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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과학칼럼: 퍼즐 풀이로서의 과학, 그 첫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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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6-03 ㅣ No.488

[과학칼럼] 퍼즐 풀이로서의 과학, 그 첫 번째 이야기

 

 

대학교 3학년 무렵에 과학철학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토마스 쿤(T. S. Kuhn, +1996)과 패러다임에 대해 알게 되었고, 고등학생 때부터 나름 전문 과학도로 훈련받던 저는 쿤의 패러다임 이론을 통해 그간 체험한 ‘과학’의 본질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조금 어렵고 딱딱할 수 있지만 이 내용의 일부를 나누고자 합니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은 과학과 신앙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데 핵심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쿤은 독특한 이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하버드에서 물리학으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은 전형적인 과학자였습니다. 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과학의 역사와 과학철학에 관심을 갖게 된 쿤은 결국 과학 자체의 역사적, 철학적 기반을 탐구하는 역사학자 혹은 철학자의 길을 걷게 되고, 패러다임이라는 말로써 과학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바꿔 놓습니다.

 

쿤은 과학의 단계를 크게 셋으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전(前)패러다임 단계인데 이는 본격적인 과학이 성립되기 전의 시기입니다. 두 번째는 정상과학(normal science)으로, 보통의 경우 많은 과학자들이 평생에 걸쳐 하는 과학 활동입니다. 이 단계에서 과학은 하나 혹은 몇몇의 패러다임 안에서 진행되는데, 여기서 패러다임이라는 말뜻이 문제가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패러다임의 변화’ 혹은 ‘새로운 패러다임’ 등의 표현을 자주 사용하지만, 정작 이 말의 정확한 뜻을 아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굳이 단어의 정의(定義)를 내리자면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 인식 체계, 세계관, 가치관 정도가 되겠습니다만, 정작 패러다임을 과학철학에 도입한 쿤은 색다르게 그것을 설명합니다. 쿤에 따르면 과학은 문제풀이 혹은 퍼즐풀이라 할 수 있고, 패러다임은 그 ‘풀이’의 모범입니다.

 

퍼즐풀이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을 지닙니다. 첫째, 풀이의 규칙이 있습니다. 예컨대 퍼즐 조각과 조각은 서로 아귀가 맞아야 하며, 모양이 서로 맞지 않는 조각을 연결하거나 심지어 조각을 잘라서 억지로 아귀를 맞추는 일은 금지됩니다. 둘째, 완성된 퍼즐의 형태, 곧 퍼즐의 ‘답’이 정해져 있습니다. 셋째, 퍼즐의 규칙과 답을 안다고 해서 초보자가 곧바로 퍼즐을 다 완성해내진 못합니다. 퍼즐을 자꾸 맞춰보고, 온갖 시행착오를 겪어봐야 비로소 산만하게 흩어진 퍼즐 조각들을 하나의 완성된 그림으로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과학도 동일한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과학은 철저히 방법론적 규칙을 따라갑니다. 과학은 양으로 측정해서 수학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만 다룹니다. 이런 대원칙하에서 과학의 각 분야에는 나름의 세세한 규칙들이 있으며, 이런 규칙을 깨는 순간 그것은 과학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고 맙니다.

 

또한 과학은 대다수의 경우 확실한 ‘답’을 갖고 있습니다. 퍼즐풀이하는 아이가 완성된 퍼즐 그림을 염두에 두고 퍼즐을 맞춰나가듯, 과학자는 이미 실험으로 측정된 값을 이론 모델을 세워 설명하거나 혹은 역으로 이론으로 예상되는 값을 실험으로 확인합니다.

 

끝으로, 정해진 규칙과 확실한 답이 있지만, 규칙과 답을 안다고 해서 과학이라는 퍼즐을 쉽게 맞출 수 있는 것은 또 아닙니다. 바로 이것이 과학의 독특함이고, 여기서 과학의 힘과 한계가 동시에 나타납니다.

 

[2023년 6월 4일(가해)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서울주보 6면, 조동원 안토니오 신부(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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