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신앙] 예수님 부활로 살맛나는 신앙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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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4-18 ㅣ No.1798

[특별기고] 예수님 부활로 살맛나는 신앙생활


당신이 열어주신 생명의 문… 두려움 떨치고 희망을 노래합니다

 

 

고립(孤立)

 

격리(隔離). 이제 내 주변의 몇 사람쯤은 이를 경험해 봤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오미크론변이에 감염돼 격리를 체험한다. 다른 것과 통하지 못하게 사이를 막아 둔 그 공간에서 사람들은 격리를 시작했다. 그 시작은 그리 낯설지 않아 보였다. 혼자 있어도 혼자 있게 내버려 두지 않을 수 있는 디지털 초연결(Hyper Connected)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초연결은 연결의 결핍을 가져오는 듯 느껴졌다. 휴대전화를 누르면 문 앞에 도착하는 배달 음식도, 또 다른 버튼을 누르면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전화 통화도, 나아가 얼굴을 보고 싶으면 카메라를 통해 화면으로 전송해 주는 디지털 수단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생활일지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연결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았다.

 

단절(斷切). 복음의 완덕을 찾아 나섰던 이들의 은수(隱修) 생활을 그려 볼 새조차 없었던 디지털 초연결적인 격리는, ‘내 밖의 세계’로부터 ‘나의 세계’를 분리시키는 고립(孤立)으로 다가왔다. 일주일. 격리가 해제되는 날, 문을 열고 문 밖의 세계에 발을 내딛는다.

 

 

굴려진 돌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것은 매우 큰 돌이었다.”(마르 16,4) 성경은 무심한 듯 이 짧은 한 문장으로 무덤 안과 무덤 밖을 연결한다. 단절의 벽이 너무나 두터워 죽음과 생명을 연결할 재간이 없었던 이들의 고민이 무색하리 만큼 그 돌은 어느새 치워져 있었다. 그렇게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알린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르 16,6)

 

무덤 안의 어둠과 무덤 밖의 빛이 연결됐다. 무덤 안의 두려움과 무덤 밖의 희망이 연결됐다. 무덤 안의 죽음과 무덤 밖의 생명이 연결됐다.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돌이 치워진 것이다.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은 치워졌고, 창으로 찔려 벌어진 그 옆구리 사이가 보고 믿은 이의 손으로 메워졌다. 그리고 그들은 고백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부활, 희망의 다리

 

코로나19 감염으로 인한 격리를 마치고 문을 열고 나오니 다리가 있었다. 안과 밖을 이어주는 다리에 발을 내딛기 위해 넘어야 할 단절의 장막은 디지털 초연결로는 도저히 메워질 수 없는 현장이었다. 인간이 고안한 초연결 방법으로는 무덤 안과 밖을 이을 수 없는 그 무력함 앞에, 바로 ‘신앙’이 자리한다. 인간의 무력함을 뒤집어 놓을 우리 신앙 진리의 정수에 바로 예수님 부활의 믿음이 자리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38항 참조)

 

예수님께서 당신의 부활을 통해 열어 주신 생명의 문, 그분께서 당신을 믿고 당신의 뜻을 끝까지 충실하게 지켜 온 사람들을 하늘의 영광에 참여시키기 위해 열어주신 천국의 문, 그 문을 무력하지만은 않게 힘 있게 열고 들어가는 발걸음이 우리 믿음의 전부일 것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26항 참조)

 

열려 있는 무덤, 굴려진 돌, 그리고 열린 상처. 단절이라 여겨졌던 그 문을 열고 나서니 부활이라는 다리가 놓여 있다. 두려움을 열고 나온 발 앞에 희망의 다리가 놓여 있고, 죽음의 문을 열고 내딛은 발은 생명을 연결하는 다리 위에 놓여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을 겪어 가는 긴 터널에도 새로운 삶을 향한 희망의 다리가 놓여 있으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의 어둠 속 긴 터널 끝에도 평화를 연결하는 다리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체험-기억-재현

 

제자들은 그 사건을 체험했다. 제자들은 놀란 입을 다물 수 없는 신비로운(mysterium) 사건을 겪었으며, 전대미문의 체험을 했다. 삶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음을 체험했고, 순간이라 여겼던 시간이 영원이 될 수 있음을 체험했으며, 고립된 실망감이 연결을 넘어 완전한 일치의 친교(koinonia), 함께 길을 걷는 사건을 체험했다. 구원자라 믿고 있었지만 무력하게 죽어 가는 모습을 목격해야 했던 그들은 다시 살아나는 예수님을 목격하는 체험을 했다.

 

그들은 도저히 그 사건을 말로 표현할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삶을 송두리째 바꿔 버린 그 사건은 그들의 사전을 아무리 뒤적여 봐도 설명해 줄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저하지 않고 그것을 설명할 방도를 찾아 길을 나선다. 그 기억을 증언하고자 길을 나서서 외친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

 

그 생생한 기억이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기억한다. 우리에게 그 기억은 단순히 2000년 전 어느 날의 사건이 기록된 전래동화가 아니며, 안락의자에 앉아 관람하듯 지켜보는 단편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펼치신 구원의 드라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고, 부활을 기념하며, 우리 삶에서 부활을 체험하며 구원의 드라마에 참여하는 주인공이 된 것이다.

 

부활한 예수님은 지금 우리의 외로움에 위안을 주시며, 지금 우리를 고립으로부터 꺼내 주며, 지금 내 안에 희망의 기쁨을 움트게 하신다. 부활하신 그분이 ‘지금, 여기서’ 우리를 초대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하고, 이 몸을 떠나 주님 곁에 살기 위해서 우리는 떠나야 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05항 참조) 기대를 키우고 이내 빼앗아 가는 절망적이고 무거운 등짐은 아니다. 단지 우리는 고립이라는 단절로부터 무거운 돌을 치우고 나서면 된다. 나와 하느님 사이의 열린 상처에 손을 넣고, 나와 내 이웃의 벌어진 틈에 손을 넣어 보면 된다.

 

그러면 우리는 부활을 재현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부활의 체험이 기억이 되어 우리의 삶에서 재현될 때 우리는 신앙생활을 참 살맛나게 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살맛을 증언하는 부활의 증인인 선교사가 될 것이다.

 

 

* 명형진 신부는... 2013년 사제품을 받고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교에서 2017년 교의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인천가톨릭대학교에서 종말론, 교회론, 성사론을 강의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22년 4월 17일, 명형진 시몬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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