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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 칼럼: 로마 - 황무지에 던져진 천사를 위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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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0-25 ㅣ No.1238

[영화 칼럼] 로마(2018년 감독, 알폰소 쿠아론)


황무지에 던져진 천사를 위한 기도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시작하는 T.S.엘리엇의 시 <황무지>는 “샨티. 샨티. 샨티”로 끝납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로마>도 “샨티. 샨티. 샨티”로 끝을 맺습니다. 고대 인도의 경전 <우파니샤드>의 결어인 ‘샨티’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평화’라는 뜻입니다. 피폐화된 인간성과 인간 문명을 날카롭게 해부하며 부활과 구원의 가능성을 모색했던 <황무지>는 <로마>의 이해를 위한 길잡이 역할을 합니다.

 

1971년 멕시코 독재 정권의 사주를 받은 극우 테러 단체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시위대를 공격하여 많은 사상자를 낸 ‘성체 축일 대학살’ 사건. 그 전후의 역사적 격변기가 <로마>의 시대 배경입니다. 인종과 성차별, 계급 착취, 야만적인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혼돈의 삶을 살면서 희망의 출구를 찾지 못합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시 <황무지>의 어부 왕이 다스리는 저주받은 땅, 황무지와 다름없는 것입니다.

 

백인 가정의 원주민 가정부 클레오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며 감독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사적인 기억의 파편들을 씨줄로, 혼란스러운 사회 풍경과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공적인 기억의 파편들을 날줄로 하여 이야기를 펼쳐갑니다. 엘리엇과 함께 문학의 모더니즘 운동을 이끈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는 오로지 ‘파편적 구조’를 통해서만 극도로 혼돈스러운 현대 문명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로마>는 바로 이 파편적 구조를 통해 야만적인 사회에서의 비극적인 삶의 단면들을 세밀하게 해부합니다.

 

극우 테러 단체의 훈련 모습, 대학살의 거리 풍경, 사산된 아이를 인공호흡으로 살리려는 분만실 모습, 기르던 개들을 박제하여 벽면에 걸어놓은 부르조아 집 풍경 등 이 영화는 섬뜩하고 충격적인 이미지들로 가득합니다. 이러한 이미지들을 통해 감독은 묻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이 황무지에서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시 <황무지>에서 가뭄의 재앙을 받은 땅에 구원의 비는 내리지 않고 마른 천둥소리만 들립니다. “다, 다, 다.” 시인이 ‘주라, 동정하라, 자제하라’로 해석한 이 천둥소리는 인간을 향한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로마>의 마지막 장면에서 감독은 빨래 꾸러미를 한아름 안고서 높은 계단을 올라가는 클레오와 함께 옥상 위로 펼쳐진 하늘을 보여줍니다. 영화에선 안타깝게도 마른 천둥 소리조차 없습니다. 대신, 비행기 소리와 개 짖는 소리 등 일상의 소음들만 들려옵니다. 하늘은 어떠한 구원의 메시지도 들려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인내심 있게 오랫동안 하늘을 보여줍니다. 영화 화면이 다 끝나고 크레딧과 협찬사 로고까지 다 지나간 후 상영이 끝나기 직전에 자막이 떠오릅니다. “샨티. 샨티. 샨티.” 감독이 황무지에 던져진 날개 잃은 천사들을 위해 던지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2020년 10월 25일 연중 제30주일 서울주보 4면, 이광모 프란치스코(영화사 백두대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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