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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라리보 주교의 대전교구 사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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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6-14 ㅣ No.1398

라리보 주교의 대전교구 사목

 

 

국문초록

 

라리보 주교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서울과 대전이라는 두 교구의 책임자를 맡은 이례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서울의 교구장에서 물러나서 본당 신부를 하다가, 다시 대전의 교구장이 된 특별한 경력을 가진 선교사이기도 하였다.

 

현재 라리보 주교의 사목활동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의미가 부여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도 참석한 그를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와 사회 속에서 무엇이 한국 천주교회에 유익한 일인가를 끊임없이 모색하면서 사목활동을 전개한 매우 진보적인 주교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1948년 5월 라리보 주교가 교구장이 되면서 파리외방전교회가 새롭게 담당하는 대전교구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대전교구가 실질적으로 독립될 때까지에는 매우 복잡한 과정이 뒤따랐다. 그것은 그의 교구장 임명이 서리였다는 사실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에 그는 1958년까지 대전이 독립적인 교구로써 제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한편 라리보 주교는 한국에 젊고 진보적인 선교사들이 새롭게 들어오기를 바랐으며, 그들의 사명이 한국인에 의한 한국천주교회가 되도록 하는데 있음을 주장하였다. 때문에 그는 한국인 성직자의 양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1965년에 한국인 성직자에게 교구장을 다시 넘겨줌으로써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그가 담당한 역사적 역할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다. 이제 이러한 그의 노력과 함께 대전교구가 새로운 시대를 향한 도약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Ⅰ. 머리말

 

한국 천주교회에서 파리외방전교회의 역사란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할 수가 있다.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교구와 서울대목구의 주교직을 담당하던 시대와 그렇지 않던 시기로 나누어진다. 이때 한국 천주교회에 그러한 전환의 기회를 마련해준 인물은 바로 아드리앙 라리보 주교(1883~1974)였다. 뮈텔 주교의 뒤를 이어 1933년에 제 9대 서울대목구장이 되었던 그는 1942년에 들어와서 한국인 성직자인 노기남 주교에게 서울대목구장 자리를 물려주었던 것이었다. 이에 한국천주교회는 한국인에 의한 한국천주교회로 나아가게 되었다. 때문에 그는 한국인에 의한 한국천주교회를 위한 초석을 마련해준 ‘한국 천주교회의 양육자’라고 불리기도 한다.1)

 

일제 말에 이루어진 한국인 주교의 등장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로 하여금 한국에서의 선교를 어떠한 방법으로 새롭게 전개할 것인가를 고민하도록 만들었다. 갑자기 닥친 엄청난 변화는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을 것이며, 라리보 주교와는 달리 한국인 주교에 의한 서울대목구의 운영을 쉽게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어떠한 곳에 새롭게 정착하는가 하는 문제가 계속해서 제기되었다. 무엇보다도 한국인 주교나 성직자들과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의 갈등이 서울대목구에서나, 대구대목구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는 서울대목구가 대구대목구의 분리에 이어서 새로운 교구분할을 모색해야만 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후에야 비로소 가능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은퇴한 라리보 주교가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1948년 5월에 대전지목구가 탄생하게 되었는데, 초대 지목구장으로 65살의 라리보 주교가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두 교구의 책임자를 맡는 이례적인 인물이 되었다. 교구장에서 물러나서 본당신부를 하다가, 다시 교구장이 된 특별한 경력을 가진 프랑스 선교사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삶에 대해서 “서울교구장이셨던 분이 그곳에서 분가한 새로운 교구의 교구장이 된다는 것은 일상의 순리로 보나 당시의 나이로 보나 받아들이기 쉽지 않으셨지만 순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러한 경력은 영광스러움이 아니라 그만큼 많은 십자가를 지고 사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라고2) 설명된다. 즉 대전교구의 초대 교구장직은 그만큼 라리보 주교에게 새로운 길을 힘겹게 걸어가도록 하였던 것이다. 서울대목구장에서 물러난 뒤에 수녀들과, 고아원 아이들을 돌보는 한편, 그가 만든 용산 본당의 주임신부로서 활동하며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보내고 있던3) 그에게 이전과 달리 새로운 형태의 한국 선교를 다시 시작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근대와 현대의 한국천주교회사 속에서 라리보 주교의 신앙과 활동은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서울대교구장과 대전교구장을 동시에 역임한 라리보 주교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거의 연구가 이루어지 않았다. 이전의 서울대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나, 그의 뒤를 이은 노기남 주교의 활동에 가리어진 부분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그가 주교가 된 이후 쓴 편지나 기록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자료의 한계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4) 그러나 2014년에 들어와서 대전교구의 내포교회사연구소에서 《라리보 주교 자료집》 (1)과 (2)를 출간함으로써 그에 대한 연구에 상당한 제약으로 작용하였던 자료의 문제는 더 이상 언급할 수 없게 되었다. 자료집을 통해서 그의 사목활동에 대한 여러 모습들을 매우 생생하게, 다양하게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자료집의 〈해제〉에서도 지적된 바와 같이 라리보 주교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고 하겠다.5)

 

이 글에서는 라리보 주교의 활동 가운데에서도 대전교구에 대한 사목 부분만을 분리시켜 다루고자 한다. 서울대교구장에 한국인 주교가 임명된 이후 대전교구가 어떻게 분리·설립되었으며,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그들의 위치를 다시 정립해가는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일반적으로 교회사의 인물을 다룰 때의 연구방법인 그의 생애나 업적들을 나열하여 서술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그의 사목은 교육사업과 사회복지사업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6) 그러한 내용만을 단순하게 언급한다는 것은 너무 재미가 없고, 단조로운 접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되도록 그가 대전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무엇에 부딪치고 고민하였는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관심을 기울여 볼 것이다. 이러한 시도를 바탕으로 앞으로 서울대목구장 시절의 라리보 주교의 사목활동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다루어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근·현대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파리외방전교회의 한국선교 역사가 더욱 체계적으로 연구되는 새로운 계기가 열리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Ⅱ. 라리보 주교에 대한 평가

 

라리보 주교의 사목활동에 대해서는 현재 그다지 적극적으로 의미가 부여되고 있지 않은 듯하다. 그러한 사실은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명동본당사》(2007)나 천주교 대전교구 편, 《대전교구 60년사》(2008)를 통해서 쉽게 살펴볼 수가 있다. 《명동본당사》에서는 뮈텔 주교의 뒤를 이어 제 9대 서울교구장으로 취임하였다는 사실만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노기남 주교의 탄생과정과 관련하여 라리보 주교가 매우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것이 그에 대한 서술의 전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때문에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펴낸 《한국천주교회사(5)》(2014)의 설명이 보다 자세하다. 그의 임명과 활동, 뮈텔 대주교의 사망과 라리보 주교의 승계라는 두 개의 항목을 통해서 1927년에 주교가 된 이후 뮈텔 주교의 위임에 따라서 실질적으로 서울 대목구의 전반적인 사무를 총괄한 역할을 수행한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한국에서 최초로 지역공의회가 개최된 사실이나, 가톨릭 운동의 확산을 추구하였다든지 등 그의 사목활동이 가지는 특징을 조금 더 다루고 있는 것이다.

 

《대전교구 60년사》에서도 초대교구장인 라리보 주교의 역할은 잘 드러나고 있지 않는다. 제 1편 대전교구의 설정과 정착(1948-1964)은 라리보 주교의 교구장 재임기간에 해당된다. 여기에서 그의 교구장 재임 16년 동안에 해당되는 내용을 1. 해방과 대전교구의 탄생(1948-1950), 2. 6·25 전쟁과 순교자들(1950-1951), 3. 대전교구의 안정과 정착(1952~1965)의 세부분으로 나누어서 서술하고 있다.

 

이 글에서도 《명동본당사》와 마찬가지로 교구장인 라리보 주교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지 않다. 물론 《명동본당사》 보다는 좀 더 긴 내용이 서술되고 있기는 하다.

 

“라리보 주교 재임기간 중 대전교구의 특징은 충청남도가 서울교구에 속해 있던 때와 비슷한 체제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아직 본격적인 산업화와 이농현상이 일어나기 전이어서 각 지역 공동체는 예전의 특징들을 고유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또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있기 이전의 시기로 전례나 교회 전통 면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던 때였다. 더구나 서울대목구장이었던 라리보 주교가 초대 대전교구장이 되었고, 한국 교회 초기부터 선교를 담당하였던 파리외방전교회의 신부들이 주축을 이룸으로써 교구행정이나 사목적인 면에서도 큰 변화가 없었다.”7)

 

“한편 초대 교구장 라리보 주교는 과중한 일을 감당하기가 어려운 나이여서 견진성사와 인사이동 외에는 거의 모든 일을 다른 성직자가 대행하였다. 직책상으로는 부주교인 보드뱅 신부가 대행하게 되어있으나 예산 본당주임 주임을 겸하고 있었기에 여러 가지 한계가 있었다. 나이로 보나 직책으로 보나 라리보 주교를 실질적으로 보좌한 것은 오기선 신부였다. 오 신부는 라리보 주교가 서울대목구장으로 있을 때 비서 신부로서 일한 경력이 있었다. 그는 대전교구의 주교좌인 대흥동 본당의 주임으로 20여 년을 사목하면서 라리보 주교가 은퇴한 이후까지 교구의 크고 작은 일들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8)

 

대전교구가 서울교구에 속해 있던 때와 비슷한 체제를 유지했으며, 교구 행정이나 사목적인 면에서 큰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 이때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이 주축을 이루었다고 한다. 다음에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라리보 주교가 대전교구의 초대 교구장직이라는 과중한 일을 감당하기가 어려운 나이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인 부주교도 아닌, 한국인 사제인 대흥동 본당의 주임신부인 오기선 신부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다. 이때 대전교구의 운영에 한국인 성직자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라리보 주교에 대한 거의 유일한 긍정적인 서술은 대전성모병원의 개원을 통해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1956년에는 대전성모병원의 전신인 희망의원이 개원하였다. 라리보 주교의 의향에 따라 시작된 이 의원은 본당이 아닌 교구차원에서 시작한 첫 사업이었다. 이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회복지 활동은 본당을 매개로 이루어졌고 대부분 수녀들이 맡아 운영하는 형식이었다.”9)

 

이 경우에도 라리보 주교의 서울 교구장 시절의 사목과의 비교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복지사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10) 그보다는 교구의 운영에 미친 수도회의 영향을 강조하면서 수녀들의 활동에 더 비중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역시 그의 사목방침에서 나온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내용에 라리보 주교가 자신의 주교좌 성당을 새롭게 건축한 사실 정도가 덧붙여지고 있다.

 

그것은 《라리보 주교 자료집(2) : 1948~1974》에서도 역시 찾아볼 수 있다. 자료의 문제는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지만, 그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두 번째 이유로는 라리보 재임기에는 연구자들의 주목을 끌만한 주제들이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교회사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박해시대와 개항기도 아니고, 교회의 대내외 활동이 활발할 때도 아니어서 연구주제를 잡기가 쉽지 않다”고11) 언급한다. 뿐만 아니라, “라리보 신부는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반면에 우편물을 발송하거나 답장을 쓰는 일, 기록을 남기는 일에는 대단히 둔감하였다.”든지,12) “어떤 이들은 그가 선교지를 더 이롭게 할 수 있었던 기회들을 그냥 버려두었다고 비난한다. 땅이나 여러 가지 건축자재들을 사들이는 것과 관련된 기회를 놓쳤다고.” 는13) 등의 사실들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부분들 가운데 일부는 라리보 주교이 자신의 부족함으로 이미 밝히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대부분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그를 비판할 때 일반적으로 언급하는 내용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라리보 주교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어느 정도 정당한 것인지를 알 수 없다. 때문에 그러한 언급들에 대해서 일일이 검토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다만 이러한 관점들 때문에 그에 대한 서술이 객관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언제나 연구를 통해서 한 인물을 파악할 때에 보다 신중함이 요구된다는 사실만을 지적해두고 싶다. 평가는 언제나 한 사람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과 함께 개별 내용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가능하다는 점에서이다.

 

라리보 주교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강조되는 사실인 비상한 기억력만해도 그러하다.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에 그러한 능력은 오히려 커다란 도움을 주는 점이 아닐까 싶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인 1973년의 일이다. 자기의 비서 신부였던 오기선 신부를 만났을 때 “늘 한국 땅에 묻히겠다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되살아나 순간 마음이 아파온다. 주교님은 이미 90을 바라보는 고령이시건만 그 기억력은 예나 지금이나 비상하시다. 심지어 서울 대전교구의 어느 신부 어느 교우는 지금 어떻게 됐으며 성사를 잘 받드느냐고 물으시더니 지금 아무개, 아무개 교우가 냉담해 있다고 하니 귀국하면 그 사람들 상태를 자세히 알려달라고 부탁을 하신다.”면서,14) “오 신부님이 세상을 한 바퀴 도는 일이 좀 늦으셨지요. 그래 우리 일터이던 대전교구는 지금 어떻습니까? 네.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 교구는 지금 장족의 발전을 해가는 셈이지요?”15)라고 묻고 있듯이, 그는 그 기억력을 통해서 대전교구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자신이 맡았던 교구의 현재 상태를 잊지 않고 계속해서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그가 주교가 된 이래로 뮈텔 주교를 대신해서 서울대목구의 행정을 직접 맡아 주도적으로 운영했다는 점에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이다.16) 때문에 당시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서술되고 있듯이 당시 몇 가지 의미를 부여할 만한 일들이 있었음은 잘 지적되고 있다. 그것은 주교가 된 이후에 작성한 서울대목구의 〈연례보고서〉나 〈뮈텔 전기〉와 같은 서술들을 얼핏 살펴보아도 그가 어떠한 성격의 사목자이며, 어떻게 교구를 운영한 인물임을 곧바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와 사회가 어떠한가를 깊이 파악하려고 하였으며, 그 속에서 무엇이 한국 천주교회에 유익한 일인가를 끊임없이 모색하면서 사목활동을 전개한 선교사였다. 다시 말해서 한국천주교회사의 흐름을 느끼면서 그 속에서 그의 사목방향을 선택하고 실천하였던 것이다.

 

새로운 교구인 대전교구의 운영과 관련된 부분에서도 그러하다. 다른 동료 선교사는 라리보 주교가 대전교구의 운영에서 보여준 태도들에 대해서 새롭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리보 주교에게는 그렇게 행동할 이유가 나름대로 있었다. 아주 여러 번의 이러한 기회는 불법적인 특혜나, 미국인들이 준 ‘기부금들’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한국교회를 위해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는 것이 적절하였겠는가? 우리는 이렇게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선교사로서의 그의 삶에 대해 전체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그가 간도에서 선교를 시작한 순간부터 대전교구의 주교를 사임한 순간까지 라리보 주교는 ‘착하고 충직한 종’이었다. 또한 한국에서 그의 사도직은 그 지역에 교회를 확장시키고 뿌리내리는데 기여했다.”고 하면서,17) 기존의 비판과는 달리 평가되고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그의 선교지 운영원칙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보다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는 1955년에 들어와서 파리외방전교회의 총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속담처럼 “천천히 가는 사람은 확실하게 간다.”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 대전교구는 잘 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빨리 나아가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교구장인 저는 이웃 대목구들이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성당을 짓는 등의 새로운 일들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자주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매번 같은 말을 되풀이합니다. 빚을 얻어 어떤 일을 시작하기 보다는 차라리 기다리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 것이 낫다고요. 무엇보다 먼저 저는 미래의 제 후임자를 생각하면서 제 결심대로 나아갑니다. 제가 그에게 빚을 남겨준다면 그가 무엇으로 갚겠습니까? 우리는 느리게 나아가겠지만 안전할 것입니다.”

 

라고 하여, 그는 기존의 교구인 서울대교구와 달리 새로운 교구인 대전교구의 미래를 염두에 둔 자신의 교구운영방침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때 그는 잘 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태도를 그 바탕에 두고 있었다. 즉 그는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새로운 교구인 대전교구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의 그 과정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리보 주교의 나이와 관련된 문제는 그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었던 교황 요한 23세과의 만남에 대한 회상을 기록한 내용을 통해서 새롭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80세 생일을 계기로 로마에 갔던 라리보 주교는 교황을 만났는데, “교황께서는 매우 다정하게 나를 맞아주셨습니다. 나는 그와 더불어 내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우리는 모두 늙은 사람들이요. 그렇지만 우리는 끝까지 일해야 합니다. 당신은 한국에서의 56년을 더 연장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한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18) 사실 80세가 넘은 고령에도 그의 건강은 1962년과 1963년 두 차례에 걸쳐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면서도 전혀 피로의 기색을 보이지 않을 정도였던 것이다.19) 그렇다면 단순히 나이의 문제만으로 대전교구에서 보여준 라리보 주교의 사목을 단순하게 평가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한다. 나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는가에 더 주목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서울대목구장으로 재임할 때부터 한국천주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면서 매우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는 “공부와 현재적 진보에 대한 조선 젊은이들의 열광은 이 때문에 그들의 신앙을 잃는 일이 없도록 우리 가톨릭이 그들을 지도해야 할 필요성을 우리에게 부과합니다.”라고 하며, 한국사회의 변화를 잘 읽으면서 천주교가 제대로 적응해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20) 그리고 그는 신학생들에 대한 교육내용 등 신학교의 운영에서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를 계속해서 바랐다. “조선에 와 있는 이 불쌍한 파리의 선교사들이 그러한 자극에 힘을 얻어 잠시도 소홀한 적이 없는 방인 성직자의 보다 신중하고 완벽한 양성을 위해 계속 몰두할 것을 기대합니다. (중략) 만일 장래 사제들이 현재의 필요에 따라 더 갖추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다만 세속 학문과 일본어일 것입니다.”라고 보았던 것이다.21) 그는 사제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필요한 덕목을 갖추어야 한국천주교회와 한국사회를 위해서 올바른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경리신부였던 원 주교는 시세와 사리에 밝았고, 냉철한 판단력을 지녔다. 그 무렵의 신부들은 내국인이나 외국인을 막론하고 의식적으로 세속과 연관되는 일을 기피하는 풍조였지만, 원 주교는 천주교 교세 확장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현실과 맞부딪치기를 꺼리지 않았다. 매사 계획과 조직으로 일하는 진취적인 이 분에게서 노 신부는 신앙인으로보다는 탁월한 행정가다운 인상을 받을 때가 많았다. 이러한 그의 뛰어난 판단력과 행정력은 나날이 강압적으로 나오는 일제의 종교탄압을 교묘하게 피하면서 이 나라 천주교를 이끌어가는 길잡이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라는22) 설명이, 라리보 주교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이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점은 요한 23세가 라리보 주교로 하여금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 꼭 참석할 것을 요청하였다는 사실에서도 그러하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면서 언급한 그의 말을 통해서 이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1962년 11월 9일 나는 한국의 모든 주교 아홉 명과 함께 교황을 두 번째 알현했습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불란서 말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나는 다른 주교들보다 더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는 한국에 있어서 우리 사업을 물어보시고 나서 ‘공의회를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만족하십니까?’하고 물으시기에 ‘우리는 만족하지 않습니다.’하고 내가 말했더니, ‘왜 그렇습니까?’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는 진보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를 놓치고 있으며 아무 것도 못하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교황께서는 ‘글쎄, 나도 압니다. 그렇지만 그게 더 좋을 것입니다. 공의회가 무엇인지는 나나 다른 사람이나 정말 모릅니다. 이제부터 잘 되어가겠지요.’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토론하는 식으로 몇 가지 문제들을 말씀하셨는데 내가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의식에 있어서, 본방어 사용에 대해 그는 말씀하셨습니다.”23)

 

그는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한 요한 23세 교황보다도 더 진보적인 입장을 피력하였다. 그 역시 교회의 쇄신을 통한 진보를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음을 잘 알려주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는 당시 같은 회원이었던 루리 델랑드 신부와 함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가진 프랑스 선교사였으며, 주교였음을 알려주고 있다고 하겠다.24) 따라서 라리보 주교의 교구사목에 대해서는 보다 새롭게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Ⅲ. 지목구장 서리직의 한계 극복

 

1948년 5월 1일에 대전지목구가 탄생하였다. 대전지목구의 설립은 1945년 노기남 주교의 요청도 있었지만, 1947년 말 파리외방전교회가 응답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25) 대전교구의 설정배경에 대해서는 한국교회가 오래전부터 추구해오던 자립의지와, 한국선교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파리외방전교회 회원들의 결단이라는 두 요인이 강조되고 있다.26) 한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외부적인 요인도 이러한 변화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서울대목구를 실질적으로 운영하게 된 한국인 주교 및 성직자들과 파리외방전교회 사이에 일어난 갈등을 보다 큰 요소로 새롭게 주목해야 할 것이다. 파리외방전교회와 한국인 성직자들의 갈등은 대구대목구에서도 이미 나타난 현상이었기 때문이다.27)

 

시잘레 신부의 청원에 의하면 대전지목구의 설립이 서울대교구와 파리외방전교회의 관계가 좋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그 내용에 대한 각주에서 잘 지적하고 있듯이 그들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던 것이 사실에 가깝다고 하겠다.28) 파리외방전교회의 회원 일부는 라리보 주교와 달리 한국인 성직자의 서울대교구장 임명을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오기선 신부의 기록에서 보이듯이, 한국인 주교를 바라는 한국인 성직자와, 이에 대해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와의 대립이 있었기 때문이다.29)

 

뿐만 아니라 라리보 주교의 의지 아래 한국인 주교가 임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은 서울대목구를 계속해서 자신의 영향 아래에 두고자 한 측면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30) 이에 대해서 한국인 주교나 성직자들 역시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앞으로 서울대목구의 관할을 받아야 하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러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란 결국 서울대목구에서 대전지목구의 분리에서 찾아질 수밖에 없었다고 하겠다.

 

이제 파리외방전교회가 대전교구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전개는 이전과 달리 서울대목구와 파리외방전교회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대목구와 지목구라는 차이만이 아니라, 대전교구가 실질적으로 자립하기 이전까지 파리외방전교회가 서울대목구의 선택이나 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상호관계가 크게 변화됨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전교구가 실질적으로 독립될 때까지에는 매우 복잡한 과정이 뒤따랐다. 우선 교구의 명칭에서도 그러하였다. 기록에서는 대전교구가 아니라 충남교구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31) 물론 대전에 그 중심지를 둔다는 것은 분명하였다. 교구의 명칭에 대해서도 이러한 논의가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기존의 서울대목구나 대구대목구의 경우와는 달리 대전지목구의 명칭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라리보 주교는 1949년 2월에 본부에 보낸 서한을 통해서 ‘대전지목구’라고 불러야 마땅하다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32) 이러한 문제는 1958년에 대전대목구라는 명칭으로 승격하면서 확실하게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대전지목구가 어느 지역까지를 관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의견이 매우 분분하였다. 여기에는 파리외방전교회가 경상남도 지역을 관할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는 견해도 나오기도 하였다.33) 이것은 아마도 처음 분리가 논의될 때에 나온 견해가 아닐까 한다. 사실 파리외방전교회는 시잘레 신부의 청원에서 보여주듯이 충남지역은 물론, 충북지역까지를 요구했던 것이다.34)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리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며, 충북지역 성직자들의 반발이 있었다는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35) 뿐만 아니라 그것은 평양교구를 관할하던 미국의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어느 지역에 정착하느냐의 문제와 서로 맞물려 있었던 문제이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파리외방전교회의 누구를 새로운 교구의 책임자로 삼는가의 문제도 함께 있었다. 노기남 주교에 의하면 라리보 주교를 주한 교황사절로 임명되기를 바랐다고 한다.36) 그러나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번 주교가 교황대사로 임명됨으로써 상황이 변화되었던 것 같다. 또한 당시 파리외방전교회의 지부장이었던 시잘레 신부의 향배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지부장으로서 그가 새로운 교구의 책임자 자리를 원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라리보 주교가 서울대목구장을 사임한 이후 그가 지부장이 된 것은 회원들의 라리보 주교에 대한 불만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37)

 

이러한 가운데 서울대목구장에서 은퇴한 라리보 주교가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오기선 신부는 “그때 충남이 신자들도 많고 가장 유순한 곳으로 인정되어 원 주교님께서 외방선교회와 타협으로 충남교구로 옮기시면서 대전교구가 설립되게 된 것이다.”라고38) 설명하고 있다. 라리보 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과 타협함으로써 대전지목구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즉 그가 대전지목구의 설립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한 교황사절인 번 주교와 노기남 주교 및 무세 주교가 그에게 대전지목구장을 강권하였다고 한다. 라리보 주교가 이를 거부하였지만, 결국 서울대목구에 이어 다시 대전지목구의 책임자가 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한편 충남지역이 최종적으로 선택된 데에는 라리보 주교 자신이 합덕과 서산의 본당신부를 역임할 때의 좋은 인연도 어느 정도 작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새롭게 설립된 대전지목구와 관련해서 문제가 된 것은 정말 지목구인지, 아니면 단지 서울대목구의 ‘감목대리구’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혼란이 일어난 배경에 대해서 파리외방전교회의 최세구 신부는 “로마 교황청은 기실 1948년 6월 대전지목구를 설립하였고, 은퇴 중인 주교지만 본당설립자이자 주임신부로 있던 라리보 주교를 1948년 7월 4일자로 대전지목구장 서리로 임명하였다. 라리보 주교는 그때까지 서울과 대구 대목구에 소속되어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 대다수를 그의 주위로 모아들였으나,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는 일을 소홀히 하였다. 그래서 신설교구가 정말 지목구인지, 아니면 단지 서울대목구의 ‘감목대리구’인지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고 설명하고 있다.39)

 

〈천주교 대전교구의 설정〉을 구체적으로 다룬 연구에서도 이와 같은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목구장 서리직을 맡은 라리보 주교의 개인적인 문제와 6ㆍ25 전쟁이 큰 변수로 작용하였다. 라리보 주교는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놀라운 기억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반면 기록을 남기는 일에는 너무 소홀하였다. 더구나 노년에 이른 그는 자신이 직접 수행해야 하는 보고 사항들을 상부에 알리지 않음으로써 자주 문제가 발생하였다. 1948년과 1949년에는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성영회 사업 내용을 보고하지 않아 한 푼의 보조금도 받지 못하는 일까지도 있었다. 라리보 주교는 포교성성과의 관계 안에서도 같은 태도를 취했을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포교성성에 보내진 서신은 그 사본을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로도 보내는데 그런 서신들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포교성성에서 보인 ‘대전지목구에 대해 아는 바 없다’는 반응은 대전지목구가 설정된 이후 새 지목구장이 수행해야할 행정절차들을 소홀히 함으로써 온 결과인 듯하다.”40)

 

라리보 주교가 대전지목구가 설정된 이후 새 지목구장이 수행해야할 행정절차들을 소홀히 하였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라리보 주교가 대전교구 설립을 위한 서류처리를 소홀히 하였다는 내용은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낳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인 성향에서 대전교구의 설립과 성격에 대한 혼란의 이유를 찾는 것은 잘못된 접근이 아닐까 싶다. 자료집 (2)에 실린 여러 기록들에서 잘 나타나고 있듯이, 대전지목구의 설립은 1948년으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으며, 라리보 주교도 동일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보다는 서울대교구나, 주한 교황대사의 문제나, 서울대목구와 파리외방전교회의 관계가 보다 더 큰 요소로 작용하였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듯하다.

 

그것은 라리보 주교의 대전지목구장 임명이 서리였다는 사실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라리보 주교를 서리로 임명한 사실이 대전교구장으로서 그의 임기나 역할은 임시였으며, 제한적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점에서이다.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교구가 분리되는 과정에서 초대교구장이 서리라는 직함으로 시작된 경우는 없었다는 점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폭풍우가 닥쳐올 것을 예감한 라리보 주교는 서울대목구에 한국인 주교를 임명해 달라고 일본주재 교황대사인 마렐라 주교에게 서신을 보냈다. 세 성직자의 이름을 적어보냈지만, 명동 비에모 신부의 보좌인 노기남 신부를 선택해주기를 암시하였다. 처름에 노기남 신부는 서울대목구장 서리일 뿐이었다. 하지만 라리보 주교는 주교품을 주어 대목구장에 임명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일본인들을 기습 공격한 것이다.”라고 하여,41) 라리보 주교가 서리로 임명된 노기남 신부로 하여금 주교가 되어 서리직을 뗄 수 있도록 바로 노력했던 것과도 커다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라리보 주교를 대전지목구의 서리로 임명한 배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라리보 주교가 서리의 직함을 받은 데에는 노기남 주교와 직책상 갖게 되는 불편한 관계에서 비롯된 듯하다. 1942년 이후 서울과 대구대목구를 한국인과 일본인 교구장이 각각 맡게 됨으로써 한국에 활동하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 안에서는 자신들의 소속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전에는 대목구장이 곧 자신들의 장상이었으나 이제는 별도의 장상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1942년에 새 장상을 뽑기 위한 투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라리보 주교가 선출되었다. 이 때문에 라리보 주교는 후일 대전이 분리될 때에 지목구장이 되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런데 라리보 주교는 노기남 주교의 선임 서울대목구장이었다. 선임 대목구장이 자신의 후임자에게 새 지목구 독립의 허락을 맡고 직책도 낮은 지목구장이 되어야 했다. 결국 번 주교와 노기남 주교는 라리보 주교를 찾아가 ‘지목구장 서리로 임명될 뿐이고 그것도 임시에 불과하다’고 설득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42)

 

위의 내용에서는 선임 대목구장인 라리보 주교가 지목구장이 됨으로써 노기남 주교와 직책상 갖게 되는 불편한 관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선임 대목구장이 자신의 후임자로부터 직책도 낮은 지목구장이 된다는 것은 모양새가 나빴다는 것이다. 이 역시 조금은 피상적인 접근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미 잘 지적되고 있듯이, 임시에 불과한 서리직이 항구적인 직책처럼 되었다는 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43) 라리보 주교 자신이 깊이 인식하고 있듯이,44) 시간이 경과하면서도 지목구장 서리라는 그의 위치는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 대전지목구장을 맡기를 강권하였던 노기남 주교나, 주한 교황사절은 새로운 움직임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를 대신하여 새로운 인물이 지목구장이 된다든지, 아니면 그에게 서리라는 명칭이 없어지도록 해주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서리란 지위는 매우 애매한 위치였던 것이다. 보다 많은 검토를 필요로 하지만, 신리 공소에 있는 〈십자가의 길 14처 설치허가서〉에 담긴 내용을 통해서도 그러한 사정을 엿볼 수 있다. 1956년에 라리보 주교에 의해서 직접 사인된 이 문서는 “두사 명의 주교이며 1951년 1월 1일에 10년 기한의 특별기한을 받은 대전지목구장 서리인 본인 아드리앵 요셉 라리보는 당진군내 합덕본당 주임인 박 바오로 신부에게 신리 공소에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할 권한을 위임합니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1948년이 아니고 1951년 1월 1일이라는 날짜를 왜 언급했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표시한 견해는 “1948년에 라리보 주교가 받은 권한이 지목구장 서리로서 받은 일시적인 권한이었고, 6·25 전쟁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연장되어야 할 상황이어서 1951년에 갱신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45) 그만큼 라리보 주교의 지목구장 서리직에 관련된 여러 부분들은 좀 더 면밀한 검토를 필요로 한다.

 

한편 비록 서리라고 하더라도 라리보 주교에게 실질적인 권한이 부여되었다고 이해되기도 한다.46) 그러나 그가 교구운영을 위해서 제대로 권한을 행사하면서 움직일 수 있었던 형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태에서는 서울대목구와 공식적인 분리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1957년에 들어와서 나온 노기남 주교의 언급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충청남도라 불리는 지방을 서울대목구에서 공식적으로 분리하여 대목구로 승격시켜”라고 하여,47) 지목구 상태의 대전교구가 서울대목구와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노기남 주교가 대전지목구에 대하여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고 지적하는 견해까지도 찾아진다.48) 이 역시 당시까지도 대전지목구의 성격에 논란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라리보 주교 역시 이러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그것은 파리외방전교회를 위해서나 자신을 위해서나 바람직한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렇게 해서는 대전지목구가 실질적으로 독립된 교구의 위치를 확보하고,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는 점에서이다. 이러한 자신의 위치가 그의 교구만이 아니라 운영에도 상당한 제약을 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결코 대전지목구의 성장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그는 이러한 상태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견해를 밝히게 된다. 그의 움직임이 구체화된 것이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1957년에 들어와서야 그것이 시도된 것으로 언급한다.49) 그러나 그보다는 훨씬 이전의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에 라리보 주교가 로마를 방문하면서 이러한 문제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50)

 

“그런데 현 주한 교황사절 서리인 퀸란 주교님이 제게 말씀하시기를, 포교성성이 대전지목구에 대해 아는바가 없다 하며 새 지목구를 만들기 위해 서울 대목구로부터 분할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전지목구는 이미 9년 전부터 저에게 맡겨졌습니다. 추기경님, 어떻게 된 일인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한 교황사절관에 서류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1950년에 로마에서 니그리스 주교님을 만났을 때, 그분은 교황청 연감에 대전지목구가 기재되어 있지 않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제가 그동안 일들을 말씀드리자 니그리스 주교님은 연감을 고치기 위해 메모를 하셨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습니다. 추기경님, 이 일이 신속하고 명확하게 해결되도록 분명한 지시를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51)

 

이러한 요구에도 교황청은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다. 1957년에 들어와서 그는 다시 움직여야만 했다. 이번에는 이전과는 달리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충청북도를 메리놀 외방전교의 대목구로 설정하여 분리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전지목구가 그와 달리 지목구로서 이제야 새롭게 승인을 받는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그가 1956년에 교황의 탑전시종이 되었다는 요소도 일정 부분 작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 결과 역시 1956년 말부터 서울대목구의 노기남 주교도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가 포교성성에 대전지목구를 대목구로 승격시키는 한편, 청주대목구의 분리를 함께 요청하였기 때문이다.52)

 

그 결과 포교성성은 마침내 라리보 주교에게 1948년에 이미 모든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그리고 1958년에 대전지목구를 대전대목구로 승격시키면서 라리보 주교로 하여금 서리직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었다. 이것은 대전지목구장에 대한 인사명령서를 받지 않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53) 이제 그는 임시라 아니라, 정식으로 교구장직을 수행하며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즉 그가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대전교구의 실질적인 출발을 알려주는 대목구장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 “라리보 주교는 1956년 4월 27일에 교황청으로부터 탑전시종의 작위를 받았고, 1958년 7월 4일에는 대전대목구장이 되었다. 이 인사명령은 사실상 지난 10년간 계속된 교구장의 직책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분명히 했고, 한국교회 안에서 라리보 주교의 위치를 좀 더 분명히 했다는데 의미가 있다.”고 한다든지,54) “1958년 6월 23일 설정된 지 얼마 안 된 대전교구는 대목구의 반열에 공식적으로 올랐는데, 이것으로 실제로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한국 교회 내에서 라리보 주교의 지위를 분명하게 하며 강화해 주었다.”고55) 설명되고 있다. 이와 같이 대전대목구의 승격은 이제 한국천주교회에서 라리보 주교의 위치를 분명하게 해주고, 더욱 강화시켜주었던 것이 분명하다. 서울대목구장직에서 은퇴한 주교를 잠시 서리로 임명하여 새로운 교구의 분리를 추진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로 하여금 다시 대전대목구장이 되어 적극적으로 활동할 계기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라리보 주교에 대한 대전대목구장 착좌식이 거행되었다. 그리고 그는 교구장으로서의 마지막 사업으로 주교좌 성당을 건립하는데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대전대목구의 위치를 제대로 확립하기 위한 그의 또 다른 움직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1962년에는 한국천주교회에 교계제도가 실시되면서 대전교구로 정식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이때에도 그가 초대 대전교구장이 되었다. 이후 “주교님은 주교좌 성당을 새로 짓기 위해 오랫동안 자금을 마련하셨고, 1963년 5월 1일에 기쁨으로 축성식을 거행하셨습니다. 이것이 주교님의 최후의 작품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듯이,56) 당시 한국천주교회로서는 최고의 주교좌성당을 마련하여 자신의 교구장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와 같이 1948년 5월에 설립된 대전지목구의 변화 양상을 볼 때 라리보 주교의 독립적 교구운영이란 1958년 6월에야 비로소 가능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대전대목구로의 승격이 이루어진 시점은 대전교구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중요한 분기점으로 새롭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후부터 교구장 서리에서 벗어난 라리보 주교는 당시 한국천주교회에서 활동하는 최고의 원로라는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교구에 대한 본격적인 사목을 전개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교회법적으로는 1948년 5월 1일이 대전교구의 설립일이라고 한다면, 실질적인 대전교구의 독립은 1958년의 6월 23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Ⅳ.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의 위치 재정립

 

대전교구의 초대교구장이 된 라리보 주교가 교구운영을 위해서 가장 많이 신경을 썼던 부분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의 관계였다. 서울대목구장이었던 그가 새로운 교구장을 한국인 성직자가 임명되도록 함으로써 그들과의 갈등이 계속되었으며, 그것은 대전지목구장으로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대전지목구장으로 재임하면서도 대전교구의 성격에 대하여 상당한 논란이 일어났던 것도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과도 일정 부분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라리보 주교는 한국천주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자신이 담당하는 교구 안에서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위치를 재정립하도록 계속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서 파리외방전교회의 회칙 2조를 충실히 따르려고 하였다. 다름 아니라 “교구에서 양성된 성직자들이 우리의 활동과 보살핌 없이도 지낼 수 있다고 판단될 때, 교황청에서 그것을 적절하게 판단한다면 우리는 모든 시설과 기관을 넘겨주고 선교를 위해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선교사로서의 그들의 사명이란 한국인에 의한 한국천주교회가 되도록 하는데 그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전지목구라는 신설 교구에 대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의 방침이기도 하였다. 1948년 7월 파리외방전교회의 총장신부도 라리보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20, 30년 후면 대전교구도 한국인 성직자들이 이끌어 갈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57) 때문에 그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성직자들이 한국인 성직자나 신자 위에서 군림하려고 한 자세에 더 이상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이래로 한국인 성직자에 대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멸시문제가 계속적으로 지적되어 왔던 점도58) 분명하게 의식했을 것이다. 이때 라리보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소속 선교사로서 어느 누구보다도 파리외방전교회가 추구하는 본래의 목표를 제대로 실천했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라리보 주교의 바람은 그의 뜻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일부 파리외방전교회의 소속 선교사들이 이에 반발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은 그의 서울대목구장 사임이후 진행된 파리외방전교회의 지부장 선출에서 바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 분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저는 지부장 선출에서 ‘그분의 패배’가 왜 한국 성직자들과 교우들에게 뜻밖이었고, 왜 우리 선교사들에게서 아주 적은 표를 얻었는지를 압니다. 첫 번째 한국인 대목구장을 고려한 라리보 주교님의 사임은 서울 대목구를 계속 관할하고 싶어하는 많은 선교사들에게는 그들의 희망이 끝나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권한 이양은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다만 라리보 주교님은 이 일로 인해 비난받을 것이 없다는 생각입니다.”59)

 

이러한 까닭에 1942년 라리보 주교의 사임 이후 파리외방전교회의 지부장으로 라리보 주교가 아닌 시잘레 신부가 선출되었다.60) 그는 라리보 주교의 사목활동을 비판적으로 본 대표적인 인물로 생각된다. 그것은 “우리 선교지에는 두 파가 있습니다. 하나는 라리보 주교님 파, 다른 하나는 시잘레 파였조.”라는 언급을 통해서61) 당시 파리외방전교회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두 명의 지부장 후보자 사이에는 거의 표의 차이가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때문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과 함께 새로운 교구인 대전지목구를 운영해야만 하는 라리보 주교에게 이러한 상황은 상당한 부담으로 남게 되었다고 하겠다.

 

우선 그것은 라리보 주교를 파리외방전교회의 새로운 한국지부장으로 임명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저의 첫 번째 응답은 이 무거운 짐을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감당하기에는 불가능해보였고, 그 책임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잘레 신부를 거드는 세 분의 주교님은 ‘로마의 요구는 명령이나 다름없다.’, ‘몇 달 안에 새로운 지부장 후보를 선출할 듯하다.’등의 말을 하며 제게 강권했습니다. 결국 저는 그분들의 의견을 따라 저희에게 맡겨진 새 교구를 위해 일하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제가 변변치 못한 설립자이며, 새 교구를 설립할 자금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말입니다.

 

시잘레 신부가 지부장 사임을 주교님께 표명했지만 그가 얼마나 잘 판단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임시로 지목구장 서리로 임명된 뿐이니, 곧 있을 지부장 선출을 기다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회칙 상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저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좀 더 긴급한 몇 가지 문제들이 있습니다. 첫째 만일 서울과 대구대목구의 우리 선교사들이 새 교구에서 일하기를 거부한다면 그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들의 지위는 무엇입니까? 기존의 두 대목구에서 특수한 일에 종사하는 신부들, 즉 수도회의 지도 신부나 신학교 교수 신부들과 같은 이들은 별 문제가 안 됩니다. 대목구장들 간에 합의가 이루어져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 전교회가 직면한 새로운 상황을 거부할 지도 모를 동료들에 관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위의 내용에서처럼 라리보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새로운 선택에 대해 반발할 동료들에 대한 염려를 피력하고 있다. 때문에 그는 새로운 지부장 선출을 기다리고자 하였다.

 

이에 대해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는 라리보 주교에게 힘을 실어주었다.62) 새로운 교구인 대전지목구에 타격을 주지 않는 한 서울과 대구 대목구에서 중요한 일을 맡고 있는 신부들은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고 결정한다. 그리고 그에게 한국에서 선교하고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을 대표할 수 있는 권한서를 동봉하였다. 이는 라리보 주교가 대전지목구장으로서 한국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새로운 지부장으로 임명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에게 이전처럼 새로운 선교지에서 강한 적응력을 발휘해주기를 바랐다. 그 결과 대구대목구장이던 무세 주교도 대구지역의 선교사들의 지부장직을 사임하게 되었으며, 그는 앞으로 라리보 주교와 상의하기 전에는 어떠한 일도 처리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63) 이제 라리보 주교는 서울과 대구에 남은 10명을 제외한 15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함께 대전지목구를 이끌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파리외방전교회는 라리보 주교에게 새로운 선교사의 파견을 제안하였다. 1949년 말에 들어와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는 새로운 선교사를 파견하는 것이 시의적절하고 유용한가를 묻고 있다.64) 이에 라리보 주교는 1950년에 들어와서 응답한다. “이곳에는 젊은 선교사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나이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온다고 해도 한국말을 배우며 지낼 곳이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가 주교님께 새 선교사들을 요청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제 생각에 올 가을에는 가능합니다.”라고 하며,65) 그는 새로운 선교사를 파견해줄 것을 본부에 요청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역시 이러한 그의 견해를 승낙하였다. 총장 주교는 “저 역시 가능한 빨리 몇 명의 젊은 선교사들을 대전교구로 파견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점점 더 심해지는 연령차이는 기존 선교사들과 젊은 선교사들 사이에 격차를 벌어지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주교님께서 곧 프랑스에 오신다니 무척 기쁩니다. 젊은 선교사들에 대한 문제는 대화로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66) 새로운 선교사의 한국파견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여기에는 기존의 프랑스 선교사들의 활동에 대한 라리보 주교의 불만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가 성가소비시녀회를 창설한 생제 신부에 대해서 참으로 훌륭한 신부라고 언급한 것처럼, 논산의 학교 설립 등을 추진하는 등 그와 적극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선교사도 찾아진다.67) 루이 델랑드 신부에 대해서도 사회복지사업을 통해서 그의 오랜 경험이 열매를 거두고 있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는 점도 그러하다.68)

 

그러나 자신의 선교지 변경을 획책하는 등 콜라르 신부처럼 함부로 행동을 하는 프랑스 선교사들도 있었던 것이다.69) 폴리 신부의 경우에도 그의 스타일로 말미암아 탕자로까지 비유되기도 하였다.70) 또한 그는 자신이 담당했던 지구장직의 후임선출과 관련해서, “좀 더 유능해 보이는 동료들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아 놀라실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어쩔 수 없습니다. 시잘레 신부는 너무 속이 좁습니다. 보드뱅 신부는 감각이 뛰어나지 못하고 판단력과 신중함 또는 표현할 수는 없지만 뭔가가 부족합니다. 용서하세요.”라고 하여,71) 관련 인물들을 평가하고 있다. 그는 자신과 대립한 시잘레 신부나, 그를 도와서 대전교구의 부주교와 파리외방전교회의 부지구장직에 있던 보드뱅 신부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견해를 드러낼 정도였다. 그만큼 프랑스 선교사들이 라리보 주교와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사목활동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라리보 주교나 총장 주교의 말에서 프랑스 선교사의 나이가 언급되고 있지만, 라리보 주교는 그 보다는 이들의 한국인에 대한 선교방식을 보다 큰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특히 그것은 그가 용산 신학교의 개혁을 수용할 때의 상황을 통해서 엿볼 수가 있다.

 

“동성상업학교와 함께 소신학교를 졸업하고 용산 대신학교로 옮겨갔다.… 용산으로 가서 철학과 신학을 배우는데 소신학교에서 6년 동안 배운 라틴어 실력만 가지고는 도저히 강의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그러다가 의견은 점점 모아지기 시작하여 1937년 말에 정식으로 학교당국에 진정을 하기로 했으나, 이미 한번 경험한 바라 방법에 신중을 기하기로 하고, 요청사항을 24개로 하여 기록해 놓았다.…후담으로 들은 이야기지만 교장신부님이 보고 차 주교님께 갔을 때 꾸중을 듣고 오셨다는 말이 있다. 원 주교님 말씀이 “학생들 청하는 것이 부당하다고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지 않소? 우리가 먼저 생각해서 해주지 못한 것이 잘못이지 학생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오? 급한 것부터 한 가지씩 해주도록 하시오.” 하셨단다. 그 결과 40년 동안 써내려오던 책상, 걸상이 새것으로 바뀌고, 없던 옷장이 들어오고, 도서실도 생기고,…석달 안에 23가지가 다 실천되었다.…다음해인 39년에 윤을수 신부를 유학 보내고…이것은 물론 하느님의 안배이지만, 원로 신부들의 반대와 경제적인 난관을 극복하고 영단을 내리신 원 주교님의 공덕을 치하해 마지않는다.”72)

 

그는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사회에 제대로 적응해가지 못하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에 대해 커다란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한국인 성직자를 제대로 양성할 수 없으며, 한국에 대한 선교도 올바르게 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젊은 새로운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해서 새로운 선교를 펼쳐가기를 바랐다고 하겠다. 이때 그는 파리외방전교회의 한국 지부 사정이 “앞으로 도착할 젊은 선교사들이 이곳의 좋지 않은 상황을 보면서 용기를 잃지 않을까 염려”하였다.73) 새로이 한국에 오는 젊은 선교사들은 이전의 선교사들과 다르기를 바랐던 것이다.

 

두봉 주교의 활동을 통해서 이를 쉽게 엿볼 수가 있을 것이다. 잘 알려지고 있듯이, 매우 진보적인 선교사였던 그는 프랑스 선교사가 교회의 쇄신을 바라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수용하여 살아갈 수가 없다면 자신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강하게 요구할 정도였다.74) 낡은 선교방침을 버릴 수가 없다면 한국을 떠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라리보 주교가 지향하던 바였던 것이다. 두봉 신부처럼 이들 새로운 선교사들은 라리보 주교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이런 상태로는 대전지목구가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의 선교목표처럼 운영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6·25 전쟁은 특히 대전교구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희생되었다. 모두 9명의 신부들이 희생되었던 것이다.75) 그의 말대로 대전지목구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그로 하여금 절망 속에 빠트렸다. 교구 사목에 커다란 어려움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76) 때문에 그에게 새로운 선교사의 파견을 더욱 필요로 하였다. “조금은 힘든 몇 해를 보내야만 할 것이고, 앞으로 도착할 젊은 선교사들이 이 곳의 좋지 않은 상황을 보면서 용기를 잃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우리의 처지가 공고해지기만을 바랍니다. 그래야 이곳에서 우리가 쫓겨날 걱정 없이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여,77) 그는 남은 프랑스 선교사들로서는 한국에서 쫓겨날지 모른다고까지 우려하였다. 한국에서 파리외방전교회의 처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도 빠른 선교사 파견을 바랐다.

 

이후 라리보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지부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1954년 12월에 이르러 새로운 신부 3명이 파견되었다. 블랑 신부와 두봉 신부 그리고 노엘 신부였다. 이에 대해서 그는 “파리 본부에서는 올해 세 명을 우리 교구로 파견했고, 내년에도 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니 절망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앞으로 좋은 날이 올 것입니다. 더욱이 한국인 새 사제들의 탄생으로 선교 일꾼들이 곧 더 늘어날 것입니다. 생제 신부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나 근심, 재정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선교하는 것이 좋다고 거듭 말합니다. 일을 할 수 있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어 용기가 생긴다고 합니다.”고 하며,78)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다음 해에 4명의 새로운 선교사가 계속해서 도착하였다. 이제 대전지목구는 새로운 변화를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1955년에 라리보 주교가 작성한 긴 〈연례보고서〉에 잘 서술되고 있다.79)

 

새로운 정신을 가진 새로운 프랑스 선교사와 함께 새로운 대전지목구를 운영하기를 바랐던 라리보 주교는 대전교구 출신의 한국인 성직자의 양성에도 커다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특별히 성모께 대한 신심이 높았던 고 원 주교는 교구장 재직 중 같은 잘못을 범할 경우 프랑스 신부를 더 책하는 등 한국인 신부들을 감싸주어 여러모로 소침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인 신부들을 격려해주었다.”고 한다.80) 그래야만 한국인 성직자에 의하여 대전교구가 제대로 운용되어 나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라리보 주교는 이들 한국인 성직자들이 프랑스 선교사와 서로 조화롭게 공존하기를 또한 바랐다. 그는 한국인 성직자들이 독자적으로 대전교구를 운영되기에는 아직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그럴 때까지 한국인 성직자들은 프랑스 선교사의 도움이나 협력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인 성직자들이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운영하는 것 역시 경계하기 위한 것으로도 이해된다. 다시 말해서 라리보 주교는 서로 다른 국적의 성직자들이 천주교라는 보편교회 안에서 서로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대전교구를 이끌어가라고 요구하였던 것이었다.

 

라리보 주교는 대전지목구에서 한국인인 새로운 사제들이 계속해서 탄생하면서 선교의 일꾼들이 곧 더욱더 늘어날 것으로 보았다.81) 1950년에 들어와서 두 명의 대전지목구 출신 한국 사제들이 탄생하였다.82) 앞으로 10년 동안 15명 정도의 젊은 한국 사제가 탄생할 것으로 전망하였다.83) 그리고 그는 교회가 필요로 하는 제대로 된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해서 대전지목구 출신의 신학생들을 계속해서 유학을 보내었다. 이것은 서울대목구장 시절 그의 사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징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84) 당시 한국인 신학생들이 간절하게 바라던 소망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라리보 주교의 이러한 노력은 앞으로 한국인 성직자에 의해서 운영되는 대전교구를 위한 인재 양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백남익 신학생은 로마로, 황민성 신학생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85) 그는 이렇게 해야만 한국인에 의한 한국천주교회, 그리고 대전지목구를 제대로 이룰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편 라리보 주교는 한국인 성직자에 대해서만 깊은 관심을 둔 것은 아니었다. 그의 한국인 신자에 대한 각별한 애정은 널리 잘 알려져 있다. 그만큼 그는 한국인 신자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뮈텔 주교는 라리보 신부를 조선대목구의 남쪽 지방인 충청도로 보내어 두 개의 본당을 맡겼다. 폴리 신부의 수곡본당과 크렘프 신부의 합덕본당이었다. 이 지역은 한국에서 복음화가 이루어진 첫 번째 지역이었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는 이 지역의 교우촌들 중 한곳에서 체포되었다. 라리보 신부의 일은 끝이 없었다. 이 일은 한국의 초가집에서 먹고 자는 여러 달 동안의 긴 여정이었지만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니었다. 그를 대단히 존경하는 한국인들에게 적응하는 법을 알았기 때문이다. 라리보 신부에게 붙여진 최고의 칭송은 그가 사람들의 얼굴을 정말로 잘 기억하고 놀라울 정도로 타고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어떤 사람을 한 번만 보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 이름을 부를 정도여서 사람들에게 대단한 기쁨을 주었다.”86)

 

“합덕 신자들은 라리보 신부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적응주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주교님은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도록 실천하셨기 때문이죠. 걱정이 없고, 주어지는 시간을 즐길 줄 알며, 가치 있는 것에 몰입할 줄 아는 어린이와 같은 주교님의 성품은 복잡한 것을 싫어하고 단순한 그곳 사람들과 훌륭한 조화를 이루었습니다.”87)

 

“이 시기에 그는 충청도 합덕 본당 신부로 부임하여 혼사서 40여개의 공소를 맡아 순방하였다. 라리보 신부는 성격이 쾌활하고 솔직하며 한국인의 성격적 특성과 잘 조화를 이루는 전교활동을 폈기 때문에 신자는 물론 외교인들과도 좋은 관계로 지낼 수 있었다.”88)

 

“이 지역에 2년(3년?)밖에 머물지 않았지만, 그를 평생 동안 따라다닐 평판을 얻었는데,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의 얼굴에 대한 놀라운 기억력이 그것이었다.”89)

 

이는 그가 제 1차 세계대전기간 동안 충청도 합덕과 서산 본당을 역임할 때의 일이었다. 이와 같이 한국인 신자들과 깊은 일치를 이루려고 노력한 사실은 그의 본당사목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매우 인상적이었다.

 

대전교구의 올바른 발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왔던 라리보 주교는 두 차례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1963년 말의 회기가 끝나자 그는 교구장직에 대한 사의를 표명하였는데, 11월 3일에 수리되었다. 이는 세계 교회의 변화를 직시한 그가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 교구장이 필요하다고 여겨 사임하였다고 이해되고 있다.90) 올바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80살의 나이가 된 그는 이제 자신이 아니더라도 한국인 성직자에 의해서 대전교구가 이끌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파리외방전교회가 대전지목구가 설립될 때 20년 혹은 30년을 예상한 것보다 조금 빠른 일이 되었다.

 

라리보 주교가 대전교구장에서 은퇴하기로 마음에 먹고서 로마로 떠나기 전의 상황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오기선 신부가 대전교구에서 한국인 주교가 탄생한 배경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떠나시기 전에 서울 성모병원에 입원하고 계셨다. 우연히 명동 성모병원에 가는 중 성당 입구에서 황(민성) 주교님(그때 황 신부님)을 만났다. 그때는 신학교 학장을 하고 있을 때였다. 만나기가 무섭게 “내가 너의 교구 주교가 되면 어떠하냐?”하신다. 그때 그대로 쓴다면(죄송하지만) “야, 황소야, 네가 정말 우리 주교가 된다면 나는 다른 데로 가야지”하고 농담으로 대답하였다. 그때 황 주교님의 표정은 너무나 음울하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때 황 주교님은 병원에서 원 주교님을 만나시고 무슨 언급을 받고 나오시는 중이었다. 나의 추측으로는 불란서 신부님들의 생각으로 그래도 불란서에서 공부하시고 말이 통하는 주교님을 필요로 하여 황 주교님을 택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하였듯이,91) 라리보 주교는 한국인 성직자를 그의 뒤를 이을 주교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 선교사와의 관계를 고려해서 오랫동안 그의 비서를 맡은 오기선 신부가 아니라, 프랑스에서 유학한 황민성 신부를 선택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가 물러난 뒤에도 한국인 성직자와 프랑스 선교사의 관계가 원만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는 그가 서울대목구장으로서 한국인 노기남 주교를 선택한 것처럼, 대전교구장으로서 한국인 황민성 주교를 계속해서 선택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한국인의 한국교회 건설에 대한 초석을 놓고 건설하는데 불후의 공헌을 하였다”고 언급되었듯이,92) 그의 거듭된 선택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매우 높이 평가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은퇴는 “진실로 원 주교의 교구장직 사임으로써 한국에 있는 성교회의 역사에 한 가지 중요한 시기가 끝을 고했”음을93)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라리보 주교의 선택은 곧바로 쉽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과의 관계가 여전히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주교님은 바티칸 공의회의 제 2회기가 끝난 후 교황청에 사의를 표명하셨고, 1964년 3월 4일 티니스 명의주교로 임명되면서 수리되었습니다. 같은 날 제가 대전교구의 교구장 서리로 임명되었는데, 분명 주교님의 추천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주교님을 괴롭게 해드린 것에 대한 복수인 듯합니다.”94)

 

“요한 23세 교황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라리보 주교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첫 번째 회기에 참석했다. 이후 라리보 주교는 예고 없이 사표를 제출했는데, 1963년 11월 2일에 수리되었다. 만 80세가 넘은 나이였다. 그는 자신이 물러나야 할 시기이고, 젊고 활동력 있는 성직자가 대전교구를 관할하도록 맡겨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교구장이 공석인 동안 보드뱅 신부가 교구장 서리로 임명되어 대전에 다른 주교를 임명하기 위한 소정의 절차를 밟았다. 교황대리대사 델 주디체 주교는 세 명의 주교 후보를 교황청에 추천하기 위해 보드뱅 신부에게 늘 하던 대로 후보 추천투표 결과를 파리외방전교회 총장에게 보내도록 요구했다. 이 상황에서 한국 신부들은 투표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한국인 주교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인 주교를 임명하도록 고집부릴 수 없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총장의 중재에 따라 교황청은 한국인 주교를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이 문제는 장기화되었다. 마침내 2년이 지난 1965년 3월 22일에 황민성 신부가 대전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5월 31일에 대전주교좌 성당에서 교황대리대사에 의해 주교로 성성되었다.”95)

 

라리보 주교는 보드뱅 신부를 교구장 대리로 추천하면서 그가 자신의 결정을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복잡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노기남 주교를 서울대목구장을 추천하였을 때의 상황이 되풀이되었던 것이다. 대전교구의 파리외방전교회 일부 신부들은 프랑스 선교사가 계속해서 주교를 맡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이에 한국인 성직자들은 투표를 거부하였다.

 

그러한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한국인 황민성 신부가 주교로 대전교구장으로 결정되었다. 거의 2년 동안에 있었던 혼란은 결국 라리보 주교의 의사대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제 일제 말에 이어, 해방 후 새로운 한국사회 안에서도 한국인에 의한 한국천주교회를 바랐던 그의 노력이 거듭해서 결실을 거둔 것이다. 그는 파리외방전교회의 회칙을 따라서 한국천주교회가 한국인 성직자와 신자들이 중심이 되어야 하며, 프랑스 선교사는 그 일을 도와주는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라리보 주교의 대전교구장 은퇴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하겠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함께 한국천주교회사, 그리고 대전교구가 새로운 출발을 하라는 그의 깊은 배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전개된 대구대목구의 사정과 함께 파리외방전교회가 안동교구를 관할하게 되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Ⅴ. 맺음말

 

지금까지 프랑스 선교사인 라리보 주교의 대전교구 사목에 대해서 간단하게 알아보았다. 그는 대전교구를 설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전교구의 기반,96) 즉 굳건한 기초를97) 마련해 놓은 인물이었다. 이때 그는 교구장으로서 또한 주교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또한 선교지에서 선교사의 사명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자 노력하였다. 교황 요한 23세가 과도기의 교황이었듯이,98) 그 역시 한국천주교회사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준 과도기의 주교였으며, 또한 그는 적응주의 선교정책을 어느 누구보다도 구체적으로 시행한 프랑스 선교사였다.99) 그는 고령의 나이라는 한계를 넘어서 자신의 사목활동을 통해서 그것을 보여주고자 지속적으로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를 토대로 해서 한국인 성직자와 신자들이 중심이 되는 한국천주교회와 대전교구가 더욱 새로운 도약을 간절히 바랐다.

 

“대전으로 내려간 그는 신사 자리였던 현 대흥동 주교관 자리를 매입하여 신사 주지가 살던 세 평 남짓한 방에 침대와 책상 하나만을 놓고 청빈하게 살아 63년 포교성성 장관이던 아가지아니안 추기경이 ‘세계에서 가장 이상적인 방’이라는 감탄을 낳게 했던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56년간 이 땅에서 살았지만 1963년 떠난 후에도 마음만은 언제나 한국에 있어 “한국에 뼈를 묻고 싶다.”고 말해왔다. 결국 그는 선종하기까지 한국에 마음을 두고 산 ‘우리의 벗’이었다.

 

72년 8월 그의 비서를 지냈던 오기선 신부가 요양소를 찾았을 때 눈물을 글썽이며 ‘한국에의 연민’을 토로하던 원 주교.

 

그는 이때 “떠나올 때 인사 못하고 온 나를 아는 모든 이에게 대신 안부를 전해 달라”고 손목을 꼭 잡았는데, 이 안부가 그의 생애를 보낸 한국과 한국의 신자들에게 보낸 마지막 인사였다.”100)

 

라리보 주교는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같이 있든지, 홀로 있든지 간에 선교사로서 한국이라는 선교지에 대한 자신의 사명을 결코 잊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서울대목구장과 대전교구장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이상적인 방’에서 청빈하게 살았던 라리보 주교의 삶과 신앙에 대해서는 앞으로 보다 본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두봉, 〈한국에서의 프랑스 선교사의 활동전망〉, 《교회사연구》 5, 1987.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명동본당사》, 2007.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천주교회사》 5, 2014.

천주교 대전교구 편, 《대전교구에서-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문서》, 2008,

천주교 대전교구 편, 《대전교구 60년사》, 2008.

내포교회사연구소 편, 《라리보 주교 자료집(1)》, 2014.

내포교회사연구소 편, 《라리보 주교 자료집(2)》, 2014.

김수태, 〈루이 델랑드 신부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수용〉, 제 8차 교회사연구자모임 자료집, 2016.

김수태, 〈루이 델랑드 신부의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업〉, 《교회사연구》 51, 2017.

 

……………………………………………………………………………………………

 

1) 내포교회사연구소 편, 《라리보 주교 자료집(2)》, 2014, 255쪽.

2) 내포교회사연구소 편, 〈간행사〉, 《라리보 주교 자료집(1)》, 2014, 1쪽. 이하의 서술에서는 자료집 (1)과 (2)로 약칭한다.

3) 〈라리보 주교의 전기〉, 자료집 (1), 31쪽.

4) 〈해제〉, 자료집 (2), 390쪽. 

5) 위의 책, 391쪽.

6) 위의 책, 283쪽에서는 라리보 주교의 대전교구 사목을 교세 및 교육사업과 자선사업의 셋으로 구분하고 있다.

7) 《대전교구 60년사》, 10쪽.

8) 위의 책, 34쪽.

9) 위의 책, 42쪽.

10) 김수태, 〈루이 델랑드 신부의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업〉, 《교회사연구》 51, 2017을 참고하라.

11) 자료집 (2), 389쪽.

12) 자료집 (1), 29쪽 및 자료집 (2), 72쪽.

13) 자료집 (1), 25쪽과 자료집 (2), 85쪽의 각주에서는 이를 후대의 평가에 맡긴다고 말한다.

14) 자료집 (2), 325쪽.

15) 위의 책, 324쪽.

16) 자료집 (1), 21~22쪽.

17) 위의 책, 25쪽.

18) 자료집 (2), 308쪽.

19) 위의 책, 314쪽.

20) 자료집 (1), 264쪽.

21) 위의 책, 341쪽.

22) 위의 책, 560쪽.

23) 자료집 (2), 308쪽.

24) 김수태, 〈루이 델랑드 신부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수용〉, 제 8차 교회사연구자 모임 자료집, 2016.

25) 천주교 대전교구 편, 《대전교구에서-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문서》, 2008, 11~15쪽.

26) 《대전교구 60년사》, 10~12쪽.

27) 자료집 (2), 91쪽.

28) 《대전교구에서》, 13쪽.

29) 자료집 (1), 543~544쪽.

 

30) 《대전교구 60년사》, 11쪽에서도 서울대목구가 그때까지 교구를 담당하던 파리외방전교회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다.

 

31) 자료집 (2), 10쪽.

32) 위의 책, 33쪽.

33) 위의 책, 46쪽.

34) 《대전교구에서》, 13쪽.

35) 자료집 (2), 14쪽.

36) 《대전교구에서》, 12쪽.

37) 자료집 (2), 79쪽.

38) 위의 책, 320쪽.

39) 위의 책, 335쪽.

40) 《대전교구에서》, 198쪽. 

41) 자료집 (1), 22쪽 및 자료집 (2), 335쪽.

42) 《대전교구에서》, 197~198쪽.

43) 위의 책, 198쪽.

44) 자료집 (2). 16쪽.

45) 위의 책, 189쪽.

46) 위의 책, 34쪽 및 204쪽.

47) 위의 책, 204쪽.

 

48) 《대전교구에서》, 199쪽에서는 “그가 1948년의 대전지목구 설정을 인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1958년에 청주대목구가 설정될 때 충청남도 지역도 대목구로 설정함으로써 이전의 문제를 덮으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49) 《대전교구에서》, 198~199쪽. 이때 라리보 주교가 편지를 보낸 시기를 1956년이 아니고, 1957년이라고 수정해서 이해하고 있는데, 1956년이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다시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노기남 주교가 대목구 승격과 관련해서 보낸 시점이 역시 1956년이라는 점에서이다.

 

50) 자료집 (2), 228쪽과 233쪽을 보면, 당시 《경향잡지》에서는 1958년에 두 차례의 기사를 통해서 “다른 한편으로 이미 6·25동란 전에 신청한 대전교구 독립과”와 “대전교구의 분립은 6.25 사변 전에 이미 신청하였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교황청에서 모르고 있어 인정치 않고 있고, 또 분립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을 서울 노 주교께서 극력 간청한 결과로 공식으로는 거번 청주교구와 함께 발령되었으며”라고 말하고 있다.

 

51) 자료집 (2), 202~203쪽.

52) 《대전교구에서》, 199쪽.

53) 위의 책. 34쪽.

54) 자료집 (1), 23쪽.

55) 자료집 (2), 336쪽.

56) 자료집 (1), 32쪽.

57) 자료집 (2), 18쪽.

58) 자료집 (1), 340쪽.

59) 자료집 (2), 79쪽.

60) 최종철 역,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열전》, 내포교회사연구소 홈페이지에 실린 시잘레 신부 약전을 참고하라.

61) 자료집 (2), 78쪽.

62) 위의 책, 15~20쪽.

 

63) 위의 책, 22~23쪽. 1950년 4월에 들어와서 파리외방전교회의 총장 주교는 대전지목구 이외에서 활동하는 회원들에 대한 관할권을 라리보 주교에게 위임하고 있다(위의 책 103쪽).

 

64) 위의 책, 71쪽.

65) 위의 책, 93쪽.

66) 위의 책, 98쪽.

67) 위의 책, 43쪽.

68) 위의 책, 86쪽.

69) 위의 책, 46쪽, 69쪽에서는 그를 방랑자로 표현하고 있다.

70) 위의 책, 66쪽.

71) 위의 책, 161쪽.

72) 자료집 (1), 490~491쪽.

73) 자료집 (2), 160쪽.

74) 두봉, 〈한국에서의 프랑스 선교사의 활동전망〉, 《교회사연구》 5, 1987.

75) 자료집 (2), 149~150쪽.

76) 위의 책, 175쪽.

77) 위의 책, 160쪽.

78) 위의 책, 176쪽.

79) 위의 책, 183~188쪽.

80) 위의 책, 328~329쪽.

81) 위의 책, 176쪽.

82) 위의 책, 111쪽.

83) 위의 책, 53쪽.

84) 위의 책, 189쪽 및 206쪽.

85) 위의 책, 22~23쪽.

86) 자료집 (1), 20쪽.

87) 위의 책, 29쪽.

88) 자료집 (2), 330쪽.

89) 위의 책, 333쪽.

90) 위의 책, 315쪽.

91) 위의 책, 320~321쪽.

92) 위의 책, 328쪽.

93) 위의 책, 317~318쪽.

94) 자료집 (1), 32쪽.

95) 위의 책, 24~25쪽.

96) 자료집 (2), 331쪽.

97) 위의 책, 79쪽.

98) 위의 책, 307쪽.

99) 자료집 (1), 29쪽.

100) 자료집 (2), 328~329쪽.

 

[학술지 교회사학 vol 17, 2020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수태(충남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387376&Page=3&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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