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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베네딕도회 선교활동과 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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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4 ㅣ No.512

베네딕도회 선교활동과 전례


『루멘 체치스』(Lumen Caecis) 제48호 18쪽에 보니 파시오 쾨스틀러(Boniface Kostler, 高世恩, 1897-1947) 신부의 사진이 실려있다. 보니파시오 신부의 젊은 시절 모습이다. 사진 아래에는 그가 선교사로서 열정을 불태우며 살았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그의 생애에 대하여 이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연합회 사망자 명부도 그가 어떻게 삶을 마쳤는지 분명히 말해 주지 않는다.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 교회 안에 어떤 영향을 끼쳤고 어떤 결과를 남겼는지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보니파시오 신부의 삶은 그 답을 제시해 줄 전형적인 예가 된다.

1897년에 태어난 보니파시오 신부는 1924년 7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서품을 받고, 그해 8월 서울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선교 지역이 갈리면서 그는 북쪽에 위치한 연길 수도원에 배정되었다. 당시 동아시아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자신이 원하는 선교지를 선택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들을 요청하는 신자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렇다 보니 보니파시오 신부도 두메산골 합마당(蛤? 塘)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조선인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가진 것 없는 채 만족하며 살아갔다. 합마당은 연길로 가려 해도 하룻길이나 되는 곳이었다. 그가 머물던 곳에는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939년 막 사제 서품을 받고, 보니파시오 신부를 보좌했던 귄텔 하이글(Gunther Heigle, 許傑東, 1910-1992) 신부는 자기가 지은 『연길의 실정(實情)』이라는 책에서 합마당에 관한 일반적인 사정과 더불어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귄텔 신부의 말을 빌리면 보니파시오 신부는 전혀 점잔 빼는 사람이 아니었고, 은수자적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다. 또한 귄텔 신부는 남평 수용소에서 보낸 시절을 이야기하며, 당시 보니파시오 신부가 몹시 지치고 쇠약해진 나머지 1947년 3월 25일에 두도구(頭道溝)에서 사망하여 그곳에 묻혔다고 전했다.

2007년 8월 연길 수도원의 옛 자취를 찾아다닐 당시에 합마당에서 뭔가 발견하리라는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그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다. 1931년 보니파시오 신부가 세운 성당이 여전히 거기에 서 있었던 것이다. 나무로 된 창틀만 없어졌을 뿐이지 벽과 지붕은 보존 상태가 양호했다. 성당 현관 위에 그려진 연합회 문장이 아직까지도 그 흔적이 뚜렷했다. 만일 이 성당이 허물어지지 않는다면, 다시 한 번 연길 지역에서 베네딕도회 선교활동의 상징적인 표지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놀랄 만한 일이 또 있었다. 중국에서 남몰래 활동하고 있는 우리 연합회 소속 두(杜) 노르베르트 신부가 사람들에게 자기를 소개하자 순식간에 사람들이 다가와 그를 둘러쌌다. 한 할머니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 할머니는 자기가 어렸을 적 사람들이 한 동네에 살던 보니파시오 신부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말해 주었다. 할머니는 보니파시오 신부를 참 친절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물었다. “왜 다시 오지 않습니까? 교회를 다시 세우려고 하면 우리가 기꺼이 도와줄텐데.” 보니파시오 쾨스틀러 신부가 합마당을 떠난 지 60년이 흐른 뒤, 유럽에서 그곳을 다시 찾아온 방문객은 은수자 성향을 지녔던 한 수도자가 이루어 놓았던 일을 보고는 감격하여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정치적인 문제는 잠시 제쳐 두고, 보니파시오 신부가 일했던 수십 년 전처럼 이곳에서 다시 한번 교회를 번성시켜 주라는 요청이 귀에 들려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연길 대목구에서 벌였던 선교활동만큼 베네딕도회적 선교 방식이 명확하게 드러난 곳은 없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연길에서 일하고 있던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교육사업과 의료 사도직이 더 이상 선교를 위한 중요 수단이 되지 못하리라고 간파하였다. 대신 그들은 전례의 중요성과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강조하였다.(유럽에서는 이와 비슷한 상황이 20년 이후에나 일어났다!) 이는 장소를 따지자는 것도 아니요, 알빈 슈미트(Alwin Schmid, 安, 1904~1978) 신부의 초창기 성당 건축에 대한 신학적 배경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는 심지어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1940년 7월 25일 테오도르 브레허(Theodor Breher, 白化東, 1889~1950) 주교 아빠스의 사제서품 은경축 기념미사가 어떻게 거행되었는지 떠올려 보기만 해도 된다. 이는 연길 선교의 절정이었다. 주교 아빠스는 신자들 가운데서 한국어와 중국어로 미사를 드리면서 모든 회중을 끌어들였다.

이제 이 이야기는 건너뛰고, 간략히 할 말만 하겠다. 덕원과 연길에서 선교활동이 중단되고, 왜관에 아빠스좌 수도원이 새로 세워졌을 때, 파비아노 담(Fabian Damm, 卓世榮, 1900-1964) 신부는 당시 본당을 맡고 있던 수사신부들을 대변하여 수소 브레흐터(Suso Brechter, 1910-1975) 총아빠스에게 항의편지를 보냈다. 1964년 2월 18일자 편지에서 그는 “만약 베네딕도 회원들이 교구를 갖지 못하면, 훗날 그들은 수도원 안에서 갇혀 살게 될 것입니다”라고 지적했다. 물론 수도원 안에 살면서도 한국 교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었겠지만, 그들이 굳이 사목활동을 필요로 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이어지는 내용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런 일화를 기억해두어야 하는데, 1909년 봄 베네딕도회 첫 선교사들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 서울의 주교좌 대성당에서는 성주간 전례가 침묵 속에 거행되고 있었다. 그때 상트 오틸리엔의 도미니꼬 엔쇼프(Dominicus Enshoff, 1868-1939) 신부가 초빙되어 엑술테트(Exultet, 부활찬송)를 노래했다. - “우리는 전례운동의 활성화와 전례 쇄신이라는 소중한 임무를 우리에게 독자적으로 맡겨진 선교지역에서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사실, 한국 주교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고 나서야, 신자들이 묵주기도나 바치는 가운데 거행되는 침묵 미사(창미사와 반대 개념, 그냥 밋밋하게 사제 혼자 경문을 읽으며 드리는 미사)와는 뭔가 다른 목표를 지향하는 전례운동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러나 한국 주교들이 이를 이해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또한 본당신부들에게 이를 이해시키기까지는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30년 동안 덕원과 연길에 있으면서 우리는 미사통상문을 번역하였고, 그것을 공동체 미사에 사용하였습니다. 이를 모범적으로 실천한 사람은 다름 아닌 대목구장(교구장)이었죠. 그래서 우리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 활약했던 북한의 신자들은 미사 드리는 것이 공동체에 기쁨을 가져다주는 일이며 마땅히 해야 할 의무임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남한에 와서 교구 소속 본당신부들에게 미사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가르쳐주었습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고유한 사목지역을 갖게 된다면, 수도원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보다 더 성공적으로 전례적 이상을 촉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수도원 안에서는 신자들을 만날 기회도 적고 실질적인 선교 사업을 위한 기회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파비아노 신부는 베네딕도회 선교가 어떠해야 하는지 자신의 견해를 계속 피력한다. 그는 본당을 맡고 있는 수사신부들을 대표하여 말하고 있다. 그는 “새로 세워질 아빠스좌 수도원은 교구를 가져야 합니다”라고 서두를 뽑고,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있다. “서정길 대주교가, 측근들의 의중도 그렇겠지만, 1966년 봄으로 만기되는 본당 위탁계약을 갱신하리라고는 전혀 확실지가 못합니다. 그가 만일 계약을 갱신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열심히 사목하는 본당들을 하나씩 포기해야만 하며, 결국 우리는 수도원 울타리 안에 갇혀 버리고 말겠지요. 이것은 선교단체의 성장과정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경향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회헌의 정신을 마음에 품고 지속적으로 항의할 것입니다. 우리는 선교 베네딕도회원이지 보이론 연합회의 회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한국 교회를 위해, 꼭 필요하지만 아직까지 착수한 적이 없는 여러 사업을 수도원 안에서 해낼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우리에게 사도직 활동을 하는 선교사의 임무까지 맡겨진다면, 훨씬 많은 성과를 낼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모시지도 않는 주교들의 변덕스러운 요구에 휘말리지 않고 자유롭게 일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이 편지가 쓰인 1964년 이후, 문제점들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었고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바뀌었다. 하지만 수도원 전례가 선교지에서 효과를 발휘하도록 만들어내는 과제가 남아 있다. 이런 노력이 오딜리아 연합회가 베네딕도회 안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게 만든다. 한마디로 말해, 전례가 선교적 요소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마도 보니파시오 쾨스틀러 신부 같은 이를 기억하는 일이 이런 논쟁에 생기를 불어넣어 줄 듯하다.

글 - 요한네스 마르(Johannes Mahr) 박사
출처 - Benedictine Monks and Missionaris, Contributon to the discussion, Lumen Caecis No 49/50 /December 2008/January 2009
번역 - 강찬규 포에멘 수사, 사진제공 역사자료실

[분도, 2009년 여름호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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