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프란치스칸 영성63: 하느님을 닮아 서로의 어머니가 되어 줍시다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1-01 ㅣ No.1694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63) “하느님을 닮아 서로의 어머니가 되어 줍시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수도회 형제들에게 서로 어머니가 되어 줄 것을 당부했다. 치마부에, 네 천사에 둘러싸여 옥좌에 앉아 계신 성모자와 성 프란치스코. 프레스코, 프란치스코 대성당, 아시시, 이탈리아.

 

 

하느님의 동정심(compassion)은 생각이나 이상으로 그저 내면 안에 조용히 머물지 않고 오히려 당신이 같은 마음을 품으시는 대상인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취하는 행동으로 명확하고 실질적으로 표현되는 실재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와 같아지신 궁극의 목적은 우리를 당신 생명의 영원한 복과 그 영광으로 끌어올리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 시작은 밑으로 내려가는 여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엄연한 진리가 존재한다.

 

가톨릭 저술가로서 복음서의 말씀들을 새로운 우주론과 연결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주디 카나토(Judy Cannato)는 사람들에 대한 위대한 동정심이 예수님이 가지셨던 제일의 목표였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선포하신 하느님의 세계는 자애와 너그러움, 동정과 치유를 특징으로 하는 곳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부르신 그 거룩하신 분의 사랑으로부터 배제된 이가 없었다. 부자건 가난한 이건, 남자건 여자건, 종이건 자유인이건, 그 누구도 이 사랑의 어우러짐에서 배제되지 않았다. 예수님은 외적인 것으로 인한 분열을 넘어 내면 깊숙한 동정의 문화로 모든 이를 초대하셨다. 동정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동정은 치유한다. 동정은 다친 곳을 고쳐주고 잃었던 것을 되찾아 준다. 동정은 소외되었던 이들이나 관계성 속에 들어서는 것을 꿈꿔보지도 못했던 이들을 모아들인다. 동정은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끌어내 다른 이의 마음에 들어서게 해준다. 이렇게 해서 동정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신발을 벗어야 하고 경외심을 갖고 걸어야 하는 거룩한 곳에 우리를 있게 해준다. 동정은 유약함(vulnerability)에서 나오고, 친교와 일치로 승리를 거둔다.”(「Field of Compassion: How the New Cosmology Is Transforming Spiritual Life」 8)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초대하시는 새로운 대안적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신비이다. 이렇게 본다면 제3의 길, 즉 대안적 삶이란 이미 성경 전통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인격을 통해 선포되고 있고, 여전히, 아니 영원히 우리를 그 세상으로 초대하고 있는 기쁜 소식이다.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코가 지극히 높으신 분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시작한 삶이다. 이 삶은 기존의 어떤 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동정과 관상, 인내와 순응의 영으로 가득 차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려는 우리의 적극적인 마음 자세와 삶에 의해 영원히 앞쪽으로 펼쳐지는 프로젝트이다.

 

 

②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감과 서로 간에 어머니가 되어 줌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 서로 간에 진정한 형제애를 구현해야 함을 말하면서 동시에 형제애가 실현되는 근본 자세로서 어머니 성을 매우 강조하여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형제들은 각자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받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마음 놓고 서로 간에 드러내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자녀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처럼 각자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따라 자기 형제를 사랑하고 기를 것입니다.”(「인준 받지 않은 수도 규칙」 9,10-11) “어머니가 자기 육신의 자녀를 기르고 사랑한다면 각자는 자기 영신의 형제들을 한층 더 자상하게 사랑하고 길러야 하지 않겠습니까?”(「인준 받은 수도 규칙」 6,7)

 

누구에게 어머니가 되어 준다는 것은 강하고 센 힘이 아니라 약하면서도 부드러운 사랑으로 자녀인 상대를 보호해주고 끌어안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어머니의 부드럽고 끌어안는 사랑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약함을 취하면서까지 인간을 사랑하고 끌어안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속성을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간직하는 삶이고 또한 기도와 신심(헌신)의 영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노리치의 율리안나 성녀는 하느님을 어머니로 표현하곤 하였다. 하느님의 자기 내어줌을 통한 우리의 창조와 길러줌 그리고 우리를 당신 사랑 안에 다시 모아들이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어머니와 같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율리안나 성녀가 말하듯이,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하느님의 속성이 어머니 같은 것이 아니라 어머니들이 하느님의 본질을 닮은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을 좀 더 확장해서 얘기하자면 어머니들뿐 아니라 어머니의 속성을 지니신 하느님에게서 창조된 우리는 모두 어머니 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어머니로서의 하느님은 자신의 생명과 자녀들의 생명을 동일화하기에 자녀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길러주고 자녀들을 모두 당신 생명에 참여하게 하는 본질을 지니실 수밖에 없다. 프란치스코가 서로 어머니가 되어 줄 것을 형제들에게 부탁한 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서로를 그런 어머니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존중하며 서로를 하느님의 생명으로 이끌어 주라는 권고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 간에 필요한 것을 마음 놓고 드러내 보이라는 것은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다른 이들의 도움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으라는 요청이기도 하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0월 31일,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703 1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