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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교회학교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하다 - 김천 성의학교와 교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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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8-12 ㅣ No.771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교회학교,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하다 - 김천 성의학교와 교장들

 

 

개항기 조선 천주교회에서는 참으로 많은 본당학교, 공소학교를 세웠다. 1893년 본당학교는 36개교에 이르렀고, 1904년에는 75개교로 늘어났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는 그 침략과정에서 ‘사립학교령’을 제정해서 민족교육을 탄압했다. 한일합방이 강행되었던 1910년 천주교 계통 학교 수가 124개교에서 46개교만 인가를 얻는 실정이었다. 대구만 해도 새방골, 남산, 대어벌 등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교회학교가 설립되었다. 1911년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가 착좌했을 때 교구 내 교회학교는 34개나 되었다. 드망즈 주교는 본당학교, 공소학교를 적극 권장했다. 그러나 교구의 본당학교 대부분은 일제가 요구하는 정규학교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해 비인가 학교로 남는 형편이었다. 대구교구의 관할지인 김천의 성의학교는 애국계몽운동기에 온 나라에 가득 차 있던 교육열에 힘입어 개교했다. 그리고 대구교구 설정 이후 교구장 및 조선인 성직자들의 관심으로 그 우여곡절을 넘어왔다. 성의학교는 김천성당에서 초등학교 수준의 남자학교로 시작되어 오늘날 남녀 중· 고등학교의 4개 학교로 성장했다.

 

 

김성학 신부 ‘성의학교’의 씨를 심고

 

김성학 신부는 김천지방의 천주교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그는 1901년 김천지역으로 발령을 받아 자라밭골 한 초가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는 부임 직후에 곧바로 초등 4년 과정의 남자학교를 세웠다. 김천 신자들은 성당을 즉각 짓기를 바랐지만, 그는 성당도 짓기 전에 학교부터 열었다. 그런 다음 그는 1907년 겨우 기와집 성당을 완성했다. 그러나 이듬해 일본통감부는 사립학교령을 공포하여 사학의 설립 및 유지를 노골적으로 억제했다. 일본 당국에서는 당시 선교사들이 신청한 개신교계 학교 778건은 무조건 인가했지만 한국인 사립학교는 인가신청 총 수 1,217건 중 42건만 인가했다. 김성학 신부도 성의학교의 인가를 받기 위해 노력했다. 이때 김 신부는 일반 교과서 외에도 『만물진원』, 『성교감략』, 『상제상서』 등을 교재로 학부에 인가를 신청했다. 사립학교령 공포 후 1910년 2월 학부로부터 인가를 받은 경상북도 내 천주교 학교는 김천의 성의학교와 대구의 성립학교뿐이었다. 1912년 김천군에서 인가된 학교는 총 네 곳이었으나 성의학교만 남아 있다.

 

학교의 인가를 받기 위해 김성학 신부는 규정에 맞는 학교건물을 지어야 했다. 1909년 김천본당 내 6칸짜리 한옥 교사를 마련했고 그해 뮈텔 주교가 학교 건물을 축복했다. 그런데 축복식이 끝날 무렵 노래를 부르러 왔던 소녀들이 주교님께 그들에게도 학교를 지어달라고 간청을 했다. 학교건물 축복 때 소녀들의 소망을 들은 김성학 신부는 1911년 여학교를 병설했다. 그는 자신이 거처하는 사제관을 여학교에 내어 주고 자신은 학교 숙직실 단칸방으로 옮겼다. 남학교 선생들이 무보수로 하루에 두 시간씩 가르치고, 나이 지긋한 신자 부인 세 명이 교대로 숙직을 섰다. 박 니콜라스 회장의 딸이 여선생으로 있었다.

 

김성학 신부는 여학교 설립 자금을 대구를 비롯하여 사방에서 모금했다. 신부는 성당 경내에 별도로 여학교를 세우고 남학교와 격리되도록 담장을 치고 교문도 따로 설치했다. 남녀유별이라는 유교적 분위기 안에서 남학교와 여학교가 한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을 문제시 한 여론 때문에 뮈텔 주교에게 편지와 함께 간단한 그림을 그려 보냈다. 그리고 주교의 결정을 기다렸다. 아마 이는 허락되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성의학교는 남녀공학으로 운영되었다. 또한 성의학교는 신자 여부를 가리지 않고 받았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첫 입학한 여학생 16명 중에는 비신자 자녀도 5명이나 있었고 그 뒤로는 비신자 비율이 더 증가했다.

 

  

일제하 폐교와 부활을 거듭

 

1911년 대구대목구가 설정됨에 따라 김성학 신부는 서울교구로 전임되고 김문옥 신부가 제2대 김천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했다. 그는 언양 살티 출신으로 피낭 유학생으로, 후에 올 김승연 신부와 동기였다. 일제 강제병합이 이루어진 후 학교는 더욱 어려워졌다. 드망즈 주교는 1912년 그 지역의 선교가 어둡다고 전망했다. 게다가 성당과 사제관 대지는 정부 땅이고 학생 수가 많지 않은 학교는 천주교인 학생이 너무 적어서 외교인 학생들 없이는 유지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일제는 1915년 교원자격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등 교회학교로서는 따라가기 힘든 기준을 제시해 나갔다. 성의학교는 재정문제까지 겹쳐 우여곡절 끝에 1918년에 폐교했다.

 

1922년 이약슬 신부가 3대 김천본당 주임으로 왔다. 이 신부는 학교를 부활시키고자 노력했다. 1919년 3.1 독립운동을 계기로 조선총독부는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했다. 1920년에는 사립학교규칙을 개정하여 요건을 완화하는 듯했다. 성의학교는 1923년 다시 문을 열었다. 그러나 사립학교규칙이 요구하는 기본재산과 설비를 갖출 수가 없어서 재래의 학교란 명칭을 계속하지 못하고 ‘학원’으로 남았다. 이 신부는 기본금 모금운동도 벌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당시 김천에는 공립보통학교가 하나밖에 없어서 이곳으로 가지 못한 아동들이 성의학원으로 몰려왔다. 학생은 총 120명 정도였다. 이때 성의학원에서 공부한 유창국 이후 육성회장이나 장학회회장으로 평생 곁에서 학교를 도왔다. 성의학교의 지속적인 발전은 ‘학원’에 희망을 부은 김승연 신부에게서 왔다고 하겠다. 김종륜 복자의 손자인 그가 1929년 김천본당에 부임해서 성당을 지었음은 앞서 보았다. 그리고 숙직실에 살던 신부는 천여 원을 자담하여 한옥 사제관을 신축했다. 이어 학원 교사가 협소하여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바쳐 교사를 신축했다. 땀으로 절은 수단만 입고 평생 절약한 사재(私財)였다. 이 학교건물은 1961년 성의학교가 평화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학교의 본관으로 사용되었다.

  

이어 김천본당 5대 주임 겸 성의학교 5대 교장으로 최재선 신부가 부임했다. 그런데 최재선 신부는 특이한 경험을 했다. 김승연 신부는 1943년 2월 25일 은퇴했으나 바로 교구청으로 들어가지 않고 성당에 머물렀다. 그는 자신이 건립한 김천성당을 떠나기를 몹시 아쉬워했고, 건강도 무척 나빴다. 그래서 최재선 신부는 부득이 지좌동에 머물면서 지방의 공소를 사목했다. 2년 뒤인 1945년 5월 김 신부는 교구청으로 돌아가 9월에 선종했다. 최재선 신부는 1945년 5월 1일 본당으로 왔다. 최 신부가 있던 마잠공소는 성당이 되었다가 그가 떠남으로써 공소가 되었다. 이 기간 최 신부는 학교를 사회적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었고 향후 지좌동 방면을 개발하게 되었다.

 

 

최재선 신부, 성의여자초급중학교로 출발하여 남녀공학으로 귀착

 

1945년 우리나라가 해방되었다. 최재선 신부는 독립된 나라에서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 될 것으로 예견했다. 그러므로 지역사회에는 중등학교가 더 필요하다고 내다 봤다. 그는 중등학교를 계획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에 교사파견을 요청했으나5년 후쯤 가능하다는 회답만 받았다. 그래서 그는 38선 이북 원산과 평양에 공산당의 탄압으로 학교에서 추방된 수녀들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냈다. 그는 단신 월남한 교우 조천수의 안내로 교사를 구하러 월북 길에 올랐다. 1946년 8월 중림동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동두천을 거쳐 노숙까지 하면서 도보로 북으로 향했다. 그러나 심한 검문과 검색을 피할 길이 없어서 결국 원산을 목전에 두고 돌아섰다. 당시 원산에는 성베네딕도수녀회가 있었는데 약 20년 후 다른 인연으로 이 수녀회에서 여학교를 운영하게 된다.

 

최재선 신부는 1947년 초등교육기관인 성의학원을 폐쇄하고 중등학원을 개설했다. 그러자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에서 김명자, 윤필술 두 수녀를 보내주었다. 최 신부는 중등과정을 개설할 때 인가를 받지 않았으므로 중학원이라는 간판을 걸었다.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교재는 정식 중학교와 같은 책이었지만, 학생들의 마음에나 사회의 대우에서 차이가 많이 났다. 1949년 당시 김천에는 정식 설립인가를 받은 남자중학교가 2개교 있었으나 여자중학교는 공립학교 1개교가 있을 뿐이었다. 최재선 신부는 학원을 여자초급중학교로 승격시키고자 했다. 그는 근화여자중학교가 천주교대구교구유지재단이 경영하는 학교로 승인받는 것을 보고 주교께 그렇게 의논드렸다. 그리하여 천주교대구교구유지재단이 경영하는 성의여자초급중학교로 1949년 3월 정식 인가를 받아 초대교장으로 취임했다.

 

학교의 인가가 나자, 경상북도 장학사의 관리 하에 성의중학원 재학생들을 편입시키기 위한 시험을 실시했다. 성의중학원 1,2,3,학년 120여 명이 응시, 전원 합격하여 성의여자중학교 해당 학년에 편입했다. 그해 7월 16일 제1회 졸업식을 거행했다. 도에서 실시한 편입시험에 합격했던 3학년 재학생 31명이 이날 첫 졸업을 했다. 당시는 1학기가 9월에 시작되던 때였으므로 학교에서는 9월 신학기를 위한 신입생을 모집했다. 그러나 응시자가 고작 30여 명이었다. 1개 학급을 편성할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학교에서는 응시자 전원을 입학시켰지만 중도 퇴학자가 속출해서 3학년으로 진급할 때에는 18명만 남았다. 결국 학교에서는 이 학생들을 모두 김천여자중학교에 편입학시켰다. 최 신부는 첫 신입생 모집이 실패하자 곧바로 여자중학교를 남자중학교로 전환시켰다. 당시 김천에는 학교가 부족하여 진학하지 못한 남학생이 600여 명에 이르렀다. 이에 최 신부는 입학정원의 여석을 남학생들로 채우고, 경상북도 학무과에 남녀공학을 위한 학칙개정을 신청했다. 최 신부는 지좌동에 남자학교 교사를 지었다. 남녀공학 설립을 위한 재단이사회에서 서봉길 신부가 남녀공학으로 인가를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최덕홍 주교는 공학제이지만 남자부와 여자부가 1km 이상 떨어져 있어 별개의 학교와 같으므로 윤리도덕상 폐단은 전혀 없다고 답했다. 주교는 후에 남녀학교를 분리하여 2개 학교로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1950년 성의중학교는 남자부는 지좌동, 여자부는 황금동으로 인가를 받았다. 성의중학교 인가가 나기 전에 입학한 남학생들은 자격시험을 거쳐 2학년으로 편입했다. 그리고 전쟁 후 교육인구가 증가하자 최재선 신부는 성의상업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최재선 신부는 무(無)에서 유(有)로 만들어 가야 했던 설립시기, 김천과 마잠의 교우와 학부형들, 특히 어린 학생들의 피나는 작업 등으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기억했다. 후에 주교가 된 그는 여학생 한 명이 너무도 가정이 어려워 수업료로 자기 어머니가 겨우 준비해 놓은 치마폭 하나를 가져온 것을 받았던 일이 그의 성의 시절 가장 가슴 아픈 기억이라고 회고했다. 이후 김수환 신부가 6개월간 이 학교의 교장을 지냈다. 그는 훗날 자신의 교구장 은퇴식에 가져온 어떤 선물도 물리쳤는데, 할머니가 된 성의 졸업생들의 선물은 받았다. 김 추기경은 “성의는 귀족적 명문고는 결코 아니다. 그보다는 흙냄새, 땀냄새가 짙은 농민과 서민의 학원이다. 때문에 그 생명력은 훨씬 줄기차다.”라고 말했다. 이후 성의학교는 왜관수도원에서 운영하게 되어 또 다른 거목으로 자랐다.

 

천주교회는 어린 자녀들의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1923년에 간행된 『회장직분』에는 “공소마다 학교나 서당을 세울 수 없으나 … 다행히 공소에 이렇게 모여 배울 만한 곳이 있으면 자녀를 부득불 그런 곳에 보내어 가르칠지니라. 그 외에 할 만한 대로 본당신부와 상의하여 본당뿐 아니라 공소에 학교나 서당을 세우고 교우자녀에게 세속학문뿐 아니라 더욱 셩교 학문을 교수할지니라. … 회장이 각 집안을 신칙하여 아무쪼록 자녀를 서당이나 학교에 보내도록 주선할지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정신을 가지고 개항기에 세워졌던 성의학교는 일제의 탄압을 견뎌냈고, 해방 이후에도 계속 발전해 갔다. 110여 년 전 김성학 신부가 심은 한 그루의 나무에서 여러 갈래의 줄기가 뻗어나갔다. 그 가지들이 합쳐지고 변화하여 오늘날 김천 성의중학교, 성의여자중학교와 성의고등학교, 성의여자고등학교로 자라날 수 있었다.

 

[월간빛, 2016년 8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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