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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황사영 백서 이본에 대한 비교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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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1-22 ㅣ No.650

황사영 백서 이본에 대한 비교 연구

 

 

1. 서론 

2. 이본의 종류 

3. 남인측 이본 백서 

4. 노론측 《東麟錄》의 〈邪賊 嗣永帛書〉 

5. 결론

 

 

1. 서론 

 

1801년 2월 11일 정약용의 고발로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이에 황사영은 김한빈(베드로)과 함께 2월 말 충청도 제천 排論 김귀동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자신의 체험과 신자들에게 들은 소식을 바탕으로 박해의 과정과 순교자들의 열전,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안이 담긴 帛書를 작성하였다. 북경교구장 주교에게 보내려던 백서는 황심의 고발로 9월 29일 배론에서 체포됨으로써 압수되고 말았다. 

 

이 백서로 말미암아 신유박해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지금까지 천주교가 유교적 질서에 영향을 주는 邪學으로서의 의미에서,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서양 세력을 끌어들이는 매체적 역할을 한다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는 백서를 정치적인 문제로 삼아, 황사영과 그와 관련된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다스리고자 한 것이었다. 결국 황사영은 11월 5일 大逆不道의 죄로1) 능지처참형을 당하였고, 정약전 등은 각각 유배를 당하였다. 이때 모친은 경상도 거제부로, 처 丁命連은 제주목 대정현에 婢로, 아들 景憲(2살)은2) 絞殺刑을 면하고 전라도 추자도에서 奴로 삼게 하였다.3) 

 

이 사건의 관련자들을 신문하는 동안 동지사의 출발 시기가 다가오자, 조정에서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처형사실이 백서에 실려 있는 만큼 그 사실이 중국에 알려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陳奏使를 파견하여 신유박해의 전반에 관한 이해를 촉구하고, 주 신부의 처형에 따른 반발을 예방하고자 하였다. 또한 討邪奏文의 내용을 입증할 증거로 백서를 갖고 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백서의 원본이 아니라 조정에 불리한 내용을 삭제한 소위 ‘假帛書’라 불리는 《辛酉冬陳奏使謄本帛書》였다. 이처럼 백서는 교회적으로 신유박해를 이해하는데, 정치적으로 조선 후기를 분석하는데, 외교적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 백서에 대한 연구는 일제하 오다 쇼오고(小田省吾)가 1930년에 논문을 발표한 이래 계속되어 왔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서에 대한 연구가 여전히 필요한 것은 백서 원본의 텍스트 분석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백서가 압수된 이후 정부측 · 남인측 · 노론측 · 교회측 이본 백서가 나왔는데, 마치 이본 백서가 백서의 원본인 것처럼 연구되어 왔기 때문이다.5) 즉 원본이 아니라 이본이 백서를 이해하는 기준이 되었고, 이본 백서 저자들의 생각이 황사영 본래의 정신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6)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남인측과 노론측 이본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후대인들의 백서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이본의 종류 


1) 원본과 필사본 및 동판 

 

1801년 10월 5일 심환지는 황사영을 체포할 때 현장에서 지극히 흉악한 문서를 압수하였다고 보고하였고, 임금과 대왕대비는 좌 · 우포장이 올린 백서를 살펴본 후 鞫廳에 내렸다.7) 이후 백서는 의금부에 보관되어 왔다. 고종대의 名醫인 황필수도 백서가 의금부에 소장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8) 

 

그런데 백서는 1894년경 의금부의 옛 문서들을 파기 · 정리하는 과정에서9) 뮈텔(G.-C.-M. Mutel, 閔德孝)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뮈텔 주교는 1924년 3월 정남규(요한)로 하여금 원본 백서와 《辛酉冬陳奏使謄本帛書》의 원문을 필사하게 하고 김한수로 하여금 원문과 대조토록 하였다. 뮈텔 주교는 백서를 콜로타이프판에 붙여 실물 크기와 똑같이 제작하였다. 실물 크기의 이 동판과 필사본은 현재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1924년 5월 15일 가니시오(Canisius Kugelgen) 신부가 백서를 사진 찍으러 주교관에 왔었고, 뮈텔 주교는 그해 5월 28일 주교관을 방문한 인도차이나 총독 메를롱(Merlon) 일행에게 백서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1925년 3월 13일 캐나다 출신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 게일(Gale)에게도 백서를 보여주었다.10) 

 

1925년 7월 5일 조선 순교 복자 79위 시복식이 로마에서 거행되었다. 이 시복식에 참석하기 위해 뮈텔 주교는 그해 3월 16일 서울을 떠나 대구를 거쳐 배편으로 일본 후쿠오카, 싱가포르, 인도양, 카리브 해를 항해하고 4월 30일 프랑스 마르세유를 경유하여 파리에 도착하였다. 6월 15일 로베스팽 후작 부인과 신학교를 위해 드 게브리앙 주교에게 백서 사본 한 부씩을 증정하였다. 6월 17일 로마에 도착한 후 25일 교황청 반 롯숨(Van Rossum) 추기경을 만나 백서를 전달하였고, 7월 4일 교황 비오 11세를 알현하였다. 이때 뮈텔 주교는 “교황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와 함께 ‘비단에 쓴 편지’(백서)를 펼쳐 놓으러 큰 테이블로 갔다. 이 편지의 증정은 교황의 마음을 감동시켰다”라고 하였다. 그 다음날 교황은 시복식을 주례한 후 뮈텔 주교에게 “황사영의 편지를 방금 읽었는데 깊은 관심을 가졌다”라고 말하고, 이 편지를 제공한 것에 감사하다고까지 하였다. 이튿날 교황청 가스파리 추기경과 7월 8일 바티칸 도서관장을 지낸 에를레 추기경에게도 백서 사본 1부씩을 전달하였다. 7월 23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 만난 인도 에르나쿨람(Ernakulam) 대교구의 칸다힐(Kandathil) 주교는 교황 알현 시에 교황으로부터 점점 더 높이 평가되고 있는 유명한 백서에 대해 10분간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11) 오동나무에 넣어져 교황에게 증정된 백서는 그해 로마에서 열린 세계 포교 박람회에 전시되었다가 교황청 민속 박물관 문서고로 옮겨져 지금까지 그곳에 보관되어 오고 있다.12) 그리고 지난 2001년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 기념으로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서 그해 8월 15일부터 두 달간 전시되기도 하였다. 

 

2) 이본의 종류 

 

첫 이본13) 백서는 백서가 압수된 후 의금부 당국자에 의해 필사되어 《邪學罪人嗣永等推案》의 1801년 10월 9일자에 실린 것으로, 이 백서가 다른 이본 백서의 원본이 되었다. 정부측 문서에 실리게 된 것은 정국을 뒤흔든 황사영 사건을 이해하는 데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해 10월 진주사 조윤대가 이것을 축약하여 중국에 갖고 간 《辛酉冬陳奏使謄本帛書》가 있는데, 이 백서는 혹 있을 지도 모르는 외교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에 유리하도록 1/15로 축약한 것이다. 이본 백서들과는 다르게 황사영이 쓴 것처럼 하기 위해서 백서에 실린 글자만을 이용했고, 황사영처럼 間字14)를 하였다.

 

노론 척사파의 입장에서 기록된 것으로 여겨지는 《東麟錄》의 〈邪賊嗣永帛書〉가 있다. 그리고 남인들이 쓴 것으로 여겨지는 작자 미상의 필사본으로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 〈嗣永帛書〉Ⅰ · Ⅱ가 있으며, 남인 이기경(1756-1819)의 후손인 이만채가 편집한 것으로 여겨지는 《闢衛編》의 〈嗣永帛書〉가 있다. 또한 교회측에서도 1859년 다블뤼(M.N.A. Daveluy, 安敦伊) 주교가 《闢衛編》등을 입수하여 그 안에 들어 있는 백서를 채록한 것이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ee(1862), pp.194-198에 있으며, 이것은 파리 외방전교회에 보내져 달레(C.C. Dallet) 신부가 쓴 Histoire de l’Eglise de Coree(1874), 1편 2권 pp.200-206에도 들어 있다. 

 

 

3. 남인측 이본 백서 


1) 《嗣永帛書》 I 

 

(1) 서지적 검토 

 

이 이본 백서의 서지는 24.8㎝×21.3㎝의 한지(楮紙)에 전체 35면(18a), 각 면마다 주로 草書로 11행 혹은 12행씩, 1행 29자 내외로 필사되어 있고,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잘못 쓴 글자를 지우고 그 옆에 글자를 다시 쓴 곳도 35곳이나 된다. 제목은 《嗣永帛書》이고, 백서의 저자를 〈姓黃哥 名嗣永〉(1a)이라고 밝혔고, 序文과 跋文은 없다. 

 

(2) 원본과의 내용 비교 

 

백서를 옮겨 적는 과정에서 〈還來問藥 因此獄中〉(9행)을 〈還來問病 自此獄中〉(2b-2)로하는 등 통용자를 쓰거나, 〈伏聞氣?候萬安〉(1행)을 〈伏聞?候萬安〉(1a-2)로 하는 등 탈자가 있다. 〈乙卯致命崔瑪弟亞之族姪〉(32행)을 〈乙卯致命崔瑪弟惡之族姪〉(6a-12)로 하는 등 오자와 〈士夫男子〉(20행)을 〈士大夫男子〉(4a-9)와 〈心界不動如山〉(59행)을 〈心界不動如泰山〉(9a-10)로 하는 등 문맥상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인지 첨가한 글자가 있고, 〈聖敎爲國家之一大政〉(21행)을 〈聖敎爲國家一大政〉(4a-12)로 하는 등 어조사 등을 생략하였다. 그리고 〈庚申五月〉(12행)을 〈庚申十二月〉(3a-2)로, 〈明會長丁奧斯定〉(25행)을 〈明會長丁奧沙定〉(5a-7)으로 하는 등 사실을 잘못 기록한 것도 있다. 〈?等勿笑吾?人生於世 爲天主死 卽當行之事耳 大審判時 吾?之涕泣 ?而爲眞樂 ?等之喜歡笑 ?而爲眞痛 ?等必勿相笑 臨刑顧謂觀者曰?等勿?〉(39행)에서 〈?等勿?〉(7b-6)이 〈?等勿〉로연결되는 것으로 보아 착오에 의해 생략한 곳과 〈大將諫曰 旣已?之〉(83행)을 〈大將諫曰 旣已?之大將諫曰 旣已?之〉(12a-10)로 착오에 의해 문장을 반복한 곳도 있다. 이는 다른 남인측 이본 백서보다는 적다. 이러한 잘못은 옮겨 적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도 있고, 편집자가 백서에 실린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있다. 그리고 불명확한 사실을 밝히기 위하여 細註를 달았는데, 〈登舟細見〉(112행)의 옆에 〈卽玄啓欽〉(16b-9)이라고15) 하였다. 이 이본의 작성자는 그대로 옮겨 적으려고 해서인지 자신의 의견을 담은 세주가 다른 남인측 이본 백서보다도 적다. 

 

황사영이 포도대장 李儒慶(27행)이라고 잘못 쓴 것을 李儒敬16)(5b-5)이라고 고쳤는데, 다른 이본 백서에서도 이처럼 바로잡았다. 그리고 황사영이 몇몇 신자들이 잡히지 않고 교회의 재건을 위해 도모할 일이 있는 것은 이 나라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표증 (〈明係肯救東國之表?〉[102행])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明係背敎東國之表症〉(15a-8)이라고 하였다. 背敎요, 表症이라고 함으로써 백서 내용의 뜻을 완전히 고쳐버렸다. 《嗣永帛書》 Ⅱ에서도 이와 같이 하였다. 후대에 와서 황사영은 이런 글을 썼을 리 없다는 추측이 나올 수 있고,17) 그 증거가 되는 셈이다. 또한 사실을 왜곡한 것도 있는데, 황사영은 주문모 신부가 6년이나 도와 준 강완숙을 총애하고 신임함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無人可擬 葛隆巴內奉神父〉[68행])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無人不擬 葛隆巴內奉神父〉(10a-3)로 하였다. 당시 사회는 이러한 사정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강완숙과 주 신부와의 관계를 뒤집어 씌워 의심하고자 한 조작으로 보인다.18) 다른 이본 백서에도 이와 같이 하였다. 

 

중국과 관련된 사항을 언급할 때는 외교적인 언사로 높이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大淸兵陷江都〉(60행)을19) 〈大淸兵臨都〉(8b-10)라고 했는데, 여기서 陷(함락하다)은 청나라가 大國이 아니라 침략자임을 드러내는 용어인 반면, 臨(임하다)은 침략자가 아니라 대국임을 드러낸 것이다.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청나라의 內服을20) 희석시킬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황사영은 청나라에 대해 침략자의 입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내복을 요청한 것은 교회의 재건을 위한 고육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嗣永帛書》Ⅱ와 《闢衛編》에서도 이와 같이 하였다. 또한 황사영은 중국에 대해 〈中朝時勢〉(106행)라고 하였는데 비해, 여기에서는 외교적인 표현인 〈大國時勢〉(18b-2)라고 하였다. 《嗣永帛書》 Ⅱ와 《闢衛編》에서도 이와 같이 하였다. 

 

정조와 관련된 부분들을 생략하였다. 특히 정조의 대서학정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천주교인들의 죽음에 관한 기록, 즉 〈崔必恭〉(40행) · 〈洪敎萬〉(40-41행) · 〈洪樂敏〉(41-43행) · 〈李承薰〉(43-46행) · 〈李家煥〉(47-52행) · 〈崔必悌〉(52-53행)의 신앙 생활과 죽음을 의도적으로 생략하였다(〈與崔多?同斬時年四十〉(40행, 7b-8) … 〈受洗而死〉(53행,7b-8). 40행은 최인길(토마스)과 함께 순교하는 정약종의 죽음 장면이다. 그런데 이어 나오는 53행의 〈受洗而死〉는 최필제 부친의 죽음에 관한 내용이다. 이 두 내용을 한 문장으로 연결함으로써 마치 최필제 부친의 죽음이 정약종의 최후 모습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도록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남인들로 반대파의 공격이 있을 때 정조가 적극 보호해 주었다는 사실을 생략한 것이다. 이 사실을 남인 功西系의21) 입장에서 감추기 위해서, 혹은 이것이 정조에 대한 불경이 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이본 백서에서도 이와 같이 하였다. 

 

김건순에22) 관한 내용 중에 〈居家忠信篤敬德著於鄕里〉(56행)을 〈居家忠信篤敬著於鄕里〉(8a-7)로, 황사영이 강조했던 ‘德’을 생략하였다. 황사영이 김건순에 대해 종교적인 덕과 유교적 사상을 겸비한 인물로 묘사한 반면, 여기서는 유학자에게 어색한 종교적인 덕을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이본 백서에서도 이와 같이 하였다. 또한 강이천에 관한 내용 중에 〈而惟姜彛天不肯全信 不數月〉(58행)을 〈而惟姜彛天不肯信 不數月〉(8b-3)로 하였는데, ‘全’을 생략함으로써 결과적으로 小北 집안의 강이천에게 유리한 표현이었다.23) 다른 이본 백서에서도 이와 같이 하였다. 

 

《闢衛編》 및 《嗣永帛書》 Ⅱ에서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들(21행, 22행, 25행, 29행 일부)과 황사영 자신이 불확실하다고 여겨 좀 더 사실을 조사해야겠다고 한 것이(54행, 70행, 72-76행 일부) 생략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모두 실려 있다. 또한 〈不料一方聖敎之存亡 ?命之生死 懸於惡瑪滿 矣只緣無財至於敎亡而?死〉(96행)를 〈不料一方聖敎之而?死〉(14a-10)로, 〈厥數甚多 而柳奧斯定兄弟 及尹方濟各 以領袖之故 不卽定配 移囚上京〉(74행)을 〈厥數甚多〉(11a-3)로 하였다. 이는 황사영이 설명한 부분인데, 문맥상 없어도 된다고 하여선지 생략한 것 같다. 

 

이 이본 백서는 작성자가 원문 그대로 옮기려고 해서인지 세주와 탈자 · 오자 및 생략된 곳이 다른 남인측 이본보다 적기에, 남인측 이본들 중에서 가장 먼저 쓴 것으로 여겨진다. 이 이본의 작성자는 의금부 堂郞이 남긴 것으로 현존하지는 않지만 《推鞫日記》에24) 실려 있는 것이나, 《邪學罪人嗣永等推案》(《推案及鞫案》)에 실려 있는 것이 母本일 것이라 여겨진다. 작성자는 대체로 처음부터 반서학적 입장에서 백서를 옮겨 쓴 것이어서, 이 백서는 박해자의 의도가 당연했다는 식으로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남인들의 자기 보존을 위해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2) 《嗣永帛書》 II 

 

(1) 서지적 검토 

 

이 이본 백서의 서지는 31.4㎝×19㎝의 한지(楮紙)에 전체 41면(21a), 한 면마다 10행, 1행 26자 내외의 楷書로 필사되어 있으며,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첫 면 우측 상단에 절두산 순교 기념관 도장이 찍혀 있으며, 인명과 세례명, 연도 및 사건 등에는 우측에 줄을 그어 표시를 하였다. 그리고 제목은 《嗣永帛書》이고, 서문이 2행에 〈邪賊嗣永姓黃 國初名將 都總制衡之後 判書晙之曾孫 錫範之子也 早染邪學 辛酉春獄亡命 見捉於堤川土窟 以帛尺書萬餘言 自鞫廳入 啓?於金吾文書櫃中〉(1a)라고 되어 있고, 발문은 없다. 

 

(2) 원본과의 내용 비교 

 

남인공서계측에서 작성한 이본 백서인 《嗣永帛書》 Ⅰ과 기본적으로는 같다. 그렇지만 〈而?釀己久端緖頗多〉(2행)를 〈而?釀旣己久端緖頗多〉(1b-2)로 하는 등 통용자를 쓰거나 〈懸於惡瑪滿矣〉(96행)를 〈懸於慈瑪備矣〉(16b-1)로, 〈今年窘難知名之〉(119행)를 〈今年窘難如右之極〉(21a-7)로 하는 등 오자가 있다. 〈居京畿道驪州〉(8행)를 〈居京畿道驪州地〉(2b-7)로 하는 등 글자를 첨가하거나 〈汝三適往他人家 忽然得疾不能還 約日部將到家空還〉(16행)을 〈汝三出他得病部將到家空還〉(4b-2)로 하는 등 축약 및 〈此等傳說 似不虛矣 四月望後 朝廷命御營大將 行軍門梟示死罪次刑 大將稱病 三日不出 三日後 遞罷病官 出新官行刑 將出獄 始加刑問一次 杖膝 三十度 ?過市曹 遍顧觀者 稱渴索酒 軍卒捧上一盃 飮之盡 遂赴城南十里演武場江上沙場地名露梁 貫矢於耳 軍卒授罪案使之看 所書頗多 而從容看畢 引頸受刑〉(80-81행)을 〈朝廷命御營 行軍門梟示演武場〉(13b-6)으로 하는 등 생략한 부분이 있는데, 이러한 것은 《嗣永帛書》 Ⅰ보다 많다. 〈行之則必然萬全〉(114행)을 〈行之行之則必然萬全〉(20a-5)로 하는 등 착오를 일으켜 반복하기도 하였다. 

 

황사영이 주교님께 간곡한 심정을 드러낸 〈願 大爺矜憫而垂憐焉 固知此請之煩?猥濫 然?而不求 求而不得 等是永死耳 求而不得 則死無遺恨 故敢此發口 罪人等形神赤光〉(97행)을 〈願大爺矜憫而垂憐焉 罪人等形神赤光〉(16b-4)으로 문장을 간략하게 축소하였다. 그리고 최창현의 모범적인 신앙 생활 · 강완숙의 남편과 이웃에 대한 선교 활동 · 조용삼이 혹독한 형벌을 잘 참아 받는 모습 등 신자들에 대한 칭찬(32-33행, 7b-4; 66-67행, 11b-5; 68행, 12a-1; 71-72행, 12b-2) 및 불명확한 사실을 알아보겠다는 말(21행, 5b-5)과 순교자들의 나이를(35행, 8a-1; 69행, 12a-3) 《闢衛編》과 같이 생략하였다. 이것은 순교자 열전이 큰 의미가 없고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증거에 맞추어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闢衛編》과 같이 〈以圖日後遷? 有惡官奏曰 此人不當? 請命暴露 大妃允之 先時命?之大將諫曰 旣已?之 何必乃爾 事得已 而守墓軍卒 厭其苦守 潛移別處 敎友們暗地遍尋 至今不得 行刑時〉(82-83행, 13b-10∼14a-1)를 〈以圖遷? 有惡官奏曰 不當? 請暴屍 大妃允之 行刑時〉(82-83행, 13b-10∼14a-1)로 한 것은 어영대장이 대왕대비의 명을 거역했을 리 없다는 판단하에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독자들을 위하여 《嗣永帛書》 Ⅰ보다 많이 교회 용어에 대한 세주를 달았다. 즉 〈多? 洋學標號〉(1행, 1a-5), 〈大爺閤下 卽天主堂主敎者〉(1행, 1a-5), 〈若望 名不出〉(10행, 3a-8), 〈鐸徵 姓名不出(13행, 4a-1),〈明會長 敎中領袖〉(25행, 6a-9) 등이다.25) 

 

〈乙卯致命崔瑪弟之族姪〉(32행)을 〈乙卯致命崔瑪弟血之族姪〉(7b-3)로 하는 등 교회 용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遂有己未冬淸州之窘〉(6행)을 〈遂有己亥冬淸州之窘〉(2a-9)로, 〈二月初九日 下李家煥丁若鏞李承薰洪樂 敏于禁府 十一日 捕權哲身〉(29행)을 〈二月初九日 下李家煥丁若鏞李承薰洪 樂敏于禁府 又捕權哲身〉(7a-3)으로 사실을 잘못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는 기미년(1799)을 기해년(1839)년으로, 또 11일에 체포된 권철신도 9일에 체포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闢衛編》과 같이 남인의 입장에서는 불리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정조와 관련된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들을(21행, 5b-5; 22행, 5b-7; 24행, 6a-6; 40행-53행) 생략하였다. 

 

이 이본은 중국 관리인 英學士26)에 대한 기록과(英學士 名桂 癸酉 皇城賊 變辭連伏誅; 107행, 18b-4) 《嗣永帛書》 Ⅰ과 같이 은언군의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작성 연대는 영학사가 죽은 1813년 이후부터 철종 즉위(1849년) 이전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를 잡으려던 조화진에27) 대해 〈趙和鎭者 淸橋庶派嘗陷邪術而奉 敎廉察以自贖者〉(6행, 2a-8)로 하였고, 서문에 실려 있는 황사영의 조상인 黃衡28)과 黃晙29) 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작성자는 남인 벽파의 관료일 것이다. 

 

3) 《闢衛編》의 〈嗣永帛書〉 

 

(1) 서지적 검토 

 

《闢衛編》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천주교를 배척하거나 反西學의 이론을 담은 여러 문헌과 상소, 박해 관련 자료 등을 모아 편찬한 대표적인 척사론서이다. 《벽위편》(兩水本)의 저자는 李基慶(1756-1819)이다. 그는 기호 남인의 학자로 親西系였던 이승훈 및 정약용 등과 가까웠으면서도 1787년의 丁未泮會 사건 이후 척사에 앞장선 攻西系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로 인해 그는 생전에 이 책을 저술하여 천주교를 사학으로 배척함으로써 正道인 유학을 고수하고자한 것으로 여겨진다. 3책 3권에 백서 사건과 관련된 40여 건의 자료들이 있다. 그런데 《벽위편》(現行本)의 편자인 이만채는 고조부인 이기경이 편찬한 《벽위편》(兩水本)을 토대로 대대적인 보완 작업을 거쳐 완성하였고, 1931년에 闢衛社에서 상 · 하 7권으로 간행하였다.30) 이본백서는 《嗣永帛書》라는 제목으로 권 5, pp.30-48에, 벽위사의 간행본 pp.329-366에 실려 있다. 

 

이 이본 백서의 서지는 본문의 내곽이 가는 선, 외곽이 굵은 선이고, 행마다 縱線이 그어져 있으며, 판형은 半葉에 12행, 한 행에 24자로 石印本이다. 그리고 서문과 발문이 있다. 서문에는 “기해년(1839)에 邪獄을 다스릴 때, 그 글은 다시 綸音과 寶鑑에 실리어 드러나게 되었으며”라고 하였고, 발문에 “邪賊들이 치밀하게 얽혀 있는 간사한 모양과 마음속에 몰래 품고 있는 흉악한 음모가 여기에 다 갖추어 있으므로 간략히 줄이면서 자세하게 기재했다”라고31) 하였다. 《嗣永帛書》 Ⅱ에서는 황사영을 邪賊으로 규정하였는데, 여기서는 황사영과 신자들을 邪賊으로 규정하였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이만채가 본 이본 백서의 저술시기가 1839년(己亥) 이후임을 알 수 있고, 문서궤에 넣어둘 때 禁府堂郞이 베껴둔 것을 이만채가 간략히 줄이면서 《闢衛編》에 기재한 것이다. 

 

(2) 원본과의 내용 비교 

 

이 이본 백서는 이만채가 백서를 옮기는 과정에서 꼼꼼이 읽지 않고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발문에서 밝혔던 것처럼 줄이면서 옮겼다. 그래서인지 《嗣永帛書》Ⅰ · Ⅱ처럼 통용하는 자와 오자, 탈자, 생략한 글자 등이 많고, 단어 및 문장을 첨가하기도 하였다. 

 

《嗣永帛書》 Ⅱ와 같이 〈四人于禁府 國法朝士及逆賊 禁府治之 捕廳專管 盜賊 庶民有罪 刑曹治之 敎友皆庶民 而屬之捕廳者 用治盜律也 移之禁府者 論以逆律也〉(29행)를〈四人于禁府盖以論逆律也〉(340-1)로 축약한 것은 모두가 아는 법률적 사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國法 앞에 盖를 넣었는데, 의금부에 옮긴이들을 역률로 처단한다고 문맥상 자연스럽게 연결한 것이다. 그리고 《嗣永帛書》 Ⅱ와 같이 사형집행 당시 관리 교체 및 주 신부가 사형장에 가는 모습인 〈大將稱病 三日不出 三日後 遞罷病官 出新官行刑 將出獄 始加刑問一次杖膝 三十度 ?過市曹 遍顧觀者 稱渴索酒 軍卒捧上一盃 飮之盡 遂赴城南十里 演武場 江上沙場地名露梁 貫矢於耳 軍卒授罪案使之看 所書頗多 而從容看畢 引頸受刑 時四月十九〉(80-81행)를 〈演武場 時四月十九〉(352-1)로 한 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생략한 것 같다. 그리고 순교자들(〈최창현〉35행, 〈최필제〉54행, 〈김백순〉64행, 〈이희영〉65행, 〈강완숙〉69행)의 나이는 《嗣永帛書》 Ⅰ과 《東麟錄》은 모두 실려 있고, 《嗣永帛書》 Ⅱ에는 최창현과 강완숙만 나이가 생략되어 있으나, 여기에서는 순교자들의 나이를 모두 생략하였다. 그리고 세주가 《嗣永帛書》 Ⅱ보다 많고 자세하다. 즉〈若望 若望名不出有元若望者〉(2행, 330-3),〈乙卯失捕事件 只擧乙卯失捕者其前事機曾有詳報者故也〉(6행,331-5),〈中培者少論一名也 中培辛酉圻啓正刑〉(8행, 332-3∼4), 〈伯多綠 若鍾子哲祥同時伏法伯多祿必其標號〉(53행, 343-9), 〈池撒巴 池撒巴則乙卯賊池潢〉(67행, 348-9),32) 〈柵門之內 柵門內開鋪〉(99행, 358-3), 〈寧古塔 淸以朝鮮屬寧古塔〉(105행, 360-7), 〈重臣 重臣指李家煥〉(115행, 364-2) 등이다. 

 

특히 다른 이본들과는 달리 은언군과 그의 부인과 며느리 부분을(69-70행, 349-5) 모두 생략하였고, 《嗣永帛書》 Ⅱ와 같이 정조의 정치적인 행위에 관한 내용들을(21행, 337-8; 22행, 337-11; 24행, 338-8; 40-53행, 344-9) 생략하였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이 이본 백서는 《嗣永帛書》 Ⅱ와 비슷한 점이 많으므로, 남인 벽파 관료가 쓴 것으로 보이는 《嗣永帛書》Ⅱ를 토대로 하면서 남인의 반서학적 입장에서 정치적 견해를 의도적으로 담아 작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4. 노론측 《東麟錄》의 〈邪賊 嗣永帛書〉 

 

1) 서지적 검토 

 

효종부터 철종까지의 당쟁관계 사실을 모은 《東麟錄》은 편자 미상의 필사본으로 35×23cm, 29책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15640) 있고, 각 면마다 楷書로 10행씩, 1행 22자 내외로 붓이 아닌 펜으로 필사되어 있다. 상소 · 통문 · 서간 등 자료 중심으로 되어 있는 각 책의 끝에 더러 昭和 3년(1928) 7월 朴囑託이 校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에 서로 다른, 혹은 동일한 것을 轉寫合綴한 것으로 보인다.33) 19-20책에는 정조의 사후, 김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고, 시파와 노론이 집권하는 내용들이 기재되어 있다. 이 부분은 斥邪 관계가 중심이 되며,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의 여러 과정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34) 이러한 점을 통해서 볼 때 대체로 정권을 장악했던 척사파 노론의 입장에 있던 인물이 엮은 것이다. 이 규장각본에는 일련 번호가 매겨져 있으나 내용의 순서가 뒤바뀌어져 있는 것을 이이화가 내용 순서에 따라 재편집하여 1985년에 여강 출판사에서 영인하였다. 이 이본 백서는 영인본인 《朝鮮黨爭關係資料集》14, 東麟錄(下) 제25책, pp.741-754에 실려 있다. 이 백서는 옮기는 과정에서 실수하여 지운 글자의 흔적이 33군데나 보인다. 제목은 〈邪賊嗣永帛書〉인데,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황사영을 邪賊으로 규정하였다. 편집자가 자료를 모아 놓은 것이기 때문인지 자신의 견해가 담긴 서문 및 발문이 없다. 

 

2) 원본과의 내용 비교 

 

이 이본 백서는 다른 이본 백서들과 같이 원본과는 다르게 〈而罪人等又不能臨危捨生〉(1행)을 〈而罪人等又不能臨危捨命〉(217b-9)으로 통용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문맥상 필요하다고 여겨서 〈神父自乙卯後〉(77행)를 〈神父自乙卯以後〉(233b-4)으로 글자를 첨가하였다. 〈三月中神父自首 未知往於誰家因何自首幷未詳自首日字〉(79행)를〈三月中神父自首 未知往於何處〉(234a-5)로 문장을 축약을 하였다. 〈而爲汝三之姻親〉(14행)을 〈爲汝三之姻親〉(221a-6)으로 어조사를, 〈中西敎友先生們〉(5행)을 〈中西敎友們〉(218b-6)으로 단어를 생략하기도 하였다. 〈崔多?之從弟〉(22행)을〈崔多?之從弟 名必悌者〉(223a-9)으로, 〈且鐸徵之事〉(13행)를 〈且鐸徵 必是文謨敎號之事〉(13행, 220b-10)로 하는 등 교회 용어(세례명과 성직자 호칭)가 생소한 노론들을 위한 세주를 달았고,〈亦不知爲誰 似是崔伯多祿等〉(32행)을 〈亦不知爲誰 似是崔多?〉(225b-7)으로 하는 등 교회 용어 등을 잘못 기록한 것도 있다. 그리고 탈자와 오자 등이 많이 있다. 

 

특징적인 부분은 〈己未冬淸州之窘(此以下落行) 不幸被誘背敎〉(6행, 219a-3)이라고 하였다. 이는 앞 문장에서 청주박해(己未, 1799)를 설명하다가 〈此以下落行〉라고 했듯이 최필공에 대한 기록인 43자가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35) 즉 그가 본 이본에는 최필공에 대한 해당 부분이 없다는 것이다. 

 

《闢衛編》의 백서를 제외한 다른 이본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노론 벽파의 입장이 잘 드러나는 것도 있다. 즉 은언군 관계 자료가(69-70행) 실려 있다는 점이다.36) 노론측에서 보면 은언군과 그의 가족들이 천주교를 믿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사실이 죄인인 思悼世子의 후손임을 강조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이본 백서들과는 다르게 서양 선박 영입 방안을 제시하면서 황사영이 한 말인 〈王欲納一人而免全國之罰乎抑欲喪全國而不納一人乎〉(111행)를 〈王欲納一人乎〉(241b-10)로 하였다. 이는 국가에 대한 협박으로 여겨졌기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의 말을 생략한 것이다. 그리고 〈大淸兵陷江都〉(60행)를 〈先祖尙容 官爲國相 崇德丙子 大淸兵入江都 尙容義不屈 自焚死〉(229b-6)로 丙子胡亂 당시 강화도가 청 군대에 의해 침략을 받아 함락되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감추기 위해 陷(함락하다)을 다른 이본들과는 다르게 入(들어오다)으로 기록하였다.37) 또한 〈願皇上斷而行之 以此大意遷就其說務期合於中朝時勢〉(106행)를 〈願皇上斷而行之〉(240b-8)로 하였다. 이것은 중국 황제에게 교회재건 방안 중의 하나로 內服監護策을 제시하면서 말하되 중국의 형편에 맞게 조절해서 청해야 한다고 말한 세주 부분을 생략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알 수 있듯이 편집자는 남인측 이본 백서, 특히 《嗣永帛書》 Ⅰ을 참조해 가며 필사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단어 및 문장을 첨가와 생략을 통해서 노론의 입장을 담은 백서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5. 결론 

 

황사영은 신유박해로 말미암은 처참한 교회 현실에 대한 슬픔과 교회를 위한 강한 사명감으로 백서를 작성하였다. 그는 국가의 부당한 박해로 말미암아 죄 없이 죽어간 신자들과 주문모 신부의 순교 사실을 언급한 이후 교회의 현실적인 어려운 상황과 박해의 종식에 관한 강한 열망을 표현하였다. 그는 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들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백서는 북경으로 보내지기 전에 압수되었다. 

 

그 후 백서는 의금부 당국자에 의해 필사된 이래 여러 이본 백서들이 나오게 되었다. 남인측 이본 백서를 보면, 작자 미상의 남인들이 쓴 필사본으로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 《嗣永帛書》Ⅰ · Ⅱ와 이만채의 《闢衛編》에 실린 〈嗣永帛書〉 백서가 있고, 노론측 이본 백서는 《東麟錄》의 〈邪賊嗣永帛書〉가 있다. 

 

이본 백서들이 공통적으로 다소 차이는 있지만 통용자를 사용하고, 탈자와 오자가 있으며, 어조사 등을 생략하거나 축약 및 착오를 일으켜 반복하기도 하였다. 인명 표기를 바르게 한 것도 있으나 세례명과 교회 용어 등을 잘못 기록하기도 하였고, 독자들을 위해 나름대로 세주를 달기도 하였다. 이것은 필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실수이기도 하고, 잘못 이해한 부분도 있다. 이와 같은 부분은 제일 먼저 쓰여진 것으로 보여 지는 《嗣永帛書》 Ⅰ, 《東麟錄》의 〈邪賊 嗣永帛書〉, 《嗣永帛書》 Ⅱ, 그리고 후대에 쓰여진 《闢衛編》에 실린 백서 순서대로 많다. 그리고 정조가 對서학 정책을 추진하면서 적극 보호해 주었던 천주교 관련 남인들의 신앙생활과 죽음을 생략하였고, 천주교에 관심을 두었다가 떠난 이들에 대해 종교적인 용어를 생략하기도 하였다. 

 

《嗣永帛書》 Ⅱ와 《闢衛編》백서는 신자들에 대한 칭찬(32-33, 66-68, 71-72행)을 생략하였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부분(21-22, 25, 29, 54, 70, 72, 76행)을 생략하였다. 그리고 초서로 쓰여진 《嗣永帛書》 Ⅰ은 그대로 옮겨 적으려고 해서인지 자신의 의견을 담은 세주가 다른 남인측 이본 백서보다 적다. 해서로 쓰여진 《嗣永帛書》 Ⅱ는 황사영 조상과 중국 관리에 대한 기록이 자세한 것을 통해서 볼 때 남인 벽파 관료가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석인본인 《闢衛編》백서는 은언군과 가족들(부인과 며느리) 부분을 모두 생략하였다. 남인측 이본 백서에는 중국을 언급할 때 외교적 언사로 높이는 글자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東麟錄》의 백서는 황사영을 邪賊으로 규정하였고, 《嗣永帛書》 Ⅰ · Ⅱ와 같이 은언군 관계 자료를 기록하였다. 이는 노론측에서 보면 은언군과 그의 가족들이 천주교를 믿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사실이 죄인인 사도세자의 후손임을 강조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편집자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국가에 대한 협박으로 여겨지는 황사영의 말을 생략하였고, 강화도가 침략되었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서 볼 때 원본이 아니라 이본이 백서를 이해하는 기준이 되었고, 이본 저자의 생각이 황사영의 생각으로 잘못 인식되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이본 백서의 비교 연구는 앞으로 백서 원문 텍스트를 철저하게 검토하고 연구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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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사영은 1909년경에 가서 伸寃되었다(《大韓每日申報》 1909년 2월 17일자, 2면 〈잡보〉. ‘황씨쳥원 고진? 황?영씨가 지난 신유년에 셔학으로 몰녀서 죽은지라 년젼에 은샤지뎐으로 탕텩신원?엿으나 그때에 뎍물?뎐장은 찻지 못?고로 그 현손 황원익씨가 탁지부 정래국에 루? 청원?엿다더라’(이 자료는 동아대 이훈상 교수의 도움을 받았다) ; 黃祐世(83세, 1981년 당시)는 조부인 黃翼熙 아래서 개화기 때 외무대신이던 金允植이 글공부를 하였고, 그의 도움으로 황사영의 죄를 풀어줄 것을 고종에게 청해 허락을 받은 바 있다고 하였다(한국천주교창립 200주년 기념 인천교구 준비위원회, 《성지》 Ⅱ, 성요셉출판사 · 동림문화사, 1982, 159쪽). 

 

2) 황사영의 아들은 정부기록에 景漢으로(《承政院日記》 권 98, 순조원년 11월 7일 庚戌), 《昌原黃氏世譜》(1914, 절두산 순교 기념관 소장) 족보에는 景憲으로 기록되어 있다. 족보의 기록이 더 정확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1957년 족보(丁酉譜)에는 황사영의 아들이 秉直으로, 1979년 족보에는 병직과 경헌으로 되어 있다. 2005년 10월 31일 배론에서 만난 후손 黃世煥씨는 필자에게 “1957년 收譜時 장손계열이 시대흐름과 세상 물정에 밝지 못함을 알고 監司公파들이 종손지위를 찬탈하여 그들의 자손인 병직을 判尹公파인 황사영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이 사실을 알고 1979년에 수정요구를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끈질긴 노력의 결과로 2003년 1월 16일 종손 황인범이 판윤공파 종손의 사임과 더불어 감사공파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1914년 족보에 의거하여 경헌을 종손으로 복위하였다”라고 증언하였다. 다음의 가계도는《昌原黃氏世譜》(丁巳譜, 1856 ; 甲寅譜(1914)와 《南譜》 등을 토대로 만들었다. 

〈황사영 알렉시오의 가계도〉(11세 黃應老 이하) 

應老 ― 潤河 ― ?― 晙 ― 在正 ― 錫範― 嗣永 ― 敬憲 ― 建燮 ― 周賢 ― 軫益

                                                                                                    ― 奎益

                                                                              ― 泰燮 ― 周弼 ― 箕益 

 

3) 정명련과 황경헌의 유배 이후의 삶은 김구정, 《가톨릭시보》874~880호, 1973년 7월 15일~9월 2일자 ; 김병준, 〈황사영 처자의 귀양길〉, 《교회와 역사》 25호, 한국교회사연구소, 1977, 2쪽 참조 ; 현요안, 〈황사영과 정난주의 순교영성〉, 광주가톨릭대 석사학위 논문, 1997, 14~17쪽 참조 ; 1909년에 황사영의 손자를 방문한 제주 본당 라크루(M. Lacrouts, 具瑪瑟) 신부는 신앙 때문에 현실적으로 가난의 고통을 참아 받은 그들에게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보내준 480프랑으로 집 한 채와 밭을 사주었다. 이 사실을 그해 10월 5일 샤르즈뵈프(J.M.E. Chargeboeuf, 宋德望) 신부에게 편지(1909년 10월 5일자)를 보내 알렸으며, 샤르즈뵈프 신부는 프랑스 리옹에서 발간되던 전교지 Les Missions Catholiques에 소개하였다(Les Missions Catholiques, XLI, Lyon, 1909, 577~578쪽 ; 〈라크루 신부의 1910년 7월 17일자 연말보고서〉, 《초기 본당과 성직자들의 서한 (1) - 라크루 신부 편》, 제주복음 전래 100년사 자료집 3집, 천주교 제주교구, 1997, 253쪽). 

 

4) 백서에 대한 연구 성과는 이원순, 〈한국천주교회사의 연구사적 추적〉, 《한국천주교회사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379~380쪽 ; 허동현, 〈황사영백서에 대한 근현대 학계의 평가〉, 《신유박해와 황사영백서사건》,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2003, 155~229쪽 참조. 

 

5) 최근의 연구로 박현모는 백서에 나타난 용어에 주목하여 언어적 맥락을 살펴보았고, 정치 내적인 또는 정치적인 기준에 의거해서 ‘정치적 차원에서의 정체성 위기’를 경험한 황사영의 백서를 재평가하였다. 이는 정치사의 입장에서 조명한 장점이 있지만, 사용한 텍스트가 원본 백서가 아닌 《闢衛編》에 실린 이본 백서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박현모, 〈세도 정치기 조선 지식인의 정체성 위기 : 황사영 백서를 중심으로〉, 《동방학지》 123, 연세대, 2004, 99~130쪽). 

 

6) 여진천, 〈황사영 <백서>의 이본 연구〉, 《민족사와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 _, 〈황사영 백서의 원본과 이본에 관한 연구〉, 서강대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5의 일부분을 수정 보완하였다. 

 

7) 《純祖實錄》권3, 순조 원년 10월 3일 丙午 《承政院日記》 권97, 순조 원년 10월 5일 戊申. 

 

8) 〈純廟朝辛酉年間 洋學之輩 送帛書于洋夷 使之入寇而事露伏誅 帛書尙留義禁府 不軌謀逆 不法之事 歲亡匿死 言?匿洋夷之亡命避死者〉(《斥邪說》(1870) (김근수, 〈척사문헌 소고〉, 《한국학》 19, 영신아카데미 한국학연구소, 1978 겨울, 42, 91쪽) ; 〈嗣永帛書〉 Ⅱ에 〈自鞫廳入 啓?於金吾文書櫃中〉, 《闢衛編》에 〈自鞫廳入啓後 ?置文書櫃中〉라고 되어 있다. 

 

9) 뮈텔 주교는 1924년 12월 8일에 쓴 글에서 “지금부터 30년 전에 당국의 散?로 잃어버렸던 것이나 吾人은 天幸으로 이 귀중한 문서를 도로 찾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LETTRE d'Alexandre Hoang a Mgr. DE GOUVEA, Eveue de Pekin(1801), Hongkong, M.E.P, 서문) ; 뮈텔 주교는 小田省吾에게 “年次는 명확치 않으나 甲午(1894) 또는 乙未(1895) 경 의금부의 고서찰이 소각될 일이 있었는데, 이때 同主敎의 友人이 본문서가 그 가운데 있음을 알고 이를 구하여 주교에게 보내왔다”고 말하였다(小田省吾, 〈李朝의 朋黨을 略述하여 천주교 박해에 이름〉, 《한국천주교회사논문집》 2, 한국교회사연구소, 1977, 180~181쪽). 

 

10) 《교회와 역사》345호,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년 1월호, 51, 53쪽 ; 352호, 45~46쪽. 

 

11) 위의 책, 352호, 47쪽 ; 353호, 49~50쪽 ; 354호, 39쪽 ; 356호, 40쪽 ; 356호, 44쪽 ; 357호, 48, 49, 51쪽 ; 358호, 43, 47쪽. 

 

12) 한국천주교순교자현양회, 〈황사영백서 彫刻 영인판 원본〉, 《가톨릭 청년》 17권 7호, 1963, 7월, 39~40쪽 ; 최석우 신부는 백서의 행방을 찾기 위해 1966년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하는 자료 전시를 기획하면서 직접 혹은 신학교 교수였던 부쉐 신부 · 유학 중인 서 요한 신부 등을 통하여 노력하였고, 1967년 교구장 명의로 교황청 국무성 장관 대리 델아콰 주교에게 찾을 수 있도록 서한을 보내기도 하였으나 찾을 수 없었다(《교회와 역사》 17호, 한국교회사연구소, 1977, 2쪽). 그런데 최석우 신부는 1983년 7월 19일 교황청 민속 박물관을 방문하여 백서를 직접 확인하였다. 민속 박물관은 비오 11세 교황의 요청으로 민속학자 슈미트(Schmidt)가 설립한 것인데, 1925년 라테란에서 개최된 포교 박람회에 각 국에서 보내온 자료들을 바탕으로 소장하고 있다. 이 박물관에 소장된 한국 관계 자료는 약 170점이고, 백서는 소장 목록 번호가 9420이다(《교회와 역사》 98호, 1983, 6쪽 ; 《교회와 역사》 348호, 2004, 겉표지 뒷면). 

 

13) 이본이란 “同一類의 서적으로 傳來에 의하여 字句가 달라진 책”이다. 이본의 발생은 어떤 Original한 서적이 轉寫되는 동안이나 改版되는 경우 생기는 사실로서 삼단계가 있다. 1) 오차가 있다고 인정키 어려운 원전과 다소의 相違가 있는 것. 2) 단순한 오차라 할 수 있겠으나 원형을 推知할 수 있는 것. 3) 복잡한 오차가 있어 원형 추정에 다른 근거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3)의 경우는 단순한 부주의나 무의식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 성립에 있어서 사정이나 혹은 恣意的 또는 意識的으로 본문이 개작된 것을 말한다(유택일, 《한국문헌학연구》, 아세아문화사, 1989, 8쪽). 이 글은 3)의 입장에서 이본을 다룬 것이다. 

 

14) 임금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기 위하여 문장 중 한 글자를 비워 둔 것을 間字 혹은 空隔이라 한다. 그러나 황사영은 당시 관례를 벗어나 천주 · 주교 · 신부 등을 나타내는 단어 앞에서는 間字하였다. 다른 이본들에서는 당시 관례대로 하였다. 

 

15) 현계흠에 대해 《嗣永帛書》 Ⅱ와 《東麟錄》에는 세주가 없고, 《闢衛編》에는 〈敎友卽玄啓欽?惑之說見上結案〉라고 되어 있다. 현계흠은 1797년 8월 27일부터 9월 10일까지 동래 용당포 앞바다에 漂到한 영국인 브로우톤(Broughton)이 이끄는 프로비던스(Providence) 호 탐험선을 살펴보았다. 그는 1801년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李亨元은 馳啓에서 〈異國船一隻 漂到東來龍塘浦前洋 … 船長十八把 廣七把 左右下杉板 俱以銅鐵片鋪之 堅緻精完 點水不透云〉라고 하였다(《正祖實錄》 권47, 정조 21년 9월 6일 壬申) ; 《邪學罪人 嗣永等 推案》, 1801년 10월 9일 황사영 공초 ; 김원모, 《근대 한미관계사》, 철학과 현실사, 1992, 81~82쪽 ; _, 〈19세기 한영 항해문화교류와 조선의 해금정책〉, 《문화사학》 21호, 한국문화사연구회, 2004, 957~ 968쪽 참조. 

 

16) 1801년 2월 초까지 포도대장은 北人係의 南人李儒敬(1747-?)이다(《正祖實錄》 권42, 정조 19년 3월 4일 乙卯). 

 

17) 홍희운에 의해 백서가 조작된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이만채, 《벽위편》 권5, 329쪽, 2∼4행) ; 이에 대해 山口正之는 1818년경에 이 말이 유포되었다고 하였다(《朝鮮西敎史》, 雄山閣, 1967, 94~96쪽 참조). 

 

18) 주문모 신부에 대한 판결을 보면 당시 일반 사회는 주문모 신부의 이러한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罪人周文謨 渠以異類凶醜 自稱神父敎主 ??匿影 ?誘許多男女 說法授洗 無非矯誣等說 七八年之間 漸染訛誤 如水益深〉(《辛酉邪獄罪人金?等推案》, 1801년 4월 17일, 19일). 

 

19) 1636년(인조 14년)에 왕족들은 강화도로 피신하였는데, 청군은 강화도를 함락시켰다. 이때 인조는 三田渡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을 하였는데, 이를 병자호란이라고 한다. 

 

20) 천하를 왕기를 중심으로 하여 주위를 순차적으로 나눈 다섯 구역이 五服이다. 上古에는 甸服, 侯服, 綏服, 要服, 荒服으로 나누었고, 周代에는 侯服, 甸服, 男服, 采服, 衛服으로 하였는데, 한 복은 각각 5백 리이다. 여기서 內服이란 要服과 采服 이내를 말하는 것으로, 중국과 똑같이 여겼다는 뜻이다. 또한 의식주(문화)가 섞이는 단계이다(《邪學罪人 嗣永等 推案》, 1801년 10월 9일, 황사영 공초. 〈問曰 所謂內服云云者何也 供曰 欲與彼國混其衣服 互相往來之計也〉 ; 백서 108행. 〈若爲內服 則奸臣之??子息 李氏之聲勢倍勝 奚但聖敎之安 亦是國家之福〉). 이 내복이란 용어는 〈討邪奏文〉에도 나온다(〈伏念小邦 僻處海隅 沐皇恩 歲執常貢 自同內服凡國有大事 悉行傳价馳奏 實出至誠 事大之義〉 [《純祖實錄》 권3, 순조원년 10월 27일 庚午]). 

 

21) 攻西系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는 차기진이다. 攻西派는 ‘서학을 正學인 유학에 비교하여 邪學으로 비판하면서 서학을 수용한 것으로 간주되던 인물들을 공격하였다’는 의미인데, 뚜렷하게 하나의 파벌을 형성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공서계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차기진, 《조선후기의 서학과 척사론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16쪽). 

 

22) 정조는 형조에 강이천 등을 체포하여 조사하게 하면서〈其中金健淳 文正金尙憲之奉祀孫 故參判金亮行之孫云 得此梁楚 卽渠之罪 而見金鼎國書納之紙 則健淳似無眞贓 只緣年少無定志且其家不貧 以至爲彛天輩誘惑憑藉 自陷一套 誠可哀 不足罪也 ?子於故參判 有不可忘之事 豈不能庇一孫乎〉라고 김건순을 두둔하여 주었다(《正祖實錄》 권47, 정조 21년 11월 11일 丙子) ; 김건순은 金尙憲의 繼後祀孫이었다. 

 

23) 강이천의 문집인 《重菴稿》의 발문을 쓴 이는 정조의 심복인 徐有隣의 아들인 徐俊輔이고, 서준보의 사위는 고종 연간 영의정을 지낸 趙斗淳이었다. 강이천은 고종 연간 우의정을 지낸 姜?의 從伯父였다(박광용, 〈정조대 천주교회와의 중암 강이천의 사상〉, 《민족사와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120쪽). 

 

24) 추국을 담당한 승정원에서 일기 형태로 추국 내용을 별도로 정리한 것이다. 규장각본은 《各司謄錄》78 : 《推鞫日記》, 국사편찬위원회, 1994에서 영인 · 간행하였다. 《推鞫日記》 8에는 신유박해 추국 내용의 일부인 1801년 2월 9일부터 3월 10일까지의 국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서종태, 〈추안 및 국안의 천주교 관계 자료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 《조선후기 천주교신자 재판기록》 상, 39~40쪽). 그런데 황사영 백서 사건을 다룬 10월 국문 내용은 남아 있지 않다. 

 

25) 이 중에서 若望은 元景道(요한, 1774-1801)를 말한다. 《東麟錄》에도 〈若望 名不出〉(10행)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鐸徵 姓名不出〉(13행)은 《東麟錄》에 〈鐸徵 必是文謨敎號〉라고 하였고, 《闢衛編》에 〈鐸徵 鐸徵名不出然下有鐸徵到東之語必是文謨〉라고 하였다. 

 

26) 英學士는 1799년에 온 副使 內閣學士兼禮部侍郞 英和를 말하는 것이다. 당시 上使는 散秩大臣 田國榮이었고, 이 사신 일행은 1799년 12월 11일 북경을 출발하여 1800년 1월 15일 압록강을 건넜고, 1월 26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해 1월 29일 回程에 올라 2월 11일 압록강을 건넜다(〈詔勅錄〉, 《同文彙考》 二, 국사편찬위원회, 1978, 1766쪽) ; 의주부윤 金箕象은 “부사 英和는 나이가 올해 30세인데, 고 예부상서 德保의 아들로서 성품이 명민하고 문필에 익숙하여 본래부터 이름이 나서 꽤나 총애를 받는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정조실록》 권53, 정조 24년 1월 19일 壬申) ; 《闢衛編》에는 〈英學士名桂〉라고 되어 있다. 

 

27) 정조는 주문모 신부를 붙잡으려 하였는데, 壯勇衛와 蓮府 別軍職과 宣傳官으로 하여금 기미를 몰래 살피게 하였다.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되자, 〈命忠淸監司 金履永 兵使鄭忠達 廉察按治染邪者 一一刑治〉게 하였고, 兵使 정충달에게 조화진을 소개시켜 주었다. 靑橋 趙氏 조화진은 〈爲傳密諭?治邪學〉하는 이로써, 筆工이라 칭하고, 行商이라 칭하면서 신자들을 만나 천주교를 배우는 척, 손으로 십자를 그으며 사서를 외었다. 이렇게 얻은 정보를 음성현감 盧?에게 연락하게 하였다. 그 〈其內浦諸邪 則或付海美鎭營治之 戊午己未兩年間 刑斃者 不下百餘人〉라고 하였다. 결국 조화진은 1801년에 감옥에 여러 달 갇혔는데, 조정에서 그 일을 알 사람이 없었으므로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戊己兩年湖西治邪〉, 《闢衛編》 권4). 

 

28) 黃衡은 성종 17년(1486) 10월에 武科重試에 뽑히고, 18년에 上護軍, 24년 8월 18일에 “용건하고 학식이 있어서 邊將이 될만한 자”라고 칭찬을 받았다. 연산군 원년 3월에 의주목사, 12년 7월 함경북도 절도사로 왕의 신임을 얻어 資憲大夫를 제수받았다. 중종 3년 11월에 경상도 병마절도사, 11년 6월에 함경북도 兵使, 10월에 知中樞府事, 12년 5월에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5년(1520) 12월 13일 죽자 중종은 “나라 일에 힘을 다하였고, 내가 매우 신뢰하였던 사람이다. 이제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니 애도의 뜻을 금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29) 黃晙은 영조 45년(1769) 5월 28일에 耆老科에서 76세로 수위를 차지하였다. 51년 12월에 회혼례를 지냈고, 정조 6년(1782) 8월 18일에 89세로 공조판서가 되었다. 

 

30) 홍이섭, 〈闢衛編 편집자 이기경의 전기사료〉, 《최현배 선생 환갑기념논문집》, 1954, 523~545쪽 ; 《홍이섭전집》 3, 연세대 출판부, 1994, 84~98쪽에 재수록) ; 최석우, 〈벽위편의 형성〉, 《한국천주교회사의 탐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253~264쪽 참조 ; 김시준 역주, 《천주교전교박해사》, 국제고전교육협회, 1984. 

 

31) 이만채, 《벽위편》 권5, 360쪽-3∼4 〈邪賊輩 綢繆之姦 狀?釀之凶謀 備悉於此 故略刪 而詳載之〉 

 

32)《嗣永帛書》 Ⅱ에서는 〈池撒巴 禮山驛卒池洪池〉(67행, 11b-6)라고 하였다. ‘지홍’으로 알려진 지황(사바, 1767~1795)은 1793년 박 요한과 함께 북경에 가서 구베아(A. de Gouvea, 湯士選) 주교를 만났고, 이듬해 국경에 가서 주문모 신부 입국을 도왔다. 그는 1795년 5월 12일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다. 

 

33) 이정섭, 〈東麟錄〉, 《한국민족문화백과 대사전》 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216쪽 참조. 

 

34) 이이화, 〈13집(동린록) 내용개략〉, 《조선당쟁관계자료집》 13, 여강출판사, 1985, 7~11쪽 참조. 

 

35) 다음 문장이 생략되어 있다〈遂有己未冬淸州之窘(湖中熱心敎友死亡?盡 崔多?必恭者中路人也 性直志毅 仗義疎財 熱心最盛 有卓?不?之風 辛亥之窘)不幸被誘背敎〉. 

 

36) 1849년에 철종이 즉위하면서 철종의 조부가 되는 은언군 죽음에 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邪學罪人 嗣永等 推案》에서 도삭되었다. 즉 〈(先王有庶兄一人 其子謀逆而)死 (先王放之江島 擧國請誅 而先王不許 其妻及子婦 留在舊宮) 辛亥壬子 … (賜藥)自盡 (江島)罪人 … 幷(賜藥)殺之〉(69~70행, 《邪學罪人 嗣永等 推案》, 768쪽-2∼7행). 이는 정치적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철종대의 역사인식이 반영된 것이다(이태진 · 홍순민, 〈《日省錄》 刀削의 실상과 경위〉, 《韓國文化》 10,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1989, 78~82쪽 참조. 은언군은 전주이씨 사이에서 全溪大院君(1785~1841)을, 전계대원군은 龍城府大夫人 廉氏 사이에서 철종(1831~1863)을 낳았다.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안동김씨 金祖淳의 딸로 1802년 순조의 왕비가 되었다. 1849년 헌종이 승하하자 순원왕후는 영조의 유일한 혈맥이라는 이유로 은언군의 손자인 철종을 즉위시켰고, 철종의 先代 은언군이 역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사실을 그냥 둘 수가 없어 도삭을 명하였던 것이다. 이는 철종 집안에 대한 사면 · 복권작업이며, 은언군과 관련된 모든 문서를 없애버려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화근을 뿌리째 뽑아버리겠다는 조치인 것이다). 

 

37) 노론의 핵심인물인 金尙憲(1570~1652)의 형인 김상용(1561~1637)은 1590년(선조 23)에 문과에 급제, 대사헌 · 형조판서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 시 청군이 강화도를 함락할 즈음 南門 누각에 올라 화약을 터뜨려 焚死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추모 · 현창은 고양되어, 그는 三學士와 더불어 병자호란을 대표하는 순절자가 되었다(이경구, 《조선후기 安東 金門 연구》, 일지사, 2007, 102~104쪽 참조). 

 

[교회사연구 제28집, 2007년 6월, 여진천(천주교 배론 성지)]

 

※ 본문 중에 ? 표시가 된 곳은 물음표가 있을 곳 외에는 현 편집기에서 지원하지 않는 한자 등이 있는 자리입니다. 정확한 내용은 첨부 파일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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