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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자녀교육의 딜레마: 체벌인가 관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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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7 ㅣ No.89

자녀교육의 딜레마 - 체벌인가 관용인가?

 

 

1. 자녀교육에서 부모들의 보편적 문제의식

 

어떤 자매님이 자녀의 종교교육 문제로 상담을 신청했다. 문제의 요점은 이렇다. 초등학교 6학년 된 자신의 아들이 통 성당에 가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성당에 간다고 부모에게 받은 헌금을 다른 곳에다 쓰고 난 뒤에 집에 와서는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안 부모는 처음에는 말로 잘 달래다가 계속해서 듣지 않자 매를 들어 거짓말을 하거나 부모를 속이는 행위에 대해 벌을 주고, 억지로라도 아이를 직접 성당에 데리고 가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를 성당에 보내려고 이런 방법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 자녀는 또한 매를 들고 야단을 쳐서 가르칠 때는 잘 알아듣는 듯 보였으나 항상 그때뿐이었기 때문에 부모는 마침내 아들이 스스로 알아서 성당에 가기를 묵묵히 기다려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몇 개월이 지나도 효과가 없음을 깨닫고 사목 상담자를 찾아온 것이다. 

 

이 자매님은 아들이 소중한 유년시절에 제대로 된 종교교육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하고 성장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무척 걱정을 하였다. 결국 요점은 자녀가 말을 듣지 않는 경우에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인내심을 가지고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계속해서 기다려주는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지에 대해 의견을 구한 것이었다. 

 

아마 이러한 문제는 보통의 어린 자녀들을 기르고 있는 모든 부모가 한 번쯤은 고민했던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특별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성당에 안 나간다는 것이 학교에 안 간다는 것보다는 차라리 낫지 않느냐 하는 식으로 위안을 삼든가 아니면 나중에 자기가 알아서 성당에 나가겠지 하고 방관하며 문제를 덮어버리는 부모들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자녀교육의 문제는 비단 종교교육 차원에서만이 아닌 자녀 양육기간 내내 모든 상황에서 벌어질 수 있는 부모들의 고민거리이다.

 

 

2. 자녀교육에 정답(正答)이나 정도(正道)는 없다

 

부모들은 가깝게는 아이들이 통제가 되지 않을 때에 그리고 먼 장래를 놓고 볼 때는 아이들의 인격 성숙을 위해서 아이들의 잘못을 어떻게 가르치고 지적해 주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을 한다. 현대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물리적인 체벌을 통해서가 아닌 대화와 합리적인 책임성 부과, 그리고 그에 따른 벌칙 등으로 통제하고 가르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모가 감정 조절이 안 되거나 아이들이 신체적인 자극 외에는 통제가 되지 않는 경우에 쉽게 물리적인 체벌을 가하게 되는 등 문제가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위의 상담 사례만을 놓고 보더라도 어떤 부모에게는 때로는 아이들을 매로 엄하게 가르치는 것이 아직 성숙하지 않은 아이에게 무조건 자유를 주는 것보다 훨씬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곧 체벌이냐 관용이냐의 양자택일 상황에서 어떤 것이 옳은가 하는 점에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도 나름대로 자신만의 교육 철학을 가지고 위의 상담사례에 대해 이 방법이 좋다 또는 저 방법이 좋다고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교육에는 정답이 없고 정도도 없다. 사람은 어떤 시스템 안에서 프로그래밍되는 방식으로 성장하거나 교육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성숙에는 수많은 성장 요소들이 있는데 이것들이 나름대로는 긍정적인 의미의 요소들이라 하더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또한 어떠한 상황에서 사용되었는지에 따라 부정적인 성장 방해 요소들이 오히려 성장에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한마디로 교육에서는 특별히 완전한 수학공식과 같이 맞아떨어지는 이론은 존재할 수 없다. 

 

곧 매를 들거나 벌을 주는 것과 같은 교육행위나 인내롭게 지켜보아 주는 관용의 행위 모두 나름대로의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 교육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구체적으로 자녀에게 적용될 때는 그 자녀의 개인 성향은 물론이요 민족성, 문화, 성별, 나이, 주변 환경, 심지어 부모의 성격 유형에 따라 이 요소들이 다양한 변화를 나타내기 때문에 긍정이냐 부정이냐 하는 결과에 대해서는 결코 어떤 확답도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목 상담자는 어린 자녀들의 종교교육 문제를 걱정하는 신자 부모들에게 적어도 교육 심리학적 설명을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교육 철학을 심어줄 수는 있을 것이다. 물론 정확한 해답은 될 수 없겠지만 나름대로 체벌이냐 아니면 관용이냐의 두 교육적 요소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을 다음과 같은 설명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정리해 보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3. 상호보완론의 시도

 

1) 논란의 대상인 체벌

 

매를 들거나 때릴 때 이것이 교육적으로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는 현실의 부모들은 물론이고 교육학자나 심리학자들 사이에서도 커다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엄격한 부모 밑에서 매를 맞고 자란 아이들이 훌륭한 인격자로 성숙한 경우도 많지만,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매를 맞지 않고 자란 아이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폭력성이나 기회주의적 태도 같은 부작용이 생기는 경우도 많다. 반대로 부모가 아이들의 기를 죽이면 안 된다는 신념 아래 매를 대지 않을 경우 아이들은 방종하고 예의를 모르며 이기적인 사람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매를 맞고 자란 아이들보다 훨씬 주체적이고 합리적이며 자발적인 책임의식을 가진 아이들로 성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자녀의 체벌과 교육에 관한 문제는 특별한 객관적 답이 있을 수 없다는 여러 부모들의 공통된 생각이 일리가 있는 듯 보인다. 예를 들어 2002년 7월 28일 미국의 Wisconsin State Journal에 실린 자녀 체벌에 대한 인터뷰 내용만 보더라도 실제로 부모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자녀 체벌에 대해서 서로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세의 아들 데니를 둔 아버지 버나드 테넨바움은 이렇게 말했다. “아들 데니를 키우면서 꼭 체벌이 필요할 때 체벌을 했을 경우 아이가 정확하게 그 의미를 알아들었으며 앞으로 똑같은 잘못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심성이 더 확실해졌습니다.” 또한 아들 데니도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체벌은 저에게 큰 상처 없이 스스로를 조절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 체벌을 당하면서 그 이유와 가치에 대해 정확히 알아들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저는 체벌은 어린아이들이 자신이 넘으면 안 되는 한계를 넘었을 경우 그것을 정확하게 가르쳐주는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세 자녀를 둔 마크와 킴 넬슨 부부는 체벌 없이 자녀들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었기에 체벌의 필요성을 못 느꼈다고 한다. “저희들의 경우 타임아웃(Time Out) 제도(일정한 경고 뒤에 불이익을 주는 것)나 그라운딩(Grounding)(방안에 가두기, 외출 금지 또는 벽 보고 서있기 등) 같은 것들이 아이들에게 무척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희가 체벌을 하지 않는 데에는 체벌이 사회적으로 꺼려지는 것이었기 때문이지 체벌이 나쁘다고 판단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교육 차원에서의 체벌은 분명히 좋지만 거기에 분노의 감정이 섞여서는 안 되겠죠. 아이들을 몰아붙이지 말고 자신이 저지른 문제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사사건건 처벌의 형식으로 해결하려 든다면 아이들이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 자녀문제에서 같은 교육방식으로 키운 자녀들의 교육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부모와 자녀가 지니는 개인적인 성향과 기질이라는 내적 요인과, 부모 자녀 관계가 이루어지는 가정환경과 사회적 배경이라는 외적 요인의 상관관계 안에 무한한 변인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평범한 부모들이 이러한 기질과 환경요인의 상관관계를 명확하게 파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부모들이 원하는 어느 정도의 객관적인 자녀교육에 대한 지침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2) 체벌의 부정적 효과

 

아동교육학자들과 심리학자들 사이에서 아직도 토론의 대상이 되고는 있지만 이들의 공통된 의견은 체벌은 긍정적인 효과보다는 부정적인 효과를 내기 쉽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콜롬비아 대학의 엘리자베스 게르쇼프(Elizabeth Gershoff) 교수는 지난 62년 동안 이루어진 88건의 체벌에 대한 연구를 2002년 7월 APA(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에서 발간하는 심리학회지에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 가운데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미국인들은 법적으로 성인 구타가 금지되어 있는 현실에서 왜 상처받기 쉬운 어린아이들을 때리는 행위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찌 보면 일리가 있는 생각인 것 같다. 꼭 교육이라는 입장을 떠나서라도 우리가 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성인의 생각과 기준으로 아이들을 때린다는 것은 어찌 보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게르쇼프 교수는 과도한 육체적 체벌은 사실 은폐되는 경향도 많고 폭력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감소시킨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학교에서는 때리면 안 된다고 배우면서 집에서는 맞고 자란 아이들은 애매모호한 메시지(mixed message)를 얻게 되며, 이런 아이들은 결국 학교보다는 집에서 행해졌던 가르침을 더 강하게 따르려는 경향이 있다는 데 그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한다. 

 

결국 가정에서 일어나는 강한 물리적 체벌은 이런 아이들에게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의 모델로 작용하게 되고, 학교나 사회처럼 폭력이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문화 안에 적응하는 데 커다란 부작용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게르쇼프 교수는 앞으로의 잘못된 행동을 억제시켜 준다는 긍정적 효과만을 제시할 뿐, 부정적인 어떤 영향력도 고려하지 않으면서 체벌을 옹호하는 학자들과 부모들에게 결코 체벌의 사용을 양심적으로 추천할 수 없다고 강하게 말하고 있다. 

 

3) 중도적 보완론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부정적인 결과가 있다손 치더라도 체벌에 관해서는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들은 체벌을 완전히 없애는 것보다는 적당한 선택을 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때에 가혹적 방식이 아닌 부드러운 처벌 방식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특히 이 처벌에는 아이들의 나이가 중요한데 2세에서 6세까지의 어린아이들에게만 물리적 체벌이 효용성이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아이가 6세를 넘어서면 행동에 대한 책임성을 스스로 인식하기 때문에 이 나이에 부모는 체벌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아이들을 훈육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단 학자들은 2세에서 6세까지의 아이들을 체벌할 경우라 하더라도 부모 입장에서 심리적으로 학대 경향성이 있는 문제 부모들(advised parents with abusive tendencies)은 절대로 체벌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4. 시너지 효과를 위한 결론

 

그렇다면 신자 부모들은 이러한 설명을 통해 나름대로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체벌은 폭력성을 유발하고 학습시킬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부모의 감정조절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나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에 있는 아이들에게는 상당히 조심해야 하며, 되도록이면 다른 방식으로 훈육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어릴 때 매를 맞고 자란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더욱더 조심해야 한다. 

 

아이들이 6세를 넘기면 자신의 행동과 사고를 스스로 인지하기 때문에 부모들은 이 아이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해 주고 스스로 그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가르침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스스로 생각할 능력이 성숙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에게는 이성보다는 육체에서 오는 메시지를 더 잘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때는 사랑이 담긴 부드러운 체벌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때 중요한 것은 부모의 감정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에 대한 애정과 사랑의 행위로 체벌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부모의 체벌이 상당히 성장한 아이에게 적용된다고 하더라도 위의 16세 데니의 경우처럼 부모의 사랑과 뜻을 자녀가 이해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폭력이 아닌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랑의 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나이에 상관없이 부모의 체벌은 일단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자녀가 느낄 수 있는 사랑이고, 부모의 감정이나 다른 교육적 수단을 위한 체벌이 아님을 자녀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성당에 다니고 싶어하지 않는 자녀를 강제적으로라도 성당에 끌고 가야 하는지 아니면 스스로 미사에 참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기다려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위 내담자의 질문에 대해서는 사목 상담자가 나름대로 위의 사항들을 잘 설명해 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의 여러 내적 상황과 가정의 환경 그리고 자신들의 성격을 잘 파악해서 어떤 결정이 올바른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좋다. 단,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6세 이전까지는 체벌의 방법이 유효하지만 그 이상의 나이가 되면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체벌은 부정적이므로 이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도 인식시켜야 한다. 하지만 충분히 상황을 모두 고려한 결과 체벌밖에는 달리 더 유효한 방법이 없다고 생각된다면 그때는 부모의 감정이 배제된 상태에서 부드러운 체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꼭 기억해 두도록 배려해 준다. 

 

사실 종교교육을 위한 자녀 지도는 자녀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대화와 따뜻한 부모의 사랑이 필요한 영역인데 이것을 위해 체벌을 한다든지 벌을 내린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그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교육의 모습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부모는 종교교육을 포함해서 모든 영역에서 아이들과 충분히 대화하고, 또한 그 자녀의 기질과 성향을 잘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먼저 길러야 할 것이다. 이러한 통찰력이 생겨나면 아이들을 끌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밀어주어 스스로의 자발성을 키워주면서도 부모의 의향대로 자녀를 잘 지도할 수 있는 길이 생겨난다. 

 

이러한 통찰력은 부모는 물론이요 사목 상담자에게도 필요한 능력이다. 사목 상담자는 먼저 관심을 가지고 자녀의 개인적인 성향이나 가정의 특성 그리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 등 여러 가지 인간적 관계나 주변 상황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일단 이러한 이해가 가능해지면 사목 상담자는 각 가정 구성원과 외적 상황이 서로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 가정 특유의 상관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통찰이 가능하면 현실적으로 어떤 교육 방법이 좋을 것인지에 대한 실제적이며 구체적인 도움도 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목 상담자가 혹시라도 종교교육에 소홀한 부모를 만난다면 다음과 같은 조언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곧 자녀에게 매를 들어야 하나 들지 말아야 하나 하는 지엽적인 문제를 떠나서 부모들은 전반적인 자녀교육에서 반드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이끌어줄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부모들은 아이들의 사기를 저하시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방종하게 아이들을 방치하면서 예의도 모르고 상식도 없는 이기적이며 독선적인 아이들로 만드는 경우가 있다. 더군다나 현실적으로 종교교육을 다른 교육보다 훨씬 소홀히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어렸을 때 종교교육과 인성교육을 통해 얻은 것이 평생을 간다는 사실을 안다면 절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가르치는 종교교육을 소홀히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들 부모들은 아이들이 성장하면 자연히 스스로 알게 되고 성숙하게 된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아이들이 각 성장 단계에서 꼭 받아야 할 교육들을 받지 않았을 경우, 그것은 평생 다시는 받을 수 없는 소중한 지적·감성적·영적 교육의 손실이라는 것, 그리고 그러한 손실은 평생을 통해 자녀들의 인생에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부모를 통해 세상에 보내주신 소중한 우리 자녀들은 성장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이전까지는 모든 지적이며 감성적이고 윤리적이며 영적인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 따라서 사랑스런 자녀들이 하느님 보시기에 더욱 어여쁜 아들딸들로 자라나도록 부모들은 자녀를 하느님 안에서 훌륭하게 양육하고 교육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곧 종교교육이나 신앙교육은 부모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아이들에게 전해주어야 하는 의무사항인 것이다. 

 

간혹 요즘에는 아이들에게 종교는 자유롭게 선택하게 해주어야 하는 선택의 대상이라고 하면서 마치 자녀에게 커다란 자유의지를 선물하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혀 있는 부모들도 간간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출산을 한 엄마가 갓 태어난 유아에게 “아가야! 아직 네가 모유를 먹고 싶어하는지 아니면 분유를 먹고 싶어하는지 엄마가 잘 알지 못하니 네가 나중에 자유롭게 선택을 해주면 그때 먹여줄게.”라고 말하며 수유를 거부하는 경우가 있을까? 아이의 자유의지는 스스로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에서나 가능한 것이기에 그 이전까지는 부모가 아이를 책임지고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성숙하게 양육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종교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에게 다른 신앙을 선택하지 못하도록 애초부터 세뇌시키라는 의미에서 어릴 때의 종교교육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훗날에 종교를 선택하는 시기가 온다 하더라도 그 이전까지는 자신의 성장단계에서 꼭 받아야 할 영적인 도움을 부모가 반드시 베풀어야 하는 의무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소년소녀기와 청소년기에 받아야 할 영성교육은 평생의 삶의 밑거름이 되며, 인성과 지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교육학자들의 한결같은 의견이다. 또한 이 시기에 받아야 할 영성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성인이 되어서 그것은 절대 보충되지 않는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그 성장단계에 맞는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할 때 그 결핍은 이후의 삶에서 절대로 보상될 수 없으며, 종교교육이나 영성교육이 아이들의 삶에서 무척 중요한 부분임을 조금이나마 인식하고 깨닫는다면 부모는 결코 아이들을 이러한 교육에서 멀어지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목, 2004년 11월호, 박현민(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홍보국장, 본지 주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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