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인간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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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5-18 ㅣ No.1243

인간 노동 (1)



인간에게 노동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노동’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십니까? ‘생활의 안정’, ‘성취감’, ‘보람’, ‘자존감’ 등 긍정적인 생각입니까, 아니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할 의무’, ‘피땀’, ‘힘겨움’ 등 부정적인 생각입니까?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 상반된 두 가지 생각을 모두 가지게 됩니다. 창세기 첫 부분도 노동에 대해서 상반된 시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노동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거룩한 사명(창세 1,28; 2,15 참조)이며 동시에 죄를 범한 인간의 고된 노역(창세 3,17-19 참조)인 것입니다. 이처럼 현실에서 노동은 인간에게 축복이며 동시에 저주로서 다가옵니다. 과연 누가 그리고 무엇이 인간 노동을 축복으로, 아니면 저주로 만들겠습니까? 모든 이에게 노동이 참된 축복으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은 불가능한 것이겠습니까?


인간은 생계만을 위해 노동하지 않는다

<딸배 인생> 김남훈 시

난 오늘도
어김없이 배달을 한다
또 시작된 딸배
돈을 벌겠다고 시작한
알바가 직장이 되었다
배달을 가면서
이리저리 곡예를 부리며
차들을 제낀다
위험한 인생이다
그래도 난 돈을 벌 것이다
그것이 살 길이다

『내일도 담임은 울 삘이다 - 공고 학생들이 쓴 시』(김상희, 정윤혜, 조혜숙 공편 / 휴머니스트 / 2012 / 30쪽)

하루에도 수없이 만나는 무법적인 배달 오토바이를 보면서, 목숨을 담보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이들의 고통을 헤아리는 운전자가 얼마나 될까요? 생계 전선으로 내몰려 물불 안 가리는 이들에게 노동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어느 누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내던지고 스스로를 밥벌이의 노예로 만들고 싶겠습니까? 앞길이 창창한 한 청소년의 비장함이 서린 슬픈 노래는 피 끓는 절규로 다가옵니다.

“노동은 인간과 인간성을 나타내는 특별한 표시이며, 인격체로 이루어진 공동체 안에 움직이는 개개의 인격체를 나타내는 표시”(요한 바오로 2세 회칙, 「노동하는 인간」, 서언)로써,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인간의 품위를 지키며 공동선에 이바지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하느님의 창조 행위와 예수님의 구원 행위에 참여하게 됩니다(『간추린 사회 교리』, 263항 참조). 하지만 경제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인간은 살아있는 노동을 제공하는 경제의 한 요소로 전락하기 쉽고, 그의 노동 역시 경제적 의미 이상을 담아내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노동하는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존엄성을 회복할 때에, 비로소 인간의 ‘노동’은 참된 의미와 가치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노동은 자본보다 우위에 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주부가 등장합니다. 주부는 멋진 디자인과 놀라운 기능을 자랑하는 세탁기를 돌리고 나서, 한가로이 독서를 즐깁니다. 잠시 시간이 지나면 세탁을 마친 옷들이 개운하다는 듯 세탁기 밖으로 나옵니다. 옷에 찌든 때 때문에 울상이 된 주부가 등장합니다. 물에 세제를 풀고 옷을 담급니다. 주부는 콧노래를 부르며 여유를 즐깁니다. 잠시 후 한 점 티 없는 깨끗한 옷들이 춤을 춥니다.

구체적인 표현은 다를지라도 세탁기와 세제의 TV 광고는 대개 이렇습니다. 주제는 ‘빨래’, 등장인물은 ‘주부, 세탁기, 세제’입니다. 과연 누가 빨래를 합니까? 광고는 슬그머니 주부를 엑스트라로 만듭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빨래하는 주부가 없다면, 세탁기도 세제도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광고의 의도대로 세탁기와 세제에 머뭅니다. 노동은 사라지고 노동이 이루어낸 기술만 남습니다. 노동 없는 생산의 신화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 신화가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널리 퍼져있습니다. 노동이 “단순한 상품이나 비인격적인 생산 도구로 간주될 수 없음”(『간추린 사회 교리』, 271항)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생산 체계를 움직이는 부속품처럼 인식되고, 때때로 자본을 위해 희생되기도 합니다. 분명 노동과 자본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상호 보완 관계가 존재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노동은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특성 때문에 생산성과 관련된 모든 요소보다 우위에 있으며, 이러한 원칙은 특히 자본과 관련하여 적용”(『간추린 사회 교리』, 276항)되어야만 합니다. [2015년 5월 17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의정부주보 6-7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송산 주임)]

 

 

인간 노동 (2)



노동하는 인간과 인간의 노동, 모두 존엄하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바라크(35) 씨는 지난 여름까지 경기 양주의 플라스틱 사출공장에서 주야간 교대 근무로 하루 13시간 가까이 일했다. 일이 워낙 힘들어 한국인들은 하루 일하면 혀를 내두르고 돌아가는 공장에서 바라크 씨는 혼자 4개의 기계를 돌려야 했다. 최소한의 생활비를 남기고 달마다 고국에 남아있는 가족에게 돈을 보내는 보람으로 하루하루를 버텼지만 이제는 다른 공장을 찾고 있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사업주의 차별 탓이다. 바라크 씨는 “원래 한국인이면 3,4명이 필요한 일을 나한테는 일, 일 외쳐가며 혼자 하라고 시켰다.”면서 “힘들게 일하다 다쳤는데도 병원에 한 번 와보지도 않는 사장에 대해 섭섭한 기분도 든다.”고 토로했다. “이주노동자라는 이유로 회사가 바쁘면 반드시 일을 해야 되고 똑같이 일을 해도 한국 사람처럼 돈을 주는 것도 아니예요. 그런데 사장은 큰 잘못이 없어도 그냥 마음에 안 들면 잘라 버리거든요. 한국인 사장들이 우리를 일회용처럼 쓰는 거죠, 일회용.” 방글라데시 출신인 띠뚜(37) 씨의 말이다. (박종관 CBS 사회부 기자 2010, 11, 12 노컷뉴스)

코리언 드림을 꿈꾸며 우리나라를 찾는 수많은 이주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가난한 나라 출신인 이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꺼리는 힘겨운 노동에 자신을 내던지면 가난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소중한 희망을 가꾸고 있습니다. 이들은 결코 노동력이라는 경제적 가치에 의해서, 합법적 신분이냐 그렇지 않으냐는 법적 기준에 의해서, 배타적인 혈연적 가치에 의해서 판단될 수 없는 고유한 가치와 존엄성을 지닌 인격체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의 노동 역시 존엄합니다. 과연 이 땅의 이주 노동자들은 온전히 사람다운 삶을 보장받고 있습니까? “아무리 커다란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이주민들 스스로 느끼는 절박한 처지를 착취에 이용해서는 안 된다.”(「노동하는 인간」, 23항)라는 교회의 준엄한 가르침을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요?


일자리와 품삯 : ‘선한 포도밭 주인’(마태 20,1-16)에게 배우는 살림의 지혜

“노동은 모든 사람에게 속한 선이며 노동에 참여할 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완전 고용은 정의와 공동선을 지향하는 모든 경제 체제에서 의무적인 목표이다”(『간추린 사회 교리』, 288항).

한 포도밭 주인이 일자리를 갖지 못한 이들을 찾아 나섭니다. 수시로 사람들을 찾아 일을 맡깁니다. 포도밭 주인은 그들의 됨됨이나 능력을 묻지 않습니다. 다만, 일하지 못하는 고통스런 상황에서 그들을 구해내고픈 마음뿐입니다. 포도원 주인 덕분에 생계가 막막하던 이들은 시름을 덜고, 일하지 못함으로써 자존감마저 흔들리던 이들은 자신의 가치를 깨닫습니다.

“노동의 보수는 각자의 임무와 생산성은 물론 노동 조건과 공동선을 고려하여 본인과 그 가족의 물질적 사회적 문화적 정신적 생활을 품위 있게 영위할 수 있도록 제공되어야 한다”(「사목 헌장」, 67항).

선한 포도밭 주인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노고에 대해 삯을 계산합니다. 인간 경제의 논리를 따른다면, 한 시간 일한 사람과 열 시간 일한 사람이 받는 몫의 십분의 일만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포도밭 주인은 일자리를 찾다가 겨우 한 시간 일한 사람도 열 시간 일한 사람과 똑같이 대우합니다. 노동의 양의 작고 많음을 떠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요구되는 최소한의 재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살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재화가 필요하고, 재화를 얻기 위해서 노동을 합니다. 따라서 노동의 대가는 하느님을 닮아 존엄한 사람이 그저 근근이 먹고 살만큼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일한 시간만큼 품삯을 주는 것은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비인간적인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하루 한 시간밖에 일하지 못한 사람에게 한 시간의 몫만 주어진다면, 그 사람은 사람답게 살 수 없습니다. 하물며 자신의 탓 없이 일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사람의 처지는 더 비참할 수밖에 없습니다.

포도밭 주인은 선합니다. 자기 탓 없이 일하지 못하는 이들이 노동을 통하여 ‘온전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을 단지 경제적 능력과 가치로 평가하지 않고 ‘존엄한 한 사람’으로 받아들였기에, 포도밭 주인은 선합니다. 냉혹한 경제 현실에서 인간 노동의 의미는 왜곡되고, 노동의 권리는 위협받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인간 노동’이라는 영역을 넘어서 ‘인간 자체’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어느 때보다도 ‘선한 포도밭 주인’이 필요합니다. [2015년 6월 7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의정부주보 6-7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송산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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