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월)
(백)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가톨릭 교리

연장자 교리 교안 (7): 상선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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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0-03-28 ㅣ No.47

7. 상선벌악(償善罰惡)

 

 

    7.0 인사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이제 어르신들을 모시고 가톨릭의 교리를 설명하는 것도 오늘로 일곱 번째 시간을 맞았습니다.  일곱 번의 시간이 결코 짧은 것이 아니듯이, 앞으로 어르신들이 살아야 할 시간이나 하실 일들도 같을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은 무한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갖는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나는 무한한 능력을 갖고 있으며,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하고 싶은 일도 많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7.1 지난 시간의 간단한 요약

저는 지난 시간까지 가톨릭 교리의 중요한 교리 4가지 중에서

첫째는 우리 삶의 바탕이 되시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서 설명 드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이 가진 머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존재를 논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일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둘째는 하느님의 속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신학적인 용어로는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합니다만,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신 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이 올 바른 길로 나아가기를 끊임없이 바라시고 도움을 주시는 성령이신 분 모두가 하느님이시며 또한 이 분들을 사람의 지식을 동원해서는 나눌 수 없다는 말씀을 들렸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 인간과 그 중 가까운 생활을 하신 예수님의 일생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씀드렸습니다. 탄생부터 보통의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 이상을 당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분 삶의 중심은 오로지 당신께 가까이 오는 사람들이 기쁨과 활력을 갖고 살기를 바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분이 결국에는 사람들의 시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 국가반역죄를 쓰고 죽었지만, 바로 그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로 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다는 것과 다른 모습인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중요한 교리의 네 번째 내용을 말씀드리는 시간입니다. 그 내용은 제목에도 쓴 것처럼 '상선벌악(償善罰惡)'에 대한 내용입니다.

 

    7.2  꿈의 실현을 위하여 - 시작기도

사람이 꿈을 꾸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꿈을 꾸는 사람이 해야 할 것은 한번쯤 사라져도 좋은 일로 그것을 간직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바라고 또 바라는 일이었다면, 눈을 찡그리지 않고 그것을 실현하는 일입니다. 실현하지 않거나 그런 가능성 없는 꿈은 의미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꾼 꿈의 결과는 우리가 실현할 몫입니다. 우리가 일을 하면서 기쁨을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는 내가 꾸었던 꿈을 이루려고 얼마나 노력을 들이고 그 결실을 얻었는가의 차이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으로 살면서 많은 일을 합니다. 그 일을 하면서 우리가 갖는 생각은 내가 들이는 노력이 좋은 결실을 맺자고 하는 일입니다. 노력이나 결실을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 어르신들이 제 말을 통하여 듣는 하느님의 교회에 대한 말씀에도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오늘 다루게 될 내용, 상선벌악의 내용입니다.  먼저 시작기도를 하겠습니다.  시작기도는 <봉헌의 기도>를 하겠습니다. 내가 꾼 꿈을 실현하려면 내가 가진 힘만으로는 부족하고 우리 삶에 근본적인 힘인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씀드립니다. 자 시작하겠습니다.

    7.3 '상선벌악'이란 무엇인가?

제목의 의미를 한자로 설명하면, '선한 자에게는 상이 주어지고[=償善], 선하지 못한 자(=악한 자)에게는 벌이 내린다[=罰惡]'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지상에서 우리가 이루는 삶에도 지극히 당연하게 적용되는 법칙입니다. 가끔씩은 이런 규정을 어기려고 무력을 동원해서 그 모양을 바꾸고 그 결과를 바꾸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그것도 잠시의 일일뿐입니다. 세상에서 같은 의미로 적용되는 규정, 일은 반드시 그가 가야 할 길로 간다는 뜻으로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씀을 쓰기도 합니다. 이 사필귀정은 인간의 세계와 그 안에 살던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어느 누구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경험이 없지만 인간의 세계에 적용되는 기준이 훗날 하느님의 심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내용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상선벌악'이라는 교리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물론 선하고 악한 것은 이 지상에 살아있을 때, 몸으로 행한 것의 결과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몸으로 더 이상의 선한 일도 할 수 없고, 더 이상의 잘못된 악한 일도 할 수 없는 순간이 되면, 우리가 행한 일들의 결과에 대한 판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몸이 죽어야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 몸이 행했던 선한 일에 대한 공덕(功德)이나 잘못한 일의 벌(罰)은 몸을 유지 관리, 발전시키는 역할을 맡았던 영혼이 받는 것으로 신앙에서는 구별합니다. 몸은 한번 숨이 끊어지면 '땅의 세계'에 두고 갈 수밖에 없지만 영혼은 죽지 않고 살아서 자신을 파견하시고 임무를 맡겨주신 분께로 돌아가 판단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상(償)은 어떻게 어떤 모양으로 주어지고, 벌(罰)은 어떻게 어떤 모양으로 주어지는가에 대한 문제는 아주 미묘한 것입니다. 이 결과는 아무도 눈으로 본적이 없기에, 살아있는 사람에게 자신감 있게 설명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에서는 그 판단으로 하느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천국'으로 가느냐, 그 가능성이 아예 단절된 고통의 장소 '지옥'으로 가느냐를 구별합니다.  선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천국(天國)이고 악한 자에게 보답으로 주어지는 것이 지옥(地獄)이라는 것입니다.

 

** 비디오 대여점에 가면 <천국보다 아름다운>이라는 이름의 비디오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인간의 입장에서 표현할 수 있는 천국과 지옥을 표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야기의 내용이나 주제가 신앙에서 이야기하는 하는 것과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참조해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비디오의 주제는 '인간으로 살아가며 자신의 삶을 더 사랑하라'는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7.4 성서에 나타난 천국과 지옥    

사람으로 살아 있으면서 지상에서의 생명을 마치고 갈 수 있는 곳이 따로 있다고 말하고 그곳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느낄 때도 있을 것입니다.  현실에서 열심히 행복하게 살 시간도 부족한데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것까지 신경 쓰고 현실에서 소비할 시간이 없다고 느낄 것이며,  그렇게 할 이유가 없다고 하실 것입니다.  이 지상의 삶이 행복하다거나 그 어느 것도 다른 힘이 필요하지 않을 때는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늘 같은 마음으로 살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란 수시로 마음이 변하기 마련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이야기하면 사람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만으로는 살 수 없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서도 삶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말씀을 드릴 차례입니다.

 

제가 가보지도 못한 세계이고, 체험하지도 못한 세계에 대한 설명이니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서에는 '천국이 어떤 것이고 지옥은 어떤 것이다. 또한 천국은 어떠한 사람이 가거나 갈 수 있는 것이고,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라는 설명은 없습니다.  다만, 앞서 말씀드린 기준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을 설명하고 말로 풀려고 애쓰는 것일 뿐입니다.

 

이 자리에서 여러 어르신들에게 말씀드리는 성서에 나오는 본보기는 그 각각이 따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몇 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①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 [루가복음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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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부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그 집 대문간에는 사람들이 들어다 놓은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성이의 몸으로 앉아  그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다. 더구나 개들까지 몰려 와서 그의 종기를 핥았다.   얼마 뒤에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었다.  부자가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다가 눈을 들어보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소리를 질러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를 불쌍히 보시고 라자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제 혀를 축이게 해 주십시오. 저는 이 불꽃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하고 애원하자.   아브라함은 '얘야, 너는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또한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 건너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건너오지도 못한다' 고 대답하였다.  그래도 부자는 또 애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소원입니다.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에게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를 보내어 그들만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주십시오.'  그러나 아브라함은 '네 형제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부자는 다시 '아브라함 할아버지,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찾아가야만 회개할 것입니다' 하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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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자신의 생이 무척이나 중요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가끔씩 잊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게 된 것도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나 노력으로 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그것을 쉽게 잊어버리는 우리는 마치도 지금의 모습이 전부 나 혼자 잘해서 이룩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조금 전에 우리가 함께 본 루가복음서에는 그런 이야기에 경종을 울려주는 이야기 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부자와 라자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서 고통과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느님나라에 가까이 갈 수 있다거나 거기에 합치할 수 있는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하는 행동과 체험을 하지 못했으니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이 세상의 삶을 마친 다음에 시작될 다른 세상의 생활은 연결돼 있다는 소리가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위로와 위안을 받는 라자로와 그의 모습을 가리켜 우리가 볼 수는 없지만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천국(天國)이라고 표현할 수 있고, 엄청나게 뜨거운 고통속에서 그 어느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곳이 지옥(地獄)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의 정신과 삶의 방법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이 남기신 비유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양자[천국-지옥] 사이에는 우리가 쉽게 할 수 있는 이야기로 넘나들 수 있는 곳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는 있습니다.

 

    ② 최후의 심판 이야기 [마태오복음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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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게 되면 모든 민족들을 앞에 불러 놓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 놓듯이 그들을 갈라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자리잡게 할 것이다. 그 때에 그 임금은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이 말을 듣고 의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또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 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으며,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저희가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 가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또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이 말을 듣고 그들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주님, 주님께서 언제 굶주리고 목마르셨으며, 언제 나그네 되시고 헐벗으셨으며, 또 언제 병드시고 감옥에 갇히셨기에 저희가 모른 체하고 돌보아드리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면 임금은 '똑똑히 들어라.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영원히 벌받는 곳으로 쫓겨 날 것이며,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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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들은 말씀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것 역시도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세상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다른 판단을 하고 싶은 우리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것은 어떤 것인지를 깨닫는 것이 더 소중한 일이 될 것입니다. 애매하게 시간을 우리가 그 시간을 소비하면서 이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도 앞서의 경우처럼, 현실의 삶이 후세의 삶과 연결돼 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앞에 등장한 정말로 너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했는지에 따라 다른 삶, 이어지는 삶의 모습도 달라질 거라는 판단을 잘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이미 내려진 판단에 대해서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세상에서 저 하고 싶은 대로 맘껏 하고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세상에서도 자신의 맘대로 하고 싶다는 소리를 항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은 많습니다. 다만, 내가 각각의 현실에서 어떤 삶의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느냐가 문제로 등장하는 것뿐입니다.

 

 

    7.5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 해당하는 연옥 :  도움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

                            마카베오 하권 12,3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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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후 유다는 자기 군대를 모아 아둘람이라는 도시로 갔다. 제칠 일이 다가 오기 때문에 유다인들은 관습대로 몸을 깨끗이 하고 그 곳에서 안식일을 지켰다.

유다와 그의 부하들은 전사자의 시체를 묻어야 할 날이 촉박하였으므로 시체들을 거두러 가야만 했다. 그 시체들을 그 다음날 조상들의 묘소에 운반하여 친족들의 옆에 함께 묻어 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시체 하나하나의 옷을 들쳐 보니 그들은 얌니아의 우상을 부적으로 지니고 있었다. 유다인이 이와 같은 물건을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은 율법이 금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죽은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되었다. 그들은 숨은 일을 모두 드러내시는 정의의 재판관이신 주님을 모두 찬양하였다. 그리고 죽은 자들이 범한 죄를 모두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면서 기도를 드렸다. 고결한 유다는 군중들에게 죄지은 자들이 받은 벌이 죽음이라는 것을 눈으로 보았으니 이제는 그들도 죄를 짓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그리고 유다는 각 사람에게서 모금을 하여 은 이천 드라크마를 모아 그것을 속죄의 제사를 위한 비용으로 써 달라고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가 이와 같이 숭고한 일을 한 것은 부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허사이고 무의미한 일 이었을 것이다. 그가 경건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갸륵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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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천국과 지옥과는 다른 차원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천주교회, 가톨릭교회에서는 연옥이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하느님 판단하시기에 천국에 갈 만큼 성실하게 잘 살았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옥에 갈 만큼 악하게 살았던 것도 아닌 사람들이 죽었을 때, 그 몸의 행위에 따라 판정을 하실 하느님도 난감하실 지 모릅니다. 그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고, 인간을 위해서 교회에서 생각한 개념이 바로 연옥이라는 곳입니다.  우리가 예비자 교리를 통해서 여러차례 시작기도로 바친 사도신경에는 '통공(通功)'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이 지상에 사는 우리는 어떤 영혼이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천국에 가 있는지, 지옥에 떨어져있는지,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기다리는 연옥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관심은 그 결과에 대한 것이 아니고, 숨을 쉬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깨닫고 거기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7.6  현실을 보고 할 수 있는 생각...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바라볼 줄 아는 우리들은 가끔씩 불만을 갖습니다. '저 사람은 옳지 않은 일은 빼놓지 않고 골라서 다 하는데 왜 잘 살고, 선하게 사는 나는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하다가 우리는 결국 하느님이 계신가 계시지 않는가 하는 데까지 문제를 끌고 갑니다. 이런 현상은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도 아마 한 두 번은 가졌을 법한 문제입니다.  이런 마음과 생각이 우리에게 드는 이유는 급하게 생각하는 탓이고, 우리 눈이 보는 이 순간에 모든 일이 옳고 그른 길로 갈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탓입니다. 그러나 만일 세상의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 선악의 결정이 나버린다면 사람이 반성할 마음도 자신의 행동을 고칠 여유도 없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미리 보았던 다윗은 시편<37장>에서 이런 글을 적고 있습니다.

 

"(1-3ㄱ)악한 자가 잘 된다고 불평하지 말며, 불의한 자가 잘 산다고 부러워 말아라. 풀처럼 삽시간에 그들은 시들고 푸성귀처럼 금방 스러지리니 야훼만 믿고 살아라. (7ㄴ-9ㄱ)  남이 속임수로 잘 된다고 불평하지 말아라. 화내지 말고 격분을 가라앉혀라. 불평하지 말아라. 자신에게 해로울 뿐이다. 악한 자는 망하게 마련이다. (10) 조금만 기다려라. 악인은 망할 것이다. 아무리 그 있던 자리를 찾아도 그는 이미 없으리라."  

 

구약성서의 또 한 곳 나훔 예언서<1장>에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야훼께서 힘이 없어 오래 참으시는 줄 아느냐? 결코 죄지은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버려 두지는 않으신다.(3ㄱㄴ)

 

 

    7.8 결론-상선벌악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

신앙인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며 신중하게 살아갑니다.  그리고 내가 흘려보낸 과거의 시간에 조금이라도 흠이 남아 있을까봐 노심초사하며 지냅니다. 이런 일들이 가끔씩은 세상을 활기차게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기도 하지만, 그렇게 돌아봄으로써 신앙인은 하느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으로 거듭나고 다시 올바른 사람으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합니다. 이런 일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상을 받을 수 있는 사람, 올바른 사람으로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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