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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한국인, 철강을 늘려 공간을 만들다(마리노 라루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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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4-09 ㅣ No.680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한국인, 철강을 늘려 공간을 만들다 - 마리노 라루(1914-2001) 수사와 강 안토니오 신부의 만남

 

 

같은 땅에서 여러 번 새로 시작하는 수도원이 있다. 성베네딕도회는 1909년 한국 서울로 진출했고, 1921년부터는 원산과 가까이 있는 덕원으로 이사해서 이곳을 새로운 고향으로 삼았다. 그리고 1·4후퇴 때 또 그곳을 떠나 경상북도 왜관에 자리 잡았다. 경부선 기차에서 수도원 성당이 예쁘게 보인다. 아마 처음 지었을 때는 철길에서 수도원 마당이 훤히 보였을 터이다. 수도원은 덕원으로 돌아갈 것을 기약하며 철길 가를 택했다고 한다.

 

“그 배에는 그만한 공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있었습니다.”

1950년 12월 25일 메러디스(Meredith Victory)호는 포화 속을 뚫고 나와 14,000명의 피난민을 단 한 건의 사고도 없이 거제도에 안전하게 하선시켰다. 1958년과 1960년 한국과 미국정부가 각각 이 배와 승무원들을 포상하려고 할 때 선장은 미국 뉴튼 시에 있는 베네딕도회의 세인트 폴 수도원에 들어가 마리노(Marinus)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사가 되어 있었다. 마리노 수사는 2001년 선종할 때까지 줄곧 수도원 성물판매점을 관리했다. 그가 46년간의 수도생활 중 수도원 밖으로 나간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1960년 그의 용기와 지도력을 인정받아 워싱턴에서 열렸던 특별상 수여식 때였다. 이때도 그는 수도원장의 지시를 받고서야 마지 못해 참여했다. 평소에 그는 이 항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수상소감에서 그 배의 키는 하느님께서 잡고 계셨음을 느낀다고 했다. 하느님은 무엇을 그에게 보여주셨을까? 아직도 포상 받지 못한 그 깊은 침묵 속의 영웅들이었을까?

메러디스의 라루(LaRue) 선장은 마지막 철수가 행해진 12월 20일 흥남부두에 도착했다. 흥남에서는 철수부대와 함께 10만여 명의 피난민이 대기 중이었다. 남쪽으로의 탈출로가 모두 봉쇄되어 바다만이 흥남을 떠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메러디스호가 부두에 닻을 내리자 미 제10군단 차일즈 대령 일행이 승선했다. 그들은 선장에게 명령이 아님을 전제하면서 피난민 중 얼마라도 태울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선장은 주저 없이 가능한 한 많은 피난민들을 태우겠다고 대답했다. 메러디스호는 2차 세계대전 때 로스앤젤레스에서 건조된 무게 7,600톤의 화물선이었다. 이때는 이미 대부분의 미군들은 탈출한 상태였고, 도시는 화염에 쌓여 있었다. 미주리호를 포함한 미군 전함들이 중공군을 향해 포를 쏠 때마다 메러디스호의 갑판이 흔들렸다. 어렵게 접안에 성공한 선장은 급한 철수 명령에 대비해 배의 머리를 공해를 향하여 돌려놓고 엔진을 계속 가동시켰다.

승무원들이 화물운반용 그물망을 배의 측면으로 내리자 피난민들이 오르기 시작했다. 승무원들은 화물용 목재 승강판을 이용해 피난민들을 선창으로 내려보냈다. 화물칸이 채워지면 승강구의 뚜껑을 덮고 다음 화물칸에 사람들을 채웠다. 5층 아래인 다섯 번째 화물칸부터 4층, 3층, 2충, 1층으로 채워나갔다. 피난민의 탑승은 12월 22일 저녁부터 이튿날 오전까지 이어졌다. 17명의 부상자와 5명의 만삭 임산부를 포함해 모두 14,000명이 갑판과 화물칸에 한 치의 공간도 없이 탑승했다. 14,000명!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들은 승선해 있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리고 어느 부분에서인지, 8천 톤의 강철이 늘어나 몰려오는 사람들 모두를 태울 공간을 만들었다.”고 선장은 말했다. 선장도 놀라는 이 기적의 숫자는 물론 한국인들의 동족애의 열매였다. 그들은 타인의 몸이 자신의 몸에 포개져도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우도록 공간을 만들다. 그래서 ‘정어리’처럼 실렸다. 서로 입 한 번 떼지 않고 만들어낸 협동의 공간, 그 공간에 승무원들의 감동을 얻어낸 것이다.

화물창 안에는 오직 무릎을 굽혀 앉을 수 있는 공간만 있었다. 그곳에는 난방시설도, 조명, 화장실도 따로 없었다. 적군의 무기보다 매섭다는 추운 날씨였지만, 화물창안의 냄새는 구역질을 일으켰다. 배 전체가 악취로 진동했다. 한편 갑판 위의 사람들도 매서운 날씨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래도 피난민들은 한명이라도 더 태우기 위해 자신의 공간을 좁혔다. 그들은 서로 포개진 채 극도의 공포와 배고픔, 추위를 견디며 사흘간 항해했다.

메러디스호는 철수작전 마지막 날인 12월 23일 오후에 흥남 항을 떠났다. 철수가 끝나자 제10공병대대와 해군 수중 폭파팀은 모든 자재와 장비를 파괴했다. 해변에 있던 유엔군과 피난민들이 떠나자 해변도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부산까지는 724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위험은 곳곳에 있었다. 선내에는 항공유가 실려 있어 작은 불씨 하나로도 불바다가 될 수 있었다. 연근해 10km 안쪽으로는 북한의 기뢰가 촘촘히 설치돼 있고, 북한 잠수정도 염려되던 상황이었다. 일단 항구를 떠나면 보안 때문에 그들은 서로 무전교신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성공할 것이다. 메러디스의 기적은 피난민들 사이의 암묵적 배려 위에 그 기초를 닦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이 죽음의 상황에서도 품격을 잃지 않았다.” 메러디스호는 이미 미래도 싣고 있었다. 배에서는 2박 3일의 항해 동안 아이가 다섯 명이나 태어났다. 나이든 한국여인들이 산파로서 아기의 분만을 도와주었다, 승무원들은 분만한 이후 사람들의 얼굴에서 미소만을 보았지 기쁨의 탄성은 듣지 못했다.


조용한 순종, 포상되지 않은 영웅들

모험적인 항해를 거쳐 배가 부산항에 들어섰다. 부산에서 밥과 물을 겨우 한번 제공받았다. 배식에만 7시간 반이 걸렸다. 그러나 부산에는 이미 백만 명 이상의 피난민이 들어와 있어서 더 이상의 그들을 수용할 공간과 시설이 없었다. 선장은 부산에서 남서쪽으로 80킬로미터 떨어진 거제도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상황에서도 한국인은 조용했다. 드디어 목적지 거제도에 도착했다. 선장이 화물창 문을 열었을 때도 그들은 여전히 조용했다. 선장과 승무원들은 절망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침착함에 감동했다. “저는 어떻게 그들이 3일 동안의 항해에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는지 아직도 모릅니다.”

거제도에 도착했지만 접안이 불가능해서 조그마한 상륙정을 이용해서 한나절 이상이 걸려 지루하게 하선이 지속되었다. 피난민들은 여전히 서로 밀치지도 다투지도 않았다. 기쁨의 탄성도 없었다. 피난민들은 배의 구석구석에서 배의 측면으로 모여들었다. 승무원들은 한국인들의 극기와 용감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들은 그 모습을 마음과 영혼 속에 담아 가지고 갔다. 이 배가 한척의 배로 가장 많은 인명을 구원한 사례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직후, 일등 항해사였던 러니는 “철수 당시의 진정한 영웅은 선원이라기보다 죽음의 극한 공포 속에서 굳건한 용기와 신념을 보여준 피난민이었다.”고 말했다.

배가 출항할 때 라루 선장은 침착하게 지휘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침착하게 따랐다. 메러디스호의 선원들은 처음 피난민들이 승선할 때 그들을 성별에 따라 분리했었다. 그러다가 이렇게 사람이 많은 상황에서는 가족이 서로 영원히 헤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방법을 바꾸었다. 그럼에도 초기 승선했던 이들은 이를 그대로 따랐다. 피난민들은 항상 침묵과 인내의 태도를 유지했다. “한국인들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아요. 하지만 나는 함교에 서서 지금도 내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곤 하는 표정을 그들의 얼굴에서 보았습니다. 우리의 승객들은 기쁘게 손을 흔들며 깊은 감사의 눈길을 우리에게 보냈지요.”라고 선장은 썼다. 피난민들은 그렇게 감사하고 떠났다. 그리고 그 감사는 대를 이어 꽃을 피운다.

강술호의 가족도 이 배에 타고 있었다. 그의 부인 이금순(29세)은 8살 된 강순화, 6살배기 강순일, 그리고 그해 4월 2일에 태어난 갓난이 강순건을 데리고 고향 함흥을 떠났다. 그의 남편 강술호는 대전이 고향인데 함흥에 있는 은행에 취직하여 그곳에서 가정을 이루었다. 공산정권이 선 뒤에도 얼마간 더 근무했다. 그러나 신자인 그는 늘 감시의 대상이었다. 강술호는 전쟁 중 처형의 위기에 처하자 산으로 도망가 3~4개월 동안 숨어 지냈다. 강술호는 국군이 들어오자 산에서 나와 연합군 쪽의 일을 도왔다. 군대가 후퇴하게 되자 그는 부인에게 산으로 가지 말고 부두로 나가라고 말하고, 자신은 은행업무로 군인들과 함께 남하했다.


왜 베네딕도회 수도원인가?

메러디스호의 승객 중 몇 명은 덕원과 원산의 수도자들이었다. 흥남철수가 있을 때까지 베네딕도회가 그 지역교회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후 인민정권 아래에서 1949년 폐쇄될 때까지도 그들은 선교했다. 그들은 암울한 세월 5년을 이곳에서 견뎌 주었다. 그래서 1950년 10월 14일, 선발대와 함께 상륙한 군종신부의 도움으로 성당, 병원 등을 재빨리 재개할 수 있었다. 새로운 위로였다. 그러나 두 달 만에 국군과 연합군의 후퇴가 시작되었다. 수도자들과 이 일대 신자들도 피난민이 되어 흥남부두에 모이게 되었다.

강술호의 할아버지는 충청도 옥천공소를 열은 구교우 집안이다. 아들 강순건은 월남한 지 8개월 후 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그들이 거제도성당에 의지해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찾을 수 있었다. 강순건은 동성중학교, 성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왜관수도원에 입회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아는 덕원시절 당시의 수사들을 만났다. 그것은 베네딕도회가 1945년부터 5년간 견딘 것이 역사 속에 씨앗을 형성한 결과이다. 그리고 메러디스호의 또 다른 열매였다.

선장이었던 마리노 수사는 흥남철수가 수도원에 들어가는 계기가 되었다고 단언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하느님께서 제가 수도생활을 하기를 원하셨다.”고 답했다. 그는 1956년 12월 25일 첫 서원을 했고 3년 뒤 12월 25일 종신서원을 했다. 일반적으로 성탄절에는 서원식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리노 수사는 피난민들을 안전하게 상륙시킨 그 기적의 날을 택해서 수도서원을 발했다. 그가 속했던 뉴튼 세인트 폴 수도원에는 한때 80여 명에 이르는 수도자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지원자가 줄어 폐쇄 위기에 놓였다. 2001년 왜관수도원은 이곳에 수도자를 보내기로 했다.

이 같은 결정이 난 지 이틀 후 마리노 수사가 선종했다. 현재는 10명의 한국인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나가 있다. 또한 미국에서 이 수도원에 지원한 한국인이 마리노라는 이름을 받고 현재 왜관수도원에 와 있다. 물론 뉴튼 수도원은 덕원수사들에게 이미 낯선 곳은 아니었다. 북한에서 독일인 성직자 수도자들이 옥사덕으로 끌려갔을 때 한국인 수도자들은 뉴튼 수도원 아빠스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덕원수도원에 있던 디모테오 비털리 신부(몬시뇰)가 있었다. 그는 1952년 한국 성베네딕도회 장상으로 임명되어 왜관수도원 초대 장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메러디스호가 쓴 역사, 쓸 역사를 기적이라고 한다. 그것은 수없는 인간을 감동시키는 각 순간에 베풀어진 최선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순간을 허락하셨다. 이를 엮어 보는 사람이 기적을 읽는다. 그리고 하느님이 키를 잡으신 배를 타게 된다.(도움: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현익현 신부, 강순건 신부, 아론 신부, 마리노 수사)

[월간빛, 2015년 4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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