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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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신앙으로 현대문화읽기: 연극 나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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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5-18 ㅣ No.824

[신앙으로 현대 문화 읽기] 연극 ‘나생문’


인간의 이기적 욕망, 본성의 추악함



연극 ‘나생문’의 한 장면. (코르코르디움 제공)


‘나생문’은 일본의 구전설화를 바탕으로 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소설이다. 1951년 베니스 영화제의 그랑프리를 받은 영화 ‘라쇼몽’으로도 제작됐고 우리 연극계의 기성 연출도 신예 연출도 자신들의 예술혼을 불어넣고 싶어 하는 작품이다.

연극의 주요 내용은 나생문 앞에서 스님과 나무꾼, 가발장수가 나누는 괴이한 살인사건이다. 이 사건이 괴이한 이유는 증인들이 말하는 각각 다른 증언들 때문이다. 첫 번째 증인인 산적은 “여자가 나와 살고 싶어 해서 사무라이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나는 정정당당한 결투로 그를 죽였다”라고 말한다. 두 번째 증인으로 나선 여자는 “산적은 나를 겁탈한 후 사라졌고, 나를 바라보는 남편의 눈빛에 혼절했다. 깨어나 보니 내 은장도에 남편이 찔려 죽어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증인은 무당을 통해 증언대에 선 사무라이 혼백이다. 혼백은 “내 아내는 산적을 따라가겠다며 나를 죽이라 했노라. 산적은 화를 내며 사라졌고 나는 명예를 위해 자결했다”고 말했다. 각각의 증언들은 앞뒤가 맞지 않고 들을수록 헷갈리고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말들뿐이다.

“우리는 과연 무엇 믿고 살아가야 하는지, 우리 사회의 답답한 모습을 보면서 나무꾼의 깨달음을 얻고 싶었다”라는 것이 작품 연출의 변이다. 나무꾼이라면 나생문앞에서 스님과 가발장수와 함께 앉아 재판과정을 털어놓고 있는 바로 그 추레한 남자다. 무대에 차례로 불려 나온 증인들의 말이 끝나자 나무꾼은 소리친다.

“거짓말이야 모두가 다 거짓말!” 가발장수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묻는다. “그럼 당신이 뭘 알고 있다는 거야?” 스님이 다그친다. “그게 뭐요, 말하시오!” 그때 갑자기 아이 우는소리가 들린다. 시체를 내다 버리는 이곳에 아이라니. 스님이 거두겠다한다. 나무꾼이 말한다. “저는 아이가 여섯인데 가난해서 못 먹이고 못 입히고 나무하러 가다가 봤는데 사무라이 가슴에 꽂힌 칼 손잡이에 보석이…. 그거면 애들을 한동안 먹일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무꾼은 칼을 훔친 죄를 졌다며 운다. 그는 허리를 깊이 숙이고 두 손을 내밀며 말한다. “애 키우는 거라면 스님보다는 제가 낫습죠, 아기를 주십시오.” 아기를 향해 쭉 뻗은 나무꾼의 가난한 빈손이 뇌리에 남는다.

살인범은 과연 누굴까. 인간의 이기적 욕망과 본성의 추악함이 주범일지 모른다. 사실과 진실은 영원히 평행선이고 그것에 아무도 놀라지 않으며 우리 안에서 서로 말이 다른 증인들과 마주쳐도 별로 민망하지 않다. 내게 좋은 것을 위한 불신과 음모는 당연히 너그럽게 넘어가 준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가. 이 세상에는 나무꾼이 산다. 내가 사는 세상에 나무꾼이 있다. 내가 나무꾼이 될 수는 없어도 그를 알아보는 눈이 없다는 건 큰일이다. 큰일 중에도 아주 큰일일 것 같다.

극장 밖을 나오며 사람들의 눈을 피하게 된다. 그 안에서 나를 볼까봐 내 안에서 자기들을 들킬까봐.

*
이원희(엘리사벳ㆍ연극배우 겸 작가) - 뮤지컬 ‘서울할망 정난주’ 극작가이자 배우로서 연극 ‘꽃상여’ ‘안녕 모스크바’ ‘수전노’ ‘유리동물원’ 등에 출연했다.

[가톨릭신문, 2015년 5월 17일,
이원희(엘리사벳ㆍ연극배우 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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