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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6·25 전쟁의 성인으로 불린 에밀 카폰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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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9-09 ㅣ No.767

[허영엽 신부의 ‘나눔’] ‘6·25 전쟁의 성인’으로 불린 에밀 카폰 신부님

 

 

지난 7월27일 청와대에서 열린 “유엔군 참전의 날” 유공 포상 수여식에서 대한민국정부는 70년 전 6.25전쟁 중 포로수용소에서 선종하신 카폰 신부님에게 군인 최고의 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습니다. 이 자리에는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과 미국에서 날아온 에밀 카폰 신부님의 조카인 레이먼드 카폰 부부도 참석했습니다. 조카의 말에 의하면 신부님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도 카폰 신부님이 고향으로 돌아올 것을 굳게 믿고 기다리며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기도를, 성모님께 드린 전구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셨습니다. 올해 초 미 국방부 산하 실종자 확인국(DPAA)에서 무명용사묘지에서 카폰 신부님의 유해 발굴과 신원 확인을 했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한국전의 예수’라 불리는 카폰 신부님의 유해를 확인한 분도 한국계 진주현 박사였습니다. 진 박사는 지난 2월 유해 확인순간을 떠올리며 매우 기뻐했고 마치 카폰 신부가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2021년에는 무명용사들을 모신 묘에서 신부님의 유해가 기적처럼 발견되어 드디어 사랑하는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고향을 떠나 먼 이국땅에서 숨진 지 70년만의 귀향이었습니다.

 

1993년 교황청은 카폰 신부를 ‘하느님의 종’으로 선언했고, 현재도 그의 고향 캔자스주 위치토교구와 미국 군종교구에서 카폰 신부의 시복시성을 추진하며 지금까지도 계속 기도하고 있습니다. 2012년에 교황청은 시복시성을 결정하는 공식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2013년에 카폰 신부님에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군인 최고 영예인 ‘명예 훈장(Medal of Honor)’을 수여하며 “총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가장 대단한 무기를 휘둘러 형제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고 말했습니다.

 

카폰 신부님이 전장에서 지프를 제대삼아 미사를 드리는 모습과 카폰 신부님.

 

 

최악의 포로수용소에서 인간의 존엄한 모습 지켜

 

1940년 6월9일 사제로 서품을 받은 카폰 신부님은 고향에서 보좌 신부와 주임 신부 생활을 하던 중 자신이 사목하던 곳에 다른 신부를 보내줄 것을 교구에 청합니다. 청원이 받아들여져 그는 군종신부로 입대하게 되고, 인도와 미얀마로 파병을 다녀와 전역합니다. 그리고 한동안 다시 본당 신부로 사목활동에 전념하던 중 군에서 많은 목자를 필요로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고심 끝에 그는 자신을 다시 군대로 보내줄 것을 교구에 재 청원하고, 그의 청원이 받아들여져 재 입대하게 됩니다.

 

이렇게 그의 두 번째 군종장교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그는 1950년 7월에 한국에 들어와 6·25전쟁의 최전선에서 군종신부로 활동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간으로서 처할 수 있는 가장 불안하고 긴장되는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카폰 신부님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언제나 전우들과 함께했습니다. 그의 소속 부대는 함경도 원산까지 진격했지만, 그해 11월 중공군에 포위되었습니다. 그 후 몇 차례나 중공군의 포위망에서 탈출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대로 남아 부상병을 돌봤습니다. 결국 그는 붙잡혀 평안북도 벽동 수용소에 수감됐습니다.

 

포로수용소의 환경은 최악의 상태였지만 카폰 신부는 끝내 인간의 존엄한 모습을 지켰습니다. 부상병을 업어주고, 거동이 불편한 부상병의 옷을 대신 빨아주기도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곡물을 훔쳐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카폰 신부님은 포로수용소에서 굶주리는 병사들에게 자신의 식단을 나눠주셨고, 자신의 시계를 담요와 바꿔서 병사들의 양말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다가 포로수용소에서 1951년 가혹한 구타와 학대와 세균에 감염돼 한쪽 눈과 다리에 이상이 생겨 35세의 젊은 나이로 먼 이국땅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군인들의 고해성사를 들으며 사제로서의 의무를 다했습니다.

 

카폰 신부는 고통으로 힘들어 눈물을 흘리면서도 주변의 병사들에게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처럼 자신도 고난을 겪는 것이 기뻐서 운다고 위로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모든 병사들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인간의 고귀한 존엄성을 잃지 않았던 카폰 신부는 포로들의 마음을 하나로 단결시켰고, 죽음의 절망 속에서 희망에 불씨를 살렸습니다. 그래서 포로수용소에서는 적군인 중공군조차 카폰 신부님을 존경했다고 합니다.

 

 

먼 이국땅에서 죽어간 외국 청년들의 고귀한 죽음 기억해야

 

전쟁이 끝나고 포로수용소에서 생존한 사람들이 카폰 신부의 업적과 그가 보였던 헌신을 증언했고, 이를 바탕으로 ‘카폰 신부의 이야기(The story of Chaplain Kapaun)’가 1954년에 미국에서 출간됐습니다. 서울공대에 입학하여 발명가가 되고 싶어 했던 고(故) 정진석 추기경(1931~2021)은 6·25전쟁동안 여러 번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돌연 사제의 길로 진로를 바꾸었습니다. 정 추기경은 신학생 신분이었던 당시 우연한 기회에 ‘종군 신부 카폰’을 접했는데 하룻밤에 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1956년 우리말로 번역했는데 당시에는 신학생 신분이어서 처음 출판에는 다른 신부님의 이름으로 책을 냈습니다.

 

정 추기경은 언젠가 나에게 “카폰 신부님의 삶은 나의 청년 시절,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는 데 도움이 됐어. 그는 나의 롤 모델이었다. 죽음 앞에서도 다른 이를 도와주는 모습을 상상하면 온몸에 전율을 느꼈어”라고 하셨습니다. 정 추기경의 카폰 신부님에 대한 사랑은 특별했습니다. 병상에서도 ‘종군 신부 카폰’ 개정판을 위해 병상에서도 추천사를 나에게 쓰게 하셨고, 수정 사항을 전달하는 등 마지막 순간까지도 카폰 신부의 생애를 많은 이들에게 전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 시기에는 정 추기경도 죽음을 기로에 서있던 위험한 시기였습니다. 정 추기경은 사제가 된 이후로도 줄곧 에밀 카폰 신부의 시복시성(諡福諡聖)을 위해 기도했을 정도로 존경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병상의 심한 고통에서도 카폰 신부님의 유해 수습 소식을 듣고 크게 반기시며, 당신이 마지막 소임을 다 한 것처럼 기뻐하셨습니다.

 

이 땅에 사는 우리가 카폰 신부님을 올바르게 알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날 이루어낸 눈부신 대한민국의 발전은 수십 년 전 이 땅에서 카폰 신부와 같은 외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카폰 신부님에게 대한민국 정부가 훈장을 수여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 전쟁동안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 특히 먼 이국땅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 외국의 청년들의 고귀한 죽음을 기억하고 기도해야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9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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