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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수도원 순례: 그리스도교의 역사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탈리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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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2-27 ㅣ No.381

[전통 영성의 샘을 찾아서 - 유럽 수도원 순례] 그리스도교의 역사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탈리아 (1)

‘블랙 마돈나’ 모셔져 있는 오로파, 뿌리 깊은 성모신심으로 유명해


- 알프스 산맥 자락에 위치한 해발 1200m의 오로파수도원은 성모신심이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곳이다. 우측에 1620년 완공된 옛 성당과 정면에 1960년에 완공된 대성당이 있다.


이탈리아는 가톨릭교회 역사의 중심이다. 그리스도교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됐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지역이라고 하면 이탈리아를 꼽을 수 있다. 이곳에서 가톨릭이 꽃을 피웠고 많은 열매를 맺었다. 그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건재하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발견된 교회유적들은 형태와 아름다움에 있어서 놀라움 그 자체다. 제7차 수도원 순례에서는 특히 이탈리아 북부지역의 신앙 흔적들을 더듬어봤다.
 

뿌리 깊은 성모신심

굽이굽이 굽은 길을 올라가도 목적지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커브길을 몇 번이나 지나서야 겨우 다다를 수 있었다. 이탈리아 도착 후 첫 방문지는 해발 1200m에 위치한 비엘라시의 ‘오로파수도원’이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두 손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하게 되는 높이다. 하지만 도착과 함께 긴장은 사라진다. 수도원 뒤로는 눈 덮인 알프스 산맥이 보이고, 앞에는 탁 트인 하늘이다. 그야말로 장관이다. 자연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라 부를 만하다. 산 아래는 너무 아득해서 보이지도 않는다. 이곳이 해발 1200m라 실감할 수 있는 것은 이따금 먹먹해진 귀와 코 앞에 있는 알프스 산맥뿐이었다.

- 페스트가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중세시대, 오로파수도원이 위치한 지역은 전염병의 위협으로부터 비껴나 있었다. 주민들은 이에 감사해 블랙 마돈나를 위한 그림을 기증했다. 1522년에 제작된 작품은 이곳에 첫 번째 기증된 작품이다.


오로파수도원은 알프스 산맥을 가운데에 두고 스위스, 프랑스 국경에 맞닿아 있다. 순례단이 어렵게 이곳을 찾아 온 것은 바로 ‘성모신심’ 때문이다. 오로파는 이탈리아에서도 뿌리 깊은 성모신심으로 유명하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신심이 인정된 에페소공의회(5세기) 이전에 이미 오로파에는 성모신심이 뿌리내렸다고 한다. 베르첼리의 주교 성 에우세비오가 ‘블랙 마돈나’를 이곳에 모셔왔다고 한다. 또한 중세 페스트가 창궐하던 시기, 지역주민들이 블랙 마돈나에게 기도를 바쳐 전염병으로부터 이곳만은 안전할 수 있었다는 전승도 있다. 오로파수도원과 관련된 여러 전승들이 있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탈리아에서는 최초로 성모신심이 확산된 곳이라고 볼 수 있다.

긴 역사만이 자랑거리는 아니다. 규모 또한 인근 지역에서는 가장 크다. 지금까지도 전 세계에서 수천 명의 순례객들이 찾아온다. 그 중에서 한국인 순례단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현지 가이드가 말했을 정도로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역사적 기록물에 오로파수도원이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13세기부터다. 은수자들이 거처하는 용도로 성모마리아성당과 바로톨로메오성당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때부터 순례자들이 서쪽에서 발레 아오스타로 넘어가기 전 기도하는 장소가 됐다.

오로파수도원의 번성은 사보이 왕국의 흥망성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당시 이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던 사보이공국은 수도원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7세기에 많은 이탈리아 바로크 예술가들이 이곳을 찾아와, 화려한 바로크 건축물을 세웠다. 그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1620년 완공된 성당은 수도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성당 안에는 블랙 마돈나와 사보이 왕국 여왕 마리아 카타리나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또한 13세기에 그려진 작품이 남아 있어, 수도원의 긴 역사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마리아의 일생을 다룬 작품의 작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작품 수준으로 보아 상당히 명망 있는 작가였음을 알 수 있다.

- 오로파의 블랙 마돈나에게 은총을 간구해 은사를 받은 이들이 감사의 뜻으로 금과 은, 초 등의 귀중품과 그림, 사진 등을 기증한 액자가 수도원 한쪽 벽면을 꽉 채우고 있다.


사보이 왕국은 특히 이곳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여왕 마리아 카타리나는 오로파수도원 순례객들을 돌보는 수도회 ‘마리아의 딸’을 설립했을 정도다. 점차 순례객들이 늘어나자 사보이 왕국은 18세기 ‘확장 프로젝트’를 계획했다. 특히 프로젝트 안에서 계획된 대성당은 이후 백년 뒤에 착공돼, 1960년대에 완공됐다. 프로젝트에서 완공까지 삼백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데는 사보이 왕국의 패망과 제1, 2차 세계대전 등 역사적 배경이 숨어 있다. 대성당은 여전히 미완성 상태로 남아있지만 대축일 미사를 봉헌할 때나 사용되고 있다.


어머니께 청하오니

오로파수도원에는 많은 기적 이야기가 있다. 앞서 말한 페스트와 관련된 기적, 사고와 병으로 죽음을 목전에 두고 마리아의 은사로 살아난 사람들 등 수를 헤아릴 수도 없다.

오로파의 블랙 마돈나로부터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이곳에 흔적을 남긴다. 옛날에는 금과 은, 초 등 귀중한 물건을 감사의 의미로 기증했다. 르네상스에 이르러서는 은사 받은 내용이 담긴 그림을 그렸고, 현대에는 사진을 찍어 기증한다. 수도원 2층에 마련된 사보이 왕국 박물관 앞 복도 벽면을 마리아의 은사를 받은 이들의 기증품으로 다 채울 만큼 많다. 이것을 모아 책으로 만들었는데 4권이나 된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오로파수도원의 성모신심은 이어진다. 이탈리아 유명 스포츠 선수들은 사인이 담긴 자신의 유니폼을 기증해, 승리를 기원하기도 한다.

또한 블랙 마돈나를 기리는 다양한 행사도 계속 마련되고 있다. 매년 알프스 산맥 너머에 위치한 폰테모르라는 지역에서 이곳까지 행렬을 하고 있다. 가뭄이 극심하던 시기 블랙 마돈나에게 비를 청하기 위해 시작된 행렬이었으나, 지금은 전 세계에서 3000명이 참여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이 지역의 큰 행사 중 다른 하나는 블랙 마돈나의 대관식이다. 1620년 기존 성당의 완공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행사였는데, 10년에 한 번씩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 사보이 왕국 박물관에는 대관식에 사용하는 왕관과 목걸이, 가슴에 붙이는 장신구 등 진품이 전시돼 있다. 사보이 왕국 마리아 카타리나 여왕이 기증한 장신구들이 전부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졌다는 설명을 듣자, 당시의 성모신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느껴졌다.

성모신심이 깊은 우리나라와도 비슷한 모습을 지닌 오로파. 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산길을 내려가면서, 성모 마리아를 위해 이 길을 오른 이들의 모습을 그려봤다. 그 마음과 발걸음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생각됐다. 방법은 다르지만 지금도 꾸준히 찾아오는 순례객에게서 성모신심의 깊은 뿌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가톨릭신문, 2012년 2월 26일, 이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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