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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930년대 가톨릭소년의 발간과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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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5-16 ㅣ No.690

[특집 2009년도 심포지엄] 성 베네딕도회의 한국 선교와 문화 활동


1930년대 《가톨릭少年》의 발간과 운영

 

 

1. 머리말 

2. 연길교구의 소년 운동과 《탈시시오회보》
3. 《가톨릭少年》의 발간
4. 《가톨릭少年》의 운영
5. 《가톨릭少年》의 내용
6. 맺는말


1. 머리말

《가톨릭少年》이라는 이름의 잡지는 두 종류가 있다. 천주교 延吉敎區에서 1936년부터 1938년까지 3년 동안 간행한 아동 잡지가 그 하나이고, 서울대교구에서 1960년부터 1972년까지 간행하다가 《소년》으로 개제되어 지금까지 발간되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본고는 전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1930년대에 연길교구에서 발간된 《가톨릭소년》은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의 중앙도서관, 그리고 雅丹文庫와 아동 문학 전공의 李在徹 교수 등이 한두 호 또는 몇 호를 소장한 것으로 알려졌을 뿐, 그 전반적인 내용에 대하여서는 알 수 없었다. 마침 성 베네딕도회에서 독일 오틸리엔 본원에 소장된 《가톨릭소년》의 원본을 빌려와 한국 진출 100주년을 맞으며 공개하게 되어, 그 대체적인 사항을 알 수 있게 되었다. 1936년 4월호로 창간된 《가톨릭소년》은 통권 28호인 1938년 8월호로 폐간되었는데, 현재 확인하지 못한 것은 2개호이다.1)
 
이 잡지는 한국아동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실제 《가톨릭소년》에 대한 관심은 아동문학계에서 보여 왔다.2) 또 잡지 실물을 볼 수 없어 본격적인 논의가 없었다.3) 이 글에서는 그 간행에 관련된 문제와 내용을 살피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으로 연길교구의 소년 운동이라든가, 천주교회의 아동 문학에 대한 이해, 그리고 베네딕도회의 문서 선교 사업 등이 어느 정도 밝혀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특히 자료와 관련지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李箱의 동시 한 편이 실렸다는 새로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尹東柱의 동시가 여러 편 게재되었으나, 모두 알려진 것들이었다. 전체적인 자료가 소개되면, 문학계 특히 아동문학계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가톨릭소년》에 관련된 전반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데에 만족할 것이다.


2. 연길교구의 소년 운동과 《탈시시오회보》

《가톨릭소년》 창간호에 실린 사장 裵光被(Balduin Appelmann) 신부의 〈창간사〉를 보면,

더욱이 재작년 전조선주교회의 때에는 이 소년 잡지 간행의 부탁과 재촉을 이 간도 연길교구에서 받게 되엿든 것입니다.

이 연길교구 안에는 이미 五년 전부터 탈시시오 少年회 연합회이 회보가 발행되어오는 터입니다. 이제 와서 연길교구장이시며 본사 총장이신 白주교 각하께서 모든 이의 열망을 채우사 이 탈시시오 연합회보를 전조선의 소년소녀들을 위한 잡지 《가톨릭少年》으로 변경하시기를 주저치 않으사 만은 물질과 정신을 히생하시게 되엇습니다.

라고 하였다. 연길교구의 탈시시오 소년회 연합회가 1931년에 조직되어 여러 해 회보를 발행해 왔는데, 그 회보 《탈시시오연합회보》를 개편하여 《가톨릭소년》을 창간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배경으로 1934년 전조선주교회의의 권유를 들고 있었다. 1934년 8월의 주교회의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가 찾아지지 않아, 주교회의의 권유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아동용 간행물의 필요에 대하여 주교회의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간행을 연길교구에 맡기고자 하였음은 추측할 수 있다. 그것은 두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하나는 가톨릭교회가 아동을 위한 간행물의 필요성을 인정하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미 1934년에 이르면 연길교구의 소년 운동과 그 기관지의 역할이 한국 천주교회 전체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결국 《가톨릭소년》의 간행은 연길교구의 소년 운동과 무관하지 않았고, 그 소년 운동은 바로 탈시시오회의 활동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탈시시오 소년회는 1931년 정초 배광피 신부가 소년들의 덕성 함양과 아울러 소년들을 성직의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이전부터 龍井에 있던 보미사회, 즉 服事會를 개편하여 조직한 단체였다고 한다. 저간의 사정을 보면,

…현재 용정 본당에 주임 신부 겸 전연길 탈시시오 연합 소년회에 총재로 있는 배광피 신부는 一九三一년 정초에 소년들의 덕성 함양과 함께 그들을 장차 성직의 길로 인도하려는 목적으로 재래 용정에 잇던 보미사회를 개조하야 탈시시오회를 조직하었다. 이 회는 의외에 또는 단시일 내에 장족의 세로 발전하여감을 본 백 주교 각하께서 가톨릭 소년 운동을 규모적으로 할 목적으로 각 지방 교회대 안 탈시시오회의 창립을 명령하였다. 그 후에 각처에서도 잘 되어감으로 고 부감독 박 신부주의 주선으로 거액의 경비를 써가며 제一회 소년 대회를 대령동에서 개최하는 동시에 정식으로 연길 탈시시오 연합 소년회의 창립 대회식을 성황리에 맛치고 즉시로 로마 탈시시오회에 가맹 청원서를 제출하었는데…4)

라고 하였다. 이 설명대로라면 탈시시오회는 백 신부의 노력으로 시작되었고, 이어 그 성장에 관심을 가진 교구장 白化東(Theodor Breher) 신부(1934년 아빠스, 1937년 주교)가 교구 내 성당에 탈시시오회의 설립을 지시하였으며, 아울러 부교구장 朴(Konrad Rapp) 신부의 지원으로 일정한 궤도에 올랐다는 것이다.

탈시시오회는 1905년 로마에서 에질리오 왈젤리라는 청년 신부가 주도하여 조직한 소년 단체로, 성체 공경과 禮典 운동, 초대 교회의 고고적 성물 연구, 덕행 수행을 목적으로 하고, 3 · 4세기 로마의 소년 순교자로 알려진 탈시시오(Tharsicius)를 주보 성인으로 삼고 있었다. 이 성인은 복사와 첫 영성체를 하는 어린이들의 수호 성인이기도 하였다.

용정의 복사회가 개편되어 시작된 탈시시오회는 교구장의 지원을 받으며 곧 간도 전체로 확대되어갔고, 연합회가 만들어졌다. 1931년 8월에는 3일 동안 大領洞에서 제1회 연길 탈시시오 연합 소년 대회가 개최될 만큼, 짧은 기간 동안 성장하였다. 이 대회에 참석한 소년들이 181명에 달하였고, 용정 · 팔도구 · 두도구 · 영암촌 · 대령동 · 명월구 등 각 지역에서 참가하였던 것이다. 이 신심 단체의 활동은 전례 중심으로 되어 있었다.

…會員은 每日彌撒에 勤實하고 熱情 있게 參禮하며 聖體朝拜를 자조함은 勿論이너미와 每月 數三次式 團體로 告解領聖體하며 重要한 祝日에는 ‘베스페라스’(夕課經) 日課를 團體로 唱하며 特히 四旬節과 將臨節 같은 때에는 모든 禮節을 完整하게 擧行하야 一般敎友들에게 큰 感動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敎理學習에 熱中하며 童話會, 討論會, 歌劇 聖劇 等을 隨時로 開催하며 旅行遠足 같은 少年에게 가장 趣味 있는 見學과 陸上競技도 각금 있는 것이다.…5)

이처럼 탈시시오회가 소년들의 전례와 영성 활동을 강조한 것은 소년이 사회 · 종교 · 국가의 희망이어서, 이들이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나는 것이 바로 사회 · 종교 · 국가의 흥망성쇠와 직결된다고 본 까닭이었다. 따라서 연길교구의 전도와 장래가 바로 이들 소년 소녀에게 달려있다는 생각이었다. 동시에 1920 · 30년대에 공산주의가 확산되어, 가톨릭교회는 공산주의의 이론이나 활동에 매우 비판적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당시 가톨릭교회에서 간행하던 《경향잡지》나 《가톨릭청년》에 반공산주의의 주장이 자주 게재된 것도 그러한 까닭이었다. 특히 연길교구는 지역적으로 소련과 지척에 놓였고, 중국 공산당 세력이 증대되어 공산주의가 크게 확산되고 있었으며, 비적들의 출몰이 계속되던 곳이었다. 가톨릭교회가 소년 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은 무엇보다도 그러한 현실적인 배경과 무관하지 않았다. 아울러 문서 선교에 대한 관심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연길 탈시시오 소년회 연합회가 결성되어 1931년 8월 제1회 연합 대회를 성황리에 마치게 되자, 이를 주도한 부교구장 박 신부와 배광피 신부는 그 기관지의 역할을 할 회보를 만들기로 하였다.6) 《탈시시오회보》가 정확하게 언제부터 발간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1935년까지 4, 5년간 월간으로 발행되었다는 것으로 미루어,7) 1931년 말부터 간행하였을 것이다. 처음에는 배 신부 혼자 작업하여 16쪽 분량으로 발행되었다가, 한국인 교사와 학생들의 조력을 받은 뒤에는 분량이 30쪽으로 늘어났고, 용정의 개신교 출판사에서 400부를 인쇄하여 월 2회 발행되었다고 한다.8) 다른 기록에 의하면, 처음에는 등사판으로 출판되다가 활판으로 바뀌었으며, 용정의 인쇄소를 거쳐 덕원 신학교 인쇄소에서 격월로 발행되었다는 것이다.9) 정리해 보면, 《탈시시오회보》는 1931년 말에 창간되었는데, 처음에는 등사판으로 16쪽 분량으로 간행한 것 같다. 이후 활판 30쪽 전후의 분량으로 증면되었고, 인쇄는 용정의 개신교 출판사를 거쳐 덕원 신학교 인쇄소를 이용했던 것이다. 다만 간행 주기는 등사판일 때에는 월간과 월 2회 정도, 활판은 격월간이 아니었을까 한다.

《탈시시오회보》의 내용은 확인되지 않지만, 언 듯 개편된 《가톨릭소년》과 크게는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그 자체가 탈시시오회의 기관지였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내용이 적지 않았을 것 같다. 예컨대 각 지역의 활동을 보고하는 회보의 성격이 강조되었을 것이고, 또 탈시시오회 자체가 복사회를 개편한 만큼 종교적인 측면이 두드러지지 않았을까 한다. 또한 지역적으로 연길교구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전국을 대상으로 한 《가톨릭소년》과는 내용, 특히 종교성과 필진 등에서도 차별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학생 문예나 아동 문학과 관련된 부분은 《탈시시오회보》와 《가톨릭소년》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무튼 연길교구의 소년 운동으로 탈시시오회는 1934년 8월 용정에서 제2회 연합 대회를 개최할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소년 200명을 포함하여 후원 인원까지 총 300여 명이 참가하여, 8월 6일부터 10일까지 집회일 · 수양일 2일 · 보고 및 운동일 · 원족일 · 해산일의 순서로 진행되었다.10) 뿐만 아니라 소녀들로 조직된 데레사회와 중등학교 이상의 연령 여성들의 세시리아회도 역시 덕육 · 지육 · 체육의 향상과 신앙 생활의 철저를 목적으로 하여, 탈시시오 소년회의 남매 기관으로 역시 禮典 운동에 진력하였다.11)


3. 《가톨릭少年》의 발간

연길 탈시시오 소년회 연합회의 기관지 《탈시시오회보》를 개편하여 《가톨릭소년》을 발행하게 되자, 회보가 발행되던 滿洲國 間島省 延吉市 용정 천주당에 사무실을 두고 잡지 창간 준비에 들어갔다. 사장은 용정 천주교회의 주임이자 연길 탈시시오 소년회 연합회 총재인 배광피 신부가 맡았으며, 연길교구장 백화동 아빠스가 총장으로 추대되고, 부주교 徐相烈(Viktorin Zeileis) 신부와 연길 해성학교 교장 具傑根(Kanisius Kugelgen) 신부, 頭道溝 천주교회 韓興烈(Ambrosius Hafner) 신부가 고문을 맡았다.12) 부주교는 교구의 출판위원이기도 하였고, 재정이나 행정적인 문제에 협조하였을 것이다. 다른 두 신부는 원고나 편집에 일정한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잡지 창간 준비는 1935년 12월중 연길교구 주교관에서 3층 회의실에서 총장 이하 사장, 고문, 주간 등이 모여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는데,13) 본래 잡지명은 《警鐘》으로 할 예정이었다.14) 제호에 종교적인 색채를 없앨 의도였던 것 같으나, 결국 《가톨릭소년》이라는 가톨릭교회의 간행물임을 명백히 밝힌 제호가 선택되었다. 이는 이후 이 잡지가 지향하는 바를 확실하게 하고자 한 의지로 보인다. 기본적으로 이 잡지는 가톨릭교회의 관점에서 아동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아울러 연길교구 지역이 개신교가 매우 왕성하게 성장하고 있었던 것도 그러한 제호로 결정하는 한 요인이었을 것 같다. 그럼에도 창간사에서 천명하였듯이, “탈시시오연합회보를 전조선의 소년 소녀들을 위한 잡지 《가톨릭少年》으로 변경”하였음을 강조하였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가톨릭소년》을 전국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일반아동 잡지로 간행하겠다는 뜻이면서도, 동시에 전국 아동을 가톨릭 신자로 만들고자 한다는 뜻으로도 이해되는 중의적인 표현이었다. 이러한 점이 오히려 이 잡지의 성격을 이해하는 하나의 척도가 될 수도 있었다. 일반 아동 잡지를 추구하면서도, 가톨릭 전도를 목적으로 하였던 것이다.

편집주간으로는 黃德泳이 선임되었는데, 전임으로 일을 맡은 것이 그 혼자였다. 그는 德源神學校 신학생 출신으로 그 자신이 《가톨릭소년》에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한 것으로 미루어, 아동문학에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 같다. 확인되지는 않지만, 황덕영은 《탈시시오회보》의 간행에도 관여하지 않았을까 한다. 전직 신학생인 그가 편집 책임을 맡은 것은 문학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과 함께, 이 잡지가 가톨릭교회의 관점을 대변하여야 하기 때문에 교리나 신학에 대한 일정한 이해가 필요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잡지 간행은 2월을 목표하고 진행되었지만, 《가톨릭소년》은 1936년 3월 하순에 발간이 되어 4월호로 창간되었다. 인쇄가 지연되어 간기는 3월로 되었지만, 실제 간행은 4월호였던 것이다.

처음 예정은 이 북쪽 나라에 버들개지 피고 잔디 파릇파릇 돋는 사월초승에 이 삼호를 띠우려든 것이 인쇄 관계로 창간호가 사월호로 되고 보니 삼호는 녹음(綠陰)호가 되고 말엇습니다.15)

따라서 제2호는 간기를 4월로 하였지만 5월호로 발간되었고, 제3호는 6월호로 간행되었다. 2개월이나 잡지 발간이 늦어진 것은 인쇄를 용정에서 하지 않고 서울 西大門町 2丁目 139번지에 위치한 주식회사 彰文社에 맡겼기 때문이었다. 서울과 용정을 오가며 편집이 이루어졌으므로, 예상보다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창문사라는 출판사 겸 인쇄소는 본래 1923년 1월 한국 기독교계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문화의 보급을 목적으로 李商在를 사장으로 하여 설립한 기관이었다.16) 이 기관은 1934년 중에 申興雨가 대표로 있다가 具滋爀이라는 인물이 인수하여 운영되고 있었는데,17) 그는 YMCA 총무로 있던 具滋玉의 형이었다.18)

《가톨릭소년》 창간호를 위하여 경향의 인사들에게 축사를 부탁하였다. 서울의 李秉岐, 평양의 康安肅, 대구의 崔正福, 덕원의 金鉉?, 회령의 朴智秉, 덕원의 金成煥, 간도의 金龍泰가 그들이었다. 저명한 문인인 이병기를 제외하면, 대체로 가톨릭교회와 관련된 문인들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강안숙은 이후 《가톨릭소년》에 몇 차례 글을 실었는데, 교육가로 소개되었다. 또 김성환은 덕원 신학교의 신학생으로 1940년 사제 서품을 받는 인물로, 가톨릭 운동과 문서 선교 등에 관련된 글을 《神友》나 《가톨릭청년》 등에 게재한 바 있었다. 최정복은 대구교구의 지도적인 인물이었고, 강안숙이나 김성환과 《가톨릭청년》에 원고를 싣기도 하였다. 이병기의 축사가 1935년 12월 7일자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창간을 준비는 그보다 일찍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창간호의 표지는 張勃이 그렸는데, 한복을 입은 소년이 한 손에는 뛰어나가는 말을 잡고 다른 한 손에는 십자가를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가톨릭교회에서 발행한다는 것이 표지에서부터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후에도 장발은 1936년에 9월까지 5차례에 걸쳐 표지를 맡았다. 6월호에는 성당을 遠景으로 한 학생의 모습을, 7월호에는 화분에 물을 주는 소년을, 8월호에는 정물을, 9월호에는 학생복의 소년을 표지로 그렸다. 창간호의 표지를 제외한다면, 가톨릭교회를 상징하는 부분을 없애 소년 잡지의 성격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잘 알려진 대로 장발은 형 張勉과 함께 미국에 유학하여 뉴욕 국립 디자인 학교와 컬럼비아 대학교 사범대학 실용예술학부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여 모교인 휘문 고등보통학교의 미술 교사로 재직하며, 성화 제작에 매진하면서 《가톨릭청년》과 같은 잡지의 표지화도 그린 바 있었다.19)

〈그림 1〉 《가톨릭소년》 창간호 표지 


아무튼 《가톨릭소년》은 대체적인 편집은 용정에서 하였겠지만, 서울에서 단순히 인쇄만 한 것은 아니었다. 창문사는 인쇄소였지만, 1936년 3월 九人會의 동인지 《詩와 小說》도 이곳에서 출판된 것처럼 출판사를 겸하고 있었다. 따라서 창문사에서 편집의 일부분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주간 황덕영의 말로도 확인된다.

본지 인쇄소 창문사 출판부에서는 시인 李箱氏며 화가 具本雄 氏 외에 멫멫 분이 도라 앉아 이 七月호를 꿈여내시노라고 땀방울을 줴뿌리는 광경은 탄복지 않을 수 없엇다20)

즉 창문사 출판부에서 편집도 담당하였는데, 그 일을 李箱과 具本雄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은 바로 〈烏瞰圖〉와 〈날개〉로 이름 높은 시인이며 소설가인, 본명이 金海卿인 바로 그였다. 구본웅은 흔히 꼽추화가로 알려졌던 이상의 오랜 친구였고, 창문사는 바로 구본웅의 부친이 운영하였다. 구본웅 자신이 창문사의 대주주이기도 하였는데,21) 다방 등의 운영에 실패한 이상을 그가 창문사 편집부에 취직을 시킨 것이었다. 이상이 창문사 출판부에서 일한 것은 그가 《시와 소설》 창간호의 〈編輯後記〉에서,

전부터 몇 번 궁리가 있었으나 여의치 못해 그럭저럭 해오던 일이 이번에 이렇게 탁방이 나서 會員들은 모두 기뻐한다. 위선 畵友 具本雄氏에게 마음으로 치사해야 한다. 쓰고 싶은 것을 써라 채[책]을낭 내 만들어주마 해서 세상에 흔이 있는 별별 글탄 하나 격지 않고 깨끗이 誕生했다. 일후도 딴 걱정 없을 것은 勿論이다. 깨끗하다니 말이지 겉 表지에서 뒷 表지까지 예서 더할 수 있으랴 보면 알게다…

차차 페이지도 늘일 작정이다. 會員 밖의ㅅ 분 것도 勿論 실닌다. 誌面 벨으는 것은 의논껏 하고 編輯만 印刷所 關係上 李箱이 맡아보기로 한다. 그것도 역 의논 후ㅅ 일이지만…

《詩와 小說》에 대한 일체 通信은 彰文社出版部 李箱 안테 하면 된다.(李箱)라고 한 언급에서도 확인된다. 《시와 소설》의 편집 겸 발행인은 구본웅이었다. 《가톨릭소년》은 창문사에서 1936년 말까지, 즉 연길교구에 인쇄소가 만들어져 자체 인쇄를 할 때까지 인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22) 

 

〈그림 2〉 이상이 그린 《가톨릭소년》 1936년 5월호 표지

 

이상은 《가톨릭소년》 제2호의 표지를 담당하였고, 동시를 게재하기도 하였다.23) 구본웅은 1936년 9월호까지 삽화를 담당하며, 글이나 만화를 실었다. 이상이 1936년 7월호 이후에도 편집에 관여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24) 구본웅은 《가톨릭소년》이 창문사에서 인쇄를 하던 1936년 9월호까지 삽화를 맡고 있었다.


4. 《가톨릭少年》의 운영

《가톨릭소년》은 3,500부를 간행하여, 만주와 국내의 가톨릭계 학교에 보내졌다고 한다.25) 1936년 11월호에는 ‘현상문제’가 실렸는데, 《가톨릭소년》의 독자수와 잡지가 가장 많이 팔리는 곳과 그 부수를 맞추는 문제였다. 그런데 1937년 1월호에 당선자 발표는 있지만, 그 정답은 밝히지 않아 정확한 독자의 숫자 등을 알 수 없다. 다만 1만여 명의 독자가 있다는 언급이 있으므로,26) 적어도 3,500부보다는 훨씬 많은 부수, 거의 1만 부 정도는 판매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35년을 전후하여 기존의 아동 잡지들의 상당수가 폐간되고, 金素雲이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지원을 받아 간행한 《木馬》가 1936년에, 조선일보사에서 尹石重을 편집자로 하여 1937년부터 간행한 《少年》 등이 있었으므로,27) 이들 잡지와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잡지의 표지에는 서력 기원을 사용하였고, 표지 우측의 발행 간기에는 만주국의 연호인 康德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1936년에는 간기에 일본 연호 昭和를 사용하다가, 1937년부터 간기에는 모두 만주국 연호로 통일하였다.

《가톨릭소년》 1936년 10월호에는 속표지에〈特告〉라 하여, “本誌는 날로 成長하야 인제는 權威 잇는 全朝鮮五敎區主敎公議會의 決議로써 全 朝鮮的으로 支持를 받는 公公한 機關紙가 되어슴을 기뻐하는 바입니다”라는 사고가 실렸다. 이 잡지가 주교회의에서 공식적으로 교회 기관지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1936년 6월 12일자로 全鮮主敎會議에서는 5교구 공인 정기 간행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二, 五敎區 公認 定期刊行物에 關한 件
좌긔 출판물은 전선 五교구 공인 정긔간행물로 인정함.
一, 京鄕雜誌 朝鮮敎會 機關紙
一, 가톨릭硏究 平壤敎區 刊行
一, 가톨릭少年 延吉敎區 刊行

이상 三종 정긔간행물 출판에 관하야 일반 성직자들의 협동 완조를 간청한다. 그러나 대금수송(代金收送)에 대하여는 경향잡지만을 성직자들이 책임질 것이다. 이상 출판물의 편집책임은 각기 해당교구 감목들이 질 것이다.28)

《가톨릭소년》을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 기관지로 인정한다는 주교회의의 의결이었다. 그러나 재정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가 없이, 교구장들이 편집 책임을 지는 것으로 되었다. 이 의결은 《가톨릭청년》의 폐간을 가져왔는데, 《가톨릭청년》 1936년 11월호에 실린 〈廢刊에 際하야〉에 의하면, “지금까지 비합법적으로 지내오던 《가톨릭연구》와 《가톨릭소년》이 五교구의 공인 기관으로 승격되는 것이다”라고 지적하였다. 이 문제는 교회 내의 갈등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지만,29) 연길교구에서 간행한 《가톨릭소년》은 교회 내의 합법적 지위를 획득한 것이었다.

이러한 가톨릭교회의 정식 기관지로 성장하며, 자체 인쇄 시설을 준비하고 있던 가톨릭소년사에서는 그 편집을 황덕영 개인에게만 부담지울 수 없었다. 황덕영은 창문사 편집부의 도움을 받아 편집을 맡다가, 이즘에 새로운 편집부원을 충원 받을 수 있었다. 즉 1936년 9월 18일자로 편집부에 趙琯昊가 입사하였던 것이다.30) 조관호는 조선광업회사 文川출장소에 근무 중 메이데이 격문에 관련되어 체포된 바 있던 인물로, 소년문사와 화가로 알려져 있었고 가톨릭을 연구하였다고 한다.31) 1935년 11월부터 1936년 4월까지 동아일보사 高原 지국의 주재기자로도 활동하였으며,32) 가톨릭 관계 잡지에 자주 글을 투고하던 이였다. 《가톨릭소년》에 참여하기 전인 1936년 7월호부터 소년소설 〈새길〉을 연재하고, 동시 〈파랑새〉도 발표한 바 있었다. 따라서 편집을 맡은 그는 표지와 삽화, 또는 필요한 글들을 《가톨릭소년》을 통하여 발표하였다.

1937년 1월호부터 《가톨릭소년》은 연길에 설립된 가톨릭소년사 직영인쇄부에서 인쇄하였다.33) 편집실도 용정에서 연길로 옮겼는데, 그 곳은 연길교구 중앙 본부 관리소가 있어 교회 사용의 발전소를 설치한 다음, 각종 기관을 옮겨왔다. 가톨릭소년사도 편집실과 인쇄부가 延吉街로 이전하였다.34) 그렇지만 별도의 사옥이 있던 것은 아니어서, 1937년 6월경부터 새로 사옥을 짓기 시작하였다.35) 이 사옥이 완성되었다는 기록은 찾아지지 않는다.

인쇄부가 설치된 이후 가톨릭소년사의 상근 직원은 12인이었다.

本社에 명의를 가지고 잇는 임원을 다 합하면 二十名이나 됩니다 마는 날마다 전문으로 일하는 이는 편즙부에 二人 印刷部에 七人 發送部에 三人입니다36)

즉 가톨릭소년사의 직책을 가진 인원은 20명에 이르나, 상근 직원은 편집부에 2인, 인쇄부에 7인, 발송부에 3인이었다. 따라서 제작비 이외에도 인건비가 적지 않게 소요되어, 재정적으로 어려웠다. 잡지 1부에 8전인데, 매월 300원 이상의 적자를 감수해야만 하였다. 매월 3,500부를 간행하였다면, 구독료가 280원에 지나지 않았다. 1만 부를 소화한다고 해도 800원에 불과한데, 구독료가 제대로 걷히지 않아 잡지사에서는 종종 구독료 납부를 종용하기도 하고, 미수금이 있는 경우에는 발송을 중지하겠다는 사고를 게재하기도 하였다.37) 가톨릭소년사에서는 독자의 질문에 답변하면서, “어째 손해가 없겟소이까? 지금은 매월 三百圓 以上의 손해가 납니다”라고,38) 1개월 적자가 300원에 달한다고 밝혔던 것이다. 재정적으로 잡지 간행이 난관에 부닥쳤음을 알 수 있다. 매월 300원의 적자를 해소하려면, 4,000부 이상의 신규 판매가 가능해야만 하였다. 《가톨릭소년》은 매호 菊版 80쪽 전후로 발간되었으며, 창간 초기에는 광고를 포함하면 100쪽 전후인 경우도 있었다.

광고는 대개가 가톨릭교회와 관련된 성당이나 단체, 학교 등이 주를 이루었다. 물론 상점이나 서점 또는 서적 광고도 보이지만, 광고료 수입이 운영에 큰 도움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가톨릭소년사의 지사는 간도에 용정 · 연길 · 도문 · 팔도구 · 두도구, 그리고 진남포 · 평양 · 용천 · 신천의 평안 · 황해도 지역, 북청 · 청진의 함경도 지역, 철원 · 복계(평강)의 강원도 지역에 있었다. 그리고 경상도의 대구와 상주에도 지사가 설치되었다.39) 지사는 모집된 것이었으므로, 일반 서점이나 통신 판매도 가능하여, 지역적으로 간도나 국내뿐 아니라 일본에까지 판매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간도에서 발행되는 지역적인 한계는 이름 있는 아동문학가들도 《가톨릭소년》의 창간을 한참 뒤에나 알았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康承翰 · 韓後男은 몇 달 뒤에, 宋昌一은 원고 청탁을 받은 뒤에서야 그 창간을 알았다고 하였다.40) 또 교회 단체나 관련자들이 맡았을 지사의 활동이 그리 활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청진 지사의 경우에는 200부도 부족하였다는 보고를 해오고 있었다.41)

편집진의 변동도 재정 문제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유는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편집원 조관호는 1937년 11월호를 마지막으로 잡지사를 사임하였다.42) 전 아동문예사 주간 韓相震이 편집을 도와준 것은 그러한 사정 때문이었다.43) 가톨릭소년사에서는 조관호의 후임으로 바로 11월에 吳朔朝를 첫원하였다.44) 오삭조는 덕원 신학교 신학생 출신으로,45) 《가톨릭소년》 1937년 7월호부터 小星이라는 필명으로 〈사랑의 승리〉를 번역하여 연재한 바 있었다.

편집원 문제가 해결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38년 1월 15일자로 주간 황덕영이 잡지사를 사임하는 일이 일어났다.46) 그는 가톨릭소년사를 사임한 뒤에, 奉天市公署에 취직하여 만주국 관리라는 전혀 다른 길로 옮겨갔던 것이다.47) 오삭조가 황덕영의 후임 주간으로 취임하였으나,48) 창간 제2 주년을 앞두고 사원 전체가 교체되었다.

이번 二週年記念號만은 한번 궹장히 하여 여러분을 만족식히려 하엿삽더니 이 記念號를 앞두고 前 社員 全體가 갈리우게 되엇슴으로 그만 보시는 바와 같이 요모양이 되엇습니다.

그러나 五月號부터는 面目을 一新하려 하오니 놀래지는 마소서. 이번 편즙에 各方面으로 도와주신 德源神大學生 金時鐸君에게 眞心으로 감사하는 바입니다. 小星49)

어떠한 이유로 사원 전체가 교체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관호에 이어 황덕영이 사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은 가톨릭소년사의 운영이 순조롭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무엇보다도 재정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톨릭소년》은 1938년 8월호, 통권 제28호로 폐간되었다. 그런데 이 폐간조치는 갑자기 결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8월호에 실린 광고들이 모두 ‘祝 가톨릭少年 發展’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을 뿐 아니라, 오삭조가 집필한 〈편즙후기〉에 방학에 관련된 내용으로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8월호가 조판된 뒤에 갑자기 폐간이 결정되어, 간지의 형태로 사장의 〈本誌廢刊辭〉가 들어갔던 것이다. 이 잡지의 간기는 8월 1일자였지만, 폐간사가 8월 19일로 되어 있으므로 8월 20일 이전에 배부되지는 못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배광피 신부의 폐간사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敬愛하는 本誌 執筆家 諸位 先생任과 밋 本誌 愛讀者 諸位께 眞實로 眞實로 미安하고 섭섭하고 또 쓰라린 消息을 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없기를 哀를 썻고 盡力을 해왓스나 그러나 大勢에는 不得已 하는 수 없엇습니다.

길게 말슴드리지 않겠읍니다. 길게 말슴드린 힘과 용기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八月號로써 本誌 가톨릭少年은 끝을 매잣습니다.

어떠한 理由로 廢刊을 한다는 것도 말슴을 드리지 않겠읍니다. 말슴드리지 않아도 여러분께서는 잘 아시겠음으로.

오직 여러분과 한 가지로 눈물을 흘리며 붓대를 꺽습니다.

先納하신 讀者께는 남은 돈을 全部 返送하여드리겠읍니다. 따라서 滯納되신 분도 생각해주시기 바람니다.

끝으로 여러분의 끝임없는 奮鬪와 勞力을 빔니다.

康德 五年 八月 十九日
가톨릭少年社
社長 裵光被

사장 배 신부는 대세의 부득이함을 들어 잡지의 폐간을 결정하였다고 밝히면서도, 폐간의 이유는 언급하지 않았다. 언급하지 않아도 독자들이 잘 아실 것이라는 단서가 따라 있을 뿐이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재정 문제였을 것이다. 이 문제는 가톨릭소년사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가톨릭소년》의 폐간에 이어 평양교구에서 발간하던 《가톨릭朝鮮》도 그해 12월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는데, 평양교구장 대리 메리놀회의 夫文化(William Booth) 신부는 그 〈廢刊의 辯〉에서 재정적 원인을 가장 큰 이유로 들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부 신부는 한국 교회가 편집진이 기대한 수준까지 이르지 못하였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런데 그는 마지막 부분에서 “머지안은 將來에는 더욱 燦爛하고 더욱 아름다운 새날이 오리라고 確信하고 있음니다. 나나 編輯者나 愛讀者 여러분들이 渴望하고 期待하는 그 기뿜과 希望과 光明의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것임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말을 바라고 기다림으로써 오늘의 이 쓴 잔을 가치 난호아 되씹으며 빛날 明日의 土臺를 닥거야 할 것임니다”라 하였다.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부 신부의 이 폐간사는 《가톨릭조선》의 폐간이 강제된 조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바로 이때가 일제가 神社參拜를 비롯하여 조선어 과목의 폐지 등, 이른바 內鮮一體를 구현하고자 하는 皇民化 정책을 강압적으로 실시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러한 점에서 가톨릭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두 잡지가 몇 달을 사이에 두고 폐간되었다는 사실은, 재정적 이유 이외에 그 배후에 일제의 강제적인 압력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의 기록은 그러한 분위기를 알려 준다.

…조선총독부와 경찰이 청소년과 민중들로 하여금 일본의 정신, 정책 및 전쟁 수행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기고문을 잡지에 받아들이도록 편집부에 요구해왔다. 또한 그들은 이에 상응하는 그림들의 발행을 두둔하였다.…50)

조선총독부가 황민화정책에 부응하는 기사의 게재를 요구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와 함께 《가톨릭소년》의 폐간 이유로 제기되는 것이 일본에서 발행되던 잡지인 《빛》(光)과 관련해서 논의가 있다. 《빛》은 일본에서 1937년 2월 벨기에 출신 파리 외방전교회원인 葛聖烈(Raphael Collard) 신부가 한글로 간행하였는데, 그는 한국에서 2~3년 활동하다가 일본으로 옮겨 주로 재일동포 사목에 진력하며 잡지도 발간하였던 것이다. 아동잡지인 《빛》은 격월간으로 46배판의 크기로 4전 가격에 25,000부를 발행하였다고 한다.51) 이 잡지가 국내에 저가로 뿌려지면서 《가톨릭소년》이 타격을 받아, 서울에서의 통합 발간을 논의하다가 결렬되어 결국 폐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52) 이 점은 현재 확인할 수 없지만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현재 확인되는 《빛》으로 미루어, 이 잡지가 아동만을 대상으로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53)


5. 《가톨릭少年》의 내용

《가톨릭소년》의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창간호를 살펴보는 것이 편리하리라 생각된다. 창간호에는 화보로 총장인 백화동 아빠스와 사장인 배광피 신부, 사옥전경, 그리고 聖畵를 실었다. 읽을거리[讀物]로 동화 · 이야기 · 일화 · 실화 · 우화 · 수신으로 나눠 1편씩을 수록하였고, 소녀 소설로 金獨影의 〈아가다의 죽엄〉, 아동극으로 安壽吉의 〈꽃과 나비〉, 문예란에 康安肅의 시 등과, 方壽龍의 동시를 실었다. 또 소년 문예란을 두어 소년, 소녀들의 투고한 작품을 동화 · 동요 · 동시로 분류하여 게재하였다. 그밖에 ‘과학란’과 ‘만화페이지’가 있었다. 창간호에 실린 〈投稿歡迎〉을 보면, 투고 장르가 소년 소설 · 동화 · 동시 · 동요 · 전설 · 奇談 · 漫談 · 만화 · 趣味讀物 · 소년회 소개 · 우슴꺼리 · 기타로 되어 있었다. 아마도 《탈시시오회보》도 이와 비슷하였을 것이고, 다른 소년 잡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즉 《가톨릭소년》의 지면은 사진 화보를 앞에 배치하고, 아동 문학가의 소설과 동시, 동요, 아동극 등을 비롯한 작품이나 전기, 수필류 등을 수록하였으며, 독자 문단 등의 명칭으로 아동 작품을 게재하였다. 과학 관련 기사나 만화 등도 빠지지 않았다. 또 필요한 경우에는 명사들의 앙케이트를 받아 실었다.

《가톨릭소년》은 전교의 성격을 일정하게 지니고 있었지만, 동시에 아동잡지였다. 따라서 다른 아동잡지들과 다르지 않은 편집이 이루어져야 하였다. 자연 과학에 관련된 상식을 소개하는 ‘과학란’을 두어 사장 배광피 신부가 연재를 맡았지만, 몇 차례 계속되다가 중단되었다. 현상 문제나 숨은 그림 찾기, 퍼즐과 같은 지면은 독자를 끌기 위한 아동 잡지의 일반적인 편집이었다. 또 만화나 삽화의 분량이 적지 않은 것도 같았다. 구본웅이나 조관호 · 李柱訓 · 吳鳳? 등이 만화와 삽화를 맡았다. 전래 동화나 전기, 일화나 笑話 · 실화 등의 표현으로 이야기 거리를 배치한 것이나, 소년 소설 · 소녀 비애 소설 · 소년 탐정 소설 등의 표현으로 소설을 연재한 것도 특별한 편집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가톨릭소년》 편집의 특징은 그 내용에 있었다고 하겠다. 사진 화보가 잡지 매호의 앞에 들어가는데, 그 대부분은 연길교구나 기타 천주교회의 행사나 성당, 교회 관련인물의 사진, 그리고 성화 등이었다. 독일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소신학교 학생들의 일상을 사진으로 소개하기까지 하였다. 독자들이 보내온 개인 사진도 실렸지만, 그 경우에도 이 점은 표지화가 종교적인 분위기를 배제해 간 것과는 달랐다. 물론 전체적으로 종교적인 분위기가 드러나면서도, 개별적인 작품의 상당 부분에서는 그러한 인상을 배제하려는 노력을 보인 것이 인정된다.

그렇지만 가톨릭교회의 전교를 《가톨릭소년》을 통하여 추진하는 일을 등한히 하지는 않았다. 가톨릭이 추구하는 덕목을 갖춘 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글들을 소개한 것이 그러한 시도였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1937년과 1938년에 연재된 〈귀도소년〉이었다. 〈귀도소년〉은 귀도 드 퐁갈랑(Guido de Fontgalland, 1913~1925)이라는 당시 시복 운동이 전개되던 어린이에 대한 전기로, 아이슬란드 출신의 예수회 신부이며 아동 문학가로 저명한 존 스원슨(Jon Svensson)이 1930년 저술한 Die Geschichte des kleinen Guido: Erzahlung fur die katholische Jugend을 번역한 것이었다.54) 번역자인 信園과 申彦化는 덕원 신학교의 신학생으로, 신원이라는 필명은 金成煥이었다.55) 〈귀도소년〉을 연재한 것은, 영성적인 소년을 통하여 소년들을 교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이 잡지가 가톨릭교회에서 간행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가장 효과적인 소년 교화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연재는 1937년 5월호부터 1938년 4월호까지 9회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스원슨 신부의 연재에 감사하는 편지까지 받았던 것이다. 또 〈사랑의 승리〉는 1937년 7월호부터 폐간될 때까지 연재가 끝나지 않았는데, 주간 오삭조가 小星이라는 필명으로 번역하였다. 13세기 십자군 전쟁 시기 베드로 롤라스코(Piet Ronolasco)가 세운 ‘자비의 성모 마리아 수도회’의 수도사와 노예 시장 등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이 또한 같은 목적에서 연재되었다.

《가톨릭소년》이 일반 아동 잡지를 지향하면서도 가톨릭 전도라는 두 가지 목적을 추구하자, 독자의 관점에 따라서는 한 부분이 지나치게 강조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톨릭 전도의 성격이 강하다고 느낀 아동 문학가들이 그 편집 방침에 불만을 토로한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아동극 연구 협회의 金相德은 창간 제2주년을 맞는 1938년 4월호의 축하 앙케이트에서 ‘本誌 創刊의 報를 드르시고 느끼신 感想’의 답변으로,
 
종교색채를 많이 띠웟습니다. 그보다도 우리 대중을 생각해 주십시오. 다만 종교 잡지에 한하지 말고 더 나아가 소년 게몽 운동에 한 기관이 되어주십시오. 처음에도 이런 기대를 가젓습니다.

라고 하였다. 창간 2주년에 이르기까지 종교 색채가 두드러진다는 평가는 결국 《가톨릭소년》을 소년 계몽 운동 기관으로서가 아니라, 종교 잡지로 인식한다는 의미였다. 그 점은 이미 창간 1주년 기념호인 1937년 4월호에도 《가톨릭소년》의 단점으로 지적된 바 있었다. 즉 서울의 보통학교 교원으로 아동 문학가였던 李康世는 “?誌는 너무 敎訓之域에서 버서나지 못한 感이 잇습니다. 그리고 畵報에 宗敎家들의 面影을 거듭내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그림을 뵈여주엇스면 하는 생각이 잇습니다”라고 하였던 것이다.56)

그러나 가톨릭계 인사들의 관점은 달랐다. 김상덕과 같은 앙케이트에 대하여 연길교구 최초의 邦人 사제 가운데 한 사람인 韓允勝 신부는,

이름이 가톨릭소년인 만큼 그 당시에는 敎會 信者 兒童을 대상으로 할 줄 알앗지오. 그러나 요지음 와서는 이름보다 내용이 너무 兒童 文藝만을 모토로 하는 感을 느겻습니다.

이는 본인이 하는 일이 信徒 兒童 指導와 傳道인데서 나온 感想인지는 몰라도 이왕 《가톨릭少年》인바야 그 本意를 더 농후이 드러냇스면 합니다.57)

라고 답변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가톨릭교회 관여자들은 《가톨릭소년》이 지나치게 아동 문학 쪽으로 경도되었다는 불만이 있었고, 아동문학을 하는 이들에게는 종교색이 너무 강조된 잡지로 보았다고 하겠다.

사실 《가톨릭소년》이 창간된 시기는 아동 문학 잡지들이 크게 위축된 시기였다. 따라서 “비록 가톨릭교를 배경 삼아 색채를 좀 달리 나온 것이나 그래도 아동 잡지의 극도로 굼주린 그때로 보아 무엇보다도 감사한 일이라 생각하엿습니다”라고,58) 1930년대 후반에 이동 잡지를 간행하였다는 그 자체가 의의를 갖는다고 한 아동 문학가 高長煥의 견해가 당시 가톨릭교회 밖 아동 문학가들의 공통된 견해가 아닐까 한다. 현재 延邊 학계에서도 고장환과 유사한 견해를 내고 있다.59)

아무튼 이 잡지가 연길교구에서 간행된 만큼, 그 내용은 가톨릭적인 분위기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지적한 대로 실제 《가톨릭소년》에는 가톨릭교회와 관련된 예화가 적지 않았으며, 동화나 우화 등에 꼭 필요한 부분이 아닌데도 세례명을 사용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예컨대 창간호만 하더라도 한윤승이 창간호에 발표한 우화 〈게름뱅이 세 아이〉를 보면, 세 아이의 이름이 요안, 베드루, 아고보였다. 또 金獨影이 쓴 소녀소설도 〈아가다의 죽엄〉이었으며, 만화 페이지의 〈작난꾸럭이 요안과 뚱뚱보 영감〉에도 요안과 바오로가 등장하였다. 이것은 단지 창간호에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럴 수 있는 배경은 필자들 가운데 가톨릭 신자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가톨릭소년》이 전국적인 아동 잡지로 성장하는데 있어, 이러한 점은 장애 요인이 아닐 수 없었다. 아마도 베네딕도회가 관할한 연길교구의 성격상 한국적인 가톨릭의 토착화와 발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다고 하겠다. 그러면서도 탈시시오회에 관련된 내용이 거의 보이지 않는 점에서, 연길교구가 이 잡지를 단순히 《탈시시오회보》의 연장선상으로 이해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가톨릭소년》의 독자는 소년 소녀 아동들, 대체로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동시에 그들을 필자로 만드는 작업에도 관심을 가지고, 독자투고를 양성화하였다. 특히 1936년 7월호부터 2, 3개월에 한 차례 ‘牧羊兒’라는 필명으로 투고된 동시나 동요를 품평하는 ‘詩評’란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목양아라는 필명을 쓴 이는 길림 국립 사범학교에 재학 중인 康永達이었다.60) 아울러 아동 문학의 발전과 신인 양성을 위하여 ‘아동문학강좌’를 여러 차례 연재하였다. 예컨대 金玉粉의 〈童謠를 戱曲化하는 方法〉을 6회에 걸쳐, 千靑松의 〈朝鮮童謠의 素描〉를 3회, 宋昌一의 〈兒童文學講座〉는 폐간될 때까지 7회 연재 중이었다. 아동 문학에 대한 이론적인 연재가 계속되었다는 사실은 그러한 시도가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가톨릭소년》의 필자에는 이름 높은 아동 문학가들도 적지 않았지만, 가톨릭 관련 인사들 또한 적지 않았다. 한상진이 《가톨릭소년》의 단점으로, “솔직하게 말한다면 아동 문학 전문 연구가의 작품이 적은 것입니다”라고 한 것은 그러한 실정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61) 언뜻 보면 이 잡지에 원고를 게재한 바 있던 尹克榮 · 姜小泉 · 金英一 · 安壽吉 · 朴泳鍾(木月) · 金相德 · 李龜祚 · 송창일 · 김옥분 · 천청송 · 金泰午 · 康承翰 · 盧良根 · 김독영 · 崔仁化 · 崔秉和 · 엄달호 · 睦一新 등은 당시 여러 곳에 작품을 발표하던 알려진 아동 문학가들이었다. 특히 윤극영이나 강소천, 김영일 등은 아동 문학계의 대표적인 작가들이었다. 그리고 朴京鍾과 權五順, 全霜玉, 李柱訓 등은 다른 매체에도 동시를 발표하였지만, 《가톨릭소년》을 통하여 이름이 알려지거나 이후 문단에 등단한 작가였다. 강안숙 · 方壽龍 · 金九鼎 · 김독영 · 吳基順 · 吳基先 · 金成煥 · 林和吉 · 黃聖準 · 조관호 등은 가톨릭 계통의 매체에 글을 자주 발표한 교계 인사였다. 그 가운데에는 사제도 있었고, 신학생도 있었다. 또 앙케이트만 보내왔지만 이병기나 金煥泰 같은 중앙 문단의 인사들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도 서울의 한상진이 아동 문학 전문가가 적다고 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가 아닐까 한다. 하나는 《가톨릭소년》의 필진 가운데 간도나 함경도 출신자들이 많아, 중앙 문단에 크게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또 하나는 일반 문단보다 가톨릭 문단의 인사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이 관계는 《가톨릭소년》이 출발할 때부터 지니고 있는 한계일 수 있었다. 韓晶東이나 尹石重 · 李定鎬 · 李元壽 · 延星欽 · 李周洪 · 鄭寅燮 등과 같이 당대 대표적인 아동 문학가들의 참여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서울에도 적지 않은 아동 잡지가 간행되던 시기에, 간도의 아동 잡지가 관심을 끄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음은 이미 몇 사례를 지적한 바 있다.

《가톨릭소년》은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작품이나 기사를 억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37년 5월호에 용어 문제로 두 곳이 삭제된 부분이 나오지만, 특별히 검열로 인해 압수나 정간을 당한 경우는 없었다. 기본적으로 아동 잡지이기 때문에 지니는 한계일 수도 있으며, 또 주간을 맡았던 황덕영이나 오삭조가 신학생 출신이었던 사실로도 민족 문제에 대한 인식이 투철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황덕영은 만주국의 하급관리로 전신하였던 점으로도 짐작되는 일이다. 오히려 독일인들이 주도한 연길교구는 독일과 일본이 동맹국이라는 면에서도, 일본의 한국 통치나 만주 통치에 저항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938년 6월호에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사진을 게재한 것을 보더라도, 《가톨릭소년》은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일본의 정치적 이익을 지지하는 수준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일본의 지배나 정책에 반대하여 정치적인 문제를 야기하지 일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견지하였다고 믿어진다.

아무튼 《가톨릭소년》에 발표된 많은 작품과 작가들을 평가하는 것은 국문학계의 과제가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가톨릭소년》에 작품을 발표한 특기할 만한 인물이나 작품을 몇 편 소개하는 데 그치고자 한다.

《가톨릭소년》을 편집하기도 한 이상이 1936년 5월호에 표지화를 그리고, 동시 1편을 게재하였던 것은 의외의 일이다. 그는 1933년 《가톨릭청년》에 〈꽃나무〉 등 여러 편의 시를 발표한 바 있는데, 九人會 회원인 鄭芝溶의 주선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1934년부터 이상도 구인회에 참여하지만, 아무튼 그가 관련이 없던 가톨릭과도 시 발표를 통하여 교분을 가질 수 있었다. 《가톨릭소년》에 그린 표지화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상으로, 뒤에 아기 천사들이 왕관을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창문사 출판부에 근무하며 이상은 《가톨릭소년》을 편집하다가 ‘해경’이라는 이름으로 동시 〈목장〉을 발표하였다. 그 전문은 아래와 같다.

송아지는 저마다
먼산바래기

할말이 잇는데두
고개 숙이구
입을 다믈구

새김질 싸각싸각
하다 멈추다

그래두 어머니가
못잊어라구
못잊어라구

가다가 엄매--
놀다가두 엄매--

산에 둥실
구름이가구
구름이오구

송아지는 영 영
먼산바래기62)

또한 尹東柱의 동시와 동요도 여러 편 수록되었는데, ‘尹童柱’와 ‘尹童舟’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그는 1935년 9월 용정의 恩眞中學校에서 평양의 崇實中學校로 전학하였다가, 1936년 3월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에 이르자 다시 용정의 光明中學校 4학년에 편입한 상태였다. 1938년 4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서울로 떠날 때까지 용정에 머무르며 《가톨릭소년》에 투고하였던 것이다.63) 그는 1936년 11월호부터 1937년 10월호까지 1년 동안에 5차례에 걸쳐 7편의 동시 또는 동요를 발표하였다. 《가톨릭소년》에 그의 글이 처음 실린 것은 1936년 11월호의 동요 〈병아리〉였다. 12월호에는 〈비ㅅ자루〉라는 동시가 게재되었다. 이어 1937년 1 · 2월 합병 신년호에는 〈오좀싸개지도〉(地圖)가, 3월호에는 동요 〈무얼 먹구 사나〉, 4월호에는 동시 〈눈 三題〉라 하여, 〈눈〉 · 〈개〉 · 〈이불〉의 세 편이 실렸다. 이 시들은 모두 尹童柱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0월호 독자 문단에 尹童舟라는 필명으로 〈거즛뿌리〉가 실렸다. 윤동주의 자필 詩稿가 남아 있는데, 이 시들은 모두 시고에 수록되어 있다.64) 그리고 그는 자신이 발표한 시를 스크랩해 두었는데, 〈눈 三題〉만은 빠져 있어, 그간 이 시들이 《가톨릭소년》에 발표된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시고에는 〈니불〉이란 제목이 역시 〈눈〉으로 수정되어 있지만, 본래 〈니불〉이 맞을 것이란 견해가 있다.65) 시고와 발표된 시를 대조해 보면, 표기법의 차이가 간혹 보이고, 한 두 마디 수정되거나, 한 줄 정도 빠지거나 삭제 또는 수정된 경우가 있다.

〈그림 3〉 《가톨릭소년》 1936년 5월호에 실린 이상의 동시 〈목장〉
 

소설가로 이름 높았던 안수길이 《가톨릭소년》에 〈꽃과 나비〉라는 아동극을 썼고, ‘安祥’이라는 필명으로 어린이 소설 〈떡보〉를 연재하였다.66) 1936년 4ㆍ5월호에 실린 〈꽃과 나비〉는 용정 시내 東亞學校 기념제에서 공연한 연극의 극본이기도 하였다.67) 안수길은 1936년 용정의 한국어 신문인 《間島日報》의 기자로 있었고, 그것이 《滿鮮日報》로 확장된 뒤에는 新京으로 옮겨갔다.

뒤에 널리 알려진 《가톨릭소년》 게재 작품으로는 권오순의 〈구슬비〉가 있다. 1938년 1 · 2월 합병 신년호에 실린 이 동요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송알송알 싸리잎에 은구슬
조롱조롱 거미줄에 옥구슬
대롱대롱 풀잎마다 촘촘촘
방긋웃는 꽃잎마다 송송송
곻이곻이 오색실에 께여서
달빛새는 창문가에 두라고
포슬포슬 구슬비는 온종일
에뿐구슬 매치면서 솔솔솔

이 동요는 일제시기 이름 높은 예술인이었던 安碩柱의 아들로 〈우리의 소원〉(1947년)을 작곡한 바 있던 安丙元이 1948년에 동요로 작곡한 뒤, 교과서에 수록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6. 맺는말

1936년 4월호부터 1938년 8월호까지 연길교구에서 발간한 《가톨릭소년》에 관련된 문제들을 살펴보았다. 주로 그 발간을 둘러싼 문제와, 운영과 내용 등에 관한 검토였다.

《가톨릭소년》은 연길교구의 소년 운동의 하나로 전개된 탈시시오소년회가 발전하며 간행한 《탈시시오회보》를 그 전신으로 하고 있었다. 이 단체는 복사회를 개편한 것인 만큼 가톨릭 신심 단체의 성격이 강하였다. 1934년 전조선주교회의에서는 연길교구에 아동 잡지의 간행을 권유하였고, 결국 1936년 전후 연길교구에서는 《탈시시오회보》를 《가톨릭소년》으로 개편하는 형식을 취하며 그 창간을 준비하였다. 사장은 연길 탈시시오 소년회 연합회 총재인 배광피 신부가, 주간은 황덕영이 맡았으며, 인쇄는 자체 인쇄부가 설치되는 1936년 말까지 서울의 창문사에서 담당하였다.

《가톨릭소년》의 편집은 초기에는 주간 이외에 창문사의 이상과 구본웅의 협조가 있었으며, 이어 조관호가 충원되었다. 조관호가 1937년 사임한 뒤에는 오삭조가 보충되었으나, 1938년 초에 황덕영이 사임하여 오삭조가 주간을 맡았다. 표지와 삽화는 장발과 이상, 구본웅이 맡았다가, 조관호와 이주훈, 오봉협 등이 담당하였다. 자체 인쇄부가 설치된 이후에는 편집부 2인, 발송부 3인, 인쇄부 7인 등 12인의 인원으로 운영되었다. 그 발행 부수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3,500부 이상 1만 부 이내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잡지는 연길교구의 지원으로 간행하였지만, 매월 300원 이상의 적자가 날 만큼 수지가 맞지 않았다. 이 재정 부족은 결국 폐간의 가장 큰 이유가 되고 말았다.

가톨릭 전교와 일반 아동 잡지를 동시에 추구한 《가톨릭소년》은 1936년 6월 한국 가톨릭교회의 공식 기관지로 인정받았으며, 결국 가톨릭적인 종교색이 만연한 아동 잡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전체적인 편집은 일반 아동 잡지와 크게 차이가 없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드러날 정도로 가톨릭의 전교와 호교론적인 기사들로 채워졌다. 물론 가톨릭과 무관한 아동 문학가나 독자들의 작품도 많이 게재되었으나, 가톨릭계 문사나 독자들의 작품이 적지 않았다. 그것은 《가톨릭소년》이 간도에서 발행되기 때문에 전국성이 부족하였고, 동시에 가톨릭 문사들의 참여가 두드러졌기 때문에 지닌 한계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가톨릭소년》의 간행으로 가톨릭교회는 가톨릭 전교와 일반 아동 잡지를 추구하고자 한 간행 목적을 만족하기는 어려웠겠지만, 상당부분 달성하였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동시에 정치색을 배제하고자 노력하였다.

《가톨릭소년》은 1938년 8월호로 갑자기 폐간되었는데, 무엇보다도 재정 적자가 그 이유였다. 하지만 황민화 정책을 추구하던 일제의 압력을 극복하기 어려웠던 것도 그 다른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1938년에 이르면 초등학교에서까지 조선어 시간을 폐지하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한글 아동 잡지의 간행은 그만큼 지난한 일이었던 것이다.

특기할 것은 앞으로 국문학계 또는 아동 문학계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이지만, 《가톨릭소년》에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李箱의 동시 〈목장〉이 실려 있다. 알려져 있는 윤동주의 동시 · 동요 가운데 이 잡지에 실린 것이 확인되는 세 편이 있으며, 안수길의 아동극과 소년 소설 역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라 생각된다.

《가톨릭소년》은 1930년대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공식적으로 발간한 아동 잡지로, 한국어의 사용과 그 발전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비록 간도에서 발간되었기 때문에 지니는 한계도 있었지만, 연길교구를 관할한 베네딕도회의 문서 선교 및 소년 운동을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앞으로 《가톨릭소년》이 자료로 이용되어 간도 지역의 가톨릭교회, 연길교구 및 베네딕도회의 사목 · 교육 · 문학 · 소년 운동 · 문서 선교 등에 관련된 많은 연구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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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고에서는 베네딕도회 소장분 25개호(제16 · 17호, 1937년 8 · 9월호는 합집)와 연세대학교 소장 1개호(제20호, 1937년 12월호)를 이용하였다. 현재 확인이 되지 않은 2개호는 제23호(1938년 3월호)와 제25호(1938년 5월호)이다.

2) 李在徹, 《韓國現代兒童文學史》, 一志社, 1978, 194~197쪽.
3) 간단한 소개는 李錫鉉, 〈《가톨릭소년》과 《빛》의 두 雜誌〉, 《思想界》 1967년 1월호가 있다.
4) 金成煥, 〈延吉 탈시시오 聯合少年會〉, 《가톨릭靑年》 1934년 9월호, 31쪽.
5) 黃聖準, 〈延吉敎區 少年運動一瞥〉, 《가톨릭靑年》 1936년 10월호, 59쪽.

6) Adelhard Kaspar, Placidus Berger, Hwan Gab : 60 Jahre Benediktinermission in Korea und in der Mandschurei, Vier-Turme-Verlag, Munsterschwarzach, 1973, S. 125에는 박 신부가 지도사제에 임명된 배 신부에게 회보 발간을 권고하였다고 한다.

7) 배광피 신부의 〈창간사〉에는 5년, 《경향잡지》 1936년 2월 29일자 회보 〈룡정가톨릭소년지발간〉에는 4년 동안 간행되었다고 하였다. 또 Adelhard Kaspar, Placidus Berger, Hwan Gab, S. 125에는 1931년부터 1934년까지 발행되었다고 하여, 1934년부터 《가톨릭소년》이 발행된 것으로 기술한 것은 착오이다.

8) Adelhard Kaspar, Placidus Berger, Hwan Gab, S. 125.
9) 黃聖準, 〈延吉敎區 少年運動一瞥〉, 60쪽.
10) 黃聖準, 〈延吉敎區 少年運動一瞥〉, 36~39쪽.
11) 金成煥, 〈延吉 탈시시오 聯合少年會〉, 60쪽.
12) 《가톨릭소년》1936년 4월호와 5월호 화보사진 참조.
13) 《가톨릭소년》1937년 4월호, 16쪽 〈일년동안 거른 자최〉.

14) 《가톨릭소년》 1936년 4월호, 59쪽 〈未安한 말슴〉을 보면, 《警鐘》이라는 제호로 창간할 것을 관련자들에게 통지하였다가, 《가톨릭소년》으로 개칭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15) 《가톨릭소년》 1936년 6월호, 89쪽 〈편즙 끝마구미〉, 《가톨릭소년》 1937년 4월호, 16쪽 〈일년동안 거른 자최〉에서는 “京城彰文社에서 三月下旬께야 이 애기의 에뿐 얼굴이 세상에 나타낫든 것이다”라고 하였다.

16) 《基督申報》 1923년 2월 7일자〈株式會社 基督敎彰文社〉.
17) 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베이스,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 1933 · 1935년판.
18) 具光謨, 〈‘友人像’과 ‘女人像’〉, 《新東亞》 2002년 11월호.
19) 정은진, 〈장발〉, 《한국가톨릭대사전》 10, 2004.
20) 《가톨릭소년》 1936년 7월호, 90쪽 〈편즙을 맛치고 나서〉.
21) 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베이스,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 1937년판.

22) 1936년 10월호와 11월호의 간기를 보면, 인쇄소가 만주국 간도성 연길시 천주교 인쇄소로 기재되어 있는데, 12월호는 창문사로 되어 있다. 이후 1937년부터는 천주교 인쇄소에서 간행되었다. 연길교구에서는 1936년 중에 인쇄소를 개설할 계획이었으나, 그 진행이 늦어져 인쇄를 간도와 서울에서 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23) 《가톨릭소년》 1936년 7월호, 74~75쪽〈독자실〉을 보면, “가톨릭少年 二號 표지화와 동시 〈목장〉의 작가인 김해경 선생님이 어디 게십니까? 그리구 무얼 하시는지 퍽 알구 싶은데 알으켜 주실 수 없을가요? 龍井 金龍庚”이라는 독자 질문이 있다. 이에 대한 편집부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記者) 김해경 선생님이 바루 李箱 先生님입니다. 詩人으로 이름 높으시구 또 그림으로도 몰으는 이가 없을 많큼 이모저모로 유명하신 선생님이심니다. 지금 서울에 게신데, 하시는 일은 퍽 여러 가지 방면에 애쓰시는 어룬이십니다. 가장 잡지 출판에 애를 쓰시는 가운데두 우리 〈가톨릭少年〉 출판에 땀을 많이 흘리심니다.
한 마데 여기 더 말하려고 하는 것은 〈李箱 先生이 金海卿 先生이라니! 어찌 된 셈인가? 姓이 두 가진가?〉 하실런지도 몰으겠으나 〈李箱〉 二字가 호입니다. 본 이름은 金海卿 先生입니다.

24) 이상은 1936년 6월 卞東琳과 결혼하고, 10월에 도일하였다. 권영민 편, 《이상전집》 1, 뿔, 2009, 396~398쪽.

25) Adelhard Kaspar, Placidus Berger, Hwan Gab, S. 126.
26) 黃聖準, 〈延吉敎區 少年運動一瞥〉, 60쪽.
27) 李在徹, 《韓國現代兒童文學史》, 191~194쪽.
28) 〈全鮮主敎會議 決議條項 抄〉, 《가톨릭연구》 1936년 10월호, 1042쪽.

29) 이에 관해서는 김수태, 〈1930년대 평양교구의 가톨릭운동〉, 《교회사연구》 19, 2002와 〈1930년대 천주교 평양교구의 문서선교〉,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7, 2006을 참고할 것.

30) 〈사고〉, 《가톨릭소년》 1936년 10월호, 20쪽.
31) 《조선중앙일보》 1934년 7월 23일자, 1936년 4월 8일자. 《동아일보》 1934년 7월 24자.
32) 《동아일보》 1935년 11월 3일자, 1936년 4월 8일자.
33) 《가톨릭소년》 1937년 12월호, 56쪽 〈사고〉, 76쪽 〈특고〉.
34) 《가톨릭소년》 1937년 3월호, 14~16쪽 〈本社를 옴기고〉.
35) 《가톨릭소년》 1937년 7월호, 77쪽 〈편즙을 맛치고〉
36) 《가톨릭소년》 1937년 8 · 9월호, 73쪽 〈讀者放送室〉.
37) 《가톨릭소년》 1937년 1월호, 56쪽 〈사고〉.
38) 《가톨릭소년》 1937년 8 · 9월호, 73쪽 〈讀者放送室〉
39) 《가톨릭소년》 1936년 6 · 8 · 12월호, 1937년 4 · 8 · 9월호 지사 관련광고.
40) 《가톨릭소년》 1938년 4월호, 60~62쪽 〈本誌 創刊의 報를 드르시고 느끼신 感想〉.
41) 《가톨릭소년》 1937년 10월호, 43쪽 〈讀者通信欄〉.
42) 《가톨릭소년》 1937년 11월호, 〈고별인사〉, 49쪽 〈사고〉.
43) 《가톨릭소년》 1937년 11월호, 77쪽 〈뒤엣말〉.
44) 《가톨릭소년》 1937년 12월호, 72쪽 〈新任社員紹介〉.

45) 그는 덕원 신학교의 교지 《신우》에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즉 제1호(1933. 4)에 〈준주성범의 한 구절〉을, 제2호(1934. 5)에 〈心理學上으로 본 人間과 動物과의 本質的 差異〉가 그것이다. 또 그는 신학생 시절 “자기를 잇고 고통을 무릅쓰고 주야로 동분서주하며 낙심치 않고 항구히 애쓰는 열심한 신부가 되려합니다. 아니 원하고 빌고 힘씀니다”라는 포부를 밝힌 바 있었다(《신우》 1, 49~50쪽 〈修養時期에 在한 神生들이 現在와 將來에 무엇을 要望하는가〉).

46) 《가톨릭소년》 1938년 2월호, 〈悲報〉.
47) 《가톨릭소년》 1938년 8월호, 화보사진.
48) 《가톨릭소년》 1938년 4월호, 11쪽 〈二週年을 當하야〉.
49) 《가톨릭소년》 1938년 4월호, 77쪽 〈편즙후기〉
50) Adelhard Kaspar, Placidus Berger, Hwan Gab, S. 126.

51) 李錫鉉,〈《가톨릭소년》과 《빛》의 두 雜誌〉 및 양인성, 〈콜라르, 라파엘〉, 《한국가톨릭대사전》 11, 2005, 8505쪽.

52) Adelhard Kaspar, Placidus Berger, Hwan Gab, S. 126.

53) 현재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된 《빛》1939년 6 · 7 · 8 · 9월 합호 복사본에는 갈 신부가 와병중이어서 새로 편집을 받은 바오로 출판 전교회 바오로 발체리노 신부의 〈新編輯者의 말〉이 실려 있는데, 그는 ‘15만 조선신도의 생명의 《빛》지’라는 표현을 쓰고 있었다. 이를 보면 《빛》은 아동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54) http://de.wikipedia.org/wiki/J%C3%B3n_Sveinsson.

55) 《가톨릭소년》 1937년 8 · 9월호, 21쪽 〈사랑스런 少年 여러분에게!〉(쫀 스윈손). 김성환은 1940년 연길교구 사제로 서품된 뒤, 월남 후 대구대교구 김천 성의중학교 · 성의상업고등학교 · 성의여자중학교 · 성의여자상업고등학교의 교장을 오래 역임하였다.

56) 《가톨릭소년》 1937년 4월호, 47쪽 〈先輩들로부터 주시는 말슴
57) 《가톨릭소년》 1938년 4월호, 62쪽 〈本誌 創刊의 報를 드르시고 느끼신 感想〉.
58) 《가톨릭소년》 1938년 4월호, 60쪽 〈本誌 創刊의 報를 드르시고 느끼신 感想〉.

59) 김만석, 《중국조선족아동문학사》, 연변대학출판사, 1994, 13쪽에 “…그(백화동 교구장)가 가톨릭 기발을 들고 잡지를 꾸린 것은 기독교를 전파하려는 것이 주관적인 목적이였겠지만 오늘에 와서 객관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것은 죽어가는 우리 말과 스러져가는 아동 문학을 건지고 살리는데서 마멸할 수 없는 력사적 공훈을 세운 것으로 된다. 《가톨릭소년》지의 출간은 우리 중국 조선족 아동 문학 작가들(물론 조선 아동 문학 작가들도 포함)의 작품 발표원지를 해결하는 것으로 되었다…”라고 《가톨릭소년》의 출간을 설명하고 있다.

60) 《가톨릭소년》 1936년 9월호, 29쪽 〈독자실〉
61) 《가톨릭소년》 1937년 4월호, 48쪽 〈先輩들로부터 주시는 말슴〉
62) 《가톨릭소년》 1936년 5월호, 62~63쪽 〈목장〉(해경).
63) 왕신영 외 편,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 민음사, 1999, 연보.
64) 왕신영 외 편,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에 윤동주의 시고가 그대로 영인되어 있다.
65) 홍장학, 《정본 윤동주전집 원전 연구》, 문학과지성사, 2004, 148쪽.
66) 安祥이 안수길의 필명인 것은 《가톨릭소년》 1936년 9월호, 29쪽 〈독자실〉에서 확인된다.
67) 〈꽃과 나비〉, 《가톨릭소년》 1936년 5월호, 53쪽.

[교회사 연구 제33집, 2009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최기영(서강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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