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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신학서원23: 인정 욕망, 자기 존엄성, 신앙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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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1-28 ㅣ No.639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23) 인정 욕망, 자기 존엄성, 신앙 공동체


교회는 오직 신앙 안에서 모든 타인을 인정·포용하는 공동체

 

 

- 서울 창5동본당 빈첸시오 회원들이 한 독거노인의 집에서 도배 봉사를 하고 있다. 교회는 세속의 인정 방식이 아닌 신앙 안에서 서로에게 관심과 사랑과 인정을 실천해야 한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생은 인정 투쟁의 장

 

인간은 타인의 관심과 인정을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자기 존엄성을 확보한다. 독일의 사회 철학자 악셀 호네트의 사유를 풀어서 설명하면, 인간은 타인과의 사랑을 통해 정서적 배려를 받고, 타자와 관계 속에서 자신의 개성과 권리가 존중되고, 사회 안에서 자신의 가치가 인정될 때 행복해한다.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오규원 시인의 시집 제목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주목받고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어 한다. 자기확인 욕망, 인정 욕망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욕망이다. 세속의 기준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흔히 권력이나 돈이나 직책이나 지식 등을 가져야 하고 외적 성취를 이루어야 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런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애를 쓴다. 자신이 가진 자본(물적 자본이든 상징 자본이든)과 권력과 세속적 능력을 통해 사람들은 인정을 추구한다.

 

돌아보면, 나 역시 자기확인과 인정 욕망에 붙들려 살아왔다. 세속의 권력과 교회 안의 어떤 직책과 권력을 탐하지는 않았지만, 공부와 책 읽기를 통해 남과 다르다는 자기확인 욕망과 공부 잘하는 신부, 책 많이 읽는 신부라는 이름과 명예를 은연중에 추구하며 살았다. 겉으로는 고상하고 속물이 아닌 척하지만 알게 모르게 이름과 명예라는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고, 지적 성취를 통한 자기확인과 인정욕구에 얽매어 종살이하고 있었다. 외형적으로는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해왔고, 세속의 기쁨이 아닌 복음의 기쁨이 내 삶을 관통하기를 원한다고 고백해왔다. 그런데 곰곰이 내면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이름과 명예와 인정욕구라는 속물적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 겉으로는 하느님을 말하고 신앙을 언급하지만, 실제 삶과 행동에서는 여전히 하느님의 인정보다 세상의 인정과 칭찬을 추구하며 살고 있다는 뜻이다. 종교인으로 살아서 웬만한 세속의 일에서 별다른 이해관계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욕심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의식 안에 아니 실제 의식 안에서 늘 나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삶을 선택하고 행동하는 나를 목격한다. 부끄러운 일이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서 제자들은 예수를 계속해서 오해하고 자신들의 욕망을 피력한다. 세 번에 걸친 수난예고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자신의 욕망만을 말하고 예수를 따름에 대한 보상과 인정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마르 9,34) “그들이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마르 10,37)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마르 10,41) 인정 투쟁과 시기와 질투의 모습이다. 예수를 따르는 신앙의 길은 세속적 인정 투쟁의 여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자기 존엄성을 지킨다는 것은

 

생은 때때로 잔인하고 운명은 자주 불공평하다. 생이라는 인정 투쟁의 장에서 많은 이들이 낙오된다. 경쟁과 투쟁의 장에는 경멸과 무시, 혐오와 배제, 굴욕과 모욕, 시기와 질투, 분노와 폭력이 난무한다.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인정에 휘둘리는 현대의 삶은 때때로 자기 부정과 자기 파괴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기적인 자기애가 아닌, 건강한 자기 존엄성을 확보하기가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능력주의가 강화되고 불평등이 자연스럽게 수용되는 시대에,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끊임없이 무시되고 도태된다. 세습된 자본도 타고난 능력으로 포장되는 시대에, 아무것도 갖지 못하고 별다른 능력도 없는 사람이 자긍심과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기란 무척 어렵다. 자기 존중, 자기 긍정, 자부심에 관한 담론들이 많아지는 역설적인 이유다.

 

건강한 자아실현, 긍정적 자기의식, 행복한 삶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긍정과 인정을 통해 건강한 자부심을 확보하며, 그 건강한 자긍심을 통해 자신의 삶을 기쁘고 즐겁게 살아갈 수는 없을까? 타인의 관심과 인정, 타인의 평가와 시선에 흔들리지 않는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 세속적 관점에서 능력이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자기 개성과 능력을 사랑하고 자기를 존중할 수 있을까?

 

자존감은 주체 되기에서 시작된다. 자존감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은 인식과 경험과 행동의 주체로 살아가는 일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체험하고, 스스로 행동한다. “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내가 결정하는 삶이다.”(피터 비에리) “진정한 자기 자신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자부심의 아름다움이자 위안이다.”(리처드 테일러) 주체로서의 인간은 타자와 세상을 위한 수단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 자체가 목적이 되는 사람이다. 타자와 세상이 제시하는 무엇이 되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목적이 되고 그저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신앙인은 하느님을 닮으려는 사람이다. 하느님은 다른 어떤 능력과 특성으로서 하느님인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그저 하느님으로서 하느님이다. 신앙인 역시 마찬가지다. 신앙인은 하느님과의 관계, 하느님의 인정을 통해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신앙인의 정체성과 존엄성의 기원은 오직 신앙에 있다. 그런데 과연 오늘의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인정만으로, 오직 신앙만으로 충분히 주체적 존재가 되고 또 자기 존엄성을 확보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교회와 건강한 인정 공동체

 

교회가 된다는 것은 신앙의 인정 공동체가 된다는 뜻이다. 교회는 신앙 안에서 모든 타인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공동체다. 타자의 건강한 관심과 인정은 고단한 생의 여정에서 우리에게 위로와 힘을 주기도 한다. 타자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상 우리는 타인의 관심과 사랑과 인정을 요청한다. 건강한 관심과 사랑과 인정은 우리를 주체 되게 하고 성장하게 한다.

 

모든 단체와 공동체 안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인정시스템이 작동되고 있다. 때로는 감정적 친밀성이, 때로는 혈연적 관계가, 때로는 다양한 인연의 깊이가 인정시스템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하지만 세속의 일반적 인정시스템은 대부분 자본과 권력과 능력에 기반한다. 초기교회 시절 교회 공동체는 독특한 인정시스템 덕분에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었다. 세속의 인정 방식이 아닌 오직 신앙 안에서 서로에게 관심과 사랑과 인정을 실천했다. 부자든 가난한 이든, 귀족이든 노예이든, 신앙 안에서 형제자매로 살아갔다.

 

오늘의 교회 공동체 안에는 어떤 방식의 인정시스템이 작동되고 있는가? 오직 신앙 안에서 서로에 대한 인정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혹시 세속의 인정시스템이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작동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올바른 인정시스템을 우리는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가톨릭신문, 2021년 11월 28일, 정희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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