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6일 (목)
(백)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최석우 교회사학의 사학사적 의의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26 ㅣ No.866

최석우(崔奭祐) 교회사학(敎會史學)의 사학사적(史學史的) 의의(意義)

 

 

국문 초록

 

최석우 몬시뇰은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한 집체적 연구를 시작한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창설자로서, 구원사와 실증사의 조화를 통해서 전체사적 전망을 제시한 선각적 교회사가였다.

 

최석우 몬시뇰의 교회사학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최석우 몬시뇰이 추구한 교회사 연구의 이상적인 형태는 교회사가 신학과 역사학의 두 영역에서 서로 공존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둘째, 최 몬시뇰은 신학으로서의 교회사를 추구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교회’라는 용어에 대한 신학적 개념 정립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최 몬시뇰은 처음에는 교계제도로서의 교회 개념이 중요하다고 보았지만, 차츰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 특히 평신도의 능동적 참여가 보장되는 교회가 더욱 중요하다고 보게 되었다.

 

셋째, 최 몬시뇰은 한국 교회사 연구에서 원사료의 발굴과 이에 대한 체계적 분석을 중요시했다. 이는 그의 실증주의적 역사학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비롯된 경향으로, 달레, 다블뤼, 정약용 등 교회 측 인사의 기록뿐만 아니라 관찬 연대기와 재판 기록 및 척사론자들의 문집에 나오는 기록들도 매우 중시했다.

 

넷째, 최석우 몬시뇰은 박해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한국 진출, 다산 정약용의 신앙과 가톨릭 사상, 안중근의 애국 활동과 신앙심,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영성과 활동 등에 대한 연구와 저술을 통하여 구세사적 관점에서의 교회사 연구를 진전시켜, 단순한 선교사와 그리스도교사의 범위를 초월하는 전체사로서의 교회사를 조망하고 추구하였다.

 

최 몬시뇰은 우리 벽돌로 지은 ‘한국 교회사’라는 건축물을 짓게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인에 의한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의 소망이 실현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직 교회사 연구의 진정한 토착화는 실현되지 못한 것 같다. 그것은 벽돌의 재질을 따지기 전에 그 벽돌로 지을 ‘교회사’라는 ‘무형(無形)의 성전(聖殿)’에 대한 건축설계도와 각종 도면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구체적 내용에 대한 합의가 아직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최석우 몬시뇰이 소망했던 “국산 벽돌로 지은 한국 교회사라는 무형성전의 건립”이 아직도 요원한 현실이 안타깝다.

 

 

1. 머리말 - 교회사 연구의 배경 : 약력과 학위 논문, 본고의 취지 등 -

 

1) 출생에서 사제 수품까지

 

최석우(崔奭祐, 안드레아, 1922~2009) 몬시뇰은 1922년 11월 27일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노월면(蘆月面) 마명리(馬鳴里)에서 최광옥(崔光玉, 루도비코) · 이선옥(李鮮玉, 마리아) 부부의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1) 최 몬시뇰의 부모는 장남 최석호(崔奭祜, 바오로)와 차남인 최석우 형제를 모두 성직자로 키운 열심한 신앙인이었기에, 최 몬시뇰의 사목 활동과 학문적 열정도 이 같은 신심 깊은 가정의 신앙 교육에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최 몬시뇰은 신천 공립보통학교와 장연(長淵) 경애보통학교, 서울 동성상업학교, 동경 법정대학 법문학부를 차례로 거쳐서, 1945년 경성천주공교신학교(京城天主公敎神學校, 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입학했고 1950년 4월 15일 성신대학(聖神大學, 현 가톨릭대학교) 신학과를 졸업,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후 최 몬시뇰은 벨기에, 독일 등에서 유학을 했고, 몇 차례 본당 사목 활동도 했지만 이때도 교회사 연구를 계속 병행했으며, 1975년부터는 온전히 교회사 연구에만 종사하였다.

 

2) 교회사 석사 · 박사 학위 취득 과정

 

최석우 몬시뇰의 최초 사목 활동 보직은 수원 북수동 본당의 보좌신부 겸 소화초등학교 교장이었다. 수개월 후 6 · 25 전쟁으로 부산, 밀양 등지로 피난 갔다 왔으며, 1953년 성신대학 부속중학교 교사를 한 후, 선종완(宣鍾完) 신부의 권유로 1954년 벨기에 루뱅 대학교 대학원 신학부에 입학하여 오베르(M. Aubert) 신부 밑에서 교회사 공부를 시작했다. 1955년 6월 석사 학위를 받았으나, 최 몬시뇰은 한국 천주교회사를 공부하기 위해서 독일 본(Bonn) 대학으로 옮겨 박사 과정에 입학, 예딘(H. Jedin)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최 몬시뇰은 예딘 교수의 지시에 따라 로마의 포교성성, 파리 외방전교회 등의 고문서고를 두루 찾아다니며 한국 천주교회사와 관련된 원사료들을 수집하였다. 특히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미공개 사료들은 박사 학위 논문의 부록으로 반드시 첨부하여야 했다. 최 몬시뇰은 1956년 초 포교성성 고문서고에서 인도와 중국 편에 함께 철해진 한국 교회 관련 1791~1792년 의사록(Acta) 자료와 한국 천주교회가 북경 교구장에게 위임된 배경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서한 5통을 찾았다. 이들 서한은 이승훈의 서한 2통, 다른 조선 교우의 서한 1통, 구베아 주교의 서한 2통이었는데, 당시까지 한국 교회에 알려지지 않던 문건으로 최석우 몬시뇰이 교회사학자로서는 처음으로 찾은 자료들이었다. 그런데 당시 포교성성 고문서고에는 복사 시설이 없어서 최 몬시뇰은 이들 자료를 사진판 복사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최 몬시뇰은 한국 교회와 관련된 자료들을 열람하면서 손으로 직접 베끼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했는데, 사진 복사한 것 150매, 타이핑 한 것이 500여 매에 달했다. 포교성성 고문서고 작업을 마친 후 최 몬시뇰은 로마에 있던 예수회 및 프란치스코회 고문서고를 찾았다. 예수회 고문서고에서는 1790년 윤유일의 북경 방문과 그곳에서의 영세 사실에 관한 새로운 자료를 찾았으며, 프란치스코회 고문서고에서는 중국 측에서 시도한 한국 선교에 관한 약간의 새로운 사료를 찾았다. 이에 더하여 최 몬시뇰은 조선 대목구 설정과 관련된 자료를 찾기 위해서 파리 외방전교회 고문서고도 뒤져야 했다. 이곳에서 1820년대 후반부터 1830년대 초반까지 포교성성과 파리 외방전교회 사이에 조선 대목구 위임과 관련하여 주고받은 문서들을 찾음으로써 초기 한국 교회사와 관련된 학위 논문을 작성하기 위한 최 몬시뇰의 자료 수집은 일단락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최 몬시뇰은 원사료의 소중함과 그에 따른 실증적 교회사 연구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3) 박사 학위 논문과 그 내용

 

최석우 몬시뇰은 1961년 8월, 본 대학에서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학위 논문의 제목은 “L’erection du premier Vicariat apostolique et les origines du Catholicisme en Coree 1592-1837”이다.2) 이 논문은 스위스에 있는 《새 선교학지》의 부록 제11권으로 1961년 7월에 간행되었다. 최 몬시뇰은 이 논문을 통하여, 프랑스인이 쓴 최초의 한국 천주교회 통사(通史)인 달레 신부의 Histoire de l’Eglise de Coree(1874, Paris, 《한국천주교회사》)의 내용과는 달리, 1831년 조선 대목구가 설정되는 시점에서 조선 교회가 공식적으로 출범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최 몬시뇰은, “제1장 : 조선에 천주교를 도입하려는 초기 시도들(1592~1783), 제2장 : 조선의 평신도 공동체(1784~1790), 제3장 : 박해들(1791~1802), 제4장 : 조선 교회를 재조직하기 위한 시도들(1802~1831), 제5장 : 조선 대목구의 초창기(1831~1837)” 등 5개의 장으로 내용을 나누고, 부록으로 이승훈, 구베아 주교, 판지 수사 등이 쓴 모두 16통의 서한을 유럽어 원문 그대로 싣고 있다. 최 몬시뇰은 이 논문에서, 달레는 1784년을 조선 교회의 시발점으로 보아 그 이전 시기를 전사(前史)에 편입했으나, 자신은 1784년의 경우 신자들의 숫자가 현저히 늘어난 점을 제외하면 당시에 교회 설립의 시원을 가리키는 전환점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고 하였다. 또 “달레의 저술이 비록 고전이기는 하지만 학문적인 면모가 많이 부족한데, 저서의 머리말에는 많은 사료들에서 내용을 가져왔다고 하면서도 정작 본문 자체에는 참고한 문헌들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고 하면서 고증의 부족함을 비판했다. 또 달레는 사실 인식 및 사료 해석상 몇 가지 오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사를 순교자들의 행적에 대한 보고에만 국한시키고 교회 내 제도와 관련된 문제점들이나 문화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 등 역사 서술의 태도 또한 편향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최 몬시뇰의 이 같은 지적은 당시까지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의 대표적인 통사로서 그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고 있던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자 문제 제기였다는 점에서 상당히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다. 그러나 최 몬시뇰은 그의 한국 교회사 연구를 진척시켜 가면서, 곧 달레와 마찬가지로 1784년을 한국 천주교회의 시점으로 인정했는데, 이는 그가 교회(敎會)의 개념에 대한 일정한 연구 성과를 토대로, 박사 논문에서 제기했던 문제의식을 좀 더 숙성시킨 결과로 해석된다. 한편 달레가 취급한 사료와 서술 태도 등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자세를 계속 견지하였다. 최 몬시뇰은 <달레 저 《한국천주교회사》의 형성과정>에서 달레가 인용한 다블뤼 주교의 기록들을 찾아내어 이를 달레의 기록들과 일일이 대조, 검토하면서 양자의 차이점을 해명하고 서로 상충되는 부분에 대한 시비(是非)나 진위(眞僞)의 판단을 내리기도 하면서, 적어도 교회사 연구자들은 달레의 이 저술보다는 다블뤼의 자료들을 직접 연구하고 분석해야 당대의 역사적 실상에 보다 더 사실적으로 접근할 수 있음을 확인해 주었다.3)

 

최 몬시뇰의 박사 논문에 대해 몇몇 부정적인 평가도 있었지만 대개는 호평을 해 주었는데, 특히 뮌스터 선교학 연구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해 주었다.

 

보다 원사료에 의거한 선교사의 서술이 요구되고 있으나 유럽의 선교학자들이 언어의 장벽으로 포교지에 관한 원사료들을 가까이하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선교사의 연구가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는 이때에, 한 젊은 한국인이 이 임무에 착수한 것은 그의 공적이다. 한국 선교사에 관한 이 저술은 포교성성과 파리 외방전교회 등에서 발굴한 제1차 사료에 근거하고 있는데, 거기에 많은 새로운 사료들이 드러나고 있을뿐더러, 저자는 풍부한 한국 사료들을 이용함으로써 새로운 사실과 관점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새로운 선교사(宣敎史) 중에서 첫 자리를 차지할 저서의 하나가 될 것이기에 모든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 부디 이 저자의 좋은 모범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4)

 

최석우 몬시뇰은 위 박사 논문을 통해서 그가 일생 종사하게 될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의 큰 틀과 방향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실증주의 교회사학의 대가인 예딘 교수 밑에서 원사료의 중요성과 함께 사료 발굴의 방법 등을 체득한 것 외에도, 한국의 정치, 사회, 사상, 문화와 결합된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를 지향함으로써, 가톨릭 신앙의 보편주의와 한국의 민족주의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교회사 연구를 추구하게 되었다.

 

4) 교회사 연구소의 설립과 연구 활동

 

1964년 최석우 몬시뇰은 파리 외방전교회의 창립 300주년을 맞아 교회사 자료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이원순 교수와 함께 교회사 연구기관 설립을 추진하였다. 최 몬시뇰은 1961년 12월부터 가톨릭대학교 교회사 교수로 재직하면서 “새 시대의 한국 교회사 연구는 학문적이며 집체적(集體的)이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는데, 마침 이원순 교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즉시 합의를 본 후 당시 교구장 노기남 대주교를 찾아가서 연구소 설립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허락을 얻었다.5) 1964년 8월 17일, 최석우 신부를 소장으로 하는 한국교회사연구소가 공식 출범하였다. 이후 연구소는 가톨릭대학 구내 가르멜 수녀원 건물에서 시작하여, 절두산 순교자기념관, 합정동, 명동 가톨릭회관 등을 거쳐 2002년 10월 현재의 저동 평화빌딩 건물에 입주하게 되었다. 연구소가 설립되기 전인 1960년대 초반에, 최 몬시뇰은 서울대교구 주교관에 소장되어 있던 서적, 서화, 유물 등 200여 점의 자료를 발견하고 이를 연구소 설립 직후 연구소로 이관한 데 이어, 1966년에는 100여 개 서류함에 담긴 총 13,000여 건에 달하는 뮈텔 문서를 주교관 지하창고에서 발견, 연구소로 이관했다. 1984년 파리 외방전교회로부터 <뮈텔 일기>를 비롯한 한국 교회사 관련 자료 일체를 마이크로피시 형태로 기증받았으며, 그 후 국사편찬위원회에 보관된 한불외교 문서 등도 마이크로필름으로 촬영해 연구소에 보관했다.6) 또한 달레 교회사의 저본이 된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와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등의 사본을 1979년과 1998년 각각 발견하여 입수할 수 있었다.7) 이렇게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최 몬시뇰은 전시회, 강습회, 발표회, 서적 출간 등 다양한 연구소 활동을 수행할 수 있었다.8)

 

5) 본고의 목적과 한계

 

본고는 이와 같은 최석우 몬시뇰의 교회사 연구 활동의 구체적 업적들을 살펴보기 위해, 우선 최 몬시뇰의 박사 학위 논문에 대해 개관해보았고, 이제부터 그가 주장한 교회사 연구방법론과 역사관을 비롯하여, 각 시기별로 그가 서술한 논문들에 나타난 주요 면모와 교회사 인식의 특징들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러한 작업 후에 최석우 몬시뇰의 교회사 연구가 갖는 사학사적 의미를 나름대로 자리매김하여 보았다. 본고는 2009년 최석우 몬시뇰이 선종한 후 약 5년 만에 최초로 수행되는 ‘최석우 몬시뇰의 연구 업적에 대한 교회사학사(敎會史學史)적 자리매김 논문’에 해당한다. 그러나 필자의 견문이 짧은 데다가, 최 몬시뇰의 연구 업적이 워낙 방대하여 그의 연구 활동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보다 심도 깊게 교회사적 분석 작업을 수행하지는 못했다. 다만 본고가 향후 최 몬시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위한 기초 작업의 하나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2. 교회사 인식과 방법론

 

최석우 몬시뇰이 교회사 연구의 자세 및 방법론과 관련하여 언급한 것은 서로 다른 시기에 나온 세 편의 논문들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9) 그 첫째는 1979년 《사목》 34집에 실린 <한국교회사는 어떻게 서술되어 왔는가?>10)라는 논문이고, 두 번째는 2000년 그의 사제 서품 50주년을 기념하여 나온 금경축 논문 <나의 교회사 연구>11)이다. 세 번째는 2004년 《교회사연구》 23집에 실린 <교회사 연구와 교회사 서술의 문제>12)라는 글이다. 이 글들을 개략적으로 보았을 때, 1979년에 발표한 첫째 논문에서는 교회사 연구의 전문화 내지 특수화 측면을 보다 강조하였고13), 2000년 둘째 논문에서는 구원(救援)의 관점을 강조하고 호교론(護敎論)의 불가피성과 가톨릭 문화에 대한 연구를 촉구했다. 그러나 2004년 발표한 셋째 논문에서는 교회 정신과 구세사적 전망에 큰 비중을 두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이를 초월하는 전체사(全體史)적 조망을 강조했다. 한편 첫 논문에서 셋째 논문까지 모두 일관된 입장은 “교회사가 신학(神學)과 역사학(歷史學)의 두 가지 속성을 모두 갖고 있으므로, 현실의 교회 공동체에 대한 애정(愛情)을 가지고 교회사를 서술해야 한다”는 점으로 파악된다.

 

1979년은 최석우 몬시뇰이 교회사 연구만을 전담하는 사제 학자로서 재출발한 1975년으로부터 5년 차에 해당하는 시점이다. 당시 최 몬시뇰은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으로서 다블뤼 주교의 <한국 순교자 역사 비망기> 사본을 파리 외방전교회로부터 대여하여,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와 대조 · 검토하고,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를 발견하여(1978년 8~10월) 이를 복원하고 관련된 월례발표회를 개최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최 몬시뇰은 일제 강점기에 편찬된 《朝鮮史》 가운데 천주교 관련 기사를 조사 · 정리했고, 달레가 저술한 《한국천주교회사》의 역주본 상권을 간행했다. 앞서 언급한 1979년의 첫 번째 논문 <한국교회사는 어떻게 서술되어 왔는가?>는 이 같은 당시 교회사연구소의 분위기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최 몬시뇰은 이 논문에서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가 사료적 가치로 보나, 문헌상으로 보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에서 거의 절대적 권위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종교적이고 순교적인 사실에 치우쳐 교회의 문화적, 사회적 활동을 등한히 하고 있으며, 선교사들의 편지가 아무런 사료적 비판 없이 인용되고 있거나 조선의 관변 자료들을 참고하지 않고 있으며, 때로 유럽 중심의 사대적(事大的)인 경향마저 보이는 점 등 상당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와 함께 최 몬시뇰은 해방 이후 1970년대까지 이루어진 교회사 ‘특수 문제’(특정 주제)에 관한 연구에서 상당한 진척이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했는데, 그 예로서 “실학(實學)과 서학(西學)”, “한국 근대화와 교회의 역할”, “서구사상(西歐思想)의 수용”, “가톨릭과 전통사상과의 대립”, “천주가사”(天主歌辭) 등의 연구 성과를 거론했다. 최 몬시뇰은 이러한 연구 성과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그 기초 작업에 해당되는 교회사 연구 관련 자료목록(資料目錄), 자료안내서(資料案內書) 등의 정리 작업이 우선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아울러 참된 교회사 연구는 어디까지나 사료에 의지한 객관적(客觀的)인 서술로부터 비롯된다고 역설하면서14), 선입견과 편파성에 기인한 지나친 호교적(護敎的) 서술을 지양(止揚)하고, 과거 교회 안의 인간적 실수에 대해서도 여과 없이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들을 통해서 볼 때, 최 몬시뇰은 이미 1970년대 후반에 철저한 실증주의적 관점에서 객관적 역사 서술을 강조하는 교회사관을 갖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2000년 발표한 <나의 교회사 연구>에서는 이전부터 그가 강조해온 실증주의(實證主義) 기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교회(敎會) 개념에 대한 신학적 검토, 구세사적(救世史的, 救援史的) 측면에서의 교회사 해석, 세속화(世俗化) 극복(克復)의 교회사 연구 등을 보다 강조하였다.

 

역사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교회사는 근본적으로 구원(救援)의 역사(歷史)이다. 물론 민족사(民族史)나 사회와 관계한 역사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으나 그때에도 구원사적(救援史的)이고 선교사적(宣敎史的)인 사관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박해 시대의 신앙을 내세주의(來世主義)니, 개인구원주의(個人救援主義)니 하며 과소평가하고, 반면에 민족이나 사회와 관계한 역사를 교회사의 전부인 것처럼 과대평가할 위험이 생긴다. 일반 역사 연구의 대상은 인간문화(人間文化)이지만 교회사의 연구 대상은 가톨릭 문화이다. 그러므로 문화(文化)란 속사(俗事)에 교회제도(敎會制度)와 교리(敎理)를 접합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교회사는 순전한 속사(俗史)의 서술로 그치게 될 것이다.15)

 

이와 같이 구원의 역사로서의 교회사 연구를 강조하면서, 최 몬시뇰은 신자들로 하여금 긍지와 사명감을 갖도록 하는 것이 교회사가들이 힘써야 할 의무로서, 가톨릭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하는 길이라고 파악했다.

 

최 몬시뇰은 2004년의 논문에 와서 “교회사는 신학”이라는 관점을 강조하면서 교회사의 교회론적 지향, 곧 교회 개념의 적용이야말로 교회사의 출발점이고 동시에 구세사적인 해석이 교회사를 그 최종 목적지(종착점)에 도달하게 해 주는 것으로 보았다.16) 최 몬시뇰에 의하면, 교회사는 신학과 역사학의 두 영역에 동시에 속해 있는 학문으로서, 일반적인 종교사와 구별됨은 물론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거나 사회와 문화 안에 그리스도 정신을 보급하고자 하는 그리스도교사보다도 훨씬 넓은 범위에서 신적(神的)인 요인인 계시(啓示)와 인간적 요인이 서로 협동하여 성립되는 학문이라고 말했다. 즉 최 몬시뇰은 비교종교학적 관점이나 순수 역사학적 관점에서 진행되는 교회사 서술의 필요성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관점들이 교회사의 본령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고 단언하였다.17) 최 몬시뇰은 교회사의 주제와 과제를 결정하기 위해서 ‘교회’ 개념이 그 기초(基礎)가 된다는 점에서 ‘교회’ 개념에 대한 신학적 고찰이 교회사 연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18)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최 몬시뇰은 1961년 박사 학위 논문에서 한국 교회사의 공식적 시점을 1831년이라고 주장했으나, 1970년대 이후부터 그가 선종할 때까지는 이 같은 주장을 더 이상 강조하지 않고, 1784년 이승훈에 의한 ‘세례 공동체’(洗禮共同體)의 탄생을 한국 교회의 시점(始點, 시작)으로 규정했는데, 이러한 변화 역시 ‘교회’ 개념에 대한 신학적 고찰이야말로 교회사의 출발점이 된다고 하는 그의 인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최 몬시뇰은 이 땅에서 ‘하느님 백성의 모임’으로 규정되는 ‘교회’의 탄생은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주교단의 존재로서 이루어지는 교계제도(敎階制度) 하의 교회에서 시작된다고 하기보다는, 이러한 교계제도와 긴밀히 연결된 세례받은 신자들로 이루어지는 평신도 공동체(平信徒共同體)의 출발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나름의 신념 때문에, 이처럼 1784년을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으로 보았던 것이다. 평신도 중심의 하느님 백성에 대한 ‘교회’ 개념 규정은, 최 몬시뇰이 평소 평신도의 자발적인 봉사와 참여를 교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인식했던 사실과도 상통하는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19)

 

다음으로 “교회사는 역사학”이라는 원칙에 입각하여 교회 과거의 사건과 사실들을 역사학적 방법론에 입각하여 관련 사실들을 해석하여야 교회사의 학문성(學問性)이 보존될 수 있다고 하여 기존부터 강조해오던 실증주의 교회사학의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면서 신학과 역사학이 교회사의 연구 안에서 각각 독립된 학문으로서 공존(共存)할 수 있어야 하고 공존해야 한다면서, 그럴 때에만 두 학문은 제 기능과 효력을 발휘할 것이며, 교회사도 그 내용이 심화되고 풍부해질 것이라고 보았다. 앞서 최 몬시뇰은 이 시대의 참된 교회사 연구는 호교론이나 구세사적 전망을 넘어서는 더 큰 범위에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신학과 역사학이 교회사 안에서 공존하면서 함께 하느님, 인간, 교회에 대한 전체적인 전망을 하는 것으로서, 이렇게 할 때 가장 효과적인 호교(護敎)가 된다고 보았다. 아울러 이러한 교회사 연구에는 교회의 과거와 현실 문제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 제기를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하며20),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이나 루터의 종교 개혁의 지향이 큰 틀에서 일치한다고 보고 진정한 에큐메니즘의 정신에 입각하여 ‘교회 일치’(敎會一致)에 대한 전망을 갖고 교회사 서술에 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를 종합해볼 때, 최석우 몬시뇰의 교회사학은 교회 개념에 대한 신학적 성찰, 교회사의 전개 과정에 대한 구세사적 전망, 역사적 실재로서의 교회의 과거와 현실에 대한 겸허한 인정과 실증주의, 교회 일치에 대한 전망 등을 교회사 서술의 주된 속성으로 하고 있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3. 각 시기별 교회사 인식의 특징

 

최석우 몬시뇰의 교회사 연구는 이 땅에 교회가 설립되기 전부터 교회 창설기, 박해 시기, 개항기,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의 현대까지 그 범위가 넓게 분포되어 있다. 이 장에서는 각 시기별로 최 몬시뇰이 서술한 논문들의 내용을 통해서 한국의 천주교회사를 어떻게 인식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면모를 살펴본다.

 

1) 교회 창설기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 문제와도 관련된 교회 창설기에 대한 최 몬시뇰의 인식은 앞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최초(1961년 박사 학위 논문 제출 당시)에는 1831년 조선 대목구 설정을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적 시작으로 인식했다. 그러다가 ‘교회’에 대한 신학적 개념의 정립(숙고) 과정을 거쳐서,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평신도 세례 공동체의 탄생을 교계제도로서의 조선 대목구의 설정보다 더 중요한 시점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서술을 하게 되었다.

 

ⓐ 조선의 천주교는 이승훈(1756~1801)이 그의 부친을 따라 북경에 들어가서 영세(領洗)하고 귀국하여 포교(布敎)를 시작한 정조 8년(1784년)에 정식으로 발족한 것은 사실이다.21)

 

ⓑ 이승훈의 영세는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영세도 아니었고, 또 그의 영세 자체가 곧 교회의 창설은 아니었다. …신도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한다면 이승훈 혼자의 영세가 교회가 될 수는 없었고, 그 후 다른 신도를 만들어 그들과 같이 모임을 가져야만 교회가 탄생할 수 있었다. “나는 어떤 학자와 더불어 하느님을 섬기고 또 다른 이들을 (이끌어) 하느님을 섬기도록 노력했는데, 믿으려는 사람들이 1천 명에 이르렀고 그들이 영세하기를 간청하므로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라는 이승훈의 말에서 우리는 한국 교회가 어떻게 형성되어 나아갔는지 역력히 볼 수 있다. …1784년 음력 9월부터 영세가 시작되었고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도 영세식이 있었으며, 1785년 음력 3월에 명례방 김범우 집에서 신도들의 모임이 있었다는 정도를 알 수 있을 뿐이다.22)

 

ⓒ 한국 천주교회는 지난 1984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초청한 가운데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공식적으로 성대하게 기념했었다. 한국 교회가 1984년을 한국 교회 창설 200주년으로 기념한 것은 바로 200년 전 1784년에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귀국하여 신앙 공동체를 형성한 것을 한국 교회의 기원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학계의 정설이기도 하거니와 한국 교회의 오랜 전통이기도 하였다.23)

 

위 인용문 ⓐ에서는 이승훈이 1784년 집단 세례식을 거행한 사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강조하는 구절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에서는 1784년 음력 9월 이벽의 수표교 집에서 집단적인 영세식을 통해서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되었음을 명백히 밝혔고, ⓒ에서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시작이 한국 교회의 오랜 전통이라고 강조했다. 최 몬시뇰은 1592년(임진왜란) 한국 교회 시작설과 1777년(또는 1779년, 천진암 주어사 강학) 한국 교회 시작설도 마찬가지로 부정하였다. 메디나 신부 등 예수회 측의 주장과는 달리, 이 땅의 신앙 공동체가 임진왜란 이후에 형성되었음을 입증하는 조선 측의 자료가 일체 없고,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들의 세례 입교는 일본 교회사에 속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예비신자들은 교회와 연결되거나 결합된다고 하지만, 아직 성사받을 자격이 없으므로 완전한 교회의 구성원이라고 볼 수 없기에, 영세자들만이 교회의 완전한 구성원이라고 보는 것이다. 최 몬시뇰에 의하면, 1777년 또는 1779년 강학회 참석자들을 한국 교회의 창립자로 보는 것은 논리의 비약에 속한다고 하였다. 또한 1984년 103위 시성 경축 미사 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강학회 참석자들이야말로 한국 교회의 창립자(fondatori)들이라고 강론했기 때문에, 강학회가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 시점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fondatori(폰다토리)란 단어는 ‘창립자’(創立者)보다는 ‘개척자’(開拓者)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낫겠다고 했다. 또한 1984년 10월, 로마에서 시성 경축 미사를 거행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지난 5월 본인은 한국에서 그리스도교의 200주년을 경축하는 기쁨을 함께 했습니다”라고 말한 데에서 이미 1784년 교회 창설을 인정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 기원설을 지나친 국수주의(國粹主義)적 편견이라고 매도하는 메디나 신부 등의 주장에 대해서는, 1784년 한국 교회 시작은 한국인이 먼저 말한 것이 아니라, 이승훈의 서한을 통해서 한국 천주교회 사정을 보고받은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가 그의 서한에서 공식적으로 언급한 데서 비롯되었고, 이를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달레가 그의 책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받아들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 천주교회가 대대로 이 같은 기원설을 수용하고 확인해 주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최 몬시뇰에 의하면, 조선교구 제7대 교구장인 블랑 주교는 1884년이 한국 천주교회 탄생 100주년임을 상기하였고, 1934년 평양교구에서는 그 해를 한국 천주교 전래 150주년으로 기념하여 성대한 축하대회를 가지는 등,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의 전통은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편 최석우 몬시뇰은 한국 교회사의 전개 과정에서 1784년 못지않게 1831년도 중요하다고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784년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교회가 시작된 해라면 1831년은 법적인 의미에서 교회가 완성된 해이다. …1831년은 한국 교회 기원에 있어서 1784년에 이어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왜 한국 교회가 이미 두 번이나, 즉 1931년 교구 설정 100주년을, 1981년 150주년을 성대하게 기념했는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24)

 

이와 같이 1831년 조선 대목구 설정을 한국 천주교회의 전개 과정에서 법적인 의미의 시점으로 설정한 것은 앞서 그의 박사 논문에서 1831년을 조선 교회의 공식적 시작으로 설정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다만 최 몬시뇰은 1960년대의 박사 논문에서 말한 ‘1831년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적 시작’이라는 말은 1970년대 이후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는 오해의 염려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만 교회사적 입장에서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紀元)을 여러 단계로 나누어 ‘신앙의 요람기(1770~1784년) → 교회의 창설(1784년) → 본당으로의 승격(1795년) → 교구로의 승격(1831년)’ 등으로 설명하여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 문제와 한국 천주교회의 발전 과정을 연계시켜 체계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다.25)

 

2) 박해 시기

 

최석우 몬시뇰이 박해 시대 한국 천주교회사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서술한 주요 내용으로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한국 진출과 선교사들의 활동, 다블뤼 <비망기>와 다산의 천주교 신앙,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 병인박해와 병인양요, 박해기 천주교 신자들의 국가관과 서양관, 회장들의 위치와 역할, 《기해일기》와 《벽위편》 등에 관한 것들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최 몬시뇰은 <빠리 外邦傳敎會의 한국진출>26)을 통하여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진출해서 활동하던 북경교구가 초창기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과 도움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의 발전 과정에서 절실히 요구된 성직자 영입 운동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면서 파리 외방전교회가 조선으로 선교사를 파견하는 것을 여러 가지로 방해했던 사실을 포교보호권(Padroado) 문제와 관련하여 서술했다. 또한 <파리 外邦傳敎會의 韓國 進出의 意義 - 한국 진출을 전후한 시기의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중심으로 ->27)에서는 대혁명을 겪은 프랑스에서 정교분리(政敎分離) 정책이 시행되고 본국에서는 가톨릭교회를 탄압하면서도 선교사의 해외 진출은 적극 후원하는 이중적인 프랑스 정부의 종교 정책에 대해서 기술하고 한불조약이 체결된 것도 해외에서 프랑스 정부가 전통적으로 취해왔던 종교 보호 정책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또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반지성주의, 낭만주의적 성향과 순교에 대한 영성 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최 몬시뇰은 프랑스 선교사들의 한국 진출을 순수한 선교 의지와 노력의 결실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제국주의와 직접 연관시키는 것은 부당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논문들에는 최 몬시뇰이 선교사 내지 구세사적 관점에서의 교회사 연구를 중시하는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와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 대한 최 몬시뇰의 관심과 이를 활용한 달레의 교회사 서술과의 비교 · 검토 문제는 다블뤼 주교가 초기 교회 서술의 거의 대부분을 인용했다는 다산 정약용의 《조선복음전래사》(朝鮮福音傳來史)의 존재를 해명하고 이를 실제로 찾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는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에서만 언급되어 있어 상당수의 교회사가와 일반 한국사 연구자들은 별도의 책이 아닌 다산이 쓴 일련의 ‘묘지명’(墓誌銘)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최 몬시뇰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반박하면서, 《조선복음전래사》에는 묘지명들에서 볼 수 없는 몇 가지 교회사 관련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28) 또한 최 몬시뇰은 1980~1990년대 약 10년간에 걸쳐 다산 정약용의 천주교 신앙과 서학 사상의 실체에 대해서 실증적 연구에 집중하여 다산이 유배 후에 천주교로 회두(回頭)하여 신자로서 선종(善終)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함으로써, “다산이 천주교와 무관하거나 적어도 유배 이후에는 천주교와 절연하여 유교로 복귀했다”고 주장하는 한국사 연구자들과 오랜 기간에 걸쳐 수차례의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29) 최 몬시뇰의 다산 관련 연구들은 다산의 천주교 신앙을 부정하고자 하는 일반 한국사 연구자들과의 논쟁을 위해서도 철저한 실증주의에 입각하여 작성될 수밖에 없었지만, 조선 후기 실학(實學)의 집대성자로 평가되고 있는 다산의 사상(思想)에 대해서, “다산이야말로 보유론자(補儒論者) 또는 외유내야(外儒內耶)라기보다는 완전한 유학자(儒學者)이자 동시에 완전한 천주교인(天主敎人)이었다”고 규정하고, 그의 내면에서는 유교와 천주교가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 만나고 공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30) 다산에 대한 최 몬시뇰의 이 같은 평가는 천주교의 토착화를 중시하는 구세사적 관점에서 볼 때, 천주교와 유교와의 내적 조화를 추구해간 조선 후기 지식인 신자의 면모를 구체적으로 입증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사료에 대한 고증을 중시하는 실증주의적 역사학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손색이 없는 교회사 서술이었다고 평가되므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최 몬시뇰이 추구한 교회사의 연구방법론과 지향이 다산 정약용 연구에 고스란히 녹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최석우 몬시뇰은 구세사의 관점에서 최초의 한국인 신부인 김대건 신부와 그의 동료 최양업 신부에 대해서 평가하기를, “순교(殉敎)의 본뜻인 ‘증언’(證言)의 관점에서 볼 때, 김대건 신부의 순교는 대표적인 ‘피의 증언’이고 최양업 신부의 경우는 대표적인 ‘땀의 증언’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31) 특히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관련해서, “순례로 표현되는 구원의 길, 신앙의 길은 멀고 험하다. 그 길은 도중하차나 중도 포기로는 이룰 수 없는 길이다. 종착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도중에 그만두는 경우가 허다한 오늘날, ‘길의 사나이’가 주는 교훈은 실로 값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특징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한 것처럼 ‘길’이 주는 의미는 중요하다”고 평가했고, 김대건 신부에 대해서도 “김대건 신부 역시 선교사의 길을 개척하다가 길에서 죽은 인물로, 최양업 신부와 더불어 한국 교회의 복음화의 길을 닦았던 선구적 인물로서 한국 교회사에서 높이 평가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서술했다.32) 이러한 최 몬시뇰의 언급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강조했던 구세사적 관점에서의 교회사 연구의 특징이 그의 서술에 매우 강하게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교회 회장의 위치와 역할>33)에서 최 몬시뇰은 한국 교회에서 회장이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에 대해서 제도사적 고찰을 한 후, 회장 제도가 쇄신되고 적응되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오늘날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에 회장직에 관하여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는 것은 초창기부터 한국 교회를 유지해온 버팀목이었던 회장직이 그 의의와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파악하고, 이제 한국 교회가 해야 할 일은 회장직을 다시 활성화하는 일이라고 역설했다. 회장직의 품위를 격상시키거나 회장들에게 종신 부제직을 수여하는 방법도 검토하자고 했다. 그러면서 “회장이 좋으면 좋은 공소가 되고, 회장이 부족하면 부족한 공소가 된다”는 한국 교회의 속담을 새겨야 할 것임을 강조했다. 이 같은 언급은 하느님 백성으로서 평신도의 교회 참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역설한 것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정신을 교회사 서술에 녹여서 반영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의 국가관과 서양관> 및 <전근대 傳統 지식인의 對西洋 인식>, <국가와 교회의 관계>34) 등을 통해서 최석우 몬시뇰은, 《천주실의》 등의 한역서학서를 통하여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은 신앙 우위의 국가관을 갖게 되었고, 국가와 신앙의 관계를 적대 관계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한편으로 중화주의적 지리관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은 “서양 문화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면서도 이를 종교적 차원에서 이용하려고 하였을 뿐이고,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근본 의미나 서양 제국주의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보았다. 또한 신자들은 완전한 정교분리 대신에 종교의 우위를 내세운 중세적인 정교혼합주의(政敎混合主義)적 개념을 갖고 육화론(肉化論)적 영성과 종말론(終末論)적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고 파악했다. 이 같은 최 몬시뇰의 언급은 교회사를 구세사적 관점에서 파악하면서도 역사학적 입장에서 세계사의 흐름에 매우 깊은 주의를 기울이는 그의 독특한 교회사학 연구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3) 개항기~현대

 

최석우 몬시뇰의 개항기 한국 교회사 연구에서 두드러진 분야는 한불조약과 전교 자유의 획득 과정, 교안(敎案), 동학(東學)과 서학(西學), 개신교와 천주교의 갈등, 안중근(安重根)과 애국 계몽 운동, 분도회의 한국 진출과 초기 활동 등에 관련된 것들이다.35)

 

최 몬시뇰의 개항기 교회사에 대한 연구는 흔히 ‘전교자유(傳敎自由)의 여명기(黎明期)’로 일컬어지는 이 시기의 특징과도 관련하여 제한된 범위에서 전교 자유가 주어지는 계기가 된 한불조약의 내용과 이로 인해 초래된 한국 천주교회의 변화된 모습 등과 관련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한불조약 체결 이전의 양국관계>36)에서 최 몬시뇰은, “프랑스 측의 포함외교(砲艦外交)는 실패로 끝났다. 포함외교의 목적은 영토적인 야심보다는 선교사, 즉 자국민의 보호와 통상 요구에 있었다. 그것은…식민지 쟁탈전의 초기 단계인 중상주의(重商主義) 정책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본격적인 식민지 확보 정책인 제국주의(帝國主義)와 관련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고 하여, 박해 시기 한불 양국 간 벌어졌던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와 이에 대한 프랑스의 군함 시위 및 병인양요 등에 대하여, 역사학적(세계사적) 입장에서 평가하면서도 구세사의 관점을 유지하는 신중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한불조약의 체결과정>37)을 통해서 최 몬시뇰은, 프랑스의 전통적인 종교보호주의 정책을 한불조약 체결의 중요한 배경적 요소로 파악하고, 이것이 정치와 통상만을 위해 조선과 조약을 체결한 구미 열강 다른 나라들과 달리, 프랑스만이 견지하고 있던 특징이라고 평가했다. <한불조약의 체결과 그후의 양국관계>38)에서는 한불조약 제9관 2항의 ‘교회’(敎誨) 조항의 삽입이 갖는 선교사(宣敎史)적 의미를 자세히 분석했다.

 

개항기 교회사 연구에서 최 몬시뇰이 역점을 두고 연구한 주제의 하나는 안중근 토마스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것이었다. <안중근의 의거와 교회의 반응>39)에서 안중근의 애국심과 신앙은 결국 분리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안중근의 신앙과 기도 생활은 의병 활동을 거쳐 감옥 생활에까지 이어졌을 뿐더러 점점 더 열렬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안중근이 전쟁터와 감옥에서 매일 기도를 했고, 사형이 선고된 후 아내에게 장남 분도를 사제로 키울 것, 숙부에게 백부의 개종을 부탁한 것, 일본인 변호사에게 천주교 입교를 권고한 것, 사형 직전 10분간 기도한 것 등을 들면서, 안중근의 신앙심이 그의 애국 활동 가운데 계속해서 성장해갔다는 추론의 근거로 삼았다. 또한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독립을 위한 의병 전쟁 중에 단행된 전투행위의 하나이므로 정당방위요, 정당한 행위라고 보았으며, 안중근이 외친 ‘동양의 평화’야말로 한국의 독립을 완전하게 해 주는 전제 조건이 된다고 했다. 한국의 근대사에 있어서 탁월한 영웅이자 애국심의 화신과 같은 인물인 안중근이 천주교 신자였다는 사실에 대한 자긍심을 신자들에게 고취시키려던 숨은 의도가 엿보이는 최 몬시뇰의 이 논문은 애국 전쟁 중의 살인 행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신학적 고찰이 요구되는 문제였다는 점에서, 또 한국 근대사 중에서도 국내외 의병전쟁사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그 기본 바탕으로 하여 안중근 의사의 독립 활동과 애국정신을 탐구하였다는 점에서, 신학과 역사학이 만나 절묘한 조화를 이룬 교회사의 본령에 속한 연구 작업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우리 교회가 그동안 안중근의 애국 활동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해왔다는 반성과 향후 동양 평화를 통해서 한국의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진다는 국제관계사적 안목 등이 담겨 있는 이 논문은 연구자들로 하여금 교회의 현실 참여 의지를 북돋아 주면서, 민족의 복음화와 동아시아의 선교가 상호 밀접한 상관관계에 놓여 있음을 깨닫게 해 주는 현실참여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글로서 역사학적 전기적 요소가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고 보여진다.40) 최석우 몬시뇰은 일제 강점기 교회사와 관련하여, 교회의 선교 활동, 교회 조직의 발전, 교회 생활, 교회의 활동과 사업, 교회의 항일운동 등으로 구분하여 교회사 서술의 방향을 제시했다.41)

 

교회 일치를 지향하는 현실참여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는 최 몬시뇰의 연구로서 개신교와 천주교의 상호 관계에 대한 연구 작업들을 들 수 있다.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의 대화>42)를 통해서, 최 몬시뇰은, “한국의 천주교와 개신교가 대립과 충돌을 한 것은 선교의 장(場)을 같이한 데서 야기된 경쟁의식 때문인데, 빈번한 갈등과 충돌은 마침내 반목과 무관심을 낳게 하여 해방 후까지 계속되었다”고 하면서 개신교와 천주교의 갈등의 원인과 실상을 노출하기를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한편 일치 운동으로서의 공동 성서 번역의 중요성과 그 성과를 주목하고 향후 양 교회 간의 지속적인 대화와 교류의 방안을 모색할 것을 간접적으로 촉구했다. 또 <개화기의 한국 천주교와 프로테스탄트>43)를 통해서 최 몬시뇰은, 만주 땅에 가서 세례를 받고 고국으로 돌아와 전교 활동을 시작한 한국 개신교의 자발적 기원을 인정하면서, “천주교와 개신교는 공히 선교사가 파견되기 전에 한국인 스스로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를 세웠다는 점에서, 동일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간의 일치 운동을 반성하는 관점에서 최 몬시뇰은, “20세기의 종교 개혁이라고도 불렸던 양 교회 간의 화해 일치 운동은 여러 방면에서의 시도로 많은 진전을 이루었으나, 확실한 전환점을 이루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라고 진단하고 공동 성서 번역 작업 이후 양자 간의 교류가 지지부진하게 된 것은 너무 성급하게 서두른 결과였다고 보았다. 또 교회와 국가라는 관계에서 천주교와 프로테스탄트는 (일치 운동의 차원에서) 그 역할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 몬시뇰의 교회 현실에 대한 비판적 참여의 경향이 매우 강하게 드러나는 논문으로 <聖地의 槪念>44)을 들 수 있다. 이 논문을 통해 최 몬시뇰은 작금 교회 내에서 추진되고 있는 이른바 성지 개발 사업에 대해서, “성지(聖地)의 난발을 염려하고 그것을 억제하고 시정하기 위해서 먼저 성지 개념의 정립이 시급히 요구된다는 여론(輿論)이 일기 시작한 것은 때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퍽 다행한 움직임이 아닐 수 없다”고 운을 뗐다. 이어서 “가치 있는 옛 문화재라 하더라도 국보와 보물, 지정문화재의 구별이 있듯이 무엇인가 표준이 될 성지의 정의가 앞서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 몬시뇰은 이른바 한국의 성지들을 유형화하여 순교기념지로서의 순교터와 산소(무덤)만을 성적지(聖蹟地)로 간주하고 나머지는 사적지(史蹟地)로 부르자고 했다. 이러한 분류 원칙에 입각하여 새남터, 서소문 밖, 당고개, 절두산, 경기도 수원, 양평, 여주, 광주, 강화, 죽산, 충청도의 보령 갈매못, 공주, 연풍, 전라도의 전주 숲정이, 여산, 경상도의 대구 관덕정, 울산 장대벌, 진주 등을 순교지(殉敎地)로 불렀다. 또 사적지(史蹟地)로는 저명한 신앙선조들의 탄생지와 거주지, 요람지(搖籃地), 유서 깊은 교우촌 및 본당, 신학당 터, 성모기념지 등을 거론했다. 이러한 용어상의 의미 정립과 분류 후에 최 몬시뇰은 날로 속화되어가고 있는 성지순례에 대한 교황청의 경고를 귀담아들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4. 맺음말 - 최석우 교회사학의 의의 : 국산 벽돌로 교회사 건축을!!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여 보면, 최석우 몬시뇰의 교회사학의 의의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으로 요약 ·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최석우 몬시뇰이 추구한 교회사 연구의 이상적인 형태는 교회사가 신학과 역사학의 두 영역에서 서로 공존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최 몬시뇰은 신학으로서의 교회사를 추구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교회’라는 용어에 대한 신학적 개념 정립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최 몬시뇰은 처음에는 교계제도로서의 교회 개념이 중요하다고 보았지만, 차츰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 특히 평신도의 능동적 참여가 보장되는 교회가 더욱 중요하다고 보게 되었다. 이러한 성찰의 결과로서 최 몬시뇰은 1961년 박사 논문 <조선에서의 첫 대목구 설정과 가톨릭교의 기원 1592~1837년>에서 한국 교회사의 공식적 시점으로서 1831년 조선 대목구 설정을 주장했으나, 차츰 1784년 이승훈이 거행한 서울 수표교에서의 집단 세례 의식이야말로 한국 교회의 시작이라고 보게 되었다.

 

셋째, 최 몬시뇰은 한국 교회사 연구에서 원사료의 발굴과 이에 대한 체계적 분석을 중요시했다. 이는 그의 실증주의적 역사학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비롯된 경향으로,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의 저본이 된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와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을 중시함은 물론, 이들의 저본이 된 것으로 본 정약용의 <조선복음전래사>에 대한 끊임없는 발굴 노력과 잦은 언급 등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최 몬시뇰은 교회 측의 기록뿐만 아니라 《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관찬 연대기와 《사학징의》, 《추안급국안》 등 재판 및 심문 조사 관련 기록들도 매우 중시했다.

 

넷째, 최석우 몬시뇰은 박해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한국 진출, 다산 정약용의 신앙과 가톨릭 사상, 안중근의 애국 활동과 신앙심,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영성과 활동 등에 대한 연구와 저술을 통하여 구세사적 관점에서의 교회사 연구를 진전시켜, 단순한 선교사와 그리스도교사의 범위를 초월하는 전체사로서의 교회사를 조망하고 추구하였다. 아울러 개신교와 천주교의 일치, 성지 개념의 정립 등에 대한 논문을 통해서 교회 현실에 대한 적극적 참여와 함께 교회의 개혁 및 향후 교회의 진로 등에 대해 교회사가로서의 조언과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이상의 4가지 특징을 다시 종합하여 요약해보면, “최석우 몬시뇰이야말로 한국 교회사에 대한 집체적 연구를 시작한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창설자로서, 구원사와 실증사의 조화를 통해서 전체사적 전망을 제시한 선각적 교회사가였다”고 할 수 있다.

 

2004년 최석우 몬시뇰은 교회사 연구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이제 한국 교회사의 연구도 국산 벽돌로 바꾸어야 할 때가 왔다”라고 장래의 희망을 표명했었다. 그로부터 4반세기의 세월이 흐른 오늘, 그 희망은 기대 이상으로 실현된 것으로 보인다. …국산 벽돌로 비유한 것은 한국 교회사 연구에서 한국인에 의하지 않고는 토착화가 실현되기 어려울 것임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집을 지으려면 지을 집의 사용 목적에 따라 그려진 건축설계와 도면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쌓아 올려진 자료들이나 일련의 사건의 서술까지도 아직은 벽돌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 구세사적인 해석이 기초로 놓여 있을 때에만 교회사는 가능하고 그래야만 진정한 교회사이다.45)

 

최 몬시뇰은 한국인에 의한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의 소망이 실현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직 교회사 연구의 진정한 토착화는 실현되지 못한 것 같다. 그것은 벽돌의 재질을 따지기 전에 그 벽돌로 지을 ‘교회사라는 무형(無形)의 성전(聖殿)’에 대한 건축설계도와 각종 도면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구체적 내용에 관한 합의가 아직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최석우 몬시뇰이 평소에 강조하던 구세사적인 전망에 대한 논의도 부족할뿐더러, 현실 참여적이면서도 실증주의적인 역사학에 대한 토론도 본격화되고 있지 않다. 이런 현실에서 한국 천주교회 최초로 한국 교회사에 대한 집체적 연구를 시작한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창립자 최석우 몬시뇰이 소망했던 “국산 벽돌로 지은 한국 교회사라는 무형성전(無形聖殿)의 건립”이 아직도 요원한 현실이 안타깝다.

 

 

참고 문헌*

 

1. 저서

《한국천주교회의 역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한국교회사의 탐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한국교회사의 탐구 II》,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한국교회사의 탐구 III - 최석우 신부 수품 50주년기념 -》,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2. 학술지 게재 논문

“L’erection du premier Vicariat apostolique et les origines du Catholicisme en Coree 1592-1837”, 1961. 7(최석우 저, 조현범 · 서정화 옮김, 《조선에서의 첫 대목구 설정과 가톨릭교의 기원 1592~1837년》, 한국교회사연구소, 2012. 7, 최석우 몬시뇰의 본 대학 신학박사 학위 논문).

인물한국사편찬회, <帛書에 얼룩진 피 黃嗣永>, 《인물한국사 4 : 시련의 대열》, 박우사, 1965.

<병인양요 소고>, 《역사학보》 30, 역사학회, 1966.

<천주교에서 본 근대화 문제>, 《한국 근대화의 이념과 방향》, 동국대학교, 1967.

<순교지의 마리아상=천주교>, 《韓國現代史 8 : 新社會100년》, 신구문화사, 1969.

<한불조약과 신교자유>, 《사학연구》 21, 한국사학회, 1969.

《이해남박사화갑기념 한국사학논총》, 이해남박사화갑기념한국사학논총 간행위원회, 1970.

<빠리 외방전교회의 한국진출(1500~1836년)>, 《혜암유홍렬박사화갑기념논총》, 혜암유홍렬박사화갑기념사업위원회, 1971.

<조선 후기사회와 천주교>, 《숭전대학교논문집》, 5, 숭전대학교, 1974.

<한국 교회 교리서의 변천사>, 《사목》 35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4. 9.

<韓國敎會史는 어떻게 서술되어 왔는가?>, 《박상일수녀화갑기념논문집》, 박상일수녀화갑기념논문집발간위원회, 1974.

<천주교의 수용>, 《한국사》 14(근대사상의 맹아), 국사편찬위원회, 1975.

<천주교의 박해>, 《한국사》 15(민중의 저항), 국사편찬위원회, 1975.

<천주교 세력의 확대>, 《한국사》 15(민중의 저항), 국사편찬위원회, 1975.

<천주교의 유교사회에의 도전>, 《한국사》 15(민중의 저항), 국사편찬위원회, 1975.

<긔?일긔의 몇 가지 문제점>, 《사목》 43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6. 1.

, 《한국천주교회사논문집》 제1집, 한국천주교회사연구소, 1976.

<パリ外邦?敎會の韓國進出>, 《韓》 5-11, 한국연구원, 1976.

<西學에서 본 東學>, 《교회사연구》 1, 한국교회사연구소, 1977.

<帛書에 기리는 殉敎者=黃嗣永>, 《歷史의 人物》 5, 일신각, 1979.

<邪學懲義를 통해서 본 初期天主敎會>, 《교회사연구》 2,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전북사학회 한국사연구실 편, <조선 후기사회와 천주교>, 《한국사회사상사논선》, 1979.

<한국 그리스도교 운동에서 본 忠孝>, 《성신여자사범대학연구논문집》 11, 성신인문과학연구소, 1979.

<黃嗣永 - 帛書에 얼룩진 피>, 《歷代人物韓國史》 6, 신화출판사편, 1979.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 <韓國宗敎運動史 IV - 天主敎 ->, 《韓國現代文化史大系 V : 文化運動 · 民族抗爭史》, 1980.

<북한의 천주교>, 《통일정책》 6-2, 국토통일원 평화통일연구소, 1980.

<한국종교운동사 4(천주교)>, 《한국현대문화사대계 5 : 문화운동, 민족항쟁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0.

국제문화재단 편, <金大建의 朝鮮全圖>, 《韓國文化의 諸問題》, 1981.

<달레著 韓國天主敎會史의 形成過程>, 《교회사연구》 3, 한국교회사연구소, 1981.

전북사학회 편, <조선 후기사회와 천주교>, 《韓國史의 理解》, 금화출판사, 1981.

<종교사적 측면에서 본 근대민족의식의 성장>, 《인문과학연구》 1, 성신여자대학 인문과학연구소, 1981.

국제문화재단 편, <서학의 수용과정>, 《韓國의 思想》, 한국문화시리즈 10, 시사영어사, 1982.

국제문화재단 편, <金大建의 朝鮮全圖>, 《韓國文化의 諸問題》, 한국문화시리즈 11, 시사영어사, 1982.

<성지의 개념>, 《신학전망》 57호(1982. 여름), 대건신학대학 전망편집부.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의 대화>, 《신학사상》 39(1982. 겨울), 한국신학연구소.

<한국 천주교 교구 발전사>, 《사목》 87호, 1983. 5.

<서양에 비추어진 한국>, 《이화사학연구》 13-14합집, 이화사학연구소, 1983.

숭전대학교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편, <조선 후기사회와 천주교>, 《韓國의 近代化와 基督敎》, 숭전대학교 출판부, 1983.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 DAVELUY의 備忘記를 중심으로>, 《다산학보》 5, 다산학연구원, 1983.

<朝鮮敎區 設定의 敎會史的 意味>, 《교회사연구》 4, 한국교회사연구소, 1983.

<天主實義에 대한 韓國 儒學者의 見解>, 《東亞硏究》 3,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1983.

<韓國芬道會의 初期修道生活과 敎育事業>, 《사학연구》 36호, 한국사학회, 1983.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 - 교회사적 입장에서>, 《사목》 91호, 1984. 1.

<재한 천주교 선교사의 한국관과 선교정책>, 《숭산박길진박사고희기념 한국근대종교사상사》, 숭산박길진박사고희기념사업회, 1984.

<파리외방전교회 연보 해제>, 《서울敎區 年譜 I : 1879~1903》, 천주교 명동교회, 1984.

<한국 천주교회와 로마 교황청>, 《한국교회사논문집》 I,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한국천주교회창설200주년기념 한국교회사논문집간행위원회 편, <韓國天主敎會와 로마敎皇廳>, 《韓國敎會史論文集》 I,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구미측 문헌에 나타난 독도>, 《독도연구》, 한국근대사자료연구협의회, 1985.

<대구교구 경계선의 확정>, 《몬시뇰전석재총장고희기념논총》, 효성여자대학 총동창회, 1985.

<북한의 종교 탄압과 의사 종교>, 《통일문제》 19호, 국토통일원, 1985.

<한국교회와 한국인 성직자의 양성 - 예수성심신학교를 중심으로 ->,

《논문집》 11, 가톨릭대학, 1985.

<해서교안의 연구>, 《한글성서와 겨레문화》, 기독교문사, 1985.

<丁茶山의 西學思想>, 《丁茶山과 그 時代》, 열음사, 1986.

한국사연구협의회 편, <한불조약 체결이전의 양국관계>, 《韓佛外交100年史》, 1986.

한국사연구협의회 편, <한불조약 체결과 그 후의 양국관계>, 《韓佛外交100年史》, 1986.

<파리 외방전교회의 한국진출의 의의 : 한국진출을 전후한 시기의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5,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편, <한불조약의 체결과정>, 《韓佛外交史》, 평민사, 1987.

<한불조약의 체결과정>, 《韓佛修交史(1886~1986)》(한국정치외교사학회논총 제3집), 평민사, 1987.

<일본교회의 한국인 순교자들>, 《교회사연구》 6(이원순교수화갑기념한국교회사논문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8.

<東亞細亞에서의 敎會의 土着化 : 韓國敎會를 中心으로>, 《교회사연구》 7, 한국교회사연구소, 1990.

<조선후기 서학사상>, 《국사관논총》 22, 국사편찬위원회, 1991.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문제>, 《한국 기독교와 역사》 창간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1.

<한국 교회의 창설과 초창기 이승훈의 교회 활동>,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안중근의 의거와 교회의 반응>, 《교회사연구》 9,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백서에 기리는 순교자 / 황사영>, 《한국인물탐사기 - 조선의 인물3 -》, 오늘, 1996.

<순교자 현양의 교회사적 의의>, 《교회사연구》 11,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일제하 한국천주교회의 독립운동 - 3 · 1운동을 중심으로 ->, 《교회사연구》 11,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성 김대건 신부에 대한 연구와 현양의 의의>, 《교회사연구》 12, 한국교회사연구소, 1997.

<전근대 전통 지식인의 對西洋 인식>, 《국사관논총》 76, 국사편찬위원회, 1997.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의 國家觀과 西洋觀>, 《교회사연구》 13,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병인양요와 조선 천주교회>, 《누리와 말씀》 3호, 인천가톨릭대학교, 1998.

<최양업 신부의 선교활동과 시복추진의 의미>, 《교회사연구》 14, 한국교회사연구소, 1999.

<부록 : 성농 최석우 신부 약력 및 저작 목록>, 《민족사와 교회사》(최석우 신부 수품 50주년 기념 논총 제1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최석우 신부의 회고 50년 / 나의 교회사 연구>, 《민족사와 교회사》(최석우 신부 수품 50주년 기념 논총 제1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교회사 연구와 서술의 문제>, 《교회사연구》 23,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Catholic Church and Modernization in Korea”, Korea Journal 7-1, Korean National Commission for UNESCO, 1967. 1.

“Korean Catholicism Yesterday and Today”, Korea Journal 24-8, Korean National Commission for UNESCO, 1984. 8.

 

3. 소논문 및 기고문

<성경 한글 번역에 있어 한국 천주교회의 선구적 역할>, 《가톨릭청년》 15-5, 1961. 5.

<이승훈의 편지가 말하는 가성사 집행>, 《가톨릭청년》 17-4, 1963. 4.

<순교자들의 꽃이여 필지어다>, 《경향잡지》 1143호, 1963. 6.

<26위 순교 사기(1~24)>, 《가톨릭신문》 380~408호, 1963. 6. 23~1964. 1. 26.

<시복될 26위에 관한 목격 증언>, 《가톨릭청년》 17-11, 1963. 11.

<한국의 개화와 그리스도교>, 《이십세기강좌》 2, 박우사, 1963.

<병인년 순교자 26위의 시복식이 내년 100주년에 이루어지기를>, 《경향잡지》 1170호, 1965. 9.

<순교자의 희생정신을 우리 생활에>, 《가톨릭청년》 194호, 1965. 9.

<김대건의 순교 비화>, 《학등》 33-20, 한성도서주식회사, 1965.

<뮈텔 - 순교자의 꽃을 피어나게 하라>, 《한국의 인물상》 3, 신구문화사, 1965.

<일직선을 가는 세월>, 《가톨릭 지성인 수상집》, 가톨릭출판사, 1965.

<황사영>, 《인물한국사》 IV, 박우사, 1965.

<교종 · 람 대주교 회담의 역사적 의의>, 《가톨릭신문》 514호, 1966. 4. 10.

<한국 교회사들을 일반에 공개하자>, 《가톨릭신문》 517호, 1966. 5. 1.

<새 교리서의 편찬을 마치고>, 《가톨릭신문》 537호, 1966. 10. 2.

<새 가톨릭 교리서 개요>, 《가톨릭신문》 563호, 1967. 4. 9.

<가톨릭 루터관의 변천>, 《기독교사상》 112호, 대한기독교서회, 1967. 10.

<시복에 누락된 순교자>, 《가톨릭신문》 638호, 1968. 10. 6.

<24위 시복까지 애쓴 공로자들>, 《가톨릭청년》 231호, 1968. 10.

<새 미사 해설>, 《가톨릭신문》 694호, 1969. 11. 23.

<미사 통상문 변경의 의의>, 《가톨릭신문》 695호, 1969. 12. 14.

<한국 교회 出版史>, 《가톨릭신문》 705호, 1970. 2. 8.

<내 양을 치라 - 역사를 통해 본 사목자상>, 《가톨릭신문》 768호, 1971. 5. 30.

<교회가 본 언론>, 《가톨릭신문》 264호, 1971. 7~8.

<순교지의 마리아상>, 《한국현대사》 8, 신구문화사, 1971.

<현대와 종교>, 《서강》 2, 서강대학, 1971.

<새 시대의 일치운동>, 《사목》 24호, 1972. 11.

<여지도서 전질 발견>, 《가톨릭신문》 859호, 1973. 4. 1.

<교회사 측면에서 본 200주년>, 《경향잡지》 1269호, 1973. 12.

<새남터 순교지 위치가 틀린다>, 《가톨릭신문》 904호, 1974. 2. 24.

<종교의 사명과 역할 - 천주교측>, 《기독교사상》 190호, 1974. 3.

<牧者有感 - 사제와 학문>, 《가톨릭신문》 192호, 1974. 4. 28.

<새남터 위치에 관하여>, 《경향잡지》 1273호, 1974. 4.

<근대화의 주역 김대건 신부 - 한 알의 밀씨로서>, 《경향잡지》 1276호, 1974. 7.

<격동 20년(1~20)>, 《가톨릭신문》 924~947호, 1974. 8. 4~1975. 1. 26.

<사랑의 증거로서의 순교>, 《경향잡지》 1278호, 1974. 9.

<한국교회 교리서의 변천사>, 《사목》 35호, 1974. 9.

<노동하는 보람>, 《경향잡지》 1284호, 1975. 3.

<殉敎血史(1~59)>, 《가톨릭신문》 956~1020호, 1975. 4. 6~1976. 8. 15.

<이조의 사회개혁 시도한 실학운동>, 《경향잡지》 1286호, 1975. 5.

<초창기 한국교회에 있어서의 세례>, 《사목》 39호, 1975. 5.

<교회의 여명기(1~48)>, 《경향잡지》 1287~1334호, 1975. 6~1979. 5.

<기해일기는 數名의 共著>, 《가톨릭신문》 979호, 1975. 9. 28.

<해미 순교자의 증언>, 《교회와 역사》 2호, 1975. 10.

<한국 가톨릭과 한국 문화(1~5)>, 《가톨릭신문》 1019~1024호, 1976. 8. 1~9. 12.

<백서의 행방>, 《교회와 역사》 17호, 1977. 2.

<한국 가톨릭과 한국 문화>, 《사목》 50호, 1977. 3.

<변기영 신부의 주장에 이의가 있다>, 《교회와 역사》 43호, 1979. 3.

<김대건의 조선전도>, 《교회와 역사》 45호, 1979. 5.

<50호를 내면서>, 《교회와 역사》 50호, 1979. 10.

<교회를 통한 한불 교섭사>, 《교회와 역사》 54호, 1980. 2.

<진통의 150년(1~3)>, 《가톨릭신문》 1233~1235호, 1980. 12. 7~12. 25.

<한국 근대 국가형성과 기독교>, 《기독교사상》 278호, 1981. 8.

<순교정신과 150周>, 《가톨릭신문》 1273호, 1981. 9. 27.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경향잡지》 1362호, 1981. 9.

<경향잡지 75년사 - 신앙생활의 병기고>, 《경향잡지》 1363호, 1981. 10.

<한국 교회사에서 본 의료>, 《한국가톨릭병원협회지》 12-2, 1981. 12.

<천주교와 함께 역사의 지평에 떠오른 평민>, 《靑五》 15호, 1981.

<200주년 기념사업을 위한 제언>, 《사목》 81호, 1982. 5.

<암살자 안중근 망언>, 《가톨릭신문》 1319호, 1982. 8. 29.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교회와 국가>, 《사목》 83호, 1982. 9.

<가톨릭신문과 교회언론의 발전과정>, 《가톨릭신문 영인본》 1, 가톨릭신문사, 1982.

<한국 분도회의 초기 수도생활과 교육사업>, 《교회와 역사》 94호, 1983. 4.

<한국 천주교 교구 발전사>, 《사목》 87호, 1983. 5.

<구주 지역에 산재하는 한구 교회사 자료에 관하여>, 《교회와 역사》 98호, 1983. 8.

<한국 천주교회사학 어디까지 왔나?>, 《교회와 역사》 100호, 1983. 10.

<서양에 비추어진 한국>, 《이화사학연구》 13 · 14합집, 1983.

<뮈텔 주교의 일기 해제>, 《교회와 역사》 103호, 1984. 1.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 《사목》 91호, 1984. 1.

<민족의 과제와 한국 가톨릭>, 《기독교사상》 308호, 1984. 2.

<한국 교회와 교황청>, 《사목》 92호, 1984. 3.

<성서의 도입과 번역>, 《성서와 함께》 103호, 1984. 10.

<사도 법관 김홍섭 - 먼지는 땅으로, 영혼은 천주께로>, 《생활성서》 23호, 1985. 7.

<신학자가 답한다 - 가톨릭의 전쟁관>, 《경향잡지》 1413호, 1985. 12.

<우리말 성서가 가지는 교회사적 의미>, 《성서와 함께》 129호, 1986. 2.

<파리 외방전교회의 한국 진출의 의의>, 《교회와 역사》 130호, 1986. 4.

<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신앙>, 《교회와 역사》 130호, 1986. 4.

<일제시대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 《새아?》 9, 광주가톨릭대학, 1986.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생애와 사상>, 《갓등 세미나》, 1986.

<드망즈 주교의 일기에 대하여>, 《교회와 역사》 142호, 1987. 4.

<교계제도설정 25년의 회고와 전망 - 여기서 멈출 것인가?>, 《경향잡지》 1429호, 1987. 4.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교회와 역사》 146호, 1987. 8.

<국가와 교회의 관계 - 한국 교회 창설에서부터 일제 말까지>, 《교회와 역사》 147호, 1987. 8.

<김범우의 생애>, 《교회와 역사》 150호, 1987. 11.

<한국 교회사(1~12)>, 《경향잡지》 1438~1449호, 1988. 1~12.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성체 신심>, 《빛둘레》 5호(1988. 봄),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일제하 한국 천주교회 저항운동(1~16)>, 《가톨릭신문》 1596~1617호, 1988. 3. 13~8. 14.

<천주교의 동양전래와 조선(1~2)>, 《교회와 역사》 155~156호, 1988. 4~5.

<한국 교회 영성의 어제>, 《사목》 117호, 1988. 5.

<한국 가톨릭 윤리관의 교회사적 고찰>, 《교회와 역사》 157호, 1988. 6.

<순교 정신과 레지오 마리애>, 《레지오 마리애》 2호, 한국 세나뚜스 협의회, 1988. 9.

<조선교구 설정과 파리 외방전교회의 진출(I)>, 《교회와 역사》 161호, 1988. 10.

<조선교구 설정과 파리 외방전교회의 진출II>, 《교회와 역사》 162호, 1988. 11.

<애국계몽운동기의 천주교(1905~1910)>, 《교회와 역사》 167호, 1989. 4.

<일제의 식민정책과 항일운동>, 《교회와 역사》 168호, 1989. 5.

<한국 가톨릭 교회사 서술 방향(2) - 제4편 일제시대의 교회(1910~1945)>, 《교회와 역사》 168호, 1989. 5.

<일제하 천주교회의 위상>, 《교회와 역사》 169호, 1989. 6.

<동아세아에서의 교회의 토착화>, 《교회와 역사》 174호, 1989. 11.

<간추린 한국 천주교회사>, 《성서의 세계》 13, 동아출판사, 1989.

<한국 천주교의 어제와 오늘>, 《한국의 종교》 1989. 문공부.

<평신도를 통한 문화의 복음화>, 《항아리》 7호(1990. 봄), 한국가톨릭문화선양회.

<대전 본당의 기원(1~3)>, 《교회와 역사》 181~183호, 1990. 6~8.

<한국 교회의 창설과 교회 초창기 이승훈의 교회 활동>, 《교회와 역사》 183호, 1990. 8.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 《교회와 역사》 184호, 1990. 9.

<한국 천주교 전래 기원에 대한 문제(1)>, 《항아리》 9호(1990, 가을), 한국가톨릭문화선양회.

<한국 천주교 전래 기원에 대한 문제(2)>, 《항아리》 10호(1990, 겨울), 한국가톨릭문화선양회.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 문제>, 《사목》 144호, 1991. 1.

<한국 천주교회 기원 문제에 관한 변기영 신부의 비판의 오류>, 《사목》 144호, 1991. 1.

<한국 천주교회 기원 문제에 대한 종합적 검토>, 《사목》 144호, 1991. 1.

<가톨릭과 제사>, 《교회와 역사》 189호, 1991. 2.

<개화기의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 《교회와 역사》 192호, 1991. 5.

<안중근 論>, 《교회와 역사》 194호, 1991. 7.

<교회와 역사 200호 발간에 부쳐>, 《교회와 역사》 200호, 1992. 1.

<초기 한국 교회의 사회적 · 정치적 상황과 선교>, 《사목》 157호, 1992. 2.

<예수 성심 공경의 어제와 오늘>, 《교회와 역사》 205호, 1992. 6.

<블랑 문서를 간행하면서>, 《교회와 역사》 208호, 1992. 9.

<오늘로 이어지는 순교>, 《교회와 역사》 214호, 1993. 3.

<신앙과 순교>, 《교회와 역사》 218호, 1993. 7.

<용인 성직자 묘지에서>, 《교회와 역사》 222호, 1993. 11.

<시성 10주년인 새해를 맞이하면서>, 《교회와 역사》 224호, 1994. 1.

<시대가 변하면 사전도 그 상황에 걸맞게 새것이 나와야 한다>, 《교회와 역사》 232호, 1994. 9.

<한국 교회사의 세계화를 위하여>, 《교회와 역사》 236호, 1995. 1.

<숨은 꽃이 만발한 배티 성지>, 《교회와 역사》 241호, 1995. 6.

<역사 바로잡아야 개혁 제대로 이루어진다>, 《교회와 역사》 248호, 1996. 1.

<재단법인 발족과 함께 새로운 출발을>, 《교회와 역사》 260호, 1997. 1.

<한글과 천주교>, 《한글 새소식》 293호, 한글학회, 1997. 1.

<역사 속에 기억될 수 있는 1998년이 되려면>, 《교회와 역사》 272호, 1998. 1.

<2000년 대희년을 향한 반성의 해로>, 《교회와 역사》 284호, 1999. 1.

<다블뤼 주교의 ‘한국 주요 순교자 약전’에 대한 검토(1~2)>, 《교회와 역사》 284~285호, 1999. 1~2.

<주어진 ‘때’를 알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교회와 역사》 286호, 1999. 3.

<기쁜 주일 문화를 창조하는데 우리 함께 노력을>, 《교회와 역사》 288호, 1999. 5.

<대희년, 무엇이 더 앞서고 중요한지를 잘 가려서 맞이해야>, 《교회와 역사》 296호, 2000. 1.

<이제 눈앞에 다가온 2천년, 그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교회와 역사》 296호, 2000. 1.

<300호 맞은 교회와 역사, 자기 반성의 계기로 삼았으면>, 《교회와 역사》 300호, 2000. 5.

 

4. 기타 참고 논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韓國天主敎會史》 상, 분도출판사, 1979.

- - - - - - - - -, 《韓國天主敎會史》 중, 분도출판사, 1980.

- - - - - - - - -, 《韓國天主敎會史》 하, 분도출판사, 1980.

이원순, <韓國天主敎會史硏究小史>, 《崔奭祐神父華甲紀念韓國敎會史論叢》, 서울 : 한국교회사연구소편, 1982.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崔奭祐神父華甲紀念韓國敎會史論叢》, 1982.

임충신 · 최석우 역, 《崔良業神父書翰集》,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誠農崔奭祐神父古稀紀念敎會史論叢》, 1991.

- - - - - - - - -,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 - 최석우 신부수품50주년기념논총 제2집 -》,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제1편 한국 천주교회사연구의 회고와 전망 : 차기진, <창설기 천주교회사 연구> /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의 과제> / 윤선자, <개화기 · 일제하 천주교회사 연구> / 강인철, <현대 천주교회사의 연구>).

 

* 성농 최석우 몬시뇰의 논저를 참고 문헌으로 정리하였다.

 

--------------------------------------------------- 

1) 최석우 신부 수품 5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편, <성농(誠農) 최석우 신부 약력>, 《민족사와 교회사》(최석우 신부 수품 50주년 기념 논총 제1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5, 718~720쪽.

 

2) 이를 우리말로 역주한 것이 최석우 저, 조현범 · 서정화 옮김, 《조선에서의 첫 대목구 설정과 가톨릭교의 기원 1592~1837년》, 한국교회사연구소, 2012. 7이다

 

3) 최석우, <달레 저 《한국천주교회사》의 형성과정>, 《한국교회사의 탐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298~343쪽.

 

4) 최석우, <나의 교회사 연구>, 《민족사와 교회사》(최석우 신부 수품 50주년 기념 논총 제1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5, 698~700쪽.

 

5) 최석우, 위의 글, 2000. 5 ; 이원순, <한국교회사연구소 40년과 방역 협조자들>, 《교회사연구》 23,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313~336쪽.

 

6) 한국교회사연구소가 교회사 관련 주요 자료들을 발굴하고 이관한 자세한 내력에 대해서는 최석우, 위의 글, 2000. 5, 700~710쪽 참조.

 

7) 이와 관련된 내용은 최석우, <다블뤼 주교의 《한국 주요 순교자 약전》에 대한 검토>, 《한국교회사의 탐구 III》(최석우 신부수품 50주년 기념),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5, 114~128쪽 참고.

 

8)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은 최석우, 위의 글, 2000. 5 ; 이원순, 위의 글, 2004 ; 김수태,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연구활동과 방향>, 《교회사연구》 23,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등을 참고.

 

9) 1983년 10월, 월간지 《교회와 역사》 100호를 맞이하여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자체적으로 개최한 심포지엄 발표 원고(소논문)도 이들 세 편의 정식 논문을 보완해 주는 최 몬시뇰의 교회사 연구방법론이 피력된 글로 인정된다. 이 소논문에서 최 몬시뇰은 한국 천주교회사를 사학사적 입장에서 그 흐름을 개관하고, 한국인 이전의 연구들로써 프랑스 선교사들과 일본인들에 의한 연구 성과를 개괄적으로 정리했다. 최석우, <한국천주교회사학 어디까지 왔나?>, 《교회와 역사》 100호, 1983. 10, 9~11쪽.

 

10) 최석우, <韓國敎會史는 어떻게 敍述되어 왔는가?>, 《司牧》 34,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9. 1(《韓國敎會史의 探究》,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221~238쪽에 재수록).

 

11) 최석우, <나의 교회사 연구>, 《민족사와 교회사》(최석우 신부 수품 50주년 기념 논총 제1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5, 691~717쪽.

 

12) 최석우, <교회사 연구와 교회사 서술의 문제>, 《교회사연구》 23,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12(한국교회사연구소 설립 40주년 기념 심포지엄 기조강연).

 

13) 1983년 최 몬시뇰은 교회사 심포지엄 소논문을 통해서, 교회사가는 사실(史實)을 신앙의 견지에서 보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하며, 교회사가는 종교적 의미를 부여해야만 한다는 교회사관(敎會史觀)을 피력했다. 아울러 향후 교회사는 민족사의 시각에서 연구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최석우, <한국천주교회사학 어디까지 왔나?>, 《교회와 역사》 100호, 1983. 10, 11쪽.

 

14) 최 몬시뇰은 어떤 사료(史料)의 내용을 연구하기에 앞서 사료의 저자(著者)와 그 저자의 진실성(眞實性)부터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곧 사료의 내적 비판과 외적 비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실(史實) 연구에 앞서 반드시 거쳐야 할 사학자의 기초 훈련에 속한다고 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역사서의 간행도 중요하지만 자료집의 간행은 더욱 중요하다고 보았다. 최석우, <한국천주교회사학 어디까지 왔나?>, 《교회와 역사》 100호, 1983. 10, 11쪽.

 

15) 최석우, 앞의 논문, 2000. 5, 717쪽.

16) 최석우, 위의 글, 2004, 20쪽.

17) 최석우, 앞의 글, 2004, 8~9쪽.

 

18) 최 몬시뇰은 1983년의 소논문에서 교회 개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과 초기 인물에 대한 적지 않은 혼란이 일어나게 된 것도 모두 교회 개념에 대한 엄밀한 신학적 고찰이 결여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최석우, <한국천주교회사학 어디까지 왔나?>, 《교회와 역사》 100호, 1983. 10, 11쪽. 한편 이와 관련하여 2014년 5월 22일 한국교회사연구소 설립 5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토론자 차기진 박사는 주어사와 천진암 문제, 교회 설립 주체들의 시복에 대한 최 몬시뇰의 부정적인 평가 등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토론자가 제기한 문제들은 모두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 논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그 논쟁 자체로서 별도의 독립적 가치와 분량을 지닌 연구 주제라고 할 것이다. 또 이 주제는 본고에서 우선적으로 탐구해야 하는 최석우 몬시뇰의 교회사 연구에 대한 집중적인 분석이 이루어진 후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체계적인 비교 연구(논쟁 분석)가 진행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본고에서 관련 논쟁을 모두 다룬다면 분량이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므로 필자의 현재 역량으로는 감당하기가 어렵다고 판단된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문제를 차후의 과제로 돌리고 본고에서는 최대한 이와 관련하여서는 직접적인 언급을 절제하고자 한다.

 

19) 최석우, 앞의 논문, 2004, 23쪽에 의하면, “한국 교회의 기원 문제는 신약성서의 판단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고 언급한 황치헌 신부의 제안이 매우 적절하다고 보면서, 황치헌 신부가 세례받은 신자 공동체로 구성된 ‘교회’ 개념을 주장한 것에 대해서 전적인 공감을 표현했다.

 

20) 최 몬시뇰은 《교회와 역사》 제300호 특집을 맞아, “교회는 자기 자녀들의 참회를 통하여 과거의 과오와 불충한 사례들, 항구치 못한 자세와 구태의연한 행동에서부터 자신을 정화하도록 격려하지 않고는 새로운 천년기의 문턱을 넘어설 수 없으며, 과거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을 강화하도록 도와주는 정직하고 용기 있는 행동”이라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교서 <제삼천년기>를 인용하면서, 과거 교회의 역사에 대한 반성이야말로 장래 교회의 발전이나 새로운 전망과도 직결되는 중요한 행동이라고 역설했다. 최석우, <300호 맞은 “교회와 역사”, 자기 반성의 계기로 삼았으면>(권두언), 《교회와 역사》 300호,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5. 1.

 

21) 최석우, <西學의 受容過程>, 《韓國敎會史의 探究》,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35쪽.

22) 최석우, <韓國 天主敎會의 紀元>, 《韓國敎會史의 探究 II》,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13쪽.

23) 최석우,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 문제>, 《韓國敎會史의 探究 III》,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11쪽.

24) 최석우, 앞의 논문, 1991, 18쪽.

 

25) 이 같은 입장은, “1784년 한국 교회의 시작은 그 후 단계적으로 완성되어 나갈 수밖에 없었고, 1837년 교구장인 주교의 부임에서 비로소 완전한 교회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아무리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사제가 없고, 더구나 주교가 없는 교회를 완전한 교회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평신도에 의해 시작된 일들이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성직자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라는 언급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최석우,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교회와 역사》 146호,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8. 5.

 

26) 최석우, <빠리 外邦傳敎會의 韓國進出>, 《韓國敎會史의 探究》,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27) 최석우, <파리 外邦傳敎會의 韓國 進出의 意義 - 한국 진출을 전후한 시기의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중심으로 ->, 《韓國敎會史의 探究 II》,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28) 그 예로서 다블뤼의 <비망기>에는, 다블뤼 주교가 로마에 보낸 조선 순교자 210명에 대한 설명을 붙일 때 다산의 형인 정약종 순교자에 대한 다산의 증언을 여러 번 인용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다산이 쓴 현존 묘지명 중 어느 곳에서도 이같이 정약종에 대해서 언급한 곳이 없다는 점은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가 결코 그가 쓴 묘지명들과 같은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또한 신유박해 순교자가 200여 명에 이른다는 이 책의 기술 또한 현전하는 다산의 묘지명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최석우 · 김옥희 수녀 편, <다산서학에 관한 논의>, 《茶山 丁若鏞의 西學思想 - 1993년도 다산문화제 기념논총 -》, 다섯수레, 1993. 10, 21~25쪽.

 

29) 이와 관련된 내용은 원재연, <다산 정약용과 서학/천주교의 관계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 《교회사연구》 39, 한국교회사연구소, 2012. 12, 37~145쪽 참고 ; 최석우 몬시뇰이 다산의 천주교 신앙과 관련하여 작성한 글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최석우, 《한국교회사의 탐구 II》(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중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정다산의 서학사상> ; 최석우, , 《한국천주교회사논문선집》 1, 한국교회사연구소, 1976. 1 ; 최석우 · 김옥희 수녀 편, <다산 서학에 관한 논의>, 《茶山 丁若鏞의 西學思想 - 1993년도 다산문화제 기념논총 -》, 다섯수레, 1993. 10 ; 최석우, <丁茶山의 西學思想>, 《정다산과 그 시대》, 민음사, 1986.

 

30) 최석우, 앞의 글, 1993. 10.

31) 최석우,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 《韓國敎會史의 探究 III》,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86쪽.

32) 최석우,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 《韓國敎會史의 探究 III》,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94쪽.

33) 최석우, <한국교회 회장의 위치와 역할>, 《韓國敎會史의 探究 III》,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96~102쪽.

34) 최석우, <국가와 교회의 관계 - 한국교회 창설에서부터 일제말까지 ->, 《교회와 역사》 147호,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8. 25.

 

35) 이와 관련된 최 몬시뇰의 근현대 교회사 이해의 흐름은 최석우, <국가와 교회의 관계 - 한국교회 창설에서부터 일제말까지 ->, 《교회와 역사》 147호(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8. 25)에 잘 정리되어 있다.

 

36) 최석우, <한불조약 체결 이전의 양국 관계>, 《韓國敎會史의 探究 II》,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37) 최석우, <한불조약의 체결과정>, 《韓國敎會史의 探究 II》,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38) 최석우, <한불조약의 체결과 그후의 양국관계>, 《韓國敎會史의 探究 II》,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39) 최석우, <안중근의 의거와 교회의 반응>, 《韓國敎會史의 探究 III》,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40) 이와 관련하여, 최석우, <안중근론>, 《교회와 역사》 194호(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7. 25)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안중근이 무엇보다도 중요시했던 것은 바로 민족의 복음화였다. …안중근 의사는 단지 조국애만을 이야기했던 것이 아니라 항상 세계주의도 이야기했다. …그가 사형 직전에 말하기도 했듯이 ‘조국의 광복을 원했다. 그러나 조국의 광복만을 원하지는 않았다. 동양의 평화를 원했던 것이다’라고 한 말을 기억하자. …안중근을 옳게 평가하고 현양하는 일은 한국 교회에 맡겨진 하나의 소임이다. 천주교인 안중근은 애국자였으며, 평신도 사도직의 관점에서도 모범적인 신앙인이었다. 사회를 위해 나라를 위해 헌신하면서도 언제나 기도로써 영성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을뿐더러 전교에도 힘썼던 그의 면모가 고정된 틀 안에서 파악되는 현실은 하루빨리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41) 최석우, <“한국 가톨릭 교회사” 서술방향(2)>, 《교회와 역사》 168호, 한국교회사연구소, 1989. 5. 25.

42) 최석우,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의 대화>, 《韓國敎會史의 探究 II》,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43) 최석우, <개화기의 한국 천주교와 프로테스탄트>, 《韓國敎會史의 探究 III》,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44) 최석우, <聖地의 槪念>, 《韓國敎會史의 探究》,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45) 최석우, <교회사 연구와 교회사 서술의 문제>, 《교회사연구》 23,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7~8쪽.

 

[교회사 연구 제43집, 2014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원재연(덕성여대 역사문화연구소 연구교수)]

 

※ 본문 중에 ? 표시가 된 곳은 현 편집기에서 지원하지 않는 한자 등이 있는 자리입니다. 정확한 내용은 첨부 파일에서 확인하세요.



파일첨부

2,660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