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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43: 최양업, 조선 입국 시도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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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4-13 ㅣ No.2073

[신 김대건 · 최양업 전] (43) 최양업, 조선 입국 시도했으나


최양업 부제 일행, 중국 국경 수비대에 체포돼 조선 입국 좌절

 

 

-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는 1846년 2월 말에서 3월 초 함경도 경원에서 2년마다 열리는 개시에서 조선 신자들과 만나 입국하려 했으나 훈춘에서 국경 수비대에 체포돼 실패하고 만다. 사진은 두만강을 두고 훈춘과 경원이 나란히 마주보고 있다. 구글 캡쳐.

 

 

“언젠가 좋으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저의 동포들을 만날 행운이 저에게 다가오기를 하루하루 바라면서 머물러 있습니다. 저의 동포들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면 탄식과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습니다.…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 이렇듯이 훌륭한 내 동포들이며, 이렇듯이 용감한 내 겨레인데, 저는 아직도 너무나 연약하고 미숙함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신학생 최양업이 1844년 5월 19일 소팔가자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두만강 입국로 준비

 

최양업 부제는 조선에 귀국하지 못하고 밖에서 떠돌고 있는 것에 매우 답답해 하고 괴로워했다. 1844년 12월 10일 이전에 함께 부제품을 받은 김대건이 페레올 주교와 동행해 조선 귀국길에 오른 후 최양업 부제의 심정은 더욱 고통스러웠다. 김대건 부제가 1845년 한 해 동안 조선과 중국 상해를 오가고 사제품을 받는 등 가장 바쁘게 보내는 동안 최양업 부제는 무엇을 했을까?

 

불행히도 1845년 한 해 동안 최양업 부제의 행적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메스트르 신부가 1845년 5월 25일 소팔가자에서 극동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편지를 보낸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 둘은 소팔가자에서 머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메스트르 신부는 이 편지에서 “페레올 주교가 (최양업) 토마스에게 반감을 품었습니다. 이것은 주교와 얼마 동안 같이 지내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아주 쉽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주교에게 이 이야기를 하지 마십시오. 그는 화를 낼 것입니다. 저는 벌써 이 문제에 대해 그에게 몇 번 지적했습니다. 그가 이것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가 지금까지 겪은 많은 모순이 그의 성격을 매우 까다롭게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진정될 것입니다”라고 적었다.

 

페레올 주교가 조선 입국 동반자로 김대건 부제를 선택하고, 그에게 먼저 사제품을 준 것에 대해 교회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두 사람이 솔직하고 직선적인 성격이어서 쉽게 의기투합할 수 있었다. 둘째, 가톨릭 신앙을 절대 허용하지 않으려는 조선 왕조의 지배 세력이 둘러쳐 놓은 강고한 박해의 장벽을 뚫고 조선에 들어가기 위해선 무엇보다 진취적이고 행동적이며 굳센 기상을 지닌 일꾼이 우선으로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원재연, ‘페레올 주교의 조선 입국 후 사목 활동’, 교회사학 권5 참조)

 

그러면 최양업 부제의 성격은 어떠했을까? 샤를르 달레 신부는 이렇게 소개한다. “하느님께서는 최(양업) 토마스에게는 같은 씩씩한 성격을 주지 않으셨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그는 어려운 여행에는 덜 적당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열심, 그의 뛰어난 재능, 그리고 꾸준하고 규칙적인 그의 행동은 그때부터 그가 나중에 얼마나 거룩한 사제가 될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한국천주교회사」 하권 59~60쪽 참조)

 

페레올 주교가 최양업 부제에게 반감을 품을 만큼 둘 사이가 틀어진 이유는 뭘까? 기록에 없어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 지경까지 이르기에는 일반적으로 윗사람의 태도에 더 큰 원인이 있다. 메스트르 신부 역시 둘 사이가 소원해진 것이 페레올 주교의 성격 때문이라고 하고 있지 않나! 아마도 페레올 주교가 지나치게 안전 확보를 요구해 선교사들과 자신들의 조선 입국이 자꾸 더뎌지는 것에 대해 최양업 부제가 불만을 가지지 않았나 짐작해 볼 수 있다. 한시라도 빨리 귀국해 동포요 겨레인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교회 최고 책임자는 위험을 전혀 감수하지 않고 꽃길만 걸으려 하니 어찌 속이 타지 않았을까! 아마도 최양업 부제는 이러한 속내를 스승인 메스트르 신부에게 틀어놓았고, 그렇지 않아도 주교의 태도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메스트르 신부가 페레올 주교에게 직언함으로써 둘의 관계가 틀어졌을 것이다.

 

불똥이 엉뚱한 곳에 튀기도 했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장 리브와 신부는 김대건 부제가 배를 장만해 중국 강남으로 올 때까지 마카오에서 머물던 페레올 주교에게 선교지로 떠나기 전 관례상으로 후임 교구장 주교를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다. 리브와 신부는 페레올 주교에게 메스트르 신부와 만주대목구 선교사 베르뇌 신부를 추천했다. 그러자 1845년 7월 15일 페레올 주교는 조선 선교사인 메스트르 신부를 거부하고, 베르뇌 신부를 승계권이 있는 부주교로 지명했다. 이것만 봐도 페레올 주교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격년제로 열린 경원 개시는 청나라와 조선의 경제에 활력을 준 무역장이었다. 사진은 1930년대 경원읍 모습. 네이버 캡쳐.

 

 

경원 입국 시도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는 조선에 입국한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두만강을 통한 조선 입국을 시도하러 1846년 1월 말께 중국인 길 안내인 2명과 함께 김대건 부제가 다녀온 길을 따라 만주 훈춘으로 떠났다.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 일행은 17일 동안 산과 골짜기를 지나 두만강 얼음을 타고 만주 벌판을 걷고 나서 조선 국경에서 4㎞ 떨어진 두만강 인근 국경 마을인 훈춘에 도착했다. 여행길은 김대건이 그랬던 것처럼 맹수들의 습격을 막기 위해 많은 이들이 함께 뭉쳐서 이동했다. 사실 북관 개시 무역은 함경도뿐 아니라 청나라 만주의 경제를 활성화했다. 청나라 사람들은 경원, 회령 등 북관 개시에서 조선의 소와 농기구를 사들여 농사를 지었고, 해삼은 길림에서 고가로 팔렸다. 영고탑, 오라 등 흑룡강성 지역에서는 조선 한지가 겨울철 방한 창호지로 인기가 있었다. 조선에서는 청나라 말과 비단, 가죽옷이 인기를 끌었다. 청나라 말 1필이 조선소 2마리 값으로 거래됐다.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 일행은 김대건이 한 달 걸린 여정을 거의 절반으로 단축했다. 최 부제 일행은 두만강 건너 조선 땅 경원에서 교역장인 개시가 열리기까지 열흘을 기다려야 했다. 경원 개시는 2년에 한 번 20일간 열렸다. 한 곳에 머무는 만큼 노출되기 쉽다. 특히 서양인인 메스트르 신부에겐 치명적이었다. 훈춘은 국경 도시이지만 작은 마을이었다. 서양인이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고 은신해 있기에는 눈이 너무 많았다.

 

1846년 2월 말 또는 3월 초 경원 개시가 열리기 전날 (참고로 신학생 김대건이 조선 신자와 접촉한 경원 개시는 1844년 3월 8일에 열렸다) 최양업 부제 일행은 경원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아마도 이들은 허리띠에 작은 붉은색 차주머니를 차고 흰 손수건을 챙겼을 것이다. 이러한 행색은 2년 전 신학생 김대건이 조선 신자들과 만나는 접선 신호였다.

 

채비를 마칠 즈음 청나라 장교 4명이 들이닥쳤다.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 일행은 포박된 채 국경 수비대로 끌려갔다. 서양인이 잡혔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고, 수비대 영내는 구경꾼들로 꽉 찼다. 구경꾼 중 어떤 이는 메스트르 신부의 모자를 벗기고, 어떤 이는 그의 수염을 잡아당기기도 했다. 또 어떤 이들은 중국말로 왜 여기까지 왔느냐고 묻기도 했다. 메스트르 신부는 이렇게 3시간 동안 무례한 구경꾼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나는 침착하게 그들을 바라보며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하느님이신 우리 구세주께서는 수난 전날에 훨씬 더한 학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제자가 스승보다 낫지 못하니 스승처럼 대우받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자정께 되어서야 호기심이 휴식의 필요에 졌습니다. 저는 (최양업) 토마스와 두 안내인과 함께 흙담으로 둘러친 감방으로 끌려갔습니다.”(메스트르 신부가 1846년 3월 3일 몽고에서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 날 아침부터 구경꾼들이 더 몰려들었다. 메스트르 신부는 군중들의 호기심을 채워주기 위해 얼마 동안 감옥에서 나와 수비대 마당을 거닐어야만 했다. 아침 10시가 되자 메스트르 신부는 관청으로 끌려가 심문을 받았다. 관장은 메스트르 신부에게 누구이며 어디서 왔으며 왜 왔는지를 물었다. 차례대로 관장 앞에 끌려간 최양업과 두 명의 중국인 신자도 심문을 받았다. 메스트르 신부는 자신은 천주교 사제이며, 서양에서 중국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게 하려고 왔다고 밝혔다. 관장은 신부는 “이 보잘것없는 읍내는 그대의 가르침을 받을 곳이 못 되니, 중국의 큰 지방으로 가라”고 일렀고, 메스트르 신부는 “참 하느님을 알지 않아도 될 만큼 작은 곳은 없다”고 항변했다.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 일행은 감옥에서 하루를 더 보내고 이튿날 석방돼 장교 2명의 호위를 받으며 하루 반나절 거리에까지 끌려간 뒤 풀려났다.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신부 일행이 군인들에게 체포된 후에도 별 탈 없이 풀려나게 된 것은 프랑스와 청나라가 1844년 10월 24일 맺은 황포조약 때문이었다. 이 조약으로 아직 선교의 자유는 허용되지 않았으나 선교사들이 여행 허가증을 갖고 중국 땅을 다닐 수 있었다.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신부 일행은 이렇게 두만강 건너 경원 개시를 통해 조선에 입국하려는 계획을 실패하고 다시 소팔가자로 돌아와야만 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4월 10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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