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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안중근 의사 이야기: 겨레의 발전을 위해서는 교육이 반드시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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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2-16 ㅣ No.1485

안중근 의사 이야기


“겨레의 발전을 위해서는 교육이 반드시 필요”

 

 

원고 청탁을 받고 얼마쯤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어쩌면 아주 단편적인 증언이라도 안 의사와 관련된 사실의 기록에 조금이나마 참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몇 자 적어본다.

 

필자는 어려서부터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책상머리에 놓아두고 공부하며 자랐다. 그건 필자의 어머니(김세실金世實, 구명 병숙炳淑)가 안 의사와 집안으로 매우 각별한 사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진은 필자가 1971년 로마 유학에서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당시 출범한 안 의사 기념관에 기증했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 사진은 안 의사의 거사 전 사진으로 정장 차림으로 찍은 상반신 독사진 중 유일하게 국내에 남아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편엽서 크기만한 흑백 사진으로 오랜 세월 탓에 빛이 조금 바랬을 뿐 탁상용 프레임에 넣어 보관했기에 상태가 아주 좋아 안 의사의 당당하고 근엄하면서도 편안한 사진 속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어린 시절, 그러니까 중학생이 되고 나서 안 의사 순국 기념일에 열린 추도식에 참석했던 기억 또한 새롭다. 당시 하얀 소복 차림의 어머니와 함께 참석한 추도식은 명동성당 강당에서 참으로 조촐하게 치러졌다. 60여 년 전 일이긴 해도 공식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처음이어서 얼마쯤 호기심도 있었던 터라 구체적인 내용까지는 아니더라도 뚜렷이 남아있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본다.

 

우선 실내가 콘크리트 바닥이었기 때문인지 적잖이 추웠던 것 같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어쩌면 당시 정치적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참석자들도 많지 않아서 더 추웠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필자의 기억으로 그때 단상에는 조병옥 박사, 장면 박사 부인 등 귀빈들이 자리했었다. 지금도 뚜렷이 기억나는 것은 당시 야당 민주당의 지도자가 된 조병옥 박사의 추도사 내용 중 한 대목이다. “안중근 의사의 추도식을 번듯하게 격에 맞는 장소 하나 찾지 못한 채 이렇게 초라하게 치를 수밖에 없는 것은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게 다 이승만 정권이 도량이 좁고 무례하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 생일과 날짜가 겹친다고 이럴 수가 있느냐?”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게다가 어머니에게 듣기로는 안 의사의 따님인 현생(賢生) 여사는 당시 집권 자유당의 끈질긴 입당 요청을 결연히 거부하고 장면 박사가 속한 민주당을 후원하는 입장이었으니 이런 사정을 미루어 짐작할 만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어려서 이러한 사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 수 없었으나 우리 나라와 교회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점점 그 뜻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특히 이 대통령 생일인 3월 26일에는 「대통령 찬가」가 라디오를 통해 울려 퍼지던 시절, 공공 기관은 말할 것도 없고 어느 민간 건물주가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대통령의 생일에 그것도 집권당에 호의적이지 않은 따님이 갖고자 하는 아버지 안 의사의 추도식에 선뜻 장소를 내어주려고 했을까? 당시 서울교구 노기남 주교의 배려로 명동성당 강당에서 안 의사 추도식을 거행한 것은 언뜻 생각하기에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길 수도 있겠으나 그런 일이 노 주교가 서슬이 시퍼런 자유당 정권의 눈치나 보고 부당한 처사에 맞설 뜻이 없었다면 과연 가능하였을까 생각해 보면 예삿일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언젠가 안 의사의 외손녀 황은주(黃恩珠)는 필자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1월 자기 어머니와 두 자매가 상해에서 귀국했을 때 노 주교가 계성여고 기숙사의 큰 방 하나를 임시 거처로 마련해주며 극진히 돌봐줬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안 의사의 따님이 두 딸을 데리고 아버지가 그토록 간절히 독립을 염원하던 고국에 돌아왔으나 아무도 돌봐줄 이 없던 때 노 주교는 말하자면 이들을 “보호할 반석이자 바위요 성곽”(시편 71, 3 참조)이었던 셈이다.

 

노 주교는 또한 이들의 요청에 따라 1947년 3월 26일 안중근(토마스) 순국 37 주년 추모 대례(大禮) 연미사를 집전하기도 하였다. 그의 강론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아 안타까운 일이지만, 안 의사 추모 미사를 이렇게 장엄하게 집전한 것 자체가 안 의사를 살인을 저지른 중죄인으로 보고 그에게 마지막 고해성사를 볼 기회조차 막으려 했던 그의 전 전임자 뮈텔 대주교와는 정반대로 안 의사가 깊은 신심을 지닌 신앙인으로 순국한 것임을 한국 천주교회가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이후 1960년 대 초에 안중근 의사 숭모회가 발족되고 1970년에는 남산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세워졌으며 안 의사가 신앙인으로서 목숨 바쳐 실천한 겨레와 교회 사랑을 기리며 본받기 위한 사업들이 교회와 사회에서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을 보니 금석지감을 금할 수 없다.

 

2010년 3월 26일 안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가 광복회를 중심으로 유교 식으로 추도식을 거행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안 의사의 외손녀 황은주 여사는 필자와 함께 광복회 회장을 찾아가 안 의사가 열심한 가톨릭 신자였던 만큼 추도식을 천주교식으로 거행해 주도록 간곡히 요청한 적이 있다. 안타깝게도 이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반 예법에 따른 추도식 거행이라면 모를까 안 의사의 종교가 있는데 이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와는 별도로 황 여사는 필자를 통해 정진석 추기경에게 2010년 3월 26일 안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 미사를 명동성당에서 집전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를 기꺼이 수락한 정 추기경은 이 날 저녁 미사 강론을 통해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은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정당방위였음을 천명하였다. 이는 안 의사가 재판정에서 직접 자신은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으로 독립전쟁 중 적의 괴수를 처단 응징했다.”고 밝힌 의거 동기가 정당함을 확인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안 의사의 행위는 침략국에 맞선 정당방위적 전쟁 중 적군의 수뇌를 살해한 것이므로 가톨릭교회의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 추기경은 또한 “안 의사의 삶은 신앙을 빼놓고는 바르게 이해할 수 없으며 오늘 이 추모 미사는 안 의사의 가톨릭 신자 신분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뮈텔 대주교의 사대(四代) 후임인 정 추기경이 그것도 바로 주교좌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통해 문자 그대로 공식적으로 확인한 것은 매우 뜻 있는 일이었다. 이 미사에는 안 의사의 두 외손녀 황은주 여사와 동생 은실(恩實) 여사, 그리고 필자도 참석하였다.

 

이왕 안 의사에 대한 글을 적게 된 기회이니 어렸을 적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도 한 토막 덧붙여볼까 한다. 그것은 필자의 어머니도 당신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로 안 의사는 자주 처가에 들러 처남과 함께 사냥 나가기를 좋아했는데 집에 돌아올 때 보면 안 의사는 새를 많이 잡아 새끼줄 같은 걸로 엮어 어깨에 둘러메고 오고 같이 갔던 처남은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채 빈손으로 오는 일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안 의사가 총도 남달리 잘 쏘았지만 매우 가정적이었고 처남과는 각별히 돈독한 우애를 나눴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 처남(김능권金能權)이 안 의사가 거사 몇 해 전 구국 인재를 양성하려고 진남포에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세울 때 그 취지에 적극 찬동하며 적지 않은 자금을 보태기도 한 그 인물이다. 그는 1946년 3월 26일 해방 후 처음으로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안중근 순국 36주기 추도회에 김구(金九), 김규식(金奎植), 조소앙(趙素昻)과 함께 참석하기도 하였다.

 

안중근 의사가 우리 겨레의 발전을 위해서는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확신을 갖고 교육 사업에 투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뮈텔 주교를 찾아가 대학 교육에 교회가 나서줄 것을 요청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비록 뮈텔 주교는 이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안 의사의 그러한 확신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언제나 타당하다.

 

이 일화를 적으며 생각나는 것이 있다. 그것은 1948년 파리에서 개최된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교황청의 도움으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받은 다음 정부의 대표단장이던 장면 박사가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바티칸으로 가 비오 12세 교황을 알현한 자리에서 한국에 가톨릭 대학을 설립하도록 교황에게 도움을 청해 서강대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 박사의 이러한 요청은 당시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안 의사의 대학 설립의 꿈이 훗날 이렇게 이뤄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안 의사는 오늘 자기의 일상 생활 현장에서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믿음을 살며 좀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해야 할 우리 모두에게 “더욱 잘 믿기 위해 더 배워야 함(intelligo ut credam)”을 깨우쳐주는 귀감 또한 되지 않을까?

 

[평신도, 2021년 겨울(71호), 한홍순 토마스(한국평협 전 회장, 주교황청대사관 전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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