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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무관심의 벽을 넘어: 왜 무관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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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0-20 ㅣ No.1269

[경향 돋보기 - 무관심의 벽을 넘어] 왜 무관심한가



한국을 고요한 나라라고 지칭했는데 언제부터인지 역동적인 나라라고 일컫기 시작했다. 그만큼 한국이 급격하게 변화를 일구어낸 놀라운 나라라는 뜻일 것이다. 사실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세계 최빈국 수준이던 나라가 다른 나라에서 수백 년에 걸쳐 이룩한 경제성장을 불과 수십 년 만에 이루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성과 못지않게 많은 후유증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고속성장을 이루면서 우리는 뭐든지 ‘하면 된다.’는 불굴의 신념을 갖고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우리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다지지 못했다. 신사숙녀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적어도 삼대에 걸쳐 이루어진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오늘날의 우리 의식구조나 실생활에서 비상식적인 것이 너무 많이 발견된다. 사람들이 얼마나 즉흥적이고 무책임하며 임기응변이던가.

난데없이 다리가 뚝 끊어진다던지, 백화점이 붕괴되어 많은 인명피해를 낸 사건은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그럴 때마다 이러한 사태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을 거듭하였건만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까맣게 잊고 지내기 일쑤다. 작년에 발생한 세월호 침몰사건에서 우리는 또 얼마나 좌절했으며 부끄러워했던가. 올해는 일급병원이라고 하는 곳에서 메르스 전염병을 도리어 확산시켜 방역체계의 허술함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어디 그뿐이랴. 핵을 다루는 발전소에 납품된 부속품들이 정품이 아니라고 하고, 안보를 책임져야 하는 군대에서는 방산비리로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모든 것은 안전 불감증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불감증의 뿌리는 바로 무관심이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내 일이 아니면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가 우리 사회를 어지럽히는 정도를 넘어서서 휘청거리게 하고 있다. 어느덧 온 국민에게 만연해 있다시피 한 이러한 무관심은 막바지에 다다랐다고 본다.


무관심의 원인

무엇 때문에 우리는 그토록 무관심해진 것일까?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너와 나의 경계를 지키지 않고 너무 간섭한다고 아우성쳤던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사적 공간이나 일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는 게 기본예의라고 사람들을 계도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이제는 냉담하리만큼 남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괜한 시간 낭비할 것 없다며 자기 일에나 몰두하기 바쁘다. 그렇게 하는 것이 현대화된 깔끔하고 세련된 태도라는 인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이제 사회문제를 낳고 있다. 옆에서 누가 비명을 질러도, 주위에서 부당한 일이 벌어져도 나의 일이 아니면 상관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넘겨버리고 있다. 그러다 자기 자신이 그러한 지경에 빠져들고 있는데도 말이다. 어쩌다 이리 되었을까?


동서양 문화의 충돌

첫째, 서양문화의 유입으로 전통문화의 급격한 몰락을 꼽을 수 있다. 본디 전쟁에서 지면 패자의 가치는 모두 다 나쁜 것으로 내몰리고, 승자의 가치는 다 좋은 것으로 미화된다고 한다. 청나라가 영국에 패한 이후 중국의 모든 문물은 구태의연한 것을 넘어 나쁜 것으로까지 취급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던 우리 사회도 큰 변화를 맞이했다.

그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던 집단주의 사상과 유교적 가치는 삽시간에 구식의 전형으로 내몰려 타파되었다. 특히 유교적 영향의 전통문화는 개인의 권리나 특성을 억압하는 것으로 취급되는 과정에서 제례의식은 물론 부모에 대한 효 사상까지도 팽개쳐졌다. 그 대신 우리 생활에는 신식으로 불리는 개인주의 사상이나 그리스도교 사상이 거침없이 파고들면서 개인의 권리나 자율성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 사회는 두 가닥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융화시키지 못하고 가정이나 사회 전반에서 크고 작은 갈등을 무수히 불러일으켰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대 간에는 갈등이 있게 마련인데, 이러한 동양문화와 서양문화의 충돌은 우리 사회에서 세대 간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다. 결과적으로 서로에게 귀를 틀어막고 사는 형상을 낳게 하였다. 곧 서로를 배타시하는 입장에서 상대의 입장에 대해 과도하게 무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최단기간 최고속 경제성장

둘째, 급격한 산업화 물결 때문이라고 본다.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가난할 때 도리어 서로 의지하고 돕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경제력이 생기면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려 하고 자신의 취향을 고수하려 드는 개인주의적 경향을 띤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보릿고개를 겪던 시절에는 그래도 이웃집 굴뚝에 연기가 나는지 안 나는지를 살펴보았다고 한다. 혹시 죽이라도 끓여먹을 게 없으면 뭐라도 하나 가져다주는 게 사람 사는 도리라고 믿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가난을 벗어나고자 하는 일념 아래 몇 차례의 경제개발 계획을 이행하며 우리는 앞만 보고 달렸다.

그 덕택에 우리는 짧은 기간에 고속의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주위를 돌아다볼 겨를도 없이 지낸 게 사실이다. 그런 때문인지 이제 우리는 이웃집에 어떤 사람이 사는지조차 모르고 그저 자기만 잘 살면 된다는 식이 되어버렸다.

어느덧 우리나라는 개발도상 국가가 아니라 중진국을 넘어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고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목표치를 달성하려고 또는 남들을 이기려고 얼마나 애써야 했는가. 한데 아이러니한 것은 예전과는 달리 혼자 벌어서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그만큼 소비 또한 커졌다는 것이다. 아무튼 오늘날에는 여성들도 일하기에 정신없다. 이유야 자기성취든 자기실현이든 우리 사회는 그렇게 돌아가기 시작했고, 그 결과 자녀마저도 부모의 주관심이 되지 못하는 실정에 와있다.


내 새끼 제일주의

셋째, 혈연에 대한 과도한 집착도 현상에 한몫했다고 본다. 지난날에는 고향이니 집성촌이니 하는 개념이 강하게 자리를 잡아 ‘나’보다는 ‘우리’를 중시하는 문화가 팽배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믿을 수 있는 대상은 오로지 직계가족인 핏줄뿐이라는 생각을 다지게 되었다. 이러한 혈족에 대한 집착은 내집단과 외집단의 차별을 만들어내는 근원이 되었다.

그 결과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이 자신의 가족만 아는 이기적인 색깔을 띠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나 몰라라 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경향이 일반화되어 우리 사회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서도 무심함을 넘어 심한 차별을 가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고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갑작스럽게 생겨난 고아들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어느 정도 살만해졌는데도 버려지는 아이들이 꽤 많았다. 그것은 핏줄에 대한 집착이 낳은 반작용으로 자기 자식이 아니면 거두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자들이 재혼할 경우 불이익이 너무 많아 하는 수 없이 아이를 버려야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의식 때문에 다른 나라보다 국내 입양이 저조한 편이며, 내 새끼 제일주의가 심한 나머지 남의 자식의 성과에 대해 질투는 할지언정 진정으로 칭찬하지는 못한다고 한다.


서열문화의 병폐

넷째, 우리 사회의 서열문화도 무관심을 자아냈다고 본다. 우리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으레 상대방의 나이에 대해 궁금해한다. 나이를 캐묻는 것이 결례 같으면 학번이라도 물어 상대의 나이가 자신보다 위인지 아래인지를 알아야 마음을 놓는다. 이렇게 하는 것은 인간관계를 수평적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맺는 관습 때문이다. 상대가 자기보다 나이가 많으면 윗사람으로 대접해야 결례가 아니라고 믿는다. 이러한 연유로 사람들은 이웃 간에도 서로 모른 척하며 지내기 일쑤다. 같은 아파트에 살며 엘리베이터에서 늘 마주쳐도 눈인사조차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일단 통성명을 하고 나면 서열을 정해 처신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나이에 대한 의식 때문인지 대학교에서도 재수나 삼수를 하고 입학한 학생들은 대체로 대학생활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자기는 1학년이지만 친구가 3학년이라면, 그 친구의 친구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곤란해한다. 선배로 불러야 할지 아니면 그냥 이름을 불러야 할지 난감해 하다가 아예 자리를 피하기 일쑤다. 이러한 현상은 직장에서 상사나 선임자가 자기보다 나이가 어릴 때 심적으로 부담을 느낀 나머지 사적인 자리를 피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심지어 직장에서 후배가 자기를 제치고 상사로 승진하면 서열문화에 길들여진 나머지 견디기 어려워 퇴직하기도 한다. 다양한 관점에서 인정할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오로지 나이만으로 서열을 정하려는 경직성 때문이다.


학업에 대한 지나친 경쟁의 산물

다섯째, 학업에 대한 과도한 경쟁이 사람들을 메마르게 했다. 특히 한국전쟁 직후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우리 사회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잘 살아보자는 일념 아래 허리띠를 졸라맸다. 더구나 그 당시에는 신분제도가 무너진 상태에서 중산층으로의 진입은 오로지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그리하여 이 땅의 부모들은 자녀에 대한 교육만큼은 양보할 수 없는 지상과제로 삼았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단시간에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만큼의 고속성장을 이루었다. 그것도 다른 자원 없이 오직 인적 자원 하나만으로 말이다. 이러한 성과는 전적으로 교육 덕분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의 위상을 그토록 눈부시게 끌어올린 교육도 지나치게 과열되다 보니 폐단을 낳고 있는 게 사실이다. 오늘날 많은 부모가 자녀의 성적에 지나치게 극성이고, 자녀는 키가 제대로 자라지 못할 정도로 잠을 줄여가면서까지 성적에 매달리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어떻게 친구들을 사귀고, 건강한 호기심을 키우며,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가지겠는가.

그러한 덕목은 저 먼 나라의 이야기이며 오로지 자신의 성적 내지는 성취만 아는 협소한 인간으로 커갈 것이 분명하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았다가는 지상과제로 여기는 좋은 대학에 진학하지 못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미 아무리 해도 부모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는 아이들은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 상태에 놓여있다. 한마디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루저(loser)’의 상태에 진입한 아이들이 우리 사회에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이런 이들이 어찌 사회에 대해 건강한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겠는가.


자아실현 욕구를 위한 동기화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으로 말미암아 우리 사회는 오늘날 지나치게 자신만 아는 이기주의 상태에 빠져있다. 하지만 삶이란 자신과 주변 환경이 함께 전진해야 윤택해지는 것이지, 어느 하나라도 뒤처지면 그만큼 낙후되고 마는 성질의 것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더 이상 외형적 팽창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질적인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Maslow)는 사람을 욕구의 존재로 파악하고 위계적인 단계를 밟으며 발전한다고 하였다. 그의 욕구(동기) 단계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우선적으로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려 드는 ‘생리적 욕구’ 단계에 열중한다고 한다. 이것이 채워져야 그다음 단계인 안정이나 보호를 중시하는 ‘안전의 욕구’로 이동한다고 하였다. 또 다시 그것이 채워지면 소속감이나 사랑과 같은 ‘사회적 욕구’를 향해 움직인다고 한다. 그런 다음 다시 자존감이나 지위와 같은 ‘존경의 욕구’로 나갈 수 있다고 한다. 그러고는 마침내 최종의 단계인 ‘자아실현 욕구’를 위해 동기화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서 우리의 현 상태를 살펴보면, 그동안 우리가 이루어낸 것은 초보단계인 ‘생리적 욕구’나 ‘안전의 욕구’ 수준에 그친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도 가난에 대한 반작용, 곧 먹고사는 일에 최우선적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열풍은 우리에게 많은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다주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에 머무르는 한 그동안 우리가 애써 이룬 경제성장의 빛도 퇴색할 게 뻔하다. 이미 우리 사회 곳곳에는 여러 형태의 그늘이 생겨나고 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좀 더 나은 단계인 ‘사회적 욕구’나 ‘존경의 욕구’ 단계로 발돋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계속 현 상태에 머무른다면 고착을 뜻하는 것으로, 이는 병리현상으로서 증상을 불러일으킨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자신의 일부로 맞이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사회는 조만간 병들어 우리의 안위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곧, 이제 주위에 대한 관심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의무라는 사실을 깊이 새겨야 한다는 말이다.

* 장성숙 - 가톨릭대학교 심리학과의 상담교수이며, 극동상담심리연구원의 소장을 맡고 있다. 「그래도 사람이 좋다」, 「무엇이 사람보다 좋으리」, 「한국인의 심리상담 이야기」, 「사람에게 사람이 필요하다」 등을 펴냈다.

[경향잡지, 2015년 10월호, 장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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