 이것은 결국 한국 천주교회가 ‘순조선인’ 교회로서 자립할 수 있는 근본적인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처럼 새롭게 조직된 평양교구 가톨릭운동연맹이 그 첫 번째 사업으로 설정한 것은 한국 천주교 수용 150주년 기념 행사였다. 이를 위하여 두 가지 사항을 우선적으로 결정하였다. 그 하나는 어느 한 교구, 한 지방의 행사에 머물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비록 평양교구가 이 사업의 발기자가 되었지만, 전체 교구의 찬동과 후원을 얻어 전국적인 가톨릭의 일치된 대회를 갖기로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장소로서 서울도 좋지만, 평양은 종교의 도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프로테스탄트의 움직임도 활발하고, 특히 새롭게 발전하는 도시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기념 행사를 열어 천주교를 사회적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평양교구 가톨릭운동연맹은 다른 교구의 가톨릭운동 대표자들과 함께 토의하는 제1회 조선 가톨릭운동 5교구 성직자위원회를 열었다.

한국 천주교 수용 150주년 기념 행사는 1935년 10월 2일부터 4일까지 3일 동안 대성황 속에 거행되었다. 이 기념 행사는 모두 평신도들에 의하여 조직되고 이루어낸 것이어서 주목된다. 무엇보다도 한국의 5교구 중에 가장 나이 어린 교구인 평양교구에서 그것을 추진하였지만, 전국의 신자들이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가톨릭운동연맹이 평양교구는 물론 한국 천주교회에 가장 바람직한 교회 조직으로서,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활동 단체임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였다.

1936년에 들어와서 8월에 1주일 동안 평양교구 가톨릭운동연맹은 하기 가톨릭대학을 개최하였다. 하기 가톨릭대학은 평양교구에서 추진한 교리 강습회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1933년에 개최된 제1회 교리 강습회를 뒤이은 것으로 하기 가톨릭대학을 제2회라고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2회 교리 강습회인 하기 가톨릭대학은 평양교구만이 아니라 한국의 전체 교구를 대상으로 바뀌었다. 평양교구 가톨릭운동연맹이 교리 강습회에 계속적으로 관심을 가진 이유는 가톨릭 교리를 제대로 배울 기관이 없었고, 민중의 요구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평양교구가 교리 강습회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전도사 양성소를 설립하려고 노력한 것과도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기 가톨릭대학은 가톨릭운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누구든지 먼저 배워서 알고 그 후에 가톨릭운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하였다. 즉 한국 천주교회에서 처음으로 마련된 이 행사를 통하여 새롭게 약진하려고 하는 천주교회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하기 가톨릭대학을 한국 가톨릭운동사상에 신기록을 기록한 것으로, 그 결과에 대하여 한국 가톨릭운동의 새로운 길을 연 것으로 자평하였다. 그만큼 하기 가톨릭 대학은 매우 성공적이었던 것이다.

1930년대 메리놀 외방전교회에서 관할한 평양교구에 의하여 3년 가까이 보여준 가톨릭운동은 한국 천주교회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던 사건으로 평가된다. 본래의 취지를 따라 평신도의 교계적 사도직 참여를 적극적으로 꾀한 것으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평신도에 대해서 적극적인 관심을 가짐으로써 평신도를 쇄신시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가 사제 중심, 주교 중심이 아니라 이제 평신도와 함께 나아가겠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드러낸 것이기도 하였다. 또한 평신도들로부터의 호응이 대단하였다는 점에서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으며, 그만큼 평신도들의 새로운 성장을 가능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즉 가톨릭운동은 한국 천주교회로 하여금 평신도의 위치와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새롭게 자각할 수 있는 계기를 주었다고 하겠다. 해방 이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하여 새로운 형태의 평신도 사도직의 문제가 강조되었지만, 1930년대 평신도 쇄신운동을 추구한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가톨릭운동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3. 문서 선교의 강조

1930년대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선교 활동에서 두 번째로 주목할 사실은 문서 선교의 강조라고 할 수 있다.7) 평양교구는 어느 다른 교구보다도 정기 간행물의 출판을 통한 문서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추진하였다. 하기 가톨릭대학을 ‘교리 대학’이라고 언급하였던 것과 달리, 평양교구에서 출판한 잡지인 《가톨릭 연구》를 ‘활자 대학’이라고 부르는 등 문서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처럼 문서 선교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이를 통해서 평신도를 쇄신시키는 한편, 한국인들에게 천주교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였다.

평양교구에서 《가톨릭 연구 강좌》라는 첫 월간 출판물을 간행한 것은 1934년 1월의 일이었다. 이 잡지의 간행은 1933년 9월 교구에서 전교 회장들에게 실시한 교리 강습회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교리 강습회를 마치는 날에 강습한 과목을 등사로 인쇄하여 한부씩 회원들에게 배부하자고 결의하였다. 그러나 전교 회장으로 구성된 후원회의 움직임만으로는 잡지의 간행은 역부족이었다. 이때 교구장인 모리스 몬시뇰이 이러한 평신도들의 열의와 움직임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가톨릭 연구 강좌》가 간행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가톨릭 연구 강좌》는 평양교구 평신도와 사제의 일치 속에서 간행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경향잡지》나 《가톨릭 청년》과 같은 기존의 출판물에 대한 불만도 개재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때문에 창간사에 잘 드러나고 있듯이 평양교구는 이 시기를 한국 가톨릭의 정기 간행물의 역사에 새로운 여명이 비쳐오는 기간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가톨릭 연구 강좌》의 창간호는 본래의 계획과 달리 1,000부를 간행하고, 다시 2,000부를 재판으로 찍을 정도로 국내외에 걸쳐서 매우 고무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가톨릭 연구 강좌》2호에 평양교구에서 추진하는 문서 선교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나오고 있어 주목된다. 가톨릭 진리를 선전하는 것이 현재 가톨릭교회의 신성한 임무인데, 선전은 글(문서)로써만이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문서 선교가 가톨릭 진리를 선전하는 가장 힘이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역설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먼저 읽으라, 그리고 읽도록 하여라, 또한 읽을 것을 만들어라”는 세 가지 사항을 강조하였다. 이에 각 교회와 집회에서는 문맹 퇴치 기관을 설립하라고 요구하였는데, 특히 한글을 가르치는 언문 학교부터 먼저 시작하라고 말하였다.

1934년 7월호에 이르면 《가톨릭 연구 강좌》는 《가톨릭 연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창간된 이후 제5호의 간행에 이르면서 잡지로서 《경향잡지》나 《가톨릭 청년》보다 높이 평가된 것과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1935년 1월호에서는 문서 선교와 관련된 교구장의 〈권유서〉가 발표되었다. 약 1천 명의 사람들이 《가톨릭 연구》를 열심히 읽는 사실에 대해서는 감사를 드리지만, 아직도 이와 같이 유용한 출판물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커다란 문제임을 지적하였다. 이에 1934년 평양교구 평신도 대회에서 결의한 대로, 1935년 평양교구 가톨릭운동연맹의 첫 사업으로서 《가톨릭 연구》의 〈1가구 1부주의〉를 추진함을 밝혔다. 그의 말처럼 현대에 가장 힘이 있는 전교 기관인 출판 사업을 철저히 힘써나갈 것을 다짐하였다.

1936년에 들어가면 《가톨릭 연구》는 기존의 것과는 달리 매우 주목할만한 내용을 담았다. 그것은 1월호 이후 4월호까지는 〈사회 신문〉으로, 5월 이후에는 〈사회 뉴스〉로, 8월호에서는 〈뉴스 팔방〉으로 나오는 기사였다. 이것은 〈교회 소식〉과는 구별되면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의 주요 사건을 다양하게 다루어줌으로써 《가톨릭 연구》의 일반 독자들로 하여금 국내외의 정세를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가톨릭 연구》가 잡지로서 뿐만 아니라 뉴스와 신문의 기능까지를 포함하려고 한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모리스 몬시뇰이 교구장직에서 물러난 이후 《가톨릭 연구》는 1936년 10월호에서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1936년 6월에 있었던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의 정기 간행물과 관련된 새로운 결정과 관련이 있었다. 《가톨릭 청년》이 폐간되었는데, 《경향잡지》와 《가톨릭 연구》, 그리고 《가톨릭 소년》만이 5교구 공인 정기 간행물로서, 일반 성직자의 협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금 수송에 있어서는 여전히 《경향잡지》만이 교회 성직자들이 책임을 지며, 나머지 두 잡지는 각 교구에서 맡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가톨릭 연구》는 《가톨릭 조선》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즉 한국 천주교회 전체를 위해서는 《가톨릭 조선》이라는 이름이 오히려 적절하다는 인식하에 바뀐 것이었다. 이것은 《가톨릭 조선》이 《가톨릭 청년》의 뒤를 이어 5교구의 공인을 받는 잡지로 새로이 바뀌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가톨릭 청년》의 폐간과 《가톨릭 연구》의 《가톨릭 조선》으로의 전환에는 많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주교회의의 결정 사항에 대한 해석상의 문제가 있는 등, 기존의 연구에서는 미묘하고 불미스러운 부분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자료로서는 그 사정을 모두 다 파악하기는 힘들다. 《가톨릭 청년》의 폐간은 주교회의에서 《가톨릭 연구》를 5교구의 통제하에 두기 위해서 합의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만큼 《가톨릭 조선》의 발간에 평양교구 이외의 다른 교구의 영향력이 증대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가톨릭 조선》은 명칭의 변화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가톨릭 조선》을 이른바 가톨릭 종합 잡지로 만들어나가겠다는 것이었다. 이전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던 일반 사회 소식이 조금씩 줄어들면서, 가톨릭에 중점을 두는 방식으로 바뀌어갔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가톨릭운동을 통해서 천주교와 한국민족과의 관련성을 강조하였던 《가톨릭 연구》의 내용과는 아무래도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러한 변화는 가톨릭운동의 기관지였던 《가톨릭 연구》의 본래 성격은, 그것이 더욱 강조된 《가톨릭 조선》에 오면서 약화되고 변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러한 점에서 《가톨릭 조선》은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가톨릭 조선》으로의 변화와 함께 신자 독자층의 확보를 위한 새로운 노력이었다. 이에 《가톨릭 조선》은 새로운 노력을 전개해야만 했는데, 바로 가톨릭 문서 보급 운동으로 나타났다. 1937년에도 이어지면서 모두 네 차례에 걸친 지상 토론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한국에서 가톨릭의 보다 유효한 발전이 문서 보급에 있느냐, 교육 기관 시설에 있느냐는 문제에 대한 토론이었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문서 보급에 놓여 있었다.

1938년에 들어와서도 《가톨릭 조선》은 2월호부터 가톨릭문서 보급 운동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면서 전개해 나갔다. 잡지의 첫머리에서 교회의 출판 사업을 강조하여 그것이야말로 한국 천주교회에 있어 성당을 건축하는 것보다 더 긴급한 사항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아주 작은 희생으로 교회에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출판 사업이라는 것이라는 점도 강조하였다. 또한 현대 사회에서 진리의 사도는 가톨릭 기자라고 하면서 기자의 역할과 의도 지적하였다.

《가톨릭 조선》의 움직임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한국 천주교회에 반듯한 가톨릭문화 기관 하나 없는 형편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즉 가톨릭문서 기관의 창설을 기대하였다. 《가톨릭 조선》을 출판하고 있는 가톨릭 조선사의 활동만으로는 여전히 역부족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가톨릭 조선》3월호에서는 권위가 있는 가톨릭출판사를 제대로 만들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출판사의 위치는 평양이 아니라 서울에 두되, 한국 천주교회 전체의 균등한 권위를 대표하는 독립 기관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현재 전국에 산재해 있는 소규모의 각지 출판사를 가톨릭출판사에 그대로 넘기든지, 통제하에 두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일반 신자들이 ‘가톨릭출판사 기성회’와 같은 조직을 결성하여 후원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것은 1937년에 열린 제3회 하기 가톨릭대학 청강생들이 조직한 ‘가톨릭문서 협우회’를 발전시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가톨릭문서 운동을 추진한 《가톨릭 조선》의 또 다른 구체적인 활동은 1938년 4월에 새로이 나온 가톨릭 월간 신문의 발행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가톨릭조선사의 지나친 계획이 아닌가를 편집자조차 자신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이제 20만에 도달하는 한국 가톨릭신자 대중의 지지와 성원이 있다면 신문 발행이 충분히 가능하리라는 것이었다. 가톨릭타임스 등의 이름이 언급되었지만, ‘가톨릭 월보 〈성등〉(聖燈)’으로 나오게 되었다. 보통 신문의 반절면 4페이지 체재로, 매달 20일에, 정가는 1부에 5전으로, 창간호는 대략 1만부를 발간하였다. 이제 평양교구는 잡지뿐만 아니라 신문을 통해서 가톨릭문서 운동을 전개하겠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평양교구의 신문과 잡지 발간을 통한 가톨릭문서 운동은 본래 추구하던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9월호에까지 가톨릭 월보인 〈성등〉에 대한 계속적인 광고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주던 《가톨릭 조선》이 12월에 가서 폐간되었기 때문이다. 문서 보급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가던 순간에 그것이 좌절되었던 것이다. 폐간의 배경에는 가톨릭 정기간행물 가운데 처음으로 1938년 4월호부터 첫 면에 〈황국신민의 서사〉를 수록하여 일제의 식민 통치 정책에 협력한 것과도 관련이 있었다. 다른 잡지보다 여기에 빨리 게재된 것은 일제가 《가톨릭 조선》을 현재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가톨릭 잡지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가톨릭 조선》이 보여준 이러한 움직임을 평양교구의 일제 정책에 대한 협력으로만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우선은 1940년대에도 잡지가 그대로 존속되었던 《경향잡지》의 상황과 비교할 때 《가톨릭 조선》의 폐간은 그러한 요구를 지속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평양교구의 의지와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930년대 평양교구에서 간행한 《가톨릭 연구》와 《가톨릭 조선》은 한국 천주교회의 정기 간행물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겠다.


4. 교회사 연구의 추진

한국에 진출한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활동 가운데 새롭게 관심을 가져야하는 사실은 이들이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하여 커다란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8) 평신도들이 한국 천주교회사를 알아야 하며,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지식을 요구하였다. 이제 서울이 아니라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평양교구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는 1920년부터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메리놀 외방전교회 선교사로서 제일 먼저 입국하였으며, 초대 평양교구장을 지낸 번 신부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그는 많은 순교자가 있는 나라로 전 세계에 알려져 있는 한국에서 순교자들의 뒤를 따를 수 있다는 것을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특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순교자가 나온 뒤에 강해질 것이라고 하며 순교자의 길을 따르기를 갈망하였다. 그러한 그의 바람은 6·25 전쟁 때 초대 주한 교황 사절로서 피랍되어 순교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번 신부가 한국 천주교회사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것은 한국 천주교회사가 순교자의 희생이라는 기름진 토양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그의 인식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순교사 중심의 한국 천주교회사에만 관심을 가지지 않고,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상황을 알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그것은 그가 영어로 번역한 책인 The Catholic in Korea (HongKong, 1924)를 통해서 살필 수 있다. 이 책은 드브레(E.A.J. Devred, 兪世竣) 주교에 의하여 홍콩에서 불어로 간행된 《한국의 천주교 -그 기원과 발전》이라는 소책자를 번역한 것이었다. 이 책에서는 달레(C.C. Dallet)의 그것과는 달리 한국 천주교회의 최근 상황까지를 다루고 있어 주목된다. 그러므로 번 신부의 한국 천주교회사 영역(英譯) 작업은 당시 영어권에 속하는 신자에게 한국 천주교회사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한 관심은 1930년대에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모리스 신부(1930년 몬시뇰 서임) 역시 번 신부와 마찬가지로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선교 초기에 그는 도보 선교 여행을 통해서 한국 천주교회사를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였다. 여행을 통해서 파악한 순교한 선교사들의 행적 - 앵베르 주교가 처음으로 한국말로 설교한 지역, 베르뇌 주교가 신자에게 세례를 준 이야기 -, 순교자들과 당시 신자들과의 친족 관계, 박해기 신자들의 탈출구와 삶의 근거지로서의 산악 지역에 대한 이해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1930년 평양교구장이 된 후 그는 프랑스인 순교자 베르뇌 주교의 유물인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녔는데, 그의 삶을 파리 외방전교회로부터 물려받은 역사적 유산에 보태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모리스 몬시뇰이 선교사로서의 자기 인식, 즉 선교사로서 어떠한 정신을 가지고 어떠한 길을 걸어야 하는가를 고민하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순교자들이 그의 선교에 있어서 길잡이의 표적을 새겨주었고, 그들의 열성이 그의 임무 수행에 영감을 불어넣어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특히 1934년 이후 평양교구에서 발간된 잡지 발간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이제 그는 문서 선교를 통해서 한국 천주교회사를 신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은 한국에 도착한 직후부터 순교사 중심의 한국 천주교회사나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상황에 대하여 커다란 관심을 가졌다고 하겠다.

1930년대 평양교구에서 발간한 《가톨릭 연구》 및 《가톨릭 조선》에 실려 있는 교회사 연구의 내용은 크게 세계 교회사와 한국 천주교회사 부분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가톨릭 연구》와 《가톨릭 조선》에 실린 교회사 관련 내용 가운데 우선 주목되는 사실은 세계 교회사 관련 서술일 것이다. 당시에 이와 같이 세계 교회사 관련 서술이 한 호도 빠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서술된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것이 평양교구에서 처음으로 시도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오늘날에도 한국 천주교회에서 한 개인에 의한 세계 교회사 저술이 쉽지 않다는 점에서 1930년대 평양교구의 이러한 시도는 교회사 연구사에서 상당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가톨릭 연구》에서 세계 교회사를 자세히 다룬 이유는 총론에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교회사와 세계사의 상호 관계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인류와 세계의 원동력이 된 그리스도교 역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세계 역사를 철저히 연구하는 첫 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세계 교회사 서술의 중요한 한 목적은 천주교에 대한 호교론적인 입장과도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교가 각 시대에 있어서 얼마만한 공헌을 인류에게 제공하였는지를 잘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이때 천주교가 그 역사적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가톨릭 연구》와 《가톨릭 조선》에는 세계 교회사에 대한 서술 이외에 한국 천주교회사와 관련된 풍부한 내용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한 언급 역시《가톨릭 연구》의 창간호부터 찾아볼 수 있다. 매우 다양한 형식으로 한국 천주교회사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 크게 주목되는 사실이다.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한 관심이 보다 구체적인 이해의 양상으로 드러난 것은 치명자 특집을 마련한 《가톨릭 연구》1934년 9월호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관심은 역시 그 다음해의 일이었다. 그것은 1935년 10월 천주교 수용 150주년 및 시복 10주년 기념 행사와, 그와 함께 발간된 《가톨릭 연구》의 ‘조선 가톨릭 세기 반 기념 특집’ 합집호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기념대회에서 주목을 끈 행사는 ‘조선 천주교 사료 전람회’였다.

‘조선 가톨릭 세기 반 기념 특집’ 합집호는 한국 천주교 수용 150주년과 시복 10주년을 학술적으로 기념하는 모임이 아무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이유에서 기획된 것이었다. 특집호는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전 역사를 총망라하여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특집호는 교회의 점진적 향상과 현재의 상황을 과거와 비교해 볼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의 과거를 돌이켜보며, 앞날의 계획을 세울 새로운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횟수를 거듭할수록 《가톨릭 연구》의 내용은 폭과 내용에서 넓어지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후 《가톨릭 연구》에서는 1936년 7월호에 이르러서 ‘대구교구 설정 25주년 기념 특집호’를 마련하여 대구교구사를 정리하였다. 또한 1936년 9월호에서는 천주교 간도 선교 40주년을 기념하여 간도 천주교회 소사를 정리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1937년 4월의 《가톨릭 조선》에서 평양교구 설정 10주년 특집을 만드는데 계속적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평양교구가 현재 한국 천주교회에서 차지하는 현재의 위치를 재점검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930년대 평양교구에 의한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는 일제 강점기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는 평양교구에서 그와 같은 노력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이다. 그동안 파리 외방전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의 흐름이 이제 새롭게 변화됨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1933년 그동안 한국 천주교회사에 집중적인 관심을 보여주었던 서울교구의 뮈텔 주교가 사망한 이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를 집중적으로 한 것은 바로 평양교구였다고 말할 수 있다.

평양교구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는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로 하여금 주체적 인식을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우선 세계 교회사 속에서 한국 천주교회사의 위치를 찾아보려고 노력하였다. 세계 교회사의 서술은 한국 천주교회사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세계 교회사의 서술을 박해사부터, 또한 천주교를 박해한 사회가 어떻게 암흑 속에 빠지게 되었는가의 문제를 함께 살피고 있는데, 박해와 순교 속에서 성장한 한국 천주교회사를 비교사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한국 천주교 150년사의 서술을 통하여 한국 천주교의 기원과 수용이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강조하였다. 한국 천주교의 기원이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라, 1784년 한국인에 의하여 사제 없이 자발적으로 탄생하였음을 분명히 밝혔다. 이것은 일본 기원설에 대한 한국 천주교의 입장을 표현한 것이었다. 아울러 천주교의 수용 이전 도덕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참담한 상태였던 한국이 천주교의 수용과 함께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면서 사회 각 부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동아일보》가 〈천주교와 조선〉이라는 사설에서 평양 기념 대회를 한국의 사상계를 흔드는 사건으로 평가한 것도 이러한 점과 관련시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이들이 한국 천주교회사 서술에서 단순히 순교사를 서술하는 과거의 역사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로까지 그 시각을 확대시켜 당대사를 서술하고자 노력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더욱 커다란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 같다. 특히 교구사의 간행이 주목된다. 그리고 한국 천주교의 각 분류사에 대한 조사는 매우 인상적인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평양교구에서 파악하고자 노력한 내용들은 한국 천주교회사의 서술과 관련해서 다루어야 할 거의 모든 항목에 대한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평양교구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는 평신도 신자들로 하여금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에 커다란 관심을 갖도록 만들어주었다는 점 또한 지적할 수 있다. 《가톨릭 연구》에 실린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한 서술의 대부분은 평신도 신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역사가들만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평론가, 소설가, 시인, 미술가 등 다양한 사람들로 하여금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한국 천주교회사를 순한글로 쉽게 표현하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그동안 달레와 같은 프랑스 사제들이나, 李能和와 같은 비신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한국 천주교회사 서술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한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형식이나 수준의 높낮이를 넘어서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것이라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1930년대는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에 있어서 공백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1930년대는 새로운 변화를 찾아볼 수 있는 시기였다. 이런 가운데 메리놀 외방전교회 신부와 평신도 신자들에 의하여 주도된 평양교구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는 1930년대 이후 일본인에 의하여 주도되었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의 공백을 메워주기에 충분한 작업이었다고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5. 신사 참배의 거부

1930년대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선교 활동 가운데에서 크게 부각되는 사실은 신사 참배의 거부일 것이다.9) 평양교구에서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32년 9월 18일 평양의 천주교 학교들이 만주사변 1주년을 기념하여 만주 출정 전몰 전사자 위령제에 참석을 거부함으로써 평양교구의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게 되었다. 이 운동은 당시 평양교구장인 모리스 몬시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평양교구에서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이 활발히 전개될 무렵 파리 외방전교회가 관할하던 뮈텔 주교의 서울교구에서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기존의 입장을 수정하고, 그것을 허용하였다. 이와 같은 교구간의 입장 차이는 각 교구가 속한 전교회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모리스 몬시뇰이 관할한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평양교구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독자적인 움직임을 걸어 나갔다. 1922년 이래 한국 천주교회의 입장이었으며, 1932년에 반포된 《한국 교회 공동 지도서》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교구장들에게도 그와 같은 입장을 취하기를 촉구하였는데, 특히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들과의 태도 변화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와 같이 평양교구를 중심으로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이 계속적으로 전개되고 한국 천주교회의 교구별 입장 차이가 드러나자, 주일 교황 사절이 이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1932년 10월 당시 주일 교황 사절 무니(E.F. Mooney) 대주교는 신사참배를 허용하는 히로시마 교구장 로스(J. Rose) 몬시뇰의 견해를 담은 글을 한국의 천주교회에 보냈다. 그러나 같은 달 평양교구는 교구장인 모리스 몬시뇰의 허락하에 중화본당의 콜만(W.J. Coleman) 신부가 로스 몬시뇰의 글에 대한 반대 의견서인 〈신사 참배 :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를 주일 교황 사절에게 제출하였다. 이를 통해 신사 참배의 허용은 로마 교황청의 승인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후 1933년 1월 무니 대주교는 교령을 통해서, 그리고 같은 해 3월 6일부터 16일에 있었던 교구장 연례회의를 통해서 한국 천주교회가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서는 주일 교황 사절의 의견을 따를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1933년에 들어와서도 평양교구의 입장은 크게 바뀌지 않았는데, 평양교구 소속 메리놀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반대 움직임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평양교구는 한국 천주교회의 다른 교구와의 뚜렷한 입장 차이뿐만 아니라, 이제 주일 교황 사절과 대립하는 새로운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1932년부터 1933년까지는 평양교구가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의 이론적 정비와 함께 구체적인 행동을 보여준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34년에 이르면 평양교구의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은 찬반을 둘러싸고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이들의 거부 움직임에 제동을 걸려는 시도가 구체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결국 1934년에 들어와서 주일 교황 사절 마렐라(P. Marella) 대주교의 요청에 의하여 메리놀 외방전교회 본부가 직접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이에 부총장 드라우트(J.M. Drought) 신부가 한국 방문을 하였다. 그는 주일 교황 사절의 입장을 충실히 따랐던 인물로서, 그의 방문 이후 평양교구 메리놀 외방전교회 선교사의 내부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다. 평양교구를 방문한 부총장 드라우트 신부는 6월 11일자 서한을 통해서 평양교구의 메리놀 외방전교회 신부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모리스 몬시뇰에게 오히려 태도 변화를 요구하였다. 그는 신사 참배가 비록 표현에 있어서는 때로 종교적이기도 하지만 항상 애국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일본 당국자가 평양교구의 움직임이 한국인들을 선동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리며, 우리의 태도로 일본 제국에서 교회의 미래가 거부된다면 얼마나 유감스럽게 될 것이냐고 질문하면서 우려의 뜻을 전달하였다.

한편으로 모리스 몬시뇰은 9월 16일에 이르러 자신들의 입장과 메리놀 외방전교회 본부의 의견을 서로 만족시킬 수 있는 절충안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지역 신문에 애국적인 동기에서 나오는 시민적 의무감 차원에서의 예절에는 우리가 참석할 것이라는 점을 주지시키며, 우리의 학생들에게 국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신사에 절을 하기보다 국기에 절하도록 가르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본적인 입장은 역시 신사 참배 거부였다. 그것은 9월 17일 천주교 학교에 또다시 신사 참배가 요구되자, 천주교 학생들로 하여금 미리 대열에서 빠져나오도록 한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무렵 평양교구의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이 새로운 국면에 들어갔음은 분명한 것 같다. 9월 22일에 들어와서 진남포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평양의 천주교 학교 교장으로 하여금 천주교 학생이 아니라, 이교도 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참석하게 하는 등 절충적인 입장을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구장으로 선교 지역의 선교사와 본부의 임원들과의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모리스 몬시뇰의 노력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가운데 1935년에 들어오면 평양교구의 모리스 몬시뇰은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서 더욱 실용적인 노선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물론 2월 12일자 코너스(J.W. Connors, 權) 신부가 드라우트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 보이듯, 거듭 신사 참배에 대한 거부 입장을 밝히면서 한국 교구장 전체가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면 그것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때 정부 관계자들이 작년 9월 진남포에서 보여주었듯이 한국에 있는 천주교 학교에 대하여 예외 조항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평양교구의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들 사이에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을 둘러싸고 분열하는 양상이 심각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제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을 둘러싸고 평양교구 내의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강경파와 온건파, 그리고 본부의 입장을 충실히 따르는 그룹으로 구분되어 대립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6월 모리스 몬시뇰은 주일 교황 사절의 호출을 받아 일본을 방문하였다. 이러한 상황 전개는 그의 신사 참배 거부 태도를 더욱 누그러지게 만들었다. 그것을 더욱 촉진시킨 것은 메리놀 외방전교회 총장인 월시(J.E. Walsh) 주교가 모리스 몬시뇰에게 평양교구의 움직임에 대해 우려를 표시한 7월 30일자 서한이었다. 서한에서는 평양교구의 선교사들이 주일 교황 사절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하며 명령을 따를 것을 지시하였다. 이어 평양교구의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이 메리놀 외방전교회와 일본의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동안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해온 콜만 신부를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제 모리스 몬시뇰은 그러한 본부의 조치를 별다른 반발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와 함께 평양교구의 메리놀 외방전교회 신부들의 희망과는 다른 방향으로 한국 천주교회 교구장들의 의견 수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8월 31일 모리스 몬시뇰은 서울과 원산교구장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새로운 반대 움직임이 자신의 관할지에서 일어나지 않았음을 해명하였다. 그리고 10월 3일부터 6일까지 평양 서포에서 주일 교황 사절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한국 천주교회 연례 교구장 회의에서 신사 참배를 허용하는 것으로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았다. 이때 모리스 몬시뇰은 평양교구가 지금까지 다른 교구에 비해 좀 다르면서도 엄격한 입장을 고수했다는 사실을 해명하면서, 교황사절과 다른 교구장들과 동석했던 최근의 회의 이후 훨씬 앞으로 나아가 그들과 보조를 맞출 태세가 되었음을 언급한 뒤, 무엇보다도 교회의 일치가 중요하기 때문에 연로하고 경험이 풍부한 다른 교구장들의 지도를 받으며 함께하기로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1936년에 들어가면 모리스 몬시뇰은 교구 차원에서 신사 참배를 허용하는 조치를 더욱 뚜렷이 취해야만 했다. 이러한 변화는 평양교구장으로서 그동안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을 이끌어오던 모리스 몬시뇰의 좌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본 동경과 한국 천주교회, 그리고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본부로부터의 다양한 형태의 압력과 지시에 결국 그가 굴복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그의 교구장직 사임을 의미하는 귀국이 언급되기 시작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한국 천주교회에서 끝까지 홀로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을 벌이던 평양교구의 움직임이 모두 정리되었다.

평양교구의 변화와 이러한 조치는 이제 공식적으로 한국 천주교 신자 전체의 신사 참배 문제를 정리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1936년 4월 12일 한국 천주교회는 《경향잡지》를 통해 천주교 신자들의 신사 참배를 공식적으로 허락하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 주교와 신부 또한 평신도 사이에 그동안 매우 혼란스럽고 복잡한 모양으로 전개되었던 신사 참배 문제가 정리되었다.

현재 평양교구의 신사 참배 거부 운동에 대해서는 한국 민족과 관련된 측면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평양교구의 신사 참배 거부 운동에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준 콜만 신부의 의견서를 잘못 이해한 것으로 생각된다. 콜만 신부의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이 한국 민족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한 그의 언급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안중근(安重根, 토마스)의 독립운동에도 주목한 그는 신사 참배의 허용이 언제나 미신과 타협하는 태도를 보인 적이 없고 신앙의 보호를 최고로 중시하고, 선교사들에게 순교 정신을 기대하고 과거에 순교한 선교사들의 영광스러운 기록에서 즐거움의 근원을 찾던 한국 천주교회의 발전을 갑자기 깨뜨리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신사 참배가 의미하고 있는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을 콜만 신부가 정확히 지적하였다는 점에서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는 그때까지 신사 참배가 종교적이냐, 애국적이냐의 문제로 크게 논란이 되었던 점에 대해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는 신사 참배가 종교적인 것과 국가적인 것으로 구분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하였다. 이때 그는 신사 참배가 종교적인 면뿐만 아니라 항상 민족적 · 애국적인 면을 함께 지니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 상호 관계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때 비판의 핵심은 신사 참배와 관련하여 표출된 일본의 잘못된 애국 · 애족주의에 치중하고 있다. 또한 그 배후에는 일본 군부가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까닭에 그는 천주교가 신사 참배를 허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 신격화된 국가를 하느님과 같이 기도하면서 섬길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국가 지상주의가 종교와 결합한 형태로 학교 교육을 통해서 어린 학생들에게 전달될 때 진실을 더 이상 가르칠 수 없는 등 너무나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신사 참배에 담긴 일제의 애국 · 애족주의에 대한 콜만 신부의 체계적 비판은 평양교구의 메리놀 외방전교회 선교사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것은 정복과 폭력을 기반으로 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을 비판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더 사나와지는 일제의 만행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가까워왔다는 것을 알리며,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따른다면 더욱 비극적인 일이 발생한다고 경고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 민족에 대한 일제의 종교 정책 및 더 나아가 식민지 정책을 비판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한국인의 독립을 바라는 평양교구 메리놀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희망과도 일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10) 따라서 평양교구의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은 한국 천주교회 평신도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에도 일정 부분 작용하였다고 하겠다.


6. 프로테스탄트와의 교류

마지막으로 1930년대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선교 활동과 관련해서 지적해야 할 사실은 프로테스탄트와의 교류일 것이다.11)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프로테스탄트와 관련된 활동은 모리스 신부를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천주교와 프로테스탄트와의 관계에 많은 관심을 가지며 활동한 인물이었다. 그는 우선적으로 평양교구 지역의 천주교와 프로테스탄트가 각기 차지하고 있는 현재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노력하였다. 그것은 그의 초기 선교 방법인 도보 선교 여행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 결과 인구 2,300,000명에 프로테스탄트 신자가 40,000명이고, 천주교 신자는 4,000명으로 1/10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천주교는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이 지역에 진출하기 전까지는 미지수였을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와 달리 프로테스탄트는 평양 지역을 본 무대로 하여 크게 활약하고 있었으며, 이 지역 사람들이 모든 그리스도교를 미국의 프로테스탄트와 관련시켜서 이해하고 있음도 파악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그들의 교회를 확장시키기 위해 바치는 엄청난 노력이나 희생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선교 사업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평양교구 지역에서 천주교회의 기초를 놓는 짐을 짊어지게 된 것을 행복한 특전으로 여긴다고 하며, 파리 외방전교회로부터 물려받은 역사적 유산에 보탬이 되겠다고 다짐하였다. 운산 지역의 방문에서 비록 상업적이지만 미국인들이 이 지역을 계몽시키려고 한 증거에 주목하였던 그는 미국인으로서, 평양교구 지역의 선교를 위하여 몸을 바칠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모리스 신부의 프로테스탄트관은 어떠하였을까. 그 역시 한국의 프로테스탄트가 미국의 프로테스탄트처럼 천주교의 가르침을 무시하며 편협한 열성과 편견 및 독선을 가지고 있음을 우려하고 있었다. 프로테스탄트 신자의 천주교 개종을 반대하는 행동이라든지, 프로테스탄트가 단지 성경만을 추구한다든지, 안식교가 서적을 통하여 천주교회와 성체대회를 왜곡 · 비난한 사실들을 그 예로 들었다. 때문에 그는 첫 부임지의 성당 건립을 위한 대지 매입 과정에서 이웃한 프로테스탄트의 방해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프로테스탄트와의 교류에 오히려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던 사실이 주목된다. 그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프로테스탄트 학교를 방문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자세는 그의 부임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계속적으로 프로테스탄트 학교를 방문하는가 하면, 가능한 한 장로교와 감리교 신자 등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만나려고 노력하였다. 당시 프로테스탄트의 교세 확장 방법인 호별 방문 전도와 서적 보급을 통한 조직화에도 주목하였다. 특히 여러 프로테스탄트 교파의 탁월한 학교 운영에 대해서도 감탄하였다. 아울러 서적을 통해서 나름대로 프로테스탄트 교파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프로테스탄트로부터도 배울 것이 많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프로테스탄트 신자들 안에서도 천주교에 대하여 적대감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프로테스탄트 신자들과 아주 허물없이 지내고 있다는 데에 의심을 받지 않을까 염려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모리스 신부의 프로테스탄트관은 그가 교구장이 되었을 때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의 프로테스탄트관은 《가톨릭 청년》의 창간호에 실린 글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는 이 잡지의 간행 목적이 천주교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서로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도모하는 데 이바지하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이는 도보 선교에서 문서 선교로의 그의 선교 방침의 변경과 관련이 있었다.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가톨릭 연구》는 《경향잡지》와 함께 당시 천주교의 프로테스탄트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잡지였다. 이것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왜곡 · 비판에 대한 천주교회의 본격적인 대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천주교와 프로테스탄트와의 교회 일치 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1935년 한국 천주교 수용 150주년 기념 행사에서 열린 〈종교의 필요성과 그리스도교의 낙관주의〉라는 학술 발표회와 천주교 사료 전람회에 많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의 참여를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모리스 몬시뇰의 활동은 당시 천주교와 프로테스탄트의 관계가 부정적이었던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같은 시기 다른 지역에서도 천주교와 프로테스탄트와의 관계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평양교구에서는 교구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프로테스탄트에 대응하였다는 사실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모리스 몬시뇰의 노력은 프로테스탄트보다 천주교의 가르침이 올바르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프로테스탄트 신자들로 하여금 천주교로 개종하는 것을 그 궁극적 목표로 하고 있었다. 프로테스탄트를 믿음으로써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이 왜곡되었지만 이제는 천주교로의 완전한 개심(改心)을 바란다는 것이다. 이에 천주교를 안내하는 책자를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에게 보내는가 하면,《가톨릭 연구》와 같은 잡지의 발간을 통하여 프로테스탄트 신자를 계몽시켜 천주교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갖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 교회의 계통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천주교가 역사적 정통성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그는 당시 미국 사회에서 나타났던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천주교 개종 움직임을 크게 주목하여 소개하기도 하였다.

한편 모리스 몬시뇰의 이러한 활동은 천주교와 프로테스탄트의 차별화를 통하여 천주교의 위상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당시 한국 사회의 천주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수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일반인들의 긍정적 프로테스탄트관을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프로테스탄트와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의 발전에 천주교의 수용이 미친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프로테스탄트가 평양에서 떠들썩할 정도로 한국 선교 50주년 기념식을 열자, 그에 맞먹는 한국 천주교 수용 150주년 기념 행사를 대대적으로 열어 그 역사적 의미를 드러냈다. 또한 그는 프로테스탄트 학교에 대응하여 천주교 학교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안식교와 장로교에서 신사 참배를 거부하자 여기에 커다란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것은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신사 참배 거부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신사 참배 거부 운동에는 프로테스탄트와의 협력이 있었다. 그것은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 정책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전 세계 사람들의 공동 전선과 협력이 필요하다는 평양교구의 입장에서 시도된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일제로 하여금 그런 종류의 협력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발생하리라는 두려움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의 천주교 비판이 계속적으로 일어나자, 비공식적으로나마 프로테스탄트와의 협력을 통해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을 벌이고자 노력하였던 평양교구의 노력은 그대로 추진될 수 없었다.

이러한 모리스 몬시뇰의 프로테스탄트 정책은 프로테스탄트가 우세하였던 평양교구 지역에서 상당한 변화를 일으키며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금까지 한국에 존재하지 않았던 미국 천주교 선교사들이 평양교구 지역에 도착한 이래 사람들이 점점 더 천주교회에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천주교로의 개종이 꾸준히 증가하여 1935년 한 해에만 2,000명의 개종자가 생기는 등 당시 극동의 어느 선교지에서도 평양의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선교지만큼 많은 개종자를 내는 곳이 없었다. 천주교 신자는 15,264명으로 3배 이상으로 증가하는 등 교세 확장에서도 1위를 기록하였다. 그 결과 이제 평양교구 지역의 한국 사회가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7. 나머지 말

지금까지 필자가 쓴 글들을 중심으로 1930년대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선교 활동을 알아보았다. 이러한 사실들만으로도 오늘 한국 천주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을 돌이켜보면서, 새롭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주리라 생각한다.

사실 당시 평양교구에서 일어난 새로운 움직임들에 대해서는 이밖에도 심층적으로 다루어야 할 주제들이 매우 많다. 그것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가톨릭 연구》나 《가톨릭 조선》과 같은 잡지 및 모리스 몬시뇰에 대한 자료집만을 통해서 볼 때에도 그러하다. 그리고 현재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수집하고 있는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또 다른 개별 자료들로까지 관심이 확대될 때에는 더욱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신부들의 활동만이 아니라 메리놀 수녀회의 소속 수녀들의 선교활동에 대한 이해도 물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최근 해방 이후의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활동에 대한 연구가 나타나고 있지만,12)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관심과 노력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때 한국 천주교회사 및 세계 교회사, 더 나아가 한국 근 · 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차지하는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선교 활동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가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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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광린, 〈개화기의 개신교관〉, 《한국개화사상연구》, 일조각, 1979.

2) 김수태,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진출과 활동〉, 《부산교회사보》 29, 부산교회사연구소, 1999.

3) 이광린, 〈한국 최초의 미국 대학 졸업생 변수〉, 《한국 개화사의 제문제》, 일조각, 1986.

4) 김현숙, 〈대한제국기 미국관료 지식인의 한국인식-궁내부 고문관 샌즈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58, 한국역사연구회, 2005.

5) 천주교 명동교회 편,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 3, 2000.

6) 김수태, 〈1930년대 평양교구의 가톨릭운동〉, 《교회사연구》 19, 한국교회사연구소, 2003.

7) 김수태, 〈1930년대 천주교 평양교구의 문서 선교〉,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7,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6.

8) 김수태, 〈1930년대 평양교구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 《한국사학사학보》11, 2005.

9) 김수태, 〈1930년대 평양교구의 신사참배 거부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38, 2004.

10) 이러한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노력은 방인 사제의 양성이나, 방인 수녀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의 창설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11) 김수태, 앞의 논문, 1999의 2절을 참고할 것.

12) 여진천,〈제1공화국 초기 교육 활동과 문교 정책에 대한 비판 - 메리놀회 문서를 통하여〉, 《교회사연구》 23,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 최선혜, 〈서양 선교사의 한국전쟁 예견 - 외방 선교회 관련 문서에 대한 소개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23,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를 참고할 것.

13)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선교방법을 다른 선교회와 비교한 연구로 이석재, 〈일제 강점기 독일 분도회와 미국 메리놀회의 선교방법 비교연구〉, 《인하사학》 9, 2002가 있다.

[교회사 연구 제29집, 2007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수태(충남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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