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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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ㅣ심리ㅣ상담

[피정] (2) 창조주 하느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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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9 ㅣ No.32

제2강의 : 창조주 하느님 1(5월 8일 오후)

 

 

오늘 오후 강의는 성 이냐시오의 수쉬뻬(Suscipe) 기도문을 바치면서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도 마음으로 함께 바치도록 해 주십시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주여 나를 받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력과 지력과 모든 의지와

내게 있는 것과

내가 소유한 그 모든 것을 받아주소서.

당신이 내게 이 모든 것을 주셨나이다.

주여 그 모든 것을 당신께 도로 드리나이다.

모든 것이 다 당신의 것이오니

온전히 당신 의향대로 그것들을 처리하소서.

내게는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주소서.

이것이 내게 족하나이다. 아멘.

 

오늘 오전 강의에서 "듣는 것"에 대해서 말을 했는데, 한자(漢子)에는 이 "듣는 것"을 뜻하는 단어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문(聞)과 청(聽)이라는 단어가 바로 그것입니다. 앞의 단어는 그냥 듣는 것, 백문이불여일견(百聞以不如一見)이라고 할 때 나오는 것으로 그냥 소리를 듣는 것을 뜻합니다. 다음 단어는 우리가 경청한다고 할 때 쓰는 것인데, 이것은 귀를 기울이고 듣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청(聽)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거기 마침 마음 심(心)이 있네요. 거기에 또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면 십자가(十)도 있으니까, 십자가를 통해서 살아가면 마음으로 듣을 수 있게 되는 것이고, 한문을 만들 때 그것을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우리 나름대로 해석을 하면 또 14(十四)가 있으니까 14처를 따라가는 자세를 가질 때 잘 들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이렇게 해석해 본 것은 우리가 이 피정 중에 정말 하느님께, 그리고 하느님 말씀에 경청하는 그런 자세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즉 기도 중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자세로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마주 앉았다면 우리와 마주 앉으신 그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이 말씀은 아주 기본적인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과 우리, 하느님과 나와의 가장 근본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물론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이 표현은 여러분이 잘 아시듯이 요한 1서 4장 8절과 16절에 나오는데,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생각해 보면 신구약 전체가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는 내용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사랑이신 하느님은 나를 그리고 우리를 지극한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냈셨다는 요한 3장 16절의 말씀이 있습니다만, 한마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는 십자가에서, 우리가 바라보는 십자가에서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은 이렇게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의 가장 근본입니다. 또한 그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때문에 성경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느님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며 얼마나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셨는지, 그리고 얼마나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는지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느님께서 얼마나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지으셨는지 성경을 따라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3장에 이르는 대목에서는 천지창조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창조 자체가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늘과 땅, 해와 달, 하늘의 별들, 땅위의 모든 생물, 이른바 아름다운 자연, 들의 꽃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크고 가장 뚜렷하게 드러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적어도 우리 믿음의 눈으로 볼 때 그렇습니다.

 

많은 분들이 경험을 하셨을 테지만 우리 북한산도 아름답고, 우리 주변도 아름답고, 여기 지금 우리가 와 있는 이 자리도 아름답고, 또 설악산 같은 곳도 아름답습니다. 제가 언젠가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간 본 적이 있습니다만, 꽃이 환히 피었을 때 거기서 내려다보는 설악산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제가 언젠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어떤 교포가 옐로우스톤(Yellowstone) 국립공원을 3일간 열심히 안내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제가 맨 마지막에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만 "역시 설악산이야!"라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말 때문에 어떤 자매님 한 분이 큰 상처를 입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어떤 기회가 되어 두 달이나 세 달 후에 그분과 수녀님들을 군종 교구에서 초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미국에서 그분들에게 신세를 졌기 때문에 제가 가서 설악산을 보여드리겠다고 해서 설악산 권금성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권금성에 올라가서 한참 둘러보더니 제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제가 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를 이 분이 그 때 제가 한 말 때문에 참으로 섭섭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말을 마음에 담고 있다가 설악산을 보니까 내 말이 일리가 있다 뭐 이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설악산을 보면서도 우리 마음이 하느님의 사랑에 이끌려 있다면, "크시도다 주 하느님"하면서 찬미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또 언젠가 겨울에 '말씀의 집'을 가게 되어 산을 한바퀴 도는데 눈이 많이 내려서 온 산을 하얗게 덮고 있었기 때문에 경치가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저 앞에 누가 갔는지, 내 생각에는 그 때 피정하러 왔던 수녀님이 아니었던가 싶은데, 눈 위에 "크시도다 주 하느님"이라는 성가 구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자신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보면 성 이냐시오께서는 당시 살고 계시던 로마 본부의 옥상에서 밤에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다가 그 별을 통해서 느낀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아름다우심에 너무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또 어떤 때는 뜰을 산책하다가 정원에 피어 있는 꽃들이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을 느꼈는데, 그 느낌이 당신에게 너무 강해서 꽃들을 꾸짖듯이 지팡이를 들어 땅을 툭툭 치면서 "너 말하지 않아도 나도 안다. 잠잠해라"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하여튼 이처럼 자연의 아름다움도 하느님의 현존과 그 사랑을 말해 줍니다.

 

하느님은 분명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에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그 창조의 능력은 결국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의 능력을 능력으로 곧 힘으로만 생각을 하지만, 하느님의 창조의 능력은 곧 사랑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친히 만드신 것을 보시고 "참 좋았다"고 하시는 말씀이 거듭 나오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고, 그 빛이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았다고 성경은 창세기 1장 4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창공을 만드시고 땅과 바다를 만드시고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그리고 온갖 식물과 과일 나무를 돋아나게 하신 후에도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이렇게 낮과 밤, 태양과 달과 별들을 만드신 후에도, 바다의 물고기와 땅 위의 짐승, 하늘을 나는 새들을 만드신 후에도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고 적혀 있습니다. 정말 진선미 자체이신 하느님, 그런 하느님께서 당신이 손수 만드시고도 당신이 보시니 좋았다 하시니 그 얼마나 아름다웠겠습니까? 또 하느님게서 이것들을 창조하실 때 얼마나 정성을 다 기울이셨고 당신의 사랑을 쏟으셨으면 "보시니 참 좋았다"고 하셨겠습니까?

 

마지막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리하여 하늘을 나는 새, 바다의 물고기, 땅위의 모든 동물을 다스리게 하자'고 하시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그리고는 또 다시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창세기 1장 1절부터 2장 4절까지의 창조 이야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라는 표현이 일곱 번 되풀이됩니다. 그것은 사랑이시며 선하신 하느님께서 그 사랑과 선하심에서 만드신 것이 얼마나 좋고 아름다운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술가들이나 조각가들도 자기 작품들이 자신이 구상하고 꿈꾸던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을 때는 자기 자신도 그 작품을 보면서 감탄하고 사랑합니다. 제가 바오로 피정의 집에 가끔 가는데, 어느 날 그 곳에 최종태 교수가 오셨습니다. 바오로 피정의 집에 가 보시면 잘 아시겠지만 최종태 교수의 작품이 여러 점 있습니다. 제가 갔을 때도 그분이 오셨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만든 작품을 보고 싶어서 방문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최 교수가 정말 사랑을 가지고 자기 정성을 다해서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로마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베드로 대성전에 있는 피에타 상도 역시 미켈란젤로의 것입니다. 그것 말고도 아주 걸작으로 알려진 것으로 모세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세상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미켈란젤로가 모세상을 다 만들어 놓고 그 작품이 너무나 살아 있는 것 같은 그런 감동을 주니까, 미켈란젤로 자신이 거기에 도취되어 가지고, 모세상을 딱 치면서 "모세야 말해라"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그만큼 작가는 자기 작품에 사랑과 열정을 쏟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나서 그 작품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불완전한 인간도 자신이 만든 작품의 아름다움에 도취되는데, 하물며 진선미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우주 만물의 창조를 위해 얼마나 정성을 쏟았고, 또 그 작품에 도취되셨겠습니까? 그것은 미켈란젤로가 자신이 만든 작품에 도취된 것과 비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보시기에 참으로 좋았다고 하셨다는 것은 가장 좋은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더구나 당신 모상을 따라 지으시고 우주 만물의 지배자로 세우신 인간을 보시고, 그 인간이 하느님 눈에 얼마나 사랑스럽게 보였으면 "보시니 좋았다"고 하셨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남녀로 만들어 놓으시고, 자신의 모습과 닮은 것을 보시고 너무나 사랑스러워 그 기쁨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라고 우린 인간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주 만물이 다 나름대로 하느님의 모습을 어느 정도는 반영하고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인간이 가장 하느님의 모습대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인간만이 생각할 줄 알고, 자기 의식을 할 줄 알고, 그리고 인간만이 자기 의지로서 사랑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우주 만물이 아무리 광대하고 크다 할지라도 우주는 자기 의식을 가질 수가 없고, 또한 사랑할 수도 없으며 하느님을 찬미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 인간만이 그 우주도 관조할 줄 알고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을 찬미할 줄도 알고 또 자기 의지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창세기에서는 하느님께서 6일 동안에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다 아는 6일로 곧이곧대로 해석하는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른바 우주 기원설에서는 빅뱅(Big-Bang)이라는 것이 맨 먼저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주가 대폭발을 한 다음 그것이 우주의 진화, 생성, 발전을 거치면서 은하계가 생겼고, 다시 태양계, 즉 지구가 생기고 해와 달, 이런 것들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 기간이 약 150억 년 정도 걸렸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200억 년 걸렸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참 재미나는 것은 현재까지는 우주에 수없이 많은 별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들이 있고, 현재 우리가 지금 보는 은하계만 해도 천억이 넘는 별들이 있는데, 그러나 하여튼 현재까지 우리가 아는 바로는 지구만이 비록 조그마한 별이지만 육지와 바다가 갈라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빅뱅이라는 우주 대폭발이 있었고, 수많은 별들이 생기고 은하계가 생기고, 이렇게 생성 발전해 오면서 그 목적은 어디에 있었느냐 하면, 그것은 어떤 의미로 이 조그마한 지구를 만들어 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거기서 생물이 나오고, 의식할 줄 아는 인간을 내기 위해서 수많은 별들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이처럼 하느님 창조의 손길을 인정하는 한, 150억 년 동안 우주의 생성, 발전, 진화를 통해 변화된 우주론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은, 이렇게 진화, 발전하는 그 목적은 어디에 있었느냐? 떼이야르 드 샤르댕(Theillard de Chardin) 신부님이 그런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우주 만물은 인간을 위해서, 자기 의식을 할 줄 아는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 말은 결국 '하느님의 창조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오늘도 신비에 싸여 있다고 볼 수 있고, 어디가 끝인지도 모르는 그 우주의 모든 것을 무엇 때문에 창조하셨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창조의 목적은 바로 '우리 인간을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주 아름답고 굉장히 환경이 좋은 자리에 어떤 돈 많은 부자가 궁궐 같은 집을 지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탄복을 하면서 '왜 저런 집을 지었는가?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이런 훌륭한 집을 지었는가?'하고 물을 때, 그 아버지의 대답이 '내 아들을 위해서'라고 말한다면 '아버지가 돈도 있지만 얼마나 아들을 사랑하면 그런 좋은 집을 지었겠는가?'하는 상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여기에 비교될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은 이 우주 만물, 우리가 바라보는 저 아름다운 하늘의 별들, 은하수, 또 이 자연의 아름다움 그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지으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신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의 작은 형제회, 예수의 작은 자매회 여러분 아시죠? 그 회의 정신적인 창립자라고 할 수 있는 샤를르 드 푸꼬(Charles de Foucauld)는 오랫동안 방황하셨던 분이셨는데,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극적으로 회개하신 분이십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파리에 성아오스딩 성당이 있는데 그 성당에서 고해 성사를 볼 때 샤를르 드 푸꼬는 개종의, 회개의 은혜를 입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푸꼬가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던 그 순간,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살아야 하는 수도 성소를 깨달았다." 제가 그 말을 처음 읽었을 때 아주 강하게 제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과연 푸꼬에게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깨달음이 얼마나 강하게 느껴졌기에, 하느님 계시다는 그 사실이 얼마나 그의 가슴에 강하게 울렸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수도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결심을 했겠는가?' 그가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다'고 말하는 것 그 자체는, 우리가 하느님께서 계시다고 말한다든지, 무신론자에 대해서 유신론자가 하느님이 계시다고 말하는 그것보다도 훨씬 더 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살아 계신 하느님, 나를 지으신 하느님, 나를 이렇게 있게 하신 하느님, 나를 지금도 살게 하시는 하느님,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는 하느님, 그 하느님을 푸꼬는 마음 깊이 느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때문에 나도 그 하느님께 나의 모든 것을 드려야겠다. 나는 그 하느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다. 물론 투옥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깨달은 그 순간에 푸꼬는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살아야 하는 수도 성소를 깨달았다고 고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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