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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개신교의 마리아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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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5-23 ㅣ No.237

[경향 돋보기] 개신교의 마리아 이해

 

 

그리스도교 간 대화에서 마리아 공경은 종종 논쟁거리가 되는 민감한 주제다. 하지만 마리아가 구세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하느님께 순명하며 신앙의 완전한 모범을 보여주었다는 것만은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다.

 

개신교 신학자가 이해하는 마리아는 어떤 존재일까.

 

마리아는 어떤 여인인가? 그녀는 어떤 권위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가? 그 답은 성경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성경은 우리가 마리아를 어떻게 이해하기를 바랄까? 이런 관점에서 그녀에 대한 기록들을 찾아보았다. 천주교의 마리아 교의와 부합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이 글을 통해 마리아에 대한 서로의 관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인하여

 

사도신경을 외우다 보면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라는 표현이 나온다. 마리아가 처녀로서 남자를 알지 못하고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셨다는 증거는 마태오 복음과 루카복음에 기록되어 있다. 마태 1,18에는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남편 요셉이 마리아의 잉태사실을 알고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정혼을 끊고자 했던 기록도(마태 1,19) 요셉과 성적인 관계가 없었음을 입증한다.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아기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임”을 알려주며 마리아를 데려오기를 두려워 말라고 당부한 것(마태 1,20)도 그 증거이다.

 

천사는 마리아의 잉태 자체가 구약에서부터 이미 예정되고 예언된 것의 성취임을 알리며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는 이사 7,14의 구절을 인용한다. 그 예언의 핵심에는 ‘처녀’가 잉태할 것임이 강조되어 있다. 성경은 분명히 마리아가 동정녀였으며 성령의 기적으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였음을 의심할 수 없도록 가르쳐준다(루카 1,31-33).

 

 

예수님 잉태는 온전히 하느님의 역사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사건을 또 다른 성경적 시각으로 보면 흥미로운 점이 관찰된다.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가 하느님께 특별한 은혜를 입었음을 말하며 그녀의 수태사건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그녀를 덮으신 결과임을 알린다(루카 1,30.35). 이로써 성경 저자는 예수님의 수태에서 마리아의 어떠한 능동적(자의적) 참여도 없었으며, 이 사건은 철저히 하느님의 주권적인 역사임을 강조한다.

 

다만 마리아의 위대한 점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고백처럼 믿음과 순종으로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인 것이다. 또한 성경의 저자는 그녀의 순명을 엘리사벳의 남편이요 제사장인 즈카르야의 불신(루카 1,20)과 대조되는 것으로 기록함으로써 마리아의 신앙을 높이 평가한다.

 

엘리사벳 방문에 이어지는 마리아의 찬가(마니피캇, 루카 1,46-55)는 하느님께서 그녀와 그녀의 백성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찬양하는 노래다. 이는 구약의 한나의 노래(1사무 2,1-10)와 비슷하며 그녀의 신앙과도 비교될 수 있다. 이 찬양 속에는 아브라함의 언약 성취를 비롯하여 구약에 대한 인용과 암시로 가득하다. 이 찬가는 그녀가 얼마만큼 하느님의 말씀을 사모했으며 말씀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으로, 그녀의 경건함과 신앙이 잘 드러난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마리아의 신앙과 순명은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고 믿는 여성, 영적으로 깨어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여성, 모든 일에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는 여성으로서 현대 개신교회에서도 신앙인의 모범으로 부각되고 있다.

 

 

인간적인 마리아, 예수님의 형제들

 

예수님을 낳으신 뒤 마리아의 삶은 어떠했을까? 마태오 복음은 요셉이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아니하였다(마태 1,25)고 기록한다. 개신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말씀을 두 사람이 예수님의 탄생 이후 동침했음을 시사하는 구절로 본다.

 

루카 복음은 예수님을 ‘첫아들’로 표현하는데(2,7), 이 말씀은 그 이후에 동생들이 생겼음을 가정한다고 본다. 실제로 예수님의 형제들의 이름들이 성경의 여기저기에서 거론되기 때문이다(마태 12,46; 마르 3,31; 6,3; 루카 8,19; 요한 2,12; 7,3.5.10; 사도 1,14). 이에 따라 예수님을 낳으신 뒤 마리아는 요셉과 다른 결혼한 부부들처럼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유지한 것으로 본다.*

 

 

예수님의 제자 마리아

 

동정녀의 출산으로 마리아는 다른 어떤 여인들과도 구분된다. 그 이후에도 그녀는 예수가 단순히 자신의 아들 이상이라는 것을 서서히 경험하기 시작하면서 그녀 자신도 아들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해야 함을 발견해 나간다. 몇 가지 실례가 있다.

 

율법교사와 대화하는 어린 예수(루카 2,41-51) : 파스카 때 예루살렘에 왔다가 열두 살 난 예수님을 잃어버린 사건이다. 본문의 핵심은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는 예수님의 발언이다. 예수님은 서서히 본인이 단순히 마리아의 아들만은 아님을 알리시며 인간 부모와 ‘분리’ 작업을 시작하신다.

 

카나의 혼인잔치(요한 2,1-12) : 이 사건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맏아들인 예수에게 의지하여 의논하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라고 하며 어머니와 간격을 두기 시작한다.

 

“여인이시여”는 불손한 말이 아닌 경어체의 표현으로, 메시아의 임무와 한 여인의 아들로서의 의무 간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제자들이 그를 믿기 시작하는데, 이는 예수님의 어머니도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메시아를 따르는 제자로서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예수님의 참가족(마태 12,46-50; 마르 3,31-35; 루카 8,19-21) :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자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하시며 예수님의 혈육도 이러한 부름에 응해야 하는 대상들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이제는 예수님과의 인간적, 혈연적 관계를 떠나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믿음을 가져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다.

 

십자가 곁의 마리아(요한 19,25-27) :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마리아를 향하여 두 가지 일을 하신다. 자신의 제자인 요한과 마리아에게 새로운 어머니 - 아들 관계를 맺어준다. 또 마리아를 다시 “여인이시여.”라고 부르며 자신과 마리아는 이제 아들과 어머니 관계가 아닌 주님과 제자의 관계임을 분명히 하신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에 마리아는 인간으로서 어떤 직접적인 관여가 없음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했을 때에 순종과 믿음으로 사건을 받아들인 것처럼 이제는 그분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 함을 가르쳐준다는 것이다. 이로써 마리아는 예수님의 제자의 돌봄이 필요한 여인이며 인간적으로 아들의 죽음을 보아야 하는 비통한 운명의 여인이지만 그 아들은 자신만의 아들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성도가 된 마리아(사도 1,14) : 주님 승천 이후 제자들이 다락에 모여 기도한다. 거기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는” 기록이 나온다. 천사의 알림에 순명하며 주님의 여종으로 출발한 마리아는 이제 제자들과 더불어 교회에서 기도하며 하느님의 뜻을 구하는 성도의 위치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보여주는 그녀의 거의 마지막 모습이자 이상적인 모습이라 하겠다.

 

 

존경받는 주님의 여종, 선택된 여인

 

엘리사벳의 찬양처럼 마리아는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이”(루카 1,42)임에 틀림없고, 마리아의 노래에서처럼 “모든 세대가 행복하다 하는 여인”(루카 1,48)이다. 예수님 탄생 예고에서 보여준 그녀의 믿음과 순종, 겸손한 종의 면모는 모든 믿는 자의 본보기요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하다시피 성전에서도, 카나의 혼인잔치 때도,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서도 마리아는 가끔 예수님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기에 그녀도 주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한 여인이며, 죄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하는 여인이며, 구원이 필요한 여인으로 이해된다. 그녀도 다른 제자들처럼 주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더라도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탄생시키고자 선택하실 만큼 깨끗하고 아름다운 여인이며, 예수님을 낳는 최고의 영광과 특권을 누린 여인이라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는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평가가 개신교의 일반적인 이해이다.

 

*이러한 관점은 가톨릭의 성모 마리아 교의 가운데 하나인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와 상반되는 면이 있다. 참고로 “성경”(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간행 전에 출판된 ‘신약성서 새 번역’ 각주에 따르면, 예수님의 형제들(마태 12,46)은 “성서에서 ‘형제’는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동기도 가리키고 가까운 친족도 가리킨다.”고 해석된다. 또 첫아들(루카2,7)은 형제들 가운데 맏이라기보다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탈출 13,12), 다윗의 자손인 요셉의 맏아들로서 메시아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 루카 복음사가가 묵시 1,5에 나오는 그리스도론적 칭호 ‘맏아들’을 염두에 두고 쓴 말”로 해석된다. - 편집자

 

* 김윤희 - 전통적 그리스도교 정신에 입각하여 현대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횃불 트리니티 신학대학원 대학교에서 구약학 교수로 일한다.

 

[경향잡지, 2008년 5월호, 김윤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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